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시대 | ||||||
{{{#!wiki style="" | }}} | ||||||
{{{#!wiki style="" | |||||||
}}} | |||||||
{{{#!wiki style="" | }}} | ||||||
가마쿠라 시대 | {{{#!wiki style="" | }}} | |||||
무로마치 시대 | {{{#!wiki style="" | ||||||
}}} | |||||||
{{{#!wiki style="" | }}} | ||||||
}}}}}}}}} |
1. 개요
관령(管領)은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다음가는 고위 역직이다. 초기에는 '집사'로 불렸다가 바뀌었으며, 쇼군을 보좌하여 막부의 정치를 통솔하는 위치였다. 즉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 총관, 청지기, 궁재와도 같은 사조직이면서 막부의 재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막부 쇼군 아시카가 가문의 분파인 호소카와, 시바, 하타케야마 가문이 번갈아서 취임했기에 3관령(3관)으로 불렸다. 여기에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장관인 도닌(頭人)에 임명되었던 아카마쓰, 잇시키, 교고쿠, 야마나 네 가문과 결합해 삼관사직(三管四職)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관동관령은 막부가 있는 교토에서 거리가 먼 간토 지방을 원활하게 지배하기 위해 쇼군이 임명한 역직이다.2. 역사
무로마치 시대의 삼관사직 체제는 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깨져 사실상 호소카와 가문이 관령직을 독점했고, 정이대장군을 허수아비로 두며 실권을 행사했다. 나중에는 이 자리를 두고 호소카와 가문 내에서 싸움까지 발생했다. 관령이였던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암살 이후 양자들이 서로 계승권을 주장한 것이 그것으로, 이는 아시카가 요시타네, 아시카가 요시즈미 쇼군의 싸움과 맞물렸다.결국 이 1차전에서 서국의 강자 오우치 요시오키와 손잡은 호소카와 타카쿠니가 승리했으나, 패배해서 최후를 맞은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하루모토가 세력을 키워 역습을 가해 타카쿠니를 몰아내고 관령이 되었다.[1]
그 뒤 하루모토도 가신 미요시 나가요시에 의하여 밀려나게 되었고, 그 뒤의 관령들은 미요시의 꼭두각시가 되었으며 미요시 가문이 쇠퇴하자 미요시 가문의 가신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상락으로 관령직 및 막부는 무력화되었고 이어서 무로마치 막부는 멸망했다.
관령이라는 호칭은 가마쿠라 시대에도 사용되었다. 집권을 관령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며, 집권직을 독점한 호조씨의 직속가신들인 어내인(御内人)들의 수장은 내관령(内管領)이라는 직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