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30 19:56:59

카타오카 야스유키

카타오카 야스유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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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8세이부.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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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시리즈
우승반지
2008


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반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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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퍼시픽 리그 최다 안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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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10년 퍼시픽 리그 최다 도루왕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8 퍼시픽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7번}}}
마쓰이 가즈오
(1997~2003)
카타오카 야스유키
(2005~2013)
와키야 료타
(2014~2015)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8번}}}
타니 요시토모
(2007~2013)
카타오카 야스유키
(2014~2017)
마루 요시히로
(2019~)
}}} ||
파일:세이부카타오카.jpg
카타오카 야스유키
片岡治大 | Yasuyuki Kataoka
생년월일 1983년 2월 17일 ([age(1983-02-17)]세)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출신지 치바현 치바시 하나미가와구
신체 176cm, 82kg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3년 드래프트 3라운드
가족 벳키 (2019~ 현재)
장녀(2020년생)
차녀(2021년생)
소속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05~2013)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4~2017)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내야수비겸 주루코치 (2018~2020)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야수 종합코치(2021)
응원가
1. 개요2. 프로 입단전3. 프로 입단 후
3.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3.1.1. 2005년3.1.2. 2006년3.1.3. 2007년3.1.4. 2008년3.1.5. 2009년3.1.6. 2010년3.1.7. 2011년3.1.8. 2012년3.1.9. 2013년
3.2. FA3.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3.3.1. 2014년3.3.2. 2015년3.3.3. 2016년3.3.4. 2017년
4. 여담

1. 개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의 야구 선수.

2. 프로 입단전

초등학교 시절 4번 타자 겸 투수로 활약했다. 중학교 시절엔 수석 리그 소속으로 2년동안 주전으로 활약했다. 3학년 때는 1번타자 3루수로서 주장으로 팀을 전국 대회까지 이끌었지만, 부상에 시달리던 시기가 길었다. 중학교 졸업 후, 토치기현 우츠노미야 학원 고등학교[현재]에 진학. 2명의 형제는 각 학교에서 뽑아낸 활약상으로 유명하며, 카타오카의 입학 후 카타오카 삼형제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때는 3번 타자이자 유격수로서 끝내기 안타로 하계 고시엔에 출전하지만, 카타오카가 허리 통증으로 결장한 팀은 고시엔 2라운드에서 탈락한다.

2001년 도쿄가스에 입사하여 사회인야구팀 도쿄가스 경식 야구부에 들어갔다. 부상이 많았기 때문에 등록명을 "片岡易之"로 등록했다. 입사 동기로 우츠미 테츠야가 있다.

제 75회 도시대항 야구대회 에는 백업 선수로 출전했다.

2004년 가을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의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 이시게 히로미치, 댈린 잭슨, 마쓰이 가즈오가 사용하던 등번호 7을 받았다.

3. 프로 입단 후

3.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3.1.1. 2005년

데뷔 첫해인 2005년 5월 1일에 9번·2루수로 첫 선발에 출장했다.1군에 정착해 2루수 또는 유격수로서 81 시합에 출장을 했다. 타율.263, 4홈런, 6도루의 결과를 남겼다.오프에는 도루수 증가를 위해 여러가지 트레이닝을 시도했고, 도루 성공에는 치명적인 발의 느림을 기술로 보충하려고 육상경기를 트레이닝에 도입한 결과, 도루 증가로 연결이 되었다.

3.1.2. 2006년

2006년 5월말에 다카기 히로유키로부터 2루수 주전을 빼앗자 타율.292를 기록해 2번·2루수 자리를 확보. 나카지마 히로유키의 부상으로 8월부터 9월초 까지 일시적으로 유격수로 돌았다. 8월 2일과 3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선 경기당 3도루를 2경기 연속 넣는 등 후쿠치 도루와의 콤비에서 2명 합쳐 53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리그 2위 33개의 희생타를 기록했다.

3.1.3. 2007년

2007년은 2번·2루수로 첫 개막전 선발 2루수를 잡았지만, 4월 18일의 니혼햄전에서 우익수 G.G.사토와 부딪쳐 오른쪽 무릎과 흉부를 타박상을 당하였다.다음 날 경기에선 부상을 당해 대타 출장해 안타를 쳤지만 상태가 나빠 등록이 말소됐다.5월 30일에 복귀했지만, 당분간은 부상의 영향으로 2할대 전반의 저타율에 허덕였다. 8월에 월간타율.353(13도루)을 기록하며 타율을 급상승시켰지만 결국 타율 0.256에 그쳤다.도루 38개를 기록하며 자신의 생애 첫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수비에서도 실책이 전년의 13개에서 5개로 감소해, 규정 시합수에 출장한 2루수로서 리그 톱의 수비율.993을 기록했다. 희생타도 전년보다 늘려, 리그 2위의 35개를 기록했다.

3.1.4. 2008년

2008년은 개막부터 1번 타자를 맡게 된다. 이해에 2번타자 쿠리야마 타쿠미와 함께 167안타로 최다안타 타이틀을 획득해 리그 톱의 득점권 타율 .382로 강한 기세도 발휘. 도루는 전반전에서만 전년의 도루수를 넘기자 최종적으로 50도루를 기록해 2위 와타나베 나오토를 16개 제치고 2년 연속 도루왕에 올랐다[2] 또 선수 간 투표에서 올스타 경기에 첫 출전해 자신의 첫 번째 베스트 나인으로도 뽑혔다.2014년 이적하게 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7경기 모두 안타를 치며 5도루를 기록했다.제7차전에서는 1점을 쫓는 8회에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하면, 도루와 보내기 번트로 3루에 진출해, 계속 되는 나카지마의 타석에서 도박 스타트의 사인에 응해 3루 땅볼 사이에 동점의 홈을 빠뜨려, 역전 일본 제일의 발판을 만드는 활약을 보였다.아시아시리즈 첫 경기인 SK 와이번스전은 감기 때문에 결장했지만 결승까지 3경기에 1번 유격수로 출전해 시리즈 제패에 기여했다.

3.1.5. 2009년

개막 전인 3월에 개최된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다.일본대표 감독 하라 다쓰노리(原辰徳)는 '리드오프로 대표에 뽑았다'고 말하며 카타오카를 'JOKER'라고 비유했다. 또 이치로도 '패미스터 피노' 같다고 평했고 1차 후보 선수 중에서는 나카지마 히로유키, 키시 타카유키와 대등한 키맨으로 꼽았다. 1라운드에는 출전은 없었지만, 제2 라운드 초전의 쿠바전부터 주로 선발이 좌투수여서 선발 출장.한국과의 결승전에서는 동점인 7회초 선두타자로 좌익수 앞 안타로 출루한 뒤 이어진 이치로의 타석에서는 볼 2구째 도루에 성공. 이치로의 번트 안타, 나카지마 히로유키의 좌익수 앞 안타로 이어지며 가타오카가 귀중한 역전 홈을 밟았다.대회에서 타율.308, 도루는 공동 1위인 4도루를 올렸고 낯선 3루수 수비도 견고하게 소화해 일본의 2개 대회 연속 두 번째 우승에 기여했다.
시즌에는 전년과 같이 1번·2루수로 기용됐으나 타격 부진에 빠졌고, 4타수 이상 무안타 경기는 29회로 리그 최다를 기록[요출처].출루율도 바닥을 쳤다.전반전에 타율.282로 돌아섰지만 결국 타율.260으로 회복되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반면 13홈런 58타점은 개인 최고로 장타율이 올라갔고 2루수 부문에서 퍼시픽리그 1위의 수비율을 기록했지만 간혹 완만한 플레이로 위기를 자초하기도 했다. 도루수로는 9월까지 혼다 유이치, 가와사키 무네노리에게 리드를 허용하고 있었지만, 9월 20일부터 6경기 10도루를 기록해, 자기 최다인 51도루를 기록, 3년 연속이 되는 도루왕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3.1.6. 2010년

개막 당초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올스타 게임에 2년만에 선출되어 2차전에서는 5타수 4안타로 MVP를 획득해, 8월 24일의 롯데전에서 퍼시픽 · 리그에서는 후쿠모토 유타카 이래가 되는 3년 연속 50도루를 달성했다. 개인 최고 타율.295, 출루율.347, 59도루로 팀을 이끌며 4년 연속 도루왕에 올랐다(혼다 유이치 동시 수상).한편 5월 아킬레스건, 6월 왼쪽 어깨와 잇따라 부상했고 9월 20일 소프트뱅크전에서는 주루 중 오른발 종아리를 다쳐 시즌 잔여점과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결장했다.

3.1.7. 2011년

스프링캠프에서 오른발 통증때문에 출발이 늦어, 4월 중순에 20 타석 연속 무안타로 타격 부진에 빠졌다. 1번타자 2루수로서 개막부터 53경기 연속 풀 이닝 출장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6월 28일의 오릭스전의 수비하는 도중에 왼쪽 어깨를 다침과 동시에 뇌진탕을 일으켜 중간에 교대했다. 7월 5일의 소프트뱅크전에서 1루에 귀루할 때 오른쪽 어깨를 탈구해, 1군 등록 말소되었다. 9월 3일에 1군에 복귀하였는데 「9번·2루」로서 출장을 계속하지만, 6월에 다친 왼쪽 어깨의 영향으로 10월 5일에 본인의 신청으로 등록 말소.같은 달 13일에 왼쪽 어깨 탈구 회복을 위한 수술을 받았다. 잦은 부상의 영향도 있어, 86 시합 출장에서는 타율.230, 22도루에 머무르며 5년 연속 도루왕을 놓쳤다.

3.1.8. 2012년

전년의 수술의 영향으로 개막을 2군에서 맞이했다. 5월 1일에 1군 복귀, 같은 달 10일에는 복귀 후 첫홈런을 친다.그러나, 7월 10일의 소프트뱅크전의 수비시에 오른 손목을 다쳐 도중 교대.그 후도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9월 16일에 오른손 삼각인대 복합체 손상 수복 수술을 받아 시즌 나머지를 날렸다.2년 연속 부상에 시달려 52경기에 출장하여 본인 프로데뷔이후로 커리어로우를 맛보았다.

3.1.9. 2013년

부상으로부터의 부활을 기약함과 동시에 베테랑으로서 팀을 견인해, 개막 선발전 1번 2루수로 출장하였다. 4월 하순에 왼쪽 무릎 뒤쪽을 다쳐도 출전을 계속해 6월 7일에 국내 FA권을 취득했지만 부상의 악화를 이유로 같은 달 14일에 등록 말소되어, 3개월간 재활을 떠났다.9월 25일의 라쿠텐전에서 끝내기 2점 홈런을 쳐, 9월도의 스커퍼! 끝내기상을 수상.

3.2. FA

2013년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해, 2013년 12월 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였다.
12월 9일에 입단 기자 회견에서 계약은 2년에 총액 3억5000만엔, 등번호는 8로 결정했다[3] 보상선수로는 와키야 료타가 지명됐다.[4]

3.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3.3.1. 2014년

개막전에서 이적 후 첫안타를 노미 아쓰시로부터 홈런으로 장식하였다. 개막 직후 3할을 치던 시절도 있었지만 서서히 부진에 빠져들었다. 8월에는 타격 부진으로 2군행도 맛보았다.최종적으로 126경기에 출전한 지 4년만에 규정타석에 들어섰고 팀 내 리드오프로서 24도루를 기록했지만 타율 0.252로 기대했던 성적을 남기지 못했다. 요미우리 2루수가 규정타석에 도달한 것은 2005년 니시 토시히사 이후 9년만이다.

3.3.2. 2015년

개막선발에 빠져 있었지만, 4월 16일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에서 통산 300도루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해에도 부상과 부진으로 2군 빠짐을 겪으며 113경기 만에 타율 0.244에 그쳤지만 5년 만에 10홈런을 기록했고 타점도 근소하게 전년보다 앞섰다.하지만 규정타석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3.3.3. 2016년

같은 2루수 루이스 크루즈의 입단으로 선발에 제외되는 일이 증가했다.또 부상에 시달리다 6월에는 하반신 부상으로 2군으로 갔다. 9월 3일 1군에 복귀했지만 9월 10일 히로시마전에 대타로 출장해 파울을 쳤을 때 왼쪽 손목을 다쳐 다음날 유구골 골절로 진단돼 다시 일군 등록이 말소됐고 이후 시즌 출장은 없었으며 32경기 출전으로 4타점, 4도루는 모두 프로진입 11년 만에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3.3.4. 2017년

2017년은 오른쪽 무릎의 부상으로 1군 출장은 없고, 9월 30일에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가 발표되었다.다음 날인 10월 1일 은퇴회견을 열어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자각이 있었기에 이런 결단에 이르렀다.아직은 억울함이 더 큽니다.희망을 가지고 재활훈련을 거듭해 왔지만, 좀처럼 생각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몇번이나 마음을 접었기 때문에, 이 타이밍에 물러나는 것이 좋은가 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10월 4일 임의 은퇴 공시되었다.그해 11월 22일 자이언츠 팬 페스타에서 은퇴 세리머니가 열리며 아직 뛰고 싶었다.아직 달리고 싶었지만 몸은 한계였습니다」라고 인사했다.

4. 여담

  • 아내는 연예인 벳키. 현역 시절도 아니고 뜬금없이 은퇴 다 하고 나서 2019년 결혼을 발표했는데,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현역 시절부터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5] 깔끔한 훈남형 얼굴과 운동선수답게 잘 빠진 몸매와 인싸스러운 성격으로 여자를 잘 후리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아나운서들과 자주 사귀었는데, 여러 번 바람을 피워서 결별과 새 여자를 만나기를 반복한 것으로 유명했다. 정작 벳키는 젊어서는 아름다웠다지만 나이가 30대 중반으로 다 늙은 데다 불륜 스캔들로 연예계에서 거의 내쫓기다시피 한지라 현역 시절의 플레이보이로 유명한 카타오카였다면 만나지 않았을, 소위 말하는 급이 떨어지는 여자이기 때문. 그래서 연예계에서 끈 떨어진 벳키가 소위 말하는 취집을 했다느니 여튼 이런저런 뒷말을 낳은 결혼이었지만 어쨌든 아이도 둘 낳고 이래저래 생각보다 잘 살고 있다.
  • 세이부 시절 팀 동료 나카무라 타케야와 동갑내기로 나카무라가 홈런을 날리고 들어오면 여러가지 재밌는 세레머니를 연출했다.


[현재] 문성 예술 대학 부속 고등학교[2] 참고로 퍼시픽리그 50도루 이상은 1997년 마쓰이 가즈오와 코사카 마코토가 유일하다.[3] 이 이후 등번호는 마루 요시히로가 가져갔다.[4] 그리고 2년뒤 와키야는 FA를 통해 다시 요미우리로 복귀하였다.[5] 프로필 신장이 176인데 보통 운동선수들 착화신장 기준에 운동선수들 키 사기치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170대 초반이라는 것이 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