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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플레이션/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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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도별로 보는 인플레이션 국가들

2. 아시아

2.1. 한국

2.1.1. 조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병학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추어 준절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적에 당십전이나 당오전을 쪼개어 당이전이나 당삼전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대번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官)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아주 좋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3년(1866년) 10월 30일 2번째 기사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 경복궁 중건을 위해 찍어낸 당백전은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조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상평통보 최고액권이 당이전이었으니 갑자기 50배의 주화를 시장에 쏟아내게 되어 경제가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이 실책은 청나라 돈을 들여오는 것으로 땜질되었다. 문제는 청나라 동전 자체도 관리들이 밀수한 동전이라서 당백전에 비하면 양화였지만 당시 화폐인 상평통보 기준 1/3의 가치의 악화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완전 수습이 안 됐다. 그러면서도 이게 당백전보다는 부작용이 적다는 이유로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폐지도 되지 않았다.

후일담으로 고종은 친정을 시작한 후 청전을 폐지했는데 덕분에 이번에는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정부 금고에는 청전만 가득한 상황이라서 갑자기 재정이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된다. 지방 관청에서 세금은 상평통보로 걷고 중앙에는 청전만 올려보내는 교과서적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재정파산 상태를 타개하는 것에만 2년이 걸렸다. 그 덕에 운요호 사건 당시 돈이 부족한 군대가 제대로 항전을 못 하는 일이 벌어졌다.

2.1.2. 광복 이후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서도 1945년 일제의 항복 선언 직후 한 가마니 가격이 1945년 11월~1946년 3월까지 무려 55배가 치솟았다고 한다. 4개월에 55배면 복리로 환산할 경우 1년에는 무려 166,375배가 된다. 이 사태의 원인으론 미국의 명령으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행정권을 행사하던 조선총독부가 자국민의 귀환 자금을 위해 조선 엔을 무차별 방출한 것이 첫 번째 원인이었고 여기에 당시 한반도를 통치하던 미군정청의 미숙한 통치능력도 한 몫 거들었다. 우선 당시 쌀 수급 상황을 살펴보지 않고 쌀 가격자유화 조치를 섣불리 실시했고 재정적자를 벌충하기 위해 무제한 통화완화를 시행했는데 거기에다가 지주와 부농들의 매점매석 현상까지 겹치며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차라리 그냥 미국 달러화를 들여놓는 게 백배 천배 나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뒤늦게서야 가격자유화 조치를 철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이는 인민위원회를 해산하면서 적산자산을 엉뚱한 인물에게 불하하고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인 토지개혁에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것과 겹쳐 정치를 조정하는 능력도 떨어지는 미군정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는 요인이 되었다. 미군정은 여론을 반전하기 위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물가 상승은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라며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

이후 물가통제조치를 다시 시행하면서 물가가 어느정도 잡히기는 했지만 식량공급은 원할치 않았고 결국 이때의 물가상승이 1946년 대구 10.1 사건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렸고 물가상승률이 다소 낮아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연 100%를 넘기는 것은 변함이 없어서 물가의 고공행진은 194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물가상승은 1949년이 되고 이 즈음하여 경제의 정상화가 이뤄지면서 겨우 진정되는가 싶었는데 6.25 전쟁이 터지면서 다시금 초인플레이션이 터지고야 말았다. 매우 빨리 서울이 점령당해 화폐를 제조하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직원들이 전쟁이 터지자 인쇄기와 인쇄원판들을 그대로 놓고 달아나서 북한이 그것들을 전부 접수했으며 한국은행 지하금고에서는 약 105억원의 미발행은행권도 접수하였다. 서울에서는 북한위조지폐[1] 대량 살포로 밀가루 한 말 가격이 1950년 7월~1950년 10월 기간에 120배가 뛴 적도 있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북한이 낙동강 방어선 내부에 위조지폐와 미발행권을 뿌려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경제교란을 염려하여 제1차 긴급통화조치를 발표한 후 새롭게 일본에서 제작한 한국은행권 원을 자연인 1명당 10만 원씩 등가교환하는 방식으로 유통했다.

한국은행의 경제통계에 따르면 도매물가지수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약 1만 배만큼 폭등했다.

2.2. 중국

2.2.1. 후한

동탁은 여러 실정을 했지만 특히 경제 정책에서 큰 실책을 저질렀는데 바로 화폐개혁이었다. 오수전을 녹여 조그만 동전으로 주조하지만 불량률이 심했는데 그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고 모양도 형편없었고 심지어는 불순물까지 잔뜩 섞여서 이게 돈인지 뭔지조차 모르게 찍힌 개체도 있었다. 그 결과 저질의 화폐가 대량으로 유통되어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후한의 경제는 혼란에 빠졌고 화폐 경제는 이후 한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오늘날의 각 나라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항목이 화폐임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점은 학계의 평이 일치하고 있다.

이 초인플레이션의 정도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삼국시대 사료인 장사목간, 주마루오간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오나라 목간이 있다. 이 목간에서 쌀 44곡 3두[2]에 무려 8억전(錢)이라는 전근대에서 상상하기 힘든 숫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이를 타개하고자 촉한과 동오에서 새롭게 고액권을 발행시켜 유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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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원나라

원나라는 쿠빌라이 칸 이래 기존의 은화를 일종의 지급준비금으로 강제적으로 몰수하고 일종의 지폐인 중통원보초/중통초(中通元寶鈔/中通鈔)를 발행했다. 처음에는 중통초 10관에 은 1냥이라는 환율을 유지하였고 위조지폐범은 사형에 처하면서 관리한 결과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원나라는 발권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원나라 정부의 방만한 지출과 말기의 혼란상에 힘입어 원나라 조정은 말 그대로 교초를 찍어 시중에 뿌려 버렸다. 조정에서 발행한 교초부터 엉망인 원말의 혼란상에서 행정력도 붕괴하면서 위조지폐가 나돌게 되자 화폐가치의 급격한 하락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원말의 명신인 토크토아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새롭게 교초를 발행하면서 기존 발행한 교초와 일정 비율로 교환하게 했는데 교환 비율과 현실적인 가치와의 괴리로 인해 교초의 가치만 떨어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교초의 액면가를 높여서 구교초와 교환하게 했지만 신교초로 교환할 수 있는 은화는 사실상 없었으며 결국 화폐가치의 폭락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고 민간은 물론 관에서도 교초를 믿지 않아 은으로 교환할 때 초고액의 수수료를 떼거나 심지어는 교환을 거부하면서 원나라의 교초는 구교초 신교초 할 것 없이 사이좋게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결국 고려는 가지고 있던 교초가 전부 종이조각이 되면서 국가경제가 완전히 파탄나 버렸고 때마침 흑사병홍건적, 왜구의 침략까지 겹치면서 멸망했다. 고려가 여몽전쟁 이후 피해를 복구하고 종속국으로나마 그럭저럭 살다가 정작 14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막장테크를 탄 이유가 바로 원나라 경제가 붕괴되면서 원을 비롯한 몽골경제권과의 무역으로 먹고살던 경제가 같이 붕괴된 데 원인이 있다.

이 화폐의 혼란상 덕분에 원나라의 멸망 이후 등장하는 명나라는 기존의 화폐제도를 폐기하고 은본위제도를 도입하여 겨우 인플레를 잡았다. 이 와중에 탄생한 조선은 교초의 트라우마로 인해 상업을 천시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폐쇄적인 경제구조로 나아가게 됐으며 17세기 이후부터 조금씩 화폐경제가 자리잡았으나 그나마도 교초 같은 지폐가 아니라 최소한의 가치를 갖는 동화인 상평통보를 이용하여 화폐가치 하락을 최소화했다. 다만 아무튼 앞서 화폐와 지폐를 사용했던 경험 때문에 조선 초기에만 해도 교초와 같은 지폐인 저화를 유통시키려고 했고 본격적으로 화폐가 사용되기 시작한 숙종 이전에도 역대 왕들은 꾸준히 화폐유통을 시도해 보려고 했다.

2.2.3.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초인플레이션도 꽤나 지독했다. 주요한 원인은 전쟁으로 인한 물자 유입 부족과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 때문이다. 흔히 국민당 정부의 화폐투기로 그렇게 되었다고 잘못 알려졌으나 1945년 이후 화폐발행이 인플레이션보다 높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일전쟁 기간 일본은 중화민국의 경제를 날려버리기 위해서 항공모함 한 척 뽑을 돈을 들여 위조지폐를 제조했지만 이 잘못된 경제 정책 때문에 일본이 만든 위조지폐 40억 위안보다 47.25배나 더 많은 1,890억 위안이 유통되어서 쓸모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인플레이션 자체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시작되었으나 1939년 6월까지는 완만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1939년 6월 이후로 광저우 함락, 주요 철도노선 단절, 왕징웨이 괴뢰정권의 등장, 난징-하노이 노선의 차단과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전까지 연당 수십% 정도의 완만한 인플레이션은 순식간에 몇백% 단위로 뛰어오르기 시작했으며 1945년 간신히 전쟁은 승리했으나 이미 지독하게 황폐화된 상황에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이전의 문제점들이 한순간에 해결될 리도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동부 연안의 산업 시설들을 가동시켜야만 했으나 소유권을 둘러싸고 또 다시 갈등이 벌어졌다. 우선 화폐 문제가 있었는데 왕징웨이 괴뢰정권이 발행한 '저축은행권'과 국민당 정부가 발행한 '법폐'와의 적당한 교환비율 때문에 대공황이 발생한 것이다. 국민당 정권은 '중국의 정통정부'라는 명목으로 법폐의 가치를 높게 책정했는데 문제는 1944년에 이미 일본군이 국민당 정부의 법폐를 낮은 가치로 저축은행권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400위안은 불과 1위안으로 추락했고 결과적으로 화폐가 동부로 유입되어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거기에 국민정부가 왕징웨이 정권 등 일본의 괴뢰국들의 경제를 파탄내기 위해 위폐를 만들어 뿌린 것도 동부 해안 지역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 자본이 소유하던 생산 설비의 전후처리도 문제가 많았는데 임시로 중앙정부가 관리하면서 원주인에게 환수하는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이러한 방칙을 두고 충칭-청두 지역의 자본가들이 '항일전쟁을 수행한 우리들이 그 보상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동부 연안의 자본가들도 '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우리들이 더욱 능숙하다.'고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며 충돌했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정부는 기업을 국영화시켰으나 이는 관료자본의 부패를 가져왔고 국민당 정권에 강한 반발을 가져와 국공내전의 패배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한편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명확한 생산물(농산물)'을 확보한 농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층의 수입원은 급락했다. 농민층도 20% 정도의 소득이 줄어들었고 일반 공무원은 무려 90% 정도의 수입이 인플레이션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는데 여기에 국공내전의 재개로 다시 엄청난 지출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국민당 정부 화폐 가치는 급격히 떨어져 갔고 1946년 6월 한 달 만에[3] 350%가 넘는 인플레이션이 닥쳤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47년에 들어오면서 국민당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고 1월에 다시 300%, 2월에 1,100%, 5월에는 3,000%, 10월에는 5,000%, 1948년 2월에는 무려 18,000%가 폭등했다. 결국 1949년 8월 상하이가 함락되기 직전에는 한 달 만에 600,000(60만)%가 넘게 오르면서 1,368,049%의 물가지수를 기록했다.

이렇게 인플레이션이 감당이 되지 않다 보니 상인들은 하루에 몇 번씩 가격표를 바꿔야 했고 나중에는 아예 문을 닫아 버렸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가능한 한 늦게 팔아야 손해를 덜 보기 때문이었다.

국민당 정부도 이를 예측하고 1945년 초에 화폐개혁을 위한 새로운 화폐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물가 폭등은 국민당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겨버렸다. 1947년 2월에 물가를 통제하고 임금을 동결하였으나 불과 석달을 가지 못해 모든 조치를 해제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1948년 8월 19일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을 발표해 8월 23일을 기하여 구권(법폐)과 신권(금원권)의 교환 비율을 300만분의 1로 정한 금본위제 기반의 통화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이미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서 버렸다. 결국 정부의 지시에 순응한 중산층만 파산시키는 대재앙을 남긴 채 공허히 끝나 버렸다. 부자들은 정부를 불신해 화폐개혁에 협조하지 않았고 물건을 강제로 유통시키려고 하자 밀수, 나중에는 아예 물건을 상하이 등의 대도시로 옮기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타 도시의 지방관이 물건이 빠져나가는 걸 금지하기도 하였다. 결국 화폐개혁을 담당하던 장징궈는 10월 31일 화폐개혁이 실패한 것을 인정하고 11월 11일 금, 은, 외환의 소지를 허용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저지하는 걸 포기했다고 자백하는 꼴이었다. 이러한 화폐개혁은 국민당 정권에 대한 지지를 결정적으로 추락시켰고 국공내전에서 민심이 공산당으로 돌아서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2.3. 이스라엘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사회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GDP에서 정부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5% 수준이었지만 이스라엘이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을 기습적으로 공격한 1967년 ‘6일 전쟁’ 이후 정부지출 비중은 국방비 지출이 급증함으로써 가파르게 상승했고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일으킨 욤키푸르 전쟁 이후에는 더욱 빠르게 증가했다. 1974~1985년 재정 적자는 GDP의 14% 수준이었다.

1977년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 집권한 리쿠드당의 우파 정권은 이스라엘 경제체제를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레바논 내전 개입으로 국방비 지출을 더욱 늘리면서 인플레이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985년에는 430%까지 상승해 볼리비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물가 상승률을 기록했고 경제학자들은 몇 개월 안에 1000%를 돌파할 거라고 예측했다.

1984년 선거에서 좌파와 우파가 대연정을 구성했고 노동당 당수인 시몬 페레스가 대연정의 첫 2년 동안 총리를 맡았다. 대연정 정부는 경제 안정화 프로그램을 시행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신 셰켈을 도입해 통화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다.

3. 유럽

3.1. 독일국(바이마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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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어린이들이 돈다발을 쌓으며 놀고 있는 모습(1923년).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불과 약 3년(1919년~1921년)만에 물가가 무려 1조 배나 올랐고 인플레이션이 수습되기 직전인 1923년 10월 한달 동안에만 300배나 물가가 올랐다.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 패한 이후로 각종 생산 시설이 붕괴된 데다 전쟁 기간 동안 필요한 자원을 조달한다며 엄청난 양의 통화를 발행하는 바람에 발생한 일이었다. 독일의 전시 국채 상환 액수만으로도 협상국의 배상금을 초과했을 정도. 게다가 당시 협상국에게 지불할 전쟁배상금이 연체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를 핑계로 영토 확장을 노리고 있었고 배상금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렸지만 나라 경제가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세금을 올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결국 바이마르 정부에서 이를 급하게 해결하기 위해 돈을 찍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다. 물론 연합국에 돈을 찍어서 전달한 것은 아니고 연합국은 이나 전후 재건을 위한 석탄이나 목재등의 현물로 받아갔기 때문에 이를 구입하기 위한 돈이였다.

추가로 패전 후 공업력이 떨어져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지는 못하는데 반해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기도 하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땔감을 사는 것보다 지폐를 땔감으로 쓰는 게 오히려 더 알뜰했고 벽지를 사느니 그냥 지폐로 을 도배할 정도였다.
파일:external/www.teaternett.no/Tapezieren_mit_Geldscheinen-WikiCommons.jpg
지폐로 벽을 도배하는 모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Billionmarks.jpg

당시 발행된 지폐. 지폐 찍을 돈도 없어서 1,000 마르크 지폐 위에 10억 마르크라고 고쳐 쓴 거다. Milliard는 10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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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미를 장식할 이 동전. 이 동전은 무려 1조 마르크짜리 동전으로 인류 역사상 최고 액면의 동전이라고 한다… 이것이 10억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독일에서는 long scale을 따르기 때문에 1조를 billion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저 동전에 새겨진 사람은 슈타인 남작인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프로이센 왕국이 패전하여 엄청난 배상금의 지불과 군대 축소를 겪게 된 후 카를 폰 하르덴베르크 수상과 함께 프로이센을 재건하고 후일 빈 회의에서 폴란드-작센 영토와 베스트팔렌을 획득해 1815년 이후 프로이센을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이후 이 동전은 1조마르크 = 1렌텐마르크라는 선언에 따라 1 렌텐마르크 지폐로 교환되었다.

고종 황제가 독일 은행에 맡겨둔 52만 마르크의 내탕금도 공중분해되어 버렸을 것이다. 물론 내탕금의 주인인 고종 황제는 이미 죽었고 일제가 이미 고종 황제도 모르는 사이에 문서를 날조하여 그 내탕금을 탈취한 후였다.[4]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다는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가 고종 황제로부터 부여받은 마지막 임무가 바로 내탕금을 찾아오라는 것이었지만 끝내 그 내탕금은 찾지 못했다.

어쨌든 1920년대 독일에는 억만장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지만 그들은 모두가 배고픈 억만장자들이었다.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돈은 몇 억, 몇 십억, 몇 백억씩이나 되는데 그 돈으로는 빵 하나, 우유 하나 사먹기도 버거울 정도였으니까. 이 인플레이션은 바이마르 공화국1923년 11월 렌텐마르크라는 새 화폐를 발행하고 옛 마르크와 1조 대 1의 비율로 화폐교환을 실시하면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농지와 산업시설을 담보로 하는 렌텐은행이라는 새 은행을 설립하였다.

놀랍게도 인플레이션은 렌텐마르크 발행과 함께 완전히 정지되었는데 이를 렌텐마르크의 기적(Wunder der Rentenmark)이라고 부른다.

정말 놀라운 점은 렌텐마르크가 실제로 기존 마르크를 흡수해나가면서 인플레이션이 서서히 멎은 것이 아니라 독일 정부가 '렌텐마르크 발행 선언'을 한 순간부터 인플레이션이 정지했다는 점이다. 원래 초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하는 경우 이전 화폐를 대체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정지되지만 렌텐마르크는 실제로 발행되기도 전인 발행 선언을 한 시점에 인플레이션이 완전히 정지했다. 그래서 렌텐마르크의 '기적'인 것이다. 사실 렌텐마르크 자체도 어차피 불태환권이었기 때문에 명목상 토지를 담보로 한다고 해도 신용화폐에 가까웠고 0의 숫자가 줄어든 걸 제외하면 사실 기존 마르크와 크게 다르지도 않았지만 렌텐마르크에는 정부가 토지를 담보로 했다는 신용, 발권량이 32억 렌텐마르크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돈을 무한정으로 찍어내서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소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달랐다. 화폐에서 신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사례다.

이 초인플레이션의 충격이 너무 커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 때문에 무너질 때까지 이런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거나 1929년부터 시작한 경제 대공황 때 다시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심지어 88만원 세대 같은 유명 대중서에서도 그런 오류를 저지른 적이 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바이마르 초기의 초인플레이션은 렌텐마르크를 발행하면서 수습했으며 대공황 때는 본질적으론 '디플레이션'이므로 이런 폭발적인 물가 상승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는 돈 가치는 떨어지고 사람들은 물건을 안 사려고 해서 문제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1차대전 직후만큼은 아니지만 큰 인플레를 겪었고, 유대인 재산 몰수를 지켜보았던 당시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 중엔 은행을 믿지 못해 재산을 현물로 바꾸어 개인 금고에 보관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았으며 현물로 바꿀 재산이 없어도 통조림을 창고에 잔뜩 쌓아놓은 사람들이 수두룩할 정도였다[5]. 그 사람들이 늙어서 사망하고 나서 자식들이 유품 정리를 하기 귀찮아서 대행업체에 맡기고는 했는데 집구석 정리하다가 자식들에게 사전에 말해주지 않은 금이나 보석이 나오면 발견한 사람이 임자여서 외국인(주로 터키계) 노동자들이 이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루르 점령 참조.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에 의하면 슈바르츠발트라는 지역[6]의 물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이곳의 물가는 정말 싸다! 하루 숙박에 40만 마르크, 저녁 한 끼에 180만 마르크, 우유 한 통에 25만 마르크.
추가적으로 나중에 물가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에는 레스토랑의 한끼 식사가 100~200억 마르크, 학교 구내식당에서도 저녁 한 끼가 10억 마르크, 극장표가 3~4억 마르크였다.

또 이런 이야기들도 있다.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은 성실하게 일해서 번 돈을 꼬박꼬박 저축해 두었고, 형은 집에서 술이나 마시며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 그런데 1차대전이 끝나고 초인플레이션이 터졌고, 동생이 번 돈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다행히 형이 마시고 모아둔 술병이 더 값어치가 나가게 되어 어떻게든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분산투자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독일 어느 도시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 스위스로 건너가 살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독일은행에 60만 마르크[7]를 예금해 놓고 스위스로 떠났다. 4년만에 독일로 다시 돌아온 그녀의 집에는 은행으로부터 3통의 우편물이 와 있었다.

첫 번째 것은 평소에 잘 알던 은행원이 보낸 것이었는데, "부인이 당 은행에 맡기신 거액의 예금을 차라리 다른 곳에 투자하시길 권합니다.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질 전망이니 다른 실질적인 것에 투자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언제 시간이 나시면 저와 상의하도록 하십시오."

두 번째 편지는 다른 은행원이 쓴 것이었는데, "귀하의 예금은 액수가 너무 적어서 은행 입장에서 더 이상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예금을 찾아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온 편지는 그녀가 스위스에서 돌아오기 몇 주 전에 보낸 것으로, "아무리 연락을 드려도 소식이 없어서 귀하의 구좌를 임의로 폐쇄했습니다. 현재 저희 은행에서 보유하고 있는 소액권이 없어서 백만 마르크짜리 지폐를 동봉합니다."

그래서 이 과부는 지폐를 찾으려고 봉투를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지폐는 보이지 않고 겉봉투에 우체국 소인이 찍힌 백만 마르크짜리 우표만 붙어 있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60만 마르크의 예금이 4년만에 우표 한 장 값에도 못 미치게 된 것이다.[8]
출처

당시를 다룬 단편소설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보이지 않는 소장품>이라는 작품이 있다. 렘브란트를 비롯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어느 장님 수집가에 대한 소문을 들은 주인공이 그 작품들을 보고 싶어 늙은 수집가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을 열렬히 환영하는 수집가의 뒤에서 그의 아내와 딸이 사색이 되어 '손님이 배가 고프실 게 틀림없으니까, 먼저 식사를 하고 작품을 보여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노인을 뜯어말리는 것이 아닌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인공은 배가 고프다는 핑계를 대고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집가의 딸이 그를 찾아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남편은 세계대전 중에 전사하고 벌이가 시원치 않아 장님인 아버지 몰래 작품 몇 점을 내다 팔고 비슷한 크기의 종이로 바꿔치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품을 팔아 거액을 받긴 했으나 며칠 만에 돈이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고 다시 다른 작품들을 내다 팔았지만 그렇게 받은 돈마저 죄다 며칠 만에 휴지조각만도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엄청난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죄다 길거리에 내다 버린 꼴이 되어 버려서 아버지에게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주인공이 작품들을 보러 왔다가 "이게 웬 백지들입니까?"라고 하면 아버지는 그야말로 심장마비로 그 자리에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설명을 하기 위해 식사부터 하자는 말로 아버지와 주인공을 일단 떼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주인공은 백지들을 가리키며 기쁘게 설명을 하는 장님 수집가에게 열렬히 호응을 해주며 작품들을 칭찬하는데 수십 년간 만져온 무게와 작품의 무게가 다른 것을 보고 수집가가 이상함을 느끼자 "여기 이러 이러한 점이 이 작품의 특징이 아닌가요?"라고 재빨리 거들며 위기를 넘긴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뒤로 이렇게 행복해하는 독일인을 본 적이 없다."는 주인공의 독백을 끝으로 소설은 끝난다.

3.2. 유고슬라비아

유고 연방이 해체된 직후 극심한 초인플레이션을 겪은 적이 있다. 사실 물가 상승의 단초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지만 특히 1980년대 후반에 민족주의 발흥으로 인해 각 공화국별로 정치혼란이 가중되면서 물가상승률이 1,000%를 넘겼고 1990년에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김에 긴축적인 경제정책을 폈지만 이러한 경제정책 자체는 기업들의 파산을 불러왔기 때문에 오히려 분열을 확정짓는 결과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자유선거가 치러지는 가운데 각 공화국별로 민족주의 세력들이 줄줄히 집권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거기에다가 내전이 터졌으니 화폐가치가 쓰레기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연방 전체 및 구성국은 1993년 한 해 동안 물가가 1000 이상 뛰었고 1994년 1월 한 달 동안 20 배가 넘는 물가 상승을 경험했는데 이 때 발행된 5,000억 디나르는 2005년 KBS 스펀지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 방송 당시 한국 환율로 환산하면 무려 1원. 다만 스펀지가 나왔을 때는 사실 1원어치도 못 되었는데 이미 해당 권종(내전기간 군표화폐)은 1996년 화폐개혁으로 모두 철폐된 권종이었기 때문이다.[9] 그냥 휴지조각이었던 셈이다.

스릅스카 공화국에서도 초고속으로 물가가 올라서 1994년 1월 한 달 동안 300만 배나 물가가 뛰었다. 결국 1994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화폐개혁을 실시하는 김에 자국화폐를 독일 마르크화에 페그하거나(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아예 독일 마르크를 갖다쓰는(코소보, 몬테네그로) 방식으로 물가를 안정화했다.

3.3. 소련, 발트 3국

이미 고르바초프 말기부터 기업 경영의 자율화로 인해 물자 부족이 심해지면서[10] 통화량이 급속히 증가했는데 이로 인해 암시장에서의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고 고르바초프는 1991년에 50루블과 100루블권 지폐를 무효화하는 방식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이는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991년 8월 쿠데타 진압 후 소련 체제 자체가 와해되다시피 하면서 물가 상승률은 더더욱 올라갔다. 거기에다가 1992년 가격자유화와 환율자유화로 물가가 1년만에 2,000% 이상 오르면서 15개국 모두 자국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지만 대다수의 국가들은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초인플레이션을 해결한 시기는 국가마다 다르다. 대부분은 1990년대 중반에 대강 해결되었으나 벨라루스와 투르크메니스탄은 고질적인 물가 상승 문제에 시달렸다. 초인플레이션 문제를 가장 빨리 해결한 나라는 에스토니아 크론독일 마르크화에 화폐가치를 고정하는 방식으로 해결한 에스토니아고 가장 늦게 해결된 나라는 벨라루스인데 벨라루스는 21세기2003년에야 간신히 인플레이션을 잡았다. 한편 러시아는 1998년 IMF 외환위기로 초인플레이션이 재개될 듯 싶었지만 다행히 1999년 이후 러시아의 경제가 정상화되면서 연 50% 이상의 물가상승률은 기록하는 일이 없어졌다.

3.4. 헝가리 왕국(1920년~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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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헝가리의 청소부가 지폐더미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 사진. 아무도 저 지폐더미를 주우려고 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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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 때 헝가리에서 발행된 1해(100,000,000,000,000,000,000 = 1020) 펭괴 지폐. 이 화폐는 당시 미국 달러로 0.2달러에 지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해 펭괴도 발행되었으나 민간에서 통용되지는 않았다. 당시 중앙은행에서 화폐 발행을 위한 종이를 너무 소비하는 통에 시중에서는 질 좋은 종이를 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흔히 초인플레이션으로는 독일이나 짐바브웨의 사례가 유명하지만 사실 최고 기록을 세운 것은 헝가리다. 물론 1차대전으로 큰 피해를 본 뒤인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최대 월 98%의 인플레이션을 자랑하는 등 인플레가 만연한 나라이긴 했으나 1944년부터는 독소전쟁의 전장이 헝가리로 옮겨지면서 독일군과 소련군이 헝가리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국부의 40%가 손실되고 산업시설의 50%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전전(戰前) 대비 석탄 생산량은 40%, 알루미늄 생산량은 1%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에 철도의 40%와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하는[11] 다리가 모조리 파괴되는 등 나라 전체가 완전히 박살나 버렸다. 말 그대로 전국토가 폐허가 되었다.

이 때문에 1944년 말부터 전쟁이 끝나는 5개월 동안 물가가 14.5배 올라 버렸고 당연히 화폐의 가치는 폭락해 버렸다. 여기에 헝가리에 주둔한 소련군이 멋대로 군표를 발행하면서 혼란을 가중시켜 버렸다. 이렇게 군표를 남발한 것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조치였다. 헝가리 왕국추축국이었고 소련이 헝가리를 접수하자 스탈린은 의도적으로 헝가리 전체의 경제력을 파탄낼 것을 명령했다. 결국 스탈린은 헝가리를 조질 방법 중 하나로 초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을 선택했다. 물론 동유럽 전체가 인플레이션을 겪은 건 맞지만 스탈린의 보복조치로 인해 2차대전 직후 당시 동유럽 국가들 중 헝가리 더 심한 초인플레이션을 겪게 됐다.[12]

아직 완전히 2차대전이 종결되지 않았고 헝가리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직전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던 헝가리 왕국 정부는 이를 막으려고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패전국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은 이미 시장에서 실효성을 잃어서 효과가 없거나 역효과만 초래했고 그 결과 1945년부터 1946년까지 15시간당 물가가 2배씩 뛰고 4일 만에 화폐 가치가 기존의 10% 수준으로 떨어지는 초막장 인플레이션이 또 일어났다. 역사상 평균적으로 2번째로 물가가 빨리 오른 짐바브웨 인플레이션은 1일에 2배씩 뛰었다는 것에 비교하면 별 차이 아닌 것 같겠지만 계산해보면 이는 1달에 13경 배(1.3×1017)%의 물가상승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결국 중앙정부와 은행은 재정의 붕괴를 막기 위해 일반 화폐와 다른 어도펭괴(Adópengő)라는 별도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정도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국채, 우편 요금, 저축 증명서도 어도펭괴로 표기되었는데 일반 펭괴로는 도저히 화폐가치를 보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월 1일 어도펭괴는 펭괴와 1대1의 가치가 있었지만 7월 31일 화폐개혁 당시에는 4.6×1029(46양)펭괴가 1 어도펭괴의 가치가 있었다.

1944년 6월 30일에 1 미국 달러당 33.5 펭괴였던 환율이 각 월의 말일 기준으로 1945년 8월에 1,320 펭괴, 1945년 10월에 8,200 펭괴, 1945년 11월에 108,000 펭괴, 1945년 12월에 128,000 펭괴가 되었는데 이마저도 1946년의 첫 7개월에 비하면 매우 안정적이었다. 1946년 1월에 795,000 펭괴, 1946년 3월에 175만 펭괴, 1946년 4월에 590억 펭괴, 1946년 5월에 4경 펭괴가 되더니 7월에는 46양 펭괴(4.6×1029)까지 올라갔다. 이 시점에서 헝가리 펭괴의 인플레이션율은 연간으로 환산하면 2.6×10177%에 달했다. 월간 인플레이션율은 4.19×1017%.[13] 그 유명한 짐바브웨 달러가 연율환산 인플레이션율이 8.2×1022%인 것과 비교하면 실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인플레이션이었다.[14]

이에 도무지 버틸 수가 없자 헝가리 정부는 조세개혁을 단행했으며 소련도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헝가리 공산정권의 안정적인 출범을 위해 기존의 정책을 폐기하고 대대적인 원조를 실시했으며 1946년 7월 31일부로 화폐 단위를 펭괴에서 포린트로 바꿈으로서 간신히 초인플레이션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포린트는 1325년부터 헝가리에서 쓰이던 화폐 단위로 피렌체의 금화 플로린을 모방한 옛 헝가리 금화였다.

교환 비율도 무지막지했는데 40양[15]펭괴당 1포린트였다. 그 덕분에 1946년 7월 한 달 동안 화폐 가치가 2억 7,000만 분의 1로 떨어졌고 8월이 되자 시중에 있는 모든 펭괴 지폐를 다 합쳐도 당시 환율로 미국 돈 1센트의 1/1000, 즉 0.001센트밖에 안 되는 휴지조각 미만의 물건이 되어 버렸다. # 참고로 휴지 30롤이 인터넷 쇼핑에서 만 원 정도 하고 휴지 한 롤에는 40칸의 휴지가 있으니 현재 휴지조각의 가격은 0.083센트 정도 된다. 1946년의 0.001센트는 2024년 4월 기준으로 정확히 0.01591센트가 되니 이 말은 즉슨 당시 헝가리라는 한 국가에 있는 모든 지폐를 합쳐도 휴지조각 한 장의 1/5 정도의 가치조차 없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질 좋은 종이이므로 폐휴지로써의 가치를 계산하면 훨씬 큰 금액이었겠지만 주화도 아닌 지폐를 액면가도 아닌 구성 물질의 가치로 평가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미 막장에 다다랐다.

이후 40여년 동안 조용했지만 공산정권이 붕괴된 뒤 자유화 과정에서 다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등[16] 경제적 혼란을 한차례 경험하기도 했다. 2020년대 들어서는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로 2022년 ~ 2023년 사이에 한때 인플레이션율이 24.5% ~ 25.7%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나마 1946년의 악몽같은 초인플레이션이 아니었다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

3.5. 튀르키예

튀르키예도 2004년까지 초인플레이션까진 아니어도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의 결과로 2004년 12월 1,339,000리라=1$의 막장 환율에 이르자 결국 1,000,000 구 리라 = 1리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4. 북미

4.1. 미국

1779년 11월 미국에서도 당시 대륙회의가 발행한 화폐인 대륙화폐(Continental Currency)의 월간 인플레이션율이 47%에 달해 간신히 초인플레이션 기준(50%)은 넘지 않은 사례가 있다. 이 때문에 'Not worth a continental'이라는 영어 숙어가 생겨났다.이제는 인플레가 생기면 달러를 외국으로 갖다 버리면 그만이다.

5. 남미

사실 남미의 웬만한 주요국들은 초인플레이션을 한 번씩 겪어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브라질아르헨티나, 페루, 볼리비아, 칠레 모두 현대사에서 초인플레이션을 겪어 왔으며 콜롬비아도 연 20~30%대의 인플레 현상을 겪어왔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베네수엘라로 2015년부터 2021년 화폐개혁 직전까지 겪었다. 사실 물가상승 문제 자체는 1983년에 고정환율제를 포기한 이래 매우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2000년대에도 별로 안정화되지 않았던 것이 외환보유고가 충분치 않았던 상황에 유가폭락, 국제제재까지 겹치며 폭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5.1. 페루

석유 파동과 외채위기가 주된 원인으로 1980년대 전반기에 연 300%대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고 이를 메꾸기 위해 1986년에 페루 잉티로 화폐개혁을 했고 일시적인 조치로 물가가 잡혔지만 이 과정에서 IMF와 척을 치면서 1988년을 기점으로 물가는 다시 폭등하기 시작했고 결국 알베르토 후지모리에 의해서 페루 솔로 회귀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한 뒤에 간신히 해결되었다.

5.2. 칠레

1973년 10월 칠레에서 한 달 동안 88%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한 적도 있다. 이 목록에 나온 나머지 사례에 비하면 믿기 힘들 수준의 안정적 물가지만. 원인은 미국의 경제봉쇄와 구리값 하락, 통화량 증가다.

5.3. 아르헨티나

198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는 외채이자율 상승으로 인해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군부가 물러나고 민주화된 1980년대 중후반에 라울 알폰신 정권이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군부독재 시대의 유산인 외채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1988년부터 화폐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고 그 여파로 외국인들의 투자도 급감하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다시 한 번 파국을 맞이했는데 특히 1989년에 5000%라는 물가상승률을 기록해서 라울 알폰신은 국민들의 반발 속에 퇴진해야 했다.

이후 카를로스 메넴이 집권하면서 물가상승률이 떨어지다가[17] 1991년에 화폐개혁을 시행하는 김에 페소 태환화 정책이라는 극약처방을 시행하면서 초인플레이션은 해결되었지만 달러태환화가 수출에 악영향을 끼치면서 나중에 1998~2002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의 단초가 되었다. 경제위기가 해결된 후의 아르헨티나는 타 중남미 국가들보다 물가상승률이 높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

2020년대 들어서 초인플레이션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과 이로 인해 촉발된 대봉쇄코로나 버블, 그리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주요한 영향을 끼졌다.

5.4. 브라질

초인플레이션이 10년 넘게 진행되었다. 사실 브라질 역사에서 인플레이션은 여러 번 있어 왔지만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반기의 인플레이션은 매우 길게 이어졌다. 중남미 외채위기의 영향인데 외환보유고 자체는 적지 않았고 수출량 자체도 많았기는 했지만 재무여건이 취약한 덕택에 물가상승률이 높아졌고 결국 여러차례 극약처방을 겸한 화폐개혁을 시행해 왔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1994년 페르난두 카르도주 재무장관의 헤알화 플랜이 효과를 발행하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이렇게 되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활할까 싶지만 해법은 간단한데 월급을 받으면 최대한 빨리 은행에서 현찰을 뽑아 물건을 샀고 보태서 어느 정도 사는 사람은 금과 은을 비롯한 고정자산을, 여유가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도 장기간 보관가능한 통조림을 비롯하여 물물교환에 쓸 수 있는 제품을 사 모았으며 남은 기간 동안에는 암시장에서 물물교환을 했다. 이 시기 브라질인들이 사치가 심하고 자산에 집착한다는 말이 많았던 것도 사실 이것 때문이었는데 브라질인들 입장에서는 화폐가치가 폐지보다 못해진 이상 빨리 다른 자산으로 바꿀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브라질의 물가사정을 모르는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 쓸데없이 과소비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5.5. 니카라과

남아메리카에선 1990~1992년 기간 동안 초인플레이션을 겪은 전력이 있는데 1980년대 니카라과 혁명의 영향으로 화폐가치가 폭락한 여파다. 예를 들어 1990년 니카라과 코르도바의 환율이 30,000,000C$=1$까지 치솟았다.

5.6.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정권 시절 외화 확충을 위해 외환 거래를 전면 금지하고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이라는 이중 환율 체계를 고집하여 화폐 시장을 교란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볼리바르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추락하여 2017년 기준으로 "비공식'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단위 가치가 낮은 화폐가 되었다. [18] 2017년 12월 4일 기준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환율은 1달러에 3,345 볼리바르였으며 암시장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가치가 떨어져서 108,279.53 볼리바르를 줘야지만 1달러를 구할 수 있었다. 2017년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은 700%를 넘어설 것으로 관측되었고 2018년에는 IMF 예측으로 2,30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해졌다.기사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 정부는 공식 환율을 끝까지 1달러에 10 볼리바르라는 가짜 환율을 꾸준히 밀고 있다. 그 이유는 안 봐도 비디오인데 바로 정권 유지를 하기 위해서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물가를 잡는답시고 생필품, 의약품, 공공재 등을 모두 공식 환율로 팔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2017년 12월 4일 기준으로 시장 환율과 공식 환율의 갭이 무려 330배를 넘은 데다 암시장 환율로는 1만배 넘게 차이난다는 것이다.

본래 베네수엘라의 경제 구조가 석유를 수출해 생필품을 수입하는 구조인데 이 상황에서 생필품 수입상들은 국영 상점에 물품을 최소 300배, 최대 1만배 넘게 손해를 보며 판매할 의사가 없다. 당연히 이들이 국영 상점에다 팔 리는 없고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시장 환율 가격으로 쳐주는 일반 상점에 팔고 비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암시장에 팔아 버린다.

여기서 일반 상점이란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대형마트 같은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베네수엘라에서 일반 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 중산층 이상들이다. 중산층 이하 계층들은 돈이 없어서 국영 상점밖에 못 간다. 그러니 국영 상점은 물품이 없어서 텅텅 비어 있고 살 사람은 줄을 서니 물가는 계속해서 오를 수 밖에 없다. 사는 사람이 늘어나면 물가는 올라가기 마련이니까. 이러니 병원의 의약품조차도 없어서 환자들이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도 못 받는 실정이고 항암제가 암시장에서 굴러다니는 등 말이 아니다.기사

2016년까지만 해도 최고액 화폐는 100 볼리바르로 버티고 있었으나 더는 상승하는 물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500 볼리바르 발행을 시작으로 1,000 볼리바르, 2,000 볼리바르, 5,000 볼리바르를 발행하더니 연말에는 급기야 10,000 볼리바르, 20,000 볼리바르를 발행하기에 이르렀으며 해가 바뀌어 2017년에는 더욱더 물가 상승폭이 커져서 결국 11월에 100,000 볼리바르를 추가 발행했다.기사

10만 볼리바르라고 해 봤자 베네수엘라 정부에서 고지한 시장 환율로는 그래도 30달러 정도는 받을 수 있지만 현실에 가깝다고 하는 암시장 환율은 발행일 당시 1달러에 41,290.28 볼리바르로 거래되고 있어 실제로는 2달러 42센트 정도 가치에 불과한 실정이다. 당시 환율을 적용하면 한화로 2,660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2달러 이상 받던 것도 며칠밖에 안 되고 불과 34일 지난 12월 4일에는 암시장 환율이 2배 이상으로 더 뛰어버려 역대 최고치인 1달러에 108,279.53 볼리바르를 기록했다. 그러므로 실제 10만 볼리바르의 가치는 92% 정도에 불과하고 한화로는 1,000원 조금 안 되는 정도다. 물론 베네수엘라와 한국의 물가 차이를 고려해야겠지만 최고액권인 10만 볼리바르의 가치는 고작 캔 음료 1캔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일:베네수엘라 지폐가방.jpg
2018년 벽두부터는 지폐로 공예품을 만들어서 그걸 외국 관광객들에게 판매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인터뷰에 의하면 원재료인 베네수엘라 볼리바르화 지폐는 암시장에서 1센트 동전 5~6개에 뭉텅이로 사 올 수 있다고 하며 길거리 좌판에 뭉치 채로 놔 두어도 한번도 도난당한 적이 없다고 한다. 저 베네수엘라 돈으로 만든 핸드백을 자세히 보면 흰색은 시몬 로드리게스의 안경이 보이고 오렌지색은 시몬 볼리바르의 구레나룻이 보인다. 최상위에 해당되는 고액권인 10,000 볼리바르와 20,000 볼리바르가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처지에 몰렸다.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5만원권과 1만원권을 이용해 손가방을 만든 셈이다.

2021년에는 20만, 50만, 100만 볼리바르가 등장했다. 물론 100만 볼리바르의 가치도 휴지조각이다.

나라가 망해가자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주변국으로 국경을 넘어 탈출하고 있으며 유엔 산하 국제이주기구에 따르면 2018년까지 230만명이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7.2%에 달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정부에서는 국경경찰대를 창설하여 국경 탈출을 막고 있으며 합법적으로 출국하기 위해 여권을 신청하는 국민에게는 자국 가상화폐인 페트로를 강매하는 등 폭압을 일삼고 있다.

결국 2018년 8월 액면가를 10만분의 1로 줄이는 리디노미네이션을 감행하고 자국의 석유에 연동된 가상화폐페트로를 개발하여 자국 통화를 여기에 페그시켰다. 일종의 석유본위제를 실시하는 것인데 초인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은 자국 통화에 대한 불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때까지의 처방 중에서는 가장 핵심을 찌르는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19] 베네수엘라 정부는 페트로로 석유를 구입하면 최대 30% 할인을 해 주겠다고 말하는 등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8월과 9월 물가상승률이 223%와 233%를 각각 찍으면서 석유본위제도 실패했다. 석유 자체가 가치가 없어서는 아니고 페트로를 이용해서 제재를 피한다고 판단한 미국이 암호화폐인 페트로도 제재 대상에 넣어 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석유를 가치 있는 자산으로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평소 하던 행태 때문에 마두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믿음 자체가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2022년에서야 고유가 덕에 연간 200%대로 안정된(?) 상황.

6. 아프리카

6.1. 짐바브웨

파일:ONE HUNDRED TRILLION DOLLARS.jpg
One Hundred Trillion Dollars
($100,000,000,000,000)

초인플레이션으로 유명한 짐바브웨의 100조 짐바브웨 달러 지폐 사진. 이 지폐를 발행할 당시 100조 짐바브웨 달러는 한국 환율로 1만 5천원 내외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지막 공식 환율을 적용하면 0.28센트 (2019년 1월 10일 기준으로 "3.14원"-). 즉, 달걀 하나도 못 사는 가격이었다.

짐바브웨는 인플레이션이 상상을 초월했던 걸로 유명했다. USD로 1,000억 달러라면 2009년 1월 환율로 100조원이 훨씬 넘어가지만 짐바브웨 달러로 1,000억 달러는 고작 달걀 세 개 값, 100조 달러로는 커피 한잔 밖에 안 된다.

이게 왜 무섭냐면 예를 들어 오늘 1,000억 짐바브웨 달러를 벌었다고 치자. 그럼 오늘 물가로는 이 1,000억 짐바브웨 달러에 달걀 3개를 살 수 있는데 이 돈을 다음 달까지 가지고 있으면 1,000억 짐바브웨 달러로 달걀 3개는 커녕 1개도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돈을 얻게 되면 바로바로 소비하거나 환전해야만 가치를 보전할 수 있으므로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국가의 월급일엔 은행과 시장이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모습이 나왔는데 이렇게 낭비되는 비용을 경제학에선 '구두창 비용'이라고 부른다.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율은 2008년 1월~7월간 2억%였다. 즉 오늘 짐바브웨에서 1 짐바브웨 달러에 산 물건이 있고 그걸 1년 뒤에 되팔면 200만 짐바브웨 달러를 손에 쥘 수 있다. 만약에 이걸 한국식으로 계산해 보면 500원 하던 두부 1모의 가격이 1년 뒤 10억원으로 폭등하는 셈이다. 짐바브웨 화폐 개혁 전인 2008년 7월 기준으로 환율은 1달러 = 69,484,070,056 짐바브웨 달러, 즉 700억 짐바브웨 달러를 벌어 와도 당신은 1달러 벌어온 거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1천억 짐바브웨 달러를 은행에 가서 바꿔 달라고 내밀면 아마 1,500원을 내 줄 것이다. 물론 이것도 2009년 얘기고 지금은 그냥 종이쪼가리... 짐바브웨 달러의 최종 공식 환율은 1달러에 3경 5,000조 짐바브웨 달러였다! 고로 짐바브웨 달러 역사상 최고액 화폐였던 100조 짐바브웨 달러를 환전해 봤자 0.28센트이다. 고로 한화로 100원 가치에도 못 미친다는 뜻이다. 100조 달러가 그 정도인데 1,000억 짐바브웨 달러를 환전해 봤자 2.8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아예 환전이 불가능하다.

2009년 2월에 세계적인 경제잡지인 포브스(Forbes)에서는 짐바브웨의 2008년 초인플레이션을 6.5×10108% = 6,500만 구골%이라고 발표했다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다. 2008년 11월 중순에 최고점을 찍었는데 그 때 월 상승률이 1억배에 좀 못 미치는 79억 6천만%. 10108 %로 오르려면 매달 10억(109)배 가까이 올라야 한다.관련링크
파일:20160402_AMC857.png
이코노미스트에서 보인 짐바브웨베네수엘라인플레이션율. 짐바브웨가 2008년 4분기에만 7.3×10^22% 폭등했다고 나온다. 기사 그래프도 아예 천정부지로 치솟아 주어진 공간을 뚫고 나갈 정도인데 왼쪽 위에 붙은 제목은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다. 대놓고 풍자하는 의미다.

이러다보니 당시 짐바브웨를 가면 과거 1차 세계대전 독일때처럼 국민들이 돈무더기를 수례를 이용해 돈을 가지고 다니며 돈은 안 건들고 돈을 담은 수레만 훔쳐가는 촌극이 벌어졌다. 실제로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짐바브웨를 방문했던 김영희 PD에 의하면 돈(가치가 이닌 돈의 무게로 계산했음)을 혼자서 계산 할수 없어서 돈을 운반하는 인부를 고용하고 아예 호텔방에 돈만 보관하는 방을 따로 마련할 정도(....) 였다고 한다.

거기다가 짐바브웨는 초인플레이션 문제 때문에 화폐 개혁을 무려 3번이나 실시했다.
  • 2006년 8월: 1000 Z$ → 1 Z$
  • 2008년 8월: 100억 Z$ → 1 Z$
  • 2009년 2월: 1조 Z$ → 1 Z$

고로 지금의 1 Z$는 예전의 1조×100억×1000(=1025,10자(秭)) Z$인 셈이다. 이렇게 3번이나 화폐개혁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100조 달러짜리 지폐를 발행해야 할 정도로 통화 가치를 상실하게 되자 2009년 초 짐바브웨 정부는 완전히 포기하고 자국 통화 발행을 금지한 후 통화를 아예 미국 달러로 바꿔버렸다.[20]

어이없게도 초인플레이션 당시 짐바브웨 대통령이던 로버트 무가베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경제학 석사 학위 보유자였다.(...)

7. 창작물

  • 라이트 노벨 무책임 남자 시리즈(무책임함장 테일러의 원작)에서는 타일러가 라르곤 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후 우주태풍의 위기를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전우주 스케일의 초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픽션인 만큼 몇달도 안 되는 사이에 10억분의 1 디노미네이션 끼워서 '자'를 넘어간다. 떡하니 자기 이름으로 화폐단위를 삼아 놓고서는 느긋하니 다음 수 단위가 어떻게 나가는지 읊는 장면이 압권.
  • 라이트 노벨 만능감정사 Q의 사건수첩에서도 초반부에 세토우치 리쿠가 리사이클 숍의 경영 정상화를 위하여 위조지폐 트릭으로 초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초인플레이션 상황에서는 현금보다 현물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 즉, 세토우치는 중고품으로 빚을 청산하고 오히려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원래 83,000엔 하던 니시이케부쿠로 3번지의 원룸멘션 월세가 순식간에 40만엔으로 올랐고 180엔 하던 JR 기본운임이 3,200엔(!)까지 치솟았으며,[21] 도쿄전력[22]과 도쿄가스는 아예 광열비를 달러로만 납부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소설 내의 초인플레이션은 꽤 세세하게 묘사되는데, 위폐 보도 이틀 후 패스트푸드점은 치즈버거세트 35,200엔, 데리버거세트 55,000엔, 주간소년점프 최신호 60,000엔, 도시락 60,000엔, 오이 5개 6,000엔/80센트, 장어 1조각 4,500엔/1달러, 무조림 100g 5,200엔/1.2달러, 톳나물 100g 6천엔/1.5달러, 청어조림 100그램 6,800엔/2달러, 카페의 스몰사이즈 블렌드커피 22,000엔/2.9달러, 택시 기본요금 42,000엔, 원래 40,900엔이던 하네다-나하 전일공 요금은 312,000엔[23], 작중에서 이전 가격을 명확히 밝힌 장어 1조각(120엔)을 기준으로 하면 대략 33시간만에 37.5배 인상되었으니그나마도 햄버거는 더 올랐다 위에서 언급한 헝가리나 짐바브웨를 아득히 쌈싸먹는 캐막장 인플레다. 물론 주인공 린다 리코의 활약에 의해 검거되고 물가는 정상화되기는 하지만. 애초에 작중에서 위조지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빠르게 정상화된 케이스다. 실제로 위조지폐가 돌아다녔다면 빠른 정상화는 어림도 없다. 화폐의 진위를 의심할 수 밖에 없으니까. 만화판에서 공예관 토도 슈이치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와중에도 이익을 챙기려 발버둥치던 높으신 분들이 있었던 모양. 실제로 그 새 자산을 불린 경우도 꽤 많았다. 만능위조사라든가.
  • 바보 이반에선 악마가 이반의 형 타라스를 망하게 하는 방법이 초인플레이션과 유사하다. 악마는 마법으로 무한정 금화를 만들어낼 수 있어서 타라스가 다스리는 나라 안의 온갖 물건을 비싼 값에 사들였으며 처음에 타라스는 국고가 늘어난다고 좋아했다. 문제는 타라스가 뭔가를 사려고 하면 악마가 타라스가 지불하려는 금액보다 더 비싼 값으로 물건을 전부 사 버리는 바람에 결국 타라스는 산더미 같은 돈을 가지고도 빵 한조각 사지 못해 쫄쫄 굶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 판타지 소설인 디스크월드 초반에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디스크 최초의 관광객 두송이꽃이 놀라고 자기 제국화폐를 막 뿌렸는데 이 화폐로 인해 앙크 모포크 달러는 개차반이 되고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에 '보험' 개념까지 추가하여 그냥 싹 다 도시를 태운다.
  • 애니메이션 전국마신 고쇼군의 악역집단 도쿠가는 굿선더팀과 고쇼군을 잡기 위해 전세계를 초인플레이션 상태에 빠트리지만 되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시민 혁명이 일어나 도쿠가가 붕괴한다(...).

7.1. 온라인 게임

온라인 게임에서도 운영자들이 경제 밸런스 잡는 데 실패하거나 작업장에서 돈을 무한히 찍어낼 경우 생긴다.
  • 이미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수없이 시달려 온 메이플스토리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스타포스 강화아케인심볼이라는 시스템을 도입해서 강화비로 억 단위 메소가 무진장 깨져나가도록 유도했다. 2022년 2월 기준으로 비공식적인[24] 현실 화폐 교환비는 1억 메소≒2,800원 수준. 그러나 막상 신규 유저들은 1억 모으기도 여간 어려운 수준이 아닌지라 빈익빈 부익부와 현금만능주의 풍조로 인한 진입장벽이 새로 세워졌다. 사실 온라인 RPG 공통이긴 한데
  • 억단위 수표가 그냥 단위로 쓰이고 있는 대항해시대 온라인. 이 게임은 현재 한국에서 서비스 중인 온라인 MMORPG 중 가장 극렬하게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초보자에게 권하는 캐시선박이 수억~수십억 단위를 찍고 있고 이로 인하여 10억 두캇으론 어지간한 조빌 선박도 풀강화해서 타기 쉽지 않다. 다만 캐시배를 안 지르고, 선박그레이드 랜덤강화시스템을 포기하고 최신 군 컨텐츠[25]나 최상위급 최신 캐시 선박을 탈 생각이 없으면, 생각보다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긴 하다. 애초에 교역이 컨텐츠인 게임이라 돈을 벌기 쉽고[26] 모험 쪽은 쓸만한 이동배 하나만 장만하면 그 뒤론 돈 들어가는 일이 별로 없다. 실제로 캐쉬배가 거의 없고 정액제인 본 서버인 일본 서버를 가 보면 거래 금액 단위 수부터가 한국보다 낮다. 한국 유통사의 랜덤박스, 랜덤강화 캐쉬정책이 초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킨 사례다.
  • 엘소드의 인플레이션도 이런 경우이지만 이 사례는 작업장에서 변조핵을 사용해 게임 내 화폐를 말 그대로 찍어낸 경우다. 아무리 게임 내라도 인플레이션이 그리 쉽게 일어나진 않는다. 게임으로 배우는 경제! 나를 빼놓으면 섭하지
  • 다만 게임머니가 지나치게 풀릴 경우 이를 회수하기 위한 해결책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는 강화로 돈의 소모를 유도하거나 게임 내 아이템을 사기 위한 유료 캐시와 게임상 돈을 변동환율로 교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 있다. 길드워 2 같은 경우가 후자인데 변동환율이므로 게임상 돈이 늘어날수록 유료 캐시를 사는 비용이 비싸져서 더 많이 회수되므로 균형이 맞춰진다. 유료 캐시인 젬이 초기에는 100젬당 0.5골드 정도의 환율이었다면 발매 5년 후에는 무려 31골드까지 올라갔다. 반면 로블록스란 웹 게임은 틱스(Tix, ticket의 줄임말)를 로벅스(Robux, 게임화폐이다. 유료.)로 바꿀 수 있었는데 틱스가 삭제된다는 무슨 미국 달러에서 센트를 빼는 소리를 했다. 지금은 삭제되었지만 아무튼 삭제되기 전에는 기간이 남아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로벅스 1:틱스 30까지 올라갔다. 현재도 로벅스의 결제 가격이 올라가는 추세다.
  • 웹 게임인 동물농장에서는 한 때 치트오매틱으로 돈을 최대 21억 4,748만 3,647포인트[27]로 미친 듯이 불리고 탐험 컨텐츠의 최종 보스를 주무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당연히 아이템 시세가 박살났고 이후에도 와글와글 장터에서 좀 귀해 보이는 물건이다 하면 몇 백만, 몇 억 포인트 단위로 입찰되는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2016년 6월 30일을 기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 이상 볼 수 없다.
  • 군주 온라인에서도 주요 아이템의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였다. 심지어 관복(판서만 착용 가능) 같이 아무나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엄청 비싸졌다.
  • 이터널시티에서도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초인플레이션도 최악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2004년에 1조 7천억EL[28] 해킹 사건이 터진 이후로 초인플레이션이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다. 2018년 12월 기준으로 1조 7천억EL은 현금으로 20만 원 수준이지만, 2004년 1조 7천억EL은 무려 현금 9억 원 수준이었다. 지금도 이터널시티를 하고 있는 유저들은 개나소나 최소 몇백억에서 많게는 몇조를 소지하고 있으니 저때 당시로 돌아가면 누구나 다 현실에서 백만장자가 될수 있었단 소리. 물론 그만큼 EL 시세가 폭락할 테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돈을 시세의 20%로 팔아 치웠으니 초인플레이션이 터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운영진들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물가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 이 초인플레이션을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터널시티를 이탈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7년 대격변 패치로 게임의 많은 부분을 손 봤음에도 손대지 못한 것이 천정부지로 뛰어 오른 물가다. 또한 포상 시스템으로 화폐의 공급은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사용자들의 이탈로 인해 수요가 계속 감소하는 것도 원인 중 하나. 얼마나 심각하냐면 일단 HP나 AP를 회복시켜주는 포션 아이템인 음식들 가격부터가 헉 소리가 난다. 삼계탕이 몇 십만 원을 한다. 무기를 구매하려면 5~6등급 이후부터는 억이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건 싼 거다. 상위급 컨텐츠인 불법 무기와 용병의 가격을 보는 순간 정말 컴퓨터 끄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왜 사람들이 이터널시티를 접었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물가가 답이 없는 수준이다. 심지어 2003년 종로에서 팬티만 입고 앵벌이를 하면 10억 원이 뚝딱하고 들어온다. 물론 이 돈으로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RF온라인은 이전부터 작업장머니로 인해 물가가 서서히 오르고 있었지만 유저들의 노력으로 어느정도 억제는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운영자의 잘못된 패치로 초인플레이션이 터져버렸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문제가 된건 2018년 2월 1일자 리파인 업데이트의 내용 중 하나인 정예병 양성소를 포함한 일일퀘스트로 퀘스트 완료시 보상에 게임머니가 포함된 것이 원인이었다. 정예병 일퀘가 아니더라도 나머지 두개의 일퀘는 하나는 그저 퀘템만 있으면 완료고 나머지 하나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하루에 적게는 수계정, 많게는 수십계정씩 퀘를 해버려 대량의 겜머니가 풀려버린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일목요연했지만 운영자들은 사태를 방관했고 1년도 안되는 사이에 물가는 수배에서 십수배 이상으로 껑충 뛰어버렸다. 게다가 개인머니 소지한도가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지 못해 겜머니로는 장비조차 구하기 어려운 사태에 이르렀지만 운영자측에선 어떤 해결방안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 쿠키런: 오븐브레이크의 스킨은 무지개큐브로 살 수 있는데, 2019년 6월 스킨 뽑기 업데이트 이전에는 일정량의 무지개큐브로 그냥 살 수 있었다(물론 한정 스킨도 있었다). 그러나 스킨 뽑기가 도입되어 스킨들의 서열화가 이루어지면서 무지개큐브 초인플레이션이 터져 버렸다. 에픽 이상의 스킨은 대부분 무지개큐브로 바로 살 수 없고, 뽑기를 통해서만 얻거나 중복 스킨으로 얻은 무지개 결정으로 사야 한다. 정가 기준 에픽은 결정 30개, 슈퍼에픽은 결정 80개가 필요하며, 2020년 7월 말에 도입된 레전더리는 무려 200개가 필요하다. 무지개큐브가 포함된 통상 패키지 가격을 기준으로 하여(11,000원 = 2,000무큐), 에픽 스킨들의 현금 가치를 대략 산정하면 다음과 같다(5연속 뽑기만 했을 경우, 레어 이상의 중복 스킨은 제외)[29].
    • 에픽: 무지개 결정 30개 = 무지개큐브 최대 11,400개 ≒ 현금 66,000원
    • 슈퍼에픽: 무지개 결정 80개 = 무지개큐브 최대 30,400개 ≒ 현금 176,000원
    • 레전더리: 무지개 결정 200개 = 무지개큐브 최대 76,000개 ≒ 현금 418,000원
  • Escape from Tarkov에서 가끔식 사재기로 인해 특정 물품의 가격이 상승한다. 또한 니키타의 다이나믹 경제 시스템 실험이랍시고 기름값이 10배 가까이 폭등한 일명 "오일쇼크"사건도 있었다.


[1] 한국은행의 인쇄원판을 가지고 만든 지폐니 명목상으로는 가짜라고 할 수도 없다. 원래의 지폐와 완전히 동일한 물건이다. 다만 발행권자와 동일하지 않은 단체가 다른 발행권자의 지폐(정확히는 은행권)를 찍으면 국제법에 따라 위조 지폐로 취급된다.[2] 전근대의 중국의 쌀을 세는 단위는 시대마다 편차가 심했다. 일단 청나라 시기의 도량형을 기준으로 현대 단위로 환산하면 약 7톤.[3] 1945년 9월의 물가지수를 100%로 환산해서.[4] 물론 찾고 나서는 전부 다 공중분해되었을 것이다.[5] 이원복 교수의 저서인 먼나라 이웃나라독일편에서도 이 사실이 언급되는데 전후에도 가족 중에 노인이 있는 가정에서는 집의 지하창고에 비상식량을 대량으로 구비해 놓은 경우가 많았다고 나온다.[6] 마르틴 하이데거가 노년에 정착한 곳.[7] 당시 환율 달러당 4.2마르크.[8] 인플레이션 전의 독일 우표값이 0.1마르크(10페니히), 인플레이션이 한창이던 1923년 우표값이 백만 마르크이므로 산술적으로 천만 배의 화폐가치 하락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20년 11월 현재 독일 일반우표(Standardbrief) 가격이 0.7유로(70센트), 우리 돈으로 약 930원 선이므로 역산하면 이 과부의 예금 60만 마르크의 가치는 현재의 420만 유로(약 55.8억원)에서 42센트(약 558원)로 떨어진 것이다. 물론 이는 우표가격만을 가지고 단순계산한 것으로서, 당시의 구체적인 자료가 뒷받침되면 현재 가치로 환산한 결과는 이와 다르게 나올 수 있다.[9] 이밖에도 같이 소개된 태국의 60바트(당시 만 원권의 2배 정도 된다고 소개)는 1987년 라마 9세의 60주년 생일 기념으로 나온 지폐이며 러시아(지갑에 넣기 힘들 정도로 크다고 소개)의 100루블은 지금의 러시아가 아닌 러시아 제국 시절의 지폐다. 참고로 원래 주제는 싱가포르의 5만 달러 지폐가 있다는 내용인데 해당 지폐도 2014년을 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10] 이유인 즉슨 국영상점에 국정가격대로 물건을 납품하기보다는 암시장에 몇배 이상의 가격에 파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던 데다 정치적인 자유화 조치로 이러한 행위에 대한 제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국정가격을 아무리 올린다고 해도 암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훨씬 낮았으니 수익을 내기 위해서 더더욱 암시장에 매달렸고 물자난이 심해졌다.[11] 현재는 이 두 도시가 통합되어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가 되었다.[12] 거기에 부다페스트에 있는 살러시 페렌츠국민단결정부와 데브레첸에서 헝가리 반독 인사들이 창설한 헝가리 임시정부가 각자 화폐를 발행하는 바람에 혼란은 더 커졌다.[13] 영어 위키백과에서의 값. 출처[14] 2차대전 이전에는 국제연맹의 보조금과 금본위제, 카르파티아 분지에서 생산된 밀을 수출해 번 돈 덕분에 헝가리 펭괴가 유럽에서 안정적인 통화로 꼽혔다는 점을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15] 4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 4×1029, 1양은 1해의 1억 배=10×1028[16] 1991년1995년에 각각 35%와 31%를 기록했다.[17] 다만 이 과정에서 예금동결을 시행해서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18] 왜 비공식이란 말이 붙었느냐면 공식 환율은 여전히 1달러에 10 볼리바르 선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19] 자국에 많은, 그리고 금은보다는 덜해도 국제적으로 일정 수준 가치는 있는 석유에 페그시켰으니 그나마 가능성도 가장 높았을 것이다. 일례로 에도 막부 시기의 일본이나 청나라는 은을 화폐로 사용했는데 일본은 이와미 광산에서, 청나라는 무역을 통해 많은 양의 은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20] 외국 통화의 유통은 인플레이션를 해결하는 검증된 방법 중 하나다.[21] 그나마도 사철의 반값이다.[22] 첫 출간은 2010년이라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다.[23] 이건 리코가 사건의 전모를 밝힐 생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드러난 것이다.[24] 운영정책 및 현행법상 게임 내에서의 메소-현금 거래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오직 메이플 포인트(구매 후 아이템 양도가 불가능한 제2의 캐시)로만 교환할 수 있는 메소마켓만이 허용된다. 그러나 고확 광고, 지인, 길드 단위로는 지하 단계에서 현실화폐-메소 교환이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다.[25] 해전 등의 대인전, 환수토벌전 레이드[26] 옛날 대항해시대 상인들처럼 동남아에 가서 향신료를 퍼오면, 기본 몇 천을 벌 수 있다 (...)[27] 32비트 정수(Integer) 최대값이다.[28] 이터널시티 게임 머니[29] 사실 2000무지개큐브는 유저들 사이에서 호구팩으로 악명이 높은데, 매일 400무큐=1100원 패키지가 풀리고, 정기적으로 3500무큐=11,000원 패키지, 6500무큐=33,000원 패키지 등 훨씬 덤을 많이 주는 패키지가 자주 풀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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