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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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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이름 김대건(金大建)
아명(兒名) 김재복(金再福)
보명(譜名) 김지식(金芝植)
세례명 안드레아
생몰년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향년 만 25세)
출생지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송산리[2]
가계 김해 김씨 안경공파 13세손[3]
시복 1960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축일 7월 5일[4]

1. 소개2. 생애
2.1. 어린 시절2.2. 신학교
2.2.1. 신학생 선발2.2.2. 신학공부2.2.3. 신학공부2.2.4. 순교하였으니...
2.3. 순교2.4. 순교 후
3. 트리비아4. 관련 문서

1. 소개

김대건은 조선 최초의 가톨릭 사제(신부)로,[5]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성 피에르 모방 신부의 천거로 마카오에서 유학하며 신학을 공부해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였으나, 단 1년의 사목생활 끝에 붙잡혀 군난을 받고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1846년, 병오박해). 1984년 한국의 동료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임해군,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이며 안경공 김영정의 증손인 해녕 부원군 김희철의 동생 김희현의 9대손이다.

집안 대대로 가톨릭 집안인데, 그의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을 이어왔고 증조할아버지, 큰할아버지, 아버지(1839년 기해박해)가 순교했다.

충청도 솔뫼[6](현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태어났으나 출생 몇 년 만에 가족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지금의 미리내 성지 인근 은이공소)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인 모방신부가 은이공소에 왔을 때(1836년)에 세례를 받았다.

2.2. 신학교

2.2.1. 신학생 선발

모방 신부는 선교지의 주민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교육하고 성직서품을 주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전통에 따라 신학생 셋을 선발했다. 당시 선발기준은 1. 세속화되지 않은 16세 미만 2. 부모가 가톨릭 신자인터라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배운 사람일 것 3. 당사자가 성직자가 되려는 뜻이 있어야 함을 만족해야 했고, 조선 가톨릭 교회의 사정을 이해하는 정하상 바오로의 도움을 받았다.

2.2.2. 신학공부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신학생은 부친과 함께 모방신부가 숙식하던 정하상(바오로)댁에 도착했으며, 이중 김대건은 두 신학생보다 6개월 늦게 한문, 라틴어를 배웠다. 16세 때인 1836년 12월 평신도 활동가들인 조신철, 정하상, 이광렬, 1834년에 입국하여 조선 가톨릭교회에서 교우들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헌신적으로 활동한 유방제 신부와 함께 중국과 조선의 국경을 출발했다. 중국인 안내원들이 옆에서 돌보았고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는 명나라 시대부터 포르투갈의 영구 임대 영지였기 때문이다. 한국화가인 이우범 화백은 계몽사 어린이그림위인전기 김대건 편의 삽화를 그릴 때에, 중국 난징[7]의 아름다운 봄을 그려넣음으로써 이들의 여행이 꽤 오랜 시간(6개월)이 걸렸음을 말하고 있다.

2.2.3. 신학공부

중국 마카오까지 가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받았다.[8][9]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프랑스어, 라틴어, 신학, 서양철학 등을 가르쳤으며, 신학생들은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산책하면서 견문을 넒혔다. 최방제 신학생이 본이 될만큼 성실히 공부하다,1837년 11월에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위열병으로 죽는 비극을 겪기도 했지만, 꾸준히 공부를 해나갔다.

2.2.4. 순교하였으니...

1845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1년 1개월 만에 순교했으니, 그가 밟아온 사제의 길을 세속적 시점에서 바라보면 매우 안습하다.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반영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사제로서의 삶뿐만이 아닌, 정신적으로라도 살아갈 수 있었던 일말의 기회조차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순교 자체가 성인으로서 기적이기에 교황 성하로부터 영광스러운 성인품에 오르셨다는 것이 위안이다.

2.3. 순교

김대건은 용인(龍仁) 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에 들어가서 양교(洋敎)를 배우고, 계묘년(1843년)에 현석문(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10]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헌종실록》13년.

이 말하기를,
"김대건(金大建)의 일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하자, 권돈인이 말하기를,
"김대건의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교(邪敎)에 의탁하여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의혹하여 현혹시키고 선동하여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술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고, 스스로 사학(邪學)을 칭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공동(恐動)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법(按法)하여 주벌(誅罰)하지 않으면 구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에 알맞고, 또 약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헌종실록》

조선교구 2대 교구장으로서 김대건과 같이 상해에서 라파엘 호를 타고 충남 강경을 거쳐 입국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할 것을 지시했다. 김대건 신부는 중국 어선들이 조기잡이를 위해 조선 해안에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고,1846년 6월 5일,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한 조선 지도와 편지들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었는데, 해주 감영의 조사로 천주교 신부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된다. 이후 김대건 신부의 죄목은 '혹세무민'과 '청나라 밀입국' 혐의를 씌웠고 최종적으로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1846년 프랑스 해군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1839년 기해박해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된 사건에 항의하는 서신을 전달했는데, 조선 정부는 김대건 신부를 통하여 프랑스와의 외교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신부는 라틴어, 중국어, 프랑스어 구사[11]가 가능한 엘리트였고 당시 조선 팔도 통틀어 이런 인재는 전무후무한 수준이었기에[12] 국가적으로도 상당히 쓸모있는 인재였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조정 관리들 앞에서 즉석에서 깃털펜을 만들어 가늘고 꼬부랑대는 서양 글자 필기체를 능숙하게 써 보이자, 조정 관리들이 마술 보듯 신기하게 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관리들 대부분은 철펜이나 깃털 펜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으로 그 가늘고 꼬부랑거리는 서양 글자를 쓰는 능력자들의 집합체인 줄 알았다고.[13]

조정 내 몇몇 대신도 그 능력이 너무나도 아깝다고 하여, "천주교만 버리면 살려줄 뿐 아니라 벼슬도 내리고 후한 보상을 하겠다"면서 설득해 보았지만 그가 결사코 거부했다. 다만 배교는 거부해도 조정에서 프랑스와의 협상을 요청해 오면 그 일은 협조할 생각이었는데, 천주교 사제 신분으로 조선 정부를 대신하여 프랑스와 협상을 좋게 이끌어 내는데 성공만 한다면 천주교 공인까지는 몰라도 천주교의 이미지가 올라갈 건 확실하니 김대건 신부로서도 해 볼 만한 일이었던 셈.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자신들의 입장이 담긴 종이 쪼가리만 휙 던져주고 사라져버려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조선 정부도 어쩔 수 없었는지 배교를 다시 권했으나 거부하자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져,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 형장에서 다른 신자들처럼 참수를 당하며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에는 강화도 조약 체결 전까지 흥선 대원군이 다시 한 번 쇄국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2.4. 순교 후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가경자로 선포한 것을 시작으로,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 때문에 그의 이름 전체를 다시 세례명으로 쓸 수 있다. 이 경우 본명인 '대건'과 세례명인 '안드레아'를 모두 합쳐 세례명으로 쓰기 때문에 홍길동이란 사람이 이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으면 교적홍길동 대건 안드레아라는 식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것은 본명을 갖고 있는 한국 출신 성인의 경우엔 모두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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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사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당시 17세의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 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 순교 40일이 지난 후에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내는 데 성공. 그리고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밤에만 걸어서 닷새 만에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現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도착하여 무사히 안장시킬 수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 오늘날의 미리내 성지이다.

참수된 후 신자들이 수습한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으로 방부 처리한 후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 두개골의 측정치를 이용하여 생전 모습을 3번에 걸쳐 복원하였는데, 흔히 알려진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갸름한 서양형 얼굴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미리내 성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경당 바로 밑에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아래 턱뼈는 미리내 성지 내의 조그만 성당인 성 요셉 성당 제단 아래에 모셔져 있으며,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분리안치, 기타 여러 뼛조각들도 성유물로 전 세계에 산재되어 있다. 또한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대성당 및 이천시 어농성지 성당에도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3. 트리비아

전국에 있는 대건중학교, 대건고등학교들은 바로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학교이다.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논산시에 있다.) 당연히 가톨릭 계열 미션스쿨. 그 외에도 예수회 재단인 서강대학교에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딴 건물인 김대건관이 존재한다. 몇몇 미션스쿨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수호성인으로 지정하는 경우도 있다.[14]



평화방송에서 김대건 신부의 삶을 조명한 특집 드라마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명동성당 왼쪽 부제대에는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성상이 김대건 신부를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목에 건 영대가 가슴 앞에서 평행하게 내려와 신부임을 알 수 있고 둘째, 오른손에 펼쳐든 두루마리에 적힌 글귀가 '교우들 보아라'로 시작하는데 이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 전 교우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4. 관련 문서


[1] 심지어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에도 김대건 신부를 그린 이 성화를 낯설어 하면서 “신부님이 마카오에서 유학해서 중국 복장을 한 것인가?”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 복장은 가톨릭 사제의 정복인 수단을 풀 세트로 갖추어 입은 성인의 모습이다. 머리에 쓴 모자는 중국 모자가 아니라 비레타라고 하는 사제 정식 복장에 포함된 모관이다. 안타깝게도 현대 한국의 일반 사제들은 잘 쓰지 않고, 로마 정도에나 가야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성화를 대신 쓰곤 한다.[2]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솔뫼성지)[3]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조부 김택현(金澤鉉), 아버지 김제준(金濟俊)이 각각 경파(京派) 16세손, 17세손, 18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4] 모든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 성인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축일[5] 한국 천주교 사제 인명록에 등재된 수품 번호에서도 당연히 1번을 받았으므로 대한민국에서도 최초의 사제로 인정된다. 이렇다 보니 김대건과 동기이자 한국의 2번째 천주교 신부로 기록된 최양업은,[15] 김대건보다 실제 활동을 통한 업적은 더 많음에도 인지도 면에서는 다소 뒤지는 편이다. 한국 천주교에서 김대건을 의 순교자라고 부르고 최양업을 의 증거자라고 부르는데, 최양업이 순교한 김대건의 몫까지 도맡아 하느라 결국 과로로 선종한 걸 보면, 땀의 증거자라는 말이 그냥 붙은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다.[6] 김대건 신부 생가 일원은 현재 성지로 조성되어 있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찾았을 때 이 성지를 순례하고 '젊은이와의 대화' 행사를 진행했다.[7] 난징대학살 할 때의 그 난징 맞다.[8] 김대건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개명한 것이다.[9] 마카오에서 아편 문제로 인해 대내 정세가 혼란해지자 필리핀으로 피신해 사제 수업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현재 필리핀 마닐라 인근 롤롬보이에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는 성지와 성당이 건립돼 있다.[10] 중국 광동성 아오먼 또는 마카오에 위치했던(1847년 홍콩으로 이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말함.[11] 1842년 세실 함장이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 리브와 신부에게 부탁하여,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과 프랑스와의 외교 시도에 통역으로 참여함.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과 프랑스가 외교를 한다면,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으로 연락이 끊긴 조선 천주교회의 소식을 알 수 있고, 선교사 입국을 위한 해로 개척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음.[12] 조선의 대외 관계가 매우 폐쇄적이었기에 당시에 역관들이 할 수 있었던 외국어라고는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골어 정도였고 라틴어, 프랑스어는 접해본 이도 없었다.[13] 당시엔 훌륭한 서예 능력은 곧 인신 수양의 결과이자 선비로서의 자질이요 업무에 필요한 핵심 능력이었으니, 그 가늘고 조그만 서양 글자를 붓으로 쓴다고 생각했다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14] 오천중학교에 김대건의 이름을 딴 성 김대건관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