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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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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관련된 위안부 문제
일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한국정부의 위안부 양공주


1. 개요2. 후방전사3. 증언4. 논란5. 일본군 위안부와의 유사점6. 미군 위안부7. 관련 링크

1. 개요

표면화한 이유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이라고 단안하면 별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내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 특수 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사감실 "후방전사 인사편", 1956년, 148쪽

6.25 전쟁 동안 한국군에서 운영되었던 위안부로 양민학살과 더불어 대한민국 국군의 전쟁범죄 중 하나다. 자국민에게 위안부 역할을 하게 한 대한민국 국군의 범죄이다. 1960년대 동아일보에서 몇 차례 언급했으나 기피되고 외면되어 오랫동안 수면 아래에 묻혀 있다가 2002년 한성대학교 김귀옥 교수와 한국 정신대 연구소의 강정숙 연구위원들의 논문과 기고로 인해 세상에 드러났다. 다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정부나 국방부의 뚜렷한 반응은 없고 사회적으로도 쟁점이 되지 못하였다.

이들 위안부는 단순히 군역 성매매 여성, 혹은 성적인 착취를 당한 여성에 대한 후대의 지칭이 아니라 1950년대 당시에 '특수 위안대' '위안부'라는 호칭으로 불리었고, 이는 후에 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 여성들에게 또한 사용되었다. 이는 명백히 태평양 전쟁시절 일본군이 운용한 위안부를 모방한 것이다. 하술하다시피 국군 초기 간부들은 거의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이었던 것도 한 몫한다.

2. 후방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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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공식기록 후방전사 인사편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폭탄. 후방전사를 발굴한 김귀옥 교수에 따르면 처음엔 속초에서 월남민 김씨를 대상으로 인터뷰 하던 중 전례 없던 새로운 이야기를 청취할 수 있었다. 김씨는 1950년 유엔군에 체포된 민간인으로, 민간인이지만 인민군으로 분류되었다. 안북도 개천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될 때까지 미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밥과 빨래를 했는데 이 월남민이 부대에는 위안대 여자들이 있었다는 증언을 했다. 이북 말씨를 안 쓴 건 분명하다며 이남 사람 같다고 했다. 이북에서 끌고 온 여자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즉 미군대한민국 국군이 50년 10월 휴전선을 돌파할 때 이미 여자들을 끌고 갔음을 증언에서 알 수 있었다. 후 5년간 김 교수는 인터뷰 등을 통해 '직접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있다', '군에 납치돼 위안부가 됐다'는 등 남녀 8명의 증언을 청취했다.
이후 그러한 노력 끝에 한국군이 1956년 공식적으로 편찬한 '후방전사'를 발굴해 내었으며, 여기에는 보다 자세하고 충격적인 내용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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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실적 통계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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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이 책에 실린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는 1952년도에 서울특별시, 강릉시 등 4개 소대로 편성된 위안대 89명이 연간 20만4,560명의 병력을 ‘위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안부 1명이 하루 평균 6∼7명의 장병을 위안한 것이다.
군은 정식 위안소를 설치해 위안부를 붙박이로 두고 운영했으며, 필요시에 로테이션으로 전방에서 준후방으로 재배치된 부대가 위안부를 요청하면 위안부 여성들을 거기로 보냈다.
여기서 위안부 여성들은 제 5종 보급품으로 분류되었다.[1] 제 3의 형태도 있는데, 일부 장군들의 회고에 따르면 사단이나 연대 단위에서 사창의 여자들을 데려와 위안부로 이용하고 사단 휼병부나 연대 인사처에서 돈을 지급하는 비정규적인 임시 위안소 또한 운영했다고 한다. 다만 이 때문에 김 교수는 비정규적인 형태로 운영한 위안부가 정규적으로 운용한 위안부보다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며, 이들에 대한 정확한 추산은 힘든 상황이다.

증언록에 따르면, 이렇게 공식적인 공창운용은 숫자라도 남아 있지만 인민군이든 한국군이든 수많은 여성들이 자발적이든 강제적으로든 해당 군에 종속되어 위안부가 되었음을 수없이 증언하고 있다. 인민군에 의해 강제적 혹은 반강제적으로 종속된 여성들도 있으며 한국군 또한 좌익 혐의자를 위안부로 만들어 성 보복 차원에서 활용했다는 증언까지 있다. *

해방전사에는 휴전에 따라 이러한 시설의 설치 목적이 해소됨에 이르러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하여 단기 4287년(1954) 3월 이를 일제히 폐쇄하였다고 적혀있다.

3. 증언

(1952년) 3월 중순의 기후는 봄을 시샘할 듯 쌀쌀했다.(……) 잔적을 완전히 소탕한 후 예비대가 되어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있을 때 사단 휼병부(恤兵部)로부터 장병을 위문하러 여자 위안대가 부대 숙영지 부근에 도착하였다는 통보가 있었다.중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전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침실에 수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중대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했다고 하였다.
- 차규헌 예비역 육군 대장, 회고록 <전투>(1985년)
(중부전선) 수도고지 전투도 잊혀지고 도망병 발생도 진정되어 갔다. 이제 FTX(야전훈련)에 본격 돌입하기 위해 소화기 및 장비 점검, 보급품 정비 등이 한창 진행되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연대1과에서 중대별 제5종 보급품(군 보급품은 1∼4종밖에 없었음) 수령지시가 있어 가 보았더니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백주에 많은 사람이 오가는 가운데 줄을 서서 분대천막을 이용하는 것이라든가 또 도덕적으로나 양심상 어정쩡하기도 해서 썩 내키지가 않았다. 먼저 소대에 2명이 할당되고 그중 1명이 먼저 소대장 천막으로 배정되어 왔다. 나는 출신환경 등 몇 마디 대화만 나누고 별로 도와줄 방법이 없어 그 동안 모아 놓았던 건빵 한 보따리를 싸서 선임하사관에게 인계하였다.
- 김희오 예비역 소장 자서전 <인간의 향기>(2000년)
어느 날 오후에 중대장이 소대장들을 소집하여 도장이 찍힌 표 한 장씩을 주면서 오늘 저녁에 즐기러 가자는 것이었다. 나이가 나보다 몇 살씩 더 많은 소대장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쪽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고 나만 몰랐던 것 같다.
저녁에 중대장을 따라서 1.5km 떨어져 있는 연대본부 지역에 도착해 보니 25인용 천막 네 개가 나란히 처져 있었느데 세 개의 천막에는 사병들이 줄을 서 있고 한 개의 천막에는 장교들이 줄을 서 있었다.
사병들은 안을 기웃 거리며 안에다 대고 '빨리 나와! 빨리 나와!'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 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수 있었다. 천막에 들어가서 여자에게 표를 주고 10여 분 간 즐기고 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그 순간 나는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도저히 천막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남들이 눈치 채지 않게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남들 보다 특별히 순진해서라기 보다는 그 동안 받아온 기독교 교육 때문이었으리라.

당시 하급 장교였던 나로서는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운용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까지도 이 문제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위안부가 전쟁을 하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의 방책으로 운용되었지만 일본 군대의 잔재인 것만은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군은 식민지의 여성을 강제로 동원했고 한국군은 아마도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매춘부와 상업적 관계를 맺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될뿐이다.
비록 전시이고 강제성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세계의 많은 전쟁사를 통해 볼 때 인간이 극한 상황에 처해진 전쟁 속에서 인간의 본능인 성의 억제는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그 문제로 야기되는 영향은 전쟁을 치르는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에게도 지대하여 이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왔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들의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 한인수 예비역 준장 著, '격량의 세월과 인샬라'(96~96쪽), 윤용남합참의장 著, '우리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다'(210~211쪽)
문아무개(69) 씨는 1951년 5월경 원산 앞 바다에 있는 섬에서 다른 여맹원 3명과 함께 모여 있다가 당시 원산 앞 바다의 여도에서 첩보공작활동을 하던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당했다가 그중 한 명(이아무개 부사관)에게 겁탈 당한 후에 강제로 '위안부'가 된 케이스였다. 문 씨는 결국 1953년 7월 정전이 될 때까지 여도에서 이 부사관의 아이를 낳고 같이 살았다. 함께 납치된 다른 여성들도 낮에는 군인들의 밥과 빨래를 하고 밤에는 '위안부'가 되어야 했다.
이런 일은 인근 양도에서도 있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문씨를 납치한 북파공작원 최아무개 씨는 "부대 내에 위안부를 데리고 있는 것은 잘못이지만, '우리'가 '일본군'과는 다르지 않느냐, 우리와는 정이 통하지 않느냐며 납치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설명을 흐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본대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취사생활을 해야 했던 북파공작원 부대원들이 '위안부'를 고용한 케이스. 김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들의 정체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북파공작원 1은 군 위안부들은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성들이었다고 일축했다. 북파공작원 2도 이에 동의했다. 그런데 북파공작원 1이나 2가 있던 원산 앞 섬에 위안부로 온 여성은 '그 섬에 와 군인들 밥하고 빨래해주면 한 밑천 장만할 수 있다'는 얘기에 속아왔다고 공작원 2는 엇갈리는 증언을 했다. 전쟁 미망인으로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일종의 '군 노무자'가 된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군 위안부가 된 것은 거절할 수 없는 강제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더욱이 납치된 여성들에게 선택권이나 거절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6.25 전쟁 기간에 한국군과 미군이 체포한 인민군 간호원들. 당시 체포된 북한 여성의 일부는 강간당하거나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6.25 전쟁 직전에 당시 38선 이남인 옹진반도를 방문해 여학생들의 영접을 받은 유엔 현장시찰단. 1950년 10월∼12월 북한 지역을 점령한 미군과 한국군의 일부 장교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일부 여학생들을 '특수목적'으로 대동 월남한 것으로 드러났다.
1950년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이아무개(73) 씨는 납치 또는 강요에 의해 군 위안부가 될 뻔했던 또 다른 여성의 사례이다. 6·25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인민군에게 협력한 것 때문에 국군에게 체포된 이 씨는 다른 여자 의대생 3명과 함께 인계된 부대의 장교 4명에게 '배정'되었다. 이 씨는 다행히 자신을 불쌍히 여긴 한 장교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나 다른 3명은 그때 이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 김귀옥 교수 증언록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예비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안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우리 5연대에서는 '위안부대'를 이용하는 데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위안부대 출입은 티킷제로 운용토록 하였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티킷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눠준다. 물론 훈장을 받았다면 당연히 우선권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다.

5연대는 무조건 계급에 관계없이 훈장을 많이 탄 사람부터 순서대로 위안부를 상대할 수 있다.

내가 이런 규칙을 만들자 부대 내에선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졌다.

'이제 너희는 모두 내 동생이다. 알았나?'
'잠시만 기다려라. 곧 내가 너희들에게 등정기를 발표할테니… 기대하시라.'

모든 입과 귀가 위안부대로 쏠려 있었다. 용감한 박판도 중사도 규정대로 두 장의 티킷을 받게 되었고, 첫 번째로 위안소에 가게 되었다.
난 당시 연대장이었으니 이 얘긴 후일 대대장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런데 박중사는 숫총각이라 위안부 상대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한다. 그리곤 티킷도 다른 전우에게 주려 하는 걸 규칙이라 안된다며, 분대원들이 억지로 떠메곤 위안부대의 천막 속에다 집어넣었다 한다.
모든 분대원들은 천막 안을 들여다보면서 역사적 사태(?)를 지켜보았는데, 아뿔싸 순진한 박판도 총각은 여자가 바지를 벗기려 하자 '싫다'며 도망가질 않나, 억지로 벗기곤 강행하려 하자 결사적으로 피하질 않나, 밖에서 지켜보는 분대원들에게 한바탕 웃음만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좁은 곳이라 결국은 여자한테 붙잡혔는데 상대가 숫총각이란 걸 안 여자가 장난삼아 그의 물건을 만지면서 '애걔, 요만한 걸 가지고 왔어?'하며 놀리자, 끝끝내 그는 총(?) 한방 못 쏴보고 얼굴만 빨개가지곤 도망쳐 나왔다는 거였다.

분대원들은 자신의 분대장에게 치욕의 여름(夏)을 남기지 않으려, 그 날 밤 철저한 강의와 사례를 들려주어 결국 박판도 중사를 설득시켰다. 다음날 재시도 끝에 박판도 중사는 결국 성공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다. 한번 위안부대를 다녀온 박중사가 완전히 맛을 들인 것이다.

'저…, 소대장님. 저…, 티킷 한 장 더 얻을 수 없나요?'
이 지경까지 되어 내게 보고가 올라오니 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 그놈 참. 그래 대대장이 알아서 두어 장 더 집어줘…. 하하하….'
그때부터 난 왠지 마음에 걸렸다. 순진한 녀석이 전투만 알다가 어느날 갑자기 인생의 어떤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다면…

당시는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많은 젊은 여자들이 생계를 위해 미군 부대에서 몸을 팔고 전선 근처에까지 밀려드는 시절이었다. 당연히 사창에는 성병이 만연했고 사창을 방치할 경우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도 우려되었다. 따라서 군에서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전투력 손실 예방을 위해서 위안대를 편성해 군의관의 성병검진을 거쳐 장병들이 이용케 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창녀들을 군의 위안대에 흡수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필요악으로서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된 많은 사창가 여자들의 인권을 보호한 측면도 있다.
- 사선을 넘고넘어(1994)(267~269쪽), 채명신 예비역 중장.

당시 연대장이었던 채장군은 이러한 군 위안부 제도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군부의 치부이며 부끄러운 일이라 언급하면서도 상기와 같이 어쩔수 없었던 부분도 있었다며 불가피성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군 위안부 제도를 기획한 군 수뇌부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으며 또 채 장군은 위안대의 규모에 대해서도 '명칭 상으로는 부대(특수위안대)이지만 부대 편제표에 의해 편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안부나 사창의 사정(수요공급)에 따라 위안대 규모가 그때그때 달라 정확한 인원을 산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관련 기사

4. 논란

2002년에 이 내용이 공개된 이후에 작은 파란이 일었지만, 월남전 전쟁범죄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으로 이 사안이 다뤄지지는 않았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타국의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 요구를 70년 넘게 이어오는 한국이 자국의 전쟁범죄에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중이다. 물론 이런 주장 역시도 잘못된 논리에서 나온 주장이다.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는 또 다른 사안이다. 진짜 해결책은 일본도 사죄하고 한국 정부도 자국군의 위안부 사실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다.

이렇듯 한국이 이중잣대 논란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이 문제를 똑바로 매듭지어야 하지만 2002년 이후 십수 년간 이 문제는 제대로 조명되지도 않는 상황. 당장 비록 잡음이 있었다 하나 한일기본조약 및 아시아여성기금 등으로 수 차례의 배상이 이루어지고 정부간의 불가역적 합의까지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와는 달리 이 문제는 제대로 아는 사람조차 드문 상황이다. 피해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이 사항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김귀옥 교수에 따르면 관련 피해자들이 증언을 극도로 꺼린다고 한다. 또한 그의 연구활동에 대해 국방부에서 항의를 하는 둥 정부가 대단히 불편해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

5. 일본군 위안부와의 유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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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표에 해당하지 않는 사례들, 예컨대 강제동원된 사람[2] 역시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를 벤치마킹한 이상 상당한 유사점을 보인다. 군표제로 운용된 일본군 위안부처럼 한국군 위안부 또한 티켓제로 운용되었으며 위의 언급된 김희오 장군도 회고록에서 '처음 위안대를 목격한 순간에 직감적으로 "이는 과거 일본군 내 종군 경험이 있는 일부 간부들[3]이 부하 사기앙양을 위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구나'라고 직감하기도 하였다. 김희오 장군은 회고록에서 이러한 사실들을 대단히 찜찜해하였다.

6. 미군 위안부

한국정부의 합의 아래에 역시나 '위안부'로 불렸던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문제도 여전히 산재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양공주 문서를 참조.

7. 관련 링크



[1] 당시 한국군은 보급품을 4종까지로 규정하고 있었다. 현재는 10종까지 규정되어 있다.[2] 참고 "한 피해자는 북쪽에서 여맹(북조선민주여성동맹)에 소속되었던 사람이었다. 인민군에 부역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것은 곧 잠재적인 적이거나 적이 될 가능성이 있거나 또는 적의 가족을 위안부로 끌고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3] 국군의 초기 간부들은 해군을 제외하면 거의 만주군, 일본군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