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1-26 00:17:22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



1. 개요2. 배경3. 진행4. 파업 사태가 남긴 교훈5. 파업으로 인한 피해6. 여담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940822_400.jpg

1994-95 Major League Baseball strike

1. 개요

샐러리캡 도입 문제를 둘러싸고 1994년 8월부터 1995년 4월까지 진행된 메이저리그 베이스볼파업 사태. 이 사건을 기준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선수단의 파업이 실시된 것은 8번째이고, 시즌 중단이 이루어진 것은 4번째이지만 아예 정규시즌 잔여 경기 및 월드 시리즈자체가 취소되는 파행을 겪은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마지막이기도 하다.[1]

2. 배경

1973년 메이저리그 최초로 FA 제도가 도입된 이후, 선수들의 연봉은 해가 지날수록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치솟는 연봉은 구단주들의 골칫거리가 되었고, 이들은 연봉 문제를 적절하게 손보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리그 시스템이 붕괴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는다.[2] 특히나 스몰마켓이었던 구단들을 중심으로 샐러리캡을 도입하자는 주장[3]이 제기된다. 샐러리캡 제도의 실시에 대하여 선수노조가 거세게 반발할 것은 불보듯 뻔한일이었지만, 1994년 1월 18일 구단주 회의에서 구단주들은 샐러리캡 제도를 장기적으로 도입할 것을 의결하고 모든 권한을 당시 메이저리그의 커미셔너였던 버드 셀릭에게 일임한다. 하지만 샐러리캡 도입을 위해서는 선수노조의 동의가 필수적이었고, 그렇게 구단주와 선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된 채로 1994년 메이저리그가 개막한다.

3. 진행

시즌 내내 교섭 시도가 진행되지만, 선수노조는 구단주 측과 사무국을 철저히 불신하였다. 이 당시 버드 셀릭밀워키 브루어스의 구단주 자리도 겸임하고 있어서 구단주들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대변할 것이라는 선수노조의 의심이 강했기 때문.[4] 1994년 6월 14일 구단주 측은 샐러리캡의 도입과 연봉조정 제도 철폐 / FA 기한 축소를 골자로 한 제안을 내놓지만, 이 제안은 선수노조에 의하여 곧바로 거부당한다. 이어서 선수노조는 구단주 측이 9월까지 샐러리캡 안건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플레이오프를 보이콧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점차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구단주와 선수 사이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상황에서, 파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당시 미국 상원에서 상정되었던 반(反)트러스트 법안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샐러리캡 도입과정에서 구단주들이 보여준 합의는 카르텔 행위로 규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샐러리캡 도입 자체가 무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월 28일 상원에서 해당 법안은 부결되었고, 점차 모두가 설마했던 파업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7월 28일 노조는 8월 12일에 파업을 실시할 것을 결의했고, 마침내 8월 12일이 되자 파업이 현실로 옮겨졌다.

파업 이후에도 양측은 계속하여 협상을 지속하였지만 견해 차이가 너무나도 뚜렷했다.[5] 결국 9월 14일 커미셔너 버드 셀릭은 월드 시리즈를 포함한 잔여 경기의 취소를 발표한다. 억만장자 구단주와 백만장자 선수단 사이에서 벌어진 추악한 이권 싸움으로 인해 빚어진 초유의 상황에서 팬들의 분노는 폭발했지만, 여전히 선수노조와 구단주 측의 입장 대립은 첨예했다. 1994년 12월 구단주 측이 압도적인 찬성 속에 샐러리캡의 도입을 재가결하자, 선수노조 역시 당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재된 선수들 전원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맞받아친다(...)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자, 급기야 정치권에서도 나서기 시작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구단주와 선수노조 대표들을 한데 모아놓고 "1995년 2월 6일까지 협상을 마치고 1995 시즌은 정상적으로 진행할 것"을 요구한다.

1995년 2월 1일, 구단주들은 마침내 샐러리캡 안건을 포기하면서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나 했지만, 선수노조 측이 샐러리캡 뿐만 아니라 연봉조정 제도 철폐를 비롯한 모든 안건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면서 상황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진다. 구단주 측은 이에 대체 선수를 동원하여 리그를 개막하겠다고 맞받아쳤고, 같은 해 3월에는 연방대법원에서 대체 선수를 동원한 리그 개막이 적법하다는 판결이 내려지면서 결국 4월 2일 장장 232일에 걸친 파업은 종료된다. 물론 파업을 종료했다고 바로 리그를 개막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1995 시즌은 본래 162 경기에서 18경기가 단축된 144경기 체제로 치러졌다.

4. 파업 사태가 남긴 교훈

이렇게 구단주들과 선수노조의 다툼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었고, 결국 구단주들이 먼저 한발 양보하며 샐러리캡을 대신할 제도로 사치세(Luxury Tax)를 도입하게 이른다. 1997년부터 3년간 시범적으로 사치세를 운용했고,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치세를 도입했다. 최초의 사치세는 연봉 총액 상위 5개팀에게 부과, 연봉 총액 상위 5위팀과 6위팀의 중간값에서 초과된 금액의 34%를 MLB사무국에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2003년부터는 1997년에 도입한 사치세 방식을 비슷하게 운용하되, 사치세를 내는 구단의 누적 횟수에 따라 세율을 상향 차등 적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6]

사치세 도입으로 빅마켓 팀에서 거둔 돈을 스몰마켓 팀들에게 분배하게 됨으로써 스몰마켓 팀들은 구단 운영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인 가운데, 2000년대 초 닷컴열풍으로 인한 인터넷 수입, 중계권료, 굿즈판매 등의 새로운 수익구조가 생기면서 MLB사무국은 이익의 균등분배를 꾀할 수 있었다. 이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빌리 빈 단장의 머니볼 등의 새로운 구단 운영기법이 도입되면서 스몰마켓 팀들도 드래프트와 해외 스카우팅을 통한 유망주 확보, 세이버메트릭스를 이용한 선수단 관리 등 혁신적인 구단 운영이 가능하게 됐다. 이를 통해 미네소타 트윈스, 탬파베이 레이스, 캔자스시티 로열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 만년 하위팀들도 2000년대 말~2010년대에 상위권으로의 도약 내지 우승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5. 파업으로 인한 피해

이 해부터 양대 리그의 동부/서부의 2개 지구를 각각 동부/중부/서부 3개 지구로 나누는 방안이 도입됐다. 또한 기존의 리그 동부/서부 지구 우승팀간 '챔피언십 시리즈-월드 시리즈'의 2단계 플레이오프 구조를 '디비전 시리즈-챔피언십 시리즈-월드 시리즈'의 3단계 구조로 재편하는 방안도 도입되었고, 늘어난 플레이오프 진출 기회에 팬들의 반응은 무척 뜨거웠다.[7]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파업으로 인해 도로아미타불.

사실 1994 시즌은 파업 전까지만 하더라도 굉장히, 매우 성공적인 시즌이었다. 양대 리그 3개 지구 개편-포스트시즌 개편 뿐만 아니라, 토니 그윈테드 윌리엄스 이후 최초의 정규시즌 4할 도전이라든가[8] 맷 윌리엄스의 한 시즌 최다홈런(로저 매리스의 61개) 경신 등 대기록 달성 여부에도 귀추가 주목됐다. 나중에 약빨임이 들어난 맷 윌리엄스는 제쳐두더라도[9] 특히 토니 그윈의 4할 도전 중단이 매우 아쉬웠는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1994 시즌 117번째 경기까지 그윈은 타율 .394를 기록하고 있었다. 시즌이 중단되기 전까지 한 달간 .450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페이스를 한껏 올리고 있던 터라 매우 아쉬웠다.

1994년의 파업으로 스몰마켓이었던 팀의 피해 역시 매우 컸고, 그 중에서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피해가 가장 컸다. 당시 엑스포스는 1992 시즌부터 3년간 플옵권 팀을 만들기 위해 팜을 재정비하고 있었고 1994 시즌에 그 결실을 이루며 13년 만에 가을야구를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1994 시즌 중단 전까지 엑스포스는 74승 40패를 거두며 양대 리그 승률 1위를 달리고 있었고 페이스를 그대로만 유지한다면 시즌 105승도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가을야구 진출 시 벌어들일 수 있는 2000만여 달러의 수익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업으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결국 엑스포스는 젊은 선수들의 인상된 연봉을 감당하지 못하여 '눈물의 폭풍세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95 시즌 이후 5년 동안 빠져나간 선수만 해도 마퀴스 그리솜, 래리 워커, 켄 힐, 존 웨틀랜드, 모이세스 알루, 페드로 마르티네스 등 한마디로 기둥이 들려나간 것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엑스포스는 이 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2004 시즌을 끝으로 워싱턴 D.C.로 연고이전을 단행한다.

1994 시즌 중단을 기준으로 가을야구 진출이 가능한 팀은 뉴욕 양키스(AL 동부)[10], 시카고 화이트삭스(AL 중부), 텍사스 레인저스(AL 서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AL 와일드카드), 몬트리올 엑스포스(NL 동부), 신시내티 레즈(NL 중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NL 서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NL 와일드카드)[11] 등이었다.

6. 여담

  • 상술했듯이, 억만장자 구단주와 백만장자 선수 사이의 추악한 이권 다툼으로 인하여[12] 가장 큰 상처를 받은 것은 팬들이었고 1995년 메이저리그는 전년도와 비교해서 상당한 관중 감소를 기록했고 이는 이후로도 몇 년 동안 이어진다. 이처럼 쇠락한 메이저리그의 인기를 되살리기 위해 MLB사무국에서는 인터리그를 도입했다. 그리고 1996년 칼 립켄 주니어의 2131경기 연속출장 신기록 달성, 1998년 마크 맥과이어새미 소사홈런왕 경쟁으로 팬들의 발길을 다시 야구장으로 돌리는 데 성공은 했다.
  • 1991-1993년까지 1차 3연패(Three-Peat) 이후 NBA에서 은퇴해서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마이너리거로 활동중이었던 마이클 조던은 당시 더블 A팀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보여주면서 1994 시즌이나 1995 시즌 중에 메이저리그로 콜업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받았었는데[13], 이 파업 이후 결국 다시 NBA로 복귀하여 1996년부터 1998년까지 2차 3연패를 기록한다.
  • 월드 시리즈가 나가리된 탓에 가을야구를 보고 싶었던 일부 미국 야구팬들은 대신 같은 해 세이부 라이온즈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맞붙었던 일본시리즈를 찾아 보기도 했고, 세이부의 에이스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지 표지에 실리기도 했다. 시카고 등 일부 지역 방송사는 아예 자체적으로 일본시리즈를 중계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 시즌 개막 일정 역시 파업으로 미루어진 탓에 케빈 미첼(다이에), 셰인 맥(요미우리) 등 일부 메이저리그 주전 선수들이 한 시즌을 일본프로야구에서 뛰기도 했다. 이러한 선수들 중 가장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바비 발렌타인 감독과 함께 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한 훌리오 프랑코. 프랑코는 익히 알려진 대로 1995년 한 시즌을 뛰고 돌아간 뒤에도 98년 다시 일본 롯데, 2000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동양 야구를 경험했고 이후에도 일본 독립리그와 KBO 롯데 자이언츠 코치를 역임하는 등 아시아 야구계에도 족적을 남겨오게 된다.
  • 선수노조의 파업 결정에도 구단의 시즌 강행 지시로 반강제적으로 메이저리그로 콜업된 마이너리그의 대체인력 선수들이 있었는데, 1995년 시범경기와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했다. 공식적으로 시즌이 개막하기 전 단체협약이 타결되면서 대체선수 신분으로 공식 경기에 참가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파업대오를 깬 배신자[14]로 간주되어 이후에도 메이저리그 선수노조에 가입을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훗날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가 되어도 우승 반지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 시기 콜업된 선수들 중에는 이후에 '떠벌이' 케빈 밀라나 코리 라이들처럼 메이저리그 주전급으로 성장한 선수도 있었고, 덕 브래디, 에드가 캐세레스, 마이크 부시, 조엘 치멜리스, 조 스트롱한국프로야구 초창기 외국인 선수가 된 선수들, 알렉스 라미레즈, 베니 아그바야니, 엔젤 에체베리아, 셰인 스펜서 등 일본 야구를 경험하게 되는 선수들도 더러 있었다.

[1] 참고로 2017년 현재까지 MLB 선수노조의 파업은 상기에 있듯 총 8번(1972, 1973, 1976, 1980, 1981, 1985, 1990, 1994-95)이 있었고, 그 중 격렬했던 1972년 파업과 1981년 파업 때 정규시즌 일부 경기가 취소되기도 했다.[2] 당시 구단주들에 따르면 28개팀(이때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탬파베이 데블레이스의 창단 전이었음) 가운데 19개 팀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3] 단순히 샐러리캡만을 해결방안책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실시하고 있는 중계권료 분배와 같은 제도가 이 때 처음으로 제시되기는 했다. 다만, 당시 구단주들이 궁극적으로 내놓은 필살기는 어찌됐든 샐러리캡 제도.[4] 나중에야 버드 셀릭 본인이 짬이 차면서 상당한 권위를 갖출 수 있었지만, 이 때 버드 셀릭은 커미셔너를 맡은 지 꼴랑 2년 밖에 안 된 초짜였다. 셀릭이 커미셔너직을 맡은 것도 1992년 구단주들이 공모하여 전임 커미셔너 페이 빈센트를 몰아낸 뒤 세운 바지사장 격으로 앉혀놓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허수아비에 가까웠던 게 사실이다.[5] 이 때 선수노조는 샐러리캡 도입 대신 연봉 총액이 높은 상위 16개 구단이 자신들의 입장 수익 일부분을 나머지 12개 구단에게 분배하는 방안을 제안하지만 구단주 측에 의하여 거부된다.[6] 연봉 총액 상위 5위팀과 6위팀의 중간값에서부터 초과금액을 구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최초 사치세 납부에 연봉 총액 상위 5위-6위 중간값으로부터의 초과금액의 22.5%(2006년까지는 17.5%)를, 이후 두번째는 30%, 세번째는 40%를 납부하며, 2013년부터는 네번째 이상은 50%를 납부하는 것으로 개정됐다.[7] 이 방안은 버드 셀릭 커미셔너의 전임자인 페이 빈센트 시절에 구상된 방안이었다. 다만, 1994년 이전부터 구단주들과 선수노조의 샐러리캡 도입 관련 다툼으로 이 제도는 볼모로 잡혀 있었다.[8] 8월들어 타율이 떨어지기는 커녕 타율이 계속 오르면서 .394까지 올랐다.[9] 맷 윌리엄스는 시즌 중단까지 43홈런을 기록했고, 당시 소속팀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정규시즌 47경기를 남겨둔 상태였다. 산술적으로는 약간 어렵긴 하지만, 몰아칠 수만 있다면 매리스의 홈런을 넘길 수 있었다.[10] 몬트리올 못지않게 양키스도 매우 아쉬웠던 시즌이었다. 시즌 중단까지 70승 43패를 거둬 AL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던 양키스는 1981년 월드 시리즈 준우승 이후 13년 만의 가을야구를 노렸는데, 1990년대 들어 양키스는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영구제명으로 인한 구단주직 박탈로 양키스의 팜을 재정비할 수 있었고, 이 시절 발굴한 양키스 팜 출신 선수들이 본궤도에 올랐던 때가 이 때였다. 또한, 당시 양키스의 주장 돈 매팅리가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1994년 파업으로 가을야구 경험은 이듬해로 미뤄지게 된다. 그리고 매팅리는 양키스 주장 중 유일하게 반지 하나 얻지 못하고 은퇴를 했다(...)[11] 그대로 시즌이 끝났다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가을야구 연속진출이 15회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망했어요(...) 그런데, 만약 와일드카드로 시즌을 끝냈다면 브레이브스의 14년 연속 지구 우승(1991~1993 NL 서부, 1995~2005 NL 동부)은 11년으로 줄어들 뻔했으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12] 특히나 선수노조의 경우에는 구단주 측에서 먼저 샐러리캡 제도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돈만 아는 집단'으로 매도된다. 이에 당시 선수노조 대표였던 톰 글래빈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13] 물론 이 당시 이미 마이클 조던은 30이 넘어갔고, 더블 A에서 기록한 성적도 연령이나 10년 넘게 야구와 거리를 두고 살았던 점들을 고려해서 괜찮았다는 거지, 결코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 콜업이 됐더라도 어디까지나 이벤트성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조던이 전세계 스포츠 최고의 슈퍼스타였단 걸 생각하면 보통 이벤트는 아니었을 것이다. 조던의 마이너리그 경기에만도 전세계에서 수백명의 취재기자가 찾아왔는데 그런 대스타가 메이저리그 무대도 밟는다?[14]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상황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