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order-left: 10px solid #004c97; border-right: 10px solid #004c97" {{{#!wiki style="margin: 0 -2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color=#004c97><colbgcolor=#f5f5f5,#2d2f34> 구성 | 인사 · 통일주체국민회의 |
여당 | 민주정의당 | |
정책 및 방향 | 3S 정책 · 2기 지하철 계획 · 언론통폐합 · 삼청교육대 · 녹화사업 · 서울 올림픽 유치 | |
평가 |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 |
타임라인 | ||
1979년 | 12.12 군사반란 · 서울의 봄 | |
1980년 | 서울의 봄 · 사북사건 · 5.17 내란 · 5.18 민주화운동 ·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 동명목재 공중분해 사건 · 미스유니버스대회 폭파음모사건 · 사회정화운동 실시 · 공직자 숙정계획 · 원풍모방 노조사수투쟁 · 노동계 정화조치 · 계엄포고 제13호(삼청교육대) · 방송자율정화방안 발표 · 중화학공업 1차 투자조정 조치 · 만화정화방안 발표 · 중화학공업 2차 투자조정 조치 · 10.27 법난 ·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 · 언론통폐합 ·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 ·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부림 사건 · 서울 지하철 2호선 개통 · 대청댐 준공 | |
1981년 | 경주 당구장 여주인 피살사건 · 전국민주학생연맹 결성 · 자동차공업 통합조치 · 한수산 <욕망의 거리> 필화 사건 · 아침방송 시간대 부활 · 국풍81 개최 · 학림 사건 · 아람회 사건 · 윤경화 보살 피살사건 · 전민노련/전민학련 사건 · 교정시설경비교도대 창설 · 해외여행 자유화 첫 실시 · 부마고속도로 개통 · 학사장교 도입 · 학력고사 시행 · 야간자율학습 시행 · 대구/인천 직할시 승격, 부림사건 · 무림파천황 사건 · 박상은 여대생 피살사건 · 서울올림픽 개최 확정 · 금강회 사건 ·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 확정 · 대학생불교연합회 노동야학 사건 | |
1982년 | 교복자율화 조치· 야간통행금지 해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발표 · 한국콘트롤데이타 노동쟁의 · 제주 C-123 추락사고 ·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한국프로야구 개막 · 의령 총기난사 사건 ·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 제1차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 정부 제2청사 개청 · 녹화사업 · 오송회 사건 | |
1983년 | 함주명 간첩조작 사건 · 북한 공군 이웅평 귀순 · 천하장사 씨름대회 개막 ·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 프로축구 개막 ·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 · 김영삼 보름달 사건 · 명성그룹 사건 · 야학연합회 사건 · 영동개발진흥 사건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 농구대잔치 개막 · 삼성전자 64K D램 개발 · 학원자율화 조치 | |
1984년 | 부산 대아호텔 화재사고 ·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 개막 · 정치활동 규제자 2차 해금 · 청계피복 노조 합법화 투쟁 ·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결성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 대우어패럴 노조 탄압 · 정래혁 투서 사건 ·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 ·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결성 · 목동주민 철거 반대투쟁 · 전두환 방일 반대투쟁 · 1984년 한강 대홍수 · 함평 무안 농민대회 · 청량리경찰서 여대생 성추행 사건 · 전두환 대통령 방일 ·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 서울올림픽주경기장 개장 · 민주화추진위원회 결성 · 박영두 의문사 사건 · 민주통일국민회의 결성 · 망원동 수재 사건 · 학생의 날 부활 ·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농성 · 전국학생총연맹 결성 · 판문점 총격사건 · 박종만 노동자 분신 ·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창립 ·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결성 | |
1985년 |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 김대중 귀국 · 국제그룹 해체 사건 · 고려대 김준엽 총장 사퇴파동 · 중국 해군 어뢰정 망명사건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출범 ·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 · 민중교육지 사건 ·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 <말>지 창간 · 구로동맹파업 · 삼민투위 사건 · '힘'전 탄압 사태 · 대구교도소 양심수 집단구타 사건 · 학원안정법 파동 · 홍기일 노동자 분신 · 서울노동운동연합 결성 ·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 63빌딩 개장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지하철 3호선 개통 · 서울 지하철 4호선 개통 ·부산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충주댐 준공 · 우종원 의문사 사건 ·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점거 농성 ·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 농성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결성 | |
1986년 | KBS 시청료 거부 운동 · 개헌 서명운동 개시 · 서울대 졸업식 집단퇴장 사건 · 박영진 노동자 분신 ·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 · 구국학생연맹 사건 · 전방입소 거부투쟁 ·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 · 인천 5.3 운동 · 서노련 사건 · <교육민주화 선언> 발표 ·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 신호수 의문사 사건 ·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결성 · 김성수 의문사 사건 ·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피습사건 ·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결성 · 보도지침 폭로 사건 · 한강종합개발사업 완료 ·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 화성 연쇄살인 사건 ·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 광주 직할시 승격 · 서울대 대자보 사건 · 유성환 국시론 파동 · 전국노동자연맹 추진위원회(이하 전노추) 사건 · 마르크스 레닌주의당(이하 ML당) 결성기도 사건 · 10.28 건국대 항쟁 · 금강산댐 사건 및 평화의 댐 모금 운동 · 반제동맹당(이하 AILG당) 사건 및 민통련 사무실 폐쇄 ·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 서울개헌대회 봉쇄 · 이민우 구상 · 대한민국 사상 첫 무역수지 흑자 | |
1987년 |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 안산노동자해방투쟁위원회 사건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 사건 · 제헌의회그룹 사건 · 대전 성지원 사건 · 김만철 일가족 귀순 · 한국민중사 사건 · 한국여성단체연합 결성 · 평화의 댐 착공 ·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 서울 택시기사 연대파업 · 4.13 호헌조치 ·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 · 서울남부지역 노동자연맹 사건 · 서대협 결성 · 서머타임제 실시 · 광양종합제철소 준공 · 공기업 민영화방안 확정 · 강우확률예보제 실시 ·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 · 6월 민주항쟁 ·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 6.29 선언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 문화예술 자율화 대책 · 금지곡 186곡 해금 · 영화 시나리오 사전심의 폐지 · 출판활성화조치 실시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 · 독립기념관 개관 ·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 장의균 간첩조작 사건 · 한국여성민우회 결성 · 민족문학작가회의 출범 · 전교협 결성 · 신민주공화당 창당 · 평화민주당 창당 · 언론기본법 폐지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 KBS 별관 점거농성 사건 · 제13대 대통령 선거 · 중부고속도로 개통 · 구로구청 선거부정 항의 점거농성 사건 | |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전두환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전두환 참고 | }}}}}}}}}}}}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87年 勞動者 大鬪爭 | |
노동자 대투쟁을 위해 모인 노동자들 |
[clearfix]
1. 개요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성행한 민주화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운동. 이전에 노동운동의 주를 이루었던 경공업 여성노동자[1]에서 중공업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번진 일대 사건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 대표위원이 6.29 선언을 발표하고 직선제 개헌을 약속함으로써 막을 내렸으나 7월부터는 노동자들이 민주노조건설,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격렬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로 노동조합과 조합원의 수가 크게 증가했고 민주노조 결성, 어용노조의 민주화, 대폭적인 임금 인상 등의 성과를 이뤄냈다.2. 전개
6월 항쟁의 승리와 6.29 선언으로 사회 전반에 민주화의 공간이 확대되자 가장 먼저 진출을 시도한 것은 노동자들이었는데 7월 5일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엔진(주)[2] 울산공장 노동자들이 비밀리에 울산 옥교동의 한 디스코텍에서 권용목 노동자(1957~2009)를 위원장으로 앉힌 노동조합 결성대회를 치른 게 시발점이었다. 그 열기는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현대종합목재(현 현대리바트) 등의 현대그룹 계열사 전체로 퍼져나갔다. 요원의 불길처럼 삽시간에 울산 전체로, 그리고 전국으로 번져갔다. 그 와중에 일어난 7월 16일 현대미포조선의 노조결성 서류 탈취사건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기름을 부었다.삼성의 이병철처럼 현대의 왕회장 정주영 역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노조는 허락될 수 없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러면 당신 눈에 흙을 넣어주겠다."면서 노조 결성에 나섰다. 그런 한국 최대 재벌 현대도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거스를 순 없었다. 그 싸움은 8월 17일에 현대그룹 계열 6개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벌인 연합시위로 발전했다. 중장비를 앞세운 노동자들의 시위에 경찰은 아예 최루탄을 쏘는 것을 포기했다. 경찰이 물러서면서 이날 시위는 큰 유혈사태 없이 끝났으나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날의 시위는 노동자 대투쟁의 절정으로 꼽혔다.
이때의 노동자 투쟁은 6.29 선언 이후부터 8월 초순까지는 비교적 원만하게 시작되어 8월 중순에는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8월 28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의 장례식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을 시작으로 정부의 대응이 강경 일변도로 변하여 9월 3일에 임금협상이 진행 중이던 울산 현대중공업과 9월 4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 대해 각각 강제진압을 감행함으로써 그 기세가 꺾여 다시 원만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아직 식은 게 아니었다. 다만 점거농성과 파업 등 과격한 투쟁형태가 줄어들 뿐이었지 노조 건설은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로써 노동자들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통한 연대조직의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고 이는 1988년에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 등의 기업/업종/지역별 협의체로, 1990년에는 전국구 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로 이어졌다.
이 두 달 사이의 투쟁 동안 발생한 노동쟁의는 1987년에 일어난 노동쟁의 3,749건 중 총 3,341건에 달해 하루 평균 44건을 기록했으며 1975-1986년까지 발생한 총 노사분규 건수(1979건)의 1.8배를 넘었다. 또 이런 폭발적 노동자 투쟁은 '민주노조'라는 조직적인 성과로 이루어져 1987년 6월 30일 당시 2,449개 노조와 90만 6천여 명을 가졌던 한국노총은 12월 말에 각각 3,532개와 117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1988년에도 지속되어 당해 6월 30일엔 단위노조 5만 62개에 조합원 수 151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1987년 6월 말과 비교해 각각 106%, 66%라는 경이적 성장을 나타냈다.[3]
이후 이러한 노조 설립 운동은 1988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설립과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설립,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후일 이석규의 변호를 맡다가 제3자개입 위반으로 주선회 검사에 의해 구속된 법무법인 부산 소속 변호사였던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설립의 주역이었던 문성현을 비롯한 당시 노동자들을 변호하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설립을 위해 찾아온 최동원에게 법률 자문을 해 주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고문 변호사로 활동했던 문재인 변호사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다. 문재인의 운명 38페이지에 그는 '나중에 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자 대투쟁 때 부산을 둘러싸고 있는 울산, 창원, 거제는 한국노동운동의 중심이 됐다. 실정법상으로는 모조리 불법파업이었으며, 폭력적이기도 했던 대형 파업사건들. 그 사건들 거의 대부분, 어쩌면 전부를 우리가 맡아 변론했다. 이 땅의 노동운동이 뜨겁게 분출하던 그 역사적 현장에 우리도 함께 한 것은 두고두고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
3. 언론과 중산층의 반응
6월 항쟁과 6.29 선언까지만 해도 기회주의적으로나마 '반군부', '반권위주의'의 목소리를 내던 언론들이 노동자 대투쟁 때부터 변신하여 기존 체제 보호에 힘쓰는 보수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당시 언론들은 <우리 경제 뿌리채 흔들린다>라는 선동적인 기사 제목을 내건 채 "계급혁명과 노동해방이념 하에", "불법 집단사태", "악성분규를 주도"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노동자 대투쟁을 '좌경폭력'적 운동으로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열을 올렸다. 이들의 은폐 및 왜곡보도는 어용노조 퇴진 요구로 인한 사건을 노조 주도권 싸움으로 격하한다든지, 노동운동을 분열 및 탄압하기 위해 관리직 등으로 구성된 구사대의 폭력 등을 미화하고 노동운동의 원인을 왜곡하거나 축소/은폐하고 경찰 및 구사대의 폭력행위를 전혀 보도하지 않는 식으로 나타났다.
또 야당 역시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서도 다른 자세를 취했는데 김영삼이 이끌던 통일민주당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보다 노동자들의 자제를 촉구했고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에게 분규 해결을 맡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중산층 역시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서 거리를 두었는데 임영일 교수는 그들이 6월 항쟁에서 얻은 성과에 대한 훼손을 우려해 거리를 두었다고 해석했다. 게다가 6.29 선언이 이루어진 때는 3저호황 시기였다.[4]
이러한 반응 때문에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과 달리 바로 눈에 보이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했고 현재까지도 6월 항쟁에 비하면 대단히 인지도가 낮다. 이처럼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주체를 분리해서 보는 경향은 훗날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4. 출처
- <대한민국 50년사> 2권. 임영태 저. p187~188.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권. 강준만 저. p183~185.
5. 보충 자료
6. 둘러보기
A: 산업재해 / B: 직장 내 괴롭힘 / G: 갑질 사건 / L: 노동운동 / X: 노동착취 / Na:국가조직 연루 및 개입 / ?: 사건 경위 불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