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구치 토모타카의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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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2010년 퍼시픽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 글러브 |
2011년 퍼시픽 리그 최다 안타왕 |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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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구치 토모타카 坂口智隆 | Tomotaka Sakaguchi | |
생년월일 | 1984년 7월 7일 ([age(1984-07-07)]세) |
효고현 코베시[1]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1cm, 82kg |
포지션 | 외야수[2], 1루수 |
투타 | 우투좌타 |
학력 | 코베국제대학 부속고등학교 |
프로입단 | 2002년 드래프트 1순위 (킨테츠) |
소속팀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2003~2004) 오릭스 버팔로즈 (2005~2015)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16~2022) |
응원가 | 오릭스 시절[3][4] 야쿠르트 시절[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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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現 야구해설가.
오릭스 버팔로즈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준수한 컨택과 수비 능력을 가진 외야수로 활약했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출신 선수 중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뛴 선수이기도 하다.
2. 경력
2.1. 프로 입단 전
초등학교 2학년부터 투수로 야구를 시작했고, 코베국제대학 부속고등학교 시절엔 에이스 투수 겸 5번 타자로써 야구부를 2학년 때 코시엔 춘, 하계 연속 진출로 이끌었다.고졸 시즌인 2002년 드래프트에서 타카이 유헤이[7]의 교섭권을 놓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가 대체 1순위로 사카구치를 지명했고, 계약금 7000만엔, 연봉 720만엔에 계약을 맺고 입단하며 모교 최초의 프로야구 선수가 되었다.[8]
입단 이후 4번 타자로 활약했을 정도의 타격과 빠른 발, 강한 어깨 등의 신체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외야수로 전향했다.
2.2.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이듬해 2003년은 2군 경기인 웨스턴 리그에서 3할 2리의 타율을 기록해 드래프트 지명을 받아 입단한 고졸 출신 야수로서는 구단 역사상 8번째가 되는 1년차에서의 1군 경기에 첫 출전을 했고 동시에 첫 안타도 기록했다. 2005년에는 긴테쓰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합병으로 입단 2년차 이내의 선수에게 내려진 조치로 인해 오릭스 버펄로스의 소속 선수가 되었고 2군에서의 타격 성적은 2할 8푼 5리의 타율과 13개의 도루를 기록했다.2.2.1. 2006 시즌
2군에서 54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 2푼 8리와 12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오프에는 하와이 윈터 리그에 파견되었다.2.2.2. 2007 시즌
시범 경기에서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남기는 등 테리 콜린스 감독은 “히라노 게이이치가 이탈하고 있는 가운데 1번 타자는 그 이 외에 없다”라고 극찬했다. 1번·중견수로서는 첫 개막전 선발 멤버로 출전해 첫 회에 팀으로서는 첫 안타를 때려냈다. 그러나 5월 초에 타격 부진으로 2군에 강등되면서 시즌 종반에는 1군으로 재승격한 이후에는 주전 선수로 뛰며 9월 이후에는 3할 대의 가까운 타율을 남겨 맹타상도 기록했다. 2군에서는 48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 1푼 7리와 팀내 1위인 10개의 도루를 기록했다.2.2.3. 2008 시즌
개막전 1번 타자로 발탁되어 전반기에서는 호조를 유지했지만 여름 이후에는 타율이 떨어지는 등 삼진 개수도 증가했지만 주로 1·2번 타자로서 터피 로즈와 대등한 팀내 최다인 142경기에 출전,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는 등 팀의 주전으로 뛰었다. 6개의 3루타와 13개의 도루는(고토 미쓰타카와는 동률) 팀내 1위, 안타 개수·희생 번트 개수·희생 플라이 개수는 모두 팀내에서 2위를 기록했고 만루 상황에서는 9타석에서 7타수 6안타 11타점이라는 성적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도 외야수로서 리그 3위인 7개의 보살을 기록해 골든 글러브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 타석의 반 이상으로 3구째까지 친 타격 스타일과 팀내 4위의 삼진 개수를 기록할 정도의 사사구의 개수가 적었고 애버리지 타자로서는 출루율이 낮아 특히 좌완 투수와 상대할 때 타율이 2할 3푼 2리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는 등 과제를 안게 되었다.2.2.4. 2009 시즌
2009시즌 도중부터 긴테쓰 선수 시절의 응원가로 바뀌면서 전용 응원가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시범 경기에서는 타율 3할 4푼 9리의 성적으로 호조를 보여주었지만 개막 이후부터 5월 초순까지 타율 1할 대의 성적으로 부진에 빠지는 등 같은 해에 입단한 긴테쓰 시절의 팀메이트이기도 한 오무라 나오유키가 1번 타자로 뛰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서서히 회복되어 6월부터는 오무라와 다시 바뀌면서 1번 타자로 복귀했다. 5월 이후에는 7월 이외에 모두 월간 타율이 3할 이상을 기록해 8월에는 월간 타율 3할 8푼 6리, 이치로 이후 구단 사상 두 번째가 되는 월간 40개의 안타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팀내 1위인 137경기에 출전해 팀내 규정 타석을 채운 선수로서 유일한 타율 3할이 되는 3할 1푼 7리의 타율(리그 2위)과 안타 부문 2위의 167안타, 전년도의 개인 최다 성적을 경신하는 팀내 1위이자 리그 10위의 16개 도루를 기록했다. 리그 6위의 출루율은 3할 8푼 1리로 좌완 투수와 상대한 타율이 2할 9푼 7리로 전년도 시즌에서의 과제를 안긴 부분에 대해서도 개선되었다.수비에서는 외야수로서 리그 1위의 성적인 14개의 보살을 기록했고 수비면에서의 안정된 모습을 보여준 공로로 2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는 등 하위권에 처져있는 팀내에서 맹활약을 했다. 같은 해 오프에는 등번호를 9번으로 변경되었고 12월 21일에는 한신·아와지 대지진 부흥 15년 자선 행사에 참가해 현지 선수들과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OB등으로 구성된 ‘힘내자, 고베 드림스’의 선수로서 출전했다.
2.2.5. 2010 시즌
풀 이닝 출전을 목표로 두며 1번 타자로서 기용되고 있었지만 거듭된 타격 부진으로 선발 멤버에서 제외되는 등 12경기에만 출전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교류전의 첫 경기가 된 5월 12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연장 10회초에 결승타인 3루타를 때려내 팀으로서는 야쿠르트전에서의 2년 만이 되는 팀 승리로 이끄는 활약을 보여주었고 6월 7일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는 프로 야구 신기록이 되는 10자 연속 안타의 선두 타자로서 1이닝 2안타를 기록하는 등 교류전 타율 3할 8푼 9리로 교류전 MVP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그러나 7월에는 다시 타격 부진에 시달리면서 전반기 종료 직전에는 3년 만에 2군으로 강등당했지만 전반기 종료 시점에서의 2할 8푼 8리였던 타율을 1군에 복귀한 이후에는 3할 대로 되돌리는 등 최종적으로 2년 연속 3할 대의 타격 성적과 3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 수상, 3년 연속 150개의 안타를 달성해 3루타는 리그 1위인 10개를 기록했다. 또 8월에는 10개의 2루타와 6개의 3루타를 기록해 8월의 JA전농 Go·Go상(수상 테마는 최다 2루타, 3루타상)을 수상했다.
2.2.6. 2011 시즌
전체 144경기에 모두 출전함과 동시에 시즌 최다인 175개의 안타를 기록하면서 퍼시픽 리그 최다 안타 타이틀을 석권했다. 시즌 초반에는 부진에 시달렸지만 교류전에서는 타율 4할 1푼 2리를 기록해 컨디션을 단번에 끌어 올려 교류전 수위타자, 최다 안타, 최다 득점을 연달아 남기면서 닛폰 생명상을 수상했다. 종반까지는 3할 대의 타율을 지키면서 수위타자를 노릴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었지만 마지막에는 17타석 연속 무안타를 기록하는 등의 극심한 부진에 시달려 최종적으로는 타율 2할 9푼 7리를 기록하면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최다 안타, 최다 3루타, 득점(리그 3위), 볼넷(리그 5위), 타율(리그 7위), 출루율(리그 8위)을 기록하는 등의 1번 타자로서 맹활약을 했다.수비에서는 10할 대의 수비율, 리그 3위의 수비 기회, 보살 개수는 5위를 나타내며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마음껏 발휘했다.
2.2.7. 2012~2015 시즌
그러나 2012 시즌 이후로부터는 통일구 도입으로 인하여 공수부분에서 쇠퇴되면서 결국 2015년 팀에서 방출 당하였다.2.3.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절
2016 시즌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을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완벽히 부활에 성공. 2018 시즌 규정타석 3할을 넘기며 아오키와 함께 명품 테이블세터진으로 활약했으나 2019 시즌 부상으로 시즌을 망쳤다. 2020 시즌 평소엔 잘 못치는 홈런을 초반부터 많이 쳤지만 대신에 컨택이 망해버려 2할 5푼도 안되는 타격으로 시즌 종료. 2021년에는 나름대로 대타나 백업 멤버로 살아남으며 팀의 세리그 우승을 함께함과 동시에 데뷔 이후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까지 획득했다.[9]2022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 사카구치가 은퇴하면서 이제는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출신 현역 선수는 단 한명도 없게 되었다.
3. 기타
- 중학교 때 소속되어 있던 야구팀 선배로 쿠리야마 타쿠미가 있었다.
[1] 자란 곳은 효고현 아카시시.[2] 전성기 땐 주로 중견수를 보았다.[3] 素早く 力強く 先陣を切れ 激闘の中で 紅く 炎(も)やせ 武士(もののふ)の心 (재빠르게 힘차게 선두를 끊어라 격투 속에서 붉게 불태워라 무사의 마음가짐을)[4] 2023년부터 등번호 9번을 이어받은 노구치 토모야의 응원가로 쓰이고 있다.[5] 不屈の魂で 再び挑み 新たな歴史を刻め 魅せろ坂口 (불굴의 혼으로 다시 도전해 새로운 역사를 써라 보여줘 사카구치)[6] 2011년에 오릭스에서 같이 뛴 적이 있었던 하마나카 오사무가 사용한 응원가를 가사를 바꿔서 유용받았다.[7] 등록명 '유헤이'로 알려진 선수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했다. 이쪽 역시 원래는 투수로써 입단 이후 1군에서 통산 144시합 37선발로 나름 많이 나왔으나 제구력이 안 좋아서 별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2009년부터 외야수로 전향했다. 타자 전향 후 2014년부터 두각을 드러내 그 해에 시즌 20홈런을 기록하고 규정타석 3할을 2번 기록하는 등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사카구치가 야쿠르트에 입단하고 나선 함께 주축 외야수로 활약했다. 2021년을 끝으로 은퇴한 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군 타격코치를 역임 중.[8] 킨테츠 최후의 드래프트 1순위 지명자이기도 하다. 다음 해이자 킨테츠 최후의 드래프트인 2003년 드래프트에선 투수 카츠키 료타를 희망입단 제도로 영입해서 드래프트 1, 3순위 지명권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9] 일본시리즈 상대가 다름아닌 사카구치의 친정팀인 오릭스 버팔로즈였다. 기분이 좀 묘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