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8:30:26

구로구청 선거부정 항의 점거농성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사건
2.1. 12월 16일2.2. 12월 17일2.3. 12월 18일2.4. 이후

1. 개요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발생한 점거농성 사건.

2. 사건

2.1. 12월 16일

1987년 12월 16일 구로구 을 선거구[1]에서 여러 명의 선관위원들이 아직 투표시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당일 오전 11시 20분 경) 선거 투표함을 소형 트럭 화물칸에 옮겨 싣는 모습이 한 시민의 눈에 포착되었다. 선관위원들은 투표함을 싣고, 빵과 과일상자로 투표함을 은닉하였으나 이 과정이 한 중년 여성에게 발각되었다. 이 모습을 본 중년 여성은 선관위원들의 행동을 주변에 소리쳤고 주변 사람들은 상황의 진위를 의심해 단체로 트럭에 몰려들어 투표함의 존재여부를 확인했다. 봉인되어 있지 않은 투표함은 빵과 과일상자들 사이에 숨겨져 있었고 부정선거를 의심한 시민들은 현장에서 투표함을 몸으로 둘러싸고 부정선거 사실을 소리치면서 소란을 일으켰다.

그렇게 관계자들과의 실랑이가 발생하자 분노한 시민들은 오후 1시 30분 경 구로구청 선관위 사무실로 쳐들어갔고 시민들은 사무실에서 투표함 1개, 붓 뚜껑 60개, 새 인주 70개, 정당대리인 도장, 백지투표용지 1,560매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인주가 방금 사용한 것처럼 선명하고 말라 있지 않아 시민들은 부정선거를 강력하게 의심했고 투표함을 지키자는 항의 농성을 시작했다.

선거부정을 방지하고 공정한 선거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해 11월 말에 시민들이 공정선거 감시단이라는 시민단체를 조직했는데 이 사건은 공정선거 감시단에 제보되었다. 제보를 받은 공정선거 감시단 회원들이 구로구청으로 출동했다. 감시단 회원들은 구로구청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구로구청 측은 선거함을 이송한다는 발언을 되풀이하였다. 결국 감시단이 임시 지도부가 되어 구로구청 항의 점거농성을 시작하였다.

부정선거 투표함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 곳곳에서 시민들이 몰려들어와 항의 농성을 시작했고 선관위원장은 18시 30분 경 투표함이 불법임을 시인했으나 바로 30분 뒤 중앙선관위에서 평화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함을 탈취했다는 자극적인 성명을 공식 발표했고 이에 분노한 야당 지지자들이 항의 농성에 참가해 농성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급하게 군경 3,000여 명이 조직되어 구로구청을 포위하고 투표함 탈환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시민들의 세가 불어 탈환에 실패했다.

2.2. 12월 17일

서울 시내 곳곳의 시민들이 구로구청으로 몰려들었고 사람들은 투표함 주위를 둘러싸 투표함을 지켰으며 그 앞에서는 선거부정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 사건이 매스컴을 타게 되면서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당선자 공고를 낼 수 없게 되었고 사건이 끝나기 전까지 노태우의 당선 발표가 유예되었다.

17일 12시 40분 시위대는 선거함을 옮기던 선관위원을 붙잡아 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일 17시 30분 경 허기수란 사람이 부정선거에 항의해 가리봉시장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하였고 이 소식이 알려진 후 더 많은 시민들이 구로구청으로 모여들어 농성인원은 6,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7시 공정선거 감시단은 선거무효화투쟁위원회로 전환할 것을 결정한 뒤 오후 9시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18일 오전 시청 앞 광장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구로구청까지의 행진을 계획했다.

2.3. 12월 18일

18일 자정 시위대 측에 염보현 서울시장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진압을 개시하겠다는 경고성 전화였다.

새벽 6시 군경은 5,000명 가량의 백골단을 투입하고 농성 시위자들을 상대로 최루탄 발포를 개시하였으며 구로구청 옆에 있던 구로경찰서 옥상에서도 최루탄 발포가 이루어졌다. 백골단은 구로구청 건물 안으로 진입했고 40분 만에 옥상을 제외한 건물 대부분 진압에 성공했으며 옥상 진압을 위해 7시 헬기가 투입되었다. 결국 시위대는 진압당해 1,034명이 구속됐고 건물 안에서 농성하던 208명이 연행되었다. 서울대생 양원태가 백골단을 피하려 5층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가 하반신 불구가 되었으며 시민 1명이 백골단에게 잡혀 창문 밖으로 던저져 크게 다쳤다. 농성 인원 17명이 중상을 입었다.

2.4. 이후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산발적으로 20일까지 지속되었다.

해당 투표함에 들어간 투표용지는 전부 무효 처리되었고 해당 투표함은 진압 이후 선관위로 넘어가 미개봉 상태로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투표함을 개봉하자는 한국정치학회의 요청을 계속 묵인하다가 2016년 7월 21일 해당 투표함을 개봉하기로 결정했다. 투표함에는 노태우 3,133표, 김대중 575표, 김영삼 404표, 김종필 130표가 들어 있었다. 선관위 측은 투표용지 수가 사전 파악된 숫자와 일치해 부정투표함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당시 구로구 선거 결과였던 김대중 34.2%, 노태우 28.6%, 김영삼 26.4%, 김종필 10.8%의 결과와 너무나 상이한 투표지 비율로 인해 다시금 부정선거 논란이 일었으나 선관위와 국과수의 조사 결과 선관위는 "투표 자체가 조작되거나 위조되지는 않았지만 13대 대선의 군 부재자투표가 온전히 민주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원택 한국정치학회장은 개함 후 "민주화 30년을 맞아서 과거의 의혹과 문제를 털고, 미래를 향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하게 된 것"이라며 "당시 우리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면이 있었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이 약했던 상황이었다. 의혹 제기가 사회적 갈등과 균열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는 게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투표함에서 노태우 후보의 표가 평균보다 훨씬 많이 나왔다. 군 관련 투표가 비민주적이거나 투명하지 않았다고 미뤄볼 수는 있다"고 했다.

당시 구속된 시민들 중 일부는 2001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다만 이 투표함이 부정투표의 결과물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한 피해를 인정받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1] 현재의 구로구 가리봉동, 금천구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