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14:11:50

히라노 나가야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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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野長泰 (ひらの ながやす)
1559년 ~ 1628년 6월 8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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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며 오와리 국 쓰시마[1] 출신. 통칭은 곤페이(權平). 히라노 가문은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나오카타류(直方流)이자 가마쿠라 막부싯켄 호조 가의 서류(庶流)[2] 호조 코레토키(北条惟時)의 후손인 요코이(横井) 가의 후손으로, 14대 무네나가(宗長)대 부터 오와리 국의 히라노지역을 다스리면서 히라노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가야스의 외조부인 히라노 만큐 뉴도(平野萬久入道)[3]대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영지를 빼앗기고 방랑하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인 나가하루를 서양자(데릴사위)를 목적으로 입양, 히라노 성을 잇게 한다. 20세까지의 행적이 전해지지 않지만 나가야스가 태어난 시점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이미 오와리를 통일했으므로 아버지 나가하루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아버지와 함께 섬기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2. 생애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급사하면서 나가야스의 주군은 자연스럽게 하시바 히데요시가 된다.[4] 1583년 오다 가의 후계 문제로 하시바 히데요시시바타 카츠이에가 대립, 시즈가타케 전투로 이어진다. 전투는 하시바 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때의 전공으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으로 불리며 가와치의 3천 석을 받게 된다. 이후 1584년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도 참전하여 하시바 히데츠구의 나카이리(中入り - 별동대를 이끌고 적 후방이나 본거지를 공격하는 일) 부대와 함께했으며 히데츠구가 패주하는 와중에 오히려 적에게 돌격하여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 이후 1595년 8월, 2천 석이 가증되어 야마토 국 토이치 군 다와라모토 인근의 5천 석을 하사받았으며, 1597년에는 종 5위하 토토미노카미(遠江守)에 서임되어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1600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아이즈 정벌에 종군하였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참가, 하타모토로써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휘하에 있었으나 히데타다의 군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늦는 바람에 공을 세울 수 없었다. 1615년 오사카의 진에서는 도요토미 측에 합류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직소했으나, 허가받지 못하고 에도의 수비를 명령받는다. 이후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오토기슈[5]로 살다가 도쿠가와 이에미츠대 까지 장수한다. 1628년 사망. 향년 70세.

자식으로는 아들 나가카츠(長勝)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일 시모즈마 나카토라의 부인이 되는 딸이 한 명 있었다. 후손의 경우 아들 나가카츠 대에 1656년 12월 8일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명으로 나나사와 기요무네(七沢清宗)의 아들을 양자를 들이면서 혈통은 끊기게 되지만, 히라노 가문은 이후로도 하타모토로 존속되다 1868년부터 1871년까지 3년간 다이묘로써 근무하고, 이후 1884년 화족령이 시행되면서 남작 작위를 받는다.

다이묘가 아닌 하타모토로써 삶을 마감했다. 같은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인물들로 비교해보자면 나가야스가 5천 석을 하사받은 1595년 가토 요시아키가 이요 국 6만 석, 1585년에 이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셋츠 국 1만 석, 5개월 후에 아와지 국 3만 석의 영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본래의 17만 석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 등을 받아 51만 석,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아키 국 히로시마와 빈고 국 도모초 49만 8천 석, 카타기리 카츠모토도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이세 국 6천 석과 야마토 국 다쓰타의 2만 4천 석으로 총 3만석과 이바라키 성의 성주가 되었고 카스야 다케노리도 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카코가와 성 1만 2천석의 다이묘가 된 전적이 있다. 이는 후손들도 마찬가지라 막말까지 하타모토로 지내오다 10대 나가히로(長裕)가 1868년 7월 14일 유신립번으로 다와라모토 번주가 된다. 하지만 번으로 승격된 후 3년만인 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으로 짧은 다이묘 경력을 끝마치게 된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유일하게 임진왜란에 불참한 인물이기도 하다.


[1] 津島, 지금의 아이치현 쓰시마시 부근[2] 서가(庶家), 분가(分家), 서자가(庶子家)라고도 한다. 일반적인 분가와는 달리 종가(宗家)에서 갈라져 나와 종가와 같은 성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며, 종가와 주종관계를 맺어 종가의 일문으로 대우받는다. 이러한 서류는 가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서류의 예로는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足利) 가의 경우 키라(吉良), 시바(斯波), 하타케야마(畠山), 호소카와(細川), 잇시키(一色), 시부카와(渋川) 가 등과 여기서 또 분가한 가문들이 일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키라 가에서 분가한 이마가와(今川) 가.)[3] 만큐는 법명, 본명은 마사나가(賢長)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음.[4] 당시 아버지 나가하루가 히데요시 휘하에서 히메지 성의 수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5] 주군이나 다이묘의 곁에서 상담 및 말상대를 하는 사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서툴러 상당한 인원의 오토기슈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