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21:53:55

부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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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피해자
3.1. 1981년 9월 7일 발표 1차 구속자 8명3.2. 1981년 10월 15일 발표 2차 구속자 8명3.3. 1982년 4월 이후 3차 구속자 3명3.4. 대학 시위 중 구속자 4명3.5. 피해자 진술
4. 영화화5. 변호사 노무현의 역할6. 관련 서적 목록7. 왜 일어난 사건인가?8. 참고/관련 문헌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1. 개요

釜林事件

제5공화국 시절인 1981년 9월부산직할시에서 일어난 군사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으로 꼽히는 사건. 부산의 학림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부림사건(釜林事件)으로 명명되었다.

2. 특징

용공조작이라는 면에서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 집권 초기 당시 통치 기반을 다질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본다.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에 공안 당국이 당시 부산 지역 양서협동조합에서 사회과학 독서 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지검의 공안 책임자로 있었던 검사 최병국이 지휘했다. 매카시즘적인 발언으로 논란이 된 고영주도 당시 담당 검사였다.

한편 당시 변호사 김광일과 함께 피고인 변론을 맡은 노무현은 이전까지는 부산에서 돈 잘 버는 변호사 정도로 유명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영주는 이후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선 대통령 김영삼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전두환 사형을, 노태우에게 징역형을 구형하였다.

사건 관계자들은 "영장 없이 체포·구속되어 대공분실에서 짧게는 20일부터 길게는 장장 63일 동안 몽둥이 등에 의한 구타와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1] 등 살인적인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조작됐다. 독서 모임이 반국가단체의 찬양 활동으로 조작됐고 술집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이나 친구 개업식에 선물을 들고 찾아간 것도, 망년회를 한 것도 모두 현저히 사회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로 규정되어 처벌됐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정권의 안보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어 노무현, 김광일[2] 등이 무료 변론에 나섰다. 이 사건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전두환 정권 초기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조작된 사건'이란 정치적 면죄부를 받았으나 법률적으로는 한동안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1999년 11월 피해자 11명이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했으나 2006년 1월 기각되었다.

2009년 8월 부산지법은 피해자들 중 7명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는 면소 판결을,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나머지 4명의 재심을 기각했다. 2014년 2월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 검찰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과 계엄법 위반에 대해서는 상고를 포기하였지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건에 대해서는 상고를 검토 중이라고 하였다. # 이는 검찰이 당시 학생들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림사건 당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주체가 당시 대법원이기 때문이다. 부산지법이 아니라 대법원 차원에서 정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2014년 9월 대법원은 부림사건 피해자 5명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

2014년 12월, 부림사건의 경우와 같은 경우를 당한 사건에 대해 서울북부지법 형사5 단독 판사 변민선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 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1982년에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은 김 모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러시아 혁명사', '사회사상사' 등을 읽었다는 이유로 고문당하였으며 "북한에 동조하는 이적 활동을 했다"고 강압에 의한 자백을 하였다. 판사는 판결과 동시에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대에 사법부가 가혹행위를 눈감고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피고인에게 사죄하였다. #

이에 앞선 2011년 4월 피해자 14명은 고문경관 3명 중 전 부산지방경찰청 대공분실장 이XX 등 생존자 2명을 부산지방검찰청에 불법감금 혐의로 고소했으나#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로 이를 기각했다.

3. 피해자

3.1. 1981년 9월 7일 발표 1차 구속자 8명

7월 4일 ~ 8월 14일에 걸쳐 불법연행 후 고문.
  • 설동일 - 당시 26세, 서울대 농대, 언양농협 근무. 이후 부산민주항쟁기념관장, 현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근무
  • 송병곤 - 당시 24세, 부산대 법대 졸, 공장 근무. 이후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 재직,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권양숙의 고종사촌 동생과 결혼하여 노무현이 주례를 서 줌
  • 노재열 - 당시 24세, 부산대 공대 4년 휴학. 1979년 부마항쟁 주도 이후 민주노총 간부 역임
  • 고호석 - 당시 26세, 부산대 문리대 졸, 당시 부산 대동고 영어 교사. 부산 거성중학교[3] 영어교사 재직, 전교조 부산지부장 및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초대 상임이사 역임, 2019년 11월 25일 골육종으로 사망. 향년 64세.
  • 이상록 - 당시 27세, 부산대 법대 졸, 선반공. 이후 8년간의 정신병 투병 후 2006년 사고로 사망. 향년 52세.
  • 송세경 - 당시 30세, 서울대 농대 졸, 회사원. 성교육 강사 구성애[4]의 남편. 이후 김광일의 사무장으로 일하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총무이사 역임
  • 김희욱 - 당시 32세, 부산 대연여중 교사. 부산환경연합 대표 재직 후 귀농
  • 이상경 - 부산대 문리대 1년 퇴학. 현재 출판업 종사

3.2. 1981년 10월 15일 발표 2차 구속자 8명

9월 11일 ~ 30일에 걸쳐 불법 연행 후 고문.
  • 장상훈 - 당시 24세, 부산대 약대 졸. 이후 노무현이 39세의 나이로 장상훈의 결혼식에 첫 주례를 섰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공안 검사 출신 한나라당 김기춘과 거제에서 맞붙었으나 패했다. 당시 출마 기사
  • 김재규 - 당시 33세, 부산대 상대 졸, 탁구장 운영. 이후 노무현 국민참여운동본부 부산본부장 및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
  • 이진걸 - 당시 23세, 부산대. 1979년 부산대 내에 '민주선언문'을 뿌려 부마항쟁 주도.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 공동대표 역임
  • 박욱영 - 당시 25세, 부산공전 졸. 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의원
  • 윤연희 - 당시 24세, 부산대 사범대 졸, 교사. 현 부산 장림여자중학교 음악 교사
  • 최준영 - 당시 29세, 서울대 공대 졸, 설비사무사. 현재 무역업 종사
  • 주정민 - 당시 24세, 부산대 법대 졸
  • 전중근 - 당시 25세, 공장 근무

3.3. 1982년 4월 이후 3차 구속자 3명

도피 중 체포.
  • 이호철 - 당시 24세, 부산대 졸. 부마항쟁 주도 이후 배재여행사 경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 설경혜 - 당시 23세, 교사. 1차 구속된 설동일의 동생으로 이후 계속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 정귀순 - 당시 22세, 부산대 졸. 현 '이주민과 함께' 대표로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가로 활동

3.4. 대학 시위 중 구속자 4명


부산지방검찰청 공소장 1981.10.2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속자 석방 요구 청원서, 각종 신문 기사 참조

3.5. 피해자 진술

부산민주운동사에서 밝힌 당시 사건 피해자들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 김 모 - 33, 상업
    부림사건은 20여명이 관련된 부산 지역 최대의 국가보안법 조작 사건으로 영장없이 불법 구금과 고문 등으로 완벽하게 조작된 사건이다. 사건의 수사 책임자가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에서 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총선 연대에 낙천 명단에 포함시켜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 송 모 - 26, 농협 근무
    대공분실에 끌려가 통닭구이, 몽둥이로 맞는 고문을 당했다. 당시 검사 최병국이 대공분실로 찾아와 수사를 지휘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검사가 관련자들에게 3년에서 10년의 중형을 구형한 것으로 보면 사건 조작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당시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면 최소한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 최 모 - 당시 피의자 최 모 부인
    당시 남편이 사건을 끝까지 부인하자 검사 최병국은 “사건을 인정한다는 반성문을 쓰면 당신 남편만 빼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뿌리친 경험이 있다. 최병국이 사건 조작의 책임자다.
  • 고 모 - 26, 교사
    관련자들 중에는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에 가서야 처음 상견례를 한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서로 거의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우리 모두 그들의 각본 속에 끼워 넣어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냈다. 당시 몇 명이 다방에 앉아 얘기 나눈 것까지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으로 몰아붙여 징역 10년에서 3년까지 중형을 구형했다.

4. 영화화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로 2013년 12월에 개봉한 영화 변호인이 있다.[6] 송강호노무현의 변호사 시절에서 모티브를 따 온 송우석 역을 맡아 열연했으며 피해자 박진우 역할을 맡은 임시완 역시 부림사건의 피해자와 똑같은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출신이란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2014년 1월 18일 천만 관객을 달성했다.

영화에서도 에드워드 카가 저술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불온서적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과 실제로 노무현이 말한 비유[7]도 재현했다.

2014년 1월 22일에 TV조선 강적들에서 영화 변호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실제 '부림사건'과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실제의 사건과 비교했을 때 영화가 여러가지 이야기와 깊이가 더해진 것은 사실이고 그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허위사실이 더해진 것 등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영화적 연출을 위해 사실과 다르게 각색하거나 드라마틱하게 바꾼 몇 가지 소재를 제시하였다.[8]

5. 변호사 노무현의 역할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의 헌신적인 노력에 깊은 감사의 뜻을 밝혔다. # 고호석은 노무현이 법정에서 격앙되어 판사와 싸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변호했다고 증언[9]하면서 그의 헌신적인 변호 덕분에 33년이 지나 무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1, #2, #3 박욱영은 노무현이 차분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때로는 거칠게 판검사들을 밀어붙였다고 증언하였으며# 최준영은 노무현이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음에도 부림사건 피해자들을 변론하느라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내었다. # 윤연희는 노무현이 자신들의 무료 변론 요청에 흔쾌히 응해 준 것에 감사해하며 재판에서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당당하게 변호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부림사건의 판사 서석구 역시 노무현이 재판에서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이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사회적 주목도를 높였다고 증언하는 등# 부림사건의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노무현의 역할이 컸다고 증언했다.[10]

이런 당시 관련자들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노무현이 부림사건 당시 아무 것도 안 했다느니 하는 극소수의 주장들은 신뢰도가 떨어진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도 변호를 맡았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있는데 문재인은 1982년에 12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였기 때문에 부림사건과 연관이 전혀 없다. 다만 33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2014년 부림사건 재심에서 변호를 맡았다.

6. 관련 서적 목록

군사정권이 당시 피해자를 만들어낸 불온서적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987년 '10.19 출판활성화조치' 이전까지 해당 서적들은 문화공보부의 '판금도서 종용제도'와 출판사 신규 등록 규제, 납본필증 거부 등으로 인해 시중에선 아예 출판이 불가능하여 대학가 앞 '사회과학서점'에서 비합법적으로 몰래 출판해 왔다.

이 책들 중에는 해당 분야에서 고전으로 취급되는 책도 일부 포함되었다.[11]교도소/구치소 등 교정기관에서는 2001년 말까지 법무부 훈령인 <재소자 열독도서 관리준칙>에 따라 '열독불허 도서목록'을 작성/배포해 사회과학서적의 열람을 원천 통제했다.

이외에도 아주 많다.

7. 왜 일어난 사건인가?

박정희 사후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은 집권 과정에서 명분이나 정통성이 전혀 없었다. 박정희 역시 쿠데타로 집권했으나 당시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대한민국은 경제력마저 북한에 뒤졌기 때문에 전쟁의 재발 가능성에 전 국민이 불안에 떨었으며 4.19 혁명 이후 집권한 윤보선, 장면 등의 지리멸렬한 내분은 국민들에게 실망과 불안감을 더 안겨주었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 이후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음에도 자기 마음대로 대통령이 되어 국가를 통치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인식하고 제대로 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진행하였다. 이것이 제5대 대통령 선거로 이 선거에선 정권을 장악한 민주공화당의 금권, 관권 선거 공세가 있긴 했지만 선거 운동을 어쨌든 제대로 했고 자신이 빨갱이라는 윤보선의 공격에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박정희가 호남에서도 높은 지지를 받으면서 14만표차라는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후 역시 여당에 유리한 구도를 유도하긴 했지만 제6대 국회의원 선거도 정상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도 겨우 34% 정도의 지지만 받았지만 야권의 분열로 결국 대승했다. 박정희는 분명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이후 국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출할 기회를 주었고 거기서 승리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쿠데타를 비난하던 야권의 거물들도 당시 기준으로는 부정을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13] 선거와 발언의 기회를 보장하는 박정희가 민의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정치의 과정을 보자면 박정희는 독재자였지만 정치적 감각과 통치술은 대단했다. 거기에 그의 기반인 대한민국 국군은 당시에는 매우 젊고 유능한 인재가 가장 많이 모인 집단으로 아직은 부패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기존 정치인들보다는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14] 좀 더 자세한 당시 상황을 알고자 한다면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하지만 전두환은 집권 배경과 과정이 박정희와 판이하게 달랐다. 전두환의 전임 최규하는 박정희 사후 대통령 유고 관련 규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시작하여 업무를 시작한 지 겨우 40여일에 불과했다. 애초에 최규하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초반에 쿠데타에 대해 정국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고 사과하며 만약 국민이 반대한다면 기꺼이 물러나겠다고 연이어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제안한 박정희와 다르게 전두환은 최규하를 허수아비로 세워 놓고 국민들의 민주화와 유신 헌법 폐기 및 대통령 직접 선거 요구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통해 무력으로 진압하고 다음날 광주에서 학살을 저질렀으며 그해 아무런 법적 정당성도 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구를 이용해 말뿐인 간접선거인 체육관 선거를 통해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유신 헌법으로 종신 독재자가 된 박정희가 사망한 만큼 박정희가 했던 대로 최소한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해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을 짓밟은 것이다.[15]

거기에 박정희 시절 대한민국 육군이 아직 부패하지 않은 젊고 유능한 장교들의 조직이었다면[16] 1980년 전두환이 이끌던 군부는 이미 20년이나 집권하면서 썩을 대로 썩은 기득권 집단에 불과했다.[17] 결국 쿠데타라는 같은 방법으로 집권했어도 박정희는 최소한 절차적인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그 이후에도 국민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고속 경제 성장을 일구어내 정통성을 일부 획득했지만 전두환은 정통성이 없어 직접 선거로는 아무리 공포 분위기를 조장해도 참패할 게 뻔했다. 결국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정치적 불안 상황을 조장하고,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자신의 집권의 정당성을 억지로 긁어내기 위해 강하게 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이 사건 역시 그런 차원에서 조작된 사건이다.

8. 참고/관련 문헌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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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가폭력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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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기구이 통닭처럼 사람을 긴 막대에 묶은 뒤 돌려가며 때리는 고문 수법으로,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수법이다.[2] 부림사건의 재심 변호인이다.[3] 거성중학교는 1990년 8월까지는 대동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의 사립학교였다. 부림사건 이후부터 1990년 8월 사이에 재단에서 거성중학교로 발령한 후 거성중학교가 계열분리된 것으로 추정.[4] 구성애 본인도 본래 노동/농민운동 등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여성 노동자들의 성문제에 대해 접하면서 성교육 활동으로 옮긴 것.[5] 이 사람의 행보를 모아 놓은 영상은 다소 편향적인 주장을 담고 있으므로 해당 부분만 참조하자.[6] 작중에서는 '부독련 사건'으로 나온다.[7] "조지 포먼하고 무하마드 알리가 권투 시합 해가 내가 알리 응원하는데 김일성이도 알리 응원하모 내 국보법 어긴깁니까?"라는 발언. 실제로 노무현은 "미국과 북한이 축구하는데 북한 응원하면 그게 국보법 위반이냐"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8] 영화에서는 노무현이 대부분의 변호를 독자적으로 했지만 실제 사건 당시에는 5명의 공동 변호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미디어물에서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각색과 연출로 작품의 완성도와 극적 몰입도를 높이는 것은 허용되는 기법이다. 또 당시의 폭압적인 정치, 사회에서 인권을 위해 변호를 맡은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노무현이 가장 열성적으로 변론에 임했다"고 증언한 걸로 보아 영화를 마냥 허구로만 볼 수는 없다. 일베저장소를 비롯한 일부 극우 성향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유는 단순한데, 단지 이 사건을 소재로 제작된 영화 변호인노무현을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9] 매우 격렬하게 변호했으며 피해자 가족들이 변호사가 저렇게 싸우듯이 변호해도 되냐고 우려할 정도였다고 한다.[10] 다만 서석구는 2000년대 초반에 극우화되기 전만 해도 리버럴 성향이었다. 이 사건으로 신군부에 밉보여 좌천된 뒤에는 아예 사표를 내고 고향 대구에 변호사사무실을 열어 1990년대 중반까지 대구경북 지역 공안사건 전담 변호사로 활약했다.[11] 그러나 선동과 날조를 해 놓은 게 아닌 이상 다소간의 사상 편향에는 관대한 유럽 학계의 분위기상 어떤 분야의 고전이라는 게 곧 사상적 편중이 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전형적인 권위 호소의 논리 오류다.[12] 실제 역사나 학계에서도 E. H. 카의 스탠스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카는 생전에 친히틀러적 언행을 했다가 나치의 만행이 폭로되자 입장을 바꾸어 영국 내 친소파의 모습을 보였다. 카는 이것 때문에 당시에도 조지 오웰 같은 반소련주의자에게 욕을 먹었다. 즉, 에드워드 카라는 사람의 언행상 불온서적으로 지정하는 게 아주 생뚱맞은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체로 카를 공산주의자로는 보지 않지만 카는 확실히 영국 내 친소주의자였고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도 상당 부분 마르크스적 시각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부림사건의 기록을 보면 검사측이나 변호사측이나 역사 전문가가 아닌 만큼 해당 도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주지 못했는데 현대의 많은 비평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는 공산주의적이지는 않으나 친마르크스적인 시각을 가진 서적으로 받아들여지는만큼 카의 서적이 친소적, 친공산권적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은 것이다. 다만 다소 친마르크스적으로 서술되었다고 해도 그게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수준은 아닌데 그냥 '소련에서 오래 살던 사람이 쓴 책이니 빨갱이 서적이다'라는 근거없는 주장을 펼친 검찰측과 사상적 학문적 자유를 중시하는 영국 당국에 해당 서적이 공산주의 서적이냐고 물어 아니라는 답변을 받은 변호측이나 해당 도서에 대한 제대로 된 학문적 고찰은 결여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부분은 애초에 불온서적 지정 자체가 학문적 검증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질 공방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13] 당시의 부정부패, 금권, 막걸리 선거는 여야 모두의 문제였고(김두한도 부정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 자유당 시절의 선거에서 이런 행위는 더욱 극심했다. 애초에 이승만은 아예 선거를 하지 않으려고 상대를 죽인 인물인데 그에 비하면 박정희는 양반인 셈.[14] 당시는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은 5공 시절보다 훨씬 능력 있는 엘리트들로 가득 채워졌다. 백선엽은 전쟁중에 미8군 사령관에게 군사작전계획을 영어로 브리핑할 정도였으니. 또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독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는 1972년 유신 헌법 제정 이후이며 이전까지는 비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평까지 들을 정도로 교묘한 술책을 사용했을지언정 선거를 제대로 진행하여 국민들로부터 확실하게 정통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15] 이미 경제 성장의 성과가 어느 정도 가시화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1960년대보다 여유로워진 경제로 인해 정치적 민주화에 슬슬 눈을 뜨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전두환 신군부가 민주화 세력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상당히 원시적이면서도 허술하게 대응한 점이 훨씬 컸다. 또 쿠데타에 대한 사과와 쿠데타를 일으킨 근거를 제시함과 동시에 선거를 제안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정통성과 지지를 확보하는 과정을 우선적으로 거친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은 애당초 정통성이 전혀 없었고 정통성을 확보하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한미 미사일 사거리 협정을 통해 미국의 지지를 받아냈을 뿐이었다. 똑같이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얻었지만 전두환의 정치적 감각과 통치력은 박정희에 훨씬 못 미쳤다. 그 결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자리를 유지했고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16] 당시 대한민국은 가혹한 식민통치와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최악의 후진국이었다. 근대적인 산업 기반 따위는 전무한 농촌 국가였기 때문에 유능한 인재들은 관료 아니면 군으로 몰려들었고, 특히 미군이 직접 훈련시킨 육군 장교단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선진 문물을 가장 많이 접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소위 1960~70년대의 개발독재, 공업화를 군부와 (미국 유학파) 관료들이 주도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사회 각 분야에서 선발된 최대 수만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에게 미국 연수의 기회를 제공했는데, 가장 많은 혜택을 본것이 육군 장교들이었다. 전쟁과정에서 드러난 장교들의 수준이 워낙에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어찌하던 이런 단기연수의 일환으로 상당수 장교들이 미국의 선진문물을 체험하고 기본적인 영어회화와 타자, 운전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웃기게 보이지만,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에 이 정도면 상위 1% 엘리트 계층이다. 하지만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한 1980년이 되면 이미 군부가 미국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도 아니고, 군인들이 최상위권 엘리트들도 전혀 아니다. 고도성장과 함께 학계, 교육계, 언론계, 대기업 등 민간사회의 수준은 계속 올라가는데, 군부는 그냥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박정희의 쿠데타에는 별다른 반발이 없었고, 오히려 일부 개혁적인 지식인들조차 '5.16은 4.19의 연장선'이라는 등 지금 시각에서는 정말 황당한 주장까지 해가면서 지지하고 나섰지만, 전두환의 쿠데타에는 격렬한 반발이 터져나온 것이다.[17] 애당초 하나회와 같이 군부에 특정 파벌이 자리잡고 권력 나눠먹기를 하던 시점에서 이미 군부가 타락할 대로 타락한 것이다. 일본군이 왜 미쳐돌아가기 시작했고 어째서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미국에게 선빵을 때리는 무모한 짓을 감행했는지 생각해 보면 이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