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9:54:05

미와 아키히로

<colbgcolor=#fedbef><colcolor=#000> 미와 아키히로
[ruby(美輪, ruby=みわ)][ruby(明宏, ruby=あきひろ)] | Akihiro Miwa
파일:Miwa_Akihiro-6.webp
본명 마루야마 아키히로 ([ruby(丸山, ruby=まるやま)][ruby(明宏, ruby=あきひろ)], Akihiro Maruyama)
출생 1935년 5월 15일 ([age(1935-05-15)]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업 싱어송라이터, 배우, 연출가, 방송인, 성우, 작가
장르 샹송
활동 1952년 – 현재
신체 161cm
학력 카이세이 중학교 (졸업)
구니타치 음악대학 부속고등학교[1] (중퇴)
소속사 오피스 미와[2]
레이블 킹 레코드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데뷔 이전2.2. 연예계 활동
2.2.1. 데뷔와 커밍아웃2.2.2. 다양한 활동
3. 주요 출연작
3.1. 영화3.2. TV3.3. 성우
4. 미시마 유키오와의 관계5. 여담6.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파일:07akihiro_miwa_1964_yahoo.jpg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비타민제나 영양보조식품은 찾지만 정신을 유지하는 것에는 너무 무관심 합니다. 정신에 있어서 비타민제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문화'입니다.
저서 천성미어(天声美語) 중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배우, 연출가, 방송인, 성우, 작가.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마루야마 아키히로(아명: 신고)이다. 1971년까지 본명인 마루야마 아키히로로 활동했다.

2. 생애

2.1. 데뷔 이전

1935년 나가사키현에서 5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혼을 해서 미와 아키히로의 동생들은 이복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카페 경영을 하는 사람이었다. 카페 이름은 세계(世界). 그래서 다양한 사람을 접하게 되고 이는 연예계 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 20명 가까이 일하던 카페였다. 가게 옆에는 '남좌(南座)'라고 불리는 연극 오두막이 있었는데, 이곳에 어렸을 때부터 드나들었기 때문에 배우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연출 방식부터 대도구, 소품, 의상, 화장법 등을 가까이 볼 수 있었고, 그곳에서는 영화도 상영되어 온갖 전 세계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고. 집 건너편에는 악기점 겸 레코드 가게가 있어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온갖 음악이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왔다고 해서 예술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으로 적성 문화를 장사하지 못하게 되며 부득이하게 금융업으로 전업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어린 시절 가정부를 둔 생활을 지냈다. 1945년 8월 9일, 여름방학 숙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중 나가사키시원자폭탄투하되었다. 이에 형과 가정부와 함께 방공호에 숨었다고 하며, 다행히 큰 상처없이 구조되었다. 그러나 중학생 때 폐결핵을 앓았고, 악성 빈혈을 비롯해 많은 후유증에 시달렸다. 일본의 패전 이후 폭심지 근처에 있던 조부모를 뵈러 갔으나 모두 사망한 상태였고, 원폭으로 인해 집안 재산이 거의 다 날아가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전쟁 이후 아버지의 대부처들이 모두 죽거나 파산해 반환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가난하게 되었고 새어머니도 사망하는 등 불행을 겪었다.
파일:20170827s00041000001000p_view.jpg
파일:6039780314035785729_04.jpg
패전 직후 후루카와 로파 주연의 영화 '우리 아버지(1946)'에 등장하는 가가미 이치로의 보이 소프라노 연기에 충격을 받게 된다. 감동해서 반복적으로 영화관에 다니면서 극중 노래를 다 외웠다고. 이후 바리톤 가수 선생이 가르치는 음악교실에서 본격적으로 피아노와 성악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 미와 아키히로는 카이세이 중학교에 진학한다. 이 학교는 창립자가 프랑스 선교사였기 때문에 영어와 프랑스어가 필수 과목(전시 중에는 적성어로 금지되지만 전후 부활)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기초부터 공부할 수 있었다. 집 앞 악기점에 프랑스어 가사가 적힌 악보가 있어서 점원에게 부탁해서 레코드를 들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가끔 듣던 그 노래가 프랑스 샹송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날 이후 독학으로 샹송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 후인 15살 때에는 가수를 목표로 상경해, 구니타치 음악대학 부속고등학교 다니게 된다. 그러나 이때 친가가 파산해 버렸다. 송금이 끊겨, 1년도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하숙비를 낼 수 없어 살던 아파트도 쫓겨나자 당시 전쟁으로 피해입은 사람들이 많이 자고 있던 신주쿠 지하도와 역 구내에서 살게 됐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시절 상급생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너 재즈 부를 줄 알아?'라는 권유를 받았고, 이 일을 계기로 연합군의 군인들 상대로 재즈를 불러 돈을 벌게 되었다.

2.2. 연예계 활동

2.2.1. 데뷔와 커밍아웃

파일:attachment/미와 아키히로/miwa5092a.jpg
1957년의 미와 아키히로 커밍아웃 당시
1952년 미와 아키히로는 커피숍이나 게이바의 바텐더로 일하는 등 아르바이트에 종사하며 일당을 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분이 있는 학생으로부터 "이번에 와세다의 찻집에서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의 타치바나 카오루 씨가 샹송 콘서트를 하는데 견습 출연으로 노래를 불러주지 않겠느냐"는 부탁을 받았다. 이 공연에서 타치바나 카오루에게 인정을 받았고, 이대로는 아깝다고 생각해 긴자에 있는 샹송 찻집 '긴바리(銀巴里)'[3] 를 소개받았다.[4] 일본 최초의 샹송 찻집인 긴바리와 전속 샹송 가수로 계약을 맺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한다.
파리에서는 문화인과 예술가들이 모이는 카페가 문화의 발신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잡지에서 읽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긴바리'도 그런 가게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나카무라 칸자부로(中村勘三郎) 씨가 에도가와 란포 선생님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재미있는 아이라고 마음에 들어하셨고, 그 후 바로 미시마 유키오 씨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선생님도 오셨습니다. 오카모토 타로(岡本太郎) 씨도 단골로 오셔서 파리 지붕 아래 같은 걸 잘 불렀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문화인분들이 오셔서 딱 발단하고 지적인 토론을 즐기고 계셨습니다.
미와 아키히로 #
미와는 긴바리에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듯한 에도 시대의 소성(小姓) 패션으로 유명해졌다. 또한 이곳에서 미시마 유키오, 에도가와 란포, 테라야마 슈지, 엔도 슈사쿠, 요시유키 준노스케, 노사카 아키유키같은 유명인사와 친분을 쌓았고, 이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그러다가 1957년에는 레코드 데뷔를 하게 된다. 샹송 '메케메케'를 일본어로 커버해 대히트를 기록했다. 중성적인 외모[5]로 샹송을 부르는 모습이 대중들에게 큰 반응을 얻었고, 이 노래로 일약 라이징 스타에 등극해 핫한 가수가 된다. 당시 그는 유니섹스 패션 스타일로 큰 화제를 모았다.[6] 화려한 의상, 그리고 기발한 언동과 함께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참고로 이때 패션은 본인이 직접 프로듀싱했다.

'메케메케' 히트 이후 주간지에서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다. 주간지 기자가 미와에게 '동성애자라고 하면 안 돼요, 매장당할 거예요'라고 말했는데, 미와는 '아니요 적어주세요. 사람을 죽인 것도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일본의 오랜 역사이고 문화입니다[7]'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보수적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마루야마 아키히로를 연예계에서 추방하라'는 내용의 비판 기사가 전국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남자의 썩은 듯한 게이보이'라고 매도되어 낯선 사람들이 돌이나 맥주병을 던지기도 했다. 그 당시엔 게이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심해 살해협박까지 받았다고. 사실 이전부터 게이라는 소문이 많았다고 한다.[8]
늘 투쟁의 연속이었어요. 제가 일본의 패션혁명이라고 할까, "남녀의 성별 따위는 상관없다"고 유명해지자 "여자가 썩은 것 같다든가" 뭐 여러 가지 비난을 받았습니다. 보통 그런 말을 들으면 자책하고 우울해지죠. 하지만 저는 "그럼 넌 뭐야? 어떤 재능이 있어? 얼마나 버니?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라는 대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미와 아키히로, 2020년[9]

2.2.2. 다양한 활동

'메케메케'로 유명해져서 경제적으로 편해진 줄 알았는데 아버지와 형이 요양소에 들어갔어요. 인기가 시들해지고 일도 없어지고요. 아버지나 형제들에게 보내는 돈 때문에 모든 것을 팔아 치운 시기도 있었습니다. 작사·작곡을 시작해 '요이토마케의 노래'를 부르자 대박이 나서, 또 최고조가 왔죠. 그것이 그늘지기 시작하는가 하면, 테라야마 슈지씨가 앵글러(언더그라운드) 연극의 이야기를 꺼냈고, 이것이 대박. 그 후, 미시마 유키오 극본의 '검은 독수리'도 대히트. 그런데 이번에는 병이 났어요.[10] 정이 오면 그 뒤에 반드시 음이 옵니다. 그게 같은 분량으로 서로 다르게 옵니다. 정음의 법칙이죠.
미와 아키히로, 2020년
동성애자 커밍아웃 이후, 인기가 급락하게 된다. 이때 그는 싱어송라이터로 전업하게 된다. 자신만 무대에서 예쁘게 입고 노래하는 것에 미안해져서 탄광마을 아이들을 소재로 한 '보타산의 별(ボタ山の星)', 반전가 '고향 하늘 아래(ふるさとの空の下に)' 등을 작사, 작곡했으며, 화려한 의상을 봉인하고 수수한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완전히 주목받지 못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그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든 상태였고, 일거리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이미지 변화에 팬들은 당황했고 처음에는 전혀 화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노동가와 반전가를 계속 불러 1963년에는 작곡가이자 재즈 피아니스트인 나카무라 하치다이(中村八大)의 도움을 받아 일본 최초로 자신의 작사, 작곡에 의한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또 1964년에는 건축현장에서 땅을 다지는 작업으로 열심히 일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친자애를 노래한 '요이토마케의 노래(ヨイトマケの唄)'를 무대에 올렸다. 역시 이 노래도 직접 작사, 작곡한 자작곡이다.
대표곡 '요이토마케의 노래'
그리고 1965년, 'NET'(현 테레비 아사히)의 '기시마 노리오 모닝쇼'에서 미와에게 노래를 불러달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미와는 이 프로그램에서 '요이토마케의 노래'를 불렀고, 방송 직후부터 방송국 전화로 응원 메세지와 격려 편지가 많이 오는 등 큰 호응을 얻게 됐다. 동성애자임을 공개하고 나서 침체하고 있던 미와가 이 노래를 계기로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이토마케의 노래'가 부적절한 가사로 방송 자제 요청을 받게 된다. 가사에 '토가타'[11]라는 말이 부적절하다고 논란이 되어 정작 TV나 라디오에는 방송되지 못했다. 다행히도 비슷한 시기의 NHK가 이 노래를 불러도 좋다고 승낙했고, 방송 후 역시 큰 호응을 얻었다. 1966년 '요이토마케의 노래'('고향 하늘 아래서'와의 커플링)를 레코드로 발매하자 40만 장을 판매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쿠죠 에이코 씨가 테라야마 슈지 씨와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났을 무렵의 일입니다. 가게에 쿠죠씨가 오셔서 "뉴욕에 있는 테라야마에서 편지가 왔다. 부탁 좀 받았는데 읽어줄래?" 그래서 그 편지를 훑어보니 이런 말이 적혀 있었어요. '지금 이쪽에서는 기성 연극에 싫증이 나지 않고 앙그라(※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연극이나 영화 등의 예술 활동.)라는 소탈한 것이 유행하고 있다. 일본에도 그런 연극을 정착시키고 싶다. '아오모리 현의 곱사등이 남자'라는 연극을 썼기 때문에, 그 주역을 미와씨가 했으면 좋겠으니, 꼭 설득해 주었으면 한다. 만약 그것이 잘 된다면 네가 정말 미와 아키히로와 친구라는 것을 인정해 주겠다.'
미와 아키히로 #
1967년에는 연극 연출가 테라야마 슈지의 전위예술 연극단 '텐죠 사지키'의 하타게 공연 '아오모리 현의 곱사등이 남자'로 정식으로 배우 데뷔를 했고, 이 작품에서 못생긴 노녀를 연기했다. 소속사에서는 모처럼 '요이토마케의 노래'의 히트로 세상이 인정해줬기 때문에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게 됐고, 그의 연극 배우로서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같은 해에 테라야마가 순전히 미와를 위해 써준[12] 연극 '모피의 마리(毛皮のマリー)'[13]에 출연한다. 이 작품은 초연때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14], 테라야마의 연극 중 가장 인기있는 작품 중 하나가 됐으며, 미와의 대표작이 된다. 이로써 미와는 배우로 인정을 받아 테라야마의 작품뿐만 아니라 에도가와 란포 원작·미시마 유키오 각본의 연극 '검은 도마뱀(黒蜥蜴)'[15](1968)과 프랑스 작가 장 콕토 원작의 연극 '쌍두독수리'(1968), 연극 '츠바키히메'(1968), 연극 '마타 하리'(1969)에 출연한다.

1968년 미시마 유키오가 각본을 쓴 연극 '검은 도마뱀'을 쇼치쿠에서 영화화[16]했는데, 후카사쿠 킨지가 감독을 맡았다. 미와는 이 작품[17]에서 여배우로 주연을 맡았다. 이 작품에 미시마 유키오가 카메오로 잠깐 출연한다.[18] 이 영화는 킬빌에 영향을 주었다. 다음 해에 검은 도마뱀의 외전인 '흑장미의 관'에서도 주연을 맡게 된다. 1970년에는 드라마 '유키노조의 복수'에 주연으로 출연한다. 1970년부터는 라디오 상담 프로그램 '라디오 신상상담'을 담당했는데 25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방송됐다. 또한 50만부가 넘어 베스트셀러가 된 '인생노트' 같은 많은 저서를 내놓기도 했다. 이렇듯 미와 아키히로는 지금까지 연극, 노래, 방송을 중심으로 여러 장르에서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는 롱런하는 연예인이다.[19]

연극 연출가 겸 연극 배우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절친이었던 테라야마 슈지미시마 유키오의 연극들을 주로 연출하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들을 자신이 직접 대도구, 소도구, 미술, 의상, 선곡을 담당하고 있다. 1997년에는 '쌍두독수리'를 재연에서 요미우리 연극 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가수로서는 1984년 파리에서, 1987년 파리 마드리드 슈투트가르트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했으며,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또한 가끔 애니메이션 더빙에 참여하여 한국인에게도 의외로 접할 기회가 있다. 특히 스튜디오 지브리의 기념비적인 히트작 '모노노케 히메'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맡아 일본의 젊은 세대에서도 인지도가 높다. 참고로 모노노케 히메에서 열연을 펼쳐 도쿄 스포츠 영화 대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주로 1세대 오카마로 여겨지며,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도 관심이 있어 LGBT에 대한 강연을 하는 등 # LGBT 권리 증진에 힘을 쏟고 있다. 본인을 여성이라고 인식하지도 않고, 성별이나 겉모습에 구애받지 않는 가치관을 가졌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미와 아키히로/miwa(1).jpg
파일:external/img.barks.jp/600.jpg
검은 도마뱀 주연 당시 1978년 라이브 음반 발매 당시
연예계에서는 주로 여장을 하고 출연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여성이라고 여기지는 않으며, 성전환수술은 일절 받지도 않았고 받을 생각도 없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대중은 '여성이 아니다=남성이다'로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그럼 남성이냐"는 질문에는 '남자든 여자든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했다.한 쪽으로 정체화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인 듯 하다. 그 자신이 확답을 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서구에서는 성전환을 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로 인식되기도 하며, 드랙퀸 음악가 테레 템리츠는 "미디어가 주목하는 것은 성전환수술을 통해 완전무결한 여자가 된 이상상 뿐. 트랜스젠더가 반드시 호르몬 주사나 수술과 동일시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미와는 스스로를 통해 체현하고 있다."고 평했다.

2012년 NHK 홍백가합전에 처음으로 출장했는데, 이때 역대 최고령 출장 가수 기록을 세웠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4년 연속으로 출장했다. 2015년에 80세의 나이로 출장해 최고령 타이틀 기록을 또 갱신했다.

2018년 도쿄도 명예도민 칭호를 받았다. "전후의 일본에 「젠더」를 초월한 생활 방식을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오랫동안 무대·영화·텔레비전·강연·저작과 다방면에서 활약해 왔다"라는 선정 이유다. # 미와는 상을 사퇴하려고 했는데 "나 같은 반역만 해온 사람한테 왜요?"라고 물었더니 "만장일치로 결정됐으니 받아주세요"라고 해서 받았다고 한다.

2022년 NHK에서 방송 문화의 발전의 영향을 끼친 인물에게 수여하는 공로상격인 방송문화상을 표창했다. #

3. 주요 출연작

3.1. 영화

  • 여자라는 것 (女であること:1958)
  • 개미 거리의 마리아 (蟻の街のマリア:1958)
  • 신혼열차 (新婚列車:1959)
  • 사냥꾼 일기 (猟人日記:1964)
  • 검은 도마뱀 (黒蜥蜴:1968)
  • 흑장미의 관 (黒薔薇の館:1969)
  •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書を捨てよ町へ出よう: 1971)
  • 일본인의 배꼽 (日本人のへそ:1977)
  • TAKESHIS' (2005)

3.2. TV

  • 긴자의 산적 (銀座の山賊 : 1962)
  • 프로 (プロ:1963)
  • 플레이 걸 (プレイガール:1969)
  • 유키노죠 변화 (雪之丞変化:1970)
  • 비정의 라이센스 (非情のライセンス:1973)
  • 풀이 타오르다 (草燃える: 1979)
  • 요시츠네 (2005) - 키이치 호겐[20]
  • 하나코와 앤 (2014) - 나레이션
  • 목숨을 팝니다[21] (2018) - 나레이션

3.3. 성우

4. 미시마 유키오와의 관계

파일:a70c2c0dd24acf84fc55fda9434e7927.jpg

미시마 유키오와 미와 아키히로의 첫만남에 대해 쓴 기사[22]

미시마 유키오와 연인 관계였다는 설로 퍼져있지만 정확히는 미시마가 정식으로 커밍아웃을 한 인물도 아니었고 미와 아키히로의 증언을 보면 둘은 우정적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시마 유키오는 본인의 커리어와 별개로 일명 미시마 사건으로 유명한 극우적 성향의 소설가인데 미와 아키히로는 이와 반대로 반자민당파인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애인이 아니라는 의견이 크다. 물론, 정치 성향이 정반대인 사람끼리 연애하는 경우는 꽤 있는 편이지만 둘이 동성 연인 관계였다는것이 확증된적이 없다. 본래 허약한 체질에 왜소한 몸이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팔뚝을 보고 미와 아키히로가 장난삼아 놀리자, 빡친 미시마가 그때 이후로 미시마 유키오는 헬스로 몸을 단련해서 근육질의 몸을 만들었고, 그 몸으로 화보 촬영을 해서 달라진 몸매를 과시하고 다녔다. 이후로도 검도나 복싱 등 다양한 스포츠를 섭렵했다. 다만 미시마 유키오가 미와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그의 활동을 지지해주었던 것은 맞다.

미시마와 관련된 일화에는 재밌는 것이 많은데,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와에 대한 미시마의 플러팅이 주를 이룬다. 하루는 미시마가 "마루야마(미와 아키히로의 본명)군. 당신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반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미시마는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영화 《검은 도마뱀》에 출연한 적도 있는데, 출연 동기가 '검은 도마뱀' 역으로 출연한 미와 아키히로와 키스하고 싶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더불어 미시마는 육체와 관련된 콤플렉스가 많았기 때문에 미와 아키히로가 이를 놀릴 때마다 화를 냈었는데, 미와와 무도장에서 춤을 추다가 미와가 미시마의 어깨, 팔뚝을 만지며 "패드, 패드밖에 없네, 미시마 씨 어디 있나요??"라고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미시마는 버락 소리치며 "파트너 교체다, 나는 가겠다." 하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후 헬스클럽에서 육체미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미와 아키히로가 아직 16세 때였다고 한다.

5. 여담

  • 일본에서 영능력자로 유명하기도 하다. 스피리츄얼 카운셀링 프로인 오라의 샘[23]에서 무속인 에하라 히로유키 TOKIO의 고쿠분 타이치와 함께 방송을 진행했다. 요괴나 귀신은 실존한다고 주장하며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은 자신이 느낀 것과 비슷하다며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홍보를 해줬으며 개인적인 교류를 가지기도 했다. 요괴워치도 미즈키 시게루의 뒤를 이어나가는 작품이라고 하며 좋아한다.
  • 한 때 휴대폰 대기화면을 미와 아키히로의 사진으로 설정하면 애인이 생긴다라는 도시전설이 있었으나, 본인 스스로가 “쓸데없는 헛소리 하지 말라”며 한 방에 부정했다.
  •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과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인물인지라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아베 신조와 자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먼저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 "삶은 영혼의 수행의 과정"이라며 "자살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수행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이 되어버린다고.
  • 노년부터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을 하기 시작했는데 왜 그러냐는 질문에 "내 전생이 피카츄라서." 라고 답변했다. 이 때문인지 사람이 CG로 보인다...
  • 자신을 일본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2019년 2월, 뇌경색을 앓았다. 다행히도 증상은 가벼워 불과 두 달 만에 직장에 복귀했다.

6. 외부 링크



[1] 구니타치(国立) 라는 이름과 달리 국립학교가 아니고 사립학교이다.[2] 개인 소속사다.[3] 이 단어의 한국식 음차 '은파리'는 방정환의 수많은 필명 중 하나로 주로 신여성지에 비난성 칼럼을 싣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다만 필명에서의 파리는 곤충을 뜻하며 공교롭게도 발음만 같은 것이다.[4] 신문 지면에서 '미소년 모집!'이라는 광고를 보고 긴바리에 지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본인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5] 당시 언론에서 '시스터 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6] 패션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7] 실제로 일본은 역사적으로 남색이 공공연히 이루어진 나라였다. 미와의 주장으로는 쇼와 시대에 군부가 군대에 남색이 퍼지면 곤란하니 금지시켜놓고 그 군부의 후손들이 정치인이 되어 그걸 그대로 유지해서 일본에서 동성애가 사회에서 금기시되고 죄악이 된 것이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일본에서 동성애가 금지된 건 단 100년 뿐이며 이 정도로 오랜 시간 동성애를 관대하게 인정했던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8] 기이하게도 남성의 여장 컨셉은 1970년대에 접어들며 주로 긴자 일대 유흥가에서 미소년들이 피로함으로써 그 자체로 하나의 스타일로 인정받았으며, 이는 성 정체성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가수 피터의 경우 그의 데뷔곡이 일본레코드대상 최우수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9] 기사 출처[10] 40대 초반에 미만성 범세기관지염을 앓았다.[11] 건설업 종사자를 비하하는 단어(도카타 등).[12] 각본 집필 단계에서 주연을 미와 아키히로로 확정하고 썼다고 한다. 테라야마는 미와의 연기력에 감탄해 오직 그를 위한 작품을 2개나 만들어 줬다.[13] 미와는 주인공인 남창 마리를 연기했다. 남자 배우가 여장을 하고 연기하는 여장극이다.[14] 일본 연극계에서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작품으로 회자된다. 1967년을 시작으로 2019년 현재까지도 상연이 계속되고 있으며, 미와 아키히로는 주연뿐만 아니라 연출, 미술까지도 담당하고 있다.[15] 미시마 유키오는 모피의 마리에 큰 감명을 받아 미와 아키히로에게 연극 '검은 도마뱀'의 주연을 의뢰했다고 한다.[16] 1962년 다이에이에서도 영화화했다.[17] 원작은 아케치 코고로가 나오는 추리소설이지만 미시마 유키오는 탐미주의를 담아서 온갖 에로신으로 가득하고 추리는 뒷전인 영화를 만들어놨다. 그래서 미와 아키히로의 연기는 전설이 되었지만 영화의 평은 그저 그렇다. 심한 평 중에는 미시마 유키오가 미와에게 야한 짓을 시키고 싶어서 만든 영화라는 소리까지 나온다.[18] 출연한 이유가 "미와 아키히로와 키스하고 싶어서"였다나.[19] 아래 리스트에는 영화나 드라마 리스트가 많은데 사실 미와 아키히로가 정말로 인정을 받는 예술 분야는 연극이다.[20] 교토 쿠라마데라에서 살며 샤나오라고 불리던 어린 시절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히에이 산의 텐구에게서 병법을 배웠다는 전설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다. 작중에서는 추격군을 도술로 바람을 일으켜 내쫓는 등 병법가라기보다는 도사에 가까운 이미지로 등장한다.[21]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화했다.[22] 글을 쓴 사람은 미시마 유키오 연구가 오카야마 노리히로(岡山典弘)다.[23] 연예 문화 스포츠관련 인물들이 게스트로 출연하여 에하라가 오라의 색으로 성격을 알아맞추거나 전생을 알려주거나 수호령에 대해 알려주며 현재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름 치유계 버라이어티 방송으로, 한동안 스피리츄얼 붐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2008년 종영. 이 방송에서 미와는 나름대로 명언을 많이 남겼는데, 한국과 중국은 일본처럼 서양 문물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진중하고 예절바르지만, 일본은 서양의 슬럼 문화도 함께 받아들여 슬럼화가 진행되어 문란해졌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외국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들이 매우 피상적이고 한정적임을 고려하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