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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리 | vs | 낙동강 시리즈 | ||||
지역 연고 | 마산고등학교 | 마산용마고등학교 | 김해고등학교 물금고등학교 | 울산공업고등학교 | 창원공업고등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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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상동 야구장 | ||||
현재 시즌 | 2025 시즌(스토브리그) | |||
구단 역사 정보 | ||||
통합 역사 | 역사 | |||
우승 | 1984년 | 1992년 | |||
암흑기 | 암흑기 (8888577, 5788, 7A78877) | |||
선수단 | 역대 선수 | 프랜차이즈 스타 | 역대 등번호 | 역대 필승조 | |||
영구 결번 | 11 최동원 | 10 이대호 | |||
기타 | 역대 기록 | 역대 신인드래프트 | |||
구단 세부 정보 | 특징 | 팀 컬러 | 유니폼(얼터너티브) | ||
라이벌리 | 상대 전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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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 6월 7일 롯데-LG전[1]이 열린 마산 야구장.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3루 쪽 조명탑을 타고 경기장으로 난입하고 있다.[2] |
1995년 8월 24일 롯데-한화 경기를 보기 위해 마산 야구장을 가득 채운 팬들의 모습. |
이미 일부 마산 관중들의 과격한 관전 태도에 익숙해져 있던 롯데 구단 직원들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섰는데도 큰 일이 벌어졌다"며 "더 이상은 마산 경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군요.
더욱이 롯데 구단 버스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을 깨던 청소년들이 이를 말리던 구단 버스 기사 손경구 씨[3]를 집단 구타, 치아가 흔들리고 입안을 7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이 날 관중들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술에 취해 패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경기가 막 끝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물병과 술병을 어지러이 그라운드로 마구 던지는 상식 이하의 관전 태도를 보였습니다.[4]
- [한국프로야구 난투사](41)수그러들지 않은 마산구장 소요사태...야구에 취해, 술에 취해
- 창원야구 100년사 (15) 지역 팬들 유별난 열정, 전설이 된 전투력 '감독 청문회'까지
- 사실은 약 100년 전인 1922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KBO 리그 역사상 전투력이 가장 강력한 야구 팬으로 평가되는 존재들이다. KBO 역사상 광주아재, 꼴리건, 대구아재처럼 버금가거나 아예 도원전사마냥 더한 팬들 자체는 많이 있었지만, 그 명맥을 21세기까지 이어간 이들은 오직 마산아재들뿐이다.
마산아재들은 롯데가 마산구장에 와서 경기만 했다 하면 크보 역사상 길이 남을 기행을 저질렀고, 해태 타이거즈의 경우 농담 않고 선수가 경기장에 들어온 뒤 무사히 걸어나간 적이 없었다. 과거 해태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강호동[5]이 진행하는 토크쇼 무릎팍도사에 나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산만 해도 그나마 괜찮았죠. 마산에서 경기하면 끝나고 기본적으로 1시간 30분은 못 나갔어요. 집에 가려면 달걀 몇 개씩 맞고 간 것 같아요." 또한 MBC 청룡-LG 트윈스의 레전드 투수 김용수 역시 스톡킹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마산이 언급되자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을 정도였다.
2. 역사
2.1. 탄생
- 창원야구 100년사 (13) 프로야구 출범과 마산, 롯데자이언츠 제2 연고지로 존재감 뽐낸 1982년
- 창원야구 100년사 (15) 지역 팬들 유별난 열정, 마산만 오면 죽쑤는 롯데 아재 마음은 불타오르네
이른바 '곤조'라고 하나요, 타고난 기질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다르게 표현하면 근성이 강한 거죠. 제 현역 시절에도 다른 지역 선수들과 비교해 마산 선수들이 근성 면에서는 최고였어요. 마산상고가 어느 대회 8강에서 광주일고한테 졌어요. 그날 저녁 식당에서 서로 마주쳤는데, 광주일고 선수들이 슬슬 피해 가더군요. 우리가 기 싸움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았죠.
이재문 경남야구협회장[6]
이재문 경남야구협회장[6]
어떨 때는 마산상고 출신이 롯데 주전으로 8~9명씩 뛰고 그랬습니다. '롯데는 마산상고 없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마산 팬들은 그것에 대한 자부심이 당연히 컸고요.
한문연 전 NC 다이노스 코치[7]
1904년 공식적으로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황성 YMCA 야구단'을 창단한 이후 전국적으로 야구단 설립 열풍이 일었는데, 이 대열에 동참한 것이 당시 마산(현 창원) '창신학교(현 창신중·고)'였다. 1906년 설립된 창신학교는 1914년 학생들에게 진취적인 의식과 행동을 심어주기 위해 야구부를 만들었고,[8] 이후 마산 지역의 야구 확산을 주도하며 하나의 대중문화이면서도 민족주의의 뿌리를 이끌었다. 1920년대 마산에서도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이 심심찮게 야구 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여럿 남아있어, 오늘날에는 조선 사람들이 팀 경기에서 힘을 합쳐 일본을 이기겠다는 의미가 짙게 깔려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 기사.한문연 전 NC 다이노스 코치[7]
1970~80년대 용마고와 마산고 야구부 경기 영상 |
1982년 프로야구가 태동하며 지역 안배, 특히 시장성을 중심으로 각 구단 연고지가 정해지면서 마산 지역은 프로야구 출범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 단독적인 지역 연고팀 없이 부산과 함께 롯데 연고지로 묶인 것인데, 다소 아쉬운 상황 속에서도 마산은 특유의 존재감을 뽐냈다. 시즌 개막 전 전지훈련 장소로 각광 받은 게 한 예로, 6개 팀 중 가장 먼저 코치진·선수 계약을 끝낸 OB는 1982년 2월 1일 마산에 스프링 캠프를 차렸다.[9]
전지훈련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던 이들 지역 프로야구 열기는 그 해 9월 마산 야구장이 준공되면서 더욱 치솟았다. 준공을 기념하고자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린 데 이어 시즌 종료 후에는 비공식 시범 경기까지 개최하게 된 것.[10] 이 시범 경기는 '경남에서도 프로야구 붐을 조성하겠다'는 전략을 안고 열렸는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마산 사람들의 그칠 줄 모르는 야구 사랑은 프로야구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이는 훗날 '마산아재'로 대표되는 지역 야구의 도약 기틀이 됐다.
마산에서 열린 첫 프로야구 경기는 1982년 9월 26일 롯데 자이언츠-삼미 슈퍼스타즈전이다. 경기는 마산 야구장 준공을 기념해 열렸는데, 마산을 비롯한 경남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입장권 예매분 1500매가 삽시간에 매진된 건 시작에 불과했다. 경기 개시 전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관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용인원의 2배를 넘어섰다.[11] 질서를 잃은 몇 관중은 유리창과 셔터를 부수고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고, 시구를 하기로 한 도지사조차 입장하지 못한 채 경기가 시작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마산 사람이 내비친 야구 열기에 놀랐던 것인지, 그 해 말 롯데는 마산시에 2억 원을 기부하며 '마산 야구장 야간 조명 설치'에 힘을 보탠다.[12] 이듬해 조명 설치 작업이 마무리되고, 롯데가 마산야구장 방문 경기를 늘리면서 이 지역 프로야구 시대도 활짝 열렸다.[13]
2.2. 전성기
이렇듯 프로야구 시작부터 전설의 탄생을 예고했던 마산아재들은 이윽고 하나의 유머 시리즈가 됐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이야기들이 구전되면서 살이 붙고 하나로 묶이기 시작했으며, 어느 때부턴가 이 도시전설들은 마산아재 베스트 사건 10이란 타이틀을 달고 인터넷을 통해 동네방네 퍼지기 시작했다. 작가 이말년은 만화 《이말년의 야구배설》에서 소재로 사용한 바 있고(이미지 유실), 불암콩콩코믹스에서도 마산아재를 이용한 에피소드가 있다.[14]전설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경기 후 분노한 아재들이 구장 곳곳에 불을 지르고 경품권 추첨을 하지 않았다고 경기 운영 사무실까지 쳐들어온 일도 있었다 한다.
2.2.1. 저격수
롯데 자이언츠와 쌍방울 레이더스가 맞붙은 마산 경기에서 벌어졌다고 알려진 도시전설. 8회까지 성영재한테 끌려다니며 완봉패를 당하기 일보 직전, 보다 못한 3루에 있던 어느 마산아재가 새총을 꺼내 쌍방울 투수 성영재를 저격했고, 명중시켰다.2.2.2. 용접기
1995년 한창 롯데가 잘 나가던 시절. 좌석이 2만 개도 채 되지 않는 마산 야구장이 매진되어 들어갈 수가 없자 마산아재들은 최강의 카운터 병기를 꺼내들었다. 그는 바로 옆동네 창원기계공단과 야구장 인근 산호동 공구상가의 용접기술자들. 결국 야구장 입구를 녹이는 데 성공해 여기서 1만 명(?)이 더 난입했다.
이렇게 문을 뚫었으나, 이미 정원의 2배가 넘어버린 상황에 자리 따위는 없었고,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던 마산아재들은 중계석 위 지붕과 스포트라이트 스탠드로 기어 올라갔다. 화상 및 감전의 위험과 더불어 받침대도 없고 뒤로 경사가 져서 여차하면 대참사가 발생할 위험에 놓였지만, 마산아재들은 끝끝내 거기서 버티며 롯데 응원을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
용접으로 문등을 훼손한건 사실이 아니지만 [15], 자물쇠가 채워져있던 문을 파손하고 막무가내로 했던 입장은 수도 없이 많으며, 지붕 관람 또한 사실이다. 당장 바로 위 개요 문단에 첨부된 1995년 8월 사진만 봐도 사진 오른쪽 상단 중앙지정석 지붕에 사람이 4명 정도 확인된다.
2.2.3. 삼겹살과 소주
보통 야구 구경은 치맥과 함께하는 것이 제격이라지만, 마산아재들은 이것마저 달랐다. 복도와 계단에 돗자리를 깔고 맥주를 마시는 대신 소주를 까고, 치킨을 뜯는 대신 삼겹살을 구워먹었다.[16] 여기에 경기가 망하면 불판을 뒤엎고 우는 조카 신발 벗겨서 던지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 여차하면 아래 사진처럼 양주도 따서 마셔댔다. 심지어 2000년대 중반까지 국내 야구장 유일하게 매점 등에서 병소주[17]를 판매하기까지 했었다.[18] 그러다 보니 2010년대 이후에는 야구장에 소주 반입이 불가능해지고, 입장 시 생수병 뚜껑을 따서 확인할 정도로 소지품 검사가 철저해지자 아예 소주로 화채를 만들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외야 쪽에서 야구장 밖으로 상인에게 5천원을 던지면 상인이 소주를 담은 500ml 페트병을 던지는 걸 받아 사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실제 마산 야구장 외야석에서 대패 삼겹살을 팔고, 사면 불판을 빌려주기도 했다. 병소주처럼 매점 등에서 합법적으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상인들이 불법적으로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외야에 앉아있으면 "대패~ 대패~" 하면서 돌아다니는 아줌마가 있었다.
경기가 잠시 중단된 도중에[19] 넉넉한 인심의 마산아재가 카메라맨에게 스카치 위스키인 로얄 살루트를 따라주던 장면.[20] 이 전통은 아직까지도 남아 카메라맨에게 술 대신 음료수를 건네기도 한다. 방송버전[21] 이 날은 어느 마산누나[22]가 깡소주를 마시는 장면도 포착되었다. 물론 당시 중계석에 앉은 권성욱 캐스터는 웃으면서 "물이겠죠? 물이겠죠? 물이라고 믿겠습니다."라고 코멘트했지만[23] 누가 봐도 플라스틱 화이트 팩소주임은 분명했다.
2.2.4. 버스 흔들기와 청문회
김용희 감독이 롯데를 맡아 588이라는 비밀번호를 신나게 찍던 시절,[25] 같잖은 연패에 벼르고 별렀던 마산아재들은 김 감독이 마산 야구장에서 경기까지 패배하자 롯데 선수단 차량을 둘러싸고는 김 감독을 차량 밖으로 불러내렸다. "왜 졌느냐", "박정태는 왜 살이 쪘느냐" 등 연패에 대한 온갖 질문을 쏟아내며 김 감독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는 선수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실책을 저지르거나 방화를 할 경우 마찬가지로 아재들에게 청문회를 받아야 했다.
"감독님, 와(왜) 졌어요?"
"죄송합니다..."
"왜 졌냐니까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 X발 와 졌냐고!!"'
- 당일 대화 내용이라고 알려졌던 글. 한동안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이게 정설처럼 퍼졌지만 실제로는 아래 후술하듯 이보다는 훨씬 온건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왜 졌냐니까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 X발 와 졌냐고!!"'
- 당일 대화 내용이라고 알려졌던 글. 한동안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이게 정설처럼 퍼졌지만 실제로는 아래 후술하듯 이보다는 훨씬 온건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문동환 7대8 사건도 있다. 당시 신문 기사. 1998년 5월 5일 마산 쌍방울전에서 7대1로 이기고 있던 롯데가 불펜진의 불질로 되레 7점을 퍼줘 7대8로 패배하자[26] 이번에도 난리가 났다. 그런데 하필 이 날이 어린이날이었던 것. 문동환은 한화에서 뛸 당시에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시절이 롯데에서 뛰던 시절이다."라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아재들은 타 팀이라도 봐 주지 않았다. 1999년 6월 10일 당시 박정태의 32경기 연속 안타 기록[27]이 마산 야구장에서 끊겼는데, 이때 상대가 두산 베어스[28]였고 선발은 이혜천이었다. 그는 이 날 박정태의 연속 안타 기록을 끊는 데 이어 단 3안타, 3볼넷을 내주고 7삼진을 잡으며 본인의 데뷔 첫 완봉승을 거두고, 6회 박정태가 친 투수 강습 타구를 엄청난 반사신경으로 잡는 등 활약을 펼쳤다. 또한 이미 승부가 결정난 9회 2아웃 박정태의 마지막 타석에 3루수 홍원기가 안타가 되어야 할 타구를 다이빙해서 잡아 간발의 차로 아웃시켰다.[29][30]당시 마지막 타석 영상
경기가 끝나고 열 받은 마산아재들은 두산 구단 버스를 붙잡으며, 두산 선수들은 무려 1시간 반이나 마산구장에서 발이 묶여야 했다. 두산 선수들은 버스 안에서 마산아재들의 욕설과 버스 흔들기에 벌벌 떨며 시간을 보냈고, 한참 뒤 마산아재들의 당장 나오라는 욕설이 들리자 이혜천은 자기 유니폼을 아재들에게 던져줬고, 마산아재들은 그 유니폼을 찢고 불태웠다고 한다. 그 사이에 투수조는 야수조 버스로 옮겨탔고, 버스가 포위망을 뚫고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탈출했다. 유일하게 외국인 선수인 타이론 우즈만 이 광경을 무척 신기한 듯이 우와우와 하면서 봤다고 한다.[31] 이때 마산아재가 버스를 얼마나 때려부쉈으면 이경필의 언급으로는 버스 수리비가 3천만원 가량 나왔다고 하는데, 감가상각 따지면 거의 버스를 한 대 뽑을 금액이다.
그리고 2015년 5월 NC 다이노스와의 마산 3연전에서 롯데가 스윕패를 당하자 재현되었다. 참고로 드러누운 아재는 롯데팬이다.
2.2.5. 방탄모
해태와 롯데가 한창 서로 열을 올렸던 1980년대 말[32]의 어느 경기 우익수로 나선 해태의 이건열은 야구 모자 대신 밑도 끝도 없이 야구 헬멧을 쓰고 눈치를 살피며 그라운드로 나섰는데, 나중에 밝혀진 이유가생명의 위협을 느꼈어요.
이건열의 예감은 정확했고, 술병 몇 개가 한 텀이 멀다 하고 경기장으로 날아왔다. 박영길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의 진술.돌에 맞은 이건열은 결국 교체됐고, 투수였던 강태원이 우익수 수비를 나갔으며, 계속 강태원을 타깃 삼아 던지려고 하자 2루수 뒤에 거의 붙어서 수비를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80년대 말이라고 써 있는데, 강태원의 타격 기록이 1991년에만 있는 것으로 보아(1타수 무안타)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91년으로 보인다.
이 방탄모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2010년대 중반까지도 사연만 알려졌지 누가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당대 외야수 포지션을 되짚어 야구 팬들 사이에서 "김종모 아니면 이건열 아니었을까?" 하는 식으로 추측되기만 했다가, 이건열이 이후 대학 강의를 하면서 관련 에피소드를 밝히며 주인공이 알려졌다. 실제로 이건열은 모교인 동국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을 맡으면서 일반 학부생도 수강 가능한 야구 관련 교양 과목을 개설해 강의를 하고 있다. 이건열이 밝힌 바에 따르면 수비하다가 벽돌에 다리를 맞아서 그 다음 이닝에는 '머리라도 보호하자' 라는 심정으로 헬멧을 쓰고 수비하러 나섰다고 한다. 이후 2021년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서 다시 증언하였다.
2.2.6. 주요 사건들의 실체
경남도민일보의 남석형, 주찬우 기자가 2013년 4월 10일 작성한 기사에 따르면, 베스트 10 중에서 새총 저격 사건과 용접기 사건은 거짓이라고 한다.
- 먼저 새총 저격 사건. 위의 기사는 물론, SBS ESPN에서 방영한 야구본색 3화에서 거짓임을 밝혔다.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면 피해자였을 성영재가 새총에 맞은 기억은 없다고 한 시점에서 거짓 확정. 하지만 몇몇 마산아재 전설의 신봉자들은 빗나가서 그랬지 실제로는 쐈다는 주장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성영재가 기절해서 기억을 잃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로야구를 원년 때부터 중계해온 허구연 해설도 어긋난 팬심에 가장 심한 것은 뭔지 아느냐 하며 한명재 캐스터에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역시 새총 저격을 언급하였다. 사실 한국프로야구에서 새총 저격이 벌어진 적은 있다. 그러나 장소가 대구야구장이었고, 피해자는 롯데 자이언츠 투수 김종석이었다. 허구연 위원이 이야기한 사건은 이쪽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2015년 5월 2일(토)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허구연 위원이 해당 사건을 "광주"에서 일어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 비슷한 사건이 1980년대에 여러 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게 지금이야 TV 중계가 일상인 프로 스포츠지만 당시 80년대만 하더라도 TV는 부의 상징이었고, 당시 방송 통폐합 때문에 방송사도 몇 없었다. 오죽하면 MBC가 팀을 창단하게 설득한 이유도 원활한 생중계를 위해서였다니 말 다했다. 그나마 남은 기록도 대부분이 기록물로 남기 힘든 라디오 방송인 경우도 많았으며, 녹화본이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필름이 귀해서 이미 녹화된 후 보관 중인 필름에 다시 녹음을 하는 경우도 흔했기 때문에, 당시에 해당 사건이 있었어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확률도 있다.
- 경남도민일보의 취재에서는 용접기 사건에 대해 거짓이라고 밝혔다. 애초에 용접기를 사용하려면 고압의 전기를 공급할 곳이 있어야 해서 불가능하다. 야구본색 3화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문 자체를 용접기로 녹여버린 건 아니지만 "산소용접기"로 "자물쇠"를 녹여서 들어왔다'는 식의 내용과 삽화를 담아 방송을 했다. 마산아재들이 용접기를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위의 지역신문 기사에 따르면 여러 명이 합심해서 자물쇠까지 채워진 문을 부수고 들어간 것은 실제 있었던 일로 보여진다. 문을 녹였든, 자물쇠를 부쉈든 녹였든 간에 마산아재들이 마치 리니지 게임 속 공성전마냥 멀쩡히 잠긴 경기장 문을 따고 난입한 건 사실로 보여진다. 또한 용접기 사건과는 별개로, 특고압이 흐르는 조명탑과 경기장 지지대를 타고 문 닫힌 경기장에 난입한 것도 역시 사실이라고.
- 즉석 청문회 사건은 실제로 벌어졌지만, 초반 버스 앞에 들어눕고 욕설을 하며 살인이라도 날 법한 흉흉한 분위기였지만 한참 뒤 김용희 감독이 모자를 벗으며 90도로 인사를 하면서 나오면서 "좋은 경기를 보여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 다음 경기를 위해서 이동해야 하니 길을 열어 달라" 고 말하고 몇몇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하자 마산아재들은 언제 그랬냐는 둥 " 빨리 나와 드려라! " 하며 교통정리를 하고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다.
- 관중들이 제 3 세력으로 가세했다는 전설은 야구가 아닌 축구가 그 기원으로 보인다. 1987년 마산공설운동장[33]에서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한국 A팀과 이집트의 경기가 그 사건이다. 그때가 6월 10일 바로 그 날이었고, 민주화의 성지였던 마산 시내에서도 격렬하게 시위가 진행 중이었는데, 경기 도중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 연기가 경기장으로 날아들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매우 많이 일어났기에 최루탄에 익숙했던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은 큰 동요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집트 선수 중 다수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 사이에 한국 선수들이 골을 넣었기는 했지만 이집트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이상을 보이자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도 웅성웅성거렸고 결국 주심은 해당 경기를 재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몰수무를 선언하며 경기를 종료시켰고, 이 장면은 KBS 1TV를 통해서 갑자기 방송이 끊기는 초대형 방송사고까지 겹쳐 전국적으로 생중계되었다.[34] 이렇게 허무하게 경기가 끝나자 경기 전에 강제로 표를 사야 했던 마산 관중들이 표 환불을 요구하며 주최 측에 대거 항의하다가[35][36] 그런데 운영측은 환불을 해주지도 않으면서 미숙한 대응으로 일관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결국 3만명이 넘는 마산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이들은 그라운드에 난입하여 항의했다. 운동장 바깥으로 나가자 때마침 마산 시내에서 전두환을 타도하자는 시위를 벌인 시위대에 합류하여 시위대 숫자는 1500명에서 3만 5천까지 불어난다. 시위대에 있던 아재 대부분은 10대~20대 시절엔 4.19 혁명[37]을 경험했고, 불과 8년 전인 1979년에는 부마민주항쟁을 겪은 산증인이었다. 당시에도 전국구급 시위를 하던 마산아재였는데, 27년 전의 잘못을 반복한다? 당연히 마산아재들의 분노는 끝을 모르고 치솟아 올랐고, 이 시위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시위 진압 경찰들이 인근 창원으로 후퇴했고, 이후부터 진입하려 하면 패퇴하고 물러갔다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인근 창원과 부산에서 인원이 충원되었는데도 패퇴했다. 당시 사건에 대한 영상.
다만 당시 서울의 시위조차 통제가 불가능해 지방의 경찰 인력까지 마구잡이로 빼내 서울로 차출해 가던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분노한 동네 사람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해봐야 경찰에 속한 동향 친구들의 의욕이 있을 리 없다. 거기다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도 어느 정도 암묵적인 룰이 존재하기도 했다. 예시로 부마항쟁의 경우 5.18 민주화운동에 비해 비중은 작지만 차지철이 '100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 질 것'이라고 말했을 만큼 상황이 심각했으며, 그 이전에는 이미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었다. 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하지 않았다면 5.18 민주화 운동보다 더 큰 규모의 사상자가 나왔을 지도 모르는 지역이다. 그렇다보니 지역 내에서 서로 알력은 있을지언정 어느 정도 같은 경남 해안권 사람[38]이라는 정서적 유대감에 더해 이전에 있던 여러 민주화 운동으로 생긴 암묵적 합의 등이 형성되어 있다 보니 진압이 되는 게 이상한 거다.[39]
이후 시위대는 마산시내 파출소를 방화하고,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사무실로 쳐들어가 전두환 및 국회의원의 사진을 불태우며 새벽까지 경찰들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40] 그리고 이 사건이 같은 시기 부산에서 있었던 일(4장 참조)이나 1988년 5월 25일 빙그레전에서 역시 최루가스로 1시간 동안 경기가 중단된 사건 등과 결합되면서 현재의 전설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출처.
2.3. 1990년대 말
이러한 지역 야구팬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진 건 마산 야구장이 새로 단장한 이후부터다. 1998년, 마산 야구장은 기존 1만 5000석이던 관중석을 2만 1000석으로 증축했다. 기존 시멘트 좌석에 의자도 설치했고 10억 원을 들여서 컬러 전광판도 설치했다. 무엇보다 야구장 주변 '술 좌판'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 글을 보면 예전보다는 관중 매너가 좋아진 모습을 볼 수 있다.1998년 마산야구장이 새 단장 됨으로써 경기장 모습이 확연히 달라졌다. 운동장 주위에 노점상이 정리되어 일찌감치 술판을 벌여놓고 시비를 벌이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1998년 5월 5일 롯데가 쌍방울에 역전패당했을 때 마산 관중들은 이전처럼 흥분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7일 야간 경기 때에도 롯데가 일방적으로 밀리자 물병 몇 개가 날아왔지만, 그 숫자가 줄어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마산시 체육사> '얌전해진 마산 관중' 출처.
그리고 200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며, 특히 야구가 본격적으로 일반인에게 알려진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마산아재는 거의 사라졌다. 자리 깔고 양주 따고 삼겹살 구워 먹는 관전 문화는 여전해도[41] 가끔 야갤과 구단 팬들한테 '그런 시절에 그런 양반들이 있었지' 하며 개드립 소재로 입에 오르내를 뿐. 마산아재 자체가 자조적인 유머 소재라 깊게 파고 들 것도 없는 말이니, 괜시리 옛날의 저 몇몇 면만 보고 옛 마산의 야구 팬들에 지역감정 같은 것을 덧씌우지 않도록 주의하자. 무엇보다도 롯데의 암흑기가 끝나며 마산 야구장에서 난동이 벌어지면 주변 관중들은 '아주라' 대신 '집에 가'를 외치고,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야구장에서 깽판을 치면 앞장서서 욕을 하기도 했다.<마산시 체육사> '얌전해진 마산 관중' 출처.
게다가 마산 경기 자체가 '롯데가 홈 팀이었지만 이동거리가 상당했기 때문에' 반쯤 원정 경기 취급이여서 경기가 줄어들기도 했다.
2.4. NC 다이노스 창단 이후
그런데 흩어졌던 마산아재들이 재집결할 계기가 생겼으니, 바로 마산시-창원시-진해시 통합과 2011년 통합 창원시를 연고지로 한 KBO 제9구단 NC 다이노스의 창단이다.구단에서 2012년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이벤트로 공모한 현수막 문구들.[42] |
게다가 마산 야구팬들의 특수한 사정 또한 조금 감안을 할 필요가 있다. 마산아재들이 이토록 열성적이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야구를 직관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NC 다이노스가 생기기 전까지 마산 지역에 배정된 롯데 홈 경기는 1년에 고작 6경기뿐이었고, 그나마도 대개 우천 취소가 일상인 6~7월에 집중되어 있었다.[44]
제2 홈구장에서 1년에 6경기라는 말만 보고 "야구가 경기 수가 많은거지 대부분의 종목들은 한 시즌 50경기도 안 하는 경우도 많은 데다 홈 경기는 거기서 또 반인데, 제2 홈구장 경기가 1년에 6번이면 적긴 하지만 그렇게 부족한 건 아니지 않아?"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는 경기 수가 많기에 보통 3연전으로 경기를 편성하는데, 이것이 마산에서도 그대로 가면서 6경기 편성이 3연전 2번 편성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6경기마저도 사실상 1년에 6번 경기를 한 게 아니라 2번 경기를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45]
즉, 정규시즌 경기가 적은 프로스포츠 리그와 마산 지역 프로야구 경기는 상황이 크게 달랐다. 그 예로 NFL은 애초에 종목 특성 상 많은 경기를 하기 어려워 정규시즌 경기가 16경기뿐이고, 이에 따라 홈 경기도 8경기뿐이라 당시 마산과 경기 수가 비슷하지만(6경기 vs 8경기), 그런 리그들은 애초에 각 경기 간 간격이 길어서 보통 1주일에 1~2경기씩 하는 게 끝이라 8경기를 한다 해도 1년에 8번이 홈에서 미식축구 경기를 볼 수 있는 시즌일 것이다.[46] 이렇게 미식축구 홈 경기는 경기 수가 적더라도 1~2번 놓쳐도 6~7번 더 볼 기회가 있는 반면, 마산 지역 프로야구 경기는 그 3연전 2번 할 때 못 보면 얄짤없이 다음 해까지 마산에서 경기를 볼 기회가 없었다.
거기에 우천 취소가 일상이라 배정된 6경기를 모두 한 경우도 별로 없었던 것을 보면 마산아재들의 입장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마산 홈 경기는 한 번 놓치면 일단 그 시즌에는 확실히 다음을 기약할 수 없고, 재수 없으면 다음 해에도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그야말로 초특급 빅 이벤트였다. 당연히 매 경기의 승패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NC 다이노스의 창단 이후로는 안방에서 1년에 무려 72경기씩[47][48]이나 구경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예전과 같은 극단적인 팬심을 부릴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다.[49]
창단 초기 살벌한 팬사인회 풍경. 극단적인 남녀 성비에 주목하자.[50][51] |
2012년 4월 14일, NC 다이노스 홈 개막 경기가 열렸는데, 이 때 NC가 집계한 공식 관중수는 9,865명, 퓨처스리그 사상 단일 경기 최다관중 기록이 확실시되었다. 4월 15일 관중수까지 합해서 총 15,000명이 넘는 관중이 왔는데, 2012 시즌 홈 경기 무료 개장이라는 점[52]을 감안해도 엄청난 수치. 덕분에 처음에는 리모델링이 완벽하게 완료된 내야만 개방했으나 관객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리모델링이 덜 끝난 외야석을 임시로 개방했다.
또 롯데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자, 관중석에서 일제히 "마!!!" 소리가 나오는,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롯데에게 마를 시전하는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NC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자 롯데 원정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를 외쳤지만 마산아재들의 답변은 "산!" 그리고 훈훈하게 이어지는 마!-산!-마!-산!의 열창. 당연한 얘기지만 이 쪽이 상대편 '마!'에 대한 부산갈매기들의 대응 '왜!'보다 짝짝 붙고, 같은 지역 사투리를 쓰는 만큼 대화가 그냥 쉽게 된다. 그리고 이 때는 창단 초기라 이렇게 했지만 이제는 견제 구호로 '쫌!'을 쓰고 있다.
덤으로 나성범에게 몸쪽 깊은 공이 오자 마산아재가 육두문자를 거하게 날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전처럼 격렬한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왕성한 활동력과 전투력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였다. 이미 2012년부터 마산 야구장에서는 주중 경기, 그리고 2군 경기임에도 안전요원들을 두세 블록마다 한 명씩 배치했는데, 그 수만 해도 잠실 야구장보다 더 많다.
2013년 NC가 1군으로 올라오면서, 이들의 전투력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시범경기 카더라에 따르면 벌써부터 욕 배틀이 펼쳐진 모양.
2013년 4월 2일, 드디어 롯데 자이언츠와 1군 홈 첫경기이자 개막전 경기를 가졌다. 개막전이라 그런지 경기 시작 전부터 많은 관중이 몰려왔다. # 하지만 이미 1만 4천장에 달하는 표는 인터넷 예매로 매진된 상황이었고, 현장 판매분은 300장 뿐. 결국 표를 못 구한 아재들은 용접기를 가져오겠다고 하거나, 매표소에 벽돌을 던지기도 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전투력이 느껴진다.[53] 표가 매진되자 분노한 마산아재들. 그래도 과거와는 달리 자제하는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보여줘서, NC가 홈 개막전에서 전패를 했음에도 마산아재들이 버스를 둘러싸더니 육두문자가 아닌 격려와 위로의 응원을 해주는 훈훈한 모습도 보였다.
사실 30여 년간 롯데의 제2 연고지였기 때문에 아직도 롯데 시절의 과거 기억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롯데 NC전에서 NC 모자를 쓴 어떤 마산아재가 술에 취해서 강민호한테 '야구 단디 해라'라고 하고 지나갔다고. # 그리고 그러한 응원에 힘입어 팀은 결국 결코 짧지 않은 1군 울렁증을 극복하고 승수를 쌓아가고 있다.
2013년 5월 7일 한화전에서는 3회부터 소주병 투척과 관중석에서는 싸움이 일어나고, 9회에 역전당하자 콜라 페트병을 던져서 경기가 잠시 중단되기까지 했다.
2014년 8월 6일 사직 롯데전에서 NC가 롯데에게 4:10으로 지고 있는 8회말, 맥주캔이 들어있는 주황색 롯데 응원봉투가 맥주가 들어있는 채로 3루심 바로 앞으로 날아들어왔고 경기는 잠시 중단되었다. 맥주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3루심에게는 치명적인 부상이 생길 뻔했다. 롯데의 응원도구이지만 크게 이기고 있는 롯데의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이물질을 투척할 리 만무한 정황상 NC 팬의 소행인 듯 하다. 이 경기를 중계하던 이순철 해설위원은 "이물질을 투척한 관중이 다시는 야구장에 발을 들일 수 없게 조치해야 한다"고 극딜했다.
2015년에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마산 롯데 아재가 5월부터 계속되는 연패 행진에 분노한 나머지 롯데 버스 앞에서 그대로 누워 버스 막아라를 시전해버렸다.
2016년 4월 2일 KIA 타이거즈와의 개막 2차전 8회초 3:1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아재 한 명이 구장 안에 난입하였다. 이 때문에 경기가 일시 중단되었고, 그 때문에 호투하던 최금강의 리듬이 끊어진 탓인지 이범호에게 솔로 홈런을 맞았다. 해맑은 아재의 현란한 스텝을 감상해보자. 구단 사과문.
2016년 7월 6일 롯데에서 NC로 이적한 손민한이 은퇴식을 마산 롯데전에서 열면서 일부 롯데 팬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NC가 2016년 플레이오프에서 LG 트윈스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되면서 마산아재들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순간[54]이 도래했으나, 결과는 그냥 홈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드디어 NC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마산아재들의 오랜 숙원을 풀었으나, 이땐 코시국으로 인해 고척돔 중립 경기로 치러져 모든 경기가 창원에서 못 치러지고 서울에서만 치러졌는데, 이 때에도 마산아재들은 홈구장에서 경기를 못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루이틀을 통으로 비우고 많은 돈을 써가면서까지 서울까지 올라와 직관하는 강력한 열기를 보여주었다.
2017년 이후로 구장 내 난동꾼은 1980년대 그 시절에 비해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역사가 되어 버렸지만, 여전히 야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마산 야구장 및 창원 NC 파크 앞 설렁탕집, 고깃집, 마산 산호동 일대의 기타 반주를 할 수 있는 각종 식당에서 야구 모자를 쓴 채 얼굴이 벌겋게 되어 한 잔씩 걸치는 나이 먹은 아재들을 볼 수 있다. 물론 TV에는 야구 중계가 나오고 있고, 식당 안에는 육두문자가 가끔 튀어나온다. 그리고 낮 경기든 밤 경기든 상관 없이 8회말쯤 되면 식당 아지매가 "마이 자싰으모 인자 쫌 드가이소" 하고 강제로 계산해버린다고 한다.
2019 시즌 4월 NC 다이노스 아재데이 안내. 홍보모델 박석민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
이처럼 NC 다이노스는 새 야구장으로 이사한 후에는 아재데이 이외에도 호러 데이, 한가위 풍성하데이, 플레이어 데이, 스쿨 데이, 고맙데이[55] 등을 개최하면서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전 연령층, 특히 미래 고객이 될 학생들과 젊은층에 대한 마케팅을 하고 있고, 예전만큼 과격한 관람 문화도 사라졌기 때문에 과격한 마산아재들의 전설은 이제는 잊혀져 가는 하나의 밈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여전히 게이트에서 구장에 무단으로 들어오려는 아재라던지, 일부 취객이나 난동꾼들은 있지만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2023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 당시 마산아재들을 촬영한 엔튜브 영상 |
창원 NC 파크 팀스토어서 판매중인 '마사나이'(MASANAI) 브랜드와 NC의 콜라보 영상 |
2.5. 여전한 행동력
허나 마산아재들은 NC 다이노스가 2016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 KBO 트레이드 이면 계약 파문 등 창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많은 사건사고에 연루되면서 이를 비판하기 위해 특히 구단 프런트에 대한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고 있다.2016년 시위를 시작으로 2018년에는 팬들이 전준호 코치 2군행 논란을 비롯하여 구단의 불통과 회전문 인사 등 프런트 수뇌부의 만행에 대해 항의하고자 NC 다이노스 팬밴드, 나인하트, NC 다이노스 갤러리 등 팬 일동이 연합하여 시위를 개최했다.
2019년에는 창원 새 야구장 명칭 선정 논란이 거세지자 NC 다이노스 갤러리를 중심으로 NC 다이노스가 창단 당시 통합 창원시의 파격적인 지원 약속을 믿고 터를 잡은 이상 처음 협약대로 구단에게 명칭권을 줘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며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신구장 명칭회의 위원에 갤러가 참석하고, 명칭회의에서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오자 창원시내에 현수막을 게재하고, 2019 시즌 홈 개막전에서 피켓 퍼포먼스를 하는 등 실제 행동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2019 시즌 초부터 명칭 논란 및 구장 사용료 협상이 지지부진하고, 구 마산 지역 정치인들의 지역이기주의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창원시 측에 항의하기 위해 아재들은 창원 NC 파크에서 열렸던 올스타전 시구자로 초청된 허성무 시장에게 야유 퍼포먼스를 한다던지, 시장과 사용료 협상 관련 면담하기 위해 한여름 8월에 시청 앞에서 시위, 엔팍 앞에서 시위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며 아재들의 정열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 발생 원인
유럽권의 축구 훌리건들의 발생 원인과 아주 유사하다. 마산은 구한말 이후 역사가 꽤 오래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볼 것 없고 놀 거리가 없는 도시였다.[56] 결정적으로 마산수출자유지역[57]과 창원국가산업단지, 마산항 등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즐길 만한 오락거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롯데그룹이 자기팀 홈구장을 자유수출[58]과 한일합섬[59] 앞에 세웠으니 무학소주 청년들의 열정이 자연스레 야구장으로 몰려간 것이다. 프로야구 제 2연고지 경기 수. 기사 1998년 마산야구장 증축 이전으로 한정하면 한 해 평균 3.8경기 수준이다. 같이 언급된 청주의 경우 1985년의 충청도 연고 공백을 고려하면[60] 실질적으로는 해당 기간 동안 제2연고지로서 평균 11.4경기를 치렀다. |
특히 롯데 시절에는 제2 홈구장이라 경기 수도 적은데 롯데의 마산 홈 경기 성적은 이상하게 부진했다. 당시 마산 팬들은 "롯데가 마산에서 야구 하기 싫어 일부러 지는 거 아닌가"라는 푸념성 음모론을 내놓기도 했다. 즉, 안 그래도 경기가 적은데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열리는 홈 경기에서 응원팀은 맨날 죽을 쑤는 게 일상이었다.[61] 심지어 마산아재 중에서는 말만 마산이지 하동군에서 두 시간 동안 차를 끌고 오는 팬들도 있었다.[62] 이런 상황이 30년 가까이 이어져 왔으니 당연히 팬들의 야구에 대한 갈망과 전투력은 상승할 수 밖에 없었다.[63]
어떻게 보면 롯데 자이언츠와 NC 다이노스에 대한 경남권의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되겠다. 저 위의 전설 역시 너무 많이 몰려 너무 험하게 응원을 하면서 터졌으니. 한때 롯데가 KBO 리그 유일의 흑자구단인 건 마산아재들의 몫이 크다 봐도 무방할 터. 사실 팬이 팀에 대한 사랑을 잃으면 열혈이 넘치는 해프닝도 없다. 사실 마산아재들이 하도 유명해서 그렇지, 제2 구장으로 1년에 몇 경기 안 치르는 청주, 포항, 울산 등등도 비슷하게 과격하기 그지없는 응원 문화로 원정팬들은 물론 제1구장 홈팬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 이유야 당연히 1년에 몇 안 되는 안방에서 직접 홈 경기를 응원할 수 있는 기회고, 심지어 평일 경기라면 연차까지 써가며 경기장에 찾아오다 보니 더욱 간절하게 승리를 염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잡음들은 억수로 민폐였지만 말이다.
현재는 NC 다이노스 창단 이래로 응원 문화도 바뀌었고, 마산아재들의 성질을 돋굴 만한 요소가 많이 일어나지는 않다 보니, 옛날에 비해선 전투력도 많이 줄었다. 물론 마산 토호들이 일으킨 창원 새 야구장 명칭 선정 논란과 창원시장의 멍청이짓에 오랜만에 그 전투력을 뽐내긴 했지만 용접기나 화염병 같은 수단들은 등장하진 않았고, 피켓 운동이나 여러 시위 등으로 나오고 있다.[64]
4. 유사 사례
사실 1980년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러한 극성 팬들이 마산아재만 있던 것은 아니다. 마산아재의 위엄에 도전했던 경쟁자들로는 해태 버스 방화 사건, 호세 고간 저격 등으로 명성을 떨친 대구아재, 해태 버스 방화 사건의 시발점이 된 진동한 저격, 2002년 플레이오프 관중석 방화 사건 등의 화려한 전적을 지닌 광주아재, 하얀색 순면 빤스로 무장하고 쓰레기통을 태우며 그물망을 타시던 도원전사 등이 있다. 2010년대 들어 보살 소리 듣고 있지만 대전에서도 대전아재가 한국시리즈 1, 2차전 패배 후 구단 버스를 부수고, 경찰 4개 중대와 돌과 빈 병으로 맞짱 떠서 경기장 안으로 도망가게 한 적도 있다.#즉 1980년대 대도시 구장에는 이런 훌리건들이 지역을 막론하고 일정 수가 존재했다. 이유는 상술한 것처럼 노동자들이 즐기고 때로는 사회적 억압을 분출할 수 있는 창구가 없다가, 프로야구의 출범으로 그 창구가 마련된 것이다. 게다가 5공시절의 경우 시쳇말로 대포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 하다가 술김에 전두환 욕하면 지나가던 경찰이 잡아다가 유치장에 처넣던 엄혹한 시대였기에[65] 억압된 울분을 비뚤어진 방식으로나마 표출할 수 있는 곳은 야구장(+축구장)이 유일했다.
하지만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를 거치며 삼성 라이온즈의 김응용-선동열 감독 재임과 팀 컬러의 변화, 해태 타이거즈의 암흑기,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이전 등으로 인해 이들 지역은 대규모 팬덤 교체 과정을 겪고, 이후로는 팬 성향 자체가 변하면서 경쟁자들은 자연스럽게 쇠퇴하게 되었다. 즉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고 야구 인기가 다시 불붙기 시작한 2000년대 중후반까지 건재했던 열혈 강성 팬덤이 오직 마산아재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산아재들이 지금과 같은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2010년대 들어 삼성의 4연속 통합 우승을 기점으로 대구아재들의 전투력이 부활하긴 했으나, 이미 마산아재들이 열혈 강성 팬덤의 이미지를 대부분 선점한 상태라서 상대적으로 유명세는 덜한 편. 어쨌든 현재 마산아재의 실질적이자 유일한 맞수는 대구아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통합 창원시 출범 이후 네이밍 관련
한편, 2018년 말부터 2019년 초까지 창원 새 야구장 명칭 선정 논란이 벌어졌다. 구 마산 지역 토호들과 정치인들이 새 야구장 명칭으로 '마산'을 꼭 넣어야 한다며, 이들은 NC 다이노스와 지역 야구계는 마산아재로 대표되는 구 마산 팬의 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산'이라는 명칭을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문서만 봐도 알듯이 마산아재들은 오히려 3.15 의거, 부마민주항쟁으로 높인 마산의 이미지를 훼손했다면 했지, 결코 야구계에는 도움이 됐다고 볼 수가 없다. 당연히 이 주장은 마산아재들을 포함한 구 마산 지역 NC 팬들에게도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66] 결국 이들이 원하는 대로 시의회의 의결을 통해 '마산'이라는 명칭을 넣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이 전국적인 망신이 되면서 이들은 쓸데없이 욕만 먹고 지역 이미지만 더 나빠졌다.이에 분노한 NC 팬들은 이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것은 물론, '마산'을 '읍산', '그 지역' 등으로 부르면서 한동안 금지어 취급을 했다. 이를 넘어서 일제강점기 때의 잔재인[67] 마산이란 명칭을 이 참에 아예 지워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많은 구 마산 지역 팬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는 상황. NC 다이노스 구단도 2019년부터 마산이 아닌 창원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그 예들로 대표 응원가였던 '마산스트리트'를 한동안 쓰지 않다가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NC 다이노스가 우승한 직후 2021년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마산 아이돌이 아닌 창원 아이돌 박민우라든가, 창원 NC라는 응원구호 제정 등등 창원을 강조하는 마케팅은 이어지는 추세다.
6. 관련 문서
[1] 당시 경기는 LG가 2:1로 승리했다.[2] 이 날 이후 조명탑 주변에 철조망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실제 사진 속 인물의 코멘터리 영상.[3] 롯데 자이언츠에서만 선수생활을 했던 전 롯데 선수이자, 현재 부산고등학교 야구부 코치인 손용석의 부친이다.[4] 이상의 내용은 1995년 8월 10일 해태 타이거즈 vs 롯데 자이언츠 경기서 일어났던 것들이며, 이 날 롯데는 해태 투수 이강철에게 힘을 쓰지도 못하고 4대 0 완봉패를 당했다.[5] 옛 마산에서 운동부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왔다. 교방초등, 마산동중, 마산상고(현 용마고) 씨름부.[6] 마산상고 감독을 역임했다. 감독 당시 제자가 장원삼이다.[7] 본인 역시 마산상고 출신이다.[8] 지역사 연구가 박영주는 "창신학교에는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았죠. 마산 야구 탄생은 이분들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특히 안확 선생이 체육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야구는 팀 경기잖아요. 조선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일본을 이기기 위한 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의미입니다."라 풀이했다. 일제가 이러한 분위기를 경계할 수도 있었지만, 호주 선교사가 세운 학교라는 점이 야구 도입 초창기 일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울타리 역할을 했다.[9] 당시 OB의 마산 전지훈련 분위기를 <경향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봄의 고향 마산은 프로야구 열기 속에 새 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들떠있다. 가고파 시인 노산 이은상 씨를 낳은 문학의 고장이자 항도인 마산에 프로야구 OB베어스 팀이 스프링 캠프를 차리면서 시민 관심은 온통 프로야구에 쏠려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평화스런 남쪽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무학산 기슭의 마산고 교정은 시골 잔칫집처럼 부산하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곰들(베어스)을 조련시키는 훈련 광경은 실업팀에서 볼 수 없는 조직적이고 강도 짙은 것이어서 호기심 어린 구경꾼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10] 1982년 11월 12~14일 마산 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시범 경기에는 MBC 청룡, OB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가 참여했다.[11] 당시 마산야구장 수용 인원이 1만 5000명이었는데, 무려 3만여 명이 몰린 것이다.[12] 이 조명탑 중 1개는 2003년 태풍 매미 때 사상 초유의 강풍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13] 이 시기 마산과 진해 출신 유명 야구인들로는 롯데 자이언츠 정학수, 박용성, 유두열, 한문연, 삼미 슈퍼스타즈 감사용 등이 있다.[14] 참고로 저기 나오는 창원시장은 박완수 現 경남지사.[15] 애초에 용접기를 쓰러면 철문 근처에 고압의 전력을 공급할 곳이 있어야 하기때문에 불가능하다.[16] 사실 마산아재가 아니여도 과거에는 야구장에서 바닥에 몰래 불판을 깔고 삼겹살을 구워먹는 관중들은 다른 구장에도 많았다. 당장 서울특별시의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이라던가 롯데의 메인 홈구장인 사직구장 또한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삼겹살을 구워먹었다는 관중이 많았다. 주로 야구 열기가 맹렬한 경상도 지방의 구장이나 4050대 이상 중년 야구 팬 사이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물론 현재는 화재나 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고기는 창원NC파크나 문학구장에 존재하는 바비큐 존과 같은 지정된 공간에서만 구워먹든지, 보온 도시락에 포장해서 담아와서 먹든지 해야한다.[17] 소주 제품은 당연히 마산 연고 업체인 무학에서 만든 화이트다.[18] 2020년대인 현재는 알코올 함유량 6% 이상의 주류, 캔류 및 유리병은 야구장 내 반입을 금지한다. 600cc 정도의 종이컵으로 맥주를 채워야 들어갈 수 있다.[19] 2008년 5월 13일 삼성 VS 롯데 경기로, 이 날 롯데는 손민한을 선발로 내세워 승리를 거뒀다. 이 경기 이후 롯데는 2010년까지 마산에서 10연패를 기록하게 된다.[20] 사실 영상으로 자세히 보면 병이 로얄 살루트이긴 하나 술 색이 호박색이 아니라 투명한 걸 볼 수 있다. 로얄 살루트 병에 소주를 담아온 거라고. 즉, 진짜로 위스키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21] 그나마 저 짤방의 마산아재들은 점잖은 축에 속하며, 짤방에 나온 아재들은 은퇴한 고등학교 교사들이다.[22] 이날 경남대학교 공대가 야구장에 과잠 맞춰 입고 단체 관람을 왔다. 복장으로 봐서 이 대학 소속 학생으로 추정.[23] 권성욱은 KBS N 스포츠 입사 이전에 지역 민영방송이었던 부산방송에서 롯데 경기 편파중계를 맡았던 경력이 있다. 이때 부산은 물론 마산 홈경기도 중계를 했기 때문에 마산아재들의 루틴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볼 수 있다.[24] 참고로 이 쇼의 호스트이던 강호동이 옛 마산의 용마고등학교 씨름부 출신이라 '그 동네'라고 표현한 것이다. 듣는 사람이 강호동이었기 때문.[25] 그래도 김용희 감독은 롯데 감독 시절이던 1995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한 적 있다. 해당 내용이 있었던 시기는 1996년~1998년 정도로 추정된다.[26] 참고로 9회초 무사 만루에서 밀어내기 볼넷으로 동점을 만든 타자가 훗날 롯데 감독이 되는 조원우이다.[27] 당시 KBO 최다 기록, 당시 일본프로야구 다카하시 요시히코(히로시마 토요 카프)가 1979년에 세운 33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깨는 것에 관심이 모아져 있었다. 훗날 연속 안타 기록은 박종호에 의해 깨진다.[28] 두산이 한국중공업을 인수하면서 창원에 거점을 두게 되었는데,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 공장이 창원시에 있어서 접점이 많다. 실제로 IMF 시절에는 예산 절약을 위해 두산 베어스의 전지훈련도 따뜻한 외국이 아닌 창원 두산중공업 내 야구장에서 했을 정도.[29] 박정태는 1루에 슬라이딩을 했으나 정말 아슬아슬 하게 아웃되었다.[30] 후배 이경필은 홍원기를 완전 FM 스타일에 매 순간 엄청나게 노력하던 선배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래서 늘 하던 대로 경기에 임했고 호수비를 보여준 것 뿐인데 하필 상황이 상황이었으니..[31]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혜천은 15년 뒤 창원을 연고로 하는 팀에 입단하여 은퇴식까지 치르며 마산아재들의 응원을 받게 된다.[32] 실제로는 1991년으로 보인다.[33] 현재의 창원 NC 파크 항목에 나와있듯 당시는 야구장이 아니라 축구장이었다.[34] 지금이야 잊혀진 경기가 되었지만 당시 대통령배는 아시아에서 그나마 규모가 좀 되는 국제경기였다. 지금으로 치면 아시안게임이나 FIFA 공인 A매치 토너먼트가 벌어지는 경기장 바로 옆에서 독재정권이 최루탄을 쏴재끼는 초대형 나라 망신을 전국에 생중계한 것. 이 때문에 TV를 보던 마산시민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35] 당시 마산 시민들 대부분이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을 지지하다 보니 전두환과 민주정의당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이 주관하는 축구 대회의 표가 팔릴 리 없었고, 결국 대다수 관중들은 강제로 동원된 유료관중이었다.[36] 오죽하면 부산 시민들은 전포동을 두고 전두환도 포기한 동네의 약자라는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 전포동의 바로 남쪽에 남구 문현동이 있는데, 문현동의 문현교차로는 단골 反5공 시위 장소였다.[37] 그것도 그냥 겪은 게 아니라, 3.15 부정선거 당일 바로 3.15 의거를 일으켜 4.19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38] 특히 해안 지역의 경우 동서양을 막론하고 '뱃문화'라는 특유의 문화로 엮이거나 유대감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39] 사실 이 전통은 한동안 부울경 지역에 그대로 내려왔다. 시위가 한참 극심했던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시위대와 진압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야구 으찌 됐는교?" "짔다는데예." 같은 대화가 시위대 앞줄 아재와 전경부대 중대장 간에 오고 갔다고 전해진다. 과격 시위의 맥이 끊긴 현재는 과거의 이야기.[40] 당시 두 명의 시위 인원이 반쯤 불탄 전두환 사진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는데, 6월 항쟁 이후 지역 언론에서 이 인원의 정체를 찾아다녔지만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41] 2013년부터 마산 야구장의 외야 나무데크석에서 삼겹살 불판을 가져와서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었고, 2019년부터 창원 NC 파크 포크밸리 바베큐석이 정식으로 도입되었다.[42] "단디해라"는 "똑바로 해라", "제대로 해라"를 의미하는 경상도 방언이다.[43] 훌리건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대체로 경기장 폭력 사태는 사회적으로 억눌린 하층 계층이 특정 팀에 과도하게 감정이입해서 자신들의 불만을 터트리는 것인 경우가 많다.[44] 당장 유명한 로얄 살루트 짤방에서도 경기가 우천 지연 중이다.[45] 어지간히 야구를 좋아해도 직장인이 주말이면 모를까 평일에 3일 연속 야구 보러 가기는 쉽지 않다. 옛 마산과 비슷한 사정인 청주에서도 경기 날이 되면 아예 휴가 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하물며 2000년대까지도 대한민국은 연차 같은 개념에 아주 박했던 데다가, 1990년대 들어서서는 마산 주민들의 직장도 점점 기존의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훨씬 먼 창원공단으로 옮겨갔으니 퇴근 하고 야구 보면 된다는 말도 그렇게 쉽게 할 소리가 못 되었다. 수출자유지역에서는 아무리 멀어도 야구장까지 10분 안팎으로 접근이 가능한 반면 창원공단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퇴근시간에 30분 내로 야구장 가기 힘들다.[46] 예시로 든 NFL은 매주 일요일마다 경기를 진행하고 홈-원정이 반복되므로 2주에 한 번씩 총 16주 동안 8번의 홈 경기를 볼 수 있다.[47] 2014 시즌까지는 홈에서 64경기, 2015 시즌부터는 72경기.[48] 마산회원구, 마산합포구에 남아 있거나, 통합창원시 출범 이후 의창구, 성산구, 진해구에 있는 롯데 팬들도 1년에 8경기를 마산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2019년 창원 NC 파크 개장 이후로는 사직구장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에서 야구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49] 설령 신구장이 진해로 들어가게 되더라도, 마산 야구팬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쨌든 사직까지 원정을 가거나 1년에 6경기 그것도 3연전 2번이라 사실상 2경기를 목 빠져라 기다리던 예전에 비하면야 훨씬 나은 여건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마산아재들이 신구장 문제에 대해서 "기왕이면 진해 말고 딴 데가 더 좋긴 한데, 진해 가더라도 옛날 1년에 꼴랑 6경기하던 그 시절보단 나으니까 별 상관은 없다" 생각하고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해서 딱히 이상할 일도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진해가 아닌 마산 야구장 바로 옆의 마산종합운동장을 새로 고쳐 새로운 야구장이 되었다.[50] 사인회에 참가한 선수는 왼쪽부터 강진성, 이민호, 나성범, 노성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023년 이민호가 NC에서 방출되며 이제 이 사진에 나온 선수 중 NC 소속은 단 한 명도 없게 되었다.[51] 나성범과 강진성은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의 주역 중 하나였으나 각각 FA와 보상선수로 2021년 NC를 떠났고, 노성호는 2019 시즌 이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여 이름까지 노건우로 개명하는 등 노력했으나 결국 2023 시즌 이후 방출되었다.[52] 이 홈경기 무료 개장은 NC 다이노스만 해당되었다.[53] 다만 이건 굳이 마산아재가 아니었어도 팬들 입장에서 충분히 분노할 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산이 아닌 다른 지역이었어도 이 정도의 충돌은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현장판매분 300표는 전체 표의 2%밖에 안 되는 너무 미미한 숫자였다. 실제로 방송에서 한 어르신은 "역사적인 개막전이라서 정말 감회에 젖어 경기를 보러 왔는데 너무 순식간에 매진되어 분노를 금할 수 없으며, 인터넷으로 대부분의 표가 팔렸다는데 그러면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거나 서툰 많은 중노년층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 너무 배려가 없는 게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54]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던 시절의 한국시리즈는 무조건 롯데의 홈인 부산에서만 경기가 열렸다. 마산에서 한국시리즈 경기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55] 마지막 홈경기 행사.[56] 지역 내에서 조각가 문신, 고향의 봄을 지은 아동문학가 이원수, 가고파를 지은 시조시인 이은상 등 문화예술계 인물들을 배출한 것을 감안하면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도시는 아니다.[57] 당시 명칭, 현재는 마산자유무역지역.[58] 잘못 쓴 게 아니다. 마산수출자유지역을 마산아재들은 꼭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다반사다.[59] 그런데 한일합섬은 대부분 여공인 마산아지매들이었다. 물론 이 아지매들 또한 한일여상(현 한일여고의 전신인 한일합섬 부속 여자상업고등학교였다) 다니던 시절부터 고교야구 광팬이던 분들이다. 마산에 가면 아직도 50~60대 할머니들이 그 시절 추억의 야구 선수 스탯을 줄줄이 읊으며, WBC를 보던 식당 할매가 과일 깎다 말고 전문가 수준의 해설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60] 당시 OB는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했고, 빙그레는 아직 리그 참가 전이었다.[61] 실제로 롯데가 마산 야구장을 제2 홈구장으로 썼을 때인 1982년부터 2010년까지의 전체 승률은 0.490인데, 이 기간 동안 마산에서의 승률은 0.429로 낮다. 심지어 제리 로이스터 감독 재임기에는 마산에서 10연패를 거두기도 했다.[62] 2020년 현재도 창원시에서 하동군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잡아야 하는데, 남해고속도로가 선형도 불량했고(특히 금오산에서 진교 넘어가는 고갯길과 함안에서 마산 넘어가는 산인고개가 양대산맥) 확장도 안 된 당시에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심지어 하동읍내에서 물리적 거리로는 광주가 더 가깝다.[63] 물론 마산에서 야구 하기 싫어서 일부러 개판치는 건 아니고, 말이 제2홈이지 실제 경기 여건은 홈팀 라커룸을 쓸 수 있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호텔 숙박부터 시작해 사실상 원정경기과 다를 게 없으니 그만큼 홈팬들이 기대하는 퍼포먼스가 전혀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64] 당연한 게 이전에는 단순히 야구 경기 내적 문제였지만, 이 건은 정치적 문제가 얽혀있으니 이전처럼 폭력적으로 여론 조성을 해봤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행동은 나서도 좀 더 온건하면서도 효율적인 수단을 취한 것이다.[65] 이 장면이 웅진출판에서 발간된 '세계의 역사' 제18권(대한민국)에 한 컷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림작가는 이희재 화백.[66] 젊은 층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재들한테도 호응을 얻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아재들은 산업화로 흥했던 마산시가 1990년대 이후 몰락하는 과정을 다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미 마산의 경제와 생활 문화는 구 창원시에 크게 의존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통합으로 '마산시'는 사라졌다. 고작 야구장 이름 가지고 마산이란 명칭이 부활하고 다시 흥할 가능성이 없다는 걸 마산아재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67] 엄밀히 말하면 마산이란 지명 자체는 고려 시대부터 유래했고, 정식으로 도시명으로 격상된 건 구한말이다. 근데 구한말 개항장이란 환경 자체가 이미 일제의 입김이 있던 시대라 이런 인식이 생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