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01:59:42

마리아 루스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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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를 묘사한 신문삽화
1. 개요2. 사건의 발단3. 사건의 조사4. 재판의 시작5. 정식재판, 그러나...6. 결말7. 미디어

1. 개요

マリア・ルス号事件

1872년 일본 제국 요코하마에서 발생한 노예제도 및 일본의 예창기해방령(芸娼妓解放令)과 관련된 사건.

2. 사건의 발단

1872년 7월 9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항에 페루 선적의 화물선 한 척이 기항했다. 해당 선박의 이름은 마리아 루스 호(María Luz, マリヤ・ルス号)로, 포르투갈령 마카오(Macao)에서 출항하여 목적지인 페루의 수도 리마(Lima) 서부의 항구도시 카야호(Callao)[1]로 향하던 중이었다. 본래 마리아 루스 호는 요코하마에 기항할 예정은 없었으나 항해 중 만난 폭풍에 의해 선체가 파손되어 수리를 위해 입항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배에 탑승해 있던 사람인 쿨리, 즉 중국인 노동자에 의해 문제가 발생했다. 본래 페루의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던 해당 중국인은 기항 다음 날 밤 배를 탈출하여 바로 옆에 정박 중이던 영국 해군 군함으로 도망쳤고 그 배에 타고있던 승조원들에게 알아듣지 못할 중국어로 무언가 급하게 이야기를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계속해서 떠드는 중국인이 귀찮았던 승조원들은 일본 관리를 불러 중국인을 넘겼다. 당시 요코하마 항은 개항된 항구여서 외국 선박과 선원들에게는 당연히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곳이었으므로 일본 관리도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어 탈주한 중국인 노동자를 다시 마리아 루스 호로 넘기려고 하였으나 그 청나라인은 '저 배에서 지독한 학대를 당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231명이나 더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구해 달라고 일본인 관리에게 호소했다.

이에 해당 관리는 마리아 루스 호의 선장 리카르도 헤레라(Ricardo Herrera)를 불러 해당 노동자를 인계하면서 '탈출한 쿨리를 관대하게 취급하고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계약 이상으로 잘 대우해 줄 것'을 권고했지만 선장은 그 권고를 듣기는커녕 탈출했던 쿨리를 심하게 폭행한 뒤에 감금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쿨리들이 탈주하여 영국 군함으로 도망쳐서 '먼저 도망쳤던 쿨리가 짐승 같은 대우를 받으며 폭행당하고 갇혀 있다. 그를 구해 달라'고 호소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승조원들은 자신들의 상관인 영국 대리공사 왓슨에게 연락하고 왓슨은 자신이 직접 영국 해병대원들을 이끌고 마리아 루스 호에 승선하여 조사를 시작하는데 실제로 쿨리들은 사실상 노예 취급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노예제도를 엄격히 금지하는[2] 영국의 관리인 대리공사 왓슨은 극도로 분노했고 자신이 직접 일본국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를 찾아가 무언가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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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의 사진.

하지만 일본은 왓슨의 요구와 달리 빠른 조치를 취하지 못햤는데 왜냐하면 아직 페루와 외교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영내에서의 페루의 이권은 미국이 대리하여 관리 중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던 소에지마는 상부[3]에 이 일을 보고했다.

3. 사건의 조사

그러자 요코하마 항이 위치한 가나가와현의 현령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는 서구 국가들과의 마찰을 걱정하여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말자, 즉 해당 사건을 덮자고 주장했지만 사법경 에토 신페이(江藤新平)[4]는 인도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결국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는 이 사건에 개입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에게 이 사건의 처리를 위임했다.

전권을 위임받은 소에지마는 마리아 루스 호의 출항을 금지시킨 다음 배의 항해일지를 확인하고 간부급 선원들을 접견하며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해당 중국인들은 전원이 문맹이라서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조차 할 수 없기에 때문에 극도로 비인간적인 계약서의 내용을 알지 못한 채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상당수는 허위계약도 아닌 납치되어 끌려온 사람들이었으며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향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상태였다. 즉, 그들은 사실상의 노예였고 마리아 루스 호 선장 리카르도는 노예상인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확인한 외무경 소에지마는 위임받은 전권을 사용하여 이 사건에 대한 외무성 관할의 재판을 열고 자신의 심복 오오에 타쿠(大江卓)를 가나가와 권령(지금의 부현지사에 해당)으로 임명해 해당 사건의 특명재판장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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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명재판장 오오에 타쿠(大江卓)의 사진.

오오에 타쿠(大江卓)는 본래 토사 번[5] 출신의 유신지사로 막부 타도에서 적지않은 공을 세운 인물이지만 메이지 유신체제에서 경찰권력과 내무의 요직을 차지한 사쓰마 번 출신들과 군부를 장악한 조슈 번 출신으로 양분된 유력한 유신지사들에 밀려서 출세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1868년부터 자신의 고향 인근인 고베의 외국사무소에서 사건 처리를 하면서 외교경험을 쌓았고 1871년에는 에타히닌 차별에 관한 법적 차별을 철폐하라는 청원을 내기도 한 인물이라 인권 문제가 걸린 이 사건의 재판을 맡기기에 적격으로 판단되었다.

4. 재판의 시작

조사를 마무리하고 외무성 관할하에 치러지는 약식재판 형태로 열린 심리에서 오오에 타쿠는 이제까지 수집된 증거들로 보아 헤레라 선장이 국제법상 금지된 노예거래라는 불법행위를 저질렀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배에 타고 있던 중국인 232명 전원을 하선시켜 가나가와현청에 수용했으며 서구 열강의 자문을 얻기 위해 일본 주재 서양 영사들에게 해당 사건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영국만이 찬성, 미국은 중립, 다른 모든 서양 대사들의 반응은 반대 일색 이었다.

서양 영사들은 법리상 가장 기본적인 부분, 즉 '사건이 벌어진 요코하마 항은 일본국 법률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이므로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일본국의 관할권이 없다. 또한 애초에 중국인 쿨리들은 일본국 법률이 미치지 않는 일본국 영토 밖인 마카오에서 마리아 루스 호에 탑승하게 된 것인데 그것을 일본이 간섭할 수 있는가' 등을 문제삼았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1867년에 체결된 '요코하마 거류지 단속규칙'에 의거한 것으로, '일본 정부가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외국 회사 및 선장의 상업행위에 대해 지나친 간섭을 한다'는 뜻이었다. 즉, 그들은 인권문제보다 서구 열강 자신들의 이득이 먼저였다는 의미다.

미국은 자신들의 이득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안이라서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다'라며 논평을 거부했는데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고 실제로는 당시 미국에게 있어 노예제도 문제는 굉장한 사회적 이슈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노예제도 찬반 문제에서 비롯된 남북전쟁이 끝난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던 데다 자신들도 흑인 노예의 대체 노동력으로 값싼 쿨리를 수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여기서 페루를 편들게 되면 미국이 노예제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여 다시 내부 분란에 휩싸이게 되고 일본 정부를 편들게 되면 자신들이 일본 내의 이권을 대리하여 관리 중이던 페루 정부의 항의를 받게 될 게 뻔했다. 게다가 페루 입장에서 보자면 멀리 있는 일본과 달리 미국과 페루는 가깝기까지 하여 자칫하면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미국은 논평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중립을 지켰다.

영국은 애초에 1807년 이래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있었던 데다 이 사건의 처음부터 깊숙히 개입하고 있던 나라였으므로 당연히 일본 정부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냈다. 당시 영국은 대서양에서 자국의 군함을 투입하여 자국 국적의 선박은 물론 프랑스나 포르투갈 등 타국의 선박이라도 노예선은 무조건 나포해서 노예들은 하선시키고 선원은 재판에 회부할 정도로 노예 단속에 열을 올리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외국영사들의 반응에 대해 오오에로부터 보고를 받은 외무경 소에지마는 '그딴 거 무시하고 원심을 존중하라'고 주문하고 특명재판장 오오에는 현청사에 보호 중이던 청나라인 전원을 해방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헤레라 선장에게는 '인신매매와 가혹행위에 대한 처벌로써 곤장 100대의 형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나, 특별히 사면하니 대신 얼른 배를 출항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일본 정부는 자신들이 인권문제에 대하여 많은 신경을 쓰는 국가라는 것을 선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지만 리카르도 선장이 판결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5. 정식재판, 그러나...

리카르도 선장이 정식재판을 청구하자 일본 정부는 처음부터 사건의 조사를 맡아서 사건 내용을 가장 잘 안다는 이유로 오오에 타쿠를 계속해서 재판장으로 선임한 채로 정식재판을 진행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은 리카르도 역시 일본어에 능통한 영국인 변호사 디킨스를 고용하여 재판에 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며 이 2심재판 중 그 유명한 ‘디킨스의 변론’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 재판에서 리카르도가 고용한 디킨스의 작전은 '일본 정부 주장과 달리 중국인 쿨리들과 리카르도 선장 사이에서 맺은 계약은 합법적이고 유효한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초로 계약이 이루어진 지역이 일본의 사법권 관할을 벗어난 포르투갈 식민지마카오였음을 지적하면서 '마리아 루스 호에 승선한 청나라 노동자들의 고용계약은 마카오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이는 포르투갈 정부의 법적 관할에 해당하는 문제이며, 포르투갈과 치외법권 협정을 맺고 있는 일본 정부 당국은 개입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해당 내용이 담긴 포르투갈 대사의 편지까지 소송 문서에 첨부하여 제출했으며 여기에 더해 이러한 주장을 했다.
"일본 정부는 인신매매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루스 호가 쿨리들과 맺은 계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창녀의 인신매매는 무엇입니까? 그녀들은 어릴 때 돈으로 팔려서 가혹한 조건 아래 홍등가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일본인 창녀의 매매가 합법이라면, 페루인 선장의 행위도 합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까."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재판장 오오에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공격당한 것이었고 이 주장에 대하여 반론을 찾지 못한 오오에는 당황하여 급히 휴정을 명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사실 일본에서 에도 시대부터 존재했던 예·창기약정(芸·娼妓約定)을 근거로 한 반론이었고 디킨스는 여기에 더해 실제 유녀의 연한계약증서[6]와 요코하마 병원의 치유보고서까지 근거자료로 제출했다.

결국 한참 후에야 재개정이 이루어진 재판에서 재판장 오오에는 이러한 판결을 내렸다.
"설사 창녀 매매에 의해 예증될 만한 노예제가 일본에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노예를 국외에 내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청나라인 노동자를 요코하마에서 국외로 이송하려 한 페루인 선장의 행위는 위법이다."
즉, 재판장 오오에는 디킨스의 주장에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하고,일본에는 예기(芸妓)창기(娼妓)라는 노예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디킨스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고 만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러한 디킨스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재판 자체는 원고인 선장 측이 패소하였고 그 결과 리카르도는 마리아 루스 호를 버려 두고 다른 배를 타고 상하이로 출국해 버렸지만 이 재판을 참관 중이던 타국의 영사들에게 이러한 일본의 치부가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자 일본 정부는 재판 종결 직후인 메이지 5년 11월 2일(서기 1872년 11월 2일) 다급히 발표한 태정관 포고문[7]을 통해 모든 유녀들에 대한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유녀의 해방에 있어서 그녀들이 포주에게 지고있던 거액의 빚(몸값)이 문제가 되자 일주일 후인 동년 11월 9일(음력 10월 9일) 사법성에서 후속조치[8]를 발령하여 포주 등에 대한 유녀들의 빚을 전액 탕감하고 모든 유녀들을 무상으로 해방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예창기해방령(芸娼妓解放令)에 대한 일본 국립도서관 자료 스캔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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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실제 유곽에서 영업 중이던 유녀들의 사진.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외국 선박과 관련한 재판 때문에 어이없는 불똥을 맞게 된 유곽의 포주들은 당연히 반발했고 특히 그녀들을 '무상으로', 즉 해방되는 그녀들의 몸값이나 그녀들이 진 빚을 한 푼도 회수하지 못하도록 채무회수를 금지한 것에 분노했지만 이러한 반발에 대한 메이지 정부 측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예기나 창기는 인간이지만 일신(一身)의 자유를 상실한 이들로, 소나 말 등의 가축과 같다. 소나 말에게 자신의 몸값을 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무상으로 해방한다
메이지 정부의 포고문 일본어 위키백과, 일본 백과사전 : 창기 해방령 문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문장은 만화 등에서 과장한 내용이 아니라 메이지 정부 최고 책임자인 태정대신(太政大臣)이 '직접' 발표한 정식 포고문이다.

당시 유곽의 여성들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음을 미뤄 본다면[9] 해당 포고에서 추출할 수 있는 법리적 해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녀들이 자유를 상실하여 가축과 다름없는 신세의 예속인이라는 현실을 일본 제국 정부가 인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그들을 인간으로서 해방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 제국 정부가 그녀들이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으로 봤을 때 금전적 관계를 바탕으로 현실적 예속관계가 형성되어 유녀들이 사실상 포주들의 재산과 다름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에 일본 제국 정부는 재산으로서 예속되어 있는 이는 행사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와 자산이 예속한 이에게 모두 속해있기 때문에 예속된 이들이 그들 자신의 해방을 위해 그들을 예속한 이에게 별도의 금전적 보상을 지불할 이유가 없다고 판정한 것이다.

이는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될 때 떠올랐던 "노예해방으로 인해 발생한 재산권의 침해에 대해 해방된 노예 혹은 해방을 선언한 주체(국가)에게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는가?"라는 법적 문제가 당시 일본 제국에서도 문제가 됐고 이에 대해 일본 제국 정부는 자산인 노예에게는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그 어떤 경제적 권리도 없음[10]을 들어 노예주가 해방된 노예에게 그 어떤 형태로도 구상권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법리적 응답을 내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예속 상태에서 맺은 계약은 법적 실효성이 없으며 예속된 이가 풀려남으로써 예속한 자에게 발생한 손해는 구상권 행사 대상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한, 특히 일본과 일본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동아시아의 법률사에서 상당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 중요한 판단이다.

6. 결말

이 사건으로 자신들이 암암리에 노예거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게 된 페루 정부는 정식으로 일본에 항의하고 페루 해군장관이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지만 그 외에는 대체로 애초 일본 정부의 의도대로 마리아 루스 호 사건과 그에 따른 일본 정부의 대응 및 판결은 국제적으로 일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전하면서 이전에 체결된 불평등조약 폐기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특히 청나라 정부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상당기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더불어 페루의 반발과 페루 정부를 지지하는 서구 열강의 반발로 인해 중립을 지켰던 미국의 중재하에 '가장 일본이나 페루의 이익과 거리가 먼 나라'가 이 재판의 3심을 맡아서 진행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러시아였고 사건으로부터 2년 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11]는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모든 재판 절차가 마무리된다.

덧붙여 오오에 타쿠의 판결문은 사실상 거짓말이었다.
"설사 창녀 매매에 의해 예증될 만한 노예제가 일본에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노예를 국외에 내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청나라인 노동자를 요코하마에서 국외로 이송하려 한 페루인 선장의 행위는 위법이다."

특명재판장 오오에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주장했지만 '일본법상 노예를 국외에 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의 수출품 중에는 해외로 수출되는 창기가라유키상(唐行きさん)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창기는 노예이며 당연히 국외로 보내어선 안 되었으나 실제로는 무려 오다 노부나가 시대부터 창기들은 아시아 각국이나 유럽, 심지어 아프리카[12]에까지 수출되었다. 물론 가라유키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9세기 초반, 즉 1800년대 들어서의 일이지만 이들은 서양과의 지속적인 접촉이 처음 이루어진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일본의 중요한 외화수입원이었고[13] 공식적인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한때 일본의 외화수입의 1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게다가 공식적으로 가라유키상이 금지된 것은 1920년대이므로[14] 마리아 루스 호 사건이 일어난 1872년에는 가라유키상 수출이 금지된 것도 아니었다.

즉, '마리아 루스 호 사건'에서의 일본의 판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선적이고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었다.

메이지 정부에 의해 예창기해방령(芸娼妓解放令)이 발령되면서 창기들의 법적 신분이 완전히 해방되고 포주들과의 사실상의 노예 계약 관계도 일소되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매춘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매춘업에 종사해 왔고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팔려와서 배운 것이라고는 몸을 파는 일뿐이었던 유녀들에게 해방령이 내려졌다 한들 그녀들은 갈 곳도,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속된 노예에서 자유계약 노동자 혹은 개인 사업자로 바뀌었다는 것은 법적으로는 큰 의의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개인의 처지가 크게 바뀌지는 않은 것이다. 포주들도 기존의 노예주에서 사업가로 신분을 바꾸면서 이들 여성들을 고용해 매춘업을 지속했다. 법적으로 자유민인 고용 여성들을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예속할 수는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폭력과 생계 위협 등의 방법으로 교묘하게 피고용 여성들을 옭아맸다.[15] 결국 1957년 4월 1일에 성매매 방지법이 발효되면서 매춘업이 일본에서 사라지고 소프랜드 등의 살아남은 유사 성매매 종사자들의 권익 침해에 대해 일본 정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면서 종사자들의 권익이 상당히 신장되었으나 여전히 불법 체류 성매매 종사 여성 등 제도적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이들이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판결 자체는 의미가 있다. 인도주의적인 면에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창기나 위안부나 계약은 겉치레였고 사실상 인신이 구속된 노예나 다름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기 때문에 마리아 루스 호 사건의 판례는 훗날 쇼와 시대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반박하기 좋은 논리를 제공해 준다.[16] 그리고 예창기라는 노예들이 해방될 필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이면에 깔린 사회경제적인 문제는 그 해결에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반면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법적인 문제는 훨씬 시정이 빠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17]

7. 미디어

한국에서는 적보대(赤報隊)와 함께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에서 시시오 마코토연인이자 십본도 중 하나로 나온 타유(太夫)출신이던 코마가타 유미에 의해 작중에서 이 사건이 언급되면서 상당히 알려졌는데[18] 유미는 같은 십본도이던 사와게죠 쵸우와 술자리를 하다가 이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노예는 그나마 인간인데 창부는 인간도 아니고 소나 말과 같다니. 메이지 정부에선 유곽에 들어가고도 열심히 살아온 우리를 여자가 아니라 암컷으로 단정한 거야'라며 표정으로 혐오감과 분노를 보였다.

헌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점이 에타히닌 같은 천민과 평민들은 물론이고 일부 하층계급의 사무라이조차도 문맹인 경우가 있었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 천대받는 유녀였던 유미가 이러한 포고령의 내용을 읽고 그 뜻을 짐작하고 분노할 수 있었던 것은 고관대작들을 상대하기 위해 당시 일본의 여성들 중에서는 귀족 가문의 히메들이나 익히던 시, 서, 화 등의 각종 재주를 익혀 가면서 길러진 타유(太夫)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웃픈 이야기다.


[1] 페루의 수도 리마의 관문격 항구도시로, 대한민국으로 치면 인천 정도에 해당한다.[2] 영국은 1807년 노예제를 폐지, 금지했다.[3] 태정관(太政官, 다이죠칸) 회의. 당시의 총리격인 태정대신이 주관하는 최고급 각료회의를 말하는 것으로, 천황에 의한 직접통치가 행해졌던 헤이안 시대 일본의 율령제에 제정된 고대의 통치기구인 '태정관 체제'에서 존재했던 것을 유신지사들이 메이지 정부를 세우면서 복원한 것이다. 헤이안 시대에는 의정관 회의나 구교회의라고도 불렸다. 본래 막부의 주인인 쇼군, 즉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은 천황의 대리인 격으로 현실정치에는 개입을 하지 말아야 했지만 전국시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가문 등은 쇼군 지위에 더하여 일종의 섭정 격인 관백(關白)이라는 관직을 겸하는 편법을 통해 현실정치에 개입해 왔다. 유신지사들은 이러한 '섭정(攝政)체제'를 일본의 국력을 후퇴시키는 악습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를 타도(倒幕, 도막)하고 천황의 직접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존황양이(尊皇攘夷, そんのうじょうい) 사상을 주장하면서 결국 메이지 유신을 통해 자신들이 집권한 후 고대 천황의 직접통치 시기에 있었던 태정관 제도를 부활시켰다.[4] 일본 근대 사법의 아버지격인 인물이지만 후에 정한론을 지지하면서 사가의 난을 일으켰다가 사형당했다.[5] 土佐藩. 정식명칭은 고치 번(高知藩)으로, 현재의 고치현. 시고쿠 지방 남부.[6] 유녀의 연한인 27세까지 유녀로 일하겠다는 내용의 불공정 계약서. 오이란 항목 참조.[7] 태정관 포고란 메이지 유신정부 초기에 행했던 법령체제로, 의회를 통한 정식 입법절차 없이 이 당시 최고 의결기구인 태정관 회의를 거쳐 총리에 해당하는 태정대신이 발령하는 법령을 말한다. 이러한 방식을 취한 이유는 메이지 유신 초기에는 아직 정식으로 입법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의회가 구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때 예창기 해방령은 제295호 태정관 포고(明治5年10月2日太政官布告第295号)였으며 포고일자가 10월 2일인 것은 아직 음력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8] 明治5年司法省達第22号(메이지 5년 사법성달 제 22호) 전차금무효 사법성달(前借金無効の司法省達). 즉 이전에 유녀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채무를 무효로 한다는 뜻이다.#[9] 실제로 당시 유녀들은 제아무리 이름높은 오이란이라고 해도 성병에 의해서건, 연인과의 신주(心中, 동반자살) 혹은 처지를 비관하여 혼자 저지른 자살이건, 도주하려다가 붙잡혀 맞아죽은 것이건 간에 죽으면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아니라 시신에 바이죠(売女, 창녀)라고 적은 후 대충 거적에 말아 강가나 근처에 버렸다. 오이란, 요시와라 유곽 항목 참조.[10] 혹은 주인에게 속해 있음[11] 러시아 제국 제12대 차르이자 폴란드 입헌왕국의 마지막 왕. 러시아 황제(차르)들 중 대표적인 개혁군주의 한 사람으로 재위 기간 내내 중세 시대의 잔재였던 농노해방을 위해 애쓴 인물이다. 당연히 노예제도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마리아 루스 호 사건 판결에서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12] 탄자니아 잔지바르[13] 다만,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관백(關白)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8년 일본인을 국외로 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한 적이 있지만 이것은 형식적 인데다 어디까지나 '일본인'에 한한 조치였기 때문에 이후 임진왜란 당시에 끌려간 조선인 부녀자들과 노예들은 계속해서 해외로 팔려나갔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나온 소설이 바로 오세영의 '베니스의 개성상인'이다.[14]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이지, 실제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15] 이런 매춘업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실질적 예속 관계 문제는 비단 일본뿐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에서 모두 문제가 되었는데 대응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일본의 매춘업 불법화는 사회적 풍기 문제에 대한 대응의 성격도 강하지만 이런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예속 관계 형성에 대한 방지적 조치의 성격도 있다.[16] 근대화 초기의 메이지 시대에 나온 이 판례대로라면 국가가 노예를 부린 격이라고 할 수 있고 설령 징병제나 징역형의 사례를 들어 국가는 노예를 부리는 것이 금지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민간업자들로 하여금 노예를 부리도록 조장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17] 미국의 흑인 노예 해방령이나 러시아의 농노 해방령, 경우는 살짝 다르지만 조선의 신분제 철폐도 법적인 폐지가 빨랐지 그 이면에 깔린 경제사회적인 불평등 문제 시정에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18] 적보대도 마찬가지로 사가라 사노스케 에피소드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