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5:35:12

이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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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군인 경력2.2. 외교관 경력2.3. 북한의 전향시도와 석방2.4. 이후
3. 기타

1. 개요

“한 평생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임을 자랑으로 여기며 감사했고, 충심(忠心)으로 국가에 헌신(獻身)하며 죽음 앞에 비겁하지 않았으며, 부정을 멀리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언제나 곧고 바른길을 걸었던 정의(正義)로운 군인(軍人), 부디 천국(天國)에서 영생(永生)하시길 바랍니다.”
대전 국립현충원 장군 2묘역 묘비번호 444번 이대용 장군의 묘비명.[1]

1925년 11월 20일 ~ 2017년 11월 14일 (향년 91세)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1925년 11월 20일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 우봉리에서 태어났다. 1944년 해방을 1년 앞두고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우신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1947년 고향인 금천군 인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총살 직전에 간신히 탈출했다. 당시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김구이승만의 민족반역 규탄교육을 할 때, "김구나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열렬히 전개한 바도 없지는 않다." 하는 사족을 붙이고 교실 게시판에 민족반역자 타도의 그림을 붙이지 않고 학생들이 그린 그림으로 바꿔 붙인 것이 문제가 되어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대용 장군은 평생 군인의 삶을 살았다. 그는 6.25전쟁시 110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는 진기록을 남겼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현역 준장 신분으로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 경제공사로 파견되었다. 공산세력에게 베트남이 패망하자, 그는 교민들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그는 몇 번이고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교민들의 안전을 위해 이를 포기했다. 그는 베트남 공산당국에 억류되어 5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가 살신성인과 희생정신의 표본으로 알려진 이유다. 그는 부정을 멀리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바른 길을 걷고자 했던 정의로운 군인이었다.

2. 생애


1984년 4월 30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2.1. 군인 경력

1948년 육군사관학교 7기로 임관했다.

6.25 전쟁 당시 육군 제6보병사단 7연대 1중대장으로 춘천-홍천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으며, 이후 제2보병사단 32연대 1대대장으로 6.25전쟁 기간 중 총 110회 전투에 참전했다. 6.25전쟁시 이대용 장군이 참전한 주요 전투의 세부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50년 6월 25일 6사단 7연대 1대대 1중대장으로서 춘천북방에서 정면으로 공격해 오는 적을 격퇴시키고, 서쪽 5번 도로 축선을 따라 춘천방향으로 진격하는 적군에 대해서는 기관총 원거리 사격 및 박격포 사격을 가해 적의 전진을 와해시켰다. 6월 26일에는 점령한 진지에서 옥산포를 향해 파쇄공격을 감행, 공격준비 중인 적을 측방에서 공격해 적의 공격 기도를 분쇄하고 적 자주포 2대를 노획했다. 이후 27일 아침 내다리 여울을 건너오던 북한군 병력을 57밀리 대전차 2문과 16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약 1개 중대의 적을 섬멸하여 춘천 조기 점령의 기도를 무산시켰다.

1950년 7월 2일 신림고개 전투시 적 장갑차 1대를 파괴하고 3대를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적의 남하를 저지시켜 철수하는 국군 제8사단 21연대를 엄호해 아군의 지연작전에 기여했다. 7월 5일 음성지구전투시에는 적 1개 중대를 집중 공격해 적 40여명을 사살하는데 기여했으나 교전 중 중상을 입어 제5육군병원에 후송되기도 했다. 8월 24일 전장으로 복귀해 중대장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1950년 8월 30일 화산지구전투에 참전해서 야간 공격에서 화산성 북단고지를 기습 공격해 적 1개 대대를 격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공격으로 인해 적은 공격기세가 꺾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대용 중대의 야간공격은 6.25 전쟁에서 실시된 소총중대 규모 야간 기습공격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1950년 10월 5일 화천전투시 북한군 26여단을 기습공격 해 적 여단을 붕괴시키고 이어서 다음날 북한 지역이었던 화천읍을 점령했다. 이 전투시 이대용은 짙은 안개를 이용해 중대 병력을 이끌고 적군 여단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심장부를 기습 공격해 북한군 26여단장이 점령하고 있던 고지를 탈환했다. 그곳의 병력을 사살하고 일부는 포로로 획득했으며 아군의 성공으로 인접해 있던 적 여단 병력들은 순식간에 와해되어 대부분의 병력들은 화천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후 화천 점령 후 본격적인 북진작전을 전개해서 검불랑, 성천 전투를 거쳐 1950년 10월 22일 청천강에서 김일성의 승용차를 노획하기도 했다. 계속 북진한 이대용 중대는 초산을 방어하던 오백룡의 여단을 격파하고 압록강으로 진격하여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나루터인 신도장에 도착했다.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신도장에 도착, 북진작전을 완료한 이대용 대위는 중공군이 후방을 차단함에 따라 부득이하게 철수했다. 10월 30일 자정 초산군 장풍면에서 중공군 사단 공격을 받아 7연대가 붕괴되고 이대용 대위는 잔여 중대원을 인솔하여 280 ㎞ 철수로에서 단 6번 식사하고 13번 전투하며 적진을 돌파해 아군지역으로 복귀했다. 특히 건제를 유지한 채 군복을 착용하고 철수작전을 수행했다. 이는 붕괴된 7연대에서 최초로 생환한 부대였다. 이후 38선 부근에서 교착전이 이루어질 때 전선 곳곳에서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당시에는 대대 작전과장, 참모 등을 역임했고, 이후 대대장으로서 전투를 지휘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이대용 장군의 군생활은 아래와 같다.
전쟁이 끝나고 이대용 중령은 1955년 육군대학 학생으로 입교했다. 육군대학을 졸업후 교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1958년 미 태평양지구 합동참모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미육군 지휘참모대학을 1960년에 졸업했다. 6.25전쟁에서 중대장과 대대장으로 참전해 수많은 전투경험을 했고, 선진국의 군사교육을 접한 이대용 중령은 군의 큰 재목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당시 부정부패가 만연한 군에서는 진급운동과 상납을 하지 않으면 진급에 선발되지 않았다. 이대용 중령은 대령진급에서 몇 차례 누락되었다. 가까스로 대령을 단 것이 1961년이었다. 이대용 대령은 제23연대장으로 보직되어 연대장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연대장들은 부대의 공금을 유용하고 장병들의 급식을 횡령해 그 돈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 상관들에게 상납을 하는 등 비리가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이대용 대령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장우주 장군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이대용 대령은 연대장 시절 나의 부하였는데, 그는 공금을 1원도 손대지 않는 깨끗함이 있었고, 연대 장병들에게 정량대로 급식하고 잘 훈련시켰다."

연대장을 마치고 베트남주재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약 3년간 무관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변변한 보직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장군진급심사에서 3차례나 낙방했다. 이대용 대령은 1967년 10월 전역지원서 제출했다.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았고, 한국철강주식회사에서 베트남에 사업을 확장하는데, 책임자로 임명하겠다는 권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11월 이대용 대령은 마지막 장군진급심사에서 장군으로 선발되었다. 1968년 1월 장군으로 진급한 이대용은 베트남주재 한국대사관 정무담당공사로 파견되었다. 1972년 정무담당공사를 마치고 귀국한 이대용 장군에게 육군은 보직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2년 9월 제6관구 부사령관으로 보직을 받았다. 관구사령부 부사령관은 그야말로 한직으로 전역을 앞둔 장군들이 가는 자리였다. 이대용 장군도 이제 서서히 군 생활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마무리를 하던 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국방장관 유재흥으로부터 베트남주재 한국대사관 부대사로 임명한다는 구두 메시지를 전달 받았다.

2.2. 외교관 경력

유재흥 국방장관에게 구두로 약속받았던 부대사 자리는 대사관 인원 감축조치로 없어졌다. 이대용 장군은 대사관 경제협조실장에 임명되었는데, 통상적으로 '경제공사'라고 불리는 자리였다. 전역조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1973년 2월 사이공에 부임했다. 여기서 1975년 공산정부에게 억류될 때까지 경제공사로 임무를 수행했다. 1975년 4월 베트남이 패망하면서 한국대사관에서는 '십자성작전'이라고 명명된 교민 철수작전을 실시했다. 이대용 장군은 현역 공사신분으로 교민들의 안전한 철수에 주력했다. 끝까지 남아 교민들이 모두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2.3. 북한의 전향시도와 석방

이대용 공사는 당시 현역 육군 준장이었고 무엇보다 중앙정보부 소속이었다. 즉 이대용 장군은 공사 직함을 달고 베트남으로 파견된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 한국의 핵심 권력기관인 중정 소속 현역 장성이 북한으로 전향한다면, 북한 입장에서 체제 선전용으로 정말 기가 막힌 소재가 될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얻을 만한 정보도 많으리라 여겼다.

공산당국에 억류되어 치화형무소에 갇힌 이후 석방되는 1980년까지 베트남 공산당국으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으며 억류생활을 했다. 몇 번에 걸쳐 북한은 이대용 장군을 북으로 납치하려는 시도도 벌였다. 특히 북한에 있는 장군의 형수를 비롯한 가족을 볼모로 온갖 협박과 회유를 서슴치 않았다. 이후 베트남 공산당국에 체포되어 북한의 집요한 납치시도가 이어지자 이대용 장군은 비밀리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동료들에게 남기기도 했다.

"첫째, 내가 체포되면 이 참사관이 한국인 통제를 하고, 프랑스 모로소 기관과 접촉하여 내가 해온 것과 같은 방법으로 상황보고와 필요한 요청을 우리 외무부장관에게 계속해 주기 바란다. 둘째, 내가 체포된 후 형무소에 있게 되면 계속 항거하면서 지내겠으나,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어 끌려갈 때에는 자결하여 목숨을 끊겠다. 그 경우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대통령 각하께 유언으로 부탁 올리니, 각하께 말씀해 주기 바란다. 그것은 내 자식들이 아직 어리므로 그 애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지급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주십사 하는 것이다. 셋째, 내가 모든 책임을 질 터이니 김대사의 허물을 묻지 말고 그를 정부에서 다시 등용해주기를 건의한다."

북한은 이대용 장군을 북한으로 데려가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중월전쟁이 발발하고 북한이 중국 편을 들자 베트남 정부는 그간 이대용 장군을 북한으로 보내는 것에 긍정적이었던 태도를 반전시켰다. 이에 이런 기회를 살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유대인 출신 사업가인 사울 아이젠버그(Shaul Eisenberg)를 중재자로 내세워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이대용 장군은 1980년 4월 석방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2.4.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끈질긴 노력 끝에 1980년 4월 2일 이대용 장군과 서병호, 안희완 영사 등은 석방되어 한국 땅을 밟았다. 베트남 공산당국에 억류된 지 꼬박 4년 11개월 만이었다. 이대용 장군은 귀국 후 각종 강연활동을 통해 월남패망의 교훈을 전하며 국민들의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했다. 정부의 배려로 1981년 한국보험협회 이사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또한 생명보험협회장, 한·베트남친선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제3대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3. 기타

공교롭게도 이대용을 체포, 심문하였던 베트남의 특별경찰조직인 안녕내정국 요원 즈엉 찐 특은 후일 주한 베트남 대사로 부임하였다. 이대용과 즈엉 찐 특은 서울신라호텔에서 만나 화해를 하였다.

이대용 공사의 억류기를 소재로 '사이공 억류기'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1986년 MBC TV에서 방영되었고, 김무생이 이대용 공사 역을 맡았다.

이대용 장군은 사물에 대한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을 구비한 훌륭한 수필가이자 기록자였다. 그는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참전한 6.25전쟁시 자신이 수행했던 춘천전투와 초산전투에 대한 세부 전투상황도를 메모로 기록해서 남기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에 억류되었을 때도 감시의 눈을 피해 억류생활을 일일 기록으로 남겼다. 국내에 돌아온 뒤 이 기록들을 모아서 책으로 발간했다.

이대용 장군이 남긴 저작물들은 일기 21권을 포함해서 여러 종류의 책과 각종 기고문 및 논문들이다. 『압록강에서 대동강까지』, 『압록강 푸른 물』, 『통곡하는 승리자』, 『사이공 억류기』(1981년), 『국경선에 밤이 오다』(1984년), 『두 번의 혈전』(2014년),『김정일과의 악연 1809일』(2000년),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2010년) 등이 장군이 남긴 저서이다. 이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도 있고, 제목만 전하는 것도 있다. 그밖에도 기고문, 학술논문들을 남겼다.

이 글은 조상현, "이대용 장군 일기와 한국현대사", 인문학술 제9호(2022.11),pp. 85-116 에서 기반하였다.


[1] 육군군사연구소장을 지낸 한설 장군이 묘비명을 썼다. 이대용 장군의 한 평생을 잘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