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8 02:40:52

테드 윌리엄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RedSoxPrimary_HangingSocks.svg.png보스턴 레드삭스의 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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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시어도어 새뮤얼 "테드" 윌리엄스 (Theodore Samuel "Ted" Williams)
생몰년도 1918년 8월 30일~2002년 7월 5일
국적 미국
출신지 캘리포니아샌디에이고
포지션 좌익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36년 보스턴 레드삭스 자유계약
소속팀 보스턴 레드삭스(1939~1960)[1]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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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윌리엄스
헌액 연도 1966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93.38% (1회)
1946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할 뉴하우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1949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루 부드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필 리주토
(뉴욕 양키스)
보유 기록
통산 출루율 역대 1위 0.482
통산 OPS 역대 2위 1.116[2]
최다 출루율 1위 시즌 12회
연속 경기 출루 84경기
최다 타격 트리플 크라운 시즌 2회[3]

1. 소개2. 선수 시절
2.1. 타격 스타일2.2. 까다로운 성격2.3. MVP와 뉴욕 양키스2.4. 참전2.5. 끝내 못해낸 우승
3. 연도별 성적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5. 은퇴 후6. 여담7. 어록8. 바깥고리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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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그날의 목표,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내 목표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저기 테드 윌리엄스가 지나간다. 이제까지 존재한 타자들 중 가장 위대한 타자다."
A man has to have goals — for a day, for a lifetime — and that was mine, to have people say, "There goes Ted Williams, the greatest hitter who ever lived.".
타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타석에 가서 미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미치고, 투수에게 미쳐라.
There's only one way to become a hitter. Go up to the plate and get mad. Get mad at yourself and mad at the pitcher,

경이적인 통산성적[4]

통산 타율 .344(통산 공동 6위), 2654안타, 521홈런, BB/K 2.85, 1839타점, 2021볼넷(통산 4위)을 기록했다. 아메리칸리그에서 2번의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한 유일한 타자이며[5], 6번의 타격왕, 4번의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조 디마지오와의 라이벌리[6]로도 상당히 유명하고 1941년에 기록한 4할의 타율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4할 타자라는 별명이 있다.

또 12번의 출루율 1위와 9번의 장타율 1위, 10번의 OPS 1위에 올랐으며, 통산 성적에서 역대 출루율 1위(.482) 장타율 2위(.634) OPS 2위(1.116), wRC+ 2위(188), 순장타율 6위(.289)를 지키고 있다. 타율에서는 역대 7위이지만 앞선 6명은 모두 1920년대 이전에 데뷔한 선수들이다.

특히 놀라운 점은 선수로서의 최전성기인 24~26세 시즌과 32~34세 시즌을 2차 세계대전한국전쟁에서 군복무로 빠졌다는 것. 선수 경력의 4분의 1인 약 5년 반을 군대에서 보낸 결과 2,500안타 500홈런 1,800타점 2,000볼넷에 그쳤다. 그의 평균 성적보다 낮춰서 30홈런 120타점 130볼넷 '밖에' 기록하지 못한다 가정해도 전쟁으로 인한 5년의 공백이 없었다면 최소 3,400안타 670홈런 2,400타점 2,600볼넷이라는 기록이 나오니, 전쟁이 없었다면 타점 역대 1위인 행크 아론의 2,297타점, 볼넷 역대 1위인 배리 본즈의 2,558볼넷을 누르고 타자의 기록이란 모든 기록은 거의 다 테드 윌리엄스의 이름으로 도배되었을지도 모른다.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2차 대전기 메이저 리그의 수준을 감안하면 테드 윌리엄스가 메이저 리그에서 계속 뛰었을 경우 지금의 기록보다도 더욱 엄청난 기록이 나왔을 확률이 크다.

그 당시의 메이저리그는 1940년대를 풍미했던 할 뉴하우저가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로도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는 등 실력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서 2차대전 투수라고 까이며 명예의 전당도 베테랑 위원회로 겨우 들어갔을 정도이다. 하지만 뉴하우져가 2차대전 선수라고 까였던건 스타들이 대거 전쟁터로 빠진 미국야구에 무혈입성해서 여우가 왕노릇을 하는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미국에서 야구는 국가적인 여가이며 일본군이 미국의 천황을 베이브 루스라고 생각했을 만큼 그 전통이나 위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리고 테드 윌리엄스가 데뷔한 이후 리그 평균 타율은 2할 5~6푼정도로 떨어졌으며 그가 활약한 시기동안 리그 방어율은 3점대 중후반정도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그의 무대는 1920~30년대의 불꽃같던 타격시대 이후로 점점 투고타저현상이 두드러지던 시기였던것이다. 그런 리그의 상황을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비율 성적으로 베이브 루스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이며, 두 차례의 참전으로 수년 동안의 공백을 겪었음에도 역대 통산 타격기록에서 열손가락에 들고, 다른 선수들보다 타율이 1할 이상 위에서 춤추던 윌리엄스를 스타들의 공백으로 덕을 본 선수라 하기에는 그 격차가 너무나 엄청나다.

기록 면에서 보면 베이브 루스, 타이 콥과 함께 MLB 최고 타자 중 하나로 꼽힌다. 모두 힘과 정교함이 뛰어났으나, 루스는 장타와 어울리는 풀히팅 타격 기술(통산 장타율 1위, 통산 출루율 2위), 콥은 탁월한 스피드를 활용할 다양한 배드볼 히팅 기술 및 주루 능력(통산 타율 1위, 통산 도루 3위), 그리고 테드는 특출난 선구안을 이용한 타격 및 출루능력(통산 출루율 1위, 통산 장타율 2위)을 특징으로 가진 대타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테드 윌리엄스의 진가라고 할 수 있는 출루율 기록은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했고 통산 2위를 자랑하는 OPS도 1980년대 중반에나 나왔던 기록측정법이라, 한동안 그 실력에 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참전 때문에 누적스탯이 타이 콥이나 베이브 루스에 비해 부족하기도 하고... 보통 야구 관련 사이트에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를 뽑는다면 5위 안에 이 3명은 꼭 들어가는 편이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테디는 누적 스탯이 부족해서 저평가를 당하는 경향이 강한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4~5위에는 꼭 자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자리는 로저스 혼스비, 루 게릭, 윌리 메이스 등이 나눠먹는다.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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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함께. 1943년. Colored Histor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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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P 경쟁을 2번이나 벌였던 당대의 라이벌 조 디마지오와 함께.
윌리엄스는 17세 때 마이너리그 퍼시픽코스트리그 소속의 고향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8]에 입단했다. 보스턴은 1939년 만 19세인 윌리엄스를 샌디에이고에서 사왔다.

데뷔시즌이었던 1939년부터 .327 31홈런 145타점을 기록했으며 MVP 투표에서도 4등에 들었을만큼 떡잎부터 달랐었다. 최초의 신인 타점왕 기록이었고, 이로 인해 'The Kid'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듬해에도 .344 23홈런 113타점을 기록하며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한 활약을 한다.

1941년 프로 3년차였던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9회말 2아웃에서 역전 끝내기 쓰리런을 쳤으며 그 해 정규시즌 타율 4할이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세운다. 이 기록은 그 이후 현재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누구도 깨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생긴 호칭이 '최후의 4할 타자'. 더욱이 무서운 것은 그러한 교타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도 장타력도 뛰어나 통산 홈런이 521홈런이며, 30홈런을 넘긴 시즌이 8시즌이나 된다.[9]

1941년 마지막 날 더블헤더를 앞두고 4할이 인정되는 .39955[10]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던 테드를 감독이 빼고 라인업을 구성하자 당장 감독을 찾아가서 내가 오늘 안타를 못치면 4할 타자가 아닌거지. 그렇게까지 해서 4할을 달성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하고는 경기에 출장했다. 결국 그는 그날 8타수 6안타를 기록, 4할 6리의 타율로(당시에는 희생타가 따로 집계되지 않았다 현재 기록으로 환산하면 .411) 20세기 마지막 4할 타율을 달성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해에는 동시기에 메이저리그를 지배했던 뉴욕 양키즈의 강타자 조 디마지오도 56경기 연속안타라는 전설적 기록을 세웠던 시즌이었고, 결국 그해 MVP는 디마지오에게 돌아갔다.


전쟁 참전 등의 공백도 우습게 씹어주면서 쾌조를 보였던 그는 1950년 시카고 코미스키파크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랄프 카이너의 타구를 잡다 펜스에 부딪혀 팔꿈치를 다쳤다. 윌리엄스는 이 부상으로 60경기를 결장했고 타율도 생애 최저인[11] .317로 떨어졌다. 양키스와 우승경쟁을 했던 보스턴은 결국 4경기 뒤진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부상은 이후 윌리엄스의 고질병으로 남았다. 테드 윌리엄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 사건으로 밀어치는 능력이 약화되어 타격 능력이 떨어 졌다고 한다.[12]

그 뒤 1959년 만 41세의 윌리엄스가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하자(.254) 톰 야키 구단주는 은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를 거부했고 1960년 .316의 타율을 기록한 후에야 비로소 옷을 벗었다.

윌리엄스는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통산 521번째 홈런을 날렸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홈런임을 안 펜웨이파크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고개를 숙인채 묵묵히 그라운드를 돌았으며 답례도 하지 않았다.[13] 그가 오랜 고집을 꺾고 모자를 벗으면서 답례한 것은 한참 뒤인 1991년 4월, 테드 윌리엄스 데이에서였다.

2.1. 타격 스타일

테드 윌리엄스는 극단적인 당겨치기(풀 히팅)를 고수했고, 이 때문에 처음으로 특정 타자를 겨냥한 수비 대형인 '수비 시프트'가 탄생하게 되었다. 194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선수 겸 감독 루 부드로가 좌타자인 테드를 아웃시키기 위해 필드 왼쪽에 좌익수만 남기고 모든 야수들을 필드 우측으로 옮겨버리는 엽기적인 시프트를 시도한 것.[14] 테드가 밀어치기를 한다면 무조건 안타가 되지만 끝내 선수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이 시프트에 대항해 밀어치기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는데, 테드 본인은 "바깥볼은 반드시 밀어 쳐야 하며 맞출때는 공의 윗부분을 노린다"고 썼던 것처럼 자신의 밀어치기 능력을 공공연히 어필했기 때문에 이 내용만큼은 추종자 등이 날조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극단적인 당겨치는 타자가 된건 상기의 부상전력으로 바깥공을 밀어서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해석할 수 있다.

테드는 자신의 타격이론서에서 상당한 선구안과 엄청난 훈련에 의한 타격 메커니즘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순간순간의 팀배팅보다는 타자 스스로가 더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한 타격을 설명한 것으로써 "좋은 타자란 자기의 스트라이크존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쁜 공에는 배트가 나가지 않아야 한다"라는 말로 설명 가능하듯이 그는 배드볼히팅이나 정황상 밀어치기하는 팀플레이어가 아니라 이상적인 타격을 연습하고 연구하는 구도자적 신념을 가진 선수였기에 나온 이야기다.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2루수 조 모건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스프레이 히팅과 레벨 스윙보다는 풀 히팅과 미세한 어퍼컷 스윙이 훨씬 더 고차원적인 스윙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곧 테드 윌리엄스의 타격과 일맥상통한다. 수십년 후 현재 스탯캐스트의 시대가 열리고, 투수들의 강속구에 맞선 타자들의 뜬공혁명으로 재조명되었다.역시 테드가 옳았다
“옮길테면 옮겨봐라. 어차피 빈 자리는 많다. 아니면 넘기면 된다”

그의 크고 아름다운 통산 스트라이크 존 9분할 타율. 그나마 약점인 인하이와 아웃로우마저도 2할 8-9푼 정도다. 던질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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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존 77분할 타율 (테드 윌리엄스의 저서 '타격의 과학(The Science of Hitting) 중)

2.2. 까다로운 성격

윌리엄스는 아무도 못말리는 괴팍한 성격 또한 가지고 있었다. 방망이를 관중석에 집어던지는 사고를 치는 등 19년 내내 팬, 매스컴과 충돌했다. 특히 싫어했던 기자들에게는 '키보드의 기사(knight of keyboard)'라는 별명도 지어줬다.(키보드 워리어의 조상격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린이 암환자를 돕는 등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걸 보면 그저 기자들과의 관계만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기자들과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윌리엄스는 펜웨이파크 홈경기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날린 후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모자를 벗어 답례했다. 하지만 다음날 보스턴 신문에서 윌리엄스는 '건방진 신인'으로 묘사됐다. 이후 윌리엄스는 팬의 환호에 두 번 다시 모자를 벗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불거진 기자들과의 갈등은 1942년 보스턴 신문에 윌리엄스에 대한 '비운의 가족사'(부모의 이혼과 형의 투옥이 그를 나쁘게 만들었다고 기사화)가 소개되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테드는 기자에게 침을 뱉은 적도 있다.)

얼마나 기자들과의 사이가 나빠졌나면, 1947년 양키스의 조 디마지오와 MVP 경쟁을 했을 때 보스턴 기자들은 테드가 아닌 디마지오에게 표를 던졌을 정도였다. 특히 결정적인 것이 스프링캠프 때 테드에게 욕을 먹었던 어떤 보스턴 지역 기자였는데, 그는 10위표 한 장조차 테드에게 주지 않아 조 디마지오의 MVP에 결정적인 수훈갑을 달성했다. 성적은 .343 32홈런 114타점(테드)과 .315 20홈런 97타점(디마지오)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테드 윌리엄스는 통산 MVP를 3회 놓쳤는데 그래도 3회 수상은 약쟁이 본즈(7회)에 이은 역대 공동 2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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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가 얼마나 기자들과 사이가 안 좋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최훈의 만화.

2.3. MVP와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는 그의 커리어 전체가 가히 매 시즌 MVP 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15] 의외로 MVP의 수상 회수는 고작(?) 2회 (1946, 1949)가 전부다. 흥미롭게도 그가 MVP 급 시즌을 보낼 때마다 그의 앞길을 막은 것이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선수들. 이유는 간단하다. 기자들이 언론을 기피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테드 대신 비교적 온화하고 사교적인, 그리고 테드가 뛰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숙명적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의 선수들을 MVP 투표 때마다 몰표를 주었던 것. 특히 스프링 캠프 때 테드에게 욕을 먹은 보스턴 지역의 기자들은 테드의 미친 듯한 시즌 성적에도 불과하고 10위표 한 장 테드에게 주지 않아 테드를 여럿 물 먹인 전력이 있다. 이후 알버트 벨 역시 기자단과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MVP를 모 본에게 뺏긴 전력이 한 번 있지만 테드는 적게 잡아도 자그마치 세 번이나 뺏겼다. 아래는 그렇게 MVP에서 물을 먹었던 사례.[16]

1. 1941시즌
테드 윌리엄스 : .406/.553/.735/1.287 홈런 37 타점 120 조정OPS 235[17]
조 디마지오 : .357/.440/.643/1.083 홈런 30 타점 125 조정OPS 184

마지막 4할 테드 윌리엄스 대 56경기 연속 안타의 조 디마지오. 당장 겉으로 보면 압도적인 스탯의 테드 윌리엄스였으나 MVP는 여지없이 온화하고 사교적인 뉴욕의 신사 조 디마지오가 가져갔다. 뭐 당시에는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가 빅 이슈였고 윌리엄스 역시 인정한다는 인터뷰를 했으니 뭐 그렇다 치더라도...

2. 1942시즌
테드 윌리엄스 : .356/.499/.648/1.147 홈런 36 타점 137 조정OPS 216
조 고든 : .322/.409/.491/.900 홈런 13 타점 103 조정OPS 154

이듬해도 조정OPS가 200이 넘는 가히 신급의 성적을 올린 테드였지만 MVP는 역시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2루수 조 고든이었다. 심지어 테드는 이 해 커리어 첫 번째 트리플 크라운(홈런 타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볼넷 득점 총루타의 8관왕) 시즌이었지만 여지없었다.

3. 1947시즌
테드 윌리엄스 : .343/.499/.634/1.133 홈런 32 타점 114 조정OPS 205
조 디마지오 : .315/.391/.522/.913 홈런 20 타점 97 조정OPS 154

사실상 상대가 되지 않는 성적이었으나 기자들은 여전히 언론과의 전쟁 상태이던 테드 대신 조 디마지오를 선택했다. 이전 1941시즌은 4할 대 56경기 연속 안타의 대결이라도 있었기에 디마지오의 수상이 납득이 되었지만, 이 시즌은 그런 상징적 대결조차 없어 역사상 가장 아쉬운 MVP 선정으로 꼽히는 시즌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시즌 테드는 커리어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했는데 역시 홈런 타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볼넷 득점 총루타의 8관왕이었지만 MVP 그런 거 없다.

2.4. 참전

파일:external/patriotden.com/TJI_TedWilliams-vi.jpg
출격 준비 완료!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선수였던 테드 윌리엄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5.22일 야구선수와 병행이 가능한 미 해군 예비역[18] 병으로 입대했다. "이 정도면 이혼하신 어머니를 부양하기 충분하다." 테드가 참전을 선언하며 외친 말이었다. 그는 해군 예비역 병으로 복무 중 해군 예비역 항공 사관후보생 과정에 지원하여 조종훈련을 받았다. 테드는 1944.5.2일 조종 훈련 이수 후 미 해병대 예비역 소위로 임관하여, 해군 비행교육대에서 F4U 콜세어 전투기 비행훈련 교관으로 해군과 해병대의 전투조종사를 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19] 2차대전 막바지에는 동원소집되어 진주만에서 실전 배치를 기다리던 중에 종전을 맞았다. 종전 후에도 동원이 해제되지 않아 1946년까지 복무했고, 동원 해제 후에도 계속 해병대 예비역으로 군에 남았다.[20] 그는 선수 생활의 절정이었던 만 24세에서 26세 사이에 군생활과 선수생활을 겸했고, 그 중 1년은 동원소집되어 현역처럼 복무했던 것이다. 그러다 해병대 예비역 대위로 진급하고 14개월 뒤인 1952.5.1일에는 다시 동원령이 떨어져서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사실 한국전에 참전했을 때 한군두를 일부러 감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뜬금없이 해군에서 신체검사를 실시하더니 덜컥 동원소집 영장이 나와버렸다고(...) 테드는 지난 8년간 비행기 몰아본적이 전혀 없고, 교관 노릇만 실컷 했을 뿐 실전 경험도 없는 예비역을 뭣하러 끌어가려드냐며 투덜댔으나 예비역으로 계속 복무하는 것보다는 동원소집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8주간의 재교육을 받고, 한국 포항 K-3 비행장에 주둔한 미 해병대 제33해병항공전대 311해병공격비행대대에서 팔자에도 없는 F9F 팬서 제트 전투기를 조종하게 되었다. 당시 대대에는 나중에 해병대 소장까지 진급한 랄프 스팬저와 우주비행사와 상원의원이 된 존 글렌이 있었는데, 존 글렌이 테드 윌리엄스의 윙맨이었다. 1952년 4월 30일 보스턴은 다시 군복을 입게 되는 테드 윌리엄스를 위해 'Ted Williams Day'를 정했고, 이날 그는 디지 트라웃으로부터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통산 324호 홈런을 뽑아냈다. 모두가 이를 테드의 마지막 경기이자 마지막 홈런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후일 알게 되지만 그것은 모두의 오판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테드 윌리엄스 대위는 해병 항공대의 F9F 팬서 조종사로 복무하며 총 39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한번은 평양에 폭격을 퍼붓고 오는길에 적군의 대공포에 맞아서 망했어요가 될뻔 하다가 수원 공군기지에서 위험천만한 동체 착륙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일화에 따르면 동체착륙 직후 테드는 걸레가 된 자신의 비행기를 뒤로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밥먹으러 가버렸다나(...) 그렇게 테드는 전투조종사 자격이 정지될 정도로 빡세게 복무했고[21] 전쟁이 끝나기 몇 달 전 1년간의 동원소집을 무사히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비행 자격을 상실할 정도로 빡세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던 테드였기에 야구에 대한 훈련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테드처럼 달팽이관이나 전정기관 근처에서 귓병이 발병하면 야구에 있어서도 크나큰 장애가 될 수 있었던 터. 그러나 그렇게 걸레짝이 된 몸을 이끌고 복귀한 테드는 37경기에서 .407의 타율에 13홈런 34타점이라는 신들린 타격을 선보였다. 그의 나이 만 34세였다.

테드 윌리엄스는 전성기 나이였던 1943~45년, 1952~53년을 군대에서 보냈다. 그가 만약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5시즌을 온전히 뛰었을 경우 그의 통산 성적은 어떻게 되었을까? 참고로 테드 윌리엄스의 참전 전후의 5시즌을 평균 내면 연 183안타 34홈런 124타점이 나온다. 3500안타, 700홈런, 2400타점의 기록이 꿈만은 아니었을 것. 하지만 그의 잃어버린 기록은 훗날 1991년 대통령 자유 훈장(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이란 명예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2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ed_Williams_and_John_Glenn_1998.jpg

노년의 존 글렌테드 윌리엄스. 글렌이 우주왕복선 임무에 참여했던 1998년의 사진이다.

한편, 테드 윌리엄스는 한국전쟁 시기에 존 글렌과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고, 복무 후반기에는 글렌과 함께 비행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글렌은 훗날 테드 윌리엄스를 최고 수준의 파일럿이었다고 회고했다.

2.5. 끝내 못해낸 우승

19년이란 선수 생활 동안 정말 불운하게도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못했다. 1946년에 그나마 한 번 진출했지만 패배했다. 당시 리그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은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만났다. 보스턴은 세인트루이스가 브루클린 다저스와 원게임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동안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과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여기서 윌리엄스는 팔꿈치에 공을 맞았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200의 부진한 타율을 보인채 보스턴은 패배했다.

3.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1939 BOS 149 675 185 44 11 31 131 145[23] 2 107 64 .327 .436 .609 1.045 7.1
1940 144 661 193 43 14 23 134 113 4 96 54 .344 .442 .594 1.036 6.7
1941 143 606 185 33 3 37 135 120 2 147 27 .406 .553 .735 1.287 11.0
1942 150 671 186 34 5 36 141 137 3 145 51 .356 .499 .648 1.147 11.6
1943 제 2차 세계대전 참전(군복무)
1944
1945
1946 BOS 150 672 176 37 8 38 142 123 0 156 44 .342 .497 .667 1.164 11.8
1947 156 692 181 40 9 32 125 114 0 162 47 .343 .499 .634 1.133 10.5
1948 137 638 188 44 3 25 124 127 4 126 41 .369 .497 .615 1.112 8.5
1949 155 730 194 39 3 43 150 159 1 162 48 .343 .490 .650 1.141 9.9
1950 89 416 106 24 1 28 82 97 3 82 21 .317 .452 .647 1.099 4.3
1951 148 675 169 28 4 30 109 126 1 144 45 .318 .464 .556 1.019 7.1
1952[24] 6 12 4 0 1 1 2 3 0 2 2 .400 .500 .900 1.400 0.3
1953[25] 37 110 37 6 0 13 17 34 0 19 10 .407 .509 .901 1.410 2.3
1954 117 526 133 23 1 29 93 89 0 136 32 .345 .513 .635 1.148 8.4
1955 98 416 114 21 3 28 77 83 2 91 24 .356 .496 .703 1.200 7.1
1956 136 503 138 28 2 24 71 82 0 102 39 .345 .479 .605 1.084 6.3
1957 132 547 163 28 1 38 96 87 0 119 43 .388 .526 .731 1.257 9.7
1958 129 517 135 23 2 26 81 85 1 98 49 .328 .458 .584 1.042 4.5
1959 103 331 69 15 0 10 32 43 0 52 27 .254 .372 .419 .791 0.0
1960 113 390 98 15 0 29 56 72 1 75 41 .316 .451 .645 1.096 3.4
MLB 통산
(19시즌)
2292 9788 2654 525 71 521 1798 1839 24 2021 709 .344 .482[26] .634[27] 1.116[28] 130.4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그레이잉크HOF 모니터HOF 스탠다드
테드 윌리엄스 122 326 354 72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Left Field (2nd)
career WAR7yr-peak WARJAWS
테드 윌리엄스 123.1 69.2 96.2
좌익수 HOF 입성자 평균 65.2 41.5 53.3

5. 은퇴 후

은퇴 후 어부 생활을 하던 윌리엄스는 1966년 첫 투표에서 93.38%의 높은 지지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29]. 헌액식에서 윌리엄스는 명예의 전당이 니그로 리그 선수들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을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30]. 정작 그의 친정팀인 보스턴은 흑인선수를 가장 늦게 받았으며, 밤비노의 저주가 끝나지 않았던 것도 이것 때문이라는 의견도 분분했다.

1969년 윌리엄스는 워싱턴 세너터스(현 텍사스 레인저스)의 감독을 맡아 리그 꼴찌였던 팀을 지구 4위로 끌어올리며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하지만 감독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윌리엄스는 1972시즌 후 해임됐으며 이후 다시는 감독을 맡지 않았다.

1999년 펜웨이파크에서 올스타전이 열렸을 때 시구를 했다. 이날 페드로는 그야말로 외계인이었다. 자세한 것은 페드로 마르티네즈 항목 참조.

2002년 7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끝내 보스턴의 우승은 보지 못했다.[31] 이후 유언에 따라 냉동인간이 되었는데 이는 유족들이 나중에 과학이 발달한 뒤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리와 몸체를 분리시켜 보관을 한 데다 유족들이 보관료를 내지 않자 신체가 함부로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고 있다고 전해진다. 머리에는 구멍이 두 개 뚫려 있고 두개골에 금이 갔다고.

6. 여담

파일:6살때 테드.jpg
6살 때의 테드 윌리엄스.
  • 지상에서 7m까지 솟았다가 스트라이크존 위를 살짝 통과하는 립 서웰(피츠버그)의 마구인 '이퓨스(eephus)'를 공략하여 펜웨이파크의 담장을 넘겨버린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사실 배트 박스을 벗어나 타격을 했다고 실토했다고 한다.[32]
  • 펜웨이 파크의 우측 펜스 뒤에서는 윌리엄스 버그라는 불펜 피칭 장소가 있다. 극단적인 당겨치기를 좋아했던 테드의 홈런 개수의 증가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로 인해 후에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었던 거포 중에서는 좌타자가 꽤 있다(칼 야스트렘스키, 데이빗 오티즈 등). 하지만 우중간이 짧아 보이는 건 착시에 가깝고, 실제로 펜웨이 파크는 좌타자가 홈런 치기 가장 힘든 구장 중 하나이다. 베이브 루스를 위해 우중간을 당긴 양키 스타디움과의 비교는 솔직히 공정치 못하다.
  • 영구결번 되기 까다로운 팀 중 하나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영구결번된 케이스. 사실 어느 팀에 가더라도 이 성적을 찍었는데 영결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것이겠지만.
  • 1984년에 제작된 미국의 야구영화 <내추럴>의 주인공 로이 홉스(로버트 레드포드 분)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는다. 등번호가 같은 9번이고, 극중 자신의 소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본 항목의 맨 위에 인용된 "저기 최고의 선수가 지나간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라고 말한 점 등이 근거.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유대인 병사 도니 도노위츠, 일명 ‘곰 유대인’이 야구방망이로 나치 장교의 머리를 후려치며 이 사람을 언급한다[33]. 그 때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좋은 대사.
  • 윌리엄스 사후, 그의 도움으로 암을 극복한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윌리엄스 씨의 미소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미소를 봤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완성된 미소를 보여주고자 여러분 앞에서 침묵을 지켰던 사내입니다. 그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면 우리의 얼굴을 봐주십시오. 그가 곧 우리입니다.
  • 그의 별명으로는 'Splendid splinter'가 있다. 우리 말로 바꾸면 '화려한 파편' 정도로 윌리엄스가 치는 타구들을 묘사한 별명이다.

7. 어록

꿈에서 난 랜디 존슨을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지.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외쳤어. '상대는 랜디 존슨이야. 밀어치라고, 밀어쳐'. 동료들에게 대답했지. '난 한번도 밀어쳐본 적이 없는걸'.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어.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초구가 날아왔고 난생 처음으로 밀어쳤지. 깨끗한 좌전안타였어. 허허허"
ㅡ 죽기 전 기자들을 상대로 옛 이야기를 풀어가듯 말했다고 한다.
이보게, 만약 스트라이크였다면 윌리엄스씨가 자네에게 알려줬을 걸세.
ㅡ 스트라이크가 아니냐고 따지는 포수에게 주심이 한 말. 이는 로저스 혼스비의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반개를 허용한다면 스트라이크 존은 무려 33%의 넓이가 늘어난다.
ㅡ 선구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나는 매일 밤마다 알코올로 배트를 닦곤 했다. 배트를 우체국으로 들고 가서 그 무게를 달아보기도 했고, 나중에는 레드삭스 클럽하우스에 저울을 들여놓기도 했다. 배트는 아주 짧은 시간에 30그램 정도 무게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지금 삼진을 당하러 가는 게 아니다. 이 나무 방망이로 야구공을 저 멀리 날려 보내러 가는 거다.
나는 거의 8,000번 가까이 타석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 8,000번은 나에게 하나하나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설레는 모험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300홈런을 칠 때까지 상대 투수가 누구였고 볼 카운트는 어떠했는지 구종과 코스가 무엇이었는지를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타격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관찰력의 문제고 경험과 실수로부터 얼마나 배우느냐의 문제다.
어떤 타자도 모든 것을 갖추지는 못한다. 완벽한 타자란 없다. 베이브 루스도 홈런보다는 삼진을 훨씬 더 많이 당했다.[35][36]
위대한 타자가 되어 꽉 찬 공을 안타로 만들기보다, 좋은 타자가 되어 홈 플레이트를 통과하는 공을 안타로 만드는 것이 세 배는 수월하다. (I have said that a good hitter can hit a pitch over the plate three times better than a great hitter with a questionable ball in a tough spot.)
자, .250짜리 타자는 40번 타석에 들어서 안타를 열 번 친다. 만약 이 타자가 나쁜 공은 버리기로 했다면 5번 정도 볼 넷을 얻을 수 있겠지. 이러면 타수는 5개 줄어들고, 35타수 10안타가 되며, 그는 .286짜리 타자가 된다. (Now, if a .250 hitter up forty times gets 10 hits, may be if he had laid off bad pitches he would have gotten five walks. That's five fewer at-bats, or 10 hits for 35, or .286.)
심판에게 따지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첫째는 그래봤자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길게 놓고 보면 심판들의 판정이 계속 틀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괜히 판정에 신경 쓰느니 다음 공이나 다음 타석을 준비하는 것이 낫다.
야구 경기를 보게 된다면, 초구를 치는 타자의 타율이 어떤지 살펴보라. 아마도 1할도 안 되거나 기껏해야 2할쯤 될 것이다. ?[37]
배트를 크게 휘두르는 타자는 큼지막한 안타를 치는 선수가 아니라 큼지막한 타구를 날리는 선수일 뿐이다.
만약 이제까지 타자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나다.
누군가 빨리 4할을 쳤으면 좋겠다. 그러면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4할을 친 사람에 대한 질문을 그 선수에게 쏟아낼 것이며 그를 괴롭힐 것이다.
ㅡ 테드 윌리엄스, 타격의 과학에서.
마지막으로 저는 너무나 행복하였으며 제가 미국에서 태어난 것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게임인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게된 것이 태어난 이래 얼마나 크나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ㅡ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당시 연설의 마지막 부분.

8. 바깥고리


[1] 다만, 1943~1945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1952~1953년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군대에서 복무했기에 야구선수로서 뛸 수 없었다.[2] 예상대로 1위는 베이브 루스이며 1.164 다.[3] 로저스 혼스비와 동률.[4] 베이스볼 레퍼런스의 해당 페이지는 해당 년도 1위를 기록한 스탯을 볼드체로 표시하고 있는데 과장 조금 보태서 22세부터 32세 시즌 중 2차대전 군복무 3년/부상 1년을 제외하면 나머지 6년의 타격 기록 대부분이 볼드체. 그후에도 한국전쟁 시기를 제외한 39세 시즌까지 타율, 출루율, OPS에서 거의 1위를 놓치지 않았으며, 이혼 조정 때문에 첫 한달을 날려먹고 5월 13일부터 출전했던 1955년 시즌에는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한 탓에 고의사구 1위 외에는 공식 1위를 기록한 스탯은 없지만 장외 타격, 출루율, 장타율, OPS, OPS+ 1위를 쓸어담았다.[5] 1942, 1947시즌에 달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이 두 시즌에서 후술할 이유로 MVP에 선정되지 못했다.[6] 디마지오가 4살 많은 메이저리그 3년 선배이다.[7]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말한다.[8] 현 MLB 팀과는 다르다.[9] 그가 참전으로 수백경기를 날렸다는걸 기억하도록 하자.[10] 3할 9푼 9리 5모 5사[11] 1950 시즌 기준[12] 테드윌리암스는 미세한 어퍼스윙에 로테이션히팅, 즉 허리를 돌리면서 방망이를 끌어안는 타격스타일이라 잡아당기는 능력이 좋았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을보면 밀어치는 방법등이 자세히 기술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편집증적인 당겨치는 타자는 아닌걸로 보인다.[13] 작가 존 업다이크는 “신은 편지에 답장하지 않는 법(Gods do not Answer letters)”이라며 윌리엄스의 태도 논란을 재치있게 표현했다.[14] 부드로가 자서전인 '선수 겸 감독(Player-Manager)'에서 밝히기를, 원래 윌리엄스 시프트 자체는 전략적 판단보다는 테드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보려는 목적으로 생각해 냈던 것이라고 한다.[15]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의 통산 OPS는 1.116으로, 그의 현역 기간 (1939~60년)동안 한 시즌이라도 테드의 통산 OPS를 넘은 선수는 지미 폭스(1939), 미키 맨틀(1956,1957), 스탠 뮤지얼(1948), 조 디마지오(1939) 단 4명 뿐이다. 맨틀, 뮤지얼, 디마지오는 당 시즌에 모두 MVP를 수상했고, 폭스는 같은 시즌에 MVP를 탄 디마지오와 리그가 겹치는 바람에 2위에 그쳤을 뿐 다른 시즌이었으면 MVP를 충분히 타고도 남을 성적이었다.[16] 그 외에 당시 레드삭스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것 또한 한 몫한다. 예나제나 투표권을 가진 기자들은 MVP투표에서 팀 성적을 일정부분 반영하였는데, 테드가 뛰었던 기간동안 레드삭스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1946년 단 1회 뿐이다. 이 시기는 흔히들 일컫는 올드-그레이트 양키스의 2기가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도맡아 하던 시기였다.[17] 출루율 .553은 배리 본즈가 2002년 .581로 갈아치우기 전까지 60년간의 세월동안 역대 1위였다. 홈런1위는 덤.[18] 미군의 예비역은 처음부터 민간에서 바로 예비역으로 입대하고, 주말에만 출퇴근 근무하며 연간 2주 소집훈련을 받는 역종으로 우리로 치면 상근예비역에 가깝다.[19] 테드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시기에 레드삭스 동료였던 자니 페스키도 해군 비행훈련에 입교하여 군복무를 했다. 비행 훈련 시절 함께 콕핏에 올라서 찍은 사진도 있다.[20] 출퇴근 하는 파트타임 예비역은 복무기간 중 최대 24개월까지 동원소집이 가능하고, 동원소집 기간은 특별볍으로 연장이 가능하다.[21] 한국전쟁 말기에 폐렴에 걸려 입원했다가 귓병이 발견되어 비행 자격이 정지되었다.[22] 스탠 뮤지얼도 2012년 이 훈장을 받았다.[23] 신인 최다 타점. 신인 최다 홈런은 피트 알론소.[24] 시즌 초 6경기 출전 후 한국전쟁에서 군복무.[25] 한국전쟁 휴전 후 복귀해 37경기 출전.[26] MLB 통산 1위.[27] MLB 통산 2위. 통산 1위는 베이브 루스[28] MLB 통산 2위.[29] 최초의 5인월터 존슨을 제외한 4명, 밥 펠러에 이어 첫 투표에 90% 넘는 지지율로 헌액된 6번째 선수이다. 테드 다음으로 이 조건을 충족한 선수는 동시대의 또 다른 강타자 스탠 뮤지얼.[30] "...그리고 언젠가는 사첼 페이지조쉬 깁슨처럼 단지 기회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니그로 리그 선수들의 이름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and I hope some day the names of Satchel Paige and Josh Gibson in some way can be added as a symbol of the great Negro players who are not here only because they weren’t given a chance.)"[31] 보스턴이 우승한 것은 2년 후인 2004년이었다.[32] 물론 등록되지 않은 배트를 썼다든가, 배트에 코르크심을 심었다든가, 이물질을 묻힌 손으로 배트를 잡았다든가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배트 박스를 벗어나 타격한 것은 규정상 부정타격이다.[33] 테드 윌리엄스가 장외 홈런을 쳤다! 펜웨이파크가 열광의 도가니구나! 공이 담 넘어 랜스다운거리까지 날아갔어![34] 사실 이 칼럼은 윌리엄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김동주를 에둘러 까는 이야기다.[35] 이 발언은 과장이 섞인 비유인게, 홈런보다 삼진이 많은 건 이 세상 어떤 타자나 마찬가지지만 베이브 루스는 712홈런에 1330삼진으로 삼진수가 홈런수의 1.9배도 안 되는, 그야말로 삼진을 매우 안 당한 타자였다. 물론 역대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구안으로 500홈런 기록자 중 단 2명 밖에 없는 3자리수 삼진 기록을 가진 테드 윌리엄스 본인에 비하면 많이 당하기는 했으나테드를 기준으로 하면 전세계에서 홈런 많이 친 타자 누구나 다 삼진을 많이 당한 선수다, 평균적으로 말하자면 베이브 루스는 장타자 중에서도 선구안이 매우 뛰어난 타자였고, 그에 따라 볼넷은 2000개가 넘는 테드보다 더 많이 기록해(메이저리그 통산 볼넷 3위) 훌륭한 볼삼비를 보여주는 선수였다. 말하자면 베이브 루스는 객관적으로 삼진을 많이 당하면서도 홈런을 잘친 타자가 아니라, 공도 잘 고르면서 홈런도 잘치는, 저 비유에 나오는 완벽한 타자였다.물론 테드 본인도 그랬지만 베이브 루스 항목 참조.[36] 물론 예외는 있다. 바로 라이벌 디마지오. 디마지오는 마지막 시즌 직전인 1950년까지 349개의 홈런을 쳤고 그보다 적은 333개의 삼진만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퇴 시즌에 홈런은 12개에 그친 반면 무려(?) 36개의 삼진을 당하며 최종적으로는 361홈런 369삼진이 되고 말았다. 어차피 베이브 루스나 테드 윌리엄스처럼 홈런왕 계열(13시즌 중 홈런왕 2번)도 아니고, 그들처럼 40대까지 선수했으면 차이 더 늘어났을텐데 기량 떨어졌다고 느끼자마자 일부러 은퇴한거라 홈삼비만으로 둘을 이긴다고 쳐주지는 않는다[37] 굳이 선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2016년 MLB 리그 타율이 .255였던데 비해 0-0카운트에서의 리그 타율은 .346 이었다. 테드 윌리엄스의 말과는 달리 실제론 초구 타격시 타율이 월등히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카운트가 타자에게 넉넉할 때 타자는 자신만의 존을 좁히고 자기 입맛에 맞는 공이다 싶을 때만 배트를 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