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0 14:56:14

마츠나가 히사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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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직전의 히사히데가 다기 히라구모를 집어 던져 깨부수는 그림.
유명한 우키요에 화가인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작품.

松永久秀(まつなが ひさひで)
1510년? ~ 1577년 11월 19일, 음력 10월 10일

미요시 가문의 쌍두마차이자 미요시 나가요시의 왼팔.
1. 소개2. 생애
2.1. 미요시 가신 시대2.2. 요시아키 시대, 오다 가신 시대와 최후
3. 후세의 평가
3.1. 재평가 이전3.2. 재평가 이후
3.2.1. 미요시 일문 살해3.2.2. 쇼군 살해와 방화
4. 일화5. 기타6. 대중문화 속에서

1. 소개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통칭 마츠나가 단죠(松永弾正). 동생으로 마츠나가 나가요리, 아들로 마츠나가 히사미치(松永久通)가 있으며, 조카는 나이토 조안이다.

센고쿠 시대 최고의 악당으로 유명한 다이묘. 주가를 찬탈하고 쇼군을 죽이고 대불을 불사르는 등 수많은 입에 담지 못할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아주아주 유명하며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한 후에도 그 반골의 정신을 억누르지 못해 여러번 반항하다 항복권유도 씹은 채로 폭사한 것으로 매우매우 유명하다. 축약해 말하면 난세의 간웅이요, 악당이요, 난봉꾼에, 최악의 인물이라고 널리널리 알려진 무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들은 전부 거짓으로 판명났다. 오히려 히사히데의 행보를 돌이켜 보면 미요시 나가요시충신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나가요시 생전 미요시 가문을 위해 분골쇄신 하였으며 쇼군들과도 친분을 쌓아 그들에게 원조에 가까운 행동을 보여주는 등 충실한 막신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기독교에도 어느정도 관심을 보이는 등 학구열도 풍부하였고 다도에 능해 유명한 다인, 호상들과 다도회를 열어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가요시를 위한 렌가와 센쿠의 준비를 도맡는 등 문화적 지식도 풍부한 인물이었다. 나가요시에 의해 야마토의 군단장을 맡았고 텐슈와 타몬 야구라(多聞櫓)의 모티브가 되는 망루를 고안하는 등 군사적 능력도 탁월한, 말그대로 당대의 인재였다.

이처럼 지금까지 알려진 악당, 모략가의 이미지와 다르게 실제 인물은 주가를 위해 일하였고 상당한 교양을 갖추었던 문화인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생애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조차도 불명이다.[1] 젊은 시절의 종적 또한 묘연한데 일설에는 사이토 도산과 동향 사이였다고도 한다.

2.1. 미요시 가신 시대

2.1.1. 나가요시 시절

나가요시에게 사관하기 까지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있지 않는데 1540년 경부터 서장이나 발급문서에 본인의 이름이나 본인의 사인(花押)이 표시되어 있는 식으로 히사히데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것은 1542년 부터인데 당시 키자와 마사나가(木沢長政)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야마토로 파견되었다. 미요시 가문과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인척이나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지만 히사히데는 나가요시의 눈에 들게되었고 이후 미요시가를 지탱하며 미요시 나가야스와 함께 미요시 가문 내의 정책에 관한 일을 담당하게 된다.

이윽고 히사히데는 군사권을 받아 셋츠의 전선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즈미에 전선을 두고 있던 소고 카즈마사와 함께 남북으로 카와치를 방어하게 되었다.

나가요시가 자신이 퇴출시켰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복귀시키자 나가요시의 적자 미요시 요시오키와 함께 쇼군가와의 외교사절 역할을 담당했으며 나가요시의 명을 받아 야마토의 공략에 나섰고 동생 나가요리 처럼 한명의 군단장이 되어 야마토 공략에 앞장서 야마토의 호족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미요시 정권의 주축이던 카즈마사와 미요시 짓큐, 요시오키가 차례차례 사망하였고 이윽고 나가요시 자신도 아타기 후유야스를 죽이고 얼마안가 사망함으로써 미요시 가문의 영토확장은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당주는 나가요시의 양자 미요시 요시츠구가 잇게되었고 히사히데도 이에 따르면서 야마토 공략을 계속해나갔다.

2.1.2. 요시츠구 시절

요시츠구가 당주가 된지 얼마지나지도 않아 요시츠구는 미요시 산닌슈 중 한명인 미요시 나가야스, 그리고 히사히데의 아들 마츠나가 히사미치와 함께 병사를 이끌고 상락하여 막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살해했다.(에이로쿠의 변)

히사히데는 처음에는 이들과 협력했지만, 위의 일들로 미요시 산닌슈와 결별하게 되었고 미요시 가문은 본격적인 내전에 빠지게되었다. 야마토 공략이 아직 끝나지 않은 히사히데는 야마토를 그대로 자신의 거점으로 삼아 키나이의 여러 호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산닌슈와 싸워나갔다. 하지만 본국 아와에 있는 시노하라 나가후사의 지원을 받는 산닌슈의 세력에 번번히 패배하여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되었다.

이와중에 요시츠구는 산닌슈&나가후사와 정치적 갈등을 겪고 이들에 반발하여 미요시 가문에서 이탈하게 된다. 히사히데는 곧바로 요시츠구와 협력하여 도다이지에서 미요시 군을 몰아붙이는등 역공을 펼치지만 전황은 바뀔기색이 없었다.

그럼에도 히사히데는 항전을 계속해 나갔고 마침내 미노를 평정한 친 아시카가 요시아키 세력의 필두격이된 오다 노부나가가 드디어 키나이로 도착하게 되었다. 이윽고 분열된 키나이 미요시 가문은 아시카가&오다 세력에 멸망하였고 히사히데는 야마토 일부를 영지로 할양받게 되었다.

2.2. 요시아키 시대, 오다 가신 시대와 최후

요시아키 세력으로서 이후로도 미요시 산닌슈와 전쟁을 계속해나가던 히사히데였으나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게 반발하자 자신의 주군이었던 요시츠구와 함께 노부나가 포위망에 뛰어들어 카와치, 야마토에서 군사를 일으켜 오다의 군세를 토벌해 나갔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되며 열세에 몰리자 히사히데는 개성하여 항복했으며 반 노부나가 연합이 압도적인 우세로 보였던 이 전쟁은 결국 노부나가가 승리를 거머쥐는 형태로 끝이 났다.[2]

시기산 성으로 본거를 옮겨 영지를 보존한 히사히데였지만 츠츠이 쥰케이같은 다른 야마토의 호족들과 마찰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2차 노부나가 포위망이 발생하자 시기산 성에서 궐기하였다. 이에 노부나가는 자신의 장남인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하여 아케치 미츠히데같은 중신 여러명을 파견하여 마츠나가 부자를 쓰러뜨릴 것을 명하였다.

결국 히사히데 부자는 오다 가문의 공격을 막을 수 없게되어 시기산 성을 자신의 손으로 불태워버리고 히사미치와 함께 자결하면서 마츠나가 가문은 멸망, 이들의 수급은 노부타다가 취해 아즈치 성으로 보내졌다.

3. 후세의 평가

3.1. 재평가 이전

센고쿠 시대의 효웅으로, 음모와 암투에 매우 능한 인물이었다고 알려졌으며, 전국 3효웅 중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하였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간단히 말해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소개할 때의 소갯말이 있다.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보통 사람이라면 한 가지도 못할 일을 세 가지나 해 낸 자일세.'
첫 번째가 주군(미요시 나가요시)을 배반한 것이요, 두 번째가 막부의 쇼군(아시카가 요시테루)을 죽인 것이며, 세 번째가 나라의 대불전(도다이지 다이부츠덴)을 불태운 것.

이 처럼 배신과 음모로 살아왔다고 알려진 탓에 효웅이자 악당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일본 웹에서는 '기리완(의리 one)'이라는 별명이 있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 '의리' 스탯이 1로 책정되어 있기 때문.[3][4]

이 처럼 자기 손으로 미요시 가문을 좌지우지하고 쇼군을 직접 살해하고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무장으로 유명하였으나 21세기 들어 무로마치 막부와 미요시 정권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대중을 대상으로한 책이 발행되자 히사히데도 재평가를 받게되었다.

3.2. 재평가 이후

그는 효웅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주가를 찬탈하고 가신의 손에 휘둘리다 죽은 어리석은 다이묘로 알려져 있던 미요시 나가요시"오다 노부나가의 선구자", "아와의 천하인"으로 재평가되었고, 이에 따라 히사히데의 이미지도 바뀌었다.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알려진 이미지는 "미요시 가문을 뒤에서 농락하던 효웅", "쇼군을 살해한 극악무도한 인물" 등이었으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그는 계속해서 주군을 갈아치운 배신자도 아니었고, 살해를 일삼는 불의의 악당도 아니었으며, 대불전에 불을 놓는 만행 역시 저지르지 않았다.

3.2.1. 미요시 일문 살해

흔히 그가 미요시 가문을 장악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이 미요시 5형제 중의 당시 이즈미를 다스리던 소고 카즈마사를 암살했던 것이라고 알려져있다. 카즈마사는 히사히데를 상당히 좋게 보고있지 않았었고 이를 상당히 고깝게 여긴 히사히데가 병에 걸린 카즈마사가 온천치료를 하러 떠날때 암살을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설은 센고쿠 시대 이후의 역사서에서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다 언급에 의하면 "소고의 당주가 히사히데 에게 암살당했다 하더라"급의 음모론이라 현재에 와서는 그다지 신뢰받고 있지 않고있다.

셋째 동생 카즈마사에 이어 아와, 사누키의 국주였던 첫째 동생 미요시 짓큐가 죽자 나가요시는 충격을 받았고 이는 병으로 까지 발전했으리라 추측한다.[5] 이를 간파한 히사히데는 본격적으로 미요시 가문을 전복시킬 꿍꿍이를 갖게 되었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나가요시의 후계자였던 미요시 요시오키를 독살하였다 한다. 하지만 이 설은 거의 전면 부정 당하고 있는데 다른 설들과는 달리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데다가 후세의 역사서 조차 "히사히데가 그랬다는 잡설이 있었다 "정도의 신뢰성을 보여주기에 가장 믿지 못할 이야기중 하나이다. 무엇보다 요시오키와 히사히데는 쇼군과의 화합 이후로 부터 미요시-아시카가를 연결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던 사람이었기도 하고 조정에서 내리는 거의 최상급의 직책을 받아 명예와 실리를 모두 챙기고 있었는데 병으로 고생하던 나가요시를 두고 총명한 후계자였던 요시오키를 죽여봤자 득이 되는건 없었다.

요시오키 마저 떠나버리고 나가요시의 권력 기반을 쌓았던 4형제는 둘째 동생 아타기 후유야스만 남게 되었다. 이것이 호기라고 본 히사히데는 정신이 맛이 가버린 나가요시에게 후유야스의 역심을 전하였고 나가요시는 이에 혹해 후유야스를 직접 이이모리야마 성으로 불러 참살하였다. 이에 나가요시는 뒤늦게 히사히데의 책략인걸 깨달았고 몹시 비통해 했다는 이야기다. 다른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히사히데를 상징하는 이야기중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데 남은 기록이 얼마없고 이 살해 자체에 의문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도 여러 주장으로 갈리는데 요시츠구의 권력기반을 위한 숙청, 실제로 반란을 품고있다는 풍문을 믿은 나가요시의 잘못, 막장에 다와가는 그의 정신상태의 폐해 등등 여러 이야기로 나뉘고 있다. 히사히데와의 관련성은 낮게보고 있으며 나가요시의 정신 불안정이 주류가 되고있는 추세이다.

종국에는 나가요시가 죽어버리고 요시츠구가 가독을 잇자 히사히데는 산닌슈와 함께 키나이의 미요시 가문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게 된다.[6] 이렇듯 결과적으로는 미요시의 최중요 인물중 한명이 되었으나 나가요시 생전이랑 하는 일은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또한 권력을 탐했다는 기록이나 실제 암살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무하므로 히사히데의 암살축제는 후세의 이야기라고 결론나는 추세이다.

3.2.2. 쇼군 살해와 방화

이렇게 되자 다시 한번 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쏟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에이로쿠의 변이다. 히사히데 자신과 산닌슈와 병사를 이끌고 쇼군의 거처인 니죠고쇼를 습격하여 쇼군을 직접 살해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역시 히사히데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낮게 보고있는데 왜냐하면 당시 히사히데는 야마토에 머물면서 호족들과 대립하며 정무를 보고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히사히데가 직접 이 일을 꾸며 쇼군을 죽이는데 앞장섰다고 하면 좀 이상하게 되어버리는데 쇼군을 죽이는 거사를 행하는데 병사만 보내놓고 자신은 다른데서 관망하고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도 히사히데는 이미 가독을 히사미치에게 넘겨준 상태였으며, 산닌슈나 아들 히사미치는 자주 거론되는데 비해서 히사히데는 그 이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사건으로 히사히데가 이득을 취하려면 당연히 쇼군에 버금가는 권력자에 붙거나 권모술수를 이용하여 자신이 절대자가 되어야하는데 이후의 요시츠구 정권과 히사히데의 행보를 보면 저런것에 전혀 부합하지 않은 행동들만 나타났다. 요시츠구와 산닌슈는 쇼군을 살해한뒤로 새로운 쇼군을 임명하지 않고 자신들 스스로 막정을 행했고 히사히데 자신이 새로운 쇼군을 세우지도 않았으며[7] 히사히데는 산닌슈와의 다툼으로 결국 미요시 가문과 전쟁을 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이로쿠의 변 부터 노부나가에 항복하기까지 약 3~4년간 히사히데가 나가요시 가신시절보다 이득을 챙겼던 일은 없다고 보여진다.

또한 야마토에서 벌어진 도다이지 전투 때 도다이지의 대불전이 불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또한 히사히데의 직접적인 방화로 의심되었다. 그러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미요시측의 키리시탄에 의한 방화라 말하고 있고 최근의 연구에서는 실화에 의한 불이 도다이지 주위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대불전도 이 화재에 불타버렸다고 추측되고 있어 히사히데의 직접범행을 증명해주는 증거는 희박하다.

4. 일화

시기산 성에서 농성하는 히사히데를 포섭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명품 차솥인 '히라구모'를 내놓으면 살려주겠다고 사자를 보냈지만, '네놈 같은 촌뜨기에게 이런 명품을 줄까보냐'라며 히라구모를 깨부수고 성에 불을 질러 폭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8] 일설에는 이 때 히사히데는 중풍을 앓고 있었는데,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을 머리에 뜨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부하가 "목숨이 그렇게 아깝나?"라 묻자, "배를 가를 때 중풍 때문에 손놀림을 그르치면 남들이 나보고 '그 유명한 히사히데도 죽을 때가 되니 무서워하는구나'라고 할까 걱정돼 그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말도 남아있다.

히사히데의 최후를 두고 여러 소문이 유포됐다. 히사히데가 자폭한 날이 수 년 전 대불전을 불태웠던 그 날이어서 저잣거리에는 히사히데 카스가대명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며, 하필 성을 공략한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의 투구가 사슴뿔 모양이었는데, 사슴을 신성한 동물이자 신불의 사자로 경외하는 일본인들은 '사찰을 불사른 것 때문에 신불이 사자를 내려 히사히데에게 천벌을 내렸다'라고 쑥덕거렸다고 한다. 덤으로 일본 최초의 폭사자로 취급되어 일본 니코니코 동화노부나가의 야망 유저들은 봄버맨이라고도 부르는 모양.

'히라구모'는 히사히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나, 히사히데가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명품 다기인 '츠쿠모나스'는 시즈오카 현의 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시기산 성을 함락시킨 노부나가가 부하들을 시켜 터를 파자 그 밑에서 나왔다고 하는 듯. 원래는 산산조각 났지만 후대에 정밀한 복구를 거쳐서 원형을 되찾았다. 겉보기에는 새것이나 다름없지만 X선 촬영 사진에는 당시 조각난 모양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관람에는 초대장을 필요로 하는 등 엄중히 관리되고 있다. 노부나가가 다기 하나를 주면 살려주겠다고 한 것이 어이없어 보이거나 지나치게 관대한 처사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다도는 정치권력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명품 다기는 그 상징성이 엄청났고, 당대 일본에서는 명품 다기 제조 기술이 없었으며 거의 중국에서 수입해 온 귀중품이라 다기 하나로 성채 하나를 지을 수 있다고도 할 만큼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었는데다 히사히데도 문화인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 조건을 관대한 것이 아니라 목숨은 살려줄테니 목숨이나 다름없는 물건을 바치라는 식의 나름대로 엄중한 조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차솥이 있어야 다도회를 열고 귀족들과 정치를 논하며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대이니 다른 나라에 비유하면 왕에게 옥새를 내놓으라는 것과 다름 없는 것.

시기산 성에서 죽은 게 아니라 살아남아 도망쳐서, 히데요시의 군사자문역을 맡았다는 설도 있다.

평생 공포라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없는 담대한 자였다고 하지만, 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을 농락했고 당대에 이미 유명했던 환술사 카신거사(果心居士)의 소문을 듣고 흥미가 생겨 불러놓고는 '나는 평생 공포라고는 느껴본 적이 없는데,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을 보여보라'라고 했는데, 이윽고 방이 어두워지고 광풍이 불더니 죽은 전처가 나타났고, 이를 보고 처음으로 기겁한 나머지 얼굴이 창백해져 그만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의 평가를 살펴보면 히사히데가 전국시대의 관점에서 그만 악랄하다고 특기할 만큼 나쁜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전국시대를 하극상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처럼 주군을 배신하거나 주가를 뒤엎어버린 가신은 히사히데 이외에도 무수히 있었기 때문이다.[9]

자기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었다는 기록도 일부 남아있다.[10]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랄한 이미지가 남아있는 것은 주로 노부나가나 그 주변인물을 주연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 NHK 대하사극의 특성상 히사히데는 필연적으로 악역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 다테 마사무네의 인기가 높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악평을 당하는 모가미 요시아키하고 비슷하다.

5. 기타

측실과는 금슬이 좋았던듯 자신이 생활하던 성을 옮길때도 계속 자신과 성에서 같이 생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다도가로 유명했다. 시기산 성에서의 최후에 히라구모가 등장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자신이 직접만든 다기가 현존하고있다.

미요시 요시츠구는 산닌슈 세력에서 경시받던 자신을 포섭해줬기 때문인지 히사히데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듯.

여러 학문과 문화에 능했던 그 답게 축성기술에도 일가견을 보였는데, 그가 쌓은 타몬야마 성은 모든 요소들이 가히 쿄토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하며 텐슈나 타몬 야구라 등의 모티브가 되는 고층의 야구라를 만들기도 하였다.

흔히 전국 3효웅에 히사히데를 넣기도 하는데 당주 사망후 내분으로 고생하던 히사히데와 달리 이들은 나라 하나를 삼켜버렸다.[11]

어째 폭사라든가 크리스마스 정전이라든가 굵직굵직한 에피소드를 많이 남긴 무장이지만 이를 증명해주는 1차 사료는 전무하다.[12]

그의 가신으로 남북조 시대 당시 남조에 속하여 북조의 아시카가 타카우지에게 끝까지 항전하였던 쿠스노키 마사시게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쿠스노키 마사토라(楠正虎)라는 무장이 사관해있었다. 쿠스노키 씨는 북조에 저항한 죄목으로 조적으로 취급받았는데 1559년, 마사토라는 자신의 노력과 히사히데의 도움으로 텐노로부터 면죄를 받아 약 200년간 계속된 쿠스노키 씨 반역의 죄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마사토라는 자신이 평소 쓰던 오아에(大饗) 성을 버리고 쿠스노키 성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마사시게의 카와치노카미(河内守) 직함을 받게 되었다.[13]

나가요시에게 사관하고 있을땐 미요시 가문과 무로마치 막부에 충성하였지만 요시츠구와 나가야스에이로쿠의 변을 일으키자 막부와의 연에 따라 요시아키를 보호해주었고 미요시 산닌슈와 사이가 틀어져 미요시 가문과 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이 전쟁의 말로는 노부나가에 대한 항복이었기 때문에 히사히데가 키나이 미요시 가문 멸망의 원인 중 하나라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6. 대중문화 속에서

죽기전 박살낸 히라구모에 거미蛛자가 들어가서 인지 거미가 그를 상징하기도 한다. 센고쿠히메나 전국컬렉션에서 옷에 거미줄이 그려져있고, 전국란스에서는 구모 탄죠라는 이름으로 나온데다 전국무장희라는 게임에선 아예 거미로 나온다... 그리고 사망할 때 보인 모습이 뭔가 인상이 깊어서인지 폭탄을 무기로 쓰거나 폭탄과 관련된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는 것도 특징.

또한 재평가 전의 이미지가 암살과 권모술수에 능하며 효웅이라고 불린데다 자신이 가문을 장악하기 위해 동생을 모함한 적이 있는데다 자신의 전 주군인 미요시 나가요시를 배반하고 에이로쿠의 변에 당시 미요시 삼인방과 함께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암살하는 등 온갖 막장행동과 기행들을 저질렀다는 악당 이미지인지라 창작물에서는 하라구로 내지 악역으로 등장하는 편이기도 하다.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후에도 종종 음흉한 악당 이미지로 나온다.

6.1. 전국무쌍 시리즈

마츠나가 히사히데(전국무쌍)

6.2. 전국 바사라 시리즈

마츠나가 히사히데(전국 바사라) 참고.

6.3. 센고쿠히메

작품 내의 대표적인 하라구로형 캐릭터이며 외모는 대단히 아름답고 단아해 보이지만 그속에 숨겨진 교활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여성 캐릭터이다. 주인공인 소우마를 여러 번 역강간하기도 하고 성희롱까지 한다.

센고쿠히메 3 에서는 원래 미요시 죠케이 루트에서의 진 주인공 노릇까지 한다. 역사와 똑같이 된 모양새다.

6.4. 효게모노

히라구모를 안고 폭사한 것은 역사와 같으나 히라구모의 뚜껑 조각만은 후루타 사스케가 주워 잘 보관하고 있다. 무사로서의 커리어냐 덕질문화적 취미생활이냐 라는 후루타 사스케의 고민 속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죽기 전까지 무사 측의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히사히데는 전국시대가 마무리되어가면서 자신이 노부나가라는 절대강자에게 가로막혀 더 올라갈 곳이 없기 때문에 반란을 택했다고 하면서, 후루타도 전국시대가 마무리되면서 자신처럼 신분상승을 가로막는 벽에 맞부딪혔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고 질문을 던지고 "노부나가여, 열반에서 기다리마."하는 폭풍간지 대사를 하고 죽는다.

6.5.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파일:松永久秀.jpg 파일:松永久秀2.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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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시리즈 전통적으로 매우 높은 지모, 정치와 그야말로 없다시피한 의리가 특징. 대개 처음부터 가보로 고급 다기인 히라구모를 가지고 있어 그로 인한 능력치 상승을 더 받는다. 일시적으로 히라구모와 맞먹는 쓰쿠모나스까지 가지고 있는데, 가보 효과는 중복되지 않고 그렇다고 뺏자니 충성도가 떨어지는 딜레마가 있다[14]. 미요시 나가요시 생전에는 미요시의 가신으로, 사후에는 야마토 지방의 독립 다이묘로 등장한다. 다이묘로서는 자기 빼고는 전투에 쓸 만한 가신이 없어서 자기 자신의 활용여부에 따라 앞날이 결정된다. 항상 일러스트에서 눈에 상처가 난 채로 그려지는 것이 특징.

무장풍운록에선 1555년 시나리오로 플레이하면 야마토 국의 성주로 나오는데, 거의 100% 반란을 일으켜 다이묘가 되는 배신의 대명사. 미요시 나가요시로 플레이할 땐 야마토 성주를 꼭 바꿔줄 필요가 있다.

천상기에서는 절대 사로잡히지 않고 역사대로 자폭하여 죽는다. 다이묘든 다이묘가 아니든. 그래서 히사히데를 부하로 부릴려면 처음부터 부하로 갖고 있든가 아님 전투중에 배반시키든가 아님 전투 중 배반을 약속할 땐 일정 확률로 아예 부하로 들어와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이용해 부하로 등용하든가 하는 방법밖에 없다.

창천록에서도 지모와 정치력이 높아 책사로서는 A급. 통솔이 좀 딸려서 야전에서 써먹기는 힘들지만, 어차피 창천록은 모략질에 특화된 게임이라... 단, 항상 본성(本城)에 붙여두고 써야 한다. 섣불리 어디 영주라도 시키면 뒷통수가 가렵다.

천하창세에서는 지모 97 / 통솔 69 / 정치 93 / 교양 94 로 책정되어 있고. 특기도 혼란 / 파괴 / 창금1, 가보빨로 효게모노에 교양+10이 붙어있다. 신장포위망에서는 1570년으로 책정되어 있고. 오다가와 동맹이 체결된 상태로 시작한다. 다만. 시대적 배경을 어떻게 짠 것인지는 모르지만. 난이도는 꽤 어려운 편으로. 스즈키를 멸망시켜 버리는게 좋다. 오다/도쿠가와/미요시 세력과는 친밀이고. 츠츠이/이시카가/혼간지/스즈키/아사쿠라 과는 험악이다. 미요시의 부하 한정 이벤트를 본다면. 히사히데가 존재하는 세력하에. 쇼군 암살 이벤트가 발생한다. 요시테루가 죽고. 가신들은 모두 강제 하야되어 로닌이 된다. 그리고 히사히데의 소속의 영토는 모두. 히사히데의 소속 가문으로 지배가 바뀐다. 시스템 빨을 좀 받는다면. 손 안대고도 수 많은 영토를 날로 먹을수 있다. 다만. 이런 이벤트를 보겠다면. 히사히데의 신분이 가로 이상이고 영주가 아니며. 본성에 거주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존재한다. 또한 빈성이니 만큼. 배치 안하면 확률적으로 로닌이 봉기해서 성을 점거하는 불상사가 터지니 주의. 적으로 만나면 예상외로 까탈스럽고. 인발등 충성도를 떨구는 계략을 자주 시전하기 때문에. 우키타 나오이에 / 다케다 신겐같은 지략형 무장의 계략질이 엄청 짜증나니 주의 할 것. 계략보정은 실행무장의 의리치가 낮을수록 성공률이 높다.

천도 기준으로 능력치는 통솔 81 무력 62 지력 98 정치 86 의리 1 전법 모살. 미요시가에 속해있지만 의리가 낮아 스즈키가나 츠츠이가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군웅패권 모드에선 어째 명품다기 때문에 긴키지역의 패자가 되려고 한다. 무서운 된장남 다만 다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벤트를 읽어보면 "유명한 다기를 수집하는 겸사겸사 천하를 취해 볼까?"란 식. 재미있게도 군웅패권모드에서는 데리고 있는 부하들이 다도로 유명했던 인물들이다. 효게모노의 주인공인 후루타 오리베도 있고, 노부나가의 사위인 가모 우지사토도 히사히데의 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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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에서는 전용 이벤트 CG도 있고, 미요시 가문을 풍비박산 내는 이벤트에서는 글자 그대로 간웅의 포스를 뿜어낸다.

DS2판 군웅쟁패 모드에서 난이도 1짜리 적으로 등장하는데, 폭사했다는 것을 반영한 건지 마츠나가 히사히데 이외의 부대를 격파하면, 만약 그 부대 주위 한 칸에 아군이 있을 경우 주위 한 칸까지 폭발이 일어나 아군이 데미지를 입는다.(..)
근데 정작 당사자인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부대는 격파시 폭발 안하고 끝난다(..) 아무래도 총대장이라 그런 듯.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는 탈모의 고통에서 벗어나 찰랑찰랑한 롱헤어를 자랑한다.

삼국지12에서는 지력이 94로 상관보다 높고 군사 특기는 없으나 이 녀석도 특이하게 귀모를 가지고 있다.

창조로 오면 전국전에서 자주 등장하며, 오다 가문 플레이 시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쇼군 암살 및 노부나가 포위망 선동, 동참 등 화려한 등장이 많이 보이며,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개인 무장록. 오다 가문으로 포위망 전국전을 진행하면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드는 히사히데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시기 산성 하나만을 가지고 거병한다. 이를 노부나가로 직접 물리치고 산성을 포위하면 완료가 된다. 겉으로는 순종하면서도 속으로 이를 갈고 정신 승리를 외치는 히사히데의 모습이 압권이다. 이는 두 번째 거병에서도 같은데, 서쪽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부나가의 앞에 또 한 번 반기를 들고 시기 산성에서 궐기하지만 노부나가로 재차 산성을 포위하면 결국 히라구모와 함께 폭사한다. 노부나가를 향해 "넌 내게서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가지 못할게다!"라고 외치며 마지막 모습을 불태우고 리타이어. 이 무장록 클리어 시 히라구모는 가보로 영구히 입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플레이 기록 달성에 필요한 부분으로는 일찌감치 히라구모를 입수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대지의 스토리에서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골탈태. 막신으로서의 면모는 제대로 고증되지 않았고, 쇼군 암살도 뒤에서 획책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나가요시에 대한 태도는 이전 작들과 180도 다른, 실제 역사에서의 충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6.6. 태합입지전 시리즈

여기서도 무력, 매력이 그저그런대신 통솔, 정무가 준수하고 지모는 최고급. 매력도 5에선 히라구모가 무려 14를 올려주기 때문에 73이면 나쁜 것도 아니다. 무력역시 소지한 무기 보정을 받아 10이 오른 65. 지모는 칭호 보정까지 받아 무려 101. 아쉬운건 축성술에 능한 역사와는 달리 여기선 건축은 겨우1에 내정쪽 기술은 별로인편. 하지만 미요시가를 구워삶은 인물답게 변설4에 사기스킬 위압을 지니고 있고, 족경, 철포기술이 3이라 전투에선 성문 내구 까는 기술이 없긴 해도 아쉬운대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


[1] 조카가 탄바의 야가미 성(八上城)의 성주가 되자 셋츠에 있던 묘후쿠지(妙福寺)를 이전 시킨 사실에 따라 마츠나가씨가 셋츠 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며 히사히데의 모친이 이즈미사카이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료를 들어 이즈미 출신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또한 아와에 마츠나가 성(松永城)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들어 아와 출신이라는 주장도 간간히 보이고 있다. 개판이네[2] 요시츠구또한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여 영지를 보존할 수 있었지만, 퇴출된 쇼군 보호 혐의로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공격당해 자결하게 된다.[3] 게임상에서 이렇게 의리가 낮으면, 능력치는 엄청나게 뛰어난데 어이없이 배반하거나 독립해버리는 등 골치아픈 위험분자가 된다.[4] 반댓말은 '기리햐쿠(의리 100)'로, 나가노 나리마사,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처럼 주가에 감동적일 정도로 충성을 바치던 인물들이 의리가 만땅이다.[5] 실제로 짓큐 사후 롯카쿠 가문을 위시로한 반 미요시 파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 전쟁에 요시오키, 히사히데, 나가야스의 이름은 남아있지만 나가요시 본인의 이름은 찾아볼수가 없다고 한다.[6] 미요시 가문의 본국인 아와에서는 짓큐에 이어 그의 아들인 미요시 나가하루시노하라 나가후사의 보좌를 받아 사누키와 함께 통치하는 형식이 되었다.[7] 산닌슈는 1~2년 사이 키나이 호족들의 반발에 의해 할수없이 새로 쇼군을 임명하였다[8] 또는 히라구모에 화약을 가득 담고 거기 불 당겨서 폭사했다는 얘기도 있다. 공명의 갈림길에서 이 설을 채택해 불길 속에서 히사히데가 화약을 채운 히라구모에 불을 붙인 막대기를 찔러넣어 자폭하는 것으로 처리.[9] 당장 히사히데에게 배신당한 노부나가의 오다 가문, 특히 그 아버지 노부히데는 오다씨의 윗선이자 막부의 3가문 중 하나인 시바씨를 몰아낸 센고쿠 다이묘이고, 이에야스도 자신을 후대한 주군 이마가와를 배신했으며, 다케다 신겐은 아버지를 쿠데타로 쫓아내버리고 친아들을 죽였다. 의롭다 이름난 우에스기 켄신은 형을 치고 가문을 이었으며, 마에다 토시이에는 시즈가타케 전투 당시 맹우이던 시바타 카츠이에를 배신하고 히데요시와 밀월관계를 구축했다. 괜히 주군을 위해서 죽은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유키모리가 사무라이 중의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사무라이가 의리의 표상이라 그가 유명해진 게 아니라, 거꾸로 당시에는 유키모리처럼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10] 이쪽은 정반대 기술도 있어서 좀 불분명한 부분이다. 세금을 체납한 농민에게 사방에서 창을 겨눈 뒤 기름에 적신 도롱이를 입히고 불을 붙여서 포위된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짚벌레 춤"이라고 부르면서 즐겼다는(...) 엽기적인 기록도 있다. 이것은 시마바라의 난의 계기를 만든 마츠쿠라 카츠이에가 처음으로 저지른 것으로 히사히데는 이미 60년 전에 죽었다.[11] 하지만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소운은 막부 쇼군의 명으로 영지를 점거한 것이고, 도산의 악행으로 평가받는 부분은 대부분이 그의 아버지가 한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노부나가 또한 막부를 직접 멸망시키자는 생각은 혼간지와의 투쟁이 끝날 때쯤 결심한 것으로 추측되는 등 현대에 와서는 "효웅"이라는 키워드 자체가 쇠퇴해가고 있는 모양새다.[12] 폭사에 대한 이야기는 시기산 성 방화와 히사히데의 자결, 그리고 없어져버린 하라구모의 사실을 재구성하여 만든 이야기가 에도 막부 말기쯤에 퍼지게 된것이 시초라고 한다.[13] 학계에서는 마사토라가 쿠스노키의 후예가 맞는지 심히 의심스러워하고 있다.[14] 다만, 혁신에서는 이 가보들을 뺏었다가 다시 주면 충성도를 100으로 만들어 줄 수가 있다. 원래 이러면 충성도가 깎이지만 히사히데의 경우 둘 다 뺏기면서 충성도가 0 미만으로 떨어질 수가 없어서 다시 주면 오히려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