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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타이거스/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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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문서
<colbgcolor=#000000,#fefe01><colcolor=#fefe01,#000000> 모기업 관련 정보 한신 전기철도 · 한큐한신토호그룹
연고지 관련 정보 간사이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고시엔 일대 · 오사카부 오사카시
일본시리즈 우승
★★
1985 · 2023
리그 우승
(10회)
1937 추계 · 1938 춘계 · 1944 · 1947 · 1962 · 1964 · 1985 · 2003 · 2005 · 2023
클라이맥스 시리즈 2007 · 2008 · 2010 · 2013 · 2014 · 2015 · 2017 · 2019 · 2021 · 2022 · 2023 · 2024
시즌별 요약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2025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 역대 등번호 · 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사건사고 · 한신아재 · 커널 샌더스의 저주 · JFK · 4466566664
주요 인물 감독 후지카와 큐지 · 선수회장 나카노 타쿠무
주요 명장면 백스크린 3연발 · 일본프로야구 최장시간 소요 경기 · 201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 고의사구 끝내기 안타
2022년 센트럴 리그 3위
경기장 1군 한신 고시엔 구장 · 고시엔 기간 교세라 돔 오사카 · 2군 닛테츠코한 SGL스타디움 아마가사키 · 과거 2군 한신나루오하마 구장 · 지방구장 머스캣 스타디움 · 춘계 캠프 기노자촌 야구장 · 추계 캠프 아키 시영구장
홈 중계 채널 파일:가오라스포츠 로고.png / 파일:스카이A 로고.jpg
기타 정보 한신 본선 ·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 전통의 일전 · 도쿄온도 · 죽음의 원정
틀 문서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 선수 · 역대 감독 · 영구 결번 ·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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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기 관련3. 구단 및 선수 관련
3.1. 곤도 마사토시카네다 마사야스 감독 구타 사건3.2. 요코하마 스타디움 심판 폭행 사건3.3. 신조 츠요시 은퇴 소동3.4. 후지타 타이라 해임 소동 (코시엔 농성)3.5. 나카무라 카츠히로 GM 사망 사건3.6. 코로나 19 회식 위반 및 선수단 집단 확진 사건
4. 팬 관련
4.1. 요미우리 선수단 습격 사건4.2. 도톤보리 커널 샌더스 상 투척 사건4.3. 1992년 9월 11일 난동4.4. 응원기가 날려버린 동점 홈런4.5. 신칸센 차내 청문회 사건4.6. 2014년 일본시리즈 5차전 이물질 투척4.7. 영아 투척 사건4.8. 코시엔 관중 난동 및 시위 사건4.9. 아오야기 코요 인스타그램 DM 테러 사건

1. 개요

한신 타이거스에 관련된 사건사고. 예로부터 열성팬이 많은 팀 특성상 여러 요란한 일들이 있었다.

2. 경기 관련

2.1. 사노 노리요시의 펜스 충돌 사고

1977년 4월 29일 카와사키 구장에서의 대 타이요 훼일즈 원정 경기에서 9회 말에 좌익수 사노 노리요시가 포구 도중에 콘크리트 펜스에 충돌해 두개골이 함몰되는 사고가 터졌다. 사고로 우왕자왕한 와중에 타이요의 1루 주자가 홈인하면서 동점을 만들면서 역사상 유일한 1루 주자의 희생 플라이가 성립되었고, 요시다 요시오 감독이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시간 제한으로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어 한신은 이길 수 있었던 경기를 동점으로 날리고 말았다.

이 사고를 계기로 일본프로야구 모든 홈구장 펜스에 고무판 설치가 의무화되었다.

2.2. 후지나미 신타로데드볼

2015년 4월 25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시합에서 상대 선발 투수였던 구로다 히로키에게 몸에 가까이 붙는 공을 던져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다.

2017년 4월 4일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시합에서 하타케야마 카즈히로에게 몸에 맞는 공을 내주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다. 당시 코치이던 야노 아키히로블라디미르 발렌틴과 과격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2.3. 카네모토 토모아키 감독의 후지나미 신타로 벌투

일본판 2016년 송창식 벌투 사건. 2016년 7월 8일 후지나미 신타로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8이닝 161투구수 6자책점을 기록한 사건이다. 카네모토 토모아키 감독 또한 시합 종료 후 후지나미를 강판시키지 않은 것을 사실상 벌투로 던지게 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여론이 한 번 난리가 난 적 있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2015년까지만 해도 센트럴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던 후지나미는 내리막을 타게 된다.
2016년 7월 8일 18:01 ~ 21:16 , 한신 고시엔 구장
선발투수 1회 2회 3회 4회 5회 6회 7회 8회 9회 R H E
히로시마 크리스 존슨 3 1 1 0 0 0 0 3 0 8 7 1
한신 후지나미 신타로 0 0 0 2 0 0 0 0 0 2 3 3
이 날 경기 요약
이 날 후지나미 신타로의 최종 기록은 8이닝 161투구수 7피안타 6사사구[1] 13탈삼진 8실점 6자책.

후지나미는 경기 초반부터 제구가 흔들리면서 실점을 거듭해 히로시마에게 경기의 흐름을 내줘버렸지만 야수진 역시 실책을 3개나 범하며 후지나미를 도와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이닝을 꾸역꾸역 소화하며 7회까지 버텼지만 131구째를 던진 시점임에도 벤치의 움직임은 없었다. 심지어 7회 말 후지나미의 타석이 돌아왔음에도 감독은 대타를 내지 않은 채 후지나미를 그대로 타석에 세웠고, 결국 8회에도 올라온 후지나미는 사사구를 남발하며 만루 위기에 몰린 끝에 이와모토 타카시에게 싹쓸이 적시타를 맞으면서 결국 무참히 패배했다.

경기 초반에 5점을 주긴 했으나 3회 이후엔 7회까지 무실점으로 던지며 5:2 스코어를 유지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투수 운용을 했더면 나름 승부를 걸어 볼 만한 점수차였다. 그러나 당시 벤치에 대타로 쓸 선수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카네모토는 후지나미를 대타로 교체하지 않았고, 결국 벌투라는 판단으로 인해 경기는 경기대로 놓치고 전도유망한 젊은 선수의 커리어 하락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가고 말았다.

혹자는 이 사건이 후지나미의 하락세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후지나미를 완전히 박살냈다고 얘기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 사건은 여러 복합적인 원인들 중 하나일 뿐이다. 실질적으로는 전임 감독이었던 와다 유타카가 데뷔 시즌부터 과도하게 선발로 굴렸다는 점[2], 나카니시 키요오키 투수 코치의 지도력 문제, 후지나미 개인의 워크에식 논란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려서 몰락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유독 카네모토의 후지나미 끝장설이 정설인 양 받아들여졌었던 이유가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하락세가 시작되었기 때문.

2.4. 사인 훔치기 논란

2021년 7월 6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메이지진구 야구장 원정 경기에서 5회 초 2사 1, 2루 상황에서 사토 테루아키가 타석에 섰을 때 2루 주자로 나간 치카모토 코지가 2루 방면으로 왼팔을 뻗었다 접었다 하는 행동을 했다. 이를 본 야쿠르트의 3루수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사인을 훔치지 말라는 듯한 어필을 했고 이에 한신 야노 아키히로 감독과 야쿠르트 타카츠 신고 감독이 서로 언쟁을 벌여 심판이 중재를 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네이버 스포츠 뉴스 기사



문제의 사인 훔치기 장면

결국 다음 날 한신은 공식 사과를 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후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2군 경기에서 또 사인 훔치기 의혹이 터졌다.

2.5. 쿄다 요타쿠마가이 타카히로 도루저지 사건

2023년 8월 18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의 요코하마 스타디움 원정 경기에서 9회 초 1사 1루 때 1루 주자 쿠마가이 타카히로가 도루를 시도해 성공했으나 비디오 판독을 거쳐 아웃으로 정정되었다. 문제는, 이때 2루수 쿄다 요타가 루상을 막아서는 장면이 정확하게 영상에 잡혔는데도 심판이 주루방해 선언을 하지 않고 쿠마가이를 아웃시켜버린 것. 이에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이 맹렬히 항의하였으나 끝내 판정이 재번복되는 일은 없었고, 화가 난 한신 팬들이 외야에 쓰레기를 투척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해당 장면. 쿄다 요타가 베이스를 완전히 막아섰다.

3. 구단 및 선수 관련

3.1. 곤도 마사토시카네다 마사야스 감독 구타 사건

1973년 시즌 종료 후 개최된 팬 감사회가 끝난 후, 당시 카네다 마사야스 감독의 끝없는 갈굼으로 마음고생에 시달렸던 곤도 마사토시가 감독실을 찾아가 카네다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카네다가 뻔뻔하게도 사과를 거절하자 울분이 폭발한 곤도가 카네다를 마구 구타해 버린 사건.[3] 곤도는 이 사건으로 인해 곧바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3.2. 요코하마 스타디움 심판 폭행 사건

사건의 전말은 여기
뉴스 기사 회상


1982년 8월 31일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와의 요코하마 스타디움 원정 경기에서 후지타 타이라의 타구 판정에 불복해 한신 코칭스태프들이 심판을 폭행한 사건.

3.3. 신조 츠요시 은퇴 소동

1995년 시즌 종료 후인 11월 19일, 당시 한신 타이거스의 중심타자로 뛰던 신죠 츠요시"자신에겐 야구 센스가 없다"란 이유로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파문을 일으킨 사건. 당시 2군 감독을 맡았다가 시즌 도중 사퇴한 나카무라 카츠히로를 대신해 감독 대행에 취임한 후지타 타이라와의 불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는데, 당시 부상 때문에 2군에 머물러있던 신죠가 치료를 위해 연습에 참가하는 대신 트레이너실에 가 있었던 걸 무단 지각으로 간주하여 정좌를 시키거나[4][5] 부상이 완치되지 않았음에도 교육리그 참여를 강요한 것 때문에 후지타와 사이가 나빠졌고, 설상가상으로 신인 시절부터 따랐던 카시와바라 쥰이치 타격코치가 퇴단하면서 구단에 불신감을 느끼게 된 신죠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의 트레이드를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당하면서 결국 은퇴를 선언하는 사태로까지 일이 커졌다.

그러나 이틀 뒤인 11월 21일에 부친의 병세 악화 등으로 심경에 변화가 생긴 신죠가 은퇴 철회를 선언하면서 이 소동은 어찌저찌 일단락되었다.

3.4. 후지타 타이라 해임 소동 (코시엔 농성)

1996년 9월 12일, 당시 감독이던 후지타 타이라의 해임을 둘러싸고 구단 고위층과 후지타 감독이 코시엔 구장 내 구단 사무실에서 10시간짜리 회담을 벌였다. 새벽까지 기자들을 코시엔에서 기다리게 한 긴 회담에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은 채 후지타는 오전 2시 반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으나, 다음 날 오후에 재개된 회담에서 30분 만에 후지타가 중도해임을 받아들이고, 대신 구단은 위약금을 보장해 주기로 합의하면서 해결되었다. 당시 회상

3.5. 나카무라 카츠히로 GM 사망 사건

2015년 9월 23일 전통의 일전 원정 관람차 도쿄에 와 있던 GM 나카무라 카츠히로가 뇌출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3.6. 코로나 19 회식 위반 및 선수단 집단 확진 사건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지는데 1번째는 2020년 3월 후지나미 신타로, 이토 하야타가, 2번째는 같은 해 9월에 후쿠도메 코스케, 이토하라 켄토가 관련된 것이었다. 두 번 다 구단 자체적으로 마련한 방역 지침을 어겨서 집단 감염을 초래하는 바람에 문제가 되었다. 전자는 그나마 시즌이 미뤄진 덕분에 시즌 진행 자체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후자는 시즌 중이던 9월에 터진 것이여서 문제가 되었다. 덕분에 해당 선수들이 자가격리에 들어가면서 한신은 2군에서 선수들을 콜업해 경기를 치러야 했다.

4. 팬 관련

トラキチ (토라키치)

한신 구단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팀이고 간사이 지역에서는 압도적 인기를 구가하며 수많은 팬덤을 보유한 구단인 탓에 팬덤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도 무지 많다. 사건사고로만 따지면 부산아재, 마산아재, 대구아재 등의 아재들에 명함을 내밀 만한 수준이다. 아니 마산아재, 부산아재, 대구아재의 매운맛을 전부 합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도의 꼴리건[6] 왜 일본프로야구는 KBO 리그처럼 다른 팀 팬끼리 섞여 있는 경우가 거의 없는가 묻는다면 아래 나올 전투력이 말해준다.

4.1. 요미우리 선수단 습격 사건

파일:자이언츠선수단습격사건1.png
파일:자이언츠선수단습격사건2.jpg
파일:자이언츠선수단습격사건3.jpg

1973년 10월 22일. 센트럴 리그 우승을 놓고 라이벌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즌 최종전에 돌입한 한신은 9-0으로 참패하며 홈구장에서 요미우리의 9년 연속 센트럴 리그 제패를 허용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런데 요미우리 선수단이 우승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잔뜩 화가 난 극성 한신 팬 5000여명이 그라운드에 난입하여 3루 더그아웃에 있던 요미우리 선수단을 덮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선수단을 습격한 극성 한신 팬들은 더그아웃을 뒤엎고 오 사다하루 등 요미우리 선수들을 밀치는 행패를 부렸고, 결국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그라운드에서의 헹가래가 취소되어 요미우리 선수단은 숙소에서 헹가래를 진행했다.

이 사태 후에도 분이 식지 않은 일부 극성팬들이 경기장 내에서 폭력행위와 기물 파손 등을 일삼는 소동이 벌어졌고[7], 결국 난동을 부린 팬들 중 20여명이 폭력 및 기물 파손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4.2. 도톤보리 커널 샌더스 상 투척 사건

1985년 우승 직후 팬들이 우승의 기쁨에 흥분하여 선수단과 닮은 사람들을 도톤보리강에 던지기까지 하던 중, 랜디 바스와 같은 외국인이란 이유로 도톤보리 강변 인근의 KFC 매점[8]에 있던 커널 샌더스[9] 동상을 강탈하여 도톤보리강에 투척해버린 사건.[10]

그 직후 한신이 암흑기에 빠진 데다, 무려 38년간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하면서 팬들에게서 그 당시 투척당한 커넬 상이 한신이 우승하지 못하게 한다는 커널 샌더스의 저주가 생겼다.

한신이 38년 만에 일본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또 다시 도톤보리강에 샌더스상을 던지려 했으나, 또 저주 걸리기 싫어서 그런지 커널 샌더스를 코스프레한 코스어를 던져버리는 것으로 타협했다.

4.3. 1992년 9월 11일 난동

문서 참조. 해당 경기에서 야기 히로시인정 2루타가 4심 합의 끝에 번복되면서 끝내기가 취소되자 분노한 한신 팬들이 한신 코시엔 구장에 난입한 사건.

4.4. 응원기가 날려버린 동점 홈런

신죠 츠요시가 한창 한신의 중심타선으로 뛰던 시기인 1995년 6월 20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요코하마 스타디움 원정경기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바로 위 야기 히로시의 타구처럼 9회 초 3 - 4로 한신이 1점차로 쫓는 상황에서 노 아웃 때 신죠가 요코하마의 마무리 사사키 카즈히로를 상대로 친 홈런성 타구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응원기에 맞고 떨어지면서 그라운드 룰 더블로 2루타가 되었다. 만약 홈런이 되었다면 동점이 되어 경기를 반전시킬 수도 있었지만 2루타가 되면서 동점도 못 건졌고, 이후 후속 타자들이 사사키에게 막혀 신죠를 홈으로 불러들이지 못하면서 결국 경기는 그대로 요코하마의 승리로 끝나버렸다.[11]

여기까지라면 자팀에 대한 응원이 과했던 나머지 팀의 승리까지 날려버린 웃픈(?) 사건이었겠지만, 이 판정에 격분한 한신 팬들이 경기장에 응원용 메가폰과 북, 쓰레기통 등 손에 잡히는 것들을 모조리 투척하고 일부 팬들은 그라운드에 난입하는 등 제대로 난동을 벌이면서 경기가 중단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한신 팬들이 난동을 부리건 말건 판정이 변하는 일은 없었고 결과는 위에 나오는 대로.

암흑기의 절정을 달렸던 1990년대 중반의 한신을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

4.5. 신칸센 차내 청문회 사건

후지타 타이라 감독 재임 시기인 1996년, 4466566664의 한복판을 지나가던 중에 벌어진 일이다.

1996년, 당시 개막 초부터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일찌감찌 최하위로 쳐진 한신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치바 마린 스타디움 원정 시리즈[12]에서 분위기 전환을 노렸으나 도리어 3연패로 시리즈를 스윕당하며 최하위 탈출은 커녕 리그 최고속 30패+야쿠르트전 9연패라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13] 당시 응원 보이콧까지 선언할 정도로 답이 없는 팀 상황에 분노했던 한신 팬들이 잠시나마 보이콧을 중단하고 응원을 재개할 정도로 기대를 걸었는데, 그 기대를 최악의 결과로 보답해 버린 것.

최악의 성적으로 치바 시리즈를 마무리지은 한신은 연고지로 돌아가기 위해 도쿄역에서 신칸센을 탔는데, 연패 행진에 화가 난 몇몇 한신 팬들이 열차 안에서 강제로 청문회를 개최했다. 기사 후지타 타이라 감독은 난리를 부리는 한신 팬들을 그린샤 개인실[14]로 초대해 면담을 했고 면담에 참가한 팬들은 열차 내에서 자진 해산했다고 한다. 팬들이 난동을 부린 것이라 이쪽으로 분류한 것이지만 한신 구단도 책임이 없다고 말 못하는 것이, 당연히 팬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막아야 했는데 저런 일이 벌어진 것[15]이다.

후지타 감독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같은 해 9월에 상술한 농성전 끝에 도중 사임했고 한신은 2년 연속 센트럴리그 최하위로 주저앉았다.

4.6. 2014년 일본시리즈 5차전 이물질 투척


니시오카 츠요시3피트 라인 위반으로 일본시리즈가 한신 패배로 끝나자 분노한 한신 팬들이 온갖 이물질을 후쿠오카 돔 외야에 투척한 사건.

4.7. 영아 투척 사건

2019년 7월 2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한신은 니시 유키를 선발로 내세워 연패를 끊고자 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관중석에서 응원하던 한 한신 팬이 자신이 안고 있던 아기를 요코하마 팬인 관중에게 투척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4.8. 코시엔 관중 난동 및 시위 사건

최악의 행보를 이어가던 2022년 4월 6일 경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신은 연장 12회 초에 5실점으로 난타당하며 6-1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 패하면서 개막 이래 1승 10패로 1할에도 못 미치는 승률을 기록하는 참담한 현실을 맞이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때 요코하마가 점수를 내며 한신을 털어먹는 꼴을 못 본 성난 팬들이 난동을 부리고 휴대폰 라이트로 시위까지 한 것. 스포츠경향 기사

이 사건이 터진 다음날 위 문단에서 언급된 요미우리 선수단 습격 사건이 재조명되기도 했다.기사

4.9. 아오야기 코요 인스타그램 DM 테러 사건

2022년 8월 중 한 극성팬이 아오야기 코요에게 인스타로 DM을 보내 험담을 한 사건. 이에 구단은 공식 보도자료까지 내며 대응했다.


[1] 5볼넷 1 몸에 맞는 공[2] 특히 탈삼진왕을 차지했던 2015년이 절정이었다. 박세웅처럼 어느정도 관리를 받아가며 던져도 탈나기가 쉬웠던 상황이었는데, 기어이 2016년에 일이 터진 셈.[3] 당시 카네다와 사이가 나빴던 에나츠 유타카도 함께 동참했는데, 곤도가 "감독의 갈굼을 더 이상 못 참겠다. 감독을 조져 버리겠다"고 에나츠에게 상담해 오자 똑같이 감독에게 불만이 많았던 에나츠도 "저도 같이 가 드릴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동참할 것을 약속했고, 곤도가 카네다를 분이 풀릴 때까지 두들겨 패 버릴 동안 에나츠는 감독실 문을 막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4] 당시 사진이 언론에 입수되면서 일파만파로 말이 커졌다. 뉴스 기사[5] 정좌를 시킨 장본인인 후지타에 의하면 선수들이 연습시간에 무단으로 지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선수들이 스스로 지각했을 때의 벌칙을 지정하도록 했고, 그 결과 지각한 시간만큼 정좌를 하도록 규칙을 정했다고 한다.[6] 하지만 열도의 꼴리건이란 명칭은 치바 롯데 마린즈가 더 어울린다.[7] 요미우리 테레비를 포함한 방송국들의 방송 기기를 부수는 등의 깽판을 부렸는데, 이 와중에도 한신전 중계를 진행하는 메인 방송국인 선 텔레비전만큼은 한신 팬들이 "우리의 아군이다"라며 건들지 않아서 무사했다는 후문이 있다.[8] 현재는 폐업했다.[9] 본명은 할랜드 샌더스로 커널이란 이름은 미국 켄터키 주에서 할랜드 샌더스에게 부여한 명예 칭호 '대령 (Colonel)'에서 유래된 것이다.[10] 심지어 만류하는 직원까지 폭행했다. 원래는 도톤보리강 명물인 쿠이다오레 타로(くいだおれ太郎)인형을 던지려고 했으나 제지당해서 이를 대신해 커널 샌더스 동상을 투척한 것이었다. 여담으로 그 인형은 7년 후인 1992년 한신이 우승 경쟁을 할 때도 당시 한신 외야수 카메야마 츠토무(亀山努)와 쿠이다오레인형이 닮았다는 점에 착안하여 팬들이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내는 수영 몬합니데이(わて、泳げまへんねん)'라고 쓰인 간판과 물안경, 튜브 등의 특별 코스튬을 뒤집어써서 저항했다. 그리고 그해 한신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우승을 내준 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공동 2위로 시즌을 마쳤다.[11] 이 날 패전투수였던 야부 케이이치는 당시 한 달 넘게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하면서 연패 탈출을 간절히 노리고 있었으나 이 경기마저도 8회 말에 스즈키 타카노리의 역전 2점 홈런을 얻어맞은 데 이어 응원기 사건까지 겹치는 통에 결국 패전투수가 되어 연패만 늘렸고(...) 결국 3달 동안 9연패만 찍는 눈물겨운 상황에까지 치닫았다가 8월 9일 히로시마 전에서 승리투수를 기록하면서 간신히 연패 행진에서 탈출했다.[12] 당시 야쿠르트가 아마추어에게 우선 사용권이 주어지는 메이지진구 야구장의 특성상 도쿄 6대학 야구리그의 일정 문제로 진구구장을 쓸 수 없어서 1991~2005년까지 5월 중순에 주말 3연전을 치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개최했다.[13] 이후 한신은 야쿠르트 상대로 6연패를 더 추가하면서 이 해 야쿠르트전 15연패라는 최악의 기록을 찍고야 말았고, 종합 대전성적도 7승 19패로 완전히 압살당했다.[14] 당시 신칸센에 개인실이 달린 건 신칸센 100계 전동차 뿐이었고, 2022년 현재 운행 중인 신칸센 차량의 경우 신칸센 700계 전동차 히카리 레일스타가 유일하다. 당시 도카이도-산요 라인에 다니던 차량은 0계, 100계, 300계 뿐이었다. (500계는 1997년, 700계는 1999년 데뷔)[15] 당시에는 노조미는 하루 몇 대만 300계로만 다녔고 도카이도-산요의 주력은 100계 히카리였다.(가끔 가다가 임시로 0계가 히카리로 뛰는 일도 있긴 있었다) 다만 하루 몇 대 안 다니더라도 노조미가 최소한 시간당 1~2대는 다녔을 텐데 한신 선수단은 그냥 노조미가 아니라 히카리를 타고 고시엔으로 돌아간 것이다. 게다가 노조미는 당시만 해도 전좌석 지정석이여서 이런 일이 벌어질 확률이 적었다.(히카리, 코다마는 첫 개통 시부터 자유석이 설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