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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마사히로

파일:doimasahiro.jpg
성명 도이 마사히로(土井正博)
생년월일 1943년 12월 8일 ([age(1943-12-08)]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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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오사카오사카시 미나토구[1]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외야수, 1루수
학력 다이테츠 고등학교(중퇴)[2]
프로 데뷔 1961년
소속팀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3] (1961~1974)
타이헤이요 클럽/크라운라이터/세이부 라이온즈 (1975~1981)
지도자 세이부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 (1985~1989)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1992)
세이부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1996~1999)
세이부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04~200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수석·타격코치 (2011~2012)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타격코치 (2017~2018)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75년 퍼시픽리그 최다 홈런
1974년
클라렌스 존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38홈런
도이 마사히로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34홈런
1976년
클라렌스 존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36홈런

1. 개요2. 프로 데뷔 이전3. 현역 시절4. 은퇴 이후, 지도자 시절5. 기타

1. 개요

1960~70년대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한 강타자 중 1명이었으며, 은퇴 후 세이부, 삼성, 주니치에서 타격코치를 역임했다.

현역 시절 '18세의 4번 타자' 와 '무관의 제왕'으로 칭해진 선수였다.[4]

2. 프로 데뷔 이전

돐도 되기 전에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 도중 필리핀에서 전사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서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돕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당시 선생님으로부터 대나무 배트와 소프트볼을 건네받고 야구에 흥미를 느껴 중학교 시절 여러 체육팀의 초대를 받았지만 야구를 택했다. 중학교 당시 오사카 구장에서 아이스크림 판매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일하면서 프로야구 경기를 많이 관람할 수 있었고, 당시 인기 매치업이었던 홈팀 난카이 호크스와 원정팀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매치업 당시 화려한 조명, 많은 관객, 그리고 토요다 야스미츠의 플레이에 매료됐다. 토요다, 나카니시 후토시, 오시타 히로시, 오기 아키라, 이나오 카즈히사 등 막강 전력을 갖춘 니시테츠는 거친 허슬 플레이로 "노부시 군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본인이 자랐던 동네도 거친 동네라서 라이온스에 매료됐다고 한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여러 학교를 고려하던 중 책 배달[5]을 간 집이 다이테츠 고등학교 교장의 자택이었고 이렇게 해서 다이테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훗날 만약 그 집으로 책 배달을 가지 않았다면 다이테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을 것이고 야구를 그만뒀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고1때부터 야구부의 중심타자로 뛰었으며, 1960년 춘계 코시엔에 진출하였으나 1회전에서 토호 고교(東邦)[6]에게 도이 본인의 수비 실책이 빌미가 되어 역전패를 당했다.

그후 1961년, 당시 킨테츠 버팔로에서 스카우터로 일하던 네모토 리쿠오[7]의 제의를 받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이 당시 어머니는 아들의 대학 진학을 원해 완강하게 고교 중퇴를 반대했으나 네모토의 설득에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고 도이에게 최종 선택을 맡겼다. 도이는 대학 진학에는 뜻이 애초부터 없었고 프로야구선수 도전을 결심하여 방과 후 혼자 야구단에 찾아가서 계약을 했다. 도이는 어머니가 항상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고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어 고교 중퇴 및 프로야구단 입단을 원했고 어머니를 좀 더 편하게 모시고 싶었다고 밝혔다.

3. 현역 시절

3.1.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파일:doiBU.jpg
신인 당시 월봉은 5만엔으로 대졸 신입사원보다도 더 많은 액수였다. 입단 직후 스프링캠프에 합류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쓰는 돈은 많이 필요하지 않아 대부분 액수를 집으로 송금했다. 입단 후 2~3년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기숙사에는 통금 시간이 있어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팀 선배인 세키노 준조는 술을 하지 못해서 종종 만두를 같이 먹었다고 술회했다.

킨테츠는 당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5년 연속 리그 최하위를 차지했으며, 도이가 입단한 1961년에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의 세자릿수 패전 기록이자 한 시즌 최다 패전 기록(103패)를 찍으며 퍼시픽리그의 짐짝이라는 오명을 얻었다.[8]

입단 첫해인 1961년 2군에서 타율 3할을 찍었고 1군에서도 강타자가 없어 1군 승격을 기대했으나 승격은 없었다. 당시 감독이었던 치바 시게루는 거포 스타일의 장타자보다는 소총 스타일의 교타자를 선호했고 도이 본인의 확신도 있어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시즌 종료 후 그를 해고대상으로 올렸다.

1961년 시즌 종료 후 지휘봉을 잡은 벳토 카오루는 당시 정리대상(해고대상)에 올라있던 도이의 장타자로써의 재능을 엿봤고, 그를 과감히 4번 타자로 기용하며 도이는 '18세의 4번 타자'라는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4번 타자를 맡았던 첫 해인 1962년엔 타율 .231/5홈런/43타점의 4번타자로써는 빈약한 성적을 기록하며 ‘약소 구단의 단순한 화제 만들기’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도이 본인도 부담을 이기지 못해 스타팅 라인업에서 빼줄 것을 감독에게 요청했지만 벳토 감독은 이를 거절하고 "(좋은 타격을) 못 치고 있는 너보다, (너를) 쓰고 있는 내가 더 괴롭다. 킨테츠가 강해지기 위해선 너의 힘이 꼭 필요하다. 그러니까 수년 뒤를 위해서라도 너는 빼지 않을 것이다." 라고 도이를 격려하며 끝임없이 그를 선발 타자로 기용하였다. "삼 년 동안 인내심을 갖고 연습에 집중하고, 놀지 마라"고 반복적으로 권고하였다.

그런 기대에 응하듯 도이는 홈런과 타점 생산량을 늘려가며 1964, 67년 최다안타를 기록하였고[9] 이후로도 팀의 중심 타자로 오랜 기간 활약하였다. 또한 1964년부터 6년 연속으로 2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1970년엔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도박 혐의) 1개월 출장정지 처분을 받는 바람에 시즌을 망치기도 했지만, 1971년에는 타율 .309/40홈런/113타점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킨테츠 시절 기록한 960타점은 킨테츠가 2004년 해체되면서 영원한 구단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타격부문 타이틀(수위타자, 홈런왕, 타점왕)은 단 한 번도 차지하지 못해 '무관의 제왕'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킨테츠의 중심타자로 활약했던 도이였지만, 1974년 시즌 종료 후인 11월 25일, 발과 어깨의 건강 악화로 인한 수비력 불안을 이유로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로 이적하게 된다.[10]

3.2.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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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즈로 이적한 도이는 계속해서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하면서 이적 첫해인 1975년, 34홈런을 날려 프로경력 유일의 개인 타이틀인 홈런왕을 차지했다. 1977년에는 개인통산 2,000안타를 달성해 명구회에 입회하였다.

파일:다이헤이요.jpg
다이헤이요 시절의 유니폼 아랫줄 맨 오른쪽이다. 맨 왼쪽은 백인천, 가운데는 히가시오 오사무다.

세이부 라이온즈로 팀명이 변경되며 구단이 사이타마로 연고이전한 후에도 도이는 당시 젊은 선수들이 많았던 팀의 중심타자이자 정신적 지주로써 꾸준히 활약했다. 이후 1981년 시즌 종료 후, 부상 등으로 인한 성적 악화와 네모토 리쿠오 감독의 퇴임과 동시에 진행된 젊은 선수들 중심의 팀 재편 등을 이유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통산성적은 2449시합 출장, 8694타수 2452안타[11], 78도루, 14희생타 78희생플라이[12], 465홈런[13], 1400타점[14], 78도루, 14희생타 78희생플라이[15], 1087사사구 777삼진 235병살타, 타율 .282/출루율 .358/장타율 .481/OPS .838이며, 타이틀 수상은 1975년 홈런왕(34홈런)과 베스트나인 수상 3회[16]가 있다.
이외에도 올스타전 MVP 수상 3회 기록을 가지고 있다.

465개의 홈런 중 우측으로 밀어쳐서 기록한 홈런은 단 3개뿐이다. 전형적인 잡아당기는 스윙의 타자이며, 일본프로야구에서 400홈런 이상을 기록한 15명 중 삼진율은 0.089로 도이,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만이 400홈런 이상 기록자 중 삼진율이 1할미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위의 각주에도 있듯, 우승 경력이 단 1번도 없었기에 통산 2452안타는 일본시리즈 진출 경력이 없는 선수들 중 최다안타 기록이다.

4. 은퇴 이후, 지도자 시절

은퇴 후 TV 사이타마 등에서 해설가로 뛰었으며, TV 드라마에도 출연하기도 했다.

그 후 1985년 세이부 라이온즈의 2군 타격코치로 프로야구계에 지도자로써 복귀했고, 이듬해인 1986년엔 초특급 신인으로 화제를 모았고, 훗날 프로선수로써 자신과 유사한 행보와 별명을 그대로 걷게 되는 키요하라 카즈히로를 애제자로써 성심성의껏 지도해 그가 훗날의 대스타가 되는 발판을 만들기도 했다.[17] 그러나 1989년, 시즌 도중 도박 혐의로 체포되는 바람에 코치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다시 TV 사이타마의 해설가로 뛰다가 1992년,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부임하면서 삼성 역사상 최초의 일본인 코치가 된다.[18]그러나 김성근 감독의 해임과 동시에 1년만에 코치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19]

그 후엔 또다시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1996년~1999년에 타격 코치, 2004~2007년 수석 코치, 2011~2012년 수석 겸 타격 코치로 뛰면서 여러 번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세이부의 타격코치로 복귀하여 대졸 야수 아키야마 쇼고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여 NPB 최고의 안타제조기로 성장시켰다. 도이는 "프로야구 투수들은 특히 신인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인코스를 공략한다. 입단 당시에는 스윙이 나오지 못했다. 캠프에서 야간 연습 시 아키야마에게 방어구를 착용시키고 나는 티 배팅의 요령으로 공을 치면 아키야마는 부드럽게 몸에 부딪치게 했다.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상은 당하지 않으나 물론 도망치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왜 이런 지도를 했는지 연유를 물으면 "신인 타자는 반드시 투수에게 세례를 받는다. 인코스의 어려운 곳을 공략당하면 공포에 질린 나머지 몸이 열리고 결과적으로 아웃코스 공이 더 멀리 보이게 된다"고 말한바 있다.

나카무라 다케야, 나카지마 히로유키, 아사무라 히데토도 그를 사사하고 강타자로 거듭났으며, 이토 쓰토무, 와타나베 히사노부 감독을 잘 보좌하였다.

세이부 퇴임 후인 세이부 시절 팀 후배였던 모리 시게카즈 감독으로부터 "우리 어린 아이들을 봐주지 않겠습니까"라는 요청을 받고 2017년부터는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격 코치를 맡았다. 세이부에서 키요하라 카즈히로, 마쓰이 가즈오, 와다 가즈히로 등 3명의 제자를 명구회에 입회시켰던 코칭 실력을 주니치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부진에 빠졌던 히라타 료스케, 외국인선수인 다얀 비시에도조일로 알몬테를 열심히 지도했고 만년 유망주 타카하시 슈헤이를 "나의 야구계의 마지막 봉공"이라 생각하고 거의 전담으로 코칭해서 7년만에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채우는 주전 타자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주니치는 성적이 영 나오지 않았고 결국 도이 본인은 2018년 시즌 후 퇴단을 발표했다. 도이는 "원래 2년 계약했다. 올해 팀을 목표였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시키지 못한 책임을 코치로서 통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5. 기타

  • 도이는 자신을 강타자로 성장시켜준 벳토 카오루를 은사로 여기며 존경했다. 그래서 도이의 결혼식 때도 벳토가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 역을 대신 해주기도 하였다.
  • 꽤나 오랜 기간 독신이었지만 1978년(당시 35세), 16살 차이의 여성과 결혼하여 화제가 된 바 있다. 결혼 후엔 1남 1녀를 낳고 잘 살고 있다는 듯.
  • 입단 후 선수는 3년 동안 놀지 말고 연습에 집중할 것, 그리고 코치도 선수에게 3년 이상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쓰이 가즈오, 나카지마 히로유키, 아키야마 쇼고 등 세이부 시절 제자들이 모두 3년차부터 터지기 시작했고 1년차부터 안타를 때린 선수는 키요하라 카즈히로 뿐이었다고 한다.
  • 또한 코치는 선수에게 기술, 조언 등은 해줄수 있지만 코칭스태프들이 실전게임에서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해야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 입단 초기 난카이와의 경기에서 스기우라 타다시의 투구는 전혀 칠 수 없었고 포수 노무라 카츠야는 특유의 입담으로 다음 투구의 구종과 코스를 알려주면서 도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냈다. 고민하던 도이는 어렸을 때 보았던 이나오 카즈히사의 투구 스타일[20]을 생각하면서 초구 타격을 연마했고 그런 이유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삼진이 거의 없었다.
  • 1967년과 1968년 올스타 투표에서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를 모두 통틀어 1위를 차지했다. 나가시마 시게오보다도 득표수가 많았다. 오 사다하루와 함께 주간야구의 표지에 등장할 정도였고 아직도 행복한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흔히 '인기의 세리그, 실력의 파리그'라고 말하지만, 센트럴 리그에 대해서는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에노모토 키하치의 배팅 스타일을 보면 카와카미 테츠하루와 비슷하며 특히 배트 컨트롤이 뛰어나 안타 제조기였다고 한다. 안타를 많이 쳤던 장훈이치로는 발이 빨라서 내야안타도 많이 쳤지만 도이와 에노모토는 발이 느려도 안타가 많아 실질적인 의미에서 도이 자신이 타격의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 에노모토의 스승이었던 아라카와 히로시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웃코스의 투구도 히팅포인트 중간에서 때릴 수 있게 고민해보라는 조언을 들었고 이를 실천하여 당겨치기 위주의 타격을 실천했다. 40홈런을 치던 시즌에도 우월 홈런은 단 1개뿐이었다.
  • 니시테츠로 트레이드된 뒤 지명타자제 도입으로 도이 본인은 타격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홈런왕을 차지했다. 그를 떠나보낸 킨테츠는 후반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윈-윈 트레이드였다고 생각한다.
  • 2,000안타를 치고 결혼했다. 당시 라이온스의 팀 분위기는 결혼보다는 야구에 더 집중하는 분위기였다고. 정작 팀 성적은 총체적 난국 그 자체였다는 건 함정.
  • 네모토 리쿠오로부터 은퇴권유를 받고 '난 아직 더 뛸 수 있다. 나가시마의 안타기록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생각했으나 출전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아키야마 코지이토 쓰토무 등 신예들의 성장을 위해서 베테랑의 은퇴가 필요하다는 권유로 수락했다. 본인이 18세 때 4번타자로 기용되면서 성장했던 경험도 있고, 새로 감독으로 부임한 히로오카 타츠로의 관리야구가 본인의 스타일과도 맞지 않았던 점도 있었다.
  • 네모토를 '지적인 야쿠자'라고 평하며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선수를 응시한다고 밝혔다. 그와는 반대로 도이는 선수들을 잘 돌보는 인본주의자라고 했다. 네모토는 야구계를 떠났을 때 철강업체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어 야구 이외의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선수들에게 "너희들은 야구 바보가 될 수 없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상식을 더 공부해야 한다" "60세가 되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은퇴 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라. 야구는 부록과 같다"고 말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를 못했으나 도이가 은퇴 후 해설가, 코치로 활동하면서 네모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네모토가 히로시마, 세이부, 다이에 감독 시절에는 팀 성적이 좋지 않았으나 그가 남겨놓고 간 유망주들(키누가사 요시오, 야마모토 코지, 조지마 켄지 등)은 확실하게 성장했다. 프런트로 변신하고서는 나가시마를 세이부 감독으로도 끌어들이려고 했다.
  • 애제자 키요하라가 마약 혐의로 체포된 뒤에도 손을 내밀고 싶은 느낌이 든다고 하였다. 키요하라는 여전히 인기가 있으며, 그러한 캐릭터는 일본프로야구에서 좀처럼 다시 나타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키요하라를 처음 봤을 때 그림자가 보였다고 하며 이는 요미우리로부터 지명받지 못한 원한 탓이었다고 한다. 키요하라도 프로 초창기에는 헤맸으나 5월부터 조짐이 보이더니 도이는 '신인왕' '신인 최초 30홈런 기록' 등의 꿈을 꾸게 되었다.
  • 키요하라가 컨디션을 잃었을 때 도이는 소속구단 GM이기도 했던 네모토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네모토는 '도이 네가 18세때의 경험을 기억할 것' '키요하라가 신인왕 감'이라고 답했다. 언론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과 달리 네모토는 "키요하라가 천천히 성장하는 것이 좋다. 현재 무라타 쵸지야마다 히사시가 키요하라를 상대하고 있고 그들이 키요하라를 깔보는 건 당연하지만 3-4년 뒤 키요하라 시대의 투수들이 마운드에 오를 예정이기 때문에 그 때는 키요하라가 투수들을 깔볼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라.'라고 조언했다. 주변의 목소리에 신경쓰지 말고 기술적인 지도에만 신경쓸 것. 이는 도이가 코치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 키요하라가 입단했을 당시에는 균형 잡힌 강철과 같은 체구였지만 다시 코치로 돌아와서 보니 상체만 커져 있었다고 하며 그런 경우 무릎에 부담을 줄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하체 중심의 트레이닝을 선호하고 이런 강인한 하체가 뒷받침돼 나카무라 타케야가 스윙을 가볍게 해도 홈런을 쉽게 날릴 수 있는 타자가 됐다고 한다.
  • 코치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와 같으며, '머리가 아픈지''배가 아픈지'를 환자가 의사에게 말하면 처방을 해주듯 플레이어 스스로 생각하고 지금 나쁜 점이 무엇인지를 알려줘야 적절한 코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깨가 너무 빨리 열린다""배트가 무겁다"같은 말을 해주는 선수들을 코치하기는 쉽다고 했다.
  • 도이의 생각은 '난 당신이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그것을 직접 할 수 있도록, 아무것도 할 방법을 가르치지 않을거야. 스스로 고안하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며, 부모가 먼저 결정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벳토와 네모토가 가르쳤듯이 "나는 내 자신의 일을 해야한다". 나는 그것이 단지 타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후지나미 신타로에 대해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미국의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이나 마이너리그, 한국프로야구, 대만프로야구 등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바닥까지 떨어져 본 후 자신을 발견해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충분하고 거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 곳에서 잘 던지고 자신감을 얻고 다시 위로 기어 올라갈 수 있다면, 후지나미도 본인이 가장 제일 좋았던 시기의 폼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1] 성장은 오사카부 카시와라 시[2] 현 한난 대학 부속 고등학교. 참고로 전설의 도루왕 후쿠모토 유타카 등 많은 스타선수들이 이 학교에서 배출되었다.[3] 도이의 데뷔 시즌이었던 1961년엔 구단명이 단수형인 킨테츠 버팔로였다. 1962년부터 킨테츠 버팔로즈로 변경[4] 18세의 4번 타자는 데뷔시즌이었던 2년차부터 바로 4번타자로 발탁되어 붙은 별명이었고, 무관의 제왕은 통산 2452안타, 469홈런 1400타점을 기록하였지만, 하필 소속팀들이 비인기 약체팀들이었던 까닭에 타이틀 수상은 홈런왕 1회(최다안타도 2회 기록했지만 그땐 공식 타이틀이 아니었다)에 베스트나인 3회에 불과했으며, 무엇보다도 현역시절 우승 기록이 하나도 없었기에 붙은 별명이었다.은퇴를 1년만늦게했으면 세이부 황금시대의 효시가 되는 82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을텐데 안타까울 따름.[5] 외삼촌이 서점을 경영하고 있어 책 배달 아르바이트도 병행하고 있었다.[6] 주쿄대주쿄(中京大中京)、토호(東邦)、아이치공대메이덴고교(愛工大名電)、쿄에이(享栄) 4개교는 아이치 사학 4강으로 불린다.[7] 데뷔 후 코치와 선수 관계로 함께 킨테츠에서 뛰었으며, 훗날 라이온즈에서 감독과 선수로 재회한다. 감독으로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나 단장으로서는 일본프로야구의 최초의 GM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해당 문서 참조.[8] 같은 리그의 한큐 브레이브스는 회색 구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한큐와 킨테츠 모두에게 해당됐던 별명은 지하철 구단..[9] 다만 이 당시엔 최다안타는 공식 타이틀이 아니었다. 제정은 1994년부터.[10] 그런데 문제는 도이가 이적한지 한달 후인 12월 20일에 퍼시픽리그에서 지명타자제 도입을 결정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나 이적 후의 도이의 활약으로나 킨테츠의 도이 트레이드는 삽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당시 감독이었던 니시모토 유키오는 훗날 인터뷰에서 지명타자제 도입 때문에 도이를 트레이드시킨 것을 매우 후회했다고 밝히기도 했다.[11] NPB 통산 10위이며 1위는 장훈의 3,085개다.[12] NPB 통산 공동 12위이며 1위는 노무라 카츠야의 113개다.[13] NPB 통산 공동 12위이며 1위는 오 사다하루의 868개다.[14] NPB 통산 공동 12위이며 1위는 오 사다하루의 2,170개다.[15] NPB 통산 공동 12위이며 1위는 노무라 카츠야의 113개다.[16] 외야수 부문 2회(1967~68), 지명타자 부문 1회(1978)[17] 입단 초기 시범경기에서의 부진으로 힘들어 할 적에 고교시절의 타격폼과 지금의 폼이 어떻게 다른지 같이 분석하고, 통금 위반으로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키요하라의 2군행을 명하자 키요하라의 편에 서서 이를 막았다. 도이는 키요하라의 몸에 맞는 볼이 많은 것에 대해 도박 문제 때문에 잠시 코치직을 내려놓았을 때 키요하라에게 몸에 맞는 볼을 피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것을 자책했고, 다시 코치로 복귀했을 때 마쓰이 카즈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친 건 몸에 맞는 볼 방지법이었다.[18] 엄밀히 따지면 일본으로 귀화장명부(후쿠시 아키오)가 1988년에 2군 코치를 맡기는 했지만. 귀화한 해외동포는 외국인 코치로 분류하지 않는 게 암묵의 룰인지라.[19] 다만 동봉철의 활약에 일조했다. 그리고 동봉철은 도이 마사히로가 떠나면서 커리어를 꼬라박고 저니맨신세가 된다. 도이 마사히로가 삼성에서 코치직을 5년더 있었다면 양준혁의 홈런개수도 기요하라처럼 팍팍 늘렸을 것이다.[20] 타자가 볼넷으로 출루하는 게 제일 낭비이고 삼진을 뺏기 위해 3-4개의 공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범타를 유도하기 위한 구종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는 주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