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賤ヶ岳の戦い.1583년에 벌어진 전투.
2. 배경
2.1. 오다 노부나가 사후의 권력 공백과 기요스 회의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장남 오다 노부타다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되자 오다 가문은 사실상 지도력을 상실하였다.이에 같은 해 6월 27일, 노부나가의 후계자 문제와 영지 분배를 논의하기 위해 기요스성에서 주요 무장들이 회의를 열었다.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자리에서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三法師)를 후계자로 옹립할 것을 주장하였고, 참석자들을 설득해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히데요시는 야마시로·단바 등 노부나가의 주요 영지를 얻으며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였다.
2.2. 히데요시에 대한 반발과 무력 충돌의 조짐
히데요시의 팽창을 경계한 시바타 가쓰이에, 오다 노부타카 등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산보시를 아즈치성으로 옮기려는 히데요시의 계획에 반발하여 산보시를 기후성에 억류함으로써, 명백히 히데요시에 대한 도전 의사를 밝혔다.가쓰이에는 자신의 근거지 에치젠 지역이 겨울 폭설로 인해 군사행동이 어려운 상황임을 이용하여, 일시적 화해 제스처로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를 간파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나가하마성을 함락시키고 기후성을 포위하였다. 노부타카는 항복했고, 히데요시는 야마자키로 철수하였다.
3. 전개
1583년 봄, 가쓰이에는 기타노쇼에서 출병하여 오미국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히데요시는 시즈가타케(비와호 북부)에서 맞섰고,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한때 히데요시군은 노부타카의 기습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히데요시는 야간 60km 강행군으로 시즈가타케에 재진입하여 반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전세는 히데요시에게 기울었다.4. 결말
패색이 짙어진 가쓰이에는 본거지 기타노쇼성으로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마에다 도시이에는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고 가쓰이에의 포위를 돕는다.최후의 저항 후, 가쓰이에는 천수각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으며, 아내 오이치(노부나가의 여동생)도 그와 함께 생을 마감하였다.
5.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후쿠시마 마사노리 | 가토 기요마사 | 가토 요시아키 | 히라노 나가야스 |
| 카타기리 카츠모토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카스야 타케노리 |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호위무장 7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가타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 등이 활약하여 전공을 세웠고, 이들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 불렀다.
정확한 공적은 전하지 않으나, 히데요시의 세력 구축에 핵심적 기여를 했다고 전해진다.
6. 의의
6.1. 히데요시의 정적 제거
시즈가타케 전투는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가 정적(시바타 가쓰이에, 오다 노부타카 등)을 제거하고 오다 가문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정치적 사건이었다.6.2. 명분과 실리 확보
산보시를 옹립하여 명분을 취하고, 실질적 권력은 자신이 행사하는 히데요시의 정치 수완이 두드러졌다.6.3. 무장들 간의 분열 활용
마에다 도시이에 등 과거 가쓰이에 측 인사들이 히데요시에게 귀순함으로써, 히데요시는 반대세력을 내부에서부터 와해시켰다.6.4. 전국시대에서 도요토미 시대로
이 전투를 통해 히데요시는 전국 통일을 위한 발판을 굳히게 되었으며, 이후의 오다와라 정벌, 조선 침략으로 이어지는 그의 패권 시대가 시작된다.
7. 여담
- 히데요시는 가쓰이에의 자결 장면을 회상하며, 그를 “예도에 밝고 명예를 중시한 무장”이라 높이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