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好義継(みよし よしつぐ)
1549년(?) ~ 1573년 11월 16일[1]
1. 소개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소고 카즈마사의 장남이자 미요시 나가요시의 양자이자 후계자. 미요시 종가의 최후의 당주.미요시 5형제 중 넷째인 소고 카즈마사의 적자. 어머니는 칸파쿠(関白) 쿠죠 타네미치(九条稙通)의 양녀. 아명은 쿠마오마루(熊王丸)이며 가명은 마고로쿠로(孫六郎)이다.
2. 생애
2.1. 소고 가문 시대
소고 가문의 적자라는 위치로 태어나 성인식을 올릴 당시에는 소고 시게마사(十河重存)로 개명하였다. 그렇게 소고 가문의 당주를 이을 아이로 키워지고 있었는데 1563년, 본래 미요시 나가요시의 후계자였던 미요시 요시오키가 22세란 나이로 요절해버리고 다른 적통이 없었던 나가요시는 새로이 후계자를 뽑아야 했다.후계자 후보로는 첫째 동생 미요시 짓큐의 장남과 차남,[2] 둘째 동생 아타기 후유야스의 장남이 있었다. 당시의 시게마사는 후계자가 될 기본 사항에 맞지 않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미 자기 자신이 소고씨의 당주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던 것이다. 만약에 시게마사가 후계자로 선정된다면 소고 가문의 당주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나가요시는 이런 리스크를 감수해가며 시게마사를 기어이 후계자로 삼는다.[3] 결국 소고 가문의 시게마사가 미요시 성을 쓰게 되고 시게마사를 대신해 미요시 가문의 짓큐의 차남이 소고 성을 쓰게 되면서 소고 가문의 적통은 끊어지지 않게 되었고 시게마사는 미요시 가문의 정통 후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후계자로 지목된 이후 시게마사는 1564년 6월에 상락하여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대면하여 후계를 인정받았으며 1564년 7월 나가요시가 사망하자 미요시 산닌슈의 지지 아래 당주에 취임하였다.[4]
2.2. 미요시 당주 시대
당주에 취임한 이후 1565년 5월 1일. 다시 한번 요시테루와 대면하여 요시테루에게 요시(義)자를 받아 미요시 요시시게(三好義重)로 개명하였다. 거기에 전 후계자였던 요시오키보다 높은 관위를 얻고 돌아갔다.[5]하지만 상락 후 1달도 채 되지 않은 5월 18일에 요시시게는 미요시 나가야스와 마츠나가 요시히사(松永義久)[6]를 대동해 군사를 이끌고 상락해왔다. 요시테루는 이 상락에 대해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고 경계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결국 19일, 요시테루는 요시시게의 군대에 살해당하고 키리시탄 선교사들이 교토에서 쫒겨나는 등 니죠고쇼에선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게 된다.[7]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야마토의 고후쿠지(興福寺)에 유폐되어 히사히데에게 보호받고 있던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히사히데의 도움으로 오우미로 탈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에이로쿠의 변 전후로 요시시게는 꽤 의미심장한 행보를 보여주는데 첫째로 18일 상락 당시 마츠나가 요시히사의 군대에 다름이 아닌 유학자였던 키요하라 시게카타(清原枝賢)가 종군한 것.[8] 둘째로 쇼군 살해 직후 자신의 이름을 미요시 요시시게에서 미요시 요시츠구(三好義継)로 바꾼 것.[9] 셋째로 미요시 산닌슈와 마츠나가 부자의 내분이 일어나기 전까지 쇼군을 옹립하지 않은 행동들이 그것이다. 이렇듯 요시츠구는 초기의 양아버지마냥 아예 막정 자체를 무력화시켜 자기가 직접 키나이-일본을 통치하겠다는 의지가 다분했고 미요시 산닌슈도 이 의견에 따라와 주었기에 쇼군 살해라는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르고도 기나이를 통치하는 게 가능했다. 딱 1년 정도만.
에이로쿠의 변 이후 미요시 가문에 파란을 불러온 건 다름아닌 미요시 가문의 또 다른 실권자 마츠나가 부자였다. 1565년 말. 요시테루의 동생인 요시아키를 놓아준 히사히데를 제거하고자 미요시 산닌슈와 히사히데의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11월이 되자 산닌슈는 요시츠구에게 히사히데 부자와 단절할 것을 요구했으며 요시츠구는 이에 응해 미요시 가문이 5년간 본성으로 사용하던 카와치 이이모리야마 성(飯盛山城)을 떠나 미요시 야스나가가 지키는 카와치 타카야 성(高屋城)으로 거성을 바꾸었다. 마츠나가 부자 또한 나가요시 침공 이전에 타카야 성을 본성으로 사용였던 하타케야마(畠山)씨와 손을 잡는 것으로 미요시 가문의 공격에 대비하였다.[10] 결국 1566년 2월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 미요시 가문 쪽이 상시 우세를 점하였으며 총력전 끝에 미요시 가문이 마츠나가 세력을 패퇴시킴에 따라 사카이 항을 점거하는데 성공하였다.[11] 5월에는 다시한번 마츠나가 세력이 사카이를 확보하려 전쟁을 걸어왔지만 셋츠의 호족 이케다 카츠마사(池田勝正)를 포섭한 미요시의 군대 앞에 패배하여 소득없이 돌아갔다. 이후 요시츠구는 6월 ~ 7월 마츠나가 세력의 하타케야마씨와 이즈미의 호족을 이끄는 마츠라(松浦)씨와의 강화를 맺는데 성공하여 더더욱 마츠나가 부자를 고립시키는데 성공한다.[12]
한바탕 난리가 끝난 후 요시츠구는 숨겨왔던 미요시 나가요시의 사망을 세간에 공표하였고 그동안 할 수가 없었던 양아버지에 대한 장례식을 6월 24일 집행하였다.[13] 장례식으로 가중을 잡고 나가요시의 뒤를 잇겠다는 의지를 전국에 알리고 마츠나가 세력의 영토를 얻어가며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나 했지만, 도망쳐서 오우미에 머물고 있던 요시아키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형과 면식이 있던 우에스기 켄신이나 오다 노부나가 등의 대다이묘들에게 구원을 요청해 상락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쇼군의 구원요청 소식에 맞춰 7월에는 교토 근방에서 반 미요시 세력이 형성되었으나 요시츠구와 산닌슈는 이들을 토벌하고 반 미요시 세력의 거점이었던 쇼류지 성(勝龍寺城)에 이와나리 토모미치를 입성시켜 쿄토 주변을 제압하기로 하였다.
동년 8월 오다 노부나가가 요시아키의 요청에 호응해 상락을 공표하였다. 노부나가는 마츠나가씨를 위시로 한 친 요시아키파와 교류를 나누며 미요시씨와 동맹관계인 사이토씨를 치기 위해 군사를 출진시키는 등 키나이 진출에 적극적이었으나 정작 본인이 미노에서 사이토 타츠오키에게 패배 당하며 상락은 유야무야 되었다. 이 이후로 요시츠구와 산닌슈는 롯카쿠 가문과 함께 요시아키에게도 본격적인 견제를 시작하였으며 요시아키는 다시 오우미에서 빠져나와 와카사를 경유하여 아사쿠라 가문의 영토인 에치젠으로 피신하게 된다.
이번 사태로 아와 미요시 가문을 담당하는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11대 쇼군의 차남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였으며 요시히데도 상락을 바라고 있었기에 산닌슈는 결국 요시히데를 새로운 쇼군으로 임명하기로 한다. 작업은 수월히 진행되었고 요시히데와 수행원들은 9월 ~ 12월에 걸쳐 키나이에 상륙하였다. 키나이 입성 후 1567년 정월에 쇼군이 되기 위한 밑작업으로 높은 관직을 하사받았고 산닌슈와 나가후사의 철저한 보좌를 받게 되어 미요시 가문은 후에 닥쳐올 전란의 대비를 마쳐놓은 듯 했다.[14]
이윽고 2월에 히사히데의 사전 공작으로 인해 이케다 카츠마사의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되자 산닌슈와 하타케야마씨의 세력은 이를 진압하러 갔고, 미요시 가문의 당주 미요시 요시츠구의 모습은 사라져있었다.
2.3. 요시아키 세력으로
미요시 진영에서 모습을 감춘 요시츠구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연합하여 미요시 산닌슈에게 반기를 들었다. 쇼군 옹립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 사상이 무너진데다 미요시 산닌슈와 시노하라 나가후사의 지원과 관심이 끊김은 물론이고 경시에 가까운 눈초리를 받은 요시츠구가 환멸감을 느끼고 아시카가 요시아키 세력에 뛰어든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제는 연합 관계가 된 히사히데와 합류한 후 4월에 사카이 근방에서 야마토 시기산 성(信貴山城)으로 이동 후, 12일에 마츠나가 세력의 본거지인 타몬 성(多聞城)으로 이동했다.정황을 파악한 산닌슈는 곧바로 야마토로 진군하여 18일에 마츠나가 세력의 남쪽에 포진하고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대립하던 야마토의 호족 츠츠이 준케이와 공동전선을 펼치며 타몬 성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24일, 산닌슈는 타몬 성 근처에 있는 고후쿠지 근처의 산에 병사를 배치했으며 '철포소리가 밤낮을 메울 정도'로 격렬하게 싸워나갔다. 5월 2일에는 이와나리 토모미치와 이케다의 세력이 도다이지의 염불당(念仏堂), 이월당(二月堂), 대불전(大仏殿)회랑에 병사를 배치하였다. 한편, 요시츠구와 마츠나가 세력 역시 도다이지의 계단원(戒壇院)에서 농성하였기에 전쟁의 양상은 시가전으로 번져나갔다.
이 와중에도 히사히데는 외교전을 벌이며 8월 이후 이이모리야마 성의 마츠야마(松山)씨와 키슈의 하타케야마씨를 포섭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이 이즈미, 미나미 카와치, 야마토로 진군함에 따라 키나이의 정세는 말그대로 개판이 되어갔다. 교토에서는 아직 요시히데가 쇼군에 취임하지 못한 상태에다 동년 15일에 요시아키를 지지하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가 결국은 사이토 타츠오키를 깨뜨리는데 성공하고 미노를 손에 넣게 됨으로써 키나이 세력에 폭풍전야를 예고하였다.
10월 10일, 마츠나가 세력은 대불전에 있는 산닌슈의 군세에 야습을 걸었다. 이 야습 도중에 화재가 발생하게 되고 이 불길은 법화당(法華堂)과 대불회랑을 지나가게 되어 오전 2시경, 대불은 소실된다.[15] 이 야습으로 산닌슈 측은 이번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그들의 군세는 이 정도로 꿈쩍하지도 않았고 타몬 성의 포위 상태는 지속되게 된다.
이후에도 요시츠구와 히사히데는 요시아키 연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군사 활동을 보이는 노부나가와 연락을 취하여 적극적으로 산닌슈 세력에 항쟁하였다. 당시 노부나가는 11월에 키나이 평정의 의지를 드러내고자 '천하포무(天下布武)'가 새겨진 주인장을 발급할 정도로 여전히 자신이 상락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2.4. 오다 가신 시대
1568년 정월, 요시츠구는 타몬 성에서 카와치 츠다 성(津田城)으로 이동했다. 2월에는 드디어 요시히데가 쇼군에 취임하게 되었고 츠다 지역에서 산닌슈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요시츠구는 다시 타몬 성으로 귀환하였다. 4월이 되자 요시아키는 성인식을 올리고 자신의 이름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로 개명한다. 또한 요시아키는 7월, 오다 가문의 확장에 적극 호응하여 에치젠에서 미노로 본거를 옮기게 된다. 노부나가의 움직임을 주의하던 산닌슈는 노부나가가 본격적으로 상락 준비를 마치자 오우미의 롯카쿠 가문에 동맹을 요청하는 등 오다 가문의 상락에 대비했으나 번번히 요시츠구, 히사히데 세력과 싸우며 야마토에도 계속 주의를 주어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동년 9월 7일,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와 함께 기후에서 출발하였다. 산닌슈는 이 소식을 듣고 이와나리 토모미치를 오우미까지 파견했으나 얼마 안 가 철군했다. 오다 가문은 13일, 롯카쿠씨의 거성이었던 칸논지 성(観音寺城)을 함락시키고 교토 남부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토모미치가 있는 쇼류지 성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미요시 나가야스는 한때 자신의 거성이었던 아쿠타가와야마 성(芥川山城)에 입성하여 오다 가문의 공세를 막을 준비를 했지만 야마토에도 병력을 남겨놨었기 때문에 산닌슈의 군세는 분단된 상태로 오다 가문과의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29일에 쇼류지 성이, 30일에 아쿠타가와야마 성이 오다 가문의 손에 떨어지면서 산닌슈는 순식간에 키나이의 거점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아와의 시노하라 나가후사에 의지해 아와로 철퇴하게 된다. 이 와중에 1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는 교토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급사하였고 노부나가가 아쿠타가와야마 성에 입성하게 되면서 미요시 가문은 키나이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당주는 원수 가문의 가신이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노부나가의 키나이 평정과 상락이 끝나게 되자 요시츠구는 이이모리야마 성을 하사받아 카와치 북부와 셋츠 남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렇게 키나이가 오다 가문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산닌슈는 포기하지 않고 1569년, 노부나가가 미노로 귀환하자 이틈을 노려 교토 혼코쿠지(本圀寺)로 상륙해왔으나 격퇴당하여 다시 아와로 돌아가게 되었다. 1570년이 되자 산닌슈는 다시 키나이로 쳐들어 왔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연합하여 오다 세력을 약간이나마 물리는데 성공한다.
1571년, 노부나가와 요시아키 사이에서 불화가 발생하였고 이에 요시아키는 전국의 반 오다 성향의 다이묘를 모아 노부나가 포위망을 만들게 된다. 타케다 신겐, 아사쿠라 요시카게 등 이름이 쟁쟁한 다이묘들이 이에 참여하였고 미요시 산닌슈 역시 참여하였다. 그리고 산닌슈와 적대관계였던 요시츠구와 마츠나가 히사히데 또한 이 연합군에 참여한다. 요시츠구는 자신이 통치하던 카와치와 셋츠 방면에서 싸워 승리하여 포위망의 일각을 담당하였으나 1573년 신겐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맞물려 노부나가 포위망은 붕괴되었고 15대 쇼군 요시아키가 추방되며 무로마치 막부 또한 멸망하였다.[16] 요시츠구도 노부나가에 항복하게 되었으며 다시 한번 오다 가문의 아래로 들어간다.
2.5. 최후
추방 되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잠시 자신의 거성이었던 와카에 성(若江城)에서 머물게 해주었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노부나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1573년 사쿠마 노부모리가 이끄는 오다 군에 와카에 성은 포위되었다. 요시츠구는 항전을 선택했으나 사건의 발단이었던 요시아키는 이미 사카이로 탈주하였고 와카에 산닌슈라 불리는 중신들에게 배신당한 것이 결정타가 되어 와카에 성은 함락되고 요시츠구 자신은 자결하게 된다. 추정나이 25세. 신쵸코기에 의하면 요시츠구는 처자를 죽인 후 성 밖으로 나와 적을 손수 베며 자신의 배를 십자로 갈라 죽었다고 전해진다.3. 평가
3.1. 부정적인 평가
나가요시의 대기를 이어받지 못한 후계자. 망국의 군주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천하인에 가까웠던 미요시 나가요시의 후계자로 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년 만에 키나이의 미요시 가문을 멸망시킨 데다 무리한 영향력 확장과 그로 인한 가신의 내분을 조장하고도 그들을 제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요시 산닌슈와 마츠나가 히사히데 사이를 오가며 분란을 일으킨 행적을 보면 아예 본인이 키나이의 미요시 가문을 없애버리려고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 결국 이런 내분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상락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며 산닌슈는 자신들을 죽음에 몰아넣었고 요시츠구와 히사히데는 오다 가문에 붙는다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17]
미요시 산닌슈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발하여 그들에게서 빠져나와 공격을 감행했지만 결국 자신에겐 부정적인 영향 밖에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이 또한 비판의 대상이다. 최후조차 긍정적인 평가로 받을 요소가 없는데 무명무실해진 쇼군을 잠시 보호해 주는 와중에 이게 또 노부나가 본인의 귀까지 들어가서 쇼군을 보호한 죄목으로 살해당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시츠구는 거의 비판의 대상이며 연구성과조차 얼마 없고 대중들에게는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3.2. 긍정적인 평가
무로마치 막부의 질서를 타파하려 했던 또 다른 선구자. 지나치게 젊은 나이와 자신의 얇은 정치 기반에 발목이 잡힌 불운한 다이묘.요시츠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면 쇼군 살해 당시의 요시츠구의 행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시츠구는 쇼군을 살해하여 쇼군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막부 정치를 행하였는데 쇼군을 죽인다는 요소만 빼면 이는 나가요시와 노부나가도 구상하고 실행한 정치 방식이다. 거기에 요시츠구는 쇼군 살해 당시엔 유학자를 종군시키고 장례식에선 미요시 가문과 쇼군 가의 위치를 확고히 보여주는 등 정치적 공작을 활발히 실행하는 것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렬히 보여주었고 실제로 요시츠구는 이런 정치 방식으로 키나이를 어느 정도 통치하는데 성공하여 마치 새로운 막부를 세울 것 같은 기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산닌슈와 히사히데가 쇼군 살해 후 1년도 가지 못해서 콩가루 집안 마냥 내전에만 몰두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며 키나이 미요시 가문 붕괴의 서막을 알렸다. 이런 결과는 당시 20세도 지나지 못한 그의 어린 나이와 약한 지지기반 때문에 산닌슈와 히사히데의 결속을 강하게 하지 못한데서 나왔다고 추측된다. 이후로도 산닌슈와 나가후사의 지지력 상실로 인해 자신의 정치 모토를 100% 실행하지 못하였고 결국 산닌슈와 나가후사를 경멸하게 되어 자신이 당주인 미요시 가문과 적대하면서까지 요시아키 세력으로 투신하게 되는 결과를 낳아 키나이의 정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에 일조하게 되었다.
그의 약한 지지기반의 원인으로 산닌슈와 히사히데의 투톱 체제였다는 것에 문제의 중심을 두는데 한마디로 그 두 세력을 조정하거나 압도하여 요시츠구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줄 정치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요시츠구가 히사히데에게 넘어가는 시점은 정확히 산닌슈가 요시츠구의 정치모토를 깨뜨리고 새로운 쇼군 후보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관위를 받은 후이다.
또한 신쵸코기에서 묘사되는 와카에 성에서 여러명의 적을 베어넘기는 요시츠구를 보고 "역시 오니 소고의 아들"이라는 평가도 받고있다.
4. 기타
그의 부인은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딸이었다. 즉, 아시카가 요시테루 쇼군에게는 매부. 혼인 자체는 에이로쿠의 변 이후에 이루어졌다.오다 노부나가와 미요시 나가요시와 비교해 인지도는 정말 최악에 가깝다. 그렇지만 나가요시 사후 미요시 가문을 잇고 에이로쿠의 변을 일으킨 데다 노부나가의 상락에 연관되어 있으며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각을 담당하던 역사를 보내왔기 때문에 그가 중세 키나이의 역사와 센고쿠-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가지는 영향력과 의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요시츠구가 사망한 후 미요시 가문의 본적은 아와에 있는 미요시 짓큐의 장남 미요시 나가하루가 이어받는다.
[1] 일본 위키백과에서는 생년을 1551년이라고 표기해오다 2009년 11월 28일자부터 1549년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했지만 2013년에 출판된 미요시 관련 서적에서 天野忠幸 박사는 1551년 생, 中西裕樹 관장은 생년불명이라고 각각 주장했다.[2] 짓큐 역시 1562년에 전사하여 후계자 선정 당시 나가하루는 시노하라 나가후사를 위시한 아와의 호족들에게 짓큐의 후계자라는 명목으로 보좌를 받고있었다.[3] 이런 무리한 가독 교체를 행한 이유로는 쇼군 가의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카즈마사에게 딸을 내주었던 관백 쿠죠씨를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혹은 쿠죠씨와의 긴말한 사이였기에 시게마사를 후계자로 지정했다고 한다.[4] 당시 시게마사의 나이는 약 15세로 추정되며 이에 불안을 느낀 미요시 가신들은 나가요시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5] 나가요시와 요시오키가 대대로 이어 받던 관위는 치쿠젠노카미(筑前守). 요시시게가 새로 받은 관위는 사쿄타이후(佐京大夫).[6] 히사히데의 아들. 즉, 후의 마츠나가 히사미치.[7] 당시 니죠고쇼에서는 방어시설 구축 공사를 하고있던 중이었는데 요시시게는 요시테루의 전혀 경계하지 않는 기색을 보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우발설이 존재한다.[8] 시게카타는 오우치 요시타카와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유학 스승이기도 했으며 몇몇 역사학자들은 다름아닌 유학자를 쿠데타 행위에 종군시킨 것으로 보아 유교에 기반한 역성혁명의 사상을 요시테루 살해의 정당화에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9] 개명 후 이름이"쇼군가의 돌림자인 義(요시)를 継(잇는다)."라고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무식하게 해석하면 "우리 미요시 가문이 이제부터 막부 쇼군의 의지를 이어가겠다."라는 게 된다! 또한 요시츠구의 개명과 동시에 요시히사가 자신의 이름을 마츠나가 히사미치(松永久通)로 개명했다.[10] 동생 나가요리는 동년 8월 탄바 평정 중 전사. 이로 인해 미요시 가문은 탄바에서의 영향력을 잃었고 히사히데는 든든한 지원군을 한 명 잃게 된 셈이다.[11] 키나이에서 이 난리가 났을 때 오우미로 도망친 요시테루의 동생은 환속하여 요시아키(義秋)로 개명하였고 조정에서 관위를 받는 것에 성공하였다.[12] 여기서 마츠라씨의 당주는 다름아닌 요시츠구의 동생인 마츠라 마고하치로(松浦孫八郎)다.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미요시 나가요시의 내전에서 키시와다 성(岸和田城)주였던 마츠라씨는 나가요시의 편에 서게 되었고 훗날 자신이 죽게 되자 소고 카즈마사 자신이 키시와다 성에 들어오고 아들이었던 마고하치로에게 마츠라 가문을 잇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마츠나가 부자는 5월의 패전 이후 종적을 감췄다. 히사미치는 야마토에서 수비를 맡고 있었다는 소리도 있는 듯.[13] 이 장례식 또한 정치색이 들어가 있다고 추측하는데 다름이 아니라 나가요시의 장례를 집행하는 승려의 지위가 쇼군 가를 포함해 상급 무가의 장례를 맡는 승려보다 월등히 높았던 것이다. 탑두(塔頭) 또한 나가요시 쪽이 더 격이 높은 절에 지어졌으며 종교 질서를 재편한 흔적이 남아있다.[14] 정작 요시히데는 쿄에 들어가지도 못하였고 미요시 가문의 본성에도 입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산닌슈는 요시히데의 추대를 탐탁찮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15] 역사서에는 산닌슈의 진지에서 실화가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16] 하지만 요시아키는 아직 쇼군 직함을 내려놓지 않은 상태였다. 한마디로 요시아키가 쫓겨난 뒤에도 무로마치 막부 자체는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17] 1570년 산닌슈와 나가후사가 외부 세력과 연합하여 어느 정도 오다 가문의 세력을 몰아낸 것을 봤을 때 요시츠구와 산닌슈, 히사히데가 힘을 합쳤다면, 노부나가와의 전쟁을 좀 더 오래 지속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