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17:46:51

아마고 츠네히사

전국 3효웅
호조 소운 사이토 도산 아마고 츠네히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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尼子経久 (あまごつねひさ) 니자경구
(1458년 12월 25일 ~ 1541년 11월 30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및 수호 취임까지2.2. 이즈모 장악 이후2.3. 말년
3. 기타4. 대중문화 속의 아마고 츠네히사
4.1. NHK 대하드라마 모리 모토나리4.2.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4.3. 이야기거리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

2. 생애

2.1. 초기 및 수호 취임까지

아마고 가는 쿄고쿠 가의 분파로, 시조이자 츠네히사의 증조부 타카히사는 쿄고쿠 타카노리의 동생이다. 타카히사의 아들 모치히사 대부터 대대로 본가의 이즈모 슈고직의 대리, 즉 이즈모 슈고다이를 지냈다 한다. 츠네히사는 어렸을 때 인질로서 주군이자 8촌 형인 쿄고쿠 마사츠네(京極政経)에게 보내져, 성인이 될 때에도 마사츠네의 '츠네'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츠네히사가 아직 20대일 무렵, 주가인 쿄고쿠씨가 누명을 씌워 퇴거를 명하자 결국 성을 잃고 무일푼으로 떠돌게 되었고, 혈기왕성하던 츠네히사는 이에 반발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리 십수명을 이끌고 풍물패에 섞여 이즈모 수호가 부재중인 틈을 타 성에 잠입하여 이즈모 갓산도다성을 탈환하였고, 이즈모 수호에 취임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후대의 창작에 따른 것이다.

츠네히사가 수호대 직을 잃은 것은 수호와 막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정책을 펴가며 세력을 확장하여 막부로부터 축출을 명받았기 때문이지 누명을 쓴 것이 아니며, 츠네히사는 수호대 직을 잃었을 뿐 이즈모국에는 그대로 머무르며 국인중 중 하나인 미사와씨(三沢氏)를 공격해 복속시키는 등 여전히 일정부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막부가 츠네히사 축출을 명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이즈모타이샤 수리를 위한 임시세 징수 거부는 츠네히사의 단독행동이 아니라 당대 이즈모 수호의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설이 우세하기에, 츠네히사 입장에선 쿄고쿠 씨에 대항해 하극상을 벌일 이유조차도 하등 없었다.

츠네히사가 수호대 직을 박탈당한지 8년 후인 1492년 쿄고쿠 마사츠네가 지속된 막부의 대립 끝에 이즈모 수호직을 박탈당했던 것 역시 츠네히사가 이즈모 내에서 자유롭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1500년, 쿄고쿠 가문의 본가인 오미 쿄고쿠 가문의 가독 상속 분쟁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고, 이즈모 수호직을 박탈당했던 마사츠네는 쇼군에 의해 사면받아 이즈모 수호직을 되찾았다. 이와 함께 츠네히사도 수호대 직을 되찾는데, 이 역시 츠네히사가 쿄고쿠 가문과 대립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이후 얼마 안가 마사츠네가 사망하고 아직 어린 손자가 수호직을 물려받으면서, 츠네히사는 실질적으로 이즈모 지역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이렇게 이즈모 지역 내의 반대파를 찬찬히 제거해 나가며 위상을 쌓던 도중, 1514년 아직 어린 이즈모 수호가 갑자기 사망하고, 츠네히사가 이즈모 수호가 되었다. 이를 두고 전국시대 초기의 전형적인 하극상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당대에는 (막부의 지원 혹은 묵인이 있지 않은 한) 수호대가 수호를 제끼고 하극상을 벌여 수호로 취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하극상 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최근에는 이즈모 쿄고쿠 가가 단절된데다가 아마고 가문은 쿄고쿠 가문의 가까운 분가였기에 이 점을 인정받아 수호로 취임할 수 있었다고 보는 추세이다.

2.2. 이즈모 장악 이후

이 시기 주코쿠 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세력은 오우치 가문의 당주 오우치 요시오키였다. 서국의 패자라고까지 불렸던 요시오키에게 대항할 수 없었던 츠네히사는 일단 교토의 막부 내 권력다툼에 개입하기 위해 상경하는 요시오키 휘하에 종군하거나, 자신의 셋째아들의 이름을 요시오키로부터 하사받은 이름으로 짓는 등 오우치 씨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오우치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을 뒤에서 지원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후 세력 확장에 나서 호키의 난조 씨를 복속시키는 등 잘나가고 있었는데, 기대의 유망주였던 장남 마사히사가 아요 성 공략 도중 유시에 맞아 죽었다. 츠네히사에게는 아들이 3명 있었는데, 차남인 쿠니히사는 전형적인 저돌맹진형의 맹장이었고, 삼남은 자꾸 영지나 요구하면서 징징거려서 갈등을 겪었다. 결국 이 삼남은 반란을 일으켜 츠네히사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했고 뒤에 자결했다.

1517년, 오우치 요시오키가 이와미국을 장악하고 이와미 수호에 취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츠네히사는 아직 요시오키가 교토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황을 이용해 기존 이와미 수호였던 야마나 가문과 손잡고 이와미 영내에 있는 오우치 가문의 성들을 하나하나 공략해 나가기 시작했고, 동시에 비추국의 다이묘 미무라씨를 공격해 복속시켰다.

1520년, 전통적으로 토착 호족들이 지배하던 이즈모 서부 지역에 대한 장악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이즈모 및 인접 호족들의 반발을 불렀고, 이들과의 대립은 츠네히사가 더욱 더 세력을 확장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1523년에는 아키국 내 국인중을 움직여 아키 내 오우치 가문의 거점을 공격했고, 이때 모리 모토나리가 종군하여 전투 승리에 일조하기도 했다. 이듬해 호키국 서부를 침공해 난조 씨를 격파하고, 호키 수호 야마나씨를 공격해 승리하여 호키국 서부를 장악했다. 이로서 츠네히사의 부친 대부터 이어진 야마나 가문과의 악연이 수십년 만에 완전히 청산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아마고 가문은 오우치 가문과 완전히 정면대결을 펼치게 된다. 오우치령 이와미 영내를 침공하였고, 아마고에게 복속된 호족들을 움직여 오우치를 공격하게도 시켰으나 패배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모리 모토나리가 이끄는 모리 가문마저 아마고와 연을 끊고 오우치로 전향한다. 이로 인해 아키국 내 세력을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 호키와 비고 두 국의 수호직을 겸직하던 야마나씨마저도 오우치와 협력해 아마고를 적대하면서, 아마고는 양면전선에 휩싸이게 된다. 1527년 비고국을 직접 병사를 이끌고 비고국을 침공하였으나 스에 오키후사에게 패배하고 이의 여파로 상당수의 호족들이 오우치 가문으로 전향하게 된다.

장남인 마사히사에게 이미 아들이 있었으므로 손자인 아마고 하루히사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이듬해 다시 비고국으로 출병하여 타카야마 가문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와미국 내 친아마고 호족들이 연이어 모리 가문에게 멸망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530년, 셋째아들 하루히사가 부친에 대항해 이즈모와 기타 여러 아마고령 호족들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고는 오우치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츠네히사는 서둘러 반란 진압을 위해 하루히사의 거점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이에 오우치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오우치는 결국 츠네히사를 도와 하루히사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로써 급한 불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고, 이를 기점으로 아마고 가문의 세력은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다. 오키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했고, 후계자인 손자 하루히사를 미마사카로 출병시켜 미마사카를 정복했다. 이후 비젠 국으로도 진출하는 등 주코쿠 여러 지방을 손에 넣었다.

2.3. 말년


1537년 오우치령이었던 이와미 은광을 점령한다. 이후 하리마국을 침략하여 하리마 수호인 아카마츠 가문을 하리마에서 쫒아낸 후 벳쇼 가문 등 하리마 영내의 여러 가문들을 복속시켜 하리마국을 평정하였다.

이후 오토모와의 동맹을 통해 오우치 가문을 포위하는 데에 성공한 츠네히사는 교토 상락을 준비하지만, 오토모가 오우치와 화평을 맺으며 아마고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이 직후 오우치가 이와미를 침략해 이와미 은광을 되찾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비슷한 시기 아키국에서도 친아마고 세력이었던 아키 다케다 가문이 오우치 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아키에서의 세력이 일소되었고, 이 지역에 진출해 있던 하루히사는 이즈모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츠네히사와 하루히사는 곧 아키를 수복하기 위해 친아마고 국인들의 군세까지 끌어모아 아마고 성채들을 공략하는 오우치 군을 공격하는 한편, 당시 오우치 휘하 가문이었던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인 요시다고오리야마성(吉田郡山城)을 포위했다. 그러나 모리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한 오우치 가문의 스에 타카후사의 원군에게 패배하는 바람에, 아키 수복이 좌절되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안가 사망하였다.

츠네히사가 죽은 후 집안에서 구니히사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고, 결국 그 횡포를 견디지 못한 하루히사는 구니히사와 그 휘하 신구토(新宮黨)를 제거했다. 이것은 후세에 소설·기담에서 모리 모토나리의 모략에 의한 내부분열이자 아마고씨 멸망의 큰 원인으로 각색되었으나, 실제로는 신구토 멸망 시점까지도 아마고씨는 상당히 강성했으며 하루히사는 그다지 암군이 아니었다. 아마고씨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보이는 것은 하루히사 사망 후이다.

츠네히사 대에 양자 결연이나 혼인 등으로 이루어진 인척관계가 이루어졌지만 배신을 하였기 때문에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히사 대에서 많은 가신을 숙청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마고 가문에게 숙청당한 이들이 모리 가문에 의지하게 되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아마고 충성파와 숙청당한 구 가신들의 분쟁은 모리가 이즈모를 차지한 후에도 계속되어서 아마고 가문 멸망 후에는 다이묘로서의 아마고 가문을 재건하려는 세력과 모리에 붙은 세력들이 다투게 된다.

3. 기타

늑대처럼 교활하고 영악한 권모술수로 가문의 번영을 가져와 '이즈모의 늑대(出雲の狼)' 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생전에 주코쿠 11개국을 제패했기 때문에 '서국재상' 이라고도 불린다.

전투, 모략, 정치, 교양 등 다방면에 우수했으며 위의 초상화도 자기가 직접 그린 자화상이라고 한다.

게임 모리 모토나리 맹세의 세 화살 등 매체의 영향으로 음험하고 무서운 노인의 이미지로 여겨지지만, 사실 영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사랑받는 영주였으며, 부하들에게 포상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자상한 일면도 있었다고 한다. 기반을 빼앗기고 쫓겨난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의 포상과 배려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부하와 백성들에겐 아낌없이 퍼주고 정작 본인은 한 겨울에도 삼베로 지은 옷 한벌만(여름용 옷) 입고 버텼을 정도. 다른 일화로는 어느 가신이 정원에 있던 나무 하나를 마음에 들어하자[2] 그자리에서 뿌리째 파내서 건네주었고, 그 가신은 매우 놀란 한편 감격하였다고 한다.

워낙 모략에 능하고 주군인 쿄고쿠 마사츠네의 가독을 이은 어린 손자의 후견을 자처했다가 그 아이가 흔적도 없이 행방불명돼서 이즈모를 그냥 먹어버리는 대단히 편리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냉혹한 이미지가 주류긴 하다. 하지만 호족들에게 영 무르게 대한 점이나 무재는 비범하나 방약무인한 구니히사를 방치하고 가신들에겐 못 베풀어서 안달인 것으로 보이는 일화등을 보면 모략가란 이미지답지않게 꽤나 무르고 선량한 사람으로도 보인다.[3] 문제는 자신의 생전에는 비범한 역량덕에 억누르고 있던 문제들이 하루히사 대에 일제히 터져 버린것.

그러나 이런 예로 츠네히사가 사실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속단하는 것은 금물인데, 이는 츠네히사나 하루히사 등의 능력이나 인덕 밖의 문제인 시대적 상황과 전국다이묘란 자리 자체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원래 전국시대 다이묘는 게임이나 영지물에서처럼 한 지역의 통제권을 모두 움켜진 한 지역의 군주와는 거리가 멀고 대부분 그 지역 호족이나 유력 무사, 유력 농민 등 지역 유력자들의 연합맹주와 비슷한 위치였기 때문에 이들과의 협력이나 지지 없이는 독단적인 권력을 휘두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요컨대 츠네히사의 저런 물러보이는 행동의 배경에는 전국다이묘라는 자리 자체가 원래 불안정한 자리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

물론 그 반대로 이 인물을 사악한 인물로 보기도 힘들다. 센고쿠 시대는 친족끼리도 죽고 죽이는 배신이 난무하던 시대라 어느 정도의 교활함이 없으면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빼도박도 못하는 악행인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는 짓도 영지운영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였다.[4] 일본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성(姓)이 주어진 건 메이지 유신을 전후해 근대화가 이루어진 다음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질 수 있었던 건 다이묘나 중앙의 귀족 등 일부 특권계층 뿐이었으며 이들 입장에서 자기 영지의 이름없는 영민들은 식량/군역 셔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만큼 선악의 기준뿐 아니라 인권조차 현대와는 판이한 시대에 어찌됐든 영민들을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단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생각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즈모국에서 아마고씨의 인기는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의 1차 이즈모 상륙 때의 열렬한 호응으로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론 시카노스케의 전술적 미스로 갓산도다성 탈환에 실패하지만.

4. 대중문화 속의 아마고 츠네히사

4.1. NHK 대하드라마 모리 모토나리

일본의 작고한 원로배우 오가타 켄이 엄청난 열연을 펼쳤다. [5]

모리 모토나리의 라이벌이자 가장 큰 인생의 스승. 모리 영내에 기습하러 왔다가 꼬마인 모토나리와 마주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모토나리(쇼쥬마루)가 쏜 장난감 화살을 잡아내며 '강궁을 당길 수 있게 되거든 다시 만나자'라고 한다. 어른이 된 모토나리를 오우치씨와 함께 강력하게 압박하여 모리 가문이 강대세력인 아마고와 오우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게 만든다. 잔혹무도하면서도 고단수의 계략을 구사하는 인물로, 모토나리가 휘하 병사, 가족 및 본인의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보장해서 그것을 믿고 항복한 적의 장수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모토나리가 말리려 하자 스스로 칼을 빼들고 그 장수의 목에 검을 쑤셔넣어 죽이기까지 한다.링크 잔인하고 냉혹하지만, 한편으로는 모토나리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작중의 많은 명대사를 제공하는데, "난 마음씨 좋은 노인으로서 죽느니,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소원이다!"(わしは、良いジジイで死ぬぐらいなら、血飛沫の中で、地獄に落ちるのが本望だ)와 "명장이라 불리는 자들은 모두 악덕과 등을 맞대고 살아간다."(名将と呼ばれるものは、みな悪徳と背中合わせに生きておる) 등의 강렬한 대사들도 그렇고, 모토나리가 평생의 슬로건으로 삼게 되는 "꾀가 많은 자는 이기고 적은 자는 죽는다."도 츠네히사의 대사다.[6] 죽고 나서 할아버지의 존재에 열등감을 품고 역량이 떨어지는 손자 하루히사 때문에 가문이 몰락하게 된다.

4.2.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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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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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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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호죠 소운과 더불어 모략 부분에서 톱클래스.[7] 다른 능력치도 모두 높아서 무력 빼면(무력은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세력 최강) 츠네히사가 가문 부동의 원탑이다. 근데 천상기에선 1534년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데 옆의 오우치 요시타카모리 모토나리에게 허구헌 날 망하는 비참한 다이묘였다. 창천록 PK에서는 캐사기 캐릭터인 소운이나 라이벌인 오우치 요시오키 때문에 밀리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능력이 출중해서 플레이어 실력에 따라 병력 하나 안 쓰고 상대 성을 쓸어먹을 수 있다. 혁신에선 호죠 소운에 이어 지략 2위였으나 천도에선 소운이 대폭 너프되면서 지략 1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능력치 총합은 소운보다 낮다. 하지만 천도에서 들고나온 전법이 귀모 전작에 비해 계략이 대폭 너프된 천도에서도 괴악하기로 이름높은 전법이다.

창조 PK에서 등장했는데 일러스트가 대하드라마에서 오가타 켄이 연기한 아마고 츠네히사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하다.[8] 일러스트의 포즈와 옷은 오늘날 시마네현 갓산도다성 유적지에 있는 츠네히사 동상에서 그대로 따 왔다. 노부나가 탄생 시나리오에서 아마고 가문으로 시작하면 다이묘로 등장하는데 첫 장면부터 반란을 일으킨 삼남을 토벌하도록 한 손자 하루히사가 자기 숙부의 목을 들고오는 범상치 않은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토나리 전국전에서도 종종 등장하는데 모토나리의 거대한 벽 같은 무서운 적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모략의 스승처럼 묘사된다. NHK의 모토나리 드라마에 묘사된 관계를 따 온 듯하다.

4.3. 이야기거리

센고쿠히메 2에 여자로 등장. 하루히사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은거 중 복귀. 어찌된 게 손자인 하루히사보다 더 어리게 나왔다. 오다 노부나가가 어린애라고 불렀다가 죽을 뻔 했다. 도대체 설정나이가 몇살이지?

전국컬렉션에서는 23화에서 유치원생으로 등장. 등장인물 중 나이는 두번째로 많으면서 제일 어리게 나오는게 함정.


[1] 경우에 따라서는 아마고 츠네히사 대신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들어가기도 한다.[2] 츠네히사가 자신의 소유물이 칭찬받으면 못 베풀어 안달인 기행에 골머리를 앓던 가신들이 함부로 칭찬하지 않기로 밀약을 했는데 방심한 가신 하나가 설마 저 소나무를 주진 않겠지 하고 방심해서 아첨한 결과라고 한다.[3] 다만 그것은 츠네히사의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기반이 취약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가 근거로 삼은 산인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농토와 인구가 부족하고 낙후된 지방이었다. 세력이 훨씬 큰 오우치라든지 오우치 멸망 이후 모리씨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단합력 유지가 필수적이었다. 더군다나 아마고 가문은 어쨌거나 가신 신분에서 반역으로 주가를 몰아내고 다이묘가 된 경우였으므로 더더욱 전통적인 권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하들이든 호족들이든 누구든지 주군의 복수를 내걸고 반역을 저지를 위험이 상존했던 것이다.[4] 비사문천을 신봉해 아주 정의롭다는 우에스기 겐신도 인신매매와 약탈을 자행했었다. 수탈이 그냥 기본적인 자금조달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우리가 돼지 저금통에 들어있는 돈을 꺼내기 위해 저금통의 배를 가를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백성들을 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다이묘는 사실상 없었다. 사람 일이라는 게 100퍼센트는 없으니 개중에 백성들을 털지 않은 다이묘가 있을 순 있겠지만 적어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다이묘들 중에선 없다. 돈통에서 돈을 꺼내지도 못하는 물러터진 다이묘가 전국시대에서 살아남기는 불가능했을테니까.[5] 1965년의 대하드라마에서 주연인 히데요시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며, 가장 최근작인 2007년의 '풍림화산'에서는 우에스기 겐신의 전설적 명군사 우사미 사다미츠로 출연했다. 2008년 타계.[6] 실제로는 모토나리가 큰아들 타카모토에게 보낸 서찰에서 나온 말로, 확인된 모토나리의 실제 어록 중 하나이다.[7] 천상기한정으로 지력이 182로 삼국지 시리즈의 초기작 유엽처럼 애매모호한 모사였다.[8] 원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몇몇 무장의 일러스트는 NHK 대하드라마에서 히트한 배우를 본떠서 일러스트가 그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 다른 예시가 다테 마사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