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95 Major League Baseball str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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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샐러리 캡 도입 문제를 둘러싸고 1994년 8월부터 1995년 4월까지 진행된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파업 사태. 이 사건을 기준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선수단의 파업이 실시된 것은 8번째이고, 시즌 중단이 이루어진 것은 4번째이지만 아예 정규시즌 잔여 경기 및 월드 시리즈 자체가 취소되는 파행을 겪은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참고로 2023년 현재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협회의 파업은 상기에 있듯 총 8번(1972, 1973, 1976, 1980, 1981, 1985, 1990, 1994-95)이 있었고, 그 중 격렬했던 1972년 파업과 1981년 파업 때 정규시즌 일부 경기가 취소되기도 했다.[1]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현대에 범세계적인 전염병이 창궐하여 1/3 토막난 시즌에도 월드 시리즈를 치렀던 걸 생각한다면 이 당시의 월드 시리즈 개최 취소는 예나 지금이나 충격적인 일인 것은 사실이다. 스포츠 역사상 파업이나 직장폐쇄로 리그 파이널이 취소된것은 이 사건과 2004년 내셔널 하키 리그 직장폐쇄 사태 단 2번 밖에 없으니 그 피해를 잘 실감할 수 있다.
2. 배경
1973년 메이저리그 최초로 FA 제도가 도입된 이후, 선수들의 연봉은 해가 지날수록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치솟는 연봉은 구단주들의 골칫거리가 되었고, 이들은 연봉 문제를 적절하게 손보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리그 시스템이 붕괴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는다.[2] 특히나 스몰마켓이었던 구단들을 중심으로 샐러리 캡을 도입하자는 주장[3]이 제기된다. 샐러리 캡 제도의 실시에 대하여 선수노조가 거세게 반발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1994년 1월 18일 구단주 회의에서 구단주들은 샐러리 캡 제도를 장기적으로 도입할 것을 의결하고 모든 권한을 당시 메이저리그의 커미셔너였던 버드 셀릭에게 일임한다. 하지만 샐러리 캡 도입을 위해서는 선수노조의 동의가 필수적이었고, 그렇게 구단주와 선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된 채로 1994년 메이저리그가 개막한다.3. 진행
시즌 내내 교섭 시도가 진행되지만, 선수노조는 구단주 측과 사무국을 철저히 불신하였다. 이 당시 버드 셀릭은 밀워키 브루어스의 구단주 자리도 겸임하고 있어서 구단주들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대변할 것이라는 선수노조의 의심이 강했기 때문.[4] 1994년 6월 14일 구단주 측은 샐러리 캡의 도입과 연봉조정 제도 철폐 / FA 기한 축소를 골자로 한 제안을 내놓지만, 이 제안은 선수노조에 의하여 곧바로 거부당한다. 이어서 선수노조는 구단주 측이 9월까지 샐러리 캡 안건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플레이오프를 보이콧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점차 악화일로로 치닫는다.구단주와 선수 사이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상황에서, 파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당시 미국 상원에서 상정되었던 반(反)트러스트 법안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샐러리 캡 도입과정에서 구단주들이 보여준 합의는 카르텔 행위로 규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샐러리 캡 도입 자체가 무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월 28일 상원에서 해당 법안은 부결되었고, 점차 모두가 설마했던 파업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7월 28일 노조는 8월 12일에 파업을 실시할 것을 결의했고, 마침내 8월 12일이 되자 파업이 현실로 옮겨졌다.
파업 이후에도 양측은 계속하여 협상을 지속하였지만 견해 차이가 너무나도 뚜렷했다.[5] 결국 9월 14일 커미셔너 버드 셀릭은 월드 시리즈를 포함한 잔여 경기의 취소를 발표한다. 억만장자 구단주와 백만장자 선수단 사이에서 벌어진 추악한 이권 싸움으로 인해 빚어진 초유의 상황에서 팬들의 분노는 폭발했지만, 여전히 선수노조와 구단주 측의 입장 대립은 첨예했다. 1994년 12월 구단주 측이 압도적인 찬성 속에 샐러리 캡의 도입을 재가결하자, 선수노조 역시 당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재된 선수들 전원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맞받아친다(...)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자, 급기야 정치권에서도 나서기 시작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구단주와 선수노조 대표들을 한데 모아놓고 "1995년 2월 6일까지 협상을 마치고 1995 시즌은 정상적으로 진행할 것"을 요구한다.
1995년 2월 1일, 구단주들은 마침내 샐러리 캡 안건을 포기하면서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나 했지만, 선수노조 측이 샐러리 캡 뿐만 아니라 연봉조정 제도 철폐를 비롯한 모든 안건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면서 상황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진다. 구단주 측은 이에 대체 선수를 동원하여 리그를 개막하겠다고 맞받아쳤고, 같은 해 3월에는 연방대법원에서 대체 선수를 동원한 리그 개막이 적법하다는 판결이 내려지면서 결국 4월 2일 장장 232일에 걸친 파업은 종료된다. 물론 파업을 종료했다고 바로 리그를 개막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1995 시즌은 본래 162 경기에서 18경기가 단축된 144경기 체제로 치러졌다.
4. 파업 사태가 남긴 교훈
이렇게 구단주들과 선수노조의 다툼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었고, 결국 구단주들이 먼저 한발 양보하며 샐러리 캡을 대신할 제도로 사치세(Luxury Tax)를 도입하게 이른다. 1997년부터 3년간 시범적으로 사치세를 운용했고,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치세를 도입했다. 최초의 사치세는 연봉 총액 상위 5개팀에게 부과, 연봉 총액 상위 5위팀과 6위팀의 중간값에서 초과된 금액의 34%를 MLB사무국에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2003년부터는 1997년에 도입한 사치세 방식을 비슷하게 운용하되, 사치세를 내는 구단의 누적 횟수에 따라 세율을 상향 차등 적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6]사치세 도입으로 빅마켓 팀에서 거둔 돈을 스몰마켓 팀들에게 분배하게 됨으로써 스몰마켓 팀들은 구단 운영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인 가운데, 2000년대 초 닷컴열풍으로 인한 인터넷 수입, 중계권료, 굿즈판매 등의 새로운 수익구조가 생기면서 MLB사무국은 이익의 균등분배를 꾀할 수 있었다. 이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빌리 빈 단장의 머니볼 등의 새로운 선수단 운영기법이 도입되면서 스몰마켓 팀들도 드래프트[7]와 해외 스카우팅을 통한 유망주 확보, 세이버메트릭스를 이용한 선수단 관리 등 혁신적인 구단 운영이 가능하게 됐다. 이를 통해 미네소타 트윈스, 탬파베이 레이스, 캔자스시티 로열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 만년 하위팀들도 2000년대 말~2010년대에 상위권으로의 도약 내지 우승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5. 파업으로 인한 피해
이 해부터 양대 리그의 동부/서부의 2개 지구를 각각 동부/중부/서부 3개 지구로 나누는 방안이 도입됐다. 또한 기존의 리그 동부/서부 지구 우승팀간 '챔피언십 시리즈-월드 시리즈'의 2단계 플레이오프 구조를 '디비전 시리즈-챔피언십 시리즈-월드 시리즈'의 3단계 구조로 재편하는 방안도 도입되었고, 늘어난 플레이오프 진출 기회에 팬들의 반응은 무척 뜨거웠다.[8]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파업으로 인해 도로아미타불.사실 1994 시즌은 파업 전까지만 하더라도 굉장히, 매우 성공적인 시즌이었다. 양대 리그 3개 지구 개편-포스트시즌 개편 뿐만 아니라, 토니 그윈의 테드 윌리엄스 이후 최초의 정규시즌 4할 도전이라든가[9] 맷 윌리엄스와 켄 그리피 주니어의 한 시즌 최다 홈런[10] 경신 등 대기록 달성 여부에도 귀추가 주목됐다.[11] 특히 토니 그윈의 4할 도전 중단이 매우 아쉬웠는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1994 시즌 117번째 경기까지 그윈은 타율 .394를 기록하고 있었다. 시즌이 중단되기 전까지 한 달간 .450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페이스를 한껏 올리고 있던 터라 매우 아쉬웠다.[12] 또한, 이외에도 그렉 매덕스가 커리어 하이급의 성적을 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업으로 인해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최종 성적을 기록했다는 점[13]은 많은 이들이 아쉽게 생각하는 중이다.[14]
나는 우리의 시즌을 빼앗아간 1994년을 기억하노라![15] |
1994 시즌 중단 당시 성적을 기준으로 가을야구 진출이 가능한 팀과 매치업은 다음과 같다.
- 아메리칸 리그
- 뉴욕 양키스(AL 동부 1위, 70승 43패)[17]-클리블랜드 인디언스(AL 와일드카드, 66승 47패)
- 시카고 화이트삭스(AL 중부 1위, 67승 46패)-텍사스 레인저스(AL 서부 1위, 52승 62패)[18]
- 내셔널 리그
- 몬트리올 엑스포스(NL 동부 1위, 74승 40패)-로스앤젤레스 다저스(NL 서부 1위, 58승 56패)
- 신시내티 레즈(NL 중부 1위, 66승 48패)-애틀란타 브레이브스(NL 와일드카드, 68승 46패)[19]
반면 1992년, 1993년 월드 시리즈 챔피언이였던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1994년부터 하락세를 겪어 암울한 성적으로 플레이오프 탈락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나, 이 파업 덕분에 명목상 디펜딩 챔피언으로 남았고 스리핏 찬스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5년 시즌에는 더 폭망하여 동부지구 최하위로 떨어지고 이후 20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 전까지 내내 동부지구 3~4위를 왔다갔다 하는 소위 '삼론토' 시기를 보내게 된다.
6. 여담
- 상술했듯이, 억만장자 구단주와 백만장자 선수 사이의 추악한 이권 다툼으로 인하여[20] 가장 큰 상처를 받은 것은 팬들이었고 1995년 메이저리그는 전년도와 비교해서 상당한 관중 감소를 기록했고 이는 이후로도 몇 년 동안 이어진다. 이처럼 쇠락한 메이저리그의 인기를 되살리기 위해 MLB사무국에서는 1997년부터 인터리그를 도입했다. 칼 립켄 주니어의 2131경기 연속출장 신기록 달성에 이어, 1998년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약홈런왕 경쟁으로 팬들의 발길을 다시 야구장으로 돌리는 데 성공은 했다.
- 1991년~1993년 1차 3연패(Three-Peat) 이후 NBA에서 은퇴해서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마이너리거로 활동중이었던 마이클 조던은 당시 더블 A팀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보여주면서 1994 시즌이나 1995 시즌 중에 메이저리그로 콜업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받았었는데[21], 조던은 파업에 동참해 대체선수로서 MLB에 콜업되는 것을 거부했고, 이후 결국 다시 NBA로 복귀하여 1996년부터 1998년까지 2차 3연패를 기록한다.
- 월드 시리즈가 취소가 된 탓에 가을야구를 보고 싶었던 일부 미국 야구팬들은 대신 같은 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맞붙었던 일본시리즈를 찾아 보기도 했고, 세이부의 에이스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에 실리기도 했다.[22] 시카고 등 일부 지역 방송사는 아예 자체적으로 일본시리즈를 중계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 시즌 개막 일정 역시 파업으로 미루어진 탓에 케빈 미첼(다이에), 셰인 맥(요미우리) 등 일부 메이저리그 주전 선수들이 한 시즌을 일본프로야구에서 뛰기도 했다. 이러한 선수들 중 가장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바비 발렌타인 감독과 함께 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한 훌리오 프랑코. 프랑코는 익히 알려진 대로 1995년 한 시즌을 뛰고 돌아간 뒤에도 1998년 다시 일본 치바 롯데, 2000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동양야구를 경험했고 이후에도 일본 독립리그와 KBO 롯데 자이언츠 코치를 역임하는 등 아시아 야구계에도 족적을 남겨오게 된다.
- 선수노조의 파업 결정에도 구단의 시즌 강행 지시로 반강제적으로 메이저리그로 콜업된 마이너리그의 대체인력 선수들이 있었는데, 1995년 시범경기와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했다. 공식적으로 시즌이 개막하기 전 단체협약(Collective Bargaining Agreement, 약칭 CBA)이 타결되면서 대체선수 신분으로 공식 경기에 참가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파업대오를 깬 배신자[23]로 간주되어 이후에도 메이저리그 선수노조에 가입을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훗날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가 되어도 우승 반지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 시기 콜업된 선수들 중에는 이후에 '떠벌이' 케빈 밀라나 코리 라이들처럼 메이저리그 주전급으로 성장한 선수도 있었고, 덕 브래디, 에드가 캐세레스, 마이크 부시, 조엘 치멜리스, 조 스트롱등 한국프로야구 초창기 외국인 선수가 된 선수들, 알렉스 라미레즈, 베니 아그바야니, 엔젤 에체베리아, 셰인 스펜서 등 일본 야구를 경험하게 되는 선수들도 더러 있었다.
- 반면 이 사건으로 뜻밖의 수혜를 본 쪽도 있었으니, 바로 NFL. 1970년대부터 슈퍼볼의 출범 등으로 급격히 세를 불리며 MLB를 위협하고 있었던 NFL은 이 사건을 계기로 MLB마저 제치고 미국 최고의 스포츠로 발돋움한다.
[1] 참고로 1981년 파업 당시 시즌을 전후기로 나눠 디비전 우승팀을 뽑은 뒤 현재의 디비전 시리즈와 비슷한 5전 3선승제의 디비저널 플레이오프(Divisional Play-off)를 운영하여, 승자팀들이 챔피언십 시리즈를 치렀다. 상세 내용은 1981년 월드 시리즈 참조.[2] 1994년 당시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탬파베이 데블레이스가 창단하기 전이었음으로 28개 구단 체제였다. 28개 구단 중 무려 절반 이상인 19개 구단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3] 단순히 샐러리 캡만을 해결방안책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실시하고 있는 중계권료 분배와 같은 제도가 이 때 처음으로 제시되기는 했다. 다만, 당시 구단주들이 궁극적으로 내놓은 필살기는 어찌됐든 샐러리 캡 제도.[4] 나중에야 버드 셀릭 본인이 짬이 차면서 상당한 권위를 갖출 수 있었지만, 이 때 버드 셀릭은 커미셔너를 맡은 지 꼴랑 2년 밖에 안 된 초짜였다. 셀릭이 커미셔너직을 맡은 것도 1992년 구단주들이 공모하여 전임 커미셔너 페이 빈센트를 몰아낸 뒤 세운 바지사장 격으로 앉혀놓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허수아비에 가까웠던 게 사실이다.[5] 이 때 선수노조는 샐러리 캡 도입 대신 연봉 총액이 높은 상위 16개 구단이 자신들의 입장 수익 일부분을 나머지 12개 구단에게 분배하는 방안을 제안하지만 구단주 측에 의하여 거부된다.[6] 연봉 총액 상위 5위팀과 6위팀의 중간값에서부터 초과금액을 구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최초 사치세 납부에 연봉 총액 상위 5위-6위 중간값으로부터의 초과금액의 22.5%(2006년까지는 17.5%)를, 이후 두번째는 30%, 세번째는 40%를 납부하며, 2013년부터는 네번째 이상은 50%를 납부하는 것으로 개정됐다.[7] 2012년 드래프트 이전까지는 1라운드 초특급 유망주에게 거액의 계약금을 주는 돈지랄이 성행하여 스몰마켓 구단도 초특급 유망주 입단에 사활을 걸기도 했으나, 구단 간의 형평성 문제로 2012년 드래프트부터 10라운드 이내 지명자에 대한 계약금 총액에 제한을 걸어뒀다. 이를 어기는 구단에는 사치세, 더 나아가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박탈까지 부과한다.[8] 이 방안은 버드 셀릭 커미셔너의 전임자인 페이 빈센트 시절에 구상된 방안이었다. 다만, 1994년 이전부터 구단주들과 선수노조의 샐러리 캡 도입 관련 다툼으로 이 제도는 볼모로 잡혀 있었다.[9] 8월들어 타율이 떨어지기는커녕 타율이 계속 오르면서 .394까지 올랐다.[10] 당시 기준 로저 매리스의 61홈런. 이후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배리 본즈가 이 기록을 경신했지만 모두 약쟁이임이 밝혀진 데다가 이 기록을 경신하던 시기엔 사실상 100% 스테로이드를 빨았던 시기로 여겨지므로 정당한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2022년 애런 저지가 62홈런을 치며 드디어 이 기록을 스테로이드라는 부정한 약물 없이 넘긴 사례가 등장했다.[11] 맷 윌리엄스와 켄 그리피 주니어는 시즌 중단까지 각각 43홈런과 40홈런을 기록했고, 두 선수의 당시 소속팀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시애틀 매리너스는 각각 정규시즌 47경기와 50경기를 남겨둔 상태였다. 산술적으로는 약간 어렵긴 하지만, 몰아칠 수만 있다면 매리스의 홈런을 넘길 수 있었다. 이후 맷 윌리엄스도 약쟁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는 했으나 훗날의 본즈, 맥과이어, 소사와는 달리 저 시기에 약을 했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미첼 리포트에서 그의 복용 시점을 2002년경으로 잡았기 때문.[12] 이 시즌은 테드 윌리엄스 1941년 이후로 조지 브렛의 1980년과 함께 4할에 가장 근접한 타자 시즌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3] 하지만 그 기대치에 비해 낮다는 성적이 리그 탑클래스이다. 다른 투수들도 파업으로 인해 성적이 중간에 끊겼기에 사이 영 상은 당연히 수상.[14] 이로 인해 매덕스는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스에 비해 임팩트 면에서는 밀린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물론 매덕스도 사이 영 상 4회 연속 수상을 했기에 단지 그 둘에 비해 밀릴 뿐 임팩트만 따져도 다른 투수들보다 두 수 위에 있었다.[15] 퀘벡주의 표어인 '나는 기억하노라(Je me souviens)'를 썼다.[16] 여기에 플레이오프를 통한 몬트리올 지역의 야구 열기 부흥, 그리고 좋은 성적을 기반으로 한 신구장 건립 추진 등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지만 모두 날아갔다.[17] 몬트리올 못지않게 양키스도 매우 아쉬웠던 시즌이었다. 시즌 중단까지 70승 43패를 거둬 AL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던 양키스는 1981년 월드 시리즈 준우승 이후 13년 만의 가을야구를 노렸는데, 1990년대 들어 양키스는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영구제명으로 인한 구단주직 박탈로 양키스의 팜을 재정비할 수 있었고, 이 시절 발굴한 양키스 팜 출신 선수들이 본궤도에 올랐던 때가 이 때였다. 또한, 당시 양키스의 주장 돈 매팅리가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1994년 파업으로 가을야구 경험은 이듬해로 미뤄지게 된다. 그리고 매팅리는 양키스 주장 중 유일하게 반지 하나 얻지 못하고 은퇴를 했다(...)[18] 레인저스는 구단 최초로 가을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파업으로 취소되고 결국 2년 후인 1996년에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하게 된다. 근데 플옵팀이 5할 승률도 안 되는 게 너무 심각하다(...)[19] 그대로 시즌이 끝났다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가을야구 연속진출이 15회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망했어요(...) 그런데, 만약 와일드카드로 시즌을 끝냈다면 브레이브스의 14년 연속 지구 우승(1991~1993 NL 서부, 1995~2005 NL 동부)은 11년으로 줄어들 뻔했으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20] 특히나 선수노조의 경우에는 구단주 측에서 먼저 샐러리 캡 제도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돈만 아는 집단'으로 매도된다. 이에 당시 선수노조 대표였던 톰 글래빈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21] 물론 이 당시 이미 마이클 조던은 30이 넘어갔고, 더블 A에서 기록한 성적도 연령이나 10년 넘게 야구와 거리를 두고 살았던 점들을 고려해서 괜찮았다는 거지, 결코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 콜업이 됐더라도 어디까지나 이벤트성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조던이 전세계 스포츠 최고의 슈퍼스타였단 걸 생각하면 보통 이벤트는 아니었을 것이다. 조던의 마이너리그 경기에만도 전세계에서 수백명의 취재기자가 찾아왔는데 그런 대스타가 메이저리그 무대도 밟는다면? 하지만 혹자는 더블 A에서의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초반 성적에 비해 후반 성적이 미친 듯이 좋아졌다는 점에서 조던의 성장 속도가 엄청 빨랐기 때문에 대스타는 몰라도 순수 실력으로 메이저리그 콜업까지는 해냈을 것이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이벤트성으로라도 좋으니 메이저리그를 밟고 싶었던 것이었으면 조던은 화이트삭스가 아닌 메이저리그 로스터 계약을 제시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갔을 것이다.[22] 그 해 일본시리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4승 2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시리즈 최종전이었던 6차전 개최 직전에 요미우리의 OB이자 세이부의 감독이었던 모리 마사아키의 경질을 도쿄 돔 전광판에 속보로 알려 우승팀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으로 욕을 먹었다.[23]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상황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