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4 11:08:35

나가시마 키요유키

나가시마 키요유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히로시마 도요 카프 엠블럼.svg
NPB 일본 시리즈
우승반지
1984

파일:NPB 로고.svg 1984년 일본 시리즈 MVP
오타 타쿠지
(세이부 라이온즈)
나가시마 키요유키
(히로시마 도요 카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3-1984, 1986-1987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66번}}}
미야와키 사토시
(1978)
나가시마 키요유키
(1980-1982)
사에키 카즈시
(1983-1986)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0번}}}
결번 나가시마 키요유키
(1983-1990)
코 신지
(1991-1998)
{{{#fff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4번}}}
이와모토 요시히로
(1990)
나가시마 키요유키
(1991)
사노 코코로
(1992-1994)
{{{#fff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0번}}}
타네다 히토시
(1990-1991)
나가시마 키요유키
(1992)
진노 준이치
(1993-1997)
{{{#ffffff [[치바 롯데 마린즈|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31번}}}
타카자와 히데아키
(1991-1992)
나가시마 키요유키
(1993)
헨슬리 뮬렌
(1994)
{{{#000000 [[한신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0번}}}
나카노 사토루
(1988-1993)
나가시마 키요유키
(1994-1997)
요시다 히로시
(1998-200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3번
박흥식
(1996~2007)
나가시마
(2009)
김재걸
(2010~2018)
}}} ||
파일:나가시마 키요유키.jpg
나가시마 키요유키
[ruby(長嶋, ruby=ながしま)] [ruby(清幸, ruby=きよゆき)] | Kiyoyuki Nagashima
출생 1961년 11월 12일 ([age(1961-11-12)]세)
시즈오카현 오가사군 하마오카초[1]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시즈오카현 자동차공업고등학교(静岡県自動車工業高等学校)
신체 170cm, 81kg
투타 좌투좌타
포지션 외야수
프로 입단 1979년 드래프트 번외 입단 (히로시마)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0~1990)
주니치 드래곤즈 (1991~1992)
치바 롯데 마린즈 (1993)
한신 타이거스 (1994~1997)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 (1998~2000)
한신 타이거스 2군 타격코치 (2001~2002)
한신 타이거스 1군 수비·주루코치 (2003)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타격코치 (2004~2005)
주니치 드래곤즈 1군 외야수비·주루코치 (2006)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09)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타격코치 (2010~2011)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타격코치 (2012)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타격코치 (2013)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타격코치 (2014~2015)
주니치 드래곤즈 2군 외야수비·주루코치 (2016)
주니치 드래곤즈 1군 외야수비·주루코치 (2017~2018)
1. 개요2. 프로 입단 전3. 선수 경력4. 은퇴 이후5. 기타6. 회견 소동 논란7. 연도별 성적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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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외야수.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등번호 0번을 사용한 선수이다.

2. 프로 입단 전

소학교 시절에는 투수로써 시즈오카현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던 경험이 있고, 고교에서는 투수 겸 외야수를 맡으며 4번타자로 활약했다. 고교 2학년 때인 1978년, 카프의 키니와 사토시[2] 스카우터가 연습 경기를 보러와서 예고홈런을 친 나가시마의 타격 능력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나가시마는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었는데, 당시 한신의 스카우터 타마루 히토시[3] 역시 나가시마에 관심이 있어 고등학교 졸업 시즌인 1979년 드래프트 직전 나가시마를 하위로 지명할 것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정작 드래프트 당일에 한신은 나가시마를 지명하지 않았고,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한 오카다 아키노부와의 계약 교섭에 차질을 빚고 있어 나가시마와의 연락이 늦어지는 사이, 카프와 난카이도 나가시마에게 연락해 영입을 시도했다. 이때 키니와가 바로 나가시마의 집을 방문하여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가계약을 맺는 데 성공하면서 결국 같은 해 드래프트 번외[4]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3. 선수 경력

처음에는 대부분의 신인이 그렇듯이 코너 외야수대타대수비, 대주자 자원으로 간간히 출전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4년차인 1983년에 등번호를 66번에서 0번으로 변경하면서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등번호 0번을 사용한 선수가 되었다. 등번호 변경의 효과가 있었는지, 그 해 첫 130경기 전경기 출장과 타율 .295/출루율 .332/장타율 .444/OPS .776의 슬래시 라인, 13개의 홈런으로 첫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1984년 9월 15일과 16일 요미우리전에서 이틀 연속 끝내기 홈런을 치면서 카프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자기 손으로 확정짓는 기쁨을 누렸고, 1984년 일본시리즈에서 1차전 역전 결승 투런을 포함한 7경기 3홈런 10타점으로 활약하며 일본시리즈 MVP에 선정되었다.

1986년 10월 12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리그 우승 결정전에서 1회부터 만루홈런을 터뜨린 것을 포함 5타수 4안타(1홈런) 7타점으로 맹활약하면서 2년 전에 이어서 또다시 본인 손으로 우승을 확정지었다. 2년 전을 포함해 승부처에서 유독 잘 친 나머지, 당시 먼저 우승을 결정지으며 일본시리즈를 준비하던 세이부 라이온즈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너무 잘 쳐서) 분석을 못하겠다"고 고개를 저었을 정도. 그렇게 맞이한 1986년 일본시리즈에서도 6, 7차전에서 홈런을 쳐내며 나름 분전했지만[5], 팀이 3승 1무에서 기적같이 4연패로 패배하면서 빛이 바랬다.

그러나 1988년 이후론 본인의 부진과 신인 마에다 토모노리의 성장으로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고, 인사를 안 한다는 등의 이유로 마에다에게 꼰대짓을 한 것이 프런트의 분노를 사면서 다음 해인 1991년 1월에 야마다 카즈토시[6], 오토 시게키[7]와의 주니치 드래곤즈트레이드되었다.[8] 이적 당시에는 야마모토 코지 감독과 친분이 있는 호시노 센이치가 감독으로 있어서 6번 타자로 출장하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지만 6월에 부상으로 시즌아웃되었고, 주니치 2년차인 1992년에는 타카기 모리미치 감독이 새로 취임하면서 출장 기회가 급감해버렸다.

결국 1993년에 우노 마사루와 함께 치바 롯데 마린즈로 트레이드되었으나 타격 부진으로 여기서도 출장 기회를 얼마 잡지 못한 채 2군을 전전했다. 그러던 도중 닛폰햄과의 2군전에서 한신 타이거스 편성부 스태프와의 만남으로 한신 이적을 주선받아 1년 만에 현금 트레이드로 한신에 가게 되었고 히로시마 시절에 이어 재차 등번호 0번을 달게 되었다. 한신에서는 주로 대타로 뛰었으나, 점점 출장기회가 줄어든 끝에 1997년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 곧바로 한신 타이거스의 타격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003년까지 6년간 한신에서 타격코치, 주루코치 등 다양한 보직코치를 맡았다. 2004년부터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격코치로 자리를 옮겨 2006년까지 재임했다.

2009년에는 한국으로 와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를 맡았다. 비록 한 시즌만 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이 시절 신명철강봉규가 20-20을 기록하는 등 삼성 타격코치 시절 평가는 꽤나 좋았다. 더불어 당시 팀 타선 리빌딩 과정에서 한창 중용되던 채태인-최형우-박석민(일명 채최박)을 두고 뛰어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미래의 클린업감이라면서 기회가 된다면 세 선수를 일본으로 데려가고 싶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이들이 훗날 삼성 왕조의 클린업 트리오로 맹활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당시 선수 보는 안목은 정확했던 셈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2013년까지 치바 롯데 마린즈의 타격코치를 맡다가, 2014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격코치로 영입되면서 약 8년만에 주니치로 되돌아와 2018년까지 재직했다.

2020년부터는 아이치현 이누야마시에서 대만 마제소바로 유명한 멘야 하나비의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5. 기타

  • 상술한 대로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0번을 단 선수이다. 원래 등번호는 66번이었지만, 작은 번호로 변경하게 된 차에 1982년 내셔널리그 수위타자였던 앨버트 올리버가 0번인 것을 알고 0번을 달기로 했다고. 때마침 1983년 카프의 캐치프레이즈가 '0(제로)부터의 출발(ゼロからの出発)'이어서 더욱 주목받았다.
  • 별명은 작은 체구에도 정열적, 활동적인 사람을 소형 전차에 빗대는 단어인 '콩탱크(豆タンク)'를 줄인 '콩(豆)'이었다. 단신에도 엄청난 갭파워를 보여준 현역 시절 플레이 스타일에서 유래한 별명.
  • 작달만한 체구와는 달리 현역시절 나름 한성깔하던 선수였는데, 관련 일화로는 1988년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나가도미 히로시[9]의 계속되는 위협구에 열받은 니무라 토오루[10]가 뛰쳐나가면서 난투극이 시작되었고, 이 때 나가시마가 주니치의 이와모토 요시히로[11]사타구니를 날아차기로 날려버렸다. 이후, '프로야구 진플레이·호플레이 대상(プロ野球珍プレー・好プレー大賞)'[12]에서 나레이터가 '퍼펙트 골드'라고 언급하면서 칭찬했다. 당시, 카프의 코치 이세 타카오[13] 는 '이와모토가 비겁한 짓을 하니깐 벤치 클리어링 일어나면 이와모토부터 조져라'고 했었고, 벤치 클리어링 발발 즉시 나가시마가 외야에서 뛰어내려와 이와모토에게 2발이고 3발이고 날아차기를 갈기고 있었다고 한다.

6. 회견 소동 논란

2006년을 끝으로 주니치가 자신을 코치직에서 해임한 것에 불만을 품어, 구단의 허락 하에 2006년 10월 28일에 단독으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과 친한) 타카시로 노부히로[14] 야수 수석코치와 사이가 안 좋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이 좋은 팀으로 만들지 않기로 말했는데 지금 이게 뭐냐? 공사 구분도 못하고 혼동을 주고 있다."며 오치아이와 타카시로를 비판했다. 당시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은 나가시마를 해임한 이유에 대해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다.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며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거기에 불과 한 달 전인 9월에 감독실에 있던 오치아이의 가방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터져 관계자인 나가시마도 경찰 조사를 받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회견에서 기자들에게 이 사건에 대한 발언을 한 것이 다음날 지면(紙面)에 "나는 절대로 오치아이의 가방을 훔치지 않았다."라는 제목으로 게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같은 해 12월 8일엔 닛칸 겐다이에 '잘가라 오치아이 주니치'라는 제목으로 칼럼까지 게재하면서 지면으로 오치아이와 주니치 구단을 비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약 8년 뒤인 2014년에 오치아이가 단장으로 복귀했을 때, 나가시마도 1군 코치로 복직시키면서 당사자들이 어찌저찌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7. 연도별 성적

통산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점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colbgcolor=#dcdcdc> 1980 広島 10 11 1 1 4 1 0 1 0 0 2 .364 .364 .727 1.091
1981 36 35 3 1 9 0 0 0 0 2 6 .281 .314 .281 .596
1982 79 178 15 17 44 8 1 2 1 7 24 .263 .299 .359 .659
1983 130 514 57 46 137 24 3 13 12 22 58 .295 .332 .444 .776
1984 125 388 43 48 94 26 2 13 11 33 76 .276 .341 .478 .819
1985 130 529 55 66 132 19 4 15 14 58 69 .291 .370 .450 .820
1986 130 527 54 62 129 29 3 12 24 35 92 .268 .316 .415 .731
1987 128 507 53 54 133 20 5 15 5 30 80 .288 .333 .450 .783
1988 117 437 29 46 87 19 0 9 5 42 71 .230 .308 .352 .660
1989 125 377 43 35 86 18 1 5 12 35 85 .259 .331 .364 .695
1990 115 322 39 37 79 18 1 7 5 29 62 .277 .343 .421 .764
1991 中日 52 180 12 16 44 9 2 4 3 17 32 .286 .355 .448 .803
1992 78 194 14 19 42 5 1 5 1 17 32 .240 .306 .366 .671
1993 ロッテ 40 80 5 7 11 2 0 1 0 7 18 .162 .240 .235 .475
1994 阪神 70 132 16 13 35 5 1 4 0 15 25 .310 .392 .478 .870
1995 67 88 4 8 18 1 0 0 1 13 18 .243 .352 .257 .609
1996 39 38 5 1 7 3 0 1 0 4 10 .206 .289 .382 .672
1997 6 6 0 0 0 0 0 0 0 0 2 .000 .000 .000 .000
NPB 통산
(18시즌)
1477 4543 448 477 1091 207 24 107 94 366 762 .271 .332 .414 .746
  • 볼드체는 리그 1위.

8. 관련 문서



[1] 現 오마에자키시[2] 7, 80년대 카프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야마모토 코지, 오노 유타카, 카와구치 카즈히사, 타카하시 요시히코 등의 유명 선수들을 발굴해낸 명스카우터로 당시 야구계에서 스카우터의 신이라 불렸다. 2008년 폐암으로 향년 82세에 별세.[3] 호세이대학 선수, 코치를 거쳐 롯데 오리온즈에서 코치를 역임한 인물로 이후 한신에서 스카우터로 일하며 키도 카츠히코 등 한신의 1985년 우승을 이끈 선수들을 여럿 발굴했다. 1993년 향년 66세로 별세.[4] 당시엔 드래프트 이후에도 지명되지 않은 선수들을 구단이 따로 접촉해 입단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드래프트 번외 입단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요미우리를 위시한 빅클럽들이 대형 유망주들을 드래프트 번외로 싹쓸이해가 리그 전력 불균형과 계약금 폭등을 초래한다는 문제점을 지적받으며 결국 1990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5] 다만 이 해 시리즈 전체 성적은 30타수 5안타, 타율 .167로 상당히 부진했고 홈런과 타점 역시 6, 7차전에서 1홈런 1타점씩 뽑아낸 것이 유이했다.[6] 배우 야마다 유우키의 아버지다.[7] 이적 후 1990년대 초중반 카프의 주전 외야수로 뛰며 1995년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8] 이 둘은 호시노 센이치가 2차로 부임한 1996년에 트레이드로 재차 주니치에 복귀했고 각각 1996, 1999년 은퇴했다.[9] 1985년 히로시마의 드래프트 1라운더로 신인 시즌인 1986년에 30등판 121.1이닝, 10승 2패 2세이브 ERA 3.04를 기록하며 센트럴리그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후 1994년까지 카프 선발진의 일원으로 뛰다 닛폰햄, 다이에로 이적하여 중간계투로 2002년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은퇴 후 다이에 등에서 코치를 역임.[10] 투수타자 전향을 거쳐 주니치에서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에 걸쳐 준주전급 내야수로 뛰었던 선수였다. 1996년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하여 이듬해 은퇴한 후 2021년까지 주니치, 라쿠텐의 코치를 역임했다.[11] 1982-90시즌까지 한큐, 주니치에서 백업 내야수로 뛰었던 선수로 90시즌 도중 현역에서 은퇴하고 주니치 주루코치로 전임하여 93시즌까지 계속 뛰었다. 공교롭게도 코치 전임 직후에 나가시마가 주니치로 이적해 온 덕분에 코치-선수 관계로 92시즌까지 같은 팀으로 뛰게 되었다.[12] 후지TV에서 1983년부터 2005년까지 방송했던 야구 프로그램으로 야구경기 도중 터져나오는 나이스 플레이나 개그 플레이들을 다루는 방송이었다. 우노 마사루가 이 방송의 단골손님으로 유명했다.[13] 킨테츠 버팔로즈,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1963-80시즌까지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뛰어온 선수로, 은퇴 후 여러 팀에서 타격코치를 역임하였고 2008~2009년엔 한국프로야구 SK 와이번스에서 타격코치를 역임하기도 했다.[14] 1980년대 닛폰햄 파이터즈의 주전 유격수로, 은퇴시즌인 1989년에 히로시마로 이적해 와 나가시마와 잠시 같은 팀으로 뛰기도 했다. 은퇴 후 주니치를 포함해 여러 팀에서 코치로 뛰었으며 2010년엔 한화 이글스의 종합코치를 역임하기도 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