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2 02:48:24

성녕대군

시호 변한 소경공(卞韓 昭頃公)
군호 성녕대군(誠寧大君)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이름 이종(李褈)
부인 경녕옹주(敬寧翁主)
부왕 태종대왕(太宗大王)
모후 원경왕후
생몰년도 1405 ~ 1418

1. 개요2. 생애3. 사후
3.1. 태종의 안타까움3.2. 관련자 처벌3.3. 후사
4. 유적5. 기록6. 여담

1. 개요

본명은 이종(李褈). 생몰년대 1405 ~ 1418.

원래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제7남이지만, 양녕대군 위의 세 아들은 모두 일찍 죽어 실록속 태종의 회상으로나 등장하는지라 실질적으로는 4남이다.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생존한 4명의 아들 가운데 막내로서, 양녕대군효령대군충녕대군의 친동생이다.

쇠고기와 닭고기를 좋아했다 하며 제사 지낼 때 쓰라고 언급했다는 기록도 있다.

2. 생애

태종과 원경왕후가 40세 가까운 나이에 낳은 막내 아들이었다. 당시에는 이 나이면 손주를 보고도 남았고,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늦둥이였던 셈이다. 어렸으나,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용모가 아름답고 행동거지가 공손했으므로 태종원경왕후가 매우 사랑하여 항상 궁중에 두고 옆에 떠나지 못하게 했다. 결혼한 뒤에도 궁중을 떠나지 않고 지냈다. 근데 2년도 안 되어 요절[1]

12세에 창녕 성씨 좌찬성 성억의 딸과 결혼했다. 그런데 신부를 맞이하러 궐을 나설 때, 굴레 위에 있던 모식(毛飾)이 말 앞에 떨어져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이에 관계된 신하들은 태형과 파직을 당했다.

1414년 대군에 봉해졌으며, 부인은 경녕옹주(敬寧翁主)에 봉해졌다. 품계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어린 나이에도 총명하고 태도가 단정하여 태종에게 총애를 받았다.

1418년(태종 18년) 1월 26일에 완두창(홍역)에 걸렸다. 성녕대군이 위독하게 되자 태종은 국사를 며칠간 돌보지 않으며, 옷을 벗고 잠을 들지 않고 수라를 들지 못할 정도로 걱정하며 흥덕사에 기도를 올렸다. 이 때 충녕대군은 의원 원학(元鶴)과 함께 의서를 보며 친히 약을 썼기 때문에 그 지성에 모두 감복하였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이 무렵에 활쏘기를 하고 놀았던 것 같다.(…) 나중에 애첩 어리의 일이 들통나서 양녕이 크게 혼날 때 태종이 "성녕이 죽었을 때에 궁중에서 활쏘는 놀이를 하였다니, 동모제(同母弟, 동복 동생)의 죽음을 당하여 부모가 애통하는 때에 하는 짓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결국 14세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태종은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3. 사후

변한 소경공(卞韓 昭頃公)으로 추증되었다. '변한(卞韓)'은 봉국(封國), '소경(昭頃)'은 시호, '공(公)'은 공작위를 뜻한다.

성녕대군의 묘 부근에 암자 대자암(大慈菴)을 지어서 불사(佛事)를 거행하였는데 태종, 세종 시대에 매우 불사가 성대하게 벌어졌다고 한다.

3.1. 태종의 안타까움

성녕대군이 죽고 나서도 얼마동안 태종은 수라를 들지 않았으며, 태종과 왕후가 35일 이상 고기반찬을 먹지 않을 정도로 슬퍼했다. 왕과 왕비가 식사를 하려 하지 않아도 안위를 위해서 아랫사람들이 어떻게든 드시라고 간청하는데 이만큼 수라를 소홀히 했다는 것은 정말로 슬픔이 컸다는 것이다.

성녕대군이 죽고 나서 1달 뒤인 1418년 3월 4일, 태종은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을 부르고, 두 대군으로 하여금 귀신의 이치를 묻게 했다. 변계량은 "귀신은 본래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제사 지내면 와서 흠향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이 있으면 그 귀신이 있고, 그 정성이 없으면 그 귀신이 없는 것이니, 내가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귀신은 나의 정성과 공경에서 이루어져 와서 감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태종은 그 설이 불교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사관이 이는 성녕대군의 죽음에 비통하여 이런 물음을 한 것이라고 기록해 두었다.

그 후에도 태종이 성녕대군을 종종 언급한다.
죽은 자식 성녕은 우리 가문에서 얼굴을 바꾼[2] 아이였다. 매양 중국의 사신에게 술을 청할 때에는 중국 사신 황엄 등은 주선하는 사이에 주의하여 보고 심히 그를 사랑하였었다. 장차 성취시켜서 노경을 위로하려 생각하였는데, 불행하게 단명하였으니 무엇으로써 마음을 잡겠느냐? - 3월 6일 기사
조말생을 불러서 이야기 하면서 나온 말인데, 바로 앞에 세자가 불의하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내가 인덕궁(仁德宮)에 가려는데, 성녕(誠寧)의 집이 길가에 있으니, 이를 보면 반드시 애훼(哀毁)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나는 진실로 너희들이 나를 조소할 줄 알지만, 그러나 차마 볼 수가 없다. - 태종 36권 18년 8월 1일 (무인) 2번째 기사 / 임금이 인덕궁에 나아가 기거하다. 경복궁에 환행하다.
대언 성엄이 술을 올리니, 상왕이 말하기를,
“너를 보니 성녕(誠寧)이 생각나는구나.”
하며,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성씨 일문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견줄 만하다.”
하니, 엄은 성녕대군(誠寧大君) 부인 성씨의 백부이다.
세종 1권, 즉위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10월 28일(갑진) 1번째 기사
억(抑)의 딸이 성녕대군(誠寧大君)의 부인이 되었는데, 태종(太宗)이 성녕(誠寧)의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여 일찍이 세종(世宗)에게 부탁하기를,
“성씨(成氏) 일족은 공신의 예로 대접하라.”
하였다. 이 때문에 대우가 특별히 달랐고 은총과 권애가 우악(優渥)하였다.
성억의 졸기

3.2. 관련자 처벌

병세를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해서 의원 양홍달(楊弘達)이 파직되는 처벌을 받았다.

이때 궁내에서 병을 고친다며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굿을 한 보문(寶文)이라는 무녀가 있었는데, 성녕대군이 죽게 되자 창질의 병에 술과 음식으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서는 안되고, 굿을 잘못 했기 때문에 이런 변이 있었다는 말이 나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보문은 장형에 처해지는 형벌을 받아야 했는데, 형조의 관리가 이를 적당히 넘어가려 했다. 이 사실을 성녕대군의 시종인들이 알고 찔러서 보문은 형벌을 받고 형조의 관리들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 유배되고 만다.

보문은 지방에 유배되게 되었으나, 외방에서 사술을 쓰면 외방 사람들이 홀려서 복종할 것이라는 논의가 있어서 울산의 관비로 강등되었다. 그런데 미처 가기도 전에 성녕대군을 모시던 사람들이 보문을 쫓아가서 구타하고 살해해 버렸다.

당시 조선 초 시대, 왕실의 치료법은 무당이 병세의 징후를 보는 미신과 의원이 병을 치료하는 과학이 공존하는 형태였는데, 태종은 자식인 성녕대군과 경안공주가 이러한 치료법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남에 따라 의학에서 미신을 배척하게 되었다.[3] 초지종에 대한 국가지원이 끊기고, 무당 없이 병의 징후를 과학적으로 따지고 치료하는 의술을 도입한 명의 편작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조선 초기 의학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3.3. 후사

어려서 사망한 탓에 후사가 없어 친형인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양자로 들어가 후사를 이었다.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죄인으로 몰려 사망하자,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인 성녕대군의 처 성씨도 연루되어[4] 경주로 유배되었다. 이 때문에 세조의 패륜 행위가 한가지 더 추가된다. 성씨가 아무리 세조의 정적인 안평대군의 양어머니라지만, 세조에게도 엄연히 친숙모이다. 그것도 사적으로는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이 가장 아꼈던 사람의 부인이다. 그런 사람을 거리낌없이 폐서인시켜 버린 것. 세조 2년에 방면되었다고 하지만, 생몰년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신원회복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성녕대군의 후사가 끊겼기 때문에, 세조 6년에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이 양자로 들어간다.[5]

4. 유적

고양시에 묘가 있다. 향토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5. 기록

전주이씨대동종약원

6. 여담

태종의 다른 적자 3명이 모두 이름이 꽤 알려진 데 비해, 유독 이쪽은 인지도가 낮다. 요절하는 바람에 남긴 일화도 별로 없는데다가,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지만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기 때문. 위인전이나 드라마 등에서도 잘 나오지 않으며, 기껏 나와 봐야 비중이 한없이 낮다.

그나마 자주 얼굴을 내민 사례가 용의 눈물이다. 배우 허정민[6]이 분했다. 몸이 약하지만 한없이 착하고 어진 성격으로 효령, 충녕과 함께 공부를 하는 모습을 많이 비쳤으며 양녕대군의 무예에 감탄하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된 이후에는 매번 병석에 누워있는 모습만 나온다. 태종과 원경왕후가 화목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는데, 원경왕후는 이걸 듣고 오죽하면 자식이 우리한테 이런 말을 하냐며 남편을 원망하고 태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1] 나이가 얼마 안되는것도 있지만 원래 몸이 약했다. 때문에 궁궐 밖에 나가서 살 저택을 마련해 두었음에도 출궁시키지 않고 곁에 둔듯 하다. 훗날 태종은 성녕대군 사후에 대군의 사가를 그의 원혼을 위로할 원찰(願刹,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법당)로 개조하려고 했다. 이에 신하들이 대경실색하여 태종을 말리기도 했다.[2] 외모가 형들과는 달랐다는 의미로 이해된다.[3] 사실 동아시아 시대 전반적으로는 이미 한나라 대부터 의학지식을 본격적으로 국가단위에서부터 체계화시키고 있었기는 하였다. 이 당시 국력의 기초는 바로 인구였고, 인구를 늘리는 가장 기초적인 법칙은 사망률을 낮추고 출산율을 늘릴 수 있는 소아와 부인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었기 때문. 따라서 중국은 물론 한반도, 일본, 심지어 베트남에서도 굵직한 왕조들의 공통요소는 바로 국가적인 의서의 편찬인 것이 과언이 아니다. 이는 거꾸로 역사적 의미로도, 지금의 한중일은 물론 북한, 대만등에서조차 동아시아권 의학이 중의학, 한의학의 이름으로 남아있는데 큰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한의학이 중의학과 발전수준을 같이 논할 수 있는 것은 동의보감 이후부터나 가능해진 것이 역사적 상황이다. 환경의 차이로 인해 필수불가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향약의 정리, 또한 체계적인 정리가 이때 이후부터 정립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병학론에서는 중국보다 뒤쳐진 것이 한의학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먼, 즉 무당이나 기도에 의 이에 따라 미신으로 질병을 치료하려 하던 상황이 이어진 것은 아주 간단한데, 왕실도 결국 사람이 구성하는 것이니만큼 자식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는 부모로서 뭐라도 하고 싶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4] 이때 연루된 이유가 사사된 안평대군과 거기에 연좌되어 죽은 그의 아들(성씨의 양손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해서였다.[5] 이런 연유로, 성녕대군파 일부 문중에서 효령대군파 항렬을 같이 쓰기도 한다.[6] 당시에는 아명인 '허민'으로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