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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미국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 로버트 에드워드 루빈 Robert Edward Rubin | |
| | |
| <colbgcolor=#131230><colcolor=#ffc224> 출생 | 1938년 8월 29일 ([age(1938-08-29)]세) |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 국적 | |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 / A.B. )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경제학 / 석사 수료 ) 예일 대학교 (법학 / L.L.B. ) |
| 소속 | |
| 경력 | 골드만삭스 시니어 파트너 골드만 삭스 공동 회장 초대 미국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 (1993~1995) 제70대 미합중국 재무장관 (1995~1999) 전미외교위원회 의장 (2007~2017) |
1. 생애
1938년 8월 29일 미국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보냈으며, 마이애미 비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6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1960년 하버드 대학교를 최우등졸업(Summa Cum Laude)하고 잠시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였으나, 재미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3일 만에 자퇴하였다. 이후 영국 런던정경대학(LSE)으로 옮겼다가 미국으로 귀국하여 예일대 로스쿨을 다니며 1964년에 법학전문박사 학위(LL.B.)를 취득하였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에는 잠깐 뉴욕의 클리어리 고틀립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66년 금융업계로 전향하여 골드만 삭스에 입사하여 26년간 근속했으며 1990년에 공동회장 겸 수석 파트너로 임명되기까지 했다.그랬던 그가 공직에 입문했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과 함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초대 위원장에 임명되어 경제정책을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95년부터 1999년까지는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며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장기 경제호황을 견인하였다. 이 시기 루빈은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 정부의 기조인 약달러 정책에서, 강달러 정책으로 크게 선회하였다. 루빈이 제시한 강달러 정책 및 재정적자 해소 정책은 당시 미국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쳐 ‘루비노믹스’라는 용어가 생겼다.
먼저 루빈은 취임 직후 미국 연방 재정적자의 급속한 해소를 장기적 목표로 삼았다. 1993년 재정균형법(Omnibus Budget Reconciliation Act from 1993) 입법을 진두지휘하며 소득세 최고세율 인상, 고소득층 세금 인상, 정부 지출의 억제 및 효율화 등 다각적인 세입세출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 미 연방정부의 재정적자는 감소 추세로 전환되었고, 1998년에는 29년 만에 최초로 예산흑자를 실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루빈의 정책은 국가신용도 회복, 금리 하락, 민간투자 활성화로 이어졌으며, 클린턴 행정부가 이룩한 오랜 경기확장국면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루빈은 국제금융정책에서 강달러(Strong Dollar) 원칙을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미국 경제의 건실한 기초(거시건전성, 개방성, 기업가정신 등)를 강조하며 달러화 가치의 안정 및 강세 유지를 정책의 중심에 놓았다. 이는 국제 투자자들에게 미국채 및 주식의 매력을 높여 자본 유입을 견인하였고, 글로벌 기축통화인 달러의 안정성을 세계 금융시장에 각인시켰다. 동시에 강달러 정책은 수입물가 안정과 저금리 유지에 기여하면서 미국 내 인플레이션 압력을 억제하였다. 루빈이 재무장관으로 취임한 1995년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93.96엔으로 달러 약세가 정점을 찍었고, 재무장관을 마친 1999년에는 달러당 113.73엔으로 환율이 가파르게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루빈은 국제 경제위기 대처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4년 멕시코 외환위기(이른바 '페소화 위기') 당시 미 재무부 주도로 IMF 및 주요국과 협력하여 신속한 구제금융과 시장 안정책을 마련하였으며,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에도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 등 위기국 지원 협상을 주도하였다. 한국의 국가부도 위험을 막기 위해 정권교체 직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직접 만나 협의를 진행하였으며, 국제 사회에서 금융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재정지원과 구조개혁을 결합한 ‘조건부 구제금융(model of conditional lending)’ 원칙을 통해 신흥국 경제의 신뢰 회복과 시장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민간 중심 성장·생산성 제고, 기술혁신(IT산업 육성)의 지배구조 개선, 미국 경제의 세계화 등 포괄적 거시경제 운용에 힘을 실었다. 이 같은 정책기조는 1990년대 미국의 “최장기(36분기 연속) 경제호황”, 고용창출, 생산성 향상, 뉴 이코노미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규제완화 및 금융자유화 정책, 특히 1999년 그램리치빌라일리(Gramm-Leach-Bliley)법(글래스-스티글법 폐지)의 후원 등은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한 원인으로도 지목받고 있다. 실제로 루빈 역시 씨티그룹 고문 등 민간금융 경력을 활용해 대형금융기관 간 통합의 물꼬를 튼 정책적 리더라는 평가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1999년에 재무장관 직에서 물러난 후 월가로 복귀하여 씨티그룹 경영위원회를 비롯한 다양한 금융 및 정책 관련 직책을 맡았다. 그는 외교평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회장직을 역임하는 등 미국의 금융 및 외교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때문에 2008년 미국 금융위기 당시 씨티그룹 고문으로 있었다는 이유로 일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 평가
- 조지 패커는 《미국, 파티는 끝났다》에서 로버트 루빈을 금융 자유화와 엘리트주의의 화신으로 그리며, 그를 미국 체제 붕괴의 조용한 공범자로 묘사한다. 루빈은 골드만삭스 출신으로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부 장관이 되어 파생상품 규제 회피, 금융기관 거대화 등 시장 중심의 정책을 주도했으며, 이는 단기적 성장에는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 금융시스템을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패커는 그를 앨런 그린스펀, 로렌스 서머스와 함께 '워싱턴 컨센서스'의 주역으로 지목하며, 금융 엘리트가 양당 정치 모두를 장악하고 대중의 이익을 외면하게 만든 구조를 보여준다. 루빈은 2008년 금융위기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음에도, 이후 시티그룹 고문으로 막대한 보수를 받으며 체제의 부조리를 상징하게 되었고, 이는 미국 시민들이 느끼는 분노와 정치 불신의 밑바탕이 되었다. 결국 그는 외형상 합리적이고 온건한 엘리트지만, 내부에서 제도를 허물고 민주주의를 시장에 종속시킨 조용한 파괴자로, 패커는 그를 통해 해체는 선동보다 오히려 정제된 기술과 자기 확신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