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04:32:02

크리스마스 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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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의 언론지 데일리 미러에 1면
기사 제목에는 "역사적인 만남: 영국과 독일 병사들이 같이 사진을 찍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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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크리스마스 정전 당시 벨기에 전선의 영국 육군 런던 소총병여단 장병들과 독일 작센 왕국군 2군단 104, 106연대 장병들.
가운데 뾰족한 피켈하우베 철모를 쓰고 담배를 문 독일 병사 양 옆의 두 명이 영국 병사들이다.[1]

1. 개요2. 1914년성탄절
2.1. 부정적 반응2.2. 각 군 지휘부의 반응
3. 이후4. 여담5. 대중매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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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몇 시간 전만 해도 서로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수백 명이 넘는 그런 사람들이, 서로 웃어주고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어!
- 크리스마스 정전을 직접 겪은 영국군 육군 병사, 톰의 편지에서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초기 서부전역에서 발생한 암묵적인 정전 사건. 양진영 지도부의 합의 하에 정식으로 이루어진 휴전이 아니라 최일선 장병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휴전이라는 점에서 영어로는 Christmas Truce(혹은 Ceasefire)이라고 한다. 여기서 Truce나 Ceasefire는 좀 더 정치적, 장기적인 의미가 강한 "휴전"보다 "정전"에 가까운 뜻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에는 크리스마스 휴전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뭔가 전장 전설 같은 믿기 힘든 일화지만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주요 참전국들에서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참전 용사들의 기록만 해도 무려 30만 건이 넘고 수많은 사진 자료까지 존재하는 명실상부한 실화다.

2. 1914년성탄절

제1차 세계 대전은 발발 당시만 하더라도 국가를 막론하고 전쟁이 길어야 2~3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국가 지도부와 군 지휘부는 물론이고 전방의 말단 사병들까지 이에 동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국민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전혀 예기치 못한 형태의 전투 현상이 발생했다. 구시대적인 관점의 낙관론과는 다르게 고도로 발달된 기술력이 집약된 전장의 새로운 환경은 기존의 관념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기 충분했다. 강력하고 파괴적인 각종 신무기들에 가로 막혀 진격은 끊임없이 좌절되고 필연적으로 전선은 고착되어 무의미한 희생만 늘어 갔다. 그렇게 참호전이라는 새롭고도 끔찍한 양상의 전장 속에 갇혀야만 했던 대부분의 일선 병사부사관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직속 상관이자 참호 속에서 병사들과 함께 비슷한 생활을 하였던 장교들조차 갈수록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치열했던 1914년에도 겨울은 찾아왔고 어느덧 성탄절이 되었다.

양측의 장병들은 불과 몇십~몇백 미터의 무인지대를 사이에 두고서 서로 대치하던 와중에도 참호 속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조촐하게 행사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 종파로 갈리긴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교를 믿는 알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를 제외한 모든 유럽 대륙은 기독교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탄절은 국가를 불문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기념일이었다. 그래서 전쟁 중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심각한 상황이 아닌 이상 부대 내에서 자그마한 행사라도 가지는 것이 관례였다. 더군다나 전쟁 당사자였던 영프독 3국은 가톨릭-개신교의 차이야 있었다지만 같은 라틴-게르만 베이스의 서방 기독교(Western Christianity)[2]를 믿고 있었고 민족, 혈통, 문화적으로도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웃나라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해프닝이었다. 역으로 동부전선의 독일-러시아 사이에서 이런 일화가 없었던 이유는 종교, 민족, 혈통, 문화적 차이점이 서부전선의 영프독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탄절도 러시아 정교회를 믿던 러시아 제국에서는 날짜부터 그레고리력 기준으로 1월 6일-7일로 다르다.

그런 가운데 캐럴 소리는 아군의 참호를 넘어 상대측의 참호에까지 전달되었고 참호 속의 장병들은 비록 서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상대방도 자신들처럼 캐럴을 부르며 성탄절을 기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속은 달랐지만 성탄절의 정신만은 공유하고 있었다.[3] 그러자 독일 측에서 참호 위로 촛불이나 전등으로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들을 올려놓기 시작했고 어떤 독일 병사가 용기를 내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고 참호 밖으로 올라왔다.[4] 평소라면 이렇게 아무런 엄폐물도 없이 당당하게 나타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고[5] 적군의 돌발 행위에 놀란 영국군 측도 당연히 전투 태세를 취했지만...

그런 그를 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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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악수를 나누고 있는 영국과 독일 육군 장병들.

이것을 발단으로 양측의 수많은 장병들이 비무장 상태로 참호 밖으로 올라왔다. 이윽고 대치선의 한가운데서 서로를 마주본 그들은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며 담소를 나누었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서로의 부대 휘장이나 계급장, 군모 등의 소소한 기념품(?)이나 식량, 술, 담배 등 간단한 기호품을 교환하며 우정을 나눴다. 병사들의 이러한 매우 파격적인 일탈 행위를 코앞에서 지켜보던 부사관, 장교들도 대부분 분위기에 동참하여 상대측 지휘관과 만나 신사적으로 조약을 맺고 당분간 교전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때 양 진영 참호 사이의 무인지대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어 대치 중 수습이 어려웠던 시체들도 제대로 수습할 수 있었다.

어느 부대는 그 시체들을 치운 빈 땅에 축구장을 급조하여 팀을 나눠서 같이 축구를 즐겼다. 경기 결과는 3-2로 영국이 독일에게 역전패했는데 영국 측은 이를 명백한 오프사이드였다고 하지만 독일 측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고 했다는 양자의 기록이 있다. 전쟁보다 중요한 스포츠맨 정신 많은 미디어에서 이 사건을 언급할 때 양측 병사들이 축구를 하는 것을 그려냈기 때문에 축구는 이 사건의 가장 큰 이미지가 됐다. 다만 이들이 진짜 축구를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사건을 연구한 역사학자 사이먼 존스는 영국과 독일의 자료에서 같은 게임의 명확한 증거를 찾는 것은 어렵다고 밝혔다.#

2.1. 부정적 반응

이 일시적이며 자연적으로 발생한 정전 상태는 특히 영국군과 독일군이 주로 대치했던 벨기에의 이프르 전역에서 많이 나타났다. 이외의 다른 서부전선 전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크리스마스 정전이 발생했다고는 하지만 영국군과 독일군의 이러한 정전 행태를 지켜보던 벨기에군과 프랑스군 병사들은 동참은커녕 오히려 분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벨기에는 전 국토가 침략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벨기에의 강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벨기에 학살로 인해 전쟁 중 독일에게 가혹한 피해를 입었고 프랑스도 전선의 대부분이 프랑스 영토 내에 형성되어 국토가 유린당하던 와중이었으니 적국 독일인들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렇다고 해당 국가 소속 군인들과의 정전이 없었던 건 아니다. 프랑스군 사병들의 사료에도 독일군과 성탄절 교류로 담배나 신문을 교환하곤 했다고 나온다. 벨기에 지역도 비슷했는데 벨기에군이 독일군들에게 자신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며 참호를 오간 기록도 있다. 아무리 독일군이라 해도 높으신 분의 명령 때문에 희생당하는 신세는 동일하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에 물들었던 독일측 사병들 중에도 이를 군인정신이 어디 갔냐며 불쾌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이 사건이 벌어졌던 이프르 전투에서 바이에른군 상병 계급으로 전령 임무를 맡고 있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이 일화를 두고 독일의 치욕이니 위대한 프로이센 군인정신은 어디갔느니 하면서 불평하는 일기를 남겼다.

2.2. 각 군 지휘부의 반응

조국이요? 여기서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 아시나요? 하나만 말하죠. 자기 집에서 칠면조나 뜯으면서 명령하는 자들보다 나는 저 독일인들이 더 가깝게 느껴져요!
- 이 사건을 다룬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에서 프랑스군 장교 오드베르 육군 중위가 상관인 자기 아버지에게 항변하면서.
양측 군 수뇌부는 이 사건으로 발칵 뒤집어져서 이를 이적 행위로 규정하고 주동자를 색출한답시고 헌병대로 부대를 뒤집어 놓고 몇 명을 본보기로 처벌하는 등 극약 처방을 내놓았다. 간혹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높으신 분들이 전선 시찰을 나오기도 했는데 이미 휴전을 한 번 맛본 병사들은 당연히 이를 얌전히 들어주고 총을 쏠 일은 없었으며 양측 사병들과 초급 장교들이 이를 눈치채고 서로 간의 합의를 통해 일종의 연기를 했다.

예를 들어 영국군 진지에 시찰이 뜬다는 정보가 돌면, 열심히 싸우는 척을 하기 위해 독일군 참호와 협의하여 한두 명 정도의 독일 병사들이 초병 임무를 수행 중인 것처럼 서 있다가 영국군 시찰단이 나타나면 영국 병사들이 그 독일 병사를 향해 공포탄을 쏘거나 소총을 빗나가게 사격하고 그 독일 병사는 총에 맞은 척하며 사라지는 식이었는데 의외로 잘 먹혔다고 한다.

그리고 적과 친해지는 상황을 막는다고 참호에 배치되는 부대의 전환 배치를 주기적으로 실시했는데 원래부터 참호 근무는 참호에서 일정 기간 근무 후 후방으로 배치시켜 휴식 기간을 주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한국군의 GP 근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며 전방의 근무 환경이 열악하니 일정 주기로 인원들을 교체해 휴식 및 재정비시킨다.

안 그래도 병력 부족으로 이런 순환 배치 주기가 점점 늦어져서 병사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는데 이 사건 이후 실시된 전환 배치는 전방 참호에서 후방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원래의 참호에서 다른 참호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즉, 장병들만 더욱 피곤해졌다. 당연히 이런 식으론 참호 생활에 지친 장병들의 사기가 되살아날 리 없었다.

3. 이후

안타깝게도 크리스마스 정전은 1914년 성탄절 한 번으로 그쳤으며 이듬해에도 일부 전선에서 크리스마스 정전이 재차 시도되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양군 수뇌부는 상대방 진영에서 캐럴 소리가 들린다는 보고를 받으면 즉시 집중 포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1918년까지도 기나긴 참호전 와중에 비교적 격전이 적었던 곳에서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기념일 같은 때에는 암묵적으로 무기를 내린 곳이 있었다고 한다.

높으신 분들 중에도 다른 날 많은데 하필 성탄절 같은 때까지 굳이 싸워야 하냐고 거부감을 느낀 경우가 없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의 공세 같은 것이 예정되지 않은 일반적인 참호 생활이 이어진 곳에선 그날만큼은 1914년처럼 대놓고 만나지는 않아도 암묵적으로 상부의 묵인 혹은 거짓 보고 하에 교전 행위를 접기도 했다. 확실한 정전이 성립된 것은 1914년의 성탄절 한 번뿐이었지만 이후에도 종종 이날 교전을 자제하는 편이었으며 일부 장병들이 개인적 혹은 소부대 단위로 만나 기념품 교환 정도 하고 헤어지는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1918년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도 이런 비공식적인 휴전이 있기야 했다고는 하지만 적개심이 높아지다 보니 휴전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6]

팃포탯에 대해 설명한 로버트 액설로드의 저서 <협력의 진화>에서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두 세력에서도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례로 크리스마스 정전을 포함한 참호전 도중의 휴전 사례를 들었다. 팃포탯을 설명하는 인디 게임인 신뢰의 진화에서도 첫 서두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였다.

4. 여담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엔 워낙 양국이 박터지게 싸웠고 서로 간 관계도 더럽게 안 좋았기 때문에 없었을 것 같지만 1944년 벌지 전투의 성탄절에도 비슷한 실화가 하나 있었다. 다만 극소수 병사들만의 거의 개인적인 정전이라 조금 경우가 다르다. #[8][9]
  • 믿기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전국시대일본에도 성탄절을 이유로 정전한 사례가 있다고 전해진다. 코에이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에서도 이벤트로 재현되어 있다.[10] 당시 키나이키리시탄 신앙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고 나름 독실한 신자들도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한동안 히사히데가 크리스마스 정전을 명했다는 이야기로 잘못 적혀있었으나, 실제로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크리스마스에 키리시탄 무사들이 주군이 누군지 가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전도시킬겸으로 작은 공간을 빌려 크리스마스 예배를 보내고 즐거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마츠나가 히사히데와는 무관한 이야기.[11]
  • 2014년 동상으로도 만들어졌다. 조각가는 앤디 에드워즈(Andy Edwards). 벨기에에서 가장 작은 도시인 Mesen 시에 있다. 작은 도시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대형 전투만 세 번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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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중매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크리스마스 정전/대중매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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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



[1] 이 사진을 제공한 제국 전쟁 박물관에 따르면 오른쪽 뒷편의 정모를 쓰고 있는 병사의 이름은 그리그, 왼쪽의 무슨 터번 같은 걸 쓰고 빼꼼히 얼굴을 내민 병사의 이름은 앤드류로 추정된다. 같은 장소에서 찍힌 다른 사진들에서도 독일군들과 같이 사진을 찍은 앤드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출처: IWM Q11745#[2] 실제로 이런 표제어를 가진 영어 위키백과 문서가 존재하는데 로마 가톨릭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를 묶어 그리스-슬라브 문화권의 정교회, 그리고 여타 非 니케아-칼케돈 교파들과 대비되는 의미로 서술되었다.[3] 거기에 영어와 독일어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언어인 만큼 유사한 단어들이 많은 데다 노래까지 똑같으니 그 시너지가 장병들에게 미친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문서 아래쪽에 있는 광고 영상에서도 영국군과 독일군이 각각 영어와 독일어로 인사를 하는데 서로 못 알아듣는다는 분위기가 전혀 없다. 심지어 들어 보면 발음마저 매우 유사하다.[4] 독일군 장교가 백기를 들고 캐럴과 스코틀랜드 민요 애니 로리를 부르며 올라왔다는 증언도 있다.[5] 실제로 전쟁이 심화되면서 지옥도와도 같은 참호전의 끔찍한 환경을 견디다 못한 일부 병사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현세의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자살이나 자해를 기도하기도 했다.[6] 피터 심킨스 et al,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플래닛미디어, 2008, pp.86~87[7] 프랑스 작곡가 아돌프 아당이 작곡한 유명한 캐롤. 한국에서는 '거룩한 밤 경사롭다'라고 불리는 곡이다.[8]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길을 잃은 미군들이 집을 발견해 하루만 묵게 해 달라고 해서 그 집에서 묵게 된다. 하지만 곧이어 길을 잃은 독일군이 찾아오게 되고 서로 총을 겨누게 되지만 집주인의 설득으로 서로 무기를 거둔다. 그리고 다 같이 칠면조를 먹으며 어느 정도 친해지고 독일군 의무병이 미군 부상병 치료도 해준다. 이틑날 독일군이 미군의 위치를 알려주며 서로 행운을 빌고 헤어지게 된다.[9] 이원복의 사랑의 학교에도 수록되었다. 단 휘르트겐 숲 부근이 베를린 부근으로, 중년 부인과 아이가 할머니로 각색되었다.[10] 범용 이벤트이기 때문에 군주가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아니어도 일어난다.[11] 엄밀히 따지자면 크리스마스 정전이 발생했을 시기가 노부나가와 히사히데간의 전투 시기에 발생했다는 설이 유력함으로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 다만, 히사히데의 지시라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