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6 00:29:31

삼보증권

파일:대우가족화이트.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0c479c> 매각, 그룹 해체 이전 계열사
종합상사 (주)대우 (상사부문, 건설부문*, 섬유사업부문, 극장사업부문, 물류사업부문*)
전자·정보통신 대우전자 (모니터사업부문*) | 대우전자부품* | 대우통신 (통신사업부문) | 대우캐리어 | 대우정보시스템 | 오리온전기 (오리온디스플레이) | 한국전기초자 | 한국산업전자 | 대우반도체 | 대우ST반도체설계 | 동흥전기 | 한국신용유통 | DCN
금융 대우증권 | 삼보증권 | 다이너스 클럽 코리아 | 대우투자금융 | 대우캐피탈 | 대우창업투자
자동차 대우자동차 (승용차부문, 트럭부문*, 버스부문) | 대우자동차판매 (건설부문*) | 대우정밀공업 | 쌍용자동차 (팬더 웨스트윈즈)
중공업 대우중공업 (기계부문, 조선해양부문, 항공사업부문, 경형자동차사업부문) | 동명중공업 | 한국철도차량 | 대우전장* | 대우파츠닉*
건설 대우엔지니어링 | 대창기업 | 경남기업 | 경남시니어타운 | 광주제2순환도로 | 한일대우시멘트 | 경우정화기술
유통·호텔·서비스 대우백화점 | 대우개발 | 설악개발 | 아도니스 | 동우공영 | 유화개발 | 일산역사
섬유·화학 대우어패럴 | 신성통상 | (주)고려 | 일광화학공업 | 대우실업
스포츠 부산 대우 로얄즈 | 레기아 대우 바르샤바 | 인천 대우 제우스 | 대우증권 남자 탁구단 | 대우중공업 여자 테니스단
싱크탱크 대우경제연구소
매각, 그룹 해체 이전 CSR
교육·문화·보건·복지 대우재단*
학교 대우학원* (아주대학교, 거제대학교, 아주자동차대학교) | 지성학원 (거제고등학교, 거제중학교, 대우초등학교)
의료 아주대학교의료원 | 대우조선 의료재단
기타
관련 단체·건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 대우인회* | 대우센터빌딩 | 대우빌딩 | 고등기술연구원
주요 경영진 김우중 | 장병주 | 김덕중 | 이재명 | 추호석
* 현재 대우 상표 유지중
}}}}}}}}} ||
삼보증권 주식회사
三寶證券株式會社
Sambo Securities Co., Ltd.
파일:삼보증권 로고.png
정식 명칭 삼보증권 주식회사
한문 명칭 三寶證券 株式會社
영문 명칭 Sambo Securities Co., Ltd.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설립일 1962년 6월 4일
해산일 1983년 6월 15일
업종명 증권 중개업
상장 유무 상장 폐지
법인 형태 폐업법 인

1. 개요2. 역사3. 역대 임원4. 여담5. 관련 자료

[clearfix]

1. 개요

대우그룹 계열 증권사. 대우 인수 이전 업계 1위로 손꼽혔다.

2. 역사

오리엔트시계 창업주로 유명한 강영진(1921~1993)이 1962년 6월 4일 자본금 2억 5천만 환으로 서울 중구 소공동 29번지 삼화빌딩에 세웠다. 설립 후 증권업허가 74호 및 거래원번호 39호 등록인가를 받고 영업개시했다.

이후 을지로 2가 오양빌딩으로 이전했으나 업계에서 중위권 정도를 유지하다 1964년 3월 강성진 전 영화증권 사장이 인수한 뒤 개척정신과 성실봉사로 총력영업을 경주하여 동년도 업계 1위 자리까지 올랐다. 이후 본사는 업계 선두를 유지키 위해 1972년 5월 명동 유네스코회관 이전 후 11월 기획조사부를 신설해 기획/조사기능을 강화했고, 영업 분야에서도 1972년 5월 남한제지 회사채 공모 주선 및 6월 진로주조 기업공개 등으로 다른 회사를 앞섰다. 그 외에도 같은 해 11월에 증권업계 최초로 신입사원 공채를 실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지방 증권인구 저변 확대를 위해 각지에 연락소/지점을 내고, 타 회사보다 앞서서 <월간 삼보투자>, <주간 삼보> 등 투자분석 잡지도 타 회사보다 먼저 내는 한편, 초보 증권투자자 양성을 위해 '증권교실'도 적극적으로 열었다. 국제부문에선 1975년 국제자본시장포럼 주도 후 1980년 한국산업은행 엔화표시제 발행에 국제인수단으로 관여했고, 1981년 대한투자신탁이 주도한 '코리아 트러스트' 발족 시 공동 간사로 참여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이에 따라 회사 규모도 커져 1978년 거래원번호가 2호로 변경된 뒤 1981년 업계 최초로 주식약정고 1조 원을 돌파했고, 1982년 기준 자본금 80억 원과 주식약정고 2조 원을 달성하며 전체 직원 수 750여 명에 지점수 28개로 업계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줄곧 업계 선두를 지키기 위한 공격적 경영에 문제가 생겨 약정고 경쟁에 부작용이 일어났고, 관리 면에서 허점이 생겨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이 누적되어 190억이 넘는 시재부족 현상이 발생해 회사 존립에 문제가 생겼다. 이에 재무부는 업계 선두 증권사 파산 시 업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인수자를 물색토록 했으나, 당대 증권업계의 어려운 사정으로 시재부족에 빠진 회사를 구원할 데가 없었다. 하지만 증권업계의 성장 가능성을 본 대우그룹이 본사를 인수 후 계열사 동양증권에 합병시켰으며,[1] 이로써 삼보로서의 21년 역사가 종결되었다.

3. 역대 임원

  • 대표이사 사장
    • 강영진 (1962~1964)
    • 강성진 (1964~1983)
  • 대표이사 부사장
    • 김창희 (1983)

4. 여담

삼보증권은 사라졌지만 본사가 낳은 우수한 인재들은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대표적으로 명호근 전 쌍용투자증권 사장, 이연우 전 고려증권 사장, 김영용 전 전자신문 사장, 임철규 초대 BNG증권 사장, 이원익 전 쌍용투자자문 사장, 손우헌 전 쌍용템플턴투자신탁 사장, 김재홍 전 쌍용화재 사장, 오세호 전 한신증권 사장 등이 있었으며, 강성진 회장도 증권업협회장 등을 맡다가 2000년 BNG증권 설립도 주도했다.

5. 관련 자료

  • 대우증권 이십년사 (1990)


[1] 동시에 사명도 대우증권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