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미 소사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 |||
1995 | 1998 | 1999 | 2000 | |
2001 | 2002 | 2004 |
199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 ||||
래리 워커 (콜로라도 로키스) | → |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 → | 치퍼 존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200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홈런왕 | ||||
마크 맥과이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 → |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200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홈런왕 | ||||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 → | 짐 토미 (필라델피아 필리스) |
199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득점왕 | ||||
크레이그 비지오 (휴스턴 애스트로스) | → |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 → | 제프 배그웰 (휴스턴 애스트로스) |
2001년~200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득점왕 | ||||
제프 배그웰 (휴스턴 애스트로스) | → |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 → | 알버트 푸홀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첫 수상 | → |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 → | 토드 헬튼 (콜로라도 로키스) |
에릭 데이비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 → | 토니 그윈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 → |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 → | 루이스 곤잘레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
1998년 첫 수상 | → | 새미 소사 마크 맥과이어 칼 립켄 주니어 | → | 토니 그윈 리키 헨더슨 배리 본즈 시애틀 매리너스 (2001) |
1998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들 | ||||
딘 스미스 | → | 마크 맥과이어 & 새미 소사 | → | 미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
MLB 보유 기록 | |
최다 50+ 홈런 시즌 | 4회 |
최다 60+ 홈런 시즌 | 3회 |
새미 소사 Sammy Sosa | |
본명 | 사무엘 페랄타 소사 Samuel Peralta Sosa |
출생 | 1968년 11월 12일 ([age(1968-11-12)]세) |
산 페드로 데 마코리스 주 산 페드로 데 마코리스 | |
국적 | [[도미니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3cm / 104kg |
포지션 | 우익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5년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TEX) |
소속 팀 | 텍사스 레인저스 (1989) 시카고 화이트삭스 (1989~1991) 시카고 컵스 (1992~2004) 볼티모어 오리올스 (2005) 텍사스 레인저스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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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 리그에서 뛰었던 야구 선수.
7번의 40홈런 시즌-4번의 50홈런 시즌-3번의 60홈런 시즌을 기록하며 통산 609홈런을 친 거포였다.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낸 라틴계 메이저리거의 대명사격 존재로 모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국민 영웅으로 대접받았다.[1]
하지만 이후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현재는 마크 맥과이어, 배리 본즈와 함께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 스테로이드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코르크 배트 사건과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현재는 맥과이어와 본즈보다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처참히 몰락한 선수다.[2]
2. 선수 시절
2.1. 데뷔 이전
도미니카 공화국의 빈민촌에서 태어난 소사는 7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이후 구두닦이, 세차, 과일 장사 등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돕는 고달픈 유년 시절을 보냈다. 수많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소년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야구 선수가 꿈이었는데, 변변한 야구 장비를 구할 수 없어서 우유팩을 찢어 글러브를 만들고, 양말을 말아서 공으로 사용했다. 16세가 되었을 때 텍사스 레인저스의 스카우터의 눈에 들어서, 1985년 계약금 3,500달러를 받고[3]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하게 된다.2.2. 데뷔 초
이후 마이너리그를 거쳐 1989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데뷔 당시에는 파워보다는 빠른 발이 돋보이는 리드오프 스타일[4]이었다. 통산 첫 홈런을 다름아닌 로저 클레멘스에게서 때려내면서 출발이 좋았으나 이후에는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시즌 중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된다.[5]2.3.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
1990년, 소사는 화이트삭스의 주전 우익수로 발탁되어 0.233의 타율에 15홈런 70타점 32도루를 기록했는데, 풀 타임 첫 해를 맞는 루키의 성적으로는 나름대로 준수했으나, 출루율이 채 3할에 닿지 못한 데다가 리그 4위인 150개의 삼진을 당하는 등 뚜렷한 약점을 보였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개막전에서 멀티 홈런을 기록하며 쾌조의 출발을 했지만, 이후 극악의 선구안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으며 타율 0.203의 부진을 겪다가 마이너리그로 강등당했다. 그리고 화이트삭스는, 이듬해 3월에 그를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한다.2.4. 시카고 컵스
컵스 이적 후 첫 시즌인 1992년에는 부상으로 67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0.260, 8홈런의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듬해인 1993년, 소사는 0.261 33홈런 93타점 36도루의 깜짝 활약으로 컵스 역사상 최초의 30-30 클럽 가입자가 된다. 파업으로 인한 단축 시즌이었던 1994년에는 0.300, 25홈런 70타점으로 빌 버크너 이래 13년만의 팀 내 3관왕이 되었고 1995년에도 0.268 36홈런 119타점 34도루의 맹활약으로 생애 첫 올스타전 출전과 동시에 실버슬러거까지 수상한다. 이후 1996년에는 40홈런, 1997년에는 36홈런을 치면서 마크 그레이스와 함께 컵스의 간판타자로 자리잡게 된다.2.4.1. 전성기
1998년은 그야말로 새미 소사의 해이자 그의 최전성기의 시작. 로저 매리스의 단일 시즌 61홈런 기록을 놓고 소사는 마크 맥과이어와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세기의 홈런 레이스를 벌이게 된다. 시즌 초반에는 맥과이어의 독주 체제였지만 소사가 6월에만 월간 신기록인 20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맥과이어를 맹추격했고, 이 둘의 경쟁은 파업으로 시들해진 메이저리그의 인기를 회복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전년도에 58홈런을 기록하며 아쉽게 홈런 신기록 도전에 실패했지만, 다음해에도 역사적인 역대 한시즌 최다홈런 61개를 뛰어 넘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던 맥과이어는, 시즌초부터 역대 최고의 페이스로 홈런을 쉴새없이 날려대며 독주를 시작, 팬들의 관심과 기대를 증폭 시켰다. 여기에 더해 소사가 5월 말부터 홈런 페이스를 엄청나게 끌어올리더니 6월의 대폭발을 통해 당당히 도전자로 등장함에 따라, 1998년의 홈런왕 레이스는 누구도 승자를 장담하기 어려운 혼전 양상이 되었고, 두 사람이 날려대는 사상 초유의 홈런 페이스로 숨막히는 경쟁 구도를 만들어갔다. 맥과이어가 한발 앞서가면 기다렸다는 듯 1~2개 차이로 따라붙는 소사 덕분에, 유례없이 치열한 경쟁은 화제거리가 되어 연일 매스미디어에 대서특필 되었고, 야구에 관심없는 사람들까지도 TV와 경기장으로 구름처럼 몰려들게 만들곤 했다.
특히 로저 매리스의 61홈런 경신을 앞둔 시점에서는 그야말로 미국의 모든 스포츠 매체가 그들의 홈런 소식으로 도배되었으며, 세인트루이스와 시카고의 경기는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았고,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서, 혹은 경매에서 일확 천금을 기대하고 홈런볼을 잡기 위해서, 몰려든 구름 관중이 경기장 안과 밖을 물 샐 틈없이 채우곤 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사건이 된 62홈런을 기록하는 순간,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와 영광은 맥과이어의 것이었지만, 외야에서 뛰어와 라이벌 맥과이어를 끌어안고 격려하며 진심으로 기뻐해주던 소사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승자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었다.
시즌 종료 후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홈런왕 타이틀은 70개를 기록한 맥과이어를 영광의 주인공으로 맞이 했다. 비록 새미 소사는 66홈런으로 역사상 가장 안타까운 홈런 2위가 되었지만, 이해 158타점으로 리그 1위를 기록했으며,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공을 세운 점을 인정받아 내셔널리그 MVP를 차지하게 된다.[6] 또한 빈민과 어린이를 위한 재단을 만들어 고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의 학교와 병원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자선 활동도 펼치면서 그해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도 수상했다. 비록 가장 큰 영광의 순간은 맥과이어에게 돌아갔지만, 1998년의 새미 소사는 그야말로 전국구를 넘어 세계적인 스타로 각광받게 되었고, 인품, 실력, 겸손함에 더해 홈런왕 경쟁에서 승리한 라이벌을 축하하는 품격과 미덕까지 갖춰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메이저리그의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다.
1999년에도 데쟈뷰처럼 맥과이어와 치열한 홈런 레이스를 이어가며 아직 전년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팬들의 환호가 쏟아졌고, 이번에도 아쉽게 홈런왕은 맥과이어에게 넘겨 주었지만, 0.288 63홈런 141타점의 무시무시한 성적을 기록하고 그 해 제정된 행크 아론 상의 초대 수상자가 된다. 2000년에는 0.320 50홈런 138타점을 기록하며 생애 첫 홈런왕의 영예를 안았고, 세이버매트릭스 상으로는 진짜 커리어하이였던 2001년에는 0.328, 64홈런 160타점으로 단일시즌 60홈런 이상을 세 차례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사는 역대 60홈런을 가장 많이 기록한(3회)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60홈런을 넘긴 3차례 시즌 모두 홈런 2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시즌 후 컵스와 4년 7,200만 달러의 대형 계약을 맺었고, 2002년에는 0.288 49홈런 103타점으로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소사는 매년 올스타전 출전과 더불어 실버 슬러거를 수상했다. 여기까지가 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5년동안 기록한 홈런의 개수는 292개로 5년간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낸 기록으로 남아있다. 5년간 연평균 58홈런이라는 성적은, 라이벌 맥과이어도, 위대한 베이브 루스도, 당시 수퍼스타에서 야구의 신이 되어버린 배리 본즈도 다가갈 수 없는 괴물 같은 기록이었다. 물론 본즈는 고의사구만 아니었으면 당연히 넘겼겠지만 말이다.[7]
2.4.2. 몰락
소사의 몰락은 후술할 코르크 배트 사건이 터진 2003년부터 시작되었다.[8]6월 4일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전에서 코르크가 들어간 배트로 타격을 했다가 배트가 쪼개져서 심판들이 회수하는 도중 적발되어 퇴장당했고, 이후 8경기 출장 정지의 징계를 받게 된다. 코르크 배트는 일반 배트보다 가벼워 뱃 스피드와 타구 비거리를 늘릴 수 있는 부정 배트로 간주되었는데,[9] 소사는 "타격 연습 때 팬서비스용으로 사용하던 것을 실수로 경기에 들고 나간 것" 이라고 해명했지만 이 사건으로 홈런왕 소사의 이미지에는 커다란 금이 가게 된다.[10]그렇게 우여곡절을 겪는 중에도 시즌을 0.279 40홈런 103타점의 훌륭한 성적으로 마쳤으나, 코르크 배트 사건 이후 옹색한 변명으로 일관한 것이 치명타로 작용하게 되었다. 1998년의 홈런 레이스 이후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친근함과 성실함, 매너 좋은 신사로 각인된 그의 이미지가 위 사건으로 인해 '사기꾼'(Cheater)이라는 오명을 쓰고 크게 실추 되었다. 이 때문에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던 아이콘에서 소사는 시카고 내에서마저 안티가 급증하는 존재로 격하되었으며, 심지어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던 선수단 클럽 하우스에서의 위상 역시 크게 흔들리게 된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연이은 경솔한 발언[11]으로 동료들의 신뢰를 점점 잃고, 클럽하우스 내에서 따돌림에 가까운 위치까지 몰락하게 되었다. 결국 잔부상과 코르크 배트로 인한 심적 위축이 겹친 끝에 0.253 35홈런 80타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문제는 그동안 대외적으로 좋은 이미지와 엄청난 성적에 가려져 있던 그의 독선적인 태도 및 성격의 문제가, 코칭스태프 및 동료들과의 연이은 불화로 인해 수면 위로 완전히 드러나게 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전년도의 코르크배트 사건으로 크게 실추된 이미지에 더해, 독불장군 어린애처럼 성숙하지 못한 태도에다 부정을 저지른 사기꾼으로 안팎의 비난을 한몸에 받게 되면서, 구단에도 클럽하우스에도 팬들 앞에서도 그가 있을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대형 사고를 2004년 시즌 마지막 홈경기에 치게 되는데 그날 소사는 경기 시작 70분 전이 돼서야 경기장에 나타나 유니폼도 착용하지 않은 채 있다가, 경기가 시작한지 15분 만에 구단의 허락도 받지 않고 경기장을 몰래 빠져나가 차를 몰고 퇴근해 버렸다. 즉 무단 이탈을 한 것이다. 당연히 컵스 선수단은 격렬하게 분노하여 소사의 라커룸에 있던 그의 상징인 대형 스테레오데크[12]를 배트로 산산조각 내버린다. 메이저리그는 저마다 팀의 내부 단결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데, 마지막 홈 경기는 로스터에 등록된 선수는 모두 경기장에 남아 팬들에게 시즌 마무리 인사를 하고 클럽하우스에 모이는 관례가 일반적이다. 게다가 구설수와 트러블이 있다고 해도 소사는 시카고 컵스를 대표하는 선수이자 메이저리그의 아이콘이었다. 아무리 그의 위치가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해도 표면적으로는 컵스의 얼굴이었는데, 이런 몰상식한 행동을 납득할리가 없었다.
소사는 늘 자신의 라커룸에 대형 스테레오데크 볼륨을 최대로 높여 헤비메탈, 하드락 음악을 틀어 놓았는데, 클럽하우스 안을 쩡쩡 울리는 굉음으로 인해 선수들끼리 소리를 질러야만 대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심지어 팀이 졌을 때도 저랬다고 한다. 문제는 팀의 상징이자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그의 위상 때문에 클럽하우스 내에서 그의 행동을 감히 제지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13] 그러므로 그의 스테레오데크를 팀원이 모두 일치단결해 박살냈다는 것은 더 이상 소사를 컵스 클럽하우스 안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소사는 기자들에게 7회가 끝난 뒤 떠났다는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여 불난 집에 휘발유를 들이부었고, 결국 경기장내 주차장에 설치된 CCTV를 확인한 결과 거짓말로 탄로나서 곱절로 개망신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짐 헨드리 당시 컵스 단장은 87,4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고, 공개적으로 언론을 통해 소사의 이기적인 행위를 비난했다. 그럼에도 소사는 선수노조에 벌금액수가 부당하다는 항의를 제기하겠다는 내용을 언론에 떠들어 댄 덕분에 시카고 내에서의 이미지는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결국 컵스의 단장, 선수단, 감독, 코칭 스태프, 팬들이 함께 소사를 내보내기로 뜻을 모았고, 이 과정에서 잔여계약과 바이아웃 포함 당시 2350만 달러의 거액을 날려가면서까지 조건없이 방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람 좋은 베이커 감독 덕에 방출 대신 2005년 2월 소사는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된다. 이 과정에서 소사의 계약은 트레이드가 되면 1년이 더 개런티되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2년간 보장금액만 무려 3950만 달러로 늘어나게 되었다. 덕분에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어보이던 소사의 평판은 온갖 비난을 더해 맨틀을 뚫고 지구 중심부까지 떨어진다.
그러나 밑바닥은 더 있었는데 동시기에 메이저리거들의 약물 복용 의혹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소사는 마크 맥과이어, 라파엘 팔메이로와 함께 그 해 3월에 스테로이드 관련 의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하게 되는데, 소사는 여기서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2.5. 볼티모어 오리올스
어쨌든 볼티모어에서 팀 동료인 라파엘 팔메이로와 함께 500홈런 듀오로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성적은 0.221 14홈런 45타점으로 바닥을 쳤고, 그나마 남아있던 장타력도 선풍기질로 일관하면서 팀에 해악만 끼치는 존재로 낙인찍혔다. 시즌 후 FA로 풀렸지만, 그를 데려가려는 팀은 나타나지 않았다. 워싱턴 내셔널스가 1년 50만 달러의 계약을 제시했지만 소사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그렇게 1년을 쉬게 된다. 하지만 600홈런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은퇴할 수 없었던 소사는 2007년 친정팀인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2.6. 텍사스 레인저스 2기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고 이후 지명타자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6월 20일 시카고 컵스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대망의 통산 600홈런을 쏘아올리게 된다. 시즌 최종 성적은 0.252 21홈런 92타점. 그해 말 메이저리거들의 금지약물 복용 실태를 폭로한 '미첼 리포트'의 발표로 메이저리그 전체가 발칵 뒤집히게 되는데, 미첼 리포트에 소사의 이름은 없었으나 이후 미 법무부의 사법 처리 관련 자료에 소사가 암페타민 등 각성제를 복용한 사실이 포함되었다는 보도가 나온다. 텍사스와의 계약이 만료된 이후에도 선수생활을 지속하려 했으나 찾는 구단이 나오지 않았고, 결국 2009년 6월 3일에 공식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그리고 은퇴 선언 며칠 후 2003년 메이저리그 도핑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을 보였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빼도박도 못하는 약쟁이로 낙인찍히게 된다. 소사는 2005년 청문회에서 금지약물 복용사실을 부인했었기 때문에 위증 혐의까지 받게 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2003년 약물 검사는 비공개로 놔둘 예정이었다. 이 검사에서 걸린 데이빗 오티즈의 약물 논란이 흐지부지된 것이랑 같은 맥락이라 보면 된다.. 만, 위증이라는 것이 비공개로 하건 뭘 하건 본인이 안했다고 하고서 했다는 사실 자체가 논란이 되는 것이기에 이경우는 비공개라고 약속한게 공개되어서 위증죄의 증거로는 사용할수 없는 것이지 위증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3. 명예의 전당 입성 실패
연도 | 득표율(%) |
2013 | 12.5 |
2014 | 7.2 |
2015 | 6.6 |
2016 | 7.0 |
2017 | 8.6 |
2018 | 7.8 |
2019 | 8.5 |
2020 | 13.9 |
2021 | 17.0 |
2022 | 18.5 |
사실 금지약물 복용 전과가 밝혀지기 전에도 소사의 명예의 전당 입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다소 있었는데, 상기한 코르크 배트 사건 이후 이미지가 많이 실추된데다 호세 칸세코의 자서전을 비롯해 소사의 금지약물 복용 여부에 대해서 적발 전에도 반 확신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단지 '의혹' 만으로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실제로 적발되어 기록에 남아버린 이상 부질없는 논쟁이 되어버렸다.
2013년 명예의 전당 투표 첫 턴에서는 12.5%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2014년도에는 7.2%로 겨우 후보자격만 유지했다. 2015년도 역시 6.6%로 간신히 유지하는 선에 그쳤다. 그나마 2016년에는 7%로 약간 오르긴 했다. 2017년 투표에서는 8.6%를 득표하여 역시 소폭 올랐다.
다만 2017년 투표에서 로저 클레멘스와 배리 본즈는 각각 54.1%와 53.8%를 득표한 상황이라 일부에선 소사에게 좀 박하다는 의견도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소사와 본즈, 클레멘스는 비슷한 선상에 둘 수가 없는 수준이다. 소사가 전국구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사실상 1998년 맥과이어와의 홈런 레이스때였고, 그때부터 5년간은 리그를 지배하는 슬러거였던 것은 사실이다. 헌데 소사가 데뷔하던 무렵부터 본즈는 이미 MVP를 수상한 건 물론 30세부터는 거의 당장 은퇴해도 명예의 전당 입성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알버트 푸홀스나 마이크 트라웃같은 어린 시절부터 대성한 선수였으며 1998년까지 3번의 MVP, 도루왕, 홈런왕, 출루율1위 4회, 40-40클럽, 역대 최초 400홈런-400도루에 골드글러브 8회 수상 등[14] 선수로서 이룰건 다 이룬 괴물이었다. 당시 본즈는 성적상으로 윌리 메이스와 동등한 선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15] 소사의 5년 중에서도 사실상 본즈보다 우세하다 할 수 있는 건 1998~2000년 단 3년에 불과하고, 그마저 1999년도는 본즈가 부상으로 단 102경기만 출전했고, 2000년도는 홈런 1개 차이로 소사가 홈런왕이 되었던 것 뿐, 타격 전반의 성적을 고려하면 소사의 우세라고 보기도 어렵다. 거기다 본즈의 약물 적응기를 끝내고 복용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2001년부터는 비교하면 2001년을 제외하고는 비참한 수준으로 격차가 크다.[16]
클레멘스 역시 성적만 놓고 보면 투수로서 메이저리그에서 차지하던 위상은 배리 본즈 못지않을 정도로 위대하다. 우선 클레멘스는 통산 성적부터 라이브볼 시대 톰 시버와 함께 우완투수 최고로 꼽히며, 약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의 위력은 사이 영 상 3회로 설명이 끝난다. 즉 시대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보스턴 시절만 놓고 봐도 이미 밥 펠러, 톰 시버, 밥 깁슨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토론토 이적 이후로도 활약했으니 통산 성적만 놓고 보면 월터 존슨 이후론 근 100년간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꼽을 수 있는 우완투수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17] 일반적으로 토론토로 트레이드 된 이후 약물을 사용했다고 추정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약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보스턴 시절만 딱 놓고 봐도 명예의 전당 입성에는 무리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근래 본즈와 클레멘스의 득표율이 올라가는 것에는, 약물복용 이전의 모습만으로도, 또는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 은퇴했어도 당연히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는 선수라는 인식이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본즈의 경우에는 약물 사용이 의심되는 1999년 이후의 기록을 전부 삭제해도 명예의 전당 입회가 가능한 수준이다. 새미 소사는 이들의 위치와는 아득히 떨어져 있는 선수이며, 시즌의 임팩트나 스타성 면에서는 마크 맥과이어에도 못 미친다고 봐야한다.[18]
2018년은 7.8%로, 배리 본즈와 로저 클레멘스 둘다 56.4%, 57.3%을 기록하며 소폭 오른 것에 비해 오히려 다시 떨어지면서 이젠 후보자격 유지 자체를 걱정해야할 판이다. 2019년에는 8.5%를 기록하며 무난하게 장기투숙하다 그대로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2020년엔 13.9%를 기록하며 눈에띄게 오르긴 했지만 워낙 득표율이 낮으니 거기서 거기.
소사의 기록에 비해 평가가 많이 떨어지는 건 약물보다는 코르크배트 사건 이후 대응과 컵스에서 내몰리는 과정에서 보인 무개념이 더욱 큰 원인이다.[19] 그 사건 이전까지 비록 클럽하우스 내에서는 불만이 있을지언정 소사의 문제점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맥과이어와의 경쟁에서 보여준 좋은 이미지와 파워풀한 스윙, 친근함과 미소로 팬들의 사랑을 받아 대중적인 호감도도 높았다.[20] 그러나 어찌보면 약물보다 더 비겁하게 느껴질 수 있고 기록의 가치 훼손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도구적 속임수라는 면에서, 코르크 배트 사용은 대중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실망으로 다가왔다. 즉 소사는 지금까지 코르크 배트를 사용해서 부정하게 홈런을 쳐왔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며, 그 동안의 기록과 세기의 홈런 레이스마저 부정한 배트의 힘으로 기록되었다는 선입견을 남겨버린 것이다.
더구나 소사가 보여준 그동안의 선량하고 좋은 인상 때문에 더욱 반감이 심해졌는데, 이 과정에서 소사의 대응은 미국인들의 정서 상 가장 안좋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다수의 미국인들은 '쿨병'이라 표현해도 될 만큼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사고를 친 당사자가 즉각 확실하게 인정하고 사과한 다음 책임을 지는 형태로 가는 것을 선호한다. 법적 처벌이 뒤따를 정도로 명백한 범죄행위가 아닌 한 계속 그 사고에 대해 질책하거나 물고 늘어지는 경우는 드물고 피해자가 납득할만한 사후처리를 원인 제공자가 이미 했음에도 특정 사건을 계속 들먹이며 물고 늘어지는 쪽이 있으면 그쪽에 더욱 큰 비난을 가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가까운 예로 약물복용 의심 기사가 나온 이후 앤디 페티트와 로저 클레멘스의 대응 방식을 비교하면 이해가 빠르다. 그리고 이후 페티트와 클레멘스에 대한 대중들의 상반된 태도와 현재까지의 평가 역시 극명하게 갈리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미국 특유의 '아메리칸 드림' 정서에서 볼 수 있듯, 잘못을 범해도 충분히 사과하고 책임을 진다면 다시금 기회를 주는 것에 관대한 편이다.
그러나 소사는 사건이 벌어진 후 사과보다는 책임을 회피하고 발뺌만 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마지못해 변명으로 계속 일관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팬들의 실망감을 몇배로 키워버리고 '사기꾼'(Cheater)이라는 선입견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켜버린 것이다. 게다가 여론이 계속 악화되어 갈수록 언론 플레이에 의존하고 자기합리화 하는 모습으로 헛발질을 반복하면서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잃고 말았다. 더구나 안좋은 선입견으로 바뀌어리자마자 컵스 팀의 분위기를 해치는 행동과 발언이 연속적으로 터져나와 소사의 부정적 이미지는 계속 증폭되어 갔으며, 결국 클럽하우스 내에서의 개념없고 독선적인 모습까지 언론에 퍼지면서 되돌릴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렸다. 이렇게 악화될대로 악화되었으면 자중하면서 야구에 집중해서 실력으로 묵묵히 보여도 모자랄 판에, 팀을 무단이탈하고 선수, 코칭스탭, 구단, 팬 모두의 존중을 잃은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약물선수들보다 훨씬 더 극한인 상황인데, 여기에 약물복용 위증과 약물 적발건까지 연달아 추가되면서 소사의 이미지는 아예 회복 불가능이 되었다. <마지못한 사과와 변명>,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책임 회피>, <뻔뻔한 거짓말>, <속임수와 부정도구로 얻은 실적> 이 넷은 미국인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고려할 때 가장 부정적으로 느끼는 것들이다. 이중에 하나만 있어도 치명타인데 소사는 짧은 기간에 이 4개의 사항을 모두 해냈다. 때문에 시카고 팬들과 컵스 구단이 소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카고 컵스의 상징이었고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역사에 남을 기록들을 여러개 달성하고도 아무도 소사를 찾지 않고 관심도 보이지 않으며 언급도 최대한 피하고 있다. 어지간히 구단과 안좋게 끝나더라도 위대한 업적을 세운 선수들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구단이 앙금을 풀고 초빙하게 되는데[21] 소사의 경우는 아무리 약물을 했더라도 업적만으로 보면 영구결번이 너무나도 당연히 진행되었어야 했고 소사 본인도 바라고 있는 중이지만, 컵스 구단과 팬들은 그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을 정도다.
비슷한 입장인 본즈만 해도 역시 소사와 비슷한 부정적인 행동들로 비판의 대상이며, 언론과의 사이도 영 좋지 않지만, 그래도 팀에 대놓고 큰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기에 고향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버림받지는 않았고 영구결번도 받은데다 팬들도 '우리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대접은 받고 있고, 동시기 홈런 레이스의 경쟁자였던 마크 맥과이어 역시 약물복용 전과가 있었음에도 친정팀 카디널스에서 타격코치로 지내면서 타율과 출루율 1위팀으로 만들었고, 2011년 월드시리즈까지 우승시키면서 코치로서 능력도 인정받았을 뿐더러, 카디널스 선수들로부터 존경까지 받고 있고[22] 심지어 대놓고 도박으로 영구제명된 피트 로즈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신시내티 레즈 구단의 명예의 전당과 영구결번을 받는 등 그래도 구단에게 최소한의 예우는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소사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몰상식한 짓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 와중에도 소사는 여러차례 언론에 컵스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고 영구결번 시켜달라고 징징대는 모습을 보여 냉대와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약물 복용 여부 및 비호감적인 행적과 관계 없이 세이버매트릭스의 보편화 이후 객관적인 성적에 대한 평가도 서서히 떨어지는 중이다. 정확히는 소사의 경우엔 타격에 있어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장점이 오로지 똥파워 뿐이었다는 말이다. 우선 그의 커리어 OPS+는 128인데 이는 객관적으로 그리 낮아보이지는 않지만 600개를 넘어가는 통산 홈런을 쌓은 압도적인 장타력에 비하면 심각하게 낮은 수치이다. 참고로 맥과이어의 경우는 통산 출루율이 생각보다 높은 OPS 히터로 OPS+가 163이며 홈런을 상술한 둘보다 덜 친 편인 블라디미르 게레로의 경우는 타출장이 전반적으로 고르게 높아서 OPS+가 140이다. 비록 소사가 1998년부터 2002년까지의 전성기 동안에는 출루율도 상당했고 객관적으로 생산성도 좋았지만[23] 이 때 외에는 홈런은 많아도 타격 생산성은 이에 비해 한참 낮았던 것. 그래도 장타력은 확실했고 홈런이 워낙 많은데다 수비, 주루가 극악한 수준은 아니었던지라[24] WAR은 60내외 수준인 데다가 MVP도 1위 1회, 2위 1회가 있어서 아무리 세이버로 인해 평가가 떨어졌더라도 상술한 금지약물 논란이나 본인의 행실을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성적 측면에서만 놓고 보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는 수준은 당연히 된다. 그래도 순수하게 타격만 보면 홈런만 많이 친 장타력 원툴 소사는 균형 잡힌 타격을 선보인 맥과이어와 게레로에 비하여 뒤떨어지는 것이 분명한데다 소사의 무시무시한 장타력 역시 결국 약물의 힘을 받은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평가가 다른 약물 복용자들보다도 더욱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예의 전당 득표율 상승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실제로도 10년차에도 그렇게 되었다. 행적들부터 '명예'와 지극히 거리가 먼 일이며, 명예의 전당 입성을 위해 측면으로 지원하고 홍보할 수 있는 지원군인 구단도 소사를 외면하고 있다. 컵스의 열성 팬들조차 구단만큼 냉랭하고 무관심하게 소사를 대하고 있는데 5% 미만으로 탈락이 안 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봐야할 것이다.
2021년 9번째 투표도 17.0%로 역시나 처참한 지지율을 기록했고 마지막 투표인 2022년 투표에서도 18.5%에 그치며 마침내 최종적으로 기자단 투표에서는 탈락했다.[25] 결국 베테랑 위원회를 통한 입성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 되었지만 소사 본인의 이미지가 너무 처참한 탓에 베테랑 위원회를 통한 입성 가능성도 논하는 이는 드물다.
4. 여담
- 야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14세이다. 남들보다 야구를 꽤 늦게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재채기를 하다가 허리가 삐끗해서 15일자 부상자 명단에 올랐던 적이 있다. 실제로 재채기를 하다가 허리를 삐끗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재채기가 온몸에 의외로 부담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 잘못하면 걸음도 못 걷는다!
- 2002년 초, 이승엽이 초청선수 자격으로 시카고 컵스 스프링캠프를 방문했을 때 소사와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팔뚝 크기가 가히 압권으로, 옆에 있는 이승엽은 거의 말라깽이 수준. 참고로 이때 새미 소사를 만난 이승엽은 그의 벌크업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자신도 무리하게 벌크업 하다가 결국 부상을 당했다. 저게 약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 박찬호가 새미 소사를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였는데, 통산 42타석 동안 .194 .310 .472 3홈런 8타점 13삼진을 기록했다.
- 김병현도 새미 소사를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통산 11타석 동안 .091 .091 .364 1안타 1홈런 7삼진을 기록했다. 다만 김병현은 자기가 상대한 타자들 중 새미 소사가 제일 껄끄러웠다고 한다.
- 2009년부터 앓기 시작한 백반증이 점점 심해져서 2013년 이후의 모습은 그야말로 과거의 소사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백반증이 심해진 나머지 피부가 거의 백인 수준으로 변했다. 이것 역시 스테로이드 부작용 중 하나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호르몬 계열 약물의 부작용 중 하나가 면역체계를 무너뜨리고 신경계의 교란을 가져오기 때문. 2018년 사진을 보면 백인보다 더 하얘져서 괴물같이 보일 정도. 본인은 표백크림을 썼다고 급히 해명을 하긴 했는데 피부색의 급 탈색이라든가.. 현역시절에도 입만 열면 거짓말에 아무말 대잔치의 대가였던 소사이기에 좀 글쎄올씨다...
- 상술한 전설적인 홈런 레이스의 경쟁자였던 마크 맥과이어와 절친한 사이이다. 각자 라이벌리 관계에 있는 팀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의의 경쟁자로서 빅맥이 먼저 로저 매리스의 기록을 뛰어넘었을 때도 기꺼이 축하를 보내주고 서로를 격려하는 등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냈으나...
- 한국에서는 완전히 약물 복용 선수로 분류되고 있다. 별명도 약물+소사 = 약사. 이후 야구선수 김재환이 약물 양성이 나오면서 약재환으로 불리고 있고, 동명이인 가수 지망생 김재환이 프로듀스 101 시즌2에 나오자 동명이인이라는 이유로 엠엘비파크에서 그를 약사라고 불렀다.
- 미국 어느 드라마에서 수사관인 주인공이 소매치기하려던 어린 흑인 아이를 잡았다가 놔주는데 이름이 뭐냐? 라고 질문하는 게 나온다. 아이는 "새미요."라고 대답하고 성은 뭐냐고 하니까 달아나면서 하던 말이 "소사요!" 당연히 주인공 얼굴이 어이없는 얼굴이 되어버린다.
- 메이저리그 역대 우타자들 중 가장 많은 삼진을 당했다.
5. 연도별 기록
새미 소사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ffffff,#191919>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89 | TEX/CHW | 58 | 203 | 47 | 8 | 0 | 4 | 27 | 13 | 7 | 11 | 47 | .257 | .303 | .366 | .669 | -0.4 | -0.4 |
1990 | CHW | 153 | 579 | 124 | 26 | 10 | 15 | 72 | 70 | 32 | 33 | 150 | .233 | .282 | .405 | .687 | 0.4 | 0.5 |
1991 | 116 | 338 | 64 | 10 | 1 | 10 | 39 | 33 | 13 | 14 | 98 | .203 | .240 | .335 | .576 | 0.5 | 0.6 | |
<rowcolor=#ffffff,#191919>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92 | CHC | 67 | 291 | 68 | 7 | 2 | 8 | 41 | 25 | 15 | 19 | 63 | .260 | .317 | .393 | .710 | 0.8 | 0.6 |
1993 | 159 | 641 | 156 | 25 | 5 | 33 | 92 | 93 | 36 | 38 | 135 | .261 | .309 | .485 | .794 | 4.6 | 4.1 | |
1994 | 105 | 458 | 128 | 17 | 6 | 25 | 59 | 70 | 22 | 25 | 92 | .300 | .339 | .545 | .884 | 3.8 | 3.8 | |
1995 | 144 | 629 | 151 | 17 | 3 | 36 | 89 | 119 | 34 | 58 | 134 | .268 | .340 | .500 | .840 | 5.2 | 5.3 | |
1996 | 124 | 541 | 136 | 21 | 2 | 40 | 84 | 100 | 18 | 34 | 134 | .273 | .323 | .564 | .888 | 5.5 | 5.4 | |
1997 | 162 | 694 | 161 | 31 | 4 | 36 | 90 | 119 | 22 | 45 | 174 | .251 | .300 | .480 | .779 | 2.5 | 2.5 | |
1998 | 159 | 722 | 198 | 20 | 6 | 66 | 134 | 158 | 18 | 73 | 171 | .308 | .377 | .647 | 1.024 | 7.1 | 6.5 | |
1999 | 162 | 712 | 180 | 24 | 2 | 63 | 114 | 141 | 7 | 78 | 171 | .288 | .367 | .635 | 1.002 | 5.3 | 4.8 | |
2000 | 156 | 705 | 193 | 38 | 1 | 50 | 106 | 138 | 7 | 91 | 168 | .320 | .406 | .634 | 1.040 | 5.8 | 5.7 | |
2001 | 160 | 711 | 189 | 34 | 5 | 64 | 146 | 160 | 0 | 116 | 153 | .328 | .437 | .737 | 1.174 | 9.9 | 10.3 | |
2002 | 150 | 666 | 160 | 19 | 2 | 49 | 122 | 108 | 2 | 103 | 144 | .288 | .399 | .594 | .993 | 5.1 | 5.8 | |
2003 | 137 | 589 | 144 | 22 | 0 | 40 | 99 | 103 | 0 | 62 | 143 | .279 | .358 | .553 | .911 | 2.8 | 2.7 | |
2004 | 126 | 539 | 121 | 21 | 0 | 35 | 69 | 80 | 0 | 56 | 133 | .253 | .322 | .517 | .849 | 2.3 | 1.3 | |
<rowcolor=#ffffff,#191919>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2005 | BAL | 102 | 424 | 84 | 15 | 1 | 14 | 39 | 45 | 1 | 39 | 84 | .221 | .295 | .376 | .671 | -1.4 | -1.0 |
<rowcolor=#ffffff,#191919>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2007 | TEX | 114 | 454 | 104 | 24 | 2 | 21 | 53 | 92 | 0 | 34 | 112 | .252 | .311 | .468 | .779 | 0.3 | 0.1 |
MLB 통산 (18시즌) | 2354 | 9896 | 2408 | 379 | 45 | 609 | 1475 | 1667 | 234 | 929 | 2326 | .273 | .344 | .534 | .878 | 60.1 | 58.6 |
[1] 1990년대 후반 맥과이어와 벌였던 세기의 홈런 레이스는 지금도 종종 회자될 정도. 당시 맥과이어와의 홈런 레이스는 선수 노조 파업 이후 인기가 바닥을 기던 메이저리그를 되살려내었다.[2] 스테로이드 시대를 대표하는 약쟁이들 중 가장 처참히 몰락한 편에 든다. 본즈는 그래도 약물 복용 외에도 나쁜 성격에 대해 욕은 먹지만 약 복용 전으로 추정되는 시점의 성적이 이미 명전급이었던 데다가 맥과이어는 추한 모습은 보였어도 타격코치로써 본인의 능력을 입증해냈다. 게다가 약쟁이 먹튀의 상징 알렉스 로드리게스마저도 성적과는 별개로 엄청난 스타성으로 인해 양키스 팬덤에게 얻어먹은 어마어마한 욕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해설 등의 역할로 멀쩡히 잘 활동 중인 반면 소사는 코르크 배트 사건 이후로는 거의 팬들에게 비호감이 될 만한 행동만 했으며, 결정적으로 소사의 이미지가 이전엔 메이저리그에서 손에 꼽게 좋았던 게 컸다. 약물 복용으로 이미지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더욱 급격히 추락하였기 때문. 실제로 맥과이어는 이미 은퇴한 후이기도 했어서 소사에 비하면 그렇게까지는 떨어지지는 않았고 본즈와 에이로드는 이미 태도 논란으로 구설수가 많은 상태였기에 이미지가 좋았다고 볼 순 없었기에 약물 복용 후에도 이미지가 추락하긴 했지만 이미지 자체는 약 빤게 들키기 전에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3] 이 계약금으로 소사는 자전거 1대를 사고 나머지는 어머니에게 보냈다고 한다[4] 장타력이 돋보이던 경쟁자 유망주 후안 곤잘레스와는 대조되는 스타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고르는 이후 10년 가까이 텍사스의 주전으로 자리잡게 된다.[5] 트레이드 상대는 조지 벨이었는데, 무려 87년 MVP 출신이다(!) 그러나 조지 벨은 이후 출루율 3할도 못 찍으면서 몰락한다.[6] 홈런 레이스가 벌어지는 기간 내내 미디어의 초점은 세인트루이스와 시카고 두 팀에 경기에 집중 되고 시청률은 월드시리즈를 월등히 넘어설 정도였다. 특히 60홈런에 도달했던 시점부터는 그야말로 전 세계의 이목이 이들에게 쏠려 한국도 스포츠 신문들의 1면마다 58,59, 60 숫자가 도배되곤 했다. 심지어 맥과이어의 62홈런 기록은 스포츠 뉴스가 아닌 KBS, MBC 9시 뉴스에 5분 가까이 할애될 정도로 화제가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가장 빛내준 것은 로저 매리스의 유족도, 맥과이어의 아들도 아니었고, 홈런이 살짝 넘어가는 순간 외야에서 전력 질주로 달려와 맥과이어를 부둥켜안고 자기 일처럼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던 소사의 몫이었다. 방송과 언론에서는 연일 새미 소사의 아름다운 격려와 승자를 배려하는 멋진 라이벌 관계에 대한 찬사를 보냈으며, 이러한 대중의 호감과 위대했던 2위에 대한 아쉬움과 연민, 팀의 포스트시즌 공로를 더해, 소사는 MVP 투표에서 홈런왕 맥과이어를 큰 차이로 제치고 수상하게 되었다.[7] 실제로 2001~2004년 전부 볼넷을 제외한 타석당 홈런 개수는 본즈가 1위였다.[8] 여담으로 소사는 2003년 4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의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투수인 살로몬 토레스가 던진 직구에 헬멧이 파괴될 정도로 머리를 강타당하였다. 물론 이건 소사가 잘못한 것이 당연히 아니었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절대 몰락한 건 아니었다.[9] 다만 디스커버리 채널의 유명 프로그램인 Mythbusters에서 코르크 배트로 실험한 결과, 낮은 무게로 인한 스윙 스피드 증가율보다 낮은 밀도로 인한 비거리 감소율이 더 커서 슬러거가 쓰기에는 영 좋지 못하다며 코르크 배트의 효과에 대해 부정했다.[10] 조사 결과 그가 가진 배트 중 부정배트는 1개 뿐이었고 평소 시합 때 쓰던 배트와 차이가 있었기에 소사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기는 했다. 소사의 다른 배트를 전량 수거하여 (76개) 검사한 결과 코르크 배트는 없었다. 명예의 전당에 기증되었던 그의 배트도 조사 대상이었으며, 엑스레이 사진은 깨끗했다. 참고로 당시 심판이었던 팀 맥클레랜드는 1983년 조지 브렛의 파인타르 배트 사건 당시 주심이었고, 부정배트 킬러로 유명하다.[11] 내년엔 몸 상태를 잘 관리해 줄 것을 요청한 더스티 베이커 감독의 발언을 전해듣고 '팀 실패의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감독에게 진절머리가 난다'는 취지로 선수단과 감독을 공개적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등 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다. 더스티 베이커는 혹사로 논란이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좋기로 유명하고 선수들과 상호간에 무한 신뢰로 유명한 명감독이다. 그 호세 칸세코도 자서전에서 다른 사람은 까도 베이커는 극찬을 할 정도. 즉 선수단 전체가 존경하고 따르는 아버지같은 존재였는데 팀의 상징인 소사가 공개적으로 감독의 요청을 무시하고 대놓고 언론에 감독을 모욕했으니, 선수단이 소사에게 실망하여 등을 돌릴 수 밖에 없다.[12] 당시 기종은 파나소닉의 SC-AK33.[13] 최희섭이 루키 때 음악 소리가 매우 시끄러워 소사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때 데크 볼륨을 확 줄여버린 일이 있었다. 소사가 돌아오자마자 '어떤 겁대가리 없는 새끼가 감히 내 데크를 손댔냐!' 하고 2번이나 큰소리를 내지르는 바람에 클럽하우스가 순간 얼음이 되었다는데 다행히 최희섭이 자세히 설명을 했더니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갔다는 일화가 있다.[14] 그것도 중견수가 수상을 독차치하던 시절에 좌익수로 달성한 성과다.[15] 게다가 1998년 시점까지도 본즈는 약물을 공개적으로 비웃고 경멸하던 쪽이었는데(마크 맥과이어가 당시 금지약물이 아닌 안드로 복용 사실을 공개했을때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인터뷰 내용도 있다.), 훨씬 수준높고 차원이 다른 야구를 하는 자신이 단순히 홈런 갯수에 밀린다는 이유로 주목을 덜 받게 되자 격분해서 약물 복용하고 야구의 신이 되어버린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16] 거기에 본즈와 달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편들어줄 유명 야구인도 없다는것도 투표에서의 가능성이 떨어짐에 한몫한다. 본즈는 아버지 바비 본즈와 스승 윌리 메이스부터 해서 친구까지 든든한 방패가 되주었지만 소사에겐 그런게 없었다.[17] 게다가 클레멘스는 역대 최다 사이 영 상 수상자인데다 통산 fWAR로는 월터 존슨마저 뒷주자로 둔다.[18] 맥과이어는 약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 데뷔시즌부터 역대 신인 최다 49홈런을 때려낸 괴물이며, 1990년대 초반까지 투고타저가 극심하던 시절에도 홈런 3위안에 늘 끼어있고 40홈런 언저리를 날리던 거물이었다.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1996년에는 52홈런, 1997년에는 58홈런으로 2년 연속 50홈런을 때리고 신기록을 기대하게 만들던 당대 최고의 스타이기도 했다. 인기와 스타성에서도 켄 그리피 주니어에 필적하던 선수였고, 역사적인 1998시즌의 신기록으로 메이저리그의 구세주이자 영웅이었으니. 그리고 맥과이어는 타격 생산성이 객관적으로 소사보다 우위였기에 누적 홈런이 더 많다고 해서 소사의 위치가 맥과이어의 위라는 인식은 거의 없다.[19] 왜냐하면 소사는 애초에 비공개로 남겨둘 예정인 검사에서 약물이 걸렸고, 이후에 미첼 리포트에서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비공식 검사에서 걸린 데이비드 오티즈는 아예 첫 턴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다만 전성기가 비공개 검사를 한 2003년 이후인 오티즈와는 달리 소사는 2003년이 마지막 전성기 시즌이라는 차이점은 있다.[20] 게다가 당시 신이 된 배리 본즈를 제외한다면 소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타자는 알렉스 로드리게스, 토드 헬튼, 짐 토미 등 몇몇에 불과했다.[21] 대표적인 예로 프랭크 토마스가 있다. 부상과 노쇠화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사이가 벌어지면서 오클랜드로 이적했음에도 39홈런 114타점으로 재기에 성공하고 500홈런까지 달성했다. 은퇴 이후엔 화이트삭스가 먼저 손을 내밀면서 구단과 화해하고 등번호 35번을 영구결번하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토마스는 1990년대에 이미 약물 검사를 도입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등 약물과는 백만광년 떨어진 청정타자이기도 하고 청정 타자였던 것을 빼고 봐도 훌륭한 타격 생산성이 이후 세이버매트릭스의 도입으로 인해 재평가되며 평가가 급상승했다.[22] 이쪽은 젊었을 땐 위증 논란으로 인해 비판받았지만 오히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철이 들었는지 본인의 약물 복용을 인정하고 명예의 전당 입성설을 일축해 이미지가 크게 나아졌다.[23] 전성기 시절에는 고의사구의 영향도 있긴 했지만 볼넷을 적지 않게 얻어내어 출루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2000년과 2001년을 제외하면 출루율이 4할도 못 넘었고, 타출갭이 1할을 넘긴 것도 커리어하이인 2001년과 마지막으로 MVP 컨텐더급 성적을 낸 2002년이 끝이므로 선구안도 전성기를 빼고 보면 좋다 보기 어렵다. 보통 소사 정도의 거포에게는 실투를 던지는 순간 무조건 홈런을 얻어맞는다는 공포를 투수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용감하게 승부를 걸기보다는 존 밖으로 빼는 유인구를 더 많이 던지므로 소사가 더 많이 공을 보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24] 맥과이어와 게레로는 타격 외에 WAR을 까먹은 게 꽤 된다.[25] 소사처럼 2003년 비공식 검사에서 적발된 데이빗 오티즈는 첫 턴에 입성한 것과 대비되는 결과이다. 이는 소사가 전술한 코르크 배트 파동 등으로 이미지를 구겼고, 전성기가 2003년부터 시작된 오티즈에 비교해서 소사는 2003년을 기점으로 전성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소사는 통산 600홈런 이상을 치고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탈락한 최초의 우타자로 이름을 남기는 크나큰 불명예를 떠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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