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임마누엘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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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은 임마누엘 칸트가 1784년 12월 《베를린 월간 학보》에 발표한 에세이다. 이 글에서 칸트는 계몽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2. 상세
당시 프로이센의 고위 관료와 학자들의 비밀 모임인 '수요회'가 있었는데, 이 수요회가 발행한 《베를린 월간 학보》 1783년 9월호에 「성직자들이 더 이상 혼례성사를 집전하지 말 것을 제안함」이라는 글이 익명[1]으로 발표됐다. 계몽된 사람에게 교회에서 치르는 결혼식은 허례허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폐지해야 된다는 주장의 글이었다. 이에 대해 같은 잡지 12월호에 쵤너[2]가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쵤너는 결혼식에 대한 교회의 승인이 도덕적 타락을 막아주기 때문에 오히려 계몽의 사명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쵤너는 '계몽'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르므로 '계몽'에 대한 분명한 개념 규정이 우선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문제제기를 했다.이에 호응하여 며칠 뒤, 뫼젠[3]도 수요회 모임에서 「시민들의 계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면서,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엄밀히 정의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 다음해 멘델스존[4]이 계몽에 관한 글[5]을 발표하였고, 칸트도 비슷한 시기에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당대 유수의 학자와 지식인들이 참여한 '계몽 논쟁'이 시작되었다.
3. 내용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이 지도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이러한 미성숙이 지성의 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는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가 없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Sapere aude!)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좌우명이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6]
칸트는 "스스로가 초래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계몽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년의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평생토록 기꺼이 미성년 상태에 안주하려고 한다. 게으름과 비겁함, 그것이 너무나 편하기 때문이다. 나를 대신해서 양심과 지식을 지켜주는 책과 사람들이 있으므로 나는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6]
그래서 개개인으로 봤을 때, 거의 천성처럼 굳어진 미성년 상태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공중(Publikum ; 공적 장소에 모인 군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하다. 공중에게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기만 하면, 즉 후견인의 편견어린 간섭이 없으면,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명은 있게 마련이어서 이들은 미성년의 굴레를 스스로 떨쳐내고,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합리적으로 존중하는 정신과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모든 사람에게 확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7]
그렇다면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누군가가 독서계의 모든 공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학자의 입장으로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공동체에 있어서 자신에게 맡겨진 시민적 역할과 관직의 범위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해서는 따지지 말고 복종해야 할 것이다.[8] 예를 들어, 장교가 직무수행 중에 상관의 명령의 합당함이나 유익함에 관해 공공연히 따지려 든다면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지만 학자의 입장에서 병역 의무의 결함에 대해 논평하고 독자층에게 판단을 호소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금지되어선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민의 경우, 자신에게 부과된 세금의 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 그렇지만 같은 사람이 학자의 입장에서 과세의 부적절함이나 부당함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공적으로 표명한다면 그것은 시민의 의무에 위배되지 않는다.[9]
그렇다면 어떤 권위있는 단체[10]가 '불변의 교의'를 준수하기로 서약하여 국민들에게 이 '불변의 교의'를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어떨까? 칸트는 만약 그런 협약이 최고위 권력에 의해 인준된다고 하더라도 전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한다. 한 시대가 담합하여 그다음 시대가 인식을 확장하고 오류를 정화하여 계몽을 진전시키는 일을 하지 못하게 서약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범죄가 될 것이다. 인간 본성의 본래적 소명은 바로 계몽의 진전에 있다. 따라서 후손들은 그러한 협약을 부당하고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파기할 권리가 있다. 어떤 국민에게 법으로 제정될 수 있는 모든 사안의 시금석은 과연 국민 스스로가 그러한 법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어쩌면 그러한 법도 더 나은 법이 제정되기를 기대하면서 일정한 질서를 도입하기 위하여 특정한 짧은 기간만 통용되는 것일테다. 그와 동시에 모든 시민은, 학자의 자격으로 글을 통해 공적으로 현행 제도의 결함에 관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이 글의 말미에서 칸트는 이런 공적인 사상의 자유를 허락해주는 계몽 군주야말로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마지막 주석에서 칸트는 멘델스존의 글을 읽지 못한 상태에서 이 글을 썼다면서 만약 자신이 그 글을 먼저 읽었더라면 지금 발표하는 이 글을 보류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4. 여담
- 칸트는 『올바르게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1786)』에서도 계몽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진리의 최고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서 (다시 말해 자신의 이성에서) 찾는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나 스스로 생각한다는 원칙이 계몽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많은 지식을 안다고 해서' 계몽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계몽이라는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닌, 그 지식을 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린 것이냐는 자기검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11]
- 이 에세이가 발표된 직후, 요한 게오르크 하만[12]은 「크라우스 교수에게 보낸 편지 (1784)」에서 칸트의 계몽 개념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비판한다. 첫째, 대중이 스스로 사고할 능력을 터득하지 못한 미성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미성년들의 후견인 역할을 자임하는 군주나 철학자의 독단적 월권 때문이다. 둘째,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구별하는 것은 결국 지배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결과에 이른다.
- 미셸 푸코는 1984년(죽기 직전)에 이 에세이를 분석하는 두 편의 논문을 쓴 적이 있다.
[1] 이 잡지의 공동 발행인 요한 에리히 비스터(Johann Erich Biester, 1749~1816)로 밝혀짐. 비스터는 변호사 출신 철학자로서 프로이센 문화부의 고위공직자였으며, 베를린 왕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면서 나중에 관장을 역임하였다.[2] 요한 프리드리히 쵤너(Johann Friedrich Zöllner, 1753~1804): 베를린의 목사[3] 요한 카를 빌헬름 뫼젠(Johann karl Wilhelm Möhsen, 1722~95):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주치의로서 과학사에도 조예가 깊어서 다수의 책을 남겼고, 베를린 수요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4]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86):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대중화한 철학자.[5]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멘델스존이 1784년 5월 모임에서 발표한 강연 원고를 《베를린 월간 학보》 1784년 9월호에 개재한 글이다.[6] 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 verschuldeten Unmündigkeit. Unmündigkeit ist das Unvermögen, sich seines Verstandes ohne Leitung eines anderen zu bedienen. Selbstverschuldet ist diese Unmündigkeit, wenn die Ursache derselben nicht am Mangel des Verstandes, sondern der Entschließung und des Mutes liegt, sich seiner ohne Leitung eines andern zu bedienen. Sapere aude! Habe Mut, dich deines eigenen Verstandes zu bedienen! ist also der Wahlspruch der Aufklärung. (Immanuel Kant,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7] Denn da werden sich immer einige Selbstdenkende, sogar unter den eingesetzten Vormündern des großen Haufens, finden, welche, nachdem sie das Joch der Unmündigkeit selbst abgeworfen haben, den Geist einer vernünftigen Schätzung des eigenen Werts und des Berufs jedes Menschen, selbst zu denken, um sich verbreiten werden. (Immanuel Kant,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8] 칸트는 이렇게 '시민적 역할과 관직의 범위 안에서의 이성활동'을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고 칭한다. 관직에서 사용되는 이성이 '사적'이라고? 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여기서 칸트가 사용하는 '공적', '사적' 개념 구별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용법과 다르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칸트에 의하면, 이성의 사적 사용은 특정한 집단에 봉사하는 제한된 역할에 국한되고, 이성의 공적 사용은 독자들이 참여하는 공론장에 개방되어 있다.[9] 그러므로 상관의 명령을 받는 장교가 직무수행 중에 그 명령의 합당함이나 유익함에 관해 공공연히 따지려 든다면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지만 학자의 입장에서 병역 의무의 결함에 대해 논평하고 독자층에게 판단을 호소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금지되어선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민의 경우, 자신에게 부과된 세금의 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 그렇지만 같은 사람이 학자의 입장에서 과세의 부적절함이나 부당함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공적으로 표명한다면 그것은 시민의 의무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마누엘 칸트 외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옮김, 길, 2020, p.32)[10] 칸트는 교회총회나 명망 있는 성직자 단체를 예로 든다. 이 에세이에서 칸트는 계몽의 주안점을 유독 종교 문제와 관련해서 다루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당시에 이런 종교와 계몽이 부딪치는 문제가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11]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진리의 최고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서 (다시 말해 자신의 이성에서) 찾는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나 스스로 생각한다는 원칙이 계몽이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계몽을 지식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족하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원칙은 자신의 인식 능력을 사용할 때 부정적 원칙이며, 흔히 매우 풍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지식의 활용 면에서는 오히려 가장 계몽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근거 또는 규칙이 이성 사용의 보편적 원칙으로 삼기에 타당한가 여부를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을 뜻한다. (임마누엘 칸트 『올바르게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12] Johann Georg Hamann, 1730~88): 칸트의 제자이자 친구로서 계몽사상을 비판하고 감성의 복권을 주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