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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정책/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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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국내 정치의 뜨거운 감자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1.1. 실질적인 성과들
3.1.1.1. 민간 교류3.1.1.2. 정상회담
3.2. 부정적 평가
3.2.1. 계속되는 무력도발3.2.2. 허울뿐인 북한과의 합의3.2.3. 원칙없는 정책은 명백한 실패3.2.4. 천문학적 대북 송금액에 비해 미미한 성과
3.2.4.1. 구체적인 내용
3.3. 비교
4. 여담5. 출처

1. 개요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를 다루는 문서이다.

햇볕정책의 3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북측의 무력 도발을 허용하지 않는다.
두 번째, 남측은 흡수 통일을 시도하지 않는다.
세 번째, 남측은 화해와 협력을 추진한다.

2. 국내 정치의 뜨거운 감자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는 국내에서 자칫 정치적으로 타격을 크게 받을 구설수가 생길만한 논란거리이기 때문에, 관련 지식이 풍부하고 신념을 갖춘 경우가 아닌 이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눈치이다. 북한이 6차 핵실험까지 강행한 덕에, 조선일보나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목소리를 강하게 낸 동아일보 같은 대형 언론사들이 부정적인 평가를 압도적인 비중으로 싣기도 했다.[1]

대체로 민주계[2]진보계[3]에서는 "북한과의 평화무드로 무력충돌 및 도발 갈등이 줄어들어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됐다"며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반대로 보수계[4]에서는 "북한 지원 정책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다"며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각각 진영에서 주류 의견을 따라가는 경향이 강하다.[5] 다만 미국 조지 워커 부시 정부의 전 정권 지우기(ABC 정책), 남북경제협력(이하 경협)의 상징이자, 중소업자들의 숨통을 틔워준 개성공단의 폐쇄 같은 외풍을 만나는 등 시류를 잘 타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 vs 때문에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부담한 자금에 주목할 경우 한국의 손해다, 이 두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

일단 정치인들 사이에서 왜 찬반이 갈리는지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6.25 전쟁의 참상을 겪은 우리 국민들은 기본적으로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게 된다. 북한과의 상호 교류가 전무하다시피한 상황에서, 잠깐의 해빙기를 제외하면 50여년 동안 대결 구도가 지속, 상호불신감이 높아,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들을 유권자들이 외면하지 않고 꾸준히 지지하여 의견에 힘을 실어주고 있으며, 남북 관계를 협의해야 할 지도층들의 언행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수 쪽은 꾸준히 북한의 불량국가 성격을 지적하며, 진보 쪽은 북과의 꾸준히 연결끈 유지 주장을 고수하고 있어 의견이 팽팽하다.
  • 북한의 극단적인 폐쇄성으로 인해 북에 대한 "정보" 매우 부족하다. 단편적으로 주요 대북 정보창이 대한민국 국정원이 아니라 일본 또는 미국 언론이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나름 연구성과를 거둔 전문가들이 있지만, 정론이라 해도, 남북 관계의 전개에 따라 민감할 수 있는 발언을 공개 석상에서 말하는 걸 꺼린다. 대표적인 예가, (1) 북한의 국내 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율을[6] 현 남북 관계 상황과 관련지어 살을 붙이고, 해석해주는 정보와, (2) 북한의 경제를 꾸려나가는 살림(민수 경제)과 국방을 담당하는 바깥살림(군수 경제)이 별도로 운영[7]된다는 정보, (3) 북한의 무기 판매[8] 실적 정보이다. 남북 경제 협력(= 경협) 자금이 전용되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인데도, 그간 연구-취재를 한 지식인들, 언론인들의 목소리가 국내 정치 여건에 따라 주무대에서 주목, 외면받는 일이[9][10] 거듭되었다.
  • 위의 영상에 등장하는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한양대 교수 출신으로, 개성공단의 갑작스런 중단을 막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이런 사람 조차도 현장의 정보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의원들의 대정부 질의에서 곤혹을 치르는 게 현실이다. 북한의 핵개발이 대북 지원으로 인해 진척되었는지, 그 증거나, 그렇지 않다는 증거마저도 없어, 북이 행하는 행위의 진위와 배경을 판단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첨부된 이해찬 전 총리, 홍용표 장관 영상을 감안하면, "정말 말해줘야 할. '진짜' 전문가들이 아닌 자극적인 주제를 연구한 사람들"의 발언이 더 큰 비중으로 다뤄지고 있다는게, 보다 진실에 가까울 가능성도 있다.
  • 북한의 폐쇄성, 막장성이 있다. 북한 수준으로 극단적인 폐쇄 및 통제 수준으로 통치를 시행하는 국가는 주변에도 없으며, 역사를 보아도 크메르 루주 치하 캄보디아나 나치 독일 정도밖에 없었다. 인권 탄압 수준 또한 동아시아에서 영 좋지 않은 쪽으로 선두를 달린다. NLPDR이 아닌 이상 대한민국 국민들도 이를 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방법이 다르다. 이 문제를 비판적으로 보는 측과, 반대로 아예 언급을 꺼리는 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다.
  • 정책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 역시 존재한다.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론자 중에서도 햇볕정책의 구상과 의도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 햇볕정책을 시행하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에도 북한의 무력 도발은 일어났다는 점(제1, 2차 연평해전). 또한 햇볕정책 기간에 남북의 긴장분위기는 완화되었어도, 북한이 2003년 1월 NPT를 탈퇴해 핵 개발을 하려는 움직임은 막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1차 북핵 위기와 별도로) 햇볕정책 초기에도 핵 개발 프로그램만은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북한은 지속적으로 핵 개발을 추진하였으며 2006년 1차 핵실험과 2009년 2차 핵실험으로 이어진다. 이후 햇볕정책의 연장 선상으로 북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던 6자회담으로 2007년 10.3 합의를 도출해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는 듯했으나, 합의 후 북한의 핵폐기 검증 불응과, 2009년 연이은 미사일 실험과 2차 핵 실험으로 중단되어 현재는 합의가 유명무실하게 된 상태 라는 것이다.
  • 물론 03년 1월 NPT 탈퇴와 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조지 워커 부시 정부의 유연하지 못한 ABC 정책에서[13], 2차 핵 실험은 2008년 박왕자 씨 피살사건 이후 시작된 남북 관계 경색(5.24 조치) 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으나, 2009년 1월 미국 오바마 정권이 들어서고 북한에게 대화를 제안한 시기에도 핵실험이 감행된 건,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표명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햇볕정책을 시행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효과를 볼 수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짦은 시간(10년) 동안 수차례 위기와 대화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강경론을 제시하는 자유주의적 매파가 신뢰를 얻는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대북 지원 자금이 북한의 비대칭 전력 강화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햇볕정책의 최종적인 목표인 남북 평화관계 구축에 실패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14][15]
  • 문제에 대해 대중이 감성적 접근을 고집하는 부분도 있다. 6.25 전쟁에 대한 분노와 그에 따른 불신 VS 현실적 상황보다 한민족의 화합만을 강조하는 양 입장이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진짜 문제될 소지가 있다. 이건 남남갈등으로 같은 편이어야 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용납하려 들지 않는데다, 자칫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이상주의로 변질될 가능성마저 있기 때문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 쪽이든 간에 철저히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연구-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전 국민을 불행하게 만드는 처참한 실패가 반복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의 해결 지향점과도 매우 깊은 연관이 있으므로 참고하면 좋다.

대북관 문서도 참조 바람.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 우선 1948년 분단 이후 50년 세월 대부분을[16] 적대적인 대립 분위기로 일관되었던 상황을 뒤집어, (결과가 어떻든 간에)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남북 교류를 처음으로 시작해냈다.[17] 북한과의 대화는 특정한 사항이 있을 때 일시적으로, 고위급 공무원들끼리만 했었지만(7.4 때 이후락과 김일성이 만난 것처럼.) 1985년 이산가족들을 위한 고향방문 행사 및 예술단 공연,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이후 남북의 "실무자"급 회담이 햇볕 정책을 시작으로 재개되었으며, 이는 금강산 관광, 개성 관광, 개성 공단 같은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교류 및 정상회담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김병연 교수는 "북한이 배부를 때 5.24 조치가 이뤄졌다."는 걸 지적하면서, “북한은 더 이상 폐쇄 경제가 아니다. "시장"이 (북한) 인민의 생명줄이 되고 있다. 북한 경제는 진화하는데, 대북 정책은 진화가 없다. 변화된 경제 구조를 고려하지 않은 대북 정책은 성과를 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단 내용은 인터뷰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Q: 1990년대 식량난 이후 한국이 ‘퍼줘서’ 살아남았다는 시각이 적지 않습니다.
A: “많이 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잘못된 레토릭이 많아요. 햇볕정책의 모든 것이 좋았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의도하진 않았으나 햇볕정책이 북한의 초기 시장화(市場化)에 기여한 부분이 있어요. 시장에 들어갈 물자와 돈이 남쪽에서 흘러들어갔으니까요. 이명박 정부의 압박 때문에 북한의 시장이 커졌다고 주장하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건 억지입니다. 경제를 전혀 모르는 분이 많아요.”
Q: 5·24조치는 어떻게 봅니까?
A: “우리도 손해입니다.”
Q: 사과받아야죠.
A: “사과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5·24조치는 우리 기업에 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북한 제품이 중국산으로 둔갑해 들어옵니다. 우리 기업이 북한에 줄 오더를 중국 기업에 주면 중국 기업은 북한에 아웃소싱을 합니다. 예전에는 거간(居間)을[18] 한국 사람이 했는데, 지금은 중국 기업이 합니다. 5·24조치로 우리가 또 잃어버리는 게 있습니다. 북한 경제구조를 변화시키고 인적 자본을 키울 기간을 놓치는 겁니다. 통일 후 한국이 번영하려면 북한에 기업가가 생기고 인적 자본이 성장해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경제학의 기회비용 개념조차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봉쇄, 압박은 비용이 안 든다고 착각해요. 그러나 압박정책 때문에 중요한 기회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Q: 금강산 관광은 성격이 다릅니다. 개발 지원이나 경협과 달리 독재집단에 현금을 직접 주는 거죠.
A: “금강산 관광이 사회 침투력과 변화력에서 제한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결국 시퀀싱이겠지요.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게임이니까요. 금강산을 주고 원하는 것을 받아내야 합니다. 정치하는 분들이 경제 과정의 임팩트를 좀 봤으면 좋겠습니다. 중세가 근대로 바뀐 과정에서도 경제구조의 변화가 핵심입니다. 시민의 자유를 허락하고 정치적 민주화로 나간 과정도 마찬가지고요. 경제구조의 변화는 도도한 파도여서 모든 것을 집어삼킵니다. 파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어야 합니다. 정책 결정자들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 2008년 '북'이 비록 머지않아 복구하기는 했으나 영변 냉각탑 폭파를 직접 실시하게 된 원인 중 하나다.
  • # 최근 탈북한 태영호 전 공사의 경우 지원을 하는 것 정도는 괜찮되 북한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거나 지원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조건을 단 바 있다. 구체적으로 현대식 병원 서비스 제공이나 설사 쌀 배급 중 7~80%를 북한 정권이 가져가고 주민들은 10~20%만 가져가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쌀은 주되 대신 배급 행사 등을 통해 그것이 남한 쌀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 햇볕정책을 편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에서 통일부를 맡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은 2001년 새로 출범한 미국 부시정권의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19] + 110억달러의 대일청구권 행사가 주 골자인 북한-일본 수교의 무산 후, 이북이 생존권 차원에서 핵 프로그램을 재가동한 부시 정부의 대외정책 실패작이지, 햇볕정책에 책임을 지우는 건 온당치 않다고 주장한다. 부시 정부의 미국이 조금만 유연하게 나갔더라면, 06년 북한 핵실험 대신 다른 결과물이 나왔을 거라는 것이다.

3.1.1. 실질적인 성과들

3.1.1.1. 민간 교류
  • 통일부가 2006년 10월 밝힌 바로는, '대북 송금액'이 김영삼 정부 시절 9억 3,619만 달러였던 것이 -> 김대중 정부 시절 17억 455만 달러, 노무현 정부 시절 22억 938만 달러로 늘어날만큼 "남북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한다.[20]
    - 물론 이 부분에 대해 "북한에 무슨 돈을 그리 많이 갖다 주느냐?"는 의문을 제기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1999 ~ 2006년 8년동안 실제 지원한 액수는 8조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같은 날 통일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문제의) 8조원은 일반적으로 대북 지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정상적인 민간의 "상거래"와 + "경수로"분담금[21] + 기업들의 개성 금강산사업 투자액을 포함한 것"이라고 한다.
    - "국민의 정부 시절은 민관을 합쳐 8,557억원, 참여정부에서는 2003년 ~ 2006년까지 4년동안 1조 4,446억원이 지원"되었다고 한다. 즉 국민의 정부 이후 8년 간 대북 지원액은 모두 2조 3,300억원이며, 이 중에 현금지원은 전혀 없고 모두 현물지원"이라고.#
  • 금강산 관광개성 관광이 시작되는데 기여하였다.비록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잠정 중단된 상태지만. 참고로,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책 <정세현의 정세토크>에서 이 사건에 대해,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는 (발포사유인) 관광객의 월담 정도는 원만하게 끝날 수도 있었던 사안"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개성공단이 탄생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 때 개성에서 업무를 봤던 현대그룹 직원들은 북한軍의 통신선을 쓸 수 있는 상징적인 혜택을 받았다는 후문. 정동영 前통일부 장관은 2016년 5월 경남 창원에서 개성공단 폐쇄 결정에 대해 "개성공단이 만들어지면서 북한의 군사시설이 훨씬 북쪽으로 이동돼 군사 위협이 줄어들었다"며 "보수와 진보를 떠나 개성에 북한의 군부대가 있는 것과 공장이 있는 것을 비교하면, 어느쪽이 우리나라에 이롭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2016년 탈북한 태영호 공사 또한 개성공단이 북의 주민에게 외부의 상황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보수 진영의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햇볕정책이 외부 상황을 알리는 데 쓰이는 것은 환영하는 편이며, 이준석과 같은 다른 인사도 파주에 북한 노동자가 출근해야 한다는 등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춘 해석이 2020년대 들어 보수 진영에서 생기고 있다.
3.1.1.2. 정상회담
  • 분단 후 네 차례 실시된 남북정상회담이 모두 이 햇볕정책의 시행과정에서 나왔다. 단, 참여정부의 2007년 10월 회담은 시기가 매우 늦었다는 지적이 있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22] → 2000년의 6.15 남북 공동 선언[23] 이어 → 한층 진일보한 2007년의 10.4 남북 공동 선언[24] 발표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한 문제인 정부의 햇볕정책 부활 이후로 남북정상회담이 두차례나 열렸고 북미정상회담과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라는 성과를 얻는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후 남북경제협력에 대한 시장의 기대가 커지면서, 김정일 위원장 시절 사회간접자본(SOC) 7개 분야의 독점권을 획득한 현대 그룹의 전반기 주가가 2018년 연초 대비 5배 오르기도 하였다.[25]
  • 북미정상회담 또한 햇볕정책 부활 이후로 사상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문재인의 대통령 취임 이후 2018년 전반기 6개월 동안, 남북정상회담 2차례, 중국-북한정상회담 2차례, 미국-북한정상회담까지 1차례 열렸다.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울 답방문제를 놓고 주저했던[26] 모습과 달리 북한이 훨씬 적극적인 모습으로 정상회담을 바라는 상태. 아직은 미국이 주도하는 UN의 대북제재 완화문제 및 평화협정[27] 문제가 남북문제의 주요 변수로 남아있지만, 우리 정부의 외교 및 중재 능력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는 만큼, 향후 정책추진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3.2. 부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이를 핵볕정책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일단 순수히 비핵화, 무력도발 억제 성과만 바라보자면 변호가 불가능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때 괜히 대북관이 강경론으로 돌아선게 아니다. 특히 반대까진 아니더라도, 마냥 좋다고 찬성하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관점인데, 주장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북한은 표면적으로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 좌익 파시즘 절대왕정국이다. 일반 공산권 국가들은 공산당 일당제를 시행하지만, 그 안에서 권력 집단 간의 균형과 견제가 존재했다. 스탈린 시대 이후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은 비록 사회적 폐쇄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공산당 내 권력독점은 지양하면서 대내외적으로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외교적 상황은 피했다. 즉 국가로서의 최소한의 기능과 신뢰는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어 소련의 경우 쿠바 미사일 위기와 같은 극단적인 외교 상황을 초래하기도 했으나 미국과 대화로 타협을 했고, 이후 전략무기 감축과 같은 군사 충돌 방지를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갔다. 하지만 북한은 스탈린 소련과 나치 독일과 같이 국가적 기능과 신뢰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2. 또한, 대다수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타 서구권 국가들의 압력과는 별개로 스스로가 개혁 개방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도 현재 북한과는 다른 상황이다. 북한 수준으로 국민을 억압했던 국가는 극히 소수였으며[28] 비록 후폭퐁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몰락하였으나 사회 경제적 모순의 탈출구로 80년대 중후반 이후 점진적인 개혁과 개방을 추구했다. 현재 지속 중인 공산국가들 역시 공산당이 주도하여 개혁 개방에 성공한 국가들이다. 하지만 북한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꾸준하게 개혁 개방을 유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고 지속적으로 핵 개발을 추진했다. 또한, 보수우파 정부 시절에도 비핵화를 전제조건으로 대화와 전폭적인 경제 지원을 약속했었다.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지만 6자 회담이 실질적인 파국을 맞이했던 이유는 2009년 4월과 5월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실험과 2차 북핵 실험이었다. 김대중 취임 이래로 진보주의 정부 10년과 보수 노선을 띤 이명박 정부 초기 2년까지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북한은 비핵화와 개혁 개방에 대한 의지를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북한이 비핵화와 개혁 개방을 체제 몰락과 동일하게 여기는 이상 햇볕정책의 실효성을 기대하기란 힘들다. 북한과 다른 공산권 국가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정책의 결과와 같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론으로 볼 수 있다.

3. 10년 밖에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른 판단은 금물이라는 주장도 간간이 보이는데, 그런 식으로 면죄부를 주게 되면 사실상 그 어떤 정책도 비판할 수가 없게 된다. 아래를 요약하자면, 결국 딱 퍼주기 정책이라는 것이다. 일부는 햇볕정책이 박왕자 씨 피살사건이라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좌초한 것을 실패원인으로 들지만, 사실상 상당수의 국민 여론상으로는 핵실험을 시행한 순간부터 실패한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본인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사전부터 핵실험 가능성을 부인했지만[29],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현재의 북핵문제로 이어졌다. 소수는 국가간의 외교문제가 한 국가의 정책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 탓을 하기도 하지만, 실제 햇볕정책이 시행되는 도중에도 연평해전을 비롯한 북한의 무력 도발은 연이어 이어졌다. 햇볕정책 지지자들은 금강산 관광개성공단의 성과를 주장하지만, 햇볕정책의 목적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 원조가 아니라 남북긴장 완화와 북한의 점차적 개방이었다. 그러나 사실 5.24 조치 이전에도 북한의 대남 도발 및 핵실험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30] 북한의 개방은 10년 넘게 별 진척이 없었다. 햇볕정책의 모델이 된 동방정책의 경우 서독과 동독이 통일되기까지의 20년여 년 가까이 시행되고 동독이 서독에게서 여러 이익을 뽑아낸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독일 상황은 햇볕정책 도중의 남북상황보다도 더 긍정적이었다. 서독인이 동독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었고, 동독 한복판에 있는 베를린 방문에도 제약이 적었다. 무엇보다 동독은 서독의 동방정책에서 뽑을만큼 뽑았지만 뒷통수를 치지는 않았으므로, 결국 동방정책이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동독도 호응하고 신뢰를 쌓을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거론한 현재 북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장경제도 밀수를 통한 암시장 위주지[31] 북한의 자발적인 개방이 절대 아니다.

4. '북한 주민들을 도와주라고 돈과 소를 비롯한 유, 무형적 지원을 해 줬더니 그 돈으로 핵과 무기를 개발한다.'는 의혹이 보수진영 등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고, '햇볕정책의 첫번째 대원칙인 북측의 무력 도발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그간 2차례의 교전과 이북의 핵 실험 실시 측면에서, 실패한 것' 이란 비판이 제기된다.
일부는 햇볕정책의 지원금으로 핵개발을 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지만,[32] 그 자금이 직접적으로 핵개발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지원금으로 인해 경제가 파탄나서 망해 가던 김정일 정권의 숨통을 틔여준 것은 사실이고, 그로 생긴 여유로 핵개발을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33]

5. 미국 부시 정권의 ABC 정책을 실패요인으로 거론하면서 햇볕정책 자체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히려 그 주장 자체가 햇볕정책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애초에 남한이 어떤 제스처를 취하든 미국이라는 강력한 외부 변수가 정책 시행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부시 정권의 냉랭한 반응이 훈훈하던 남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처음부터 북한 측에 책임이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 및 NPT와 맺은 협정을 어기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도 계속 지적되고 있던 부분이고, 부시 정권은 단지 그런 북한의 기만행위를 받아주길 거부한 것 뿐이라는 것. 만약 북한이 남한과 화해 분위를 지속하거나 햇볕정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줬다면 중동과 알 카에다 문제에 집중하던 미국 쪽으로도 굳이 북한을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북한은 햇볕정책 진행 중에도 도발 및 핵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부시 정권도 햇볕정책이나 대화가 실제 북핵 문제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고, 오히려 북한 쪽 기만에 남한과 자신들이 놀아나고 있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결국 햇볕정책은 북한의 행동에 조금도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그 이유로 부시 정권의 태도를 탓하는 건 전후과정에서 북한이 남한, NPT, 미국을 기만해 왔다는 점을 무시하는 논리이다.

3.2.1. 계속되는 무력도발

한국국제정치학회 논문에 의하면,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과 기조는 역대 한국정부와 확연히 구별된다. 햇볕정책의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온 대북 지원정책은 퍼주기 정책이라는 비난속에 강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간에 신뢰와 협조관계를 구축하는 데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제로 북은 계속된 지원에도 연평해전을 일으키고, 핵개발을 강행하였다.

3.2.2. 허울뿐인 북한과의 합의

통일연구원 소속 '국방대학교'[34] 한용섭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35]
북미제네바 핵협상에서 제네바합의를 하였으나 제네바합의에서 금지한 핵무기개발을 계속했고, 영변 이외의 지역으로 주요 핵시설을 옮겨서 비밀리에 핵개발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제네바합의에서 약속했던 핵시설의 동결을 풀고, 핵물질을 지속적으로 생산하였으며, 특히 우라늄 농축시설을 건설하려 우라늄탄을 개발한 사실이 적발되자, 제네바합의 파기 및 NPT를 다시 탈퇴하였다. 제2차 핵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2003년부터 2008년까지 6자회담이 개최되었고 9.19 공동성명과 2.13 조치 등이 합의되었으나 곧 이어서 9.19 공동성명을 위반하고 핵물질의 신고를 이행하지 않고 사찰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핵실험을 세 차례나 감행함으로써 핵무기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를 성공시켰다고 선언하고, 한미 양국에 대해서 핵전쟁 협박을 가함으로써 모든 기존의 핵합의를 폐기시키고, 북한핵에 대해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기대와 신뢰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북한은 1990년 이후 북핵문제에 대해서 타협과 파행, 진전과 후퇴를 반복해 옴으로써 한미중러일 등 국제사회의 신뢰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악화시켰다.
햇볕정책에서 파생된 6자회담은 거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3.2.3. 원칙없는 정책은 명백한 실패

햇볕정책은 북한의 대남도발 연평해전, 핵 개발 등으로 인해 제 1원칙을 지키지 못하였다.

통일연구원 이화여대 박인휘 교수의 논문을 참고하면,[36]
햇볕정책은 기능주의적 이론을 바탕으로 경제사회문화적 교류의 성과가 정치군사적 성과로 전환될(spill-over effect) 것이라는 전망에 의존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측면이 인정된다.
즉, 햇볕정책의 대북송금(경제문화적 교류)이 비핵화, 통일 등 정치군사적 성과를 이루지 못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 서부 잡지인 로스앤젤레스타임즈(LAT)에서는,
로스엔젤레스타임즈(LAT)는 20일 사설에서 ‘햇볕정책’은 신기루에 불과했다며 DJ의 대북정책을 혹평하는 사설을 실었다. 한국 특파원 출신인 도널드 커크는 이 신문 사설에서 “’햇볕정책’은 남북 결전의 어두운 구름 속을 투과하며 반짝이긴 했지만 방향을 잘못 잡은 정책으로, 그 실패는 처음부터 예고됐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김대중 만큼 한국인에게 꿈을 키운 대통령은 없었지만 “곧이어 회담에서 발생한 희망은 깨졌다”며 “다른 모든 화해 시도처럼 선언의 약속은 부질없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6자회담과 햇볕정책 모두가 실패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정권시절 동아태 차관보이자 6자회담 미국 측 최상위 실권자였던 크리스토퍼 힐[37]이 자신의 회고록 '미국 외교의 최전선'에서 밝힌바에 따르면 "워싱턴 정계는 노무현 정부의 참을성 없는 태도에 분노"했으며 04년 국무부 군축차관이었던 볼튼은 "노무현 정권은 지나치게 북한에 우호적"이란 평을 내렸다.

그리고 햇볓정책에 대한 힐 본인의 평은 이렇다.
"남북정상회담에 대가를 지불하고, 일반인 방북에도 대가를 지불하며, 단순협력에도 대가를 지불하는 대북 접근법은 부시 행정부만이 아니라 그 어떤 미국 정부와도 공존불가"

3.2.4. 천문학적 대북 송금액에 비해 미미한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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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송금 및 현물제공은 참여정부 때가 최대
-통일부, '정부별 대북 송금 및 현물제공 내역'(2017)[38]
친노 네티즌들이 출처불명의 시각화 자료[39][40]를 들고 와서 참여정부보다 보수정부의 대북송금액이 많았다는 거짓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통일부는 2017년 '정부별 대북 송금 및 현물제공 내역을 공개하면서 전술된 통계 그래프'정체불명의 허위자료'라고 밝혔다.[41] 앞서 나온 글과 달리 여기 잘 설명한 글도 있다. 물론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대북송금이 이루어졌으나 상당수는 참여정부 말기에 활성화된 개성공단 송금액이고, 무엇보다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대해 그 책임을 상기시키며, 대북지원 및 교류협력을 축소 중단함으로써 상호주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주창하며 햇볕정책과 맞닿아 있는 대북정책을 내세웠으나,[42] 이후 북한 측의 물리적 도발이 반복되자 기존 대북 패러다임의 폐기를 천명, 개성공단 중단 등의 강경책으로 선회했다. 한편,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송금액을 제외한 단순 대북 지원금만 보면 차이는 더 크게 벌어진다. 대북 지원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참여정부의 지원금이 압도적으로 많다. 문재인 후보도 거짓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2조 7,028억원)와[43] 노무현 정부(5조 6,777억원)는 공식적으로 10년 간 8조 3,805억원(이자 부담금 포함)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원했으며, 이는 결코 햇볕정책의 결과에 합당하지 않는 너무 많은 액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단, 이 중 경수로 차관 기금 1조 9,236억원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 북핵 사태 당시 미국-북한 협상 결과[44]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면 김대중 정부(1조 6,550억원), 노무현 정부(4조 8,019억원)이다. 그럼에도 도합 6조 4,569억원이라는 자금이 천문학적인 액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3.2.4.1. 구체적인 내용
통일부에 따르면 '대북 송금액'은 김영삼 정부 시절 9억 3,619만 달러, 김대중 정부 시절 17억 455만 달러, 노무현 정부 시절 22억 938만 달러, 이명박 정부 시절 16억 7,942만 달러, 박근혜 정부 시절 2억 5,494만 달러였다.#

또 '현물 제공 내역'을 보면 김영삼 정부 시절 2억 8,408만 달러, 김대중 정부 시절 7억 6,610 만 달러, 노무현 정부 시절 21억 4,694만 달러, 이명박 정부 시절 2억 9,703만 달러, 박근혜 정부 시절 8,233만 달러였다고 한다.

북한의 국채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한국의 차관을 상환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한국은 북한의 과거 국채상환 문제를 파악하지 않았다.#, #2, #3, #4 이는 경제논리가 배제된 행위로 정치적 목적이 우선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 기업들과도 각종 경제적 거래 과정에서 북한정부는 각종 채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바 있고 이에 관해 원자바오 총리도 거론한 바 있다.

또한 한국은 대북차관 및 송금관련 정부정책 진행에 있어서 국회동의나 공개적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관련기사 이는 엄낙용 당시 산업은행 총재의 폭로 저서로 이어져서 대북송금 사건으로 가게 되었으며 이를 유죄로 판결받았다. 이와 유사한 독일의 과거 동방정책에서는 구 동독 총리인 로타어 데 메지에르 전 총리는 2012년 조선일보 인터뷰 및 이명박 전 대통령[45]과의 면담에서 조건부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언급한바 있다.

현재 북한의 한국 차관 상환률은 1~3%이다.관련기사 이 상환률은 통일부가 2017년 공개한 대북 현물/현금지급 기준에서 2006~07년 분량의 일부분만 해당한다. 거기에, 미국의로 망명한 전 39호실 고위 관리였던 리정호의 증언에 따르면, 햇볕정책 자체를 북한 체제의 실상을 발가벗기려는 위험한 정책으로 봤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그냥 돈만 받아먹을 생각만 했다고 진술했다.기사

2017년 현재 대북차관으로 북한을 얽매인다는 전략의 실패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 1조 원의 상환은 예정대로 먹튀를 당하게 생겼다. 기사 경제적 기초원칙조차 무시하면서 차관으로 북한을 옭아 맨다는 근거없는 정치적 이념의 정책 행보의 실패는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이미 기한말기인 1조 3,600억원의 차관은 완전히 먹튀당한 상황이다.기사

3.3. 비교

퍼주기라고 비판받을 정도로 남북 경제협력과 대북 지원에 매우 큰 비중을 두었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10년간 어느 정도의 민간 교류와 회담 등을 성사시켰으나, 북한의 무력 도발과 핵실험을 막지 못했고 실질적인 통일 과정의 진전은 전무한 수준이다. 또한 강경으로 일관했던[46] 박근혜 정부 말기에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선제 북폭을 검토 등 전쟁 직전까지 갔으며 북한은 핵실험에 매달려 무려 5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한다. 거기에 ICBM, SLBM 등의 신형 미사일 개발 및 발사(대표적으로 광명성 4호)와 셀 수 없는 무력도발이 이루어지는 등 남북관계는 급속히 나빠졌다.#

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북핵문제에 대한 '햇볕정책 책임론'을 제기하자 박지원 의원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동안 5번의 북한 핵실험이 있었고, 북한 미사일 기술의 진전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이던 대통령께서 '대화 위해 북에 준 돈이 핵개발 자금 됐다'며 햇볕정책에 책임을 떠 넘기고 있다.", "정부 말대로 하면 북한은 이미 망했거나 오늘 망해야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동안 준 돈이 없는데 북이 핵 SLBM 미사일 핵잠수함까지 건조해서 실험을 하는건 무엇인가. 경부고속도로에서 사고나면 동작동 국립묘지 박정희 대통령 묘소로 가서 항의하냐"고 반박했다.# 또한 이에 대해 이종찬국정원장 또한 2016년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 이후 지금까지 남북 교류가 중단된 상태에서 더욱 신속하게 북한 핵무기 개발이 이뤄지고 있지 않나. 그 돈은 어디서 나온 돈인가. 근본 원인은 오바마가 이란과 쿠바에 대해서는 집권 기간 내내 대화에 나서 핵무기를 막고 국교 수립까지 갔는데, 왜 북한에 대해서는 '전략적 인내'[47] 라며 시간을 벌어줬느냐 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 문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북한을 방치한 책임이 더 크다."면서 "북한 핵 개발 속도가 빨라진 책임이 이명박·박근혜 두 대통령에게 있다. 남북대화를 통해 대북 관계를 풀고, 그리고 핵 감시 체제인 NPT로 북한을 끌어들였으면 북한이 이렇게 핵 개발 속도를 낼 수 없었다고 본다. 곧 정부가 북한 문제를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미국에서도 2016년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조차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오히려 북한에게 핵과 미사일 능력을 개발하는 시간만 벌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쇄도했다.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과 도널드 트럼프 등 공화당 대선 주자들은 ‘전략적 인내’ 정책의 폐기를 주장했다.#

다만 여기서 정책 당사자의 말도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DJ 북핵관련 발언들, DJ 對 서울대 학생들 1문1답, DJ 對 전남대 학생들 햇볕정책관련 1문1답)

이와 관련해 보수성향 언론 중앙일보에서는 2016년 8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48]
"1994년 김일성이 돌연사하자 정부는 북한 붕괴를 기정사실화합니다. 당시 정종욱 안보보좌관은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앤서니 레이크)에게 "북한이 6개월 내지 2년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머지않아 통일이 가까운 것을 느낀다”고 '천기누설성' 발언을 해 주목받기도 했죠.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곧 무너진다던 북한은 무너지기는 커녕 핵 개발국이 됐습니다. ICBM 발사 실험에 이어 500km를 날아간 SLBM 시험발사에도 성공하는 등 핵 능력을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를 상대로 '핵 보유국의 지위를 인정하라'며 미사일 발사 시위를 벌이는 세계의 골칫거리가 됐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쯤에서 북한 붕괴론에 도취돼왔던 지난 20여년 미혹(迷惑) 의 세월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실재하는 북한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싶은대로 북한을 봐왔던 것은 아닌지, 5년 단임정권의 정치적 부침(浮沈)에 따라 갈팡질팡해 온 대북정책이 낳은 괴물이 아닌지, 대북 압박과 경제 제재가 북한을 스스로 붕괴하게 할 것이라고 오판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중략) 지난 시기의 역사에서 우리는 북한이 얼마 못가 스스로 무너질 것이란 낙관과 믿음이 대북 교류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평화정착 정책의 폐기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관리체제에서 북한을 완벽하게 이탈하게 하는 빌미를 줬다는 뼈아픈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사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햇볕정책이 부활하자 1년 안에 정상회담이 세 차례 열렸고 핵 실험장 폭파 또한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북한이 질질끌며 아니나다를까 단계적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정상회담을 한 것도 대북제재의 북한에 대한 선제적 압박효과가 전제되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대북제재가 북한을 궁지로 몰았기 때문에 유화정책인 햇볕정책이 성과를 거둔 것이라는 견해다. 즉, 당근과 채찍이라는 상보적 관계라는 논리를 요지로 하는 주장인 셈이다. 이에 대해 당근을 굳이 우리재원을 들여서 줄 필요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이 핵을 순순히 포기 or 폐기 하는것에 예전보다도 회의적인 시각을 펼치는 전문가들도 있는데 바로 1990년대부터 북한은 애초부터 온갖 제재를 각오하고 핵개발을 했다는 점을 예시로 든다. 실제로 핵개발을 하면서 미국을 위시로한 세계로부터 90년대 중반부터 엄청난 제재와 견제에도 끝까지 버텼으며 이후, 햇볕정책으로 유화정책을 펼쳤음에도 뒤로는 핵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즉 강경한 제재와 유화정책 모두 실패했으며, 북한의 핵기술이 이제는 미국까지 타격이 가능해질정도의 정밀한 기술적 발전까지 이루어냈는데 이제와서 그동안 이 핵미사일을 위해 세계로부터 온갖 제재를 받아왔고 본인들의 체제를 지탱해줄 핵 기술을 뚝딱 포기하겠다는것에 다소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허버트 맥매스터는 2021년 3월 2일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가 연 청문회에서 서면 자료를 통해 햇볕정책과 다른 대북정책에 관한 입장을 밝혔다.
"북한 정권이 세계에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여러 외교적 노력은 실패와 실망을 초래했다. 외교적 실패 배경으로 김일성 일가 3대 세습 과정에서 두 가지 잘못된 가정이 작용했다.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북한 개방이 정권의 본질을 바꿀 것이라는 허망한 희망, 김씨 일가 정권이 지속 불가능하며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고 배치하기 전에 무너질 것이라는 믿음. 이 두 가지에 근거한 대북정책은 실패했다." 기사

4. 여담

  • 북한 고난의 행군과 관련해 보수 성향의 고위급 탈북민 강명도는 "일부에서는 다 죽어가는 김정일 정권을 햇볕정책으로 퍼주기 식으로 지원해줌으로써 살려놨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도와주지 않았으면 그 북한 정권이 죽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거다. 더 고통받고 힘들었겠지만, 독재정권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독재정권을 타도할만한 세력이 있었으면 황장엽 선생이 한국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에 대해 주성하 북한 전문 기자 또한 "대량 아사가 초래돼도 간부들은 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제일 먼저 구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장애인이 되고, 김정은 체제를 옹호하던 기득권층들만 살아남는 통일이라면, 난 그런 통일은 절대 반대다. 제재는 강력해야 하겠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구분하는 이성은 갖고 있어야 한다. 인질범 잡겠다고 인질들부터 죽여선 안 된다. 핵에 집착하는 김정은 한 명을 어찌 못해 대신 수십만∼수백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다면, 어떤 명분으로도 이를 정당화할 순 없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보였다.#
  • 이명박 정부 - 박근혜 정부 하에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보다 더 많은 대북지원이 이루어졌다는 일각의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시절 대북정책은 매우 철저하게 상호주의 원칙을 추구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는 08년 전반기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북한이 협조를 잘 안 한다"는 이유를 들어, (참여정부 말기에 수해물자 지원차원에서) "기존 약속된 옥수수 50,000톤 지원"까지 번복했을 정도. <정세현의 정세 토크> 34 ~ 35쪽 참조.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에서 우리 기업체들을 철수시켰기에 남북 교류 액수 또는 지원 액수가 늘어날만한 여지가 없었다.

5. 출처

  •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9권: 우리나라편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03.

[1] 중앙일보는 홍석현 회장의 영향으로 대북 보도에 관해 이념 < 장기적인 관점을 지향했다.[2] 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3] 정의당, 진보당, 기타 원외 진보 정당.[4] 국민의힘.[5] 진보 측에서도 정책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으며, 보수 측에서도 정책에 긍정적인 사람들이 많다. 남원정으로 일컫어지는 보수계 소장파가 보수진영에서 이 정책에 호의적인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정책을 설계한 임동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수진영에서 영입한 인물이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도 개성공단의 성과와 이북의 만행을 들어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인물들이 있다.[6] 50 ~ 80년대 국민 총생산(GNP) 적용할 때부터 "GNP 6% 이상을 국방비로 쓰는 나라는, 살림 거덜나는 건 시간 문제"라는 격언이 있었다. 그러나, 공산권 국가들은 GNP의 10% 내외를 국방비로 지출하는 관행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오늘날 북한의 근황은 어떤지 궁금해하는 것이다.[7] 12분 11초부터[8] 판매 대금은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국방 예산으로 반영된다.[9] 예를 들면, 국내 대표적인 경제지인 한국경제신문에서 2018/02/12일 게재한 사설이 있다. 현 남북 관계가 우리 경제,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과 관련하여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글 말미에 실으며, 선 핵포기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한겨레에서 한국의 북미 관계 중재가 현 남북 문제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기사를 올렸다.[10]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관계자들은, 이북 측의 발언 저의를 일단 의심해보는 한편, 이북이 먼저 선 핵포기 또는 전향적인 자세(예, 천안함 사과)를 보이는 진정성을 표할 것을 강조한다.[11] 노태우 정부 이후 등장한 모든 정부의 대북정책에 기준 척도로서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심지어는 6.15 남북공동선언 = 남북기본합의서 + 추가 항목 약간(공통점 찾기 노력) + 양 정상의 서명이라 보는 학자도 있을 정도.[12] 이 때도 임동원이 실무를 맡았다. 야당 시절부터 이 남북기본합의서를 매우 호평했던 김대중이 임동원을 공들여 모셔와, 자신이 최성 등 소장 학자들과 같이 연구한 남북문제 저술활동 사무 전반을 맡겼고, 새 정부 출범 후에는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으로 중용하며 대북 정책 전반을 맡긴 것.[13] Anything But Clinton(클린턴 것만 아니면 돼). 전임자인 클린턴 정부의 정책은 일단 뒤집고 다른 정책을 폈다는 말. 클린턴 대통령은 대북한 유화 정책을 편 끝에 "내게 1년이라는 시간이 더 허용되었으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미북의 관계가 호전된 상태였으나, 부시 정부 출범 후 미국은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분류, 자금줄을 묶는 역대급 대북 제재(BDA, 방코델타아시아) 카드를 꺼냈다. 게다가 ABC 정책이 가동된 시기는 북한이 "110억 달러 대일 청구권"을 행사하는 북한-일본 수교에 근접한 상황이었는데, 미 부시 정부에서 판을 뒤집은 것.[14] 이후 북한의 핵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보수 성향 정부와 미국은 비핵화를 남북 관계의 전제 조건으로 선 비핵화 후 대화를 원칙으로 대북 정책을 수립한다. 여기에 정세현처럼 이 방침을 두고 테이블에 앉아 풀어나가야 할 문제를 대화 조건으로 내거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15] 비현실적인 조건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보수 성향 정부와 미국이 대화의 선결 조건으로 비핵화를 내세우는 이유는 핵 문제를 대화로 끌어들일 경우, 우리 관계자들이 철저하게 사전 연구를 하지 않으면 대화의 주도권이 북한에 넘어갈 우려가 있고, 이렇게 되면 북한이 대화를 통해 핵 포기 보다 핵 보유를 인정받으려고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핵화 혹은 동결을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 불가침조약 등 안보거래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일단 북한은 핵을 가진 상태에서 대화를 시작할 경우 98년보다 유리한 협상 카드를 손에 쥔 채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2018년 2월, 고강도 압박과 제재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낸 후 대화를 시도하려는 입장을 밝혔는데,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때 방남한 북한 김여정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에 공식 초청하는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함에 따라, 북한-미국과의 관계를 중재하는 우리나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다만 핵 포기가 정상회담 자체에 전제되어야 한다는 미국 측 주장도 있어 아직은 결과가 불투명하다.[16] 1974년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잠시 해빙분위기가 일었고,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6.15 공동선언의 바탕을 마련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서명된 역사가 있다. 다만, 7.4 남북 공동 성명은 해당 문서에서 보듯이, 비록 강경 일관 분위기의 얼음을 깼다는 중요한 의의가 있지만, 남북 서로가 정권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이용한 측면도 있었다. 동시기에 우리나라는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유신헌법이 추진되고, 북한은 북한식 사회주의라는 명분으로 주체사상이 들어왔기 때문.[17] 보수 일각에서도 처음으로 시도된 대북유화정책이라는 점 때문에 김대중 시기의 햇볕정책은 마냥 부정적으로만 평가하지는 않는다.[18] 물건을 팔고 사는 사이에서 흥정을 붙이는 일[19] 전임인 빌 클린턴의 정책이라면 무조건 거부하고 뒤집어 정책으로까지 나아간데서 유래된 말. 때문에 북미 유화분위기 및 수교 얘기까지 수면에서 떠오르던 클린턴 정부 시기와 미 대북정책의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20] 남북관계를 다시 강경기조로 되돌린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민간 교류액수가 16억7942만 달러를 기록할 정도였다. 심지어 개성공단을 폐쇄조처 결정을 내린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2억 5,494만 달러를 기록할 정도.#[21]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 북핵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1996년 대북 경수로 지원금 32억달러를 우리 정부가 부담하게 된 것이다.[22] 노태우 정부. 평화통일을 지향한다는 원칙을 명시해놓았다.[23] 김대중 정부[24] 노무현 정부. 남북기본합의서를 계승한 6.15 공동선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기 시작했다는 의의가 있다.[25] 다만, 이 사업권이 여전히 유효한지 여부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으며, 실제 시행능력은(현대 로템, 건설) 현대자동차에 있기 때문에, 현대 그룹 단독으로는 일을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26] 밑에서 39번째 문단부터[27] 종전선언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건 이 평화협정이라고 한다. 다만 중국측은 2018년 6월 5일, 종전선언부터 자국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의사를 밝히고 있는 현실[28] 루마니아, 에티오피아도 세부적으로 보면 북한보다는 훨씬 나았고, 알바니아 정도가 북한과 동급이었다. 애초에 전국민을 정치범수용소에 가둔 수준의 국가였던 민주 캄푸치아는 논외.[29] 다만 많이 알려진 김대중의 "북한은 핵을 만들 능력도, 의지도 없다"라는 발언은 가짜 뉴스다. 정확히는 김영남이 1991년 6월 21일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 와전된 것. #[30] 일부 진보는 보수 노선을 탄 이명박 정부의 출범으로 인한 국면 전환 때문에 그런 거라며 이명박을 비롯한 보수정권 탓을 하지만, 진보파인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도중에도 도발과 핵개발은 진행 중이었다. 무엇보다 첫 핵실험이 노무현 정권 때 실행되었다. 단순히 보수정권 탓으로 매도하는 건 남쪽의 신뢰를 먼저 배신한 북한 쪽의 행적을 무시하는 것이다.[31] 거기에 더해 해당 지역 당 간부들과의 뇌물 거래, 그리고 그에 따른 묵인.[32] 이와 유사하게 탈북자 출신 동아일보 기자 주성하(철저한 중립 성향이다)도 (비록 개성공단에 관한 언급이긴 하나) 김정은이 가진 수많은 자금원 중에 딱 개성공단의 달러가 핵 개발에 쓰였다고 단정할 증거는 제시하기 어렵다면서 "당장 나부터도 통장에 월급 상여금 원고료 등이 들어오는데, 저녁에 카드로 긁은 술값이 월급으로 낸 것인지, 원고료로 낸 것인지 증거를 대라면 할 말이 없다."고 명료하게 언급했다.(덤으로 주성하는 개성공단 자금의 거의 100%가 김정은의 주머니에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 # 참고로 주성하는 탈북민인데 정치적으로는 중도 성향의 인물이다.[33] 실제로 외부에서 좋은 의도로 성심성의껏 준 인도적 지원이 부패한 정권에 의해 지도층의 사치와 부정부패, 권력 강화 등에 악용되는 일은 세계적으로 매우 흔한 일이다. 일례로 하마스도 인도적 지원금을 악용해 부동산 기업을 설립한 바가 있으며, # 더 오래 전 중앙아프리카 제국보카사 1세프랑스의 개발 목적 원조금을 탈탈 털어 초호화 대관식에 써먹었다. 또 고난의 행군 시기(햇볕정책 시행 이다)에도 해외에서 인도적 목적으로 성심성의껏 원조해준 식량들이 군량미 명목으로 보관되고는 주민들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않아 기근 피해를 가중시켰다. 북한'이기 때문에' 인도적 지원을 악용한 것은 아니다.[34] 은행장과 청원경찰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35] 59페이지. pdf 파일은 64페이지.[36] 30페이지, pdf 기준 4페이지.[37] 힐의 보고가 바로 국무장관 라이스에게 올라가는 상황[38] https://www.yna.co.kr/view/AKR20170427160900014[39] 파일:역대정권 대북송금액(김영삼~이명박).jpg[40] 이 자료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보다 mb정부, 박근혜 정부가 더 많은 대북지원을 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지만, 그래프 자체가 조작 왜곡된 가짜자료다. 이 자료의 그래프는 대북지원 내역을 비교함에 있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경우 '현금송금액'만을, mb정부의 경우는 '현금송금액에 현물지원액을 더한' 금액으로 비교해놓았다. 통일부에서도 해당 자료가 정체불명의 허위자료이며, 역대 정부의 대북송금액은 '참여정부' 시기가 가장 많았다고 밝힌 바 있다[41] 통일부 공식 통계는 참여정부에서의 현물, 현금 지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나온다.[42]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로 대변되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관여(포용), 즉 유화론에 가까웠다. 이러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두고 mb정부에서 일한 어느 고위공직자는 햇볕정책의 아류작이라 평했다.[43] 심지어 이 때는 한나라당의 주도로 이루어진 대북송금 특검 결과 정부 예산 1억불 + 민간 투자기금 3억 5,000만불로 약 5,000억원 내외의 액수가 적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불법으로 북한으로 송금되었음이 최종 확인되었다.[44] 북한 경수로 지원금을 미국과 우리나라가 공동 부담하는 방식의 지원안이 결정. 한국은 공사비의 70%인 32억 2,000만 달러를 담당.# 이 과정에서 북한이 의도적으로 우리나라를 협상에서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이 다음 정권인 국민의 정부에서 일한 임동원, 정세현 같은 관료들은 (우리나라의) 대북 문제 주도권(initiative) 행사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특히 정세현 같은 경우는 자신의 책 지면 곳곳에 주도권 문제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을 정도.[45] 당시에는 시장직에서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상태이다.[46] 단, 이는 북한의 비협조와 물리적 도발에 기인한 것으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자체는 대북 유화론과 궤를 같이한다. 물론 북한이 이에 호응하지 않고 도발을 거듭함으로써, 기존 대북 정책을 폐기하고 강경책으로 선회할 명분은 충분했다.[47] ‘전략적 인내’란 북핵이나 미사일 문제 등에서 북한이 먼저 변화(비핵화 등)를 선택하지 않는 한 미국이 먼저 협상에 나서지 않는다는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원칙이다.[48] 참고로 중앙일보 사주 홍석현은 햇볕정책에 긍정적인 편이다.[49] 위에서 12번째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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