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3 23:40:36

바비 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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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로버트 존 "바비" 발렌타인
(Robert John "Bobby" Valentine)
생년월일 1950년 5월 13일
국적 미국
출신지 코네티컷 주 스탬포드
포지션 유격수, 외야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8년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9, 1971~1972)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73~197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75~1977)
뉴욕 메츠 (1977~1978)
시애틀 매리너스 (1979)
지도자 텍사스 레인저스 감독 (1985~1992)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1995)
뉴욕 메츠 감독 (1996~2002)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2004~2009)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 (2012)
{{{#ffffff [[텍사스 레인저스|텍사스 레인저스]] 역대 감독}}}
덕 레이더[1]
(1983~1985)
바비 발렌타인[2]
(1985~1992)
토비 해라
(1992, 대행)
[[치바 롯데 마린즈|치바 롯데 마린즈]] 역대 감독
나카니시 후토시
(1994, 대행)
바비 발렌타인[3]
(1995)
에지리 아키라
(1995~1996)
야마모토 코지
(1999~2003)
바비 발렌타인
(2004~2009)
니시무라 노리후미
(2010~2012)
{{{#ffffff [[뉴욕 메츠|뉴욕 메츠]] 역대 감독}}}
댈라스 그린
(1993~1996)
바비 발렌타인
(1996~2002)
아트 하우
(2003~2004)
{{{#ffffff [[보스턴 레드삭스|보스턴 레드삭스]] 역대 감독}}}
테리 프랑코나
(2004~2011)
바비 발렌타인
(2012)
존 패럴
(2013~2017)

1. 개요2. 선수 시절3. 감독 시절
3.1. 레인저스 감독 시절3.2. 단 1년만에 끝나버린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시절3.3. 뉴욕 메츠 시절3.4. 마린즈 감독으로 복귀, 그리고 일본시리즈 우승3.5. 공백기3.6. 보스턴 레드삭스
4. 성격5. 기타

1. 개요

미국의 야구인. 양주의 한 종류와 이름이 같아서 한국에선 양주 감독이라는 별명이 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일본프로야구를 오가며 감독을 역임했던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양 리그 모두에서 괜찮은 성적을 냈다. 또한, 구시대적 야구관에 물들어 있던 김성근을 계몽한 김성근의 스승이다.[4]

하지만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에게는 금지어가 되어버린 존재.[5]

2. 선수 시절

고등학교 시절에는 풋볼과 야구를 병행했는데, 이 때부터 기대치는 매우 높아 1968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5번으로 다저스에 지명될 정도였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서의 활약과는 달리 메이저리그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1973년에는 다리 부상으로 그나마 높은 평가를 받던 주력조차 상실하면서 저니맨으로 여러 팀을 떠돌다가 29살에 은퇴한다.

하지만 재능 자체는 뛰어나서 내야수, 외야수, 심지어 포수 마스크를 쓴 적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어느 포지션에서도 정착하지 못했지만.

3. 감독 시절

3.1. 레인저스 감독 시절

은퇴 후 메츠의 3루 주루 코치로 일하다가 1985년 중도 사임한 덕 레이더 감독의 후임으로 텍사스 레인저스의 지휘봉을 잡는다. 비록 이 시즌은 레이더 감독이 워낙 대차게 말아먹은 게 커서 62승 99패로 마무리 짓지만, 그 다음 시즌을 87승 75패로 마무리지으며 AL 올해의 감독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당시 구단주였던 조지 W. 부시에 의해 1992 시즌 도중 해고된다.

3.2. 단 1년만에 끝나버린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시절

해고된 뒤 1994년에는 뉴욕 메츠의 트리플 A 팀의 감독을 역임했다.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로 메이저리그 시즌 정상 개막이 불투명해진 1995년에는 일본프로야구치바 롯데 마린즈와 2년 계약을 맺고 감독직을 잡았다. 이 때 발렌타인과 함께 롯데에 입단한 선수로 레인저스 시절 발렌타인과 사제 관계였던 훌리오 프랑코가 있었다. 성적은 69승 58패 3무로 당시 리그 하위권 개막장팀이던 롯데를 순식간에 퍼시픽리그 2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그는 당시 GM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6] 와 야구관에 있어 심각한 마찰을 겪었다. 일반적인 GM의 업무는 선수 팜을 관리하는 것(선수 영입, 방출, 트레이드, 드래프트와 같은 업무)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잡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히로오카는 발렌타인의 의향을 무시한 채 독단적인 자세를 취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히로오카는 발렌타인을 해임하고 수석 코치였던 에지리 아키라를 추대한다. 이에 대해 발렌타인은 "GM이 선수 관리는 안하고 현장에 와서 참견이나 한다!"라고 디스했고, 히로오카는 "발렌타인은 현장에서 선수들을 열심히 가르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라고 맞대응하면서 발렌타인을 비판했다. 결국 사고관의 차이로 인해 생긴 씁쓸한 결말이었다. 아, 그리고 마린즈는 망했다.[7]

3.3. 뉴욕 메츠 시절

마린즈에서 짤린 뒤 그는 다시 뉴욕 메츠 산하 AAA 팀의 감독으로 와서 82승 59패의 호성적을 거두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96년 시즌 도중 뉴욕 메츠의 감독으로 승진한다.

그가 메츠를 맡으면서 팀은 살아나기 시작했고, 97년부터 2001년까지 88-88-97-94-82승을 거두면서 메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비록 이 당시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최전성기라 지구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두 번의 와일드카드를 통해 가을야구를 했고, 2000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완파하고 월드 시리즈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당시 상대는 90년대 후반 최강 팀이었던 뉴욕 양키스. 결국 1-4로 패퇴하고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비록 월드 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메츠에서의 성공은 그를 명장 반열에 올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2002 시즌에는 75승 86패로 부진했고, GM 스티브 필립스는 그를 해고한다.[8]

3.4. 마린즈 감독으로 복귀, 그리고 일본시리즈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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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그는 치바 롯데 마린즈에 다시 복귀한다. 복귀 시즌 첫 해는 NPB 재편성으로 인한 혼돈 속에서 막판까지 닛혼햄과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B클래스인 4위로 끝마치며 비밀번호를 끊진 못했지만[9] 9년만에 5할 승률을 달성했고, 두 번째 시즌이었던 2005년 그는 마린즈를 또다시 리그 2위로 올리며 플레이오프 진출 성공, 비밀번호를 끊은 뒤 플레이오프에서도 세이부 라이온즈, 가을야구의 저주에 시달리던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연달아 격파하며 마린즈에게 구단 사상 31년만의 퍼시픽리그 우승 을 선물한다.[10] 그리고 일본시리즈에서는 JFK(한신), 카네모토 토모아키 등을 주축으로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룬 오카다 아키노부한신 타이거스4전 전승, 그것도 33-4라는 충격적인 종합 스코어로 떡실신시키며 역시나 구단 사상 31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가져온다. 거기다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선동열이 지휘하던 삼성 라이온즈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평이 그리 좋지 않은데, 이는 당시 마린즈에 있던 이승엽에 대해 플래툰[11]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데이터야구가 세밀하게 분석되고 있었는데, 특히 발렌타인은 이것에 심하게 집착하여 잘 할때나 못 할때나 플래툰을 돌려 이승엽의 누적 성적에 악영향을 준 원흉이 되어 버렸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팀이 우승했고 이승엽도 일본시리즈에서는 대활약을 했기 때문에 크게 부각은 안됐지만, 적어도 이승엽의 팬들에게는 발렌타인이 그리 인정을 받지 못했다.

얼핏 보면 이승엽이 부당한 차별을 받았다고 오해를 받을 수 있으나, 당시 발렌타인 감독과 치바 롯데 마린즈의 팀컬러가 김성근 감독 재임 시절의 SK 와이번스와 유사했다.[12]슈퍼스타 몇 명에 의존하지 않고 많은 가용자원을 두고 플래툰 시스템을 돌리던 팀이었고, 이는 이승엽뿐만 아니라 1루수 후쿠우라 카즈야와 3루수 이마에 토시아키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포지션의 선수 모두[13] 로테이션과 플래툰의 대상이 되던 팀이었다. 4번 타자 자리도 유동적이었고 오오무라 사부로이마에 토시아키 같은 거포라고 보기엔 어려운[14] 스타일의 선수들이 상위타선에, 맷 프랑코, 베니 아그바야니[15], 이승엽 등의 거포들이 하위타선에 배치되는 일도 잦았다. 딱히 이승엽만 홀대했다고 하긴 어렵다. [16]

그런데 이승엽 자서전에 따르면 외야수로 기용을 하면서 펑고를 시키지 않다 보니까 동료들이 타격 연습을 할 때에 하는 공을 잡다가 펜스에 손가락을 부딪혀서 손가락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이게 일본 시절 이승엽의 발목을 잡는 손가락 부상의 시발점이라고...

그래도 이러한 기용 시스템과 용병술로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성과로 바비 매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이후 히로시마 도요 카프오릭스 버팔로스같은 팀이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는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물론 두 팀은 외국인 감독 아래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17] 이 후에도 2006년 교류전 우승,[18] 2007년 리그 2위 등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2008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반게임 차로 밀려 클라이맥스 시리즈[19] 진출에 실패한 뒤 재계약 옵션 문제와 전력보강 문제를 놓고 프런트와 갈등을 빚었고, 이것도 김성근과 닮았다..기 보단 훨씬 전부터 김성근이 하던 짓 결국 2009년 스프링캠프 도중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뒤 태업을 시전, 5위로 시즌을 마친 뒤 미국으로 귀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비밀번호만 찍던 팀을 A클래스 경쟁이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무엇보다도 31년 만의 퍼시픽리그 - 일본시리즈 우승이 매우 의미있었기 때문에 팬들로부터 반발이 많았다. 해고 당시 11만 2000여개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가 구단에 전달되기도 했으며, 발렌타인의 연임 문제를 두고 강도높게 프론트를 비판하던 외야 응원단과 MVP라는 서포터 조직이 다른 팬들과도 갈등을 겪다가 결국 해체되었을 정도로 후유증이 컸다.[20]


당시 치바 롯데 마린즈 팬들의 지지를 받았었던 증거. 감독 콜까지 나왔으니 말 다한 거다. 물론, 그 전 부터 있었다

어쨌든 롯데시절(95년 제외) 종합 평가는 2년(06년,09년)빼고 5할 이상 성적을 거둔데다가 6년 동안 가을야구를 2번이나 갔고 그 중 한번은 우승까지 했으니 평가는 좋은 편이다. 그러나 몇년뒤...

3.5. 공백기

미국으로 돌아온 발렌타인은 ESPN에서 애널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감독 자리에는 여전히 관심이 많았고 메츠와 마린즈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꾸준히 링크가 났다. 문제는 링크만 나지 오피셜이 안 떴다는게... 2009년 후반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10년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플로리다 말린스, 뉴욕 메츠, 밀워키 브루어스 그리고 2011년에 다시 플로리다 말린스.

하지만 결국 어디와도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관심왕으로 끝나나 싶었는데... 결국 2011년 테리 프랑코나의 후임으로 2012시즌 보스턴 레드삭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그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3.6. 보스턴 레드삭스

보스턴 판 킬끼리 & 백골퍼 & 순페이 & 세이콘. 이렇게 정의된다.그래도 다음해 우승한걸 보면 저사람들처럼 미래를 팔아먹진 않았잖아?
당시 충격적인 포스트 시즌 탈락 으로 인해 팀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보스턴 수뇌부는 강한 카리스마를 통해 선수단을 휘어잡는 감독을 선임했다. 그러나 선임 직후부터 레드삭스의 몇몇 선수들은 대놓고 불만을 표출했다.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발렌타인은 라커룸에 알코올 반입을 금지하는 등 강하게 나가기 시작했다.본인 이름도 알코올인데...

그러나 이는 전년 보스턴 선수단이 덕아웃에서 무려 치맥 파티를 벌이며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의 팀 케미스트리를 거의 파멸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바비 밸런타인 감독이 이렇게 강경하게 라커룸 알코올 반입 금지등 선수단 기강을 확립할려는 시도를 무리하게 했던것도 이해되는 처사이긴 했다.다만 그놈의 성적을 못내서 문제였지만 밸런타인이 물러난후 이듬해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지만 그후 2년동안 꼴찌를 찍어버린걸 보면 그냥 보스턴 선수단의 부패가 정말 심각한 문제임을 알수있다.

문제는 선수단을 휘어잡는 게 아니라 그냥 선수들과 싸움을 했다. 원체 많아서 좀 정리를 해보면...

결국 7월에는 레스터의 11실점 당시 발렌타인의 어리버리한 교체에 대해 아드리안 곤잘레스를 대표로 한 17명의 선수들이 항명까지 했을 정도였다. 물론 당시에는 성적도 안나오는 녀석들이 어딜 감독에게 항명을 하냐? 라는 의견도 있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보스턴 수뇌부는 발렌타인을 최대한 믿어주려고 여름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를 통해 조시 베켓, 아드리안 곤잘레스, 칼 크로포드를 처분해가면서까지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존 래키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라커룸에서 술을 마시는게 걸리는 등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선수들과 싸운 것으로 끝났다면 차라리 욕은 덜 먹었을지도 모른다. 경기 직전에 상대가 좌완인지 우완인지도 모르고 라인업을 짰다가 포수였던 살티가 체크해주니까 그때 다시 바꾸는 등 준비조차 제대로 하는지가 의문스러울 정도의 운영까지 보여주었다. 거기에 코치진들과도 싸우는 등... 그야말로 팀은 개판 5분 전이었다.

그렇게 프런트가 힘을 실어주었지만 9월 성적은 더욱 나빴고 결국 팀은 지구 꼴등까지 꼬라박았다. 결국 69승 93패라는 47년만의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시즌 종료 전날 경질당했다. 마지막에는 선수들 뿐만 아니라 코치진들도 배신했다!라고 발악을 했으나 팬들의 입장은 "지X하고 있네 미친놈." 결국 보스턴의 체질개선은 커녕 되려 더 상황을 악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2013 시즌 존 패럴의 레드삭스가 순항하는 것을 보면서 팬들은 "발렌타인 하나 빠졌다고 팀이 저렇게 변할 수 있다니!" 라고 감탄하면서 다시 발렌타인을 씹었다.

이 와중에 발렌타인은 "내가 계속 감독 맡았어도 똑같이 할 수 있었을 거다."(=월드 시리즈 진출했을 것이다)라며 레드삭스팬의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엄청난 개드립을 쳤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그러고 2013년, 보스턴은 우승해버렸다. 팬들은 존 패럴 감독이 유능한 건지 발렌타인이 무능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모르겠다는 게 중평.

그러나 2014 시즌, 보스턴은 선수들의 개막장 짓거리를 2011-2012 시즌에 이어 보여주면서 동부지구 꼴찌를 찍으며 멸망했다. 우승 다음해에 꼴찌를 찍어서 더욱 임팩트가 컸다. 덕분에 반사적으로 발렌타인이 피해자가 아니냐는 평이 나왔다(...) 무슨 OB 베어스도 아니고 우승-꼴찌를 달성해버렸다

그리고 2015 시즌에도 보스턴은 엿같은 경기력을 또다시 보여주면서 2년 연속 동부지구 꼴찌를 찍으며 파멸했다. 바비 밸런타인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존 패럴 감독이 억세게도 운이 좋았던 모양.

4. 성격

완고하고, 자기 할 말 다하고, 터치 많이 하는 감독의 전형.

감독의 성향으로는 맹장의 유형에 드는데, 그의 스타일은 확실히 일본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롯데에게 선사한 우승의 원동력은 대체로 일본 야구에서의 감독의 위치와 큰 연관이 있다. 슈퍼스타들이 메인이 되는 MLB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감독의 발언권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21]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기 쉽고, 발렌타인 역시 잘 나갈 때는 좋은 성적을 내면서 그에 보답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커리어를 보면 잠깐 잘 나갔다가 마지막 한 두시즌은 밑으로 꼬라박는 모양새가 눈에 띄는데, 이는 팀이 부진했을 때 이를 타개하는 역량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축구로 치자면 조세 무리뉴 같은 스타일? 물론 보스턴 시절은... 그냥 말을 말자.

가장 큰 문제는 감독치고는 상당히 속좁은 나쁘게 말하면 찌질한 성격을 가졌는데, 아래에서 언급했던 메츠 시절의 기행부터 위에서 언급한 선수들과의 수많은 불화 등까지 꽤나 모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결국 그나마 남아있던 감독으로서의 역량조차 공백기동안 잃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줘버렸고, 결국 보스턴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남아버리면서 향후 현장 복귀는 쉽지 않게 되었다.

감독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일본에서조차 "지나치게 제왕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을정도로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또한 언론플레이로 자기 편을 늘리는데 능숙하고, 상대 약점을 물고 늘어지거나 여러차례 상대팀 디스를 걸어버릴정도로 악랄하다. 과연 김성근의 스승답다.

5. 기타

  • 1999년 뉴욕 메츠 시절 주심에게 항의하다 퇴장당하자 라커룸에 잠깐 들렸다가 콧수염에 선글라스 끼고 변장한 후 덕아웃에 천연덕스럽게 앉아있다 발각돼 한 경기서 두 번 퇴장당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 2012 시즌에는 마이클 케이가 진행하는 뉴욕 라디오 쇼에 출연한다고 했다가 레삭팬들의 분노를 샀다. 참고로 마이클 케이는 뉴욕 양키스 산하의 YES 네트워크의 캐스터이다.
  • 레드삭스에서 짤린 직후 양키스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힌 뒤로 보스턴과는 그야말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인 제리 로이스터와 상당히 친분이 있는 사이이다. 신동빈 롯데 구단주에게 제리 로이스터 감독을 추천한 이도 바로 발렌타인이며, 2012 시즌 레드삭스의 감독을 맡았을 때에는 로이스터를 3루 베이스 코치로 기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발렌타인이 짤리면서 로이스터도 옷을 벗었다.

[1] 중도 경질.[2] 중도 경질.[3] 중도 경질.[4] 김성근 감독의 자서전에 나와있다. 본인이 한 말. 정확히는 김성근은 야구관이나 작전뿐만 아니라 그의 언론플레이 실력을(...) 더 잘 베껴갔지만...[5] 실제로 보스턴을 제외한 타팀 팬들이 매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가 올 때마다 발렌타인 감독을 기리며 발렌타인 위스키를 마시는 날이란 개드립을 많이 써먹는다.[6]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야구선수,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으로써 1978년 첫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줬고 그 뒤 세이부 라이온즈에 부임하여 1982년 라이온즈에게 24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과 이듬해에도 일본시리즈 우승 등을 안겨주는 등의 명활약을 펼친 감독이었다.[7] 롯데는 발렌타인 감독이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A클래스(리그 1~3위)에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다. 1998년에는 18연패를 기록하며 일본프로야구 최다연패 기록을 세웠고, 2002년에는 한화 이글스/2013년을 떠올리게 하는 개막 11연패를 거두는 등 한국 롯데8888577 시절을 연상케하는 긴 암흑기를 지냈다.[8] 사실 1999년에 한번 발렌타인의 코치진을 자르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코치들을 채워넣으면서 무언의 압박을 가한 적이 있었지만 이후 성적이 좋아 자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9] 이게 좀 아쉬운 면이 있는게, 당시 재편성 혼동의 원인이었던 오릭스킨테츠의 합병을 후루타 아츠야 등을 주축으로 한선수협 측에서 강력반대하면서 벌어진 파업 때문에 당시 예정된 경기였던 135경기에서 2경기가 취소되어서 2004년부터 실시된플레이오프에 못간것이다. 더욱 안습인건 당시 3위 닛폰햄과는 불과 0.5게임차 였다는거... 그리고 4년뒤에 롯데는 똑같은 팀에게 똑같은 게임차로 당하고 그 기점으로 2년뒤에 그 팀에게 똑같은 게임차로 역으로 되갚았다[10] 시즌 순위는 2위. 그 후 PO 우승으로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한 것이다. 2004~2006년까지는 퍼시픽 리그에서만 단독으로 시행하던 플레이오프에서 PO 우승팀이 리그 우승팀이 되는 제도였다. 이후 2007년에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도입되면서 이 플레이오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11] 선발 제외도 제외지만 심지어 신인 이래 해본 적이 없던 좌익수 수비도 시켰다.[12]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김성근이 발렌타인의 영향을 받아서 야구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게 되었다. 즉, 발렌타인이 원조고 김성근이 이를 가져온 셈. 실제로 이후 SK나 한화(원더스는 독립구단이므로 제외)에서 보이는 그의 운영 방식은 전부 이 때 발렌타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정확하게 말하면 한화 시절은 악령의 지배를 받았지만(...)[13] 2005년 기준으로 포수 사토자키 토모야/하시모토 타스쿠, 유격수/2루수 니시오카 츠요시/코사카 마코토/헤이우치 히사오(+ 2루수 베테랑 호리 코이치), 외야 맷 프랑코/베니 아그바야니/이승엽/사부로/오오츠카 아키라 등.[14] 이전 버전엔 대놓고 똑딱이라고 서술했는데, 이마에는 똑딱이라고 볼 만 하지만 사부로는 똑딱이까지는 아니다. 일본 최악의 타자친화구장인 마린 스타디움에서 20홈런 이상 친 적도 있다. 이정도면 최소 중장거리는 된다.[15] 공교롭게도 이 두 선수들은 발렌타인 감독이 메츠에 감독으로 있던 시절에 같이 뛰었던 선수들이다. 물론 주로 벤치요원들이었지만.[16] @ 당시 롯데 타선의 특징을 다룬 일본어 위키피디아 항목. '마린건 타선'은 '머신건 타선'(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전성기의 교타자 중심 타선)과 '마린즈'를 합친 말이다.[17] 오히려 발렌타인 이전인 2003년(도쿄 연고 최종연도)에 취임한 트레이 힐만 감독의 닛폰햄 파이터즈가 2006, 2007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거두고, 2006년에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휘하에서 1962년 일본시리즈를 우승한 이후 44년만에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는 등 가장 성공적인 외국인 감독 기용 사례로 꼽힌다.[18] 하지만 시즌 순위를 4위로 끝마치는 바람에 PO 진출엔 실패했다.[19] 2007년 센트럴리그에서도 플레이오프를 도입하며 명칭 변경.[20] 그래도 롯데는 다음 해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 하에 팀을 어찌저찌 수습해 리그 3위라는 괜찮은 성적을 거둔 뒤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거쳐 2010년 일본시리즈까지 우승해버리는 저력을 보이며 "사상 최대의 하극상"이라는 대업을 이룩하였다. 그 다음해 바로 꼴찌로 돌아갔지만[21]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감독이 중심이 되어 팀을 운영하는 스타일이었다. 단 2010년 이후로는 점차 프런트의 입김도 세지고 있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KBO에서도 프런트의 일은 프런트에 맡기는 게 점차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6년 두산 베어스의 김태형과 넥센 히어로즈의 염경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