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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유격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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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산대 시절2. 조선인민유격대 창설3. 6.25 전쟁 발발4.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5.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6. 지대 개편7. 제1차 대토벌작전8. 소강기9. 지구당 개편10. 남로당 숙청11. 제2차 대토벌작전12. 최후13. 그 이후

1. 야산대 시절

8.15 광복 후 약 1년 정도는 공산당이 합법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서울에 중앙당을 두고, 지역별로 하부 조직을 두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미군정조선공산당 탄압을 시작하였고, 동년 9월 7일 박헌영 등 주요 간부들의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동년 대구 10.1 사건으로 공산활동이 불법화되자 박헌영·리승엽 등 지도부는 월북해 버리고, 김달삼남조선로동당 계열은 지하 활동을 한다. 그런데 북한에서 이미 김일성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으나 박헌영은 없어서 매우 불리한 입장이었다. 이에 남한에 유격대 형식의 무장 세력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후 빨치산이 된다. 초기에는 야산대(野山隊) 라고 하여 그 규모는 미약하였으며[1], 경찰지서나 우익청년단 사무실을 습격하는 정도였다.

애초에 야산대와 행동대는 직접적인 공격의 목적이 아니라 남로당이 불법화된 이후 남로당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고 탄압을 피해 투쟁하기 위해 조직된 성격이 강했으며, 이들이 하는 전투는 방어적인 성격이 강했다. 애초에 그 이상의 투쟁을 시도할 만한 병력과 무기 자체가 없었다. 물론 남로당 뿐만 아니라 이승만에 반대하는 세력은 좌우 무관하게 탄압받았기 때문에 이들 또한 야산대나 행동대에 가담하거나 별도의 유격 투쟁을 시도했다. 물론 이는 적극적으로 정부를 전복하고자 한다기 보다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 어려워서 탄압을 피해 입산한 것에 가까웠다.

남한의 각 도별로 도당이 있었으며, 각 도당을 2,3개 지구로 나누고 한 지구가 몇개의 군당을 운영하여 도당 사령부→지구별 사령부→군당 야산대 체제였다. 군당에는 다시 면당이 있었는데 각 면당은 초모사업, 식량지원등 후방지원을 맡았고 야산대는 군당 직할로 있었다. 야산대의 전투 지휘는 일본군이나 국군준비대에서 군사 경험을 가진 청년 당원들이 맡았다. 이 시기에 야산대는 중앙당 군사부 이중업이 총지휘하다가 체포되었다. 이중업은 이후 탈옥하여 월북하였고 이주하가 책임자가 되었다. 당 조직 외에도 외곽단체인 농맹, 민청, 여맹 등이 있었고 이들 역시 면단위까지 조직되었고, 각 단체별 위원장과 조직책을 두는 등 체계화되었다. 이 당시 이현상은 남로당 간부부장으로 있었다.

이때 남한은 착착 단독 정부 수립이 진행중이었는데 이때 남로당과 야산대에서는 그들의 용어로 '2.7 구국투쟁'이나 '5.10 단선반대 투쟁'을 벌이면서 남한을 혼란스럽게 한다.

1948년 제주도에서 4.3 사건이 일어나 도민 10%가 죽고, 가옥의 75%가 소실되는 미증유의 재난이 발생하였지만, 섬이라는 환경상 육지와 단절되어 다른 지역 남로당과 연계가 되지 않았고, 도망갈 곳도 없어 1년 만에 완전히 진압된다. 그 바람에 6.25 전쟁 시기에도 제주도는 잠잠하였다. 물론 전부 소탕된건 아니고 일부가 남아서 지속적인 유격 투쟁을 하긴 했다. 즉 외부와 완전히 고립되어 다른 지역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는데, 남로당 측도 전혀 예상치 못하게 진압을 위해 14연대가 제주도로 출병 명령을 받았다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1948년 7월 중순부터는 북한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인단 선출에 들어간다. 이는 북한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뽑기 위하여 남한은 직접 투표가 어려우니 간접선거를 위해 3배수에 달하는 선거인을 뽑겠다는 것인데 지하당과 야산대가 투표함을 들고 다니며 '애국인민'들에게 투표를 받아 1080명의 선거인단을 뽑았다. 이들중 1002명이 월북에 성공하여 황해도 해주시에 집결한다. 이어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에 걸쳐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남조선 인민 대표자대회'를 개최한다. 이때 제주도 대표 김달삼등 6명이 올라와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한다. 이어 북한의 선거에 맞추어 25일 남한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일조한다. 북한 정권의 명분만 쌓아준 회의가 끝나자 이들은 잉여화된다.

그러자 이미 월북했던 남로당 지도부에서는 이들을 흡수하기 위한 강동정치학원을 만들어 정치 교육을 시키고 일부는 이후 남파공작원으로 쓰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때 월북했던 선거인단-대의원들이 다시 빨치산이 되어 남하하게 되는 것이다. 군사교관은 월북하여 대의원으로 선출된 제주의 김달삼지리산남도부였다. 이들은 조선인민유격대 제1병단, 제3병단이라는 이름으로 남파되기도 하고 6.25 전쟁 이후 남도부 부대에 남한 대의원 20명이 포함되기도 하는 등 빨치산 대원으로 소모된다.

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후 6연대 반란사건 등으로 이들 남한 정규군 출신자들이 입산하자 야산대의 전투력이 대폭 상승하여 비로소 유격대라고 부를만한 전력이 되었다. 또한 남조선이 해방되었다고 판단하여 양지로 나와 날뛰던 남로당 세력과 이에 동조하는 좌익세력이 대거 입산하여 유격대 인원이 확충되었다. 이 점 때문에 빨치산의 역사를 여순사건 때부터로 보기도 한다.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이때 지하선을 남겨뒀어야 하는데 전부 입산시킨 것은 중대한 과오라고 비판한다. 덕분에 6.25가 터졌을 때 극소수의 빨치산만 남았지 후방을 교란시킬 지하세력이라고 할만한게 없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전향한 좌파 단체인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의 보도연맹원들은 지하세력, 빨치산, 남로당 등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 오히려 살아남은 보도연맹원은 북한 치하 시절에 배신자라며 인민재판을 받았다.

2. 조선인민유격대 창설

1949년 6월 북한에서는 남조선로동당북조선로동당이 합당해 조선로동당을 결성하였고, 동년 7월 남한내 유격대를 지도하기 위해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하였다. 이 당시에는 박헌영, 리승엽이 지도하였다. 또한 남한내 유격 지구를 재편성하였고, 각 지구에 강동정치학원 출신들로 유격대를 편성하여 파견하였다.

● 제1병단 : 이호제[2], 오대산 지구, 49년 초순 남파
정치위원 박치우(학원 정치부장, 남로당계), 참모장 서철(학원 군사부장, 88특별여단파)

지도부는 강동정치학원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고 간부 3인이 중심이 되어 강동학원출신 5개중대 360명을 기간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강원도 인제군으로 남파되어 주변 야산대를 흡수하며 남하하다가 1949년 12월 태백산 일대 광복군 출신의 이성가를 사령관으로 한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이하 태전사) 제8사단에게 포착되어 토벌된다. 약 75% 가량이 사살되고 일부는 북상 도주했으며, 잔여병력 100명은 이호제를 따라 끝까지 남하하여 3병단에 합류.
8사단의 전투에서 이호제가 사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위키백과의 경우 이호제 사살설을 따른다.

● 제2병단 : 이현상, 지리산 지구
- 3연대 : 박종하, 백운산-광양,하동,곡성,구례와여수 일부[3]
- 5연대 : 이영회, 지리산 동부 경상도 방향
- 7연대 : 연대장 대행 조용식, 지리산

남로당 조직지도부장인 이현상이 지역별 야산대 점검차 지리산에 있던 상황중 우연히 여순사건이 발생하였고, 이후 14연대 반란군과 여수-순천 지역, 지리산 일대의 광양, 구례, 곡성 지역 좌익세력을 규합하여 지리산 유격대를 만들어 빨치산 활동을 한다. 여순사건 때 반란군과 좌익동조세력 4천명중에서 진압군을 뚫고 지리산에 입산한 세력은 약 6백~8백명 가량. 그러나 이들도 진압군에게 걸려 개박살났으며 반란의 주역인 김지회, 홍순석는 사살당하고 지창수는 잡혀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례군당 유격대 등이 합류하였다.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전남도당과는 협조관계였는데, 전남도당에서는 중앙당 조직책 김삼룡의 지시로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곡성 5개군당을 묶어 백운산 특수지구당(특각)을 만들어 이현상 부대를 지원했다(특각책 박대수, 오르그 오금일, 선전부장 조용식, 간부부장 정규석, 조직부장 정운창). 이현상은 이 백운산 특각의 위원장 격이었다. 그러나 당 사업은 전남도당에게 맡겨두고 본인은 유격활동에만 전념하는 이원 구조를 유지하였다.

1949년 5월 하순에는 박종하, 이영회, 조용식 부대로 각 백명씩 배치하였고, 이현상이 가장 약한 조용식 부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이후 3/5/7 연대 체제로 재편하였다. 실질 전투력은 3,5연대이며 7연대는 이현상이 직접 이끄는 본부이다. 주로 부상자와 병자 대원을 모아서 후방 사업을 하며, 조용식이 연대장 대리로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병력이 더 줄어 각 연대가 수십명 정도. 3명의 연대장중 이영회만 반란군 하사관 출신이고 박종하와 조용식은 나중에 합류한 지방 유격대 출신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49년 6월 남북 로동당이 합당하면서 빨치산의 성격이 조선로동당의 대남공작 전술의 일환으로 바뀐다. 또한 조직 지도체계도 개편하여 이들 지리산지구를 '인민유격대 제2병단'으로 개편한다. 역시 당사자인 이현상 부대는 이 사실을 모른다.

군경의 토벌에 다 죽을 지경이 되어 더이상 견디지 못해 1950년 6월 21일경 북상을 기도한다. 그리고 7월 23일에서야 덕유산으로 이동중 무주에서 6.25 전쟁 소식을 듣고나서야 산에서 내려왔다. 함께 하산한 병력은 대략 90명 정도. 지리산에도 김금일을 대장으로 부상자 등 70명을 남겨 두었다. 이후 인민군과 합류하고 쉴 틈도 없이 이동하여 8월 1일에는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였고, 이후 대구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한다.

이영회는 국군 14연대 하사관 출신이며, 박종하는 구례군당 유격대장으로 특각에서 일하다가 이현상 부대로 소환되었다.
- 8연대 : 맹0, 조계산-순천, 곡성과 화순일부
- 9연대 : 장금모, 덕유산-무주, 거창, 장수군 일대
다른 자료에는 8/9연대도 보이는데 활동근거지가 달라 이현상쪽 부대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부대가 아닌가 추정된다.

● 제3병단 - 김달삼, 태백산 지구, 1949년 8월 4일 남파
부사령관 : 남도부(하준수), 나훈, 성동구
- 1대대 : 남도부
- 2대대 : 나상일
- 3대대 : 김달삼

김달삼은 이미 제주 4.3 사건으로 악명을 날린 남로당의 고위간부이고, 남도부는 지리산에서 1천명 규모의 야산대를 이끌어 남로당이긴 하지만 북로당이 그를 포섭하기 위해 인민군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둘다 강동정치학원 군사부 교관을 역임하였다.

역시 강동학원 출신 300명으로 49년 8월 안동․영덕 지방으로 침투하였는데 이때부터 ‘동해여단’이라고 자칭하였다.

초기에는 별다른 전투 없이 성공적으로 남파되어 영일군까지 내려와 북한으로부터 중화기를 해상 보급받으며 기세등등하였다. 먼저 이전 여순사건 즈음하여 대구에서 일어난 3차에 걸친 국군 6연대 반란 사건으로, 반란군 80명이 팔공산에 은신해 있었는데 이들과 합류하였다. 다음으로 3병단을 지원하기 위해 9번째로 남파된 100명과 합류하였고, 마지막으로 3병단 이후에 남파된 오대산 지구의 1병단이 국군에게 쫓긴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기 위해 다시 북상하여 1병단의 잔여세력 100명도 합세하게 된다.

이로서 3병단 초기남파 인원 300명+국군 6연대 반란군 80명+9차남파 인원 100명+이호제의 1병단 잔여세력 100명 도합 600명이라는 남파유격대 최대 세력으로 늘어나고 남도부는 부사령관 겸 독립 제1대대장이 된다. 문제는 다른 병단과 마찬가지로 유격전 대신 자꾸 군청 소재지 공격 등 거점 공격을 일삼고 심지어 토벌대에 대한 선제공격까지 나섰다. 1950년 2월 1일영덕군 형제봉에서 국군 제3사단 17연대와의 교전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국군도 130명 사망). 이후에도 3사단 22연대, 25연대와 지속적인 전투로 피해가 지속되었고, 토벌 목적으로 만들어진 태전사는 동년 3월 15일자로 성공적으로 해체될 수 있었다.

3병단 잔여세력은 기록이 엇갈리는데 남한유격사업에 대한 건의 보고를 위해 월북한 3병단 지휘부와 호위병력 60명, 그리고 백선엽의 <실록 지리산>에서 나온대로 "당시 육군정보국의 자료에 따르면 오대산 일대에 약 70명, 태백산 일대에 약 100명, 보현산 일대에 100여명의 빨치산들이 남아 명맥을 잇기 급급했다."라고 나온 것과 엮어 도합 330명이 남았다는 설이 있고, 60명이 월북한 것에 주목하여 '60명만 살아남았다.'라고 보는 설이 있다.

사령관 김달삼의 행적도 엇갈리는데 항목에도 나오듯이 1950년 3월 김달삼이 군경에게 사살되어 목이 따인 것이 일단 정설이고, 이태의 <남부군>이나 노가원의 <남도부> 등에 의하면 김달삼 남도부 등 지휘부와 호위병 60명은 월북에 성공했다고 한다. 일단 월북중인 3월 20일 부사령관 나훈은 8사단(이형근 준장) 336부대에게 포착되어 사살되었다. 이때 김달삼도 함께 죽었는지는 조금 의문이 된다.
어쨌든 3병단 지휘부와 호위부대는 1950년 4월 3일 월북에 성공한다. 남한의 유격활동의 공로로 남도부는 인민군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한다.

그 외에도 합법시절부터 존재하던 남로당 도당/군당 위원회들이 대거 입산하여 유격투쟁을 벌였다. 각 군당 야산대는 50~100명 정도로 도당에는 군사부, 또는 유격대가 만들어지고, 도내를 몇개의 지구로 나누어 지구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각 지구는 몇개 씩의 군당을 지도하였다. 즉 도당-지구-군당-면당으로 이어지는 체계였다.

그러나 이들은 38선의 방어선이 부실해지는 문제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국군 3개 사단이라는 대병력이 동원된 강력한 토벌로 지리멸렬한다.[4] 전남도당의 빨치산의 예를 들자면 초기 약간의 야산대로 시작하여 여순사건의 반란군 14연대병력 천여명이 보강되고 이후 계속하여 남로당 계열의 지하세력이 대거 입산하였지만 6.25 발발 당시 이현상의 2병단은 100명, 전남도당은 겨우 70~80명, 전북도당은 3~40여명 남았을 정도이다. 이들이 이른바 “구빨치”로 이후 빨치산의 간부급이 된다. 남로당 계열의 빨치산들이 6.25 발발전에 거의 다 죽어서 박헌영이 말한대로 전쟁만 나면 20만명의 남로당원들이 후방에서 들고 일어날 것이라는 호언장담은 나가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로동당 서울지도부에서는 지방당에 "결정적 시기가 불원간 도래한다.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각 지방당은 정권접수를 위한 준비를 하라. 또한 인민군이 진격하게 되므로 각 도당은 해방지구를 1~2개 확보하라. 모든 당조직은 군사조직으로 개편하고 결정적 투쟁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49년 북한의 건국 기념일인 9월 9일을 기념하여 9월 투쟁을 벌였다. 이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에서는 동원된 남한 유격대원이 89,900명이고 교전 횟수가 1,330회라고 발표했지만 이것은 남로계가 북로계에 대해 자신들의 전력을 과장해서 주장하는 선전에 가까운 것이고 이태는 실제 병력은 발표의 1/100 정도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나마 이 병력도 9월 투쟁으로 전력이 노출되어 군경에게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어 괴멸당한다.

6.25 전쟁 이후에야 이현상이 빨치산의 상징으로 불리지만, 6.25 이전에는 제주 4.3 사건을 일으킨 김달삼이 빨치산의 상징이었다. 그는 4.3 사건 4개월 후 잠수함을 타고 북한으로 탈출하여 당내에서 최고위직으로 승진하는 등 남로당 계열에서는 상당한 서열이었다. 한편 월북한 남로당원 등을 유격대원으로 재교육하기 위해 1947년 평안남도 강동군에 세워진 강동정치학원이 있었다.[5] 이곳에서는 10차에 걸쳐 2,400명을 남파시켜 유격전을 수행하게 하였다.

이곳에서 교육받은 김달삼 역시 1949년 3월 4차 교육생 300명을 이끌고 안동시, 영덕군 방면으로 침투하였다. 그러나 1차적으로 휴전선을 넘어오다 포착되어 대타격을 입고, 겨우 살아남아 후방까지 침투했어도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로 인해 태백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작살난다. 김달삼 역시 50년 3월에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김달삼모가지잘린골’(...)[6]에서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대부분의 빨치산 문학에 나오지만 50년 봄이 빨치산이 결정적으로 괴멸하는 시기였으며 늦어도 그해 겨울까지는 빨치산이 군경의 토벌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3. 6.25 전쟁 발발

6.25가 일어나기 10일 전에 북한에서는 5~7명으로 된 분조 30개를 특수 임무를 주어 동해안으로 침투시킨다. 이들은 앞서 대규모 침투(강동학원출신의 백여명 단위의 남파)와 소규모 침투(50년도 초 각도 출신자로 3~4명)가 계속해서 실패하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편성되었는데, 그야말로 6.25 이전 최후의 유격대였다.

이와 별도로 박헌영, 이승엽은 월북한 남로당계를 다시 남파시켜 당조직을 수습하여 인민군 남침 때 군중을 호응/궐기시키게 했다. 이들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 서울 : 이중업, 조직지도부책 안영달[7] , 6월 10일 남파
- 충남 : 전남도당위원장 이주상, 도인민위원회 위원장 여운철[8], 6월 초순
- 전남 : 김백동, 도인민위원장 격 이담래, 6월 초순
- 전북 : 도당 조직책 박승원, 6월 초순

이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겨우 목숨을 건진 빨치산들이 하산하여 몇 안남은 지하세력을 규합하고 무산자계급을 선동하여 순식간에 상당한 조직을 만들어 남한 각지를 접수한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이 진주하자 북로당 중앙당부에서는 새롭게 도당위원장, 인민위원장(도지사, 시장/군수), 내무서장(경찰서) 등을 임명하여 조직을 장악해나간다.[9] 겉보기에는 도당위원장은 남한 출신, 부위원장은 북한 출신으로 임명했지만(하부 조직도 부장은 남한 출신, 부부장은 북한 출신), 실제로는 해당 지역에서 끝까지 투쟁하던 지하세력이 아니라 남한 출신이지만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남로당 지하당은 1인자인 총책 김삼룡, 2인자 군사부책 이주하(1905), 3인자 이론·선전부책 정태식 체제였는데 막판에 셋다 잡혀서 김상룡과 이주하는 처형되고 정태식은 징역 20년을 받았다. 그바람에 박갑동이 1950년 4월부터 임시 총책이 되었다. 그런데 6.25가 터지니 임시총책 박갑동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정태식 두 사람을 남로당 기관지인 <해방일보>에 일개 논설위원으로 짬처리 해버린다. 모든 권력을 북에서 파견된 박로당계 + 남로당계에서 월북한사람(박헌영, 리승엽 등)이 차지한 것이다. 반면 형무소에서 풀려난 남로당계(정태식 등), 지하에 숨어 있던 남로당계(박갑동 등), 야산대 활동자(이현상 등)은 별다른 직책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남로당계는 의용군이 되어 전선에 투입되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다.

이때의 각 도당위원장은 다음과 같다.
- 서울시당 위원장 : 김응빈[10]
- 경기도당 위원장 : 박광빈[11]
- 강원남도당 위원장 : 조진성[12]
- 충북도당 위원장 : 이성경, 부위원장 정해수
- 충남도당 위원장 : 남충열(본명 박우헌),[13] 부위원장 유영기
- 전북도당 위원장 : 방준표, 부위원장 조병하
- 전남도당 위원장 : 박영발[14], 부위원장 김선우[15]
- 경북도당 위원장 : 박종근,[16] 부위원장 이영섭
- 경남도당 위원장 : 남경우, 부위원장 김삼홍(본명 김병인)

예를 들자면 전북도당 위원장은 대구 출신의 월북한 남로당원 방준표, 전남도당 위원장은 경북 봉화 출신 월북한 남로당원 박영발이었다. 부위원장, 도인민위원장, 군사부장, 내무서장은 전부 북한출신으로 임명했다. 구빨치들은 그 이하 간부를 맡았다. 어찌됐든 남한 전역에 도당, 군당, 면당이 생기고 행정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전쟁 발발 불과 3개월 전에 농지개혁법이 실시되어 1951년쯤에는 대부분의 농민이 자영농이 되었기 때문이다.[17]

게다가 각지에서 의용군이라며 강제 징모하고, 군량미를 확보를 위해 벼의 낱알까지 세서 매기는 현물세로 인해 인기가 급하락했다. 이에 농민들이 보는 시선도 싸늘해졌다.

의용군의 경우 7월 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전시 동원령을 내렸는데, 남한에서는 초기에는 남로당계로 유격대나 선무공작대 등을 만들어 보냈으나, 7월 6일에는 남한까지 의용군 편성을 지시하여 18세 이상 청년들을 닥치는데로 참가 시켰다. 서울 거리 요소에 민청원이 배치되어 지나가는 청년들을 강제 연행하여 입대 시킨 것이다.

노동당은 현물세로 북한과 마찬가지로 총 수확고의 25%를 징수한다고 했는데 워낙 알랄하여 벼알, 콩알 하나 하나를 세었다. 심지어 뜰에 감나무가 있어 100개의 감이 열렸으면 25개를 바쳐야 할정도였다. 빨치산을 미화한다고 비판받는 <태백산맥>이나 <빨치산의 딸>에서도 이 부분은 확실히 비판한다. 이 곡식의 낱알까지 세서 가져가는 현물세 때문에 빨치산이 인심을 완전히 잃었다.

4.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가 끊긴 인민군이 황급히 북으로 후퇴하면서 3개월 동안의 인민공화국 시절은 끝났다. 각 도당은 초기에는 당황했지만 인민군이 다시 남하할 때를 대비해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벌리라는 지시를 받고 모든 조직을 이끌고 입산한다. 즉 빨치산은 후퇴못한 인민군 부대가 아니라 남한에 조직된 북한의 행정기관들인 것이다.[18][19]

이때의 인민군 전선사령부의 긴급지시 제 6항으로 각 지방당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한다. 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유엔군 상륙 때 지주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시킬 것, 군사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파괴할 것, 산간지대 부락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할 것, 입산경험자 및 입산활동이 가능한 자는 입산시키고 기타 간부들은 일시 남강원도 까지 후퇴케 할 것"[20]

이태의 <남부군>에서는 당시 유격대의 수는 1만명이 넘었다고 하고, 다른 기록들에서는 2만~15만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 인민군(낙동강 전선 말기, 인민군5만+남한출신의용군5만) 상회하는 10만 대군이 나올 수는 없고, 아래에서 언급되는 각 도당 산하 병력들을 합산 해보았을 때 순수한 의미로 유격대원들은 1~2만명 정도 되지 않을까 추산한다. 51년 7월 8일 중앙일보에는 "지난 9개월간 공비사살 155,419명"라는 정부 발표가 실렸지만 자신들의 병력을 과장하는 빨치산 출신자들도 인민군 낙오병을 합쳐도 2만도 안됐다고 한다.

하지만 유격대원외에 도당 산하에 비전투원인 피난민 성격의 노약자들도 상당히 있었다. 이들은 후방지원을 담당했으나 그해 겨울을 못넘기고 대부분 하산하여 항복한다. 잔여세력도 국군의 1차대토벌 작전때 완전히 토벌되어 이후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후방지원 역할보다 전투력도 없으면서 밥만 축내는 존재였다. 유격대원들에게는 자신들의 배를 채울 식량을 구하는 것도 버거운데 이런 다수의 비전투인력의 식량까지 구해야 하니 부담스럽기만 하였다.

이때 구성되었던 것은 중부지역과 제주도를 제외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등 6개 도당이였다.[21] 각 도당에서는 기존의 행정 조직으로서의 도당, 군당, 면당등을 그대로 유지한 가운데 유격전을 전담할 유격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민청과 여맹원들이 대량으로 입산하여 이들이 사실상 주력이 되었다.

유격대는 도당 직속 유격대, 중간 조직인 지구/전구 산하 유격대가 있었고, 군당 차원에서도 수십명에서 수백명의 조직원을 보유하고 있고, 그중 유격대는 많게는 70여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면당의 경우 자체 유격대는 보유하지 않고, 약간명의 조직책과 피난민을 데리고 있었다. 주로 군당과 도당의 유격대 병력 공급원 역할을 하였다. 빨치산은 적어도 1만명 이상에 달했지만 무기가 없어서 극히 취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남한정부 역시 행정력이 부족하여 남한 전역을 접수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일부는 미수복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결국 북한으로 부터 보급이 전무하다시피 한 빨치산의 무기는 거의 모두가 군경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것이였다.

우선 도당의 구조를 보자면
기본적으로 도당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존재하고
산하에 조직부장, 선전선동부장, 로동부장, 간부부장, 농림부장, 경리부장, 기요과장(문서담당, 비서), 당증과장, 보도과장, 통신과장 등이 있다. 주요 부서는 부부장도 있다.
여기에 주권기관으로 도 인민위원회(도청 역할)가 있고 심지어 검찰소장과 재판소장, 도당간부학교까지 있었다.

외곽사회단체로 주병력 공급원인 ‘민청’(남조선민주청년동맹), 여성들로 구성된 ‘여맹’(남조선민주여성동맹), ‘농맹’(남조선농민동맹), ‘직맹’(직업총연맹)이 있다.
모든 도당에서는 도당기관지와 도 인민위원회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북한 통치하에서 행정관청으로서나 존재 가능한 기형적 조직은 거의 좆망 직전에 가서야, 비로서 도당-유격대의 통합이 일어난다. 그전 까지는 어디까지나 별도의 조직으로 존재한다.[22]

각시군 위원장은 대부분 구빨치, 부위원장은 이북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군당’은 병력 공급 및 보급, 지하투쟁을 담당하였다. 최소한 시군당까지는 대부분 시군에 조직되었고, 심지어 면당까지 있기도 하였다.
도당과 군당/시당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지구’가 존재 했는데, 중간 관리자 입장이라 ‘지구당’-‘지구당 위원장’이 아니라 그냥 ‘지구’-‘지구책’이였다. 전남도당의 경우 지구별로 당원 교육을 하는 당학교와 군사교육을 하는 군사학교가 있었다.
유격대의 거점이 되는 산을 중심으로 몇 개의 지구를 나누고 각 지구마다 몇 개의 시군당을 관할하였다. 각 지구별로 ‘지구책’과 ‘부책’, ‘유격대 사령관’이 되는데 실질적으로 빨치산의 중심은 도당과 지구였다. 국군의 1차 대공세로 작살난 이후에는 군당을 운영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아 도당과 지구만 남아 빨치산 활동을 이어간다. 또한 전구 개념도 있는데 지구는 도당에서 관리하는 당조직이고, 전구는 유격대에서 관리하는 무장세력이다. 통상 1지구에 1~2개 전구가 있었다. 전남도당의 경우 6개 지구에 8개 전구가 있었다. 지리산지구의 경우 산하에 구례군당 딱 1개만 있었고, 전남도당 유격대와 별도의 조직인 이현상의 ‘남부군’이 있었기 때문에 전구가 따로 없었다.

도당 산하의 유격대의 경우 총사령관, 부사령관, 정치장교 문화부 사령관, 참모장, 부참모장 후방부장, 책임지도원(도당에서 파견)이 있었다. 각 부서별 산하 부서는 다음과 같다.
총사령부 : 기요과, 선전과, 선동과, 정보과, 대열과[23] 출판과[24], 통신과[25]
후방부 : 병기과, 의무과

각 도당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각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유격대 사령관과 부사령관을 겸임한다.
● 서울시당
위원장 김응빈
인민위원장 이승엽
여러가지 사정상 인천상륙작전은 공공연한 비밀이였다. 이에 서울시당은 미리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당에서는 특수부를 구성하고 각 구역당별로 특수자위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무장을 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지만 전반적으로 9월 27일을 넘기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이후 김응빈이 경기도까지 조직을 총괄하였지만 전선에 가까운 지역적 한계 때문에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결국 김응빈은 강원도로 이동하여 제2지대장이 된다.

● 경기도당
위원장 박광빈
청평, 가평 등지로 이동하면서 노출되지 않은 핵심당원들을 서울로 재투입시켜 파괴, 교란공작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위원장 박광빈은 '현지에서 유격활동'이라는 당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북으로 후퇴하였다고 이후 별오리 대회에서 출당조치 된다.

● 남강원도당
위원장 조진성
여기도 위원장이 임지를 버리고 무단후퇴하여 별오리 대회에서 출당조치 된다.
50년 10월부터 약 3개월 동안 인민군 4군단, 69여단 병력 5천명이 강원도 산악지역에서 국군 수도군단과 50여회 교전 하였으나 빨치산 활동이 아닌 정규전 그자체였다.
위원장이 공석인 상태였고 경북 통보산에 거점을 두었다. 이철이 지휘하는 30~40명의 연락부대가 있었는데, 남파하는 유격부대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군당으로는 인제군인민유격대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군당위원장 김학만이 120명으로 구성되어 도로차단과 함께 고성군 수동면 소재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 충북도당
위원장 : 이성경
부위원장 : 정해수
6개 도당중 최고 약세로 아무런 정보가 없다. 도토리만 주워 먹었다고 한다.

● 충남도당
위원장 : 남충열[26]
부위원장 : 유영기(북로당계, 간부 40명과 함께 북상)
거점 : 대둔산 → 전북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 지산(12월 7일)
백두산부대(320명), 가야산부대(130명), 압록강부대(100명), 청천강부대(100명), 대전부대(대전부대), 대덕부대(130명), 한둔산부대(대둔산 부대? 사령부 직속부대의 이명?)와 사령부 직속으로 공병부대, 통신중대, 정찰중대 등을 두었다. 총원 1천명 가량. 산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 너무 비참한 상황이라 ‘도토리부대’로 불렸다. 이후 지리멸렬하여 통폐합 되었는지 충남북도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27]

● 전북도당
위원장 : 방준표
부위원장 : 임종환(전 서울시당 부위원장)→조병하(북로당계, 도인민위원장)
문화부사령 : 오운식
참모장 : 최의순
군사부장 : 김명권
거점 : 엽운산 → 회문산

도당 보위병단 - 박모?, 참모장 김귀락, 정치위원 외팔이 최태환, 150명
기포 병단 -조철호, 남해여단 잔류병 부대, 100~200명
독수리 병단 - 맹봉, 70명
번개 병단 - 돌진 장성환, 200명
벼락 병단 - 백암 박판쇠, 부사령 강철 박천석
카츄샤 병단 -왜가리 박춘성
땅끄 병단 - 학소(學蘇) 황의지, 80명

극초기에 40명의 중대체개를 개편하여 중대 상위에 병단을 설치하여 7개 병단 체제로 구성하였다. [28] 독수리 병단의 경우 병단 사령부 30명(...)에 병단내 '4중대' 하나 뿐이여서 가장 병력이 적었다. 즉 머리만 다른 병단급이고 몸통은 어린아이라서 최약체로 평가된다. 특히 맹봉의 지도력이 부족해 대개의 전투에서 실패를 거듭해 쫒기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그에반해 기포병단은 1,2,3,5중대로 구성되고 정규군 출신이라 무장이 워낙 좋아 최강으로 불렸다.
장성구, 황의지, 맹봉등 병단장 급은 6.25이후 딱 30명 살아남았다는 구빨치 출신이였다. 그에반해 정규군인 인민군 중좌 최태환은 배척 받아서 임실군당→도당 보위병단→벼락 병단을 거쳤는데 딱히 직위가 없는 객장 신분이였다. 이태의 책에서도 남부군 사령부를 따라다니며 참모대우 받는 인민군 군관 출신 객장이 언급되는데, 구빨치들이 견제하는 목적도 있고, 본래 정규군 출신은 원대를 만나면 언제든지 합류해야 하며 각 도당은 이를 최대한 보장 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황이 반영 된 것 같다. 실제로 최태환은 병단장 장성환의 무시에 화가 나서 본대를 찾아 월북을 시도하다가 군경에게 체포되었다.

노가원의 <남도부>에서는 '황의지의 증언이 신뢰성이 있다고 볼때...'라며 아래와 같은 서술을 한다.
사령관 밑에는 제1정치사령과 제2정치사령이 있었다. 제1정치사령은 전주시당유격대(70명), 김제군당유격대(50명), 임실군당유격대(310명), 순창군당유격대(260명), 완주군당유격대(150명), 익산군당유격대(100명), 금산군당유격대(300명), 진안군당유격대(50명), 무주군당유격대(130명), 장수군당유격대(300명), 진안군당유격대(50명), 무주군당유격대(130명), 장수군당유격대(470명), 남원군당유격대(150명)을 담당하였고,
제2정치사령은 정읍군당유격대(60명), 고창군당유격대(590명), 부안군당유격대(160명)을 담당하였다.
다른 기록들과 비교 해보았을 때 너무 비정상적으로 많은 병력이다. 대략 1/10정도로 줄여서 봐야 할 듯. 정작 황의지의 책에서는 이부분이 없었다. 참고로 이태의 <남부군>에서는 회문산 시절 초기에 7개병단과 임실군당(위원장 호유박, 유격대장 김정기)이 함께 있었는데, 군당중에서는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했으며, 전반적으로 임실군당이 다른 병단과 비슷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이태의 <천왕봉>에서는 임실군당 유격대가 70명이라고 정확히 나온다. 50년 말 임실군당에서 직접 활동한 최태환 중좌의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는 4~50명으로 되어 있다.
즉 노가원의 <남도부>의 자료는 상당히 뻥튀기 되었으며, 임실군당 외에 다른 군당의 전력은 그 이하라는 이야기.

● 전남도당
위원장 : 박영발
부위원장 겸 유격사령관 : 김선우(구빨치, 6.25 직전 잠시 도당위원장 역임)
유격부사령관 : 오금일(구빨치)
거점 : 백아산
총사령부 직속으로 150명 규모의 4개 연대(연대별로 총기는 40정 가량. 나머지는 빈손)와 사령부를 경호하는 보위중대가 있었다. 도당지도부도 약간의 보위부대가 있다.
유일하게 도당위원장과 유격사령관이 분리되어 있었다. 각 군당, 면당 별로 유격대가 존재했고, 지방 세포가 없는 곳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평양에서 방송하는 조선중앙통신으로 로동신문을 자체 발행하여 매일 각 군당,면당 유격대에 배급하고(500부 가량), 남한에서 발행되는 조간 신문이 오후면 도당 사령부에 도착할 정도였다고 한다.

● 경남도당
위원장 : 남경우(뒤집으면 '경남' 즉 가명으로 아무도 그의 본명과 실체를 모른다.)
부위원장 겸 사단장: 김의장(북로당, 청진시 전 인민위원장) →김삼홍
참모장 : 노영호
거점 : 지리산 하봉
인민군의 점령지였던 낙동강 서쪽만 관할한다. 낙동강 동쪽으로는 도당 조직이 형성되지 않았는데, 북한에서 남파된 남도부 부대가 낙동강 동쪽에서 활동 하였다.
인민군 패잔병 집단인 303, 102부대를 ‘불꽃사단’으로 통합. 사단장은 김의장이며 참모장은 함양군 유림면 출신의 노영호였다.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빨치산 자료집>에 의하면 경남도당 유격대는 5차에 걸쳐 개편되었는데 대충 사령관은 안병화(도당 조직부장)와 배명훈(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돌아가면서 맡았고, 정치위원이 김이장(김의장의 오기)이였다. 참모장에 조용구(남도부 부대원으로 남파중 낙오했다가 경남도당에 합류. 이후 도당의 명령으로 남도부 부대 먹으러 감), 전투부사령 이영회(이현상 부대 5연대장으로 낙동강에서 낙오되어 경남도당에 합류), 조직부사령에 노영호(영화 '피아골'에서 군경 추적끝에 죽는걸로 나온다. 이영회 부대 괴멸후 경남 북부에서 남한내 사실상 마지막 빨치산 부대를 이끈다. 여기 소속 대원이 마지막빨치산 정순덕), 문화부사령에 임정택이라고 한다. 기존의 다른 조직편제와 너무 상이하여 다소 의아스럽다.

● 경북도당
위원장 : 박종근
부위원장 : 이영삼(이영섭?)
소백산에 거점을 정하고 유격대 사령관 강철삼, 참모장 김점섭을 임명했다.
제1대대 50여명, 제2대대 50여명, 무전사 장성재등으로 총병력 500명

각 유격부대의 지휘관들은 인민군 낙오병 출신이나 구빨치가 맡았다. 그러나 상당수의 낙오병들은 잠깐 있다가 부대를 찾아가야 한다고 북상하여 교체가 잦았다.
위의 연대/병단은 도당 총사령부 직속부대일 뿐이고, 그 외에도 군당별로 조직된 유격대가 있었다. 주요 군당 유격대는 1개 연대/병단에 준하는 수준의 병력을 갖고 있었다. 1개 도에 속한 군당이 30여개에 달하기 때문에 중간 조직인 지구/전구에 몇 개씩 나눠져 속해 있었다.

약간 주제와 벗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북한에서도 빨치산이 있었다.
● 황해도당 인민유격대
인민위원회 로동부장 백재선 총지휘
처음에는 896명의 세력이였으나 50년 12월께 중공군이 참전하고 인민군의 남하가 예상되자 2,386명까지 늘어났다. 4개 연대로 편성되었고 사령부와 연대, 대대에는 정치위원을, 중대와 소대에는 정치지도원을 배치해서 모든 것을 당에서 통제했다. 각군당별로도 유격대가 조직되어 활발히 활동하였다. 황해도 유격대는 국군의 10월1일 북진에서 부터 중공군의 대공세까지 딱 3개월만 활동하였다.
여담으로 구월산 유격대는 수시로 민가에 나타나 약탈을 하였는데 마을 청년들은 초모사업의 위기에 벗어나기 위해 2~3일 정도 집을 떠났다가 돌아 오곤 했다고 한다. 이때 구월산 인근에 살던 송해선생님께서 여느때 처럼 유격대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님께 "잠깐 피했다 올께요." 하고 떠났다가 생각치도 않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남한으로 내려와버렸다고 한다.

이들 도당 조직 외에도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부대가 있었다.
● 남부군(이현상) : 6.25 발발이후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대구일대에서 유격활동을 하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다른 인민군 처럼 강원도 까지 후퇴했다. 여기서 남로당 2인자 이승엽에게 6개도당 유격대를 지휘할 확대된 권한을 부여받고, 남한 전역의 빨치산을 통솔할 목적으로 다시 남하하였다. 이후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 자세한 것은 후술함.
나팔부대(공격할 때마다 나팔을 불어서. 문화공작대원 한월수가 낙동강 전선에서 노획했다), 남부군단(경찰쪽 기록), 독립제4지대(공식명칭),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자칭)등 다양한 이름이 있었는데 통상 이현상 부대라고 불렸다.

● 동해남부 부대(남도부) : 경상북도 동부 산악지대 활동하였다. 이후 제3지대로 개편한다.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 따르면 6.25 이전 대타격을 입고 월북한 1․3병단의 수십명의 잔여 세력, 회령 제3군관학교[29] 120명, 김상호부대 200명[30], 30연선(沿線) 유격대원 300명[31][32]남한출신 인민위원회 대의원 20명을 통합하여 약 750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 참가했던 성일기를 주인공으로하는 <북위38도선>에 의하면 1•3병단의 극소수의 생존자, 다 죽고 10명남은 김상호 부대, 김무현이 사망하고 27명 남은 김무현 부대, 중국팔로군 출신 조선족 의용군 100명, (38연선부대 출신이자)회령제3군관학교의 보충인력, 남한 최고회의 대의원 20명등 총 300명이라고 한다. 아마도 위의 자료는 남도부 부대와 강정호 부대를 합쳐서 계산하고, 아래의 자료는 별도로 계산 한 것 같다. 6.25 당일 북한 해군의 배를 타고 주문진항에 상륙한 것 까지는 함께 했지만 이후 헤어져서 강정호 부대는 동해안 북부, 남도부 부대는 동해안 남부 부대에서 활동한다.

이후 남도부 부대라고 불리며 이현상과 함께 가장 유명한 빨치산이 된다. 남부군도 명칭이 자주 바뀐 것처럼 이들 역시 제7군단(6.25를 준비하며 붙여진 위장명칭), 766부대(766명이라서 붙인 명칭. 766부대는 오진우가 이끄는 정규군이라는 설도 있다.), 동해 여단(소설 <남부군>), 남한유격대(실록 <남도부>), 팔공산 부대(소속된 국군 반란군 6연대 때문에), 동해남부군(경북도당 연락책 윤인호-가명 나동하의 증언)등 다양한 명칭이 있었는데, 통칭으로 남도부 부대라고 불렸다. 그러나 2001년 성일기가 창녕의 큰아버지집 마당에 묻어둔 기록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는 "동해남부 부대"라고 나온다. 아마도 이쪽이 공식 명칭이 아닌가 싶다.

피난민 행렬에 가까웠던 각 도당세력에 비하면 처음부터 유격전 전문 부대로 양성되어 남파된 유일한 사례.
여기에 낙동강 전선의 제2군단 낙오병 집단 길원팔 부대 700명이 합류하여 위세가 대단했으나, 길원팔 부대는 51년 2월 원주까지 남하한 중공군을 만나 그대로 북상해 버린다. 그대신 남부군과는 조금 다른 루트로 남하 하였던 인민군 경보병 10사단 낙오병 100여명이 51년초에 합류하였다.
길원팔 중장은 이후 지대화 개편때 5지대장으로 임명되어 부하들과 함께 남하였는데, 51년 3월 18일께 안전한 후방인 인제까지 와서 보초 세워놓고 휴식중 인민군 복장을 하고 침투한 백골병단(사령관 채명신 중령)에게 체포된다. 이때 참모장인 외팔이 강칠성 총좌에 호위병, 여비서 중위까지 총 13명이 일망타진당해 채명신에게 끌려가 조사받고 이틀뒤 현지 군법회의를 거쳐 총살형에 처해진다.[33]

● 남해여단(이청송 소장) : 정규군 낙오병 부대. 이청송은 소련 타슈켄트 출신 교포 1세로, 2차대전 장시 소련군 특무상사로 종군하였다. 이후 인민군에서는 소장 계급을 받고 제2보병사단장, 민족보위성 통신부부장에 임명되었으나 좌천되어 제26해안방어여단장 신분으로 목포 방면으로 보내졌다가, 조국해방전쟁이고 빨치산이고 나몰랑 하는 태도로 유유자적 하며 소타고 호남 일대를 주유하였다. 수백명의 정규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전북도당에서 설득당해 떨어져 나간 백여명으로 전북도당 산하 최강의 부대 기포병단이 만들어 졌다. 이후 전남도당을 지나가다가 무장해제당하고 투쟁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총살되었다고 한다.[34]

5.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6.25 직후 하산하여 인민군과 합류할 때 백 수십명 남은 이현상의 제2병단은, 연합군 후방을 교란하여 인민군 진격에 협조하라는 김일성의 평양방송을 듣고 전선지도부와 상의하여 낙동강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유격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민군이 북쪽으로 후퇴하자 이들 역시 태백산맥을 타고 후퇴하여 10월 하순 북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 도달한다.
여기서 남로당계열 박헌영에 이어 서열 2위이며 로동당 제2비서 겸 사법상 법무부의장 겸 서울시 인민위원장이였던 이승엽은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을 자칭하고 있었는데 후평에서 11월경 이현상과 직접 대면하여 남부 6개도 유격대를 지휘할 권한을 받는다. 또한 이때 전 충남도당 위원장 여운철은 6개 도당지도권을 부여 받는다.[35]

그러나 이와같은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은 이승엽이며, 이현상은 그에게 남반부 유격대를 총지휘할 확대된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 '위임지도설'은 그들만의 뻥카였다. 전 인민군 종군기자이자 비전향 장기수로 북송된 이인모의 증언에 의하면 "당초 당 중앙에서 이현상에게 내린 지시는 이현상 부대는 제6지대(4지대겠지...)로서 지리산 전북도당에 속해 활동하라는 것이었다(월간 <말> 89년 12월호)"

사실 민군을 총지휘하는 것은 오직 총사령관 김일성 뿐이였고 남한의 유격대 역시 그의 소관이였다. 1개월 후인 50년 12월 김일성 명령 제10호-유격지대 개편 명령에 따르면, 이현상 부대는 단지 '제4지대'에 불과하였다. 일단 이승엽과 이현상의 둘사이에 밀약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었으나, 이승엽에게는 그럴만한 권한은 없었다. 이승엽은 남한에서 후퇴하는 기관원들과 피난민들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남하시키는 역할 이상의 권한은 갖고 있지 못한 것이였다.

1950년 11월 14일 강원도 후평을 출발할 때는 ‘남반부 인민유격대’라고 호칭하였고[36] 기존의 2병단 200여명 외에, 남한에서 모집된 인민군 낙오병, 부근의 당원과 민간인을 포섭하여 세를 확충하였다. 공식 명칭은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로 명칭부터 어느 지역당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 하는 것을 천명하였다. 이때만 해도 ‘수류탄 몇 개에 몽둥이를 든 비무장 대원이 절반’인 시절이였다. 이후 모든 것을 노획으로 충당하여 전원이 미군복에 엠원 소총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편제는 다음과 같다.

사령관 이현상, 총참모장 박종하, 본부 정치위원 차일평
승리사단(450명) - 사단장 이진범, 정치위원 유주목
흥복부대(김흥복)와 관일부대(송관일)로 구성
이진범 이하 소대장 전원이 여순사건의 반란군 14연대 출신을 중심으로한 구빨치. 분대장 급에 가야 남한 의용군 출신이 있다.
지리산에서 2병단 활동후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중 합류한 좌익세력 포함

인민여단(150명) - 부대장 김재연, 정치위원 김삼홍, 참모장 김태규
후퇴 중이던 기관원, 남한 출신 인민군 의용군, 민간인 중에서 지원자를 뽑아 편성.
여단장 김재연은 해방 후 박헌영의 경호대장을 한적이 있다.
혁명지대와 함께 신빨치로 불리며 양부대는 '연합부대'라는 이름으로 작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혁명지대(130명) - 부대장 서흥석
경기와 충청 출신 남한인으로 원래 충청지방으로 침투할 예정이였음.
51년 7월 당초 목적지인 충청, 경기지방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4지대와는 연이 끈어졌다.

사령부 직속 부대(80명)
총인원 800명[37] 나이는 주로 이십대였으나 15살 소년병 부터 삼십대 후반도 있었다. 구빨치, 신빨치에 인민군/의용군 출신도 섞여 있었다. 대부분 남한출신이며 복장은 출신에 따라 제각각이였다.

‘독립 제1지대’도 있긴 있었다. 51년 1월 하순 서울시당 위원장 김응빈을 지대장에, 경기도 인민위원장 박승원을 정치위원에 각각 임명하고, 서울․경기 출신 청년으로 유격 제1․2․3여단 1천여명을 독립 제1지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강원도 오대산으로 남하한지 얼마 안되어 국군 부대에 포착되어 대부분이 사살당하고 일부는 북상 도주하였다.

‘제6지대’는 남한출신의 인민군 의용군을 중심으로 50년 9월 29일에 편성하여 남하침투 하였다가 50년 3월에 월북한 '929부대'(부대장 윤상칠)을 다시 재조직 한 부대이다. 제6지대라는 부대명을 부여받고 마태식을 지대장, 이창문을 정치위원으로 하여 51년 5월에 남하하다가 7월에 속리산에서 지대장 이하 간부들 대부분이 사살되고 분산된 일부가 충남도당에 합류한다. 이후 충남도당 위원장 남충렬이 제6지대장이 된다. 덕유산에 도착했을때 병력은 약 200명으로 강동학원 출신과 인민군 패잔병으로 구성되었다. 남하도중 전투를 거치며 미군 복장에 M1소총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그 외 남한 출신 청년을 모아 평남 중화군에 제1지대, 황해도 옹진에 제2지대, 황해도 남연백에 제9지대, 황해도 연안에 제10지대[38]를 각각 편성하여 훈련하였지만 전선이 38선 인근에 고착화 되면서 침투 자체를 시도하지 못한다.

한편 독립4지대는 유격전을 벌이며 내려오다가 12월 초순 월악산 언저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라고 개칭하며, 이현상은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갖게 되었다. 이 남부군이라는 명칭이 유명해지고 뒤에 ‘단’이 붙어서 군경에게 빨치산=남부군단 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소백 산맥을 따라 내려오는 과정에서 중공군이 더 이상 남진하지 않아 3개월간 속리산 일대를 맴돌다가, 충북도당 유격대와 합동으로 51년 5월 26일 새벽에 충북 도청 소재지인 청주시를 공격하여 청주형무소 좌익 죄수 142명을 탈옥시키는 대사건을 일으켰다.[39][40] 빨치산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도청소재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장악했던 대사건으로 이때가 빨치산과 남부군에게는 리즈시절. 토벌대 쪽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자 남한 빨치산의 최대 전과였다.
자칭 "청주해방작전"의 공로로 6월 6일 속리산에서 경축대회까지 열었다. 이때 훈장수여식도 열었는데 박종하, 이종하, 임현태, 이진범은 영웅칭호, 유주목, 김흥복, 손관일, 김갑제에게는 국기훈장 1급,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청주형무소 습격한 6명의 조장이자 사망한 박원길은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이러한 훈장수여식은 박수만 존재할뿐 훈장이 없는 기록상의 수여식이였다. 남부군은 사기진작을 위해 가끔 이러한 수여식을 가졌는데 첫번째는 세포군 후평리, 두번째가 청주해방작전 경축대회장에서 였고, 그 이후는 소설 <남부군>에서 이태가 목격한 가회전투 직후등 지리산자락에서 몇번 하게 된다.

그외에도 소백산전투, 단양전투, 영풍전투, 죽령전투, 수안보전투, 미원전투등 전선의 약간 후방인 37도선 근방에서 제2전선을 펼치며 유격전을 벌였다. 이들의 목적은 중공군보다 조금 앞서 국군 진영을 돌파하여 후방에서 유격전을 펼치는 것이였는데, 전선이 37도선에서 고착되는 바람에 남부군도 속리산 일대에서 멈춘 것이다. 이 3개월간의 속리산 시절이 남부군에게는 리즈시절이였다. 갈평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붙여 '관평 시절'이라고 불렀다.

매우 군기엄정하고 민가에 피해를 안끼치며, 군경의 포로는 사상교육과 함께 투쟁하자는 설득 후 안통하면 석방했다고 한다. 포로를 그냥 풀어준다는 것은 무려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의 수기에서 나오는 이야기니 리얼이다. 그의 수기에는 "왜가리(박춘성)로 알려진 부대장을 이끌고 다니는 방준표는 양민들로부터 약탈을 일삼았으나 이현상 부대는 약탈을 삼가고 경찰이나 경찰 정보원을 잡아도 죽이지 않으며 물자를 징발할 때는 차용서를 써주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엄정한 군기는 남부군의 단결의 원동력이 되었고, 대원들은 이현상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깊히 존경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공군이 압도적인 미군의 공격에 밀려 삼팔선 이북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은 이미 3월 14일에 재탈환 되어 있었다. 이현상을 참모 회의 끝에 중공군을 따라 북상하는 대신, 속리산을 떠나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동하기로 결정 하였다.

51년 6월 중순 민주지산에 도착하여 부대를 둘로 나눈다. 인민여단과 혁명지대의 연합부대는 가야산 방면으로 나가고, 사령부와 승리사단은 덕유산으로 갔다. 부대 개편도 이뤄지는데
승리사단은 사단장 14연대 출신 24세 김흥복, 정치위원에 원산민청 위원장 출신 26세 이봉갑이 임명된다.
예하부대는 서울, 대구, 전주, 여수등 4대 구분대로 개편된다. 구분대는 연대 이하 전투 단위를 뜻하는 북한식 용어인데, 승리사단 자체가 남한 반란군들이라 북한식 용어인 구분대 대신에 연대/연대장이라고 칭했다. 서울부대장의 경우 14연대 김금일 중사가 임명된다. 각 구분대는 40~50명 가량이였다.
연합부대는 남쪽 수도산을 거쳐 7월 12일 가야산 해인사에 나타났다. 이후 혁명지대는 당초 목적지인 충청, 경기지방으로 가고 인민여단만 남부군에 남아 행동하게 된다.

51년 7월초에 덕유산에 도착한 이현상은,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에게 연락원을 보내 소집한다. 이에 각 도당 위원장은 삼엄한 군경의 감시망을 뚫고 호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집결하였다.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은 건강이 매우 나빠 호위병에게 업혀서 이동해야 했다. 이현상은 부대를 참모장 박종하에게 맡겨두고 사령부 객원격인 여운철과 약간의 호위대만 이끌고 회의에 참석한다.

이러한 과정 끝에 전원이 소집된 6개도당위원장회의[41]가 열렸다. 여기서 이현상은 "6개 도당 통합 남도지도부 위원장은 여운철이며, 각 도당 휘하 무장부대는 사단 편제로 개편하여 남부군 휘하로 들어오라"는 폭탄 선언을 하였다.[42]
사실 강원도 후평에서 이승엽이 여운철에게 준 “남한의 각급 당과 유격대의 정치적 지도에 관한 위임장”은 여운철 개인의 신분을 보장하는 신임장이었을 뿐 남한의 각급 당과 유격대 전반에 관한 개편과 지도를 뜻하는 것은 아니였다. 이렇게 되면 이현상은 여운철이 받은 신임장을 확대해석하여 악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승엽은 이현상을 통해 남한내 빨치산을 총지휘할 생각이였다. 그러나 인민군이든 남한 유격대든 총사령관은 김일성이였다. 이승엽은 단지 월북하는 남한 청년들은 유격대로 재편하여 내려 보낼 권한만 갖고 있을 뿐이였다. 또한 빨치산 내부에서도 중요한 명령은 반드시 문서로 하는데, 어떻게 이정도로 중요한 명령이 문서 없이 구두로 전달 되었다는 것이 매우 수상하였다.

결국 도당위원장회의는 시작부터 설전이였다. 우선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도당이 무장투쟁을 지도해야 하며, 중앙당의 정식명령이 없이는 남부군에 소속될 수 없다”라며 이현상과 격렬히 대립하였다.[43]

이현상의 지시는 매우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확인할 연락수단이 없어 심증 뿐이였다. 이에 박영발은 "도당 부대들 끼리도 연락이 어려운 상황에서 남한 전 지역을 통합 지도한다는 게 가능하지 않다. 이미 지역별로 활동을 잘하고 있으며 유격대가 비대해질 경우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러자 이현상은 "유격대가 도당 별로 흩어져 수세에 몰리다 보니 무기 공급이나 전투력 향상에 문제가 있다는점을 지적하며 우선 비무장 대원을 보내면 남부군이 확보하고 있는 무기들을 공급하겠다. 파견된 대원들은 남부군에 편입되고, 무기만 제공받을 수도 있다. 넓고 안전한 지리산에 남한 유격대의 총거점을 두며, 도당 위원장들의 지적은 수용하지만 남부군의 결성은 중앙당의 결정이니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결국 3일간의 치열한 토론 끝에 상호간 의견의 중간 지점에서 합의 보기로 하였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도당들을 존중하여 이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결국 6개항의 결정서가 채택되었는데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과업 수행에 있어서 군사에 관한 제반 문제는 군사부장이 운영할 것이며 당의 정치사업에 치중하여 지방당 재건에만 힘쓸 것.
둘째, 군사부는 각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시켜 군사행동으로 남반부를 장악할 것.
셋째, 비합법투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탈자가 속출되고 있으니 사상 교육에 힘쓸 것.
넷째, 6개 도당은 군사적 유일체제를 보장하기 위해 지리산에 총거점을 설치할것.[44]
다섯째, 군사경험이 있는 비무장원은 모두 무장시킬 것. 이에 소요되는 무기는 승리사단에서 제공한다.
여섯째, 가급적 약탈과 방화를 중지하고 민심 수습에 노력할 것.[45]
-최태환의 <젊은 혁명가의 초상> 314페이지

이로서 한때나마 이현상에 의해 통일된 무장투쟁이 진행되었고 각 도에서 발간하는 빨치산 기관지도 남부군에서 발간하는 신문 제호와 똑같이 ‘○○의 길’로 통일되었다. 남부군 기관지는 '승리의 길', 남부군 직속부대의 경우는 ‘지리산 승리의 길’, 전남도당은 '백아산 승리의 길', 경남도당은 '덕유산 승리의 길'이였다. 다만 전북도당 만은 '운장산 승리의 길' 대신 기존의 '전북로동신문이 이미 4백호가 넘게 발행되었기 때문에 그냥 사용하기로 했다.[46] 이회의에 불려지지 않은 남도부 부대의 경우 그냥 "붉은별"이라는 별도의 제호의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기존의 전구는 더 큰 단위로 개편되고 도 경계선까지 넘나드는 실질 구역 조정이 있었다.
또한 각 도당 유격대는 사단제로 재편되어 남부군 산하로 들어갔다. 이로서 각 보대는 ‘조선인민 유격대 남부군 ○○사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당 사업 총괄 : 여운철[47]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총사령관 : 이현상
제1부사령관 : 이진범(국군 14연대 출신, 기존 승리사단장을 승진시킴)
제2부사령관 : 문춘(충북유격대 출신. 남부군 남하때 속리산에서 충북유격대 일부를 이끌고 합류)
참모장 : 박종하(전남도당 출신, 2병단 7연대장)[48] → 임현태(국군 4연대 출신)
총정치위원 : 차일평[49]

● 남부군 직할사단
- 81사단 : 사단장 김흥복, 정치위원 이봉각[50] 참모장 김태규, 170명, 6.25이전 2병단 시절부터 주력이였던 승리사단이 이름만 변경.
여순사건의 14연대의 잔여세력 70~80명을 근간으로 강원도 후평에서 200명으로 출발하였다. 이때의 사단장은 14연대 이진범이였고 예하 ‘흥복부대’(김흥복), ‘관일부대’(송관일)가 있었다. 이 두 부대를 서울․대구․전주․여수 4개 구분대로 개편하면서 14연대 하사관 김흥복이 사단장으로 승진한다.
한편 중간에 소모된 병력 충원을 위해 전북도당에서 40며명을 보내준다. 이때 소설 <남부군>의 이태는 서울부대에 배속된다. 서울부대장(연대장)은 14연대 사병출신 김금일.
51년 9월 하순 81사단 개편시 예하 4개 구분대가 801(서울부대)․802․803(여수부대)연대로 개편되었다. 각연대별 50명.
- 92사단 : 사단장 김재연, 170명, 남부군 직속 부대였던 인민여단,[51] 그리고 315부대와 그 모체인 102부대[52]를 통합함. 903․904․907연대 보유.
● 충남도당
- 68사단 : 충남 조직부부장 고판수, 570명 혹은 680명. 67사단, 68지대라는 표현도 보인다.
● 충북도당
- 72지대
● 전북도당
- 45사단 : 땅끄 병단장 학소 황의지, 700명. 당시 전북도당 유격대는 군당 지도를 쉽게 하기 위해 북부와, 남부로 나누고, 도당은 남원군만을 직할로 두었다. 당시 땅끄 병단을 중심으로 전북 북부를 담당할 418연대를 만들었는데 이를 다시 45사단으로 개편한다. 산하 402․403․404 연대.
정치위원 산하에 간부부, 조직부, 선전부, 연예부를 두었고 참모장 산하에 작전과, 대열과, 정보과, 연락과, 보급과를 두었다.
- 46사단 : 벼락 병단장 백암 박판쇠, 700명. 전북 남부 산재부대를 통합 개편.
- 47사단 : 전 도당 군사부장 김명권. 전북 남부 담당. 53사단이라는 표현도 보인다.[53]
그외 돌진 장성구를 보위대장으로 임명하여 4백명을 주어 지리산 일대에 배치하였다.
● 경남도당
- 57사단 : 이영회[[54]. 독립8지대(803․805․808․815 부대)를 개편.

각 사단의 정치위원 산하에 간부부장, 조직부장, 선전부장, 후방부장, 연예부장을 두고
참모부 산하에 작전과장, 대열과장, 정보과장, 연락과장을 두었다. 사단 및에 연대를 두기도 하였다. 원칙적으로 유격대는 남부군의 지시를 받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존처럼 도당 유격대 군사부의 지휘를 받았다. 다만 기존과 달리 다른 도당 산하 유격대와 통합 작전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전남 도당 위원장 박영발은 결국 사단제 개편을 거부하였다. 자료에 따라 전북도당, 경북 도당도 이현상과 의견 충돌이 심했다고 나오지만, 일단 전북도당은 사단제 개편을 받아들였다.신동아기사참조 이러한 사단제 개편은 이현상이 충북도청 습격전처럼 대규모 무장세력으로 정규전처럼 운용할려는 생각이였지만, 실제로는 너무 대규모 부대로 몰려 다니다 보니 군경에서 이동경로를 포착하기 좋아 좃망하게 된다. 그래도 이때가 남한 빨치산의 리즈시절.

전북 도당 위원장 방준표도 이현상에게 대립했다는 자료도 있지만, 다른 자료에는 충남북 도당과 전북 도당이 가장 이현상에게 협조적이였다고 나온다. 7백명으로 북강원도에서 출발하여 400명으로(승리사단 160~170명, 인민여단 100명, 혁명지대 60~70명, 사령부 직할 30명) 줄어든 남부군에게 병력 보충 해준 것도 전북 도당이였다. 전북도당은 재귀열병에 걸려 회복중이였던 60명을 남부군에게 보내 주는데 이때 <남부군>의 저자 이태도 함께 넘어간다. 종합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당시 떠돌던 소문인, 박영발과 방준표가 이현상과 대립했다는 것은 사실일 지라도, 회의가 끝나도 박영발은 비협조적이였고, 방준표는 남부군에 협조 하였다.[55]
그외에도 전북도당(720부대 70명), 충남도당(붉은별부대와 인부대 100명), 경남도당(815부대)에서도 부대가 파견되어 남부군과 함께 움직이며 전투에서 얻은 무기와 탄약을 자신의 소속 도당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경남도당 일부 부대는 그냥 남부군에 눌러앉기도 하였다.

지휘부 조직도 개편 되었는데 병단시절 문화부로 불리고, 연대시절 정치주임이라고 불렀던 것을 사단으로 승격되면서 정치위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 사단은 당사업은 기존의 도당을 통해 지도받았지만, 군사적 지휘는 남부군이 하였다. 남부군 사령부는 지리산 뱀사골에 두었다.

남부군 사령부는 사령관 이현상 아래로 참모장(작전과장, 대열과장, 정보과장, 연락과장), 통신부장, 후방부장, 군의부장이 있었고,
정치위원 차일평 아래로 간부부장, 조직부장, 선전부장, 후방부장, 연예부장이 있었다.
사령부 직속 부대로 호위대 10~15명, 정찰대 10~15명, 통신대 10~15명이 있었다.

남부군 직속사단의 경우
사단장 아래로 작전참모, 대열참모, 교육참모, 후방참모, 통신참모
정치위원 아래로 교양지도원, 적공지도원[56], 민운지도원[57], 문화지도원[58] 조직지도원(92사단만)이 있었고[59]
산하에 3개 연대(40명)와 정찰대가 있다. 연대에는 군사 지휘관인 연대장 외에 사단정치위원 소속인 민청지도원과 훈련지도원이 있었다. 여기에 중앙당과 인민군의 고위 간부 몇 사람이 직책 없이 사령부의 객원 격으로 따라 다니고 있었다. 척봐도 알겠지만 꼴랑 170명 가량인 사단에서 간부들의 비중이 상당하다. 물론 부사관 격인 특무장, 분대장등을 제외한 것이다. 아마도 사단 인원을 1천명 까지 확충할 계획으로 지휘부를 처음부터 크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군사부 지휘관들은 구빨치(주로 14연대 반란군) 출신의 남로당계였지만, 이들을 사상적으로 통제하는 정치위원들은 북에서 온 북로당계였다.

6. 지대 개편

그런데 50년 12월 압록강까지 후퇴하였던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과 총참모장 남일, 작전국장 유성철의 이름으로 ‘유격지대 개편에 관한’ 지령문을 시달하였다. 기존의 도당위원회 활동에서 벗어나 제2전선 형성을 위해 군사적 활동에만 전념하는 개편안이였다. 50년 12월, 51년 1월, 3월등 3차례에 걸쳐 전파로 지령문을 발송하였지만(...) 받을 수단이 없었다.[60] 중공군 참전과 서울 재점령 같은 경천동지할 사태도 몰랐던 남한 빨치산들이 세세한 지령문 까지야(...)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 북한에서는 51년 4월 23일에 ‘423부대’라는 소규모 유격대를 시켜 인편으로 직접 지령문을 전달하게 된다. 이들은 천신만고 끝에 속리산에서 충북도당 부위원장 송명헌을 만나게 되어, 이것이 충북도당을 거쳐서 지리산에 도착한 것이 1951년 10월경이다. 북측에서 423부대라는 특수부대 까지 만들어서 치열한 전선을 거쳐서 산넘고 물건너 오다보니 워낙 시일이 오래 걸려 무려 6개월만에 이현상에게 접수가 된 것이다. 그바람에 지난 7월의 6개도당위원장회의의 결정사항은 나가리가 된다. 또한 이현상의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총사령관’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도 개구라로 밝혀지고 지령문에는 이현상은 단지 지리산․덕유산으로 거점으로 활동해야 하는 4지대장일 뿐이며 정치위원도 여운철이 아니라 전남도당 부위원장 김선우로 되어 있었다.

무려 10개월전 상황을 기준으로 지시한 것이라 51년 10월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다. 일단 중공군이 곧 내려올 테니 후방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주 목적이였는데 중공군의 대공세는 이미 꺾인 이후이고 전선은 38선 인근에서 고착화 되었다. 또한 길월팔 부대로 5지대를 형성해야 하는데 길월팔 부대는 이미 51년 2월에 북한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후 길원팔은 제5지대장의 임무를 부여받고 남하침투하던 51년 3월 18일께 백골병단에 체포돼 처형당했다.

인민군최고 사령관 '김일성명령 제10호'에 따른 남한유격지대 개편 명령은 다음과 같다.

제1지대 : 소백산지구에서 활동하는 유격대로 편성
제2지대 : 충남유격대와 충북유격대, 그리고 원주지방의 '홍사민연대'로 편성하고, 제1거점 속리산, 제2거점 영동, 제3거점 계룡산으로 설정하고 상주•보은•청주지구까지를 활동범위로 할 것.
제3지대 : 울산•일월산•안동 일대에서 활동하는 유격대로 구성(남도부 부대와 경북도당)
제4지대 : 지대장에는 이현상, 정치부지대장에는 김선우를 임명하며 전남북지구의 유격대를 편성하고 제1거점을 지리산, 제2거점 덕유산, 제3거점은 운장산에 마련하고, 활동범위는 곡성•구례하동•산청•진주•마산지구로 할 것
제5지대 : 지대장에는 길원팔, 정치부지대장은 남경우를 임명하여 경남유격대와 청도동부지구 유격대로 편성한다. 거점은 운문산, 지리산, 관용산에 두고 청도•울산•동래•밀양•마산•김해•부산•산청 등 지구를 활동구역으로 한다.
제6지대 : 무주•옥천•영동•금산•보은 등을 활동구역으로 한다.

빨치산 측에서 북한의 지령 하나 받는데 6개월씩 걸리는 것처럼, 북측에서도 빨치산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어쩌랴. 기존의 도당 산하 유격대를 대충 지대화 하여 변경한다. 지대의 순번은 ‘4지대 이현상 부대’만 고정적이고 다른 도당부대는 자료마다 상이하다. 예를들어 제3지대를 구성해야할 남도부의 실제 활동지역은 길원팔이 담당할 제5지대에 가까웠고 길원팔도 죽었기 때문에, 남도부가 제5지대장을 '사실상' 맡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외에 이설에 따르면
제1지대 : 서울
제2지대 : 강원
제3지대 : 경남 낙동강 동쪽(남도부 부대)
제4지대 : 이현상 부대(남부군)
제5지대 : 충남북
제6지대 : 전북
제7지대 : 전남
제8지대 : 경남 낙동강 서쪽
이렇게 구성되었다고 한다.

남부군의 경우 명령을 접수 하고 1951년 11월 14일 자로 남부군을 해산하고 ‘독립 4지대’로 개편한다. 이전의 남한내 빨치산의 총사령부의 위치에서 동등한 지대로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문화부장은 정치위원으로 명칭을 변경한다.[61]

통상적인 조직은 다음과 같다.
지대장, 제1부지대장, 부지대장 약간명
정치위원, 제1부정치위원, 부정치위원 약간명 - 조직부장, 선전부장, 민청부장
지휘부 직속 - 군의부장, 간부과장, 기요과장
참모부 - 참모장, 부참모장 약간명, 작전과장, 대열과장, 정찰과장, 통신과장
후방부 – 후방부장, 보급과장, 병기과장

이현상이 야심차게 만든 '사단제'도 그냥 몽땅 없던 일이 되었다. 김흥복의 81사단은 '김지회부대'가 되었고, 김재연의 92사단은 '박종하부대'가 되었다. 이현상이 아끼던 죽은 인물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 개편이 미쳐 있기도 전인 51년 4월 인민군최고사령부 작전부 직속으로 유격지도처, 일명 526부대(6.25를 거꾸로 해보자)
를 설치하여 남한의 각 지대를 관장하게 한다. 유격지도처장에는 6.25 이전 경북도당위원장이여서 빨치산 경험이 있던 배철이 임명되었다.
예하에는 조직2부, 간부부, 후방부, 사회안전부로 편성되었다.
남한의 각 지대와 연락을 꾀하기 위해 전선지대에 동부연락소와 서부연락소를 설치했다.
동부연락소는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하련리에 설치하였다. 소장에는 서울시 중구역당위원장으로 강동정치학원 출신자중 이례적인 거물이였던 맹종호였다. 당시 황해도 연안에 월북청년 400명으로 편성된 제10지대장이였다.
서부연락소는 황해도 금천군 구이면 관문리에 있었고 소장은 이윤형이였다.

1951년 8월 31일자로, 기존 4월에 내린 지시가 현실에 안맞는다고 판단되어,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미해방지구에 있어 우리당 사업과 조직에 대하여>라는 결정 제 94호가 채택되었다. 이는 빨치산을 5개 지역으로 설정하며, 각 지구에 지구조직위원회를 두고 각종 유객대들은 이곳의 지시를 받는 다는 것이다. 빨치산 지도라인도 변경되어 신설하는 당 중앙 연락부에서 관리하기로 하였다. 로동당 대남사업 비서는 사법상 이승엽이 겸하고, 연락부장은 배철이 맡았다. 그 외 임화, 리강국, 설정식등 남로당계가 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이 소식은 한참후에나 전해져서 토벌작전 이후에나 개편이 이루어진다.

7. 제1차 대토벌작전

51년 10월 25일. 유엔군과 공산군 양군은 그동안 개성에서 하던 휴전 협상을 판문점으로 옮겨 개최하면서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을 다시 획정하기 위해 한 달간 모든 전선에서 전투를 중지하기로 하였다. 그러자 국군은 이 기회에 빨치산을 토벌하기로 하고 최전선에 있던 수도사단을 LST편으로, 8사단을 기차편으로 남하시킨다.

51년 11월 25일. 당시에는 공비 토벌작전이라고 통칭되었고, 이후 제1차 대토벌작전[62]이라고 알려진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전선이 이전 분계선 인근에 고착화된 후, 어느 정도 숨 돌릴 여유가 생긴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 후방에 득실대는 빨치산은 말 그대로 눈엣가시였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흐르면서 정부가 각 지역의 통제력을 확고히 장악하여, 빨치산들은 모든 해방구를 뺏기고 산속 깊숙히 숨어 들어간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일부 산간지대에서는 빨치산이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63]

이에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만주벌판에서 항일유격대 때려잡으며 유격전 경험을 쌓은 제1군단장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白) 야전사령부'가 전주에 설치되고 영호남에 12월 1일자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백 야전사령부 전투서열과 지휘관, 전방지휘소 위치는 다음과 같다.

백 야전사령부 : 백선엽 사령관(전주)[64]

수도사단 : 송요찬 준장(사단본부 순천, 전방 지휘소 구례)
제8사단 : 최영희 준장(사단본부 전주, 전방 지휘소 남원)
서남지구 전투사령부(군경혼성) : 김용배 준장(남원)
치안국 전방사령부 : 최치환 경무관
태백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 : 이성우 경무관
지리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 : 신상묵 경무관
백아산 경찰대 : 김동진 경감
전남 전투경찰대 : 주재선 경감
전남 행정경찰대 : 민병찬 경감
제1102 야전공병대 : 박정제 중령
제225 자동차수송대 : 김홍 소령
제35 야전통신중대 : 한철동 대위

2개 육군 보병사단, 4개 전투경찰연대가 모인 어마어마한 병력으로, 이때 백(白) 야전사의 병력이 4만여명에 달했다고.[65]

그리고 이번에는 미군 역시 작전 계획 입안 단계에서부터 지원하였고 덕분에 포병, 소이탄 등의 탄약과 식량 등을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었던 건 물론,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66] 등 게릴라전 경험자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67]

토벌 작전의 정식 명칭은 쥐 살해자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나 보통 단순히 공비 토벌 작전으로 불린 이 작전은 군경 토벌대가 지리산을 포위한 후 포격과 공습을 가한 후에 경찰들은 빨치산의 이동경로 및 퇴로를 차단하고 국군은 능선을 타고 올라가 적의 주력을 정상까지 올라가 타격하고 내려오면서 도주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는데, 망치와 모루 전술의 일종이다.[68]

기존의 군경은 낮에 쳐들어 왔다가 밤에는 경찰서 등으로 돌아갔고, 어쩌다 산 위에 머물러도 2~3일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요 능선을 장악하면 아예 거기다가 벙커를 구축하고 주둔하였다. 또한 보다 정밀한 타격을 위해 항공지원과 포병을 배치했고 특히 항공지원때 F-51이 뿌린 소이탄은 빨치산들에게 불지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이 때문에 여러 간부들이 사망하였으며 빨치산 출신 작가들도 이 때를 기억하려 하면 치를 떤다.[69]

작전기간이 겨울이라는 시점이 절묘한데, 겨울에는 녹음이 우거지지 않아 숨을데가 없고 눈 때문에 도주시 이동경로가 그대로 노출되며 먹을 것을 구하기도 힘들다. 한국전쟁 이전에도 겨울은 빨치산에게 매우 불리한 시절이었다. 또한 동상자가 속출했고 치료가 안되어 그대로 얼어죽기 딱 좋은 상태였다.

또한 그동안 군경은 마을이 빨치산에게 쌀 한되 퍼주기만 해도 통비(通匪)분자로 몰아 두들겨 패고 마을을 불태우기 일쑤였다. 그 바람에 민심도 잃었고 할 수 없이 입산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이 쌀 퍼주는 것도 한두번이지 수십번씩 찾아 오니 민심도 결국 돌아서 버렸다. 여기에 백선엽은 주민들과 빨치산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선무하여[70] 빨치산과의 연결을 차단하였다. 또한 빨치산 포로들을 가벼운 조사 후 훈방 처리해주었는데 이것이 대단한 효과를 보았다. 실제로 <한국전란 2년지>에 의하면 52년 3월12일부터 20일 사이에 수용중이던 ‘남녀노소의 게릴라’ 4000명을 심사 끝에 방면하였다고 나온다.

남부군의 경우 지휘부가 일본군→국군 14연대인지라, 일본군처럼 상대방(군경)을 까닭없이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2개 사단 + 4개 경찰연대 병력인 백야전사령부를 상대로 백주대낮에 정면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그동안처럼 자신들이 나팔 불며 돌격하면 알아서 도망갈 부대로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이현상이 각 도당을 기존에 유격전에 적합한 소부대 편제를 정규전에 가까운 사단체제로 바꿔 놓아 몸집이 둔해져 도망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대표적인 전투가 경남 하동군 악양면 경찰지서를 습격한 악양전투이다. 남부군 직속 81사단, 92사단과, 경남도당 57사단이 동원되어 습격전을 펼쳤는데 하필 그날이 비상계엄령 발동일이자 대토벌작전 하루 전날인 12월 1일 밤(...). 토벌작전 준비중인 수도사단에게 걸려서 빨치산 3개 사단은 큰 피해를 입었다(3개 사단 합쳐서 3백명...). 게다가 악양전투를 위해 충남 68사단 70여명, 전북 46사단(47사단?) 60여명이 차출되어 악양으로 이동중이었는데 군부대에 포착되어 궤멸되어 버린다.

토벌작전은 병력교체와 이동을 위해 몇 차례 나눠서 실시되었는데 실전에서는 중간 중간 며칠씩 휴식을 취하는등 반드시 지켜지지 않았고[71] 작전지역별로 조금씩 달랐다. 그 시기는 다음과 같다.
제1기 작전 : 51년 12월 2일 ~ 51년 12월 14일[72]
제2기 작전 : 51년 12월 16일 ~ 52년 1월 4일
제3기 작전 : 52년 1월 4일 ~ 52년 1월 31일
제4기 작전 : 52년 2월 4일 ~ 52년 3월 14일
백 야전사는 1952년 3월 15일에 해산되고 비상 계엄령은 4월 7일에 해제.

백야전투사령부 발표 전과
사살: 5,009명
생포: 3,968명
귀순: 45명
은거지 파괴: 341개소

이때까지만 해도 정부는 애초에 5~6천명의 빨치산이 있다고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위 결과에서 보듯 이것보다 더 많았다. 그만큼 빨치산은 세가 강했으나 그 세는 결국 뒤통수가 가려운 정도로만 끝나고 전황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1차 대토벌 작전 기간 동안 빨치산 측에서는 나름 전과에 관계 없이 뜻있는 전투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빨치산이 일방적으로 군경에 털리고 있을 뿐이었다. 화력도, 병력도, 물자도, 주민 지지마저 군경에 비해 부족했던 빨치산 쪽에서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고, 예전처럼 토벌대를 전면적으로 격퇴한다는 것은 몽상의 영역에 한없이 가까웠다. 그나마 군경의 수색대 뒤로 돌아 잠복하거나 야산지대에 비트를 파고 잠입하는 방식으로 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결정적으로 빨치산을 그로기 상태에 몰아넣은 것은 천왕봉 전투로, 52년 1월 중순경 대략 19일 언저리에 지리산 천왕봉 근처 대성리에서 일어났다.[73] 군경에게 쫒기던 남부군(81사단, 92사단), 경남도당(57사단), 그리고 전남도당에서 그동안 후방에 두었지만, 후방이 위협받자 지리산으로 보냈던 노약자 수백명등 천명 이상의 빨치산이 지리산 천왕봉 근처 대성골 골짜기에 몰려들었다.

남부군 사령부와 81사단(김지회 부대)은 쫒기다가 천왕봉까지 도망쳤고, 세석평전에서 예상치 않게 엄청난 국군부대를 뒤에 매달고 나타난 이영회의 57사단(경남부대)과 경남도당 간부를 만났다. 이에 마주오던 국군을 피하기 위해 대성골로 우회하니 여기에는 남부군 92사단(박종하 부대)이 국군에게 쫒겨 올라오고 있었다. 92사단은 거림골에서 분산해 따로 움직이기로 했지만 군경에게 쫒기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심지어 전남부대에서 차출되어 악양전투에서 보급품을 날랐던 투쟁인민이라 불리던 민간인들과 노약자들도 이미 대성골에 있었다. 심지어 전남부대와 전북부대 일부까지 대성골로 도망쳤다. 결국 3개도의 접경지역인 지리산에서 도망치다 보니 꼭대기인 천왕봉 대성골에 인근 빨치산이 죄다 몰려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국군에서는 대성골 전투로 2일 동안 589명의 유격대를 죽이고, 237명을 생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현상 평전>[74]에서는 이 정도의 수치도 부족하며, 네이팜탄에 맞아 흔적도 없이 소실되어버린 이들의 숫자는 빠져있었다고 한다. 즉 실제 사망자는 이보다 많았다는 이야기. <실록 정순덕>에서는 네이팜탄으로 대성골이 밤낮없이 5일 동안 불타올라 바위 틈새에서 5일동안 선체로 버텼다고 한다.

경남도당은 여기서 전멸. 57사단장 이영회 및 몇십명만 살아남는다. 이후 경남도당은 부위원장 김삼홍이 담당하며, 부대는 경남부대로 개편하여 이영회가 이끈다. 둘다 충실한 이현상파이다.

전남도당은 파견대장 오신태, 구례군당 위원장 조용길이 사살되었으며 천여명에 달한다는 설이 있던 전남도당 노약자들은 이 전투 이후 다시는 언급되지 않는다.

<남부군>에는 ‘궤멸하는 남부군 - 남부군 최악의 날’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건 이태가 전체 작전을 조망하지 못해서 남부군만 나오는 것이고 실제로는 다른 도당 부대들도 토벌대의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죄다 지리산 천왕봉에 운집해 있었다. 또한 소설에서는 81사단과 사령부만 있었다고 나오지만, 92사단도 있었다는 설도 같이 기재해 놓았다.[75] 소설에 의하면 포위망에 갇혀서 이동중 대열 중간이 졸다가 못 따라와 끊겨 버리고, 다시 중간쯤에 공격 받아서 또 두토막 나서 남부군과 81사단 사령부, 각 대여섯명 남은 정찰대와 호위대 등 도합 30명만 남아 포위당한 채 절망적인 전투를 벌였다고 나온다.

또한 이번 전투에서 남부군의 최고정치위원이었던 여운철이 사살되었다. 그가 지니고 있던 방대한 문건으로 인해 남부군의 사정이 많이 알려졌다.[76]

1차 대토벌 작전의 결과 빨치산은 그야말로 개박살났다.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전남도당의 경우 총사령부와 직속 연대에 350명, 전남도당부에 200명 정도만이 살아남았고, 각 지구와 시군당부의 경우 가장 많이 남은데가 광양 군당 70명, 곡성 군당 60명[77]으로 그나마 살아남았을 뿐, 후방지원을 담당하던 다수의 비무장 빨치산들과 군당조직이 싹 전멸해버렸다.

그리고 남부군의 경우에는 처음엔 700명 정도의 규모였으나 중간중간 병력보충이 되어 1천 2백명 가량의 병력이 남부군에 속해 있었다. 허나 대성골 전투로 병력이 싹 죽어나가는 바람에, 남부군은 겨우 150명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빨치산의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그동안 일부나마 호의적이었던 마을 사람들이 빨치산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으로, 이제 대세는 완전히 기울었다고 판단하여 그 전처럼 자발적인 식량 조달은 커녕, 초모사업을 통한 병력 보충에 협조하지 않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결국 기존의 사단 체제는 군경의 1차 대토벌 작전으로 대부분의 병력이 몰살되고, 병력을 수급할 길도 막혔기 때문에 존속할 길이 없어, 남부군은 향후 휴전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소부대로 개편했다. 52년 1월 28일, 남부군 직속의 81사단(김흥복), 92사단(김재연)은 사망자 이름을 따서 각각 김지회부대(국군 14연대 중위, 여순사건 주역)와 박종하 부대(가회전투에서 죽은 남부군 참모장)로 개편되었다.[78]

그러나 이어진 수도사단의 3차 공세(4기작전?)으로 또 50명이 죽어 전투부대 60명, 사령부 요원 30명 등 도합 1백명 남는다. 이태가 소속되었던 서울부대장이었던 14연대 반란군 출신 김금일도 이때 사망한다. 박종하부대의 경우 너무 피해가 커서 해산되었다가, 봄이 지나면서 흩어진 대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재건된다.[79]

경남도당은 천왕봉 동편 써리봉에서 급습당해 수뇌부가 전멸하고 이영회의 57사단 60여 명만 탈출하였다. 위원장 남경우만은 조금 앞서 같은해 1월 18일 대성골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로써 당 지도부가 와해된 경남도당 잔여세력은 남부군에 종속적인 모습을 보인다. 일단 부대장 이영회 부터가 14연대 반란군 하사관 출신으로 이현상의 심복같은 존재이니.

전북도당은 주력이었던 황의지의 45사단이 지리산으로 이동중 성수산에서 토벌대에 걸려 괴멸하였다. 시체가 골짜기를 메우고 선혈이 개울을 이루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들 중에 전투가능한 80여명은 도당위원장 방준표가 호위병으로 쓴다고 하여 데려가버리고, 황의지의 부대에는 부상자 30명만이 남아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결국 황의지는 경찰의 포로로 잡혀 이후 전향하여 남원경찰서 사찰유격대 부대장이 된다.

거물급의 귀순도 있었는데 전북도당 정치위원 오원식과 남부군 정치위원 차일평이 이에 해당한다. 전 중앙민청 부위원장이던 오원식은 25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귀순하였는데 동료 포로들의 심한 힐난을 받고 수용건물에 방화를 하였다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하였다.[80]

차일평의 귀순은 너무 중대해서 비밀에 부쳐졌을 정도였으나, 나중에 빨치산에게 귀순방송을 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후 행적은 남한내 살아았다는 설도 있고 북한으로 탈출했다는 설도 있는 등 불분명하다. 어쨌든 남로당계 도당 위원장과 유격대장 전원은 산에서 최후를 마쳤는데, 북로당계의 최고위 정치위원들이 가장 먼저 투항한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아울러 대토벌작전 후반기였던 1월 28일 남부군은 사단제를 폐지하고 '독립 제4지대'라는 이름으로 돌아가며 예하 81사단과 92사단을 각각 김지회 부대와 박종하 부대로 개칭한다.[81] 뒤이어 각 도 사단들도 사단 호칭을 없애고 남부군 사령부와 형식적인 종속 관계도 끝낸다.

리지웨이 유엔 사령관은 52년 3월자로 약 3900명의 빨치산이 남았다고 추정하였고, 정부에서는 2천명 정도로 추정하였다. 국군에서는 소백산맥과 지리산 일대의 잔존 유격대를 1천2백명으로 추산했다.

또한 토벌대인 국군 역시 백야전사령부를 모태로 2군단을 창설하여 후방을 담당케 했고 아래 언급될 사찰유격대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며 빨치산들의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되는 때이기도 하다.

8. 소강기

도당 유격대 직속 연대들의 조직 자체는 비교적 건재했고, 국군의 공세가 끝나면서 선이 떨어진 빨치산들이 개별적으로 다시 모여듦에 따라 각 전구를 중심으로 조직들이 재건 되었다. 살아남은 군·면당 조직은 남은 인원들을 합쳐 통합 조직을 만들고 기타 잡다한 조직들이나 소부대 들도 통합하였다. 모든 간부들은 자체무장하며 연락병이나 보위병들을 줄여서 전투부대를 편성하게 하였다.
전남도당의 경우 각종 해방구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고, 군경이 요지마다 지키고 있어 도당이 지구/전구와 각 시군당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이에 전남을 동/서부로 나누고 조직 역시 분할하였다. 동부지도부는 기존처럼 도당이 직접 관할하고(구례, 광양, 여수, 순천, 고흥, 곡성), 서부지도부를 신설하여 도당부위원장 겸 유격대총사령관 김선우가 담당하였다.

서남지구 경비사령부(약칭 서경사)는 대토벌작전이 끝난 후에도 해체하지 않고 상설편제로 남아서 계속해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결국 서경사의 정규군과 경찰의 전투경찰대, 그리고 각 시군경찰서의 무장경찰대가 수시로 빨치산 토벌을 벌이는 형국이였다.

52년 5월 1일 지리산 공비 완전 소탕을 위해 그동안 3개 도에 분산되어 있던 경찰의 작전과 행정권을 겸임하는 순수한 지리산 지구 토벌대가 발족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사령부(서전사)로 예하에 107 예비연대, 제1~2경비대대, 경찰전투 203, 205, 207연대등 총 4개 전투경찰 연대와 전남북, 경남 3도 경찰국과 1시 12개군의 경찰기동대 2만 병력을 두고 있었다. 결국 이 서전사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이현상을 사살하게 이른다.

이들 서전사는 기존의 군부대의 '서남지구 경비사령부(서경사)'와는 별도의 경찰 조직으로 상호 경쟁적으로 빨치산을 토벌한다. 이전까지 토벌대는 군이 지휘하고 경찰은 종속되었는데, 이제 서경사와 서전사라는 2원화된 조직을 통해 상호 경쟁을 통해 독자적으로 토벌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단점으로는 상호간에 어떠한 정보교류가 없어서 가끔 병크짓이 나왔다.

52년 여름에는 제1사단(사단장 박임항)이 2개월간 호남 일대를 쓸었다. 그나마 52년 겨울 예상되었던 대토벌작전은 없어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빨치산들은 새로운 적을 상대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빨치산 투항자들로 구성된 사찰유격대 들이였다. 이들은 그동안 산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야간에 빨치산 거점 깊숙이 침투하였다. ‘희망부대’, ‘승리부대’, ‘강철부대’등의 이름으로 시군 산하의 무장경찰대 안에 조직되어 있었는데 통칭 ‘보아라부대’라고 하였다. 비록 모든 직위가 박탈되어 떠돌아 다니다가 당하기는 했지만,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의 목을 잘라낸 것도 이들이였다.

이전까지는 빨치산을 생포하면 그자리에서 총살하거나, 감옥에 보냈지만, 1차대토벌 작전부터는 귀순자를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월급에 계급장까지 달아주며 토벌대에 편입시켰다. [82] 경찰서나 부대마다 수십명 단위의 사찰유격대가 편성되었고, 죽으리라 예상했다가 용서를 받은 이들은 공을 인정받기 위해 군경보다 더 열심히 유격대를 잡으러 다녔다. 이들은 빨치산의 행동양식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찾아내는 것 또한 훨씬 용이했다. 또한 인간은 자신에게 나지 않는 냄새는 생각보다 훨씬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데, 군경이 풍기는 담배 냄새, 비누/치약 냄새 등 소위 '인간의 냄새'는 빨치산이 50미터 밖에서도 군경의 존재를 눈치차고 미리 우회하거나 습격하는 대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러나 사찰 유격대는 완전한 매복을 위해 빨치산과 똑같이 세수와 면도, 양치질, 담배를 전부 금지하니 냄새가 안 난다며 방심하는 빨치산을 상대로 대단한 전과를 세울 수 있었다.

군경의 대토벌을 ‘역천의 패륜적’, ‘인도적 고려나 동포적 교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행위’ 라고 분노하던 빨치산은 한때 동지였던 사찰유격대의 배신을 ‘해악분자’라고 하며 치를 떨며 분노한다. 특히 꼭꼭 숨어 있던 간부급이 많이 당했고, 심지어 전당 도당 유격대 총사령부가 털려서 한때 총사령관(김선우) 사망설이 돌 정도였다.

살아남기도 힘든 바쁜 와중에 북한의 뜻에 따라 정전협정 체결을 촉진하는 호소문을 돌리며 빨치산 전원은 물론 인근 주민들에게 서명을 받는 한심한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83] 전남도 내에서만 30만명의 애국적 인민들의 서명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1948년에 남한내에서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수백만명의 비밀투표가 있었다는 소리와 함께 최강의 개소리.

1952년 초가을경, 대토벌 작전 이전인 북한의 51년 8월 31일 결정에 관련된 회의가 지리산에서 있었다. 많은 이견이 있었지만 북한의 지시는 절대적인 것이였다. 결국 지시대로 지구당 체계로 개편된다. 그동안 도당 산하에 있었던 지구/전구와 군당·면당은 통합되어 몇 개의 소지구당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이시기는 군경의 대공세가 없었을 뿐이지 전투경찰대의 계속되는 공격등으로 빨치산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특히 경찰의 토치카 장벽등으로 식량보급 대상지가 차단된 문제가 심각했는데 게릴라전은 이론상으로 고정된 거점의 전투를 피해야 했지만 식량문제가 워낙 긴박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무리하게 경찰 토치카를 뚫다가 빨치산 피해가 늘어나고, 이로인해 경찰과 싸울 힘이 약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9. 지구당 개편

한편 51년 8월 31일자로 로동당 중앙정치위원회 명의로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당 사업과 조직에 대해서’라는 ‘94호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94호 결정서는 휴전에 대비해서 남한을 5개 지구로 나누고 기존의 도당 조직 해체하고 새롭게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정서는 "전쟁 시작 후 1년 이상 경과 했으나 빨치산투쟁은 결정적인 성과를 쟁취하지 못했으며...... 국방군 내부에 '의거운동'과 와해를 일으키지 못했다. 당정치노선과 정책은 옳았는데 남한 안의 단체들이 잘못해서 그러한 것이다."라며 노골적으로 남탓을 한다. 주지의 사실과 같이 인민군최고사령관은 김일성이며 모든 빨치산에 대한 지도권 역시 그에게 있다.
또한 '각 지대는 중대 단위로 개편하여 활동의 민활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며, 이들을 지도하기 하기 위해 당중앙에 연락부를 설치하고 기존의 인민군최고사령부 유격지도처 사업을 관장하기로 하였다.
이는 기존에 지대화로 개편하여 당사업을 중지하고 유격활동만 하라고 한 50년 12월의 '김일성명령 제10호-유격지대 개편'을 전면 폐기하고 장기전 태세로 돌입하여 당사업 위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또한 "각 지구조직위원회를 조직하여 칠체의 당사업을 지도하도록 한다", "각 지구조직사업에 있어서 간부문제 해결과 배치는 원칙적으로 각 조직위원회에 일임한다"라고 명시 되었다.

이러한 지시는 다른 지시와 마찬가지로 94호 결정서 역시 산넘고 물건너 1952년 중반에야 가까스로 이현상에게 접수된다. 그 과정도 눈물겨운데, 문서를 소지하고 남하하던 연락원이 국군에게 체포된다. 그러나 이현상에게 접근하기 위해 해당 연락원을 설득하여, 전향한 인민군 출신들을 대동시켜 지리산으로 보낸다. 연락원은 지리산에서 경남도당 김상홍과 만나지만 이들이 배신했다는 것을 금새 눈치챈다. 하지만 문서 자체가 워낙 중요하여 이현상에게 연락원과 문서를 압송한다. 그 덕분에 94호 결정서가 이현상에게 갔지, 아니면 영원히 모를 뻔 했다. 이설로 연락원이 의심스럽기는 했는데 이현상이 감싸 줘서 그냥 있다가, 지리산에서 도망가다가 사살되자 더 수상해서 군경의 쁘락치가 아닌가 의심했다는 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서의 형식이나 내용은 군경의 조작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였다. 이 연락원은 해주군당 위원장 안진규라고 하는데, <이현상 평전>에서는 전향한 연락원 사건 이후, 또다른 전향자인 안진규가 침투 했다가 실패하고 도망갔다도 한다. 이후 안진규는 56연대 수색대장이 되어 다시 빨치산을 잡으러 와 이현상을 사살하는 대공을 세운다.

당 중앙에서 지시한 지구당 편제와 가장 중요한 2개 항은 다음과 같다.
(1) 행정구역 단위의 당 조직은 잠정적으로 해체하고 다음의 5개 지역을 설정, 각 지구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여 일체의 당 사업을 지도하도록 한다.
제1지구당 : 서울 및 경기도 전역
제2지구당 : 남강원도 전역(울진군 제외)
제3지구당 : 충·남북도(논산군 제외)
제4지구당 : 경북 전역, 경남 낙동강 동쪽, 강원도 울진군
제5지구당 : 전남·북도, 제주도, 경남 낙동강 서쪽, 충남 논산군
(2) 각 지대 단위로 활동하고 있는 유격대들을 지구당 조직위원회 지도하에 두며 중대 단위의 소조로 개편하여 활동의 민활성을 보장한다.

제1․2지구당 지역은 도당 위원장들이 북으로 날른 상태라 도당 조직이 빨치산화 되지 못하고 지리멸렬 하였다. 제3지구당의 충남북은 험악한 산이 없어서 빨치산이 숨을 곳이 부족하였다. 이 때문에 하도 궁핍하여 도토리만 주어 먹는다고 도토리 부대로 불리는 곳으로 남부군이 강원도에서 남하할 때 합동 작전을 펼치며 충남 도청 소재지를 급습할 정도로 끝발 날리기도 했지만 이당시에는 약체화 되었다. 제4지구당은 이미 경북도당과 남도부 부대간에 협조가 원활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3개도당+남부군이 몰려 있는 제5지구당이다.[84]

52년 중반기에 가서야 다음과 같이 지구당을 개편한다.
제1지구당 : 위원장 김점권, 부위원장 박광희•한창근
지리상 가까워 가장 먼저 명령을 접수하여 지구당 개편을 한다. 본부를 이북의 황해도 용영면 구룡리에 두었다가 51년 10월에 개성으로 옮겨 공작원을 남파하여 당 재건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52년 4월에 결국 해체한다.

제2지구당 : 위원장 유오규(강원도당 로동부장),
51년 11월 조직. 본부는 이북의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하현리에 두었다.
강원도를 4개 소지구당을 나눠 당재건 공작을 했다. 당본부를 삼척군으로 옮기기 위한 122무장대를 침투 시키는등, 여러차례 공작원을 침투시켰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소지구당도 조직하지 못했다.

제3지구당 : 위원장겸 충남소지구당위원장 남충렬(충남도당위원장), 충북소지구당위원장 송명현
전 청주시당위원장 신정식이 남파되어 52년 8월 94호 결정서를 전달하여 조직개편을 이룰 수 있었다.
정상적으로 활동한 3개 지구당중에서는 최약체.

제4지구당 : 위원장 박종근(경북도당위원장), 부위원장 겸 유격부장 남도부, 정치위원 안철(남도부 부대 정치위원)
52년 6월경 개편하게 된다. 이태의 <남부군>에서는 기존의 3지대장이 박종근, 부지대장 남도부라고 나오지만, 실록 <남도부>에서는 부임전에 사망한 길월팔 대신 남도부가 사실상 5지대장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4지구당은 3지대와 5지대가 통합되는 형식이라고 한다. 종합해 보건데,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이 3지대장 신분으로 경북을 관할하고, 남도부는 3지대 부지대장 신분으로 공백지인 경남의 낙동강 동쪽을 관할 한 것으로 보인다.
조직지도위원회에는 이상 3명에 경북도당부위원장 이영섭이 추가되어 조직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부군>에 따르면 의문의 여지는 있지만 박종근은 이미 사망한 상태라 위원장은 공석이였고 52년 11월에 중앙당에서 남파된 이구형이 임명 되었다는 설도 있다.
시점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박종근이 지구당 개편직후 팔공산 인근에서 유격투쟁하다가 전사한다. 그러자 신불산 사령부에서 열린 제4지구당 조직위원회를 통해 위원장에는 남도부 중장, 부위원장에는 경남도당 부위원장 이영섭이 선출된다. 이쪽 주장에는 남파된 이구형은 부위원장으로 합류했다고 한다. 경북도당은 박종근의 사망으로 전투력이 없다시피 하고, 지구당 사령부만을 구성하며 신불산에 있었다.
소설 <남부군>과 실록 <남도부>에 따르면 예하에 9개 소지구당을 두었다고 하지만, <북위38도선>에서는 남도부 부대만 전투력을 보유하였으며 예하에 청도부대(성상성), 동래부대(윤종구), 울산부대(홍길동)가 있어 각지에 소규모 유격대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구당 개편 전후하여 부대장이 모두 사망하는등 부대장 교체가 잦았고 각 부대원도 30명 이하수준이였다.

이들의 활동하는 신불산이 임시수도 부산과 가까운 관계로 이승만은 수시로 빨치산이 나타났다며 계엄령을 걸어 야당 탄압 및 정권 연장을 위한 개헌의 수단으로 애용한다.[85]

그리고 피터지는 개편이 이뤄질 것 같은 대망의 제5지구당...
1952년 10월 제5지구당 창설을 위한 도당위원장회의가 지리산 뱀사골에서 열렸다. 이회의에 이현상(구 남부군, 현 제4지대장), 방준표(전북도당 위원장), 박영발(전남도당 위원장), 김삼홍(경남도당 부위원장-위원장 사망)등이 참석했다. 지난번 도당을 지대로 개편하라는 지시는 충실히 따랐지만, 기존의 행정구역에 따른 조직체계를 보류하고 6개 도당 해체후 새롭게 5개 지역을 설정하라는 것은 도저히 따르기 힘든 지시였다.

있지도 않는 서울, 경기, 강원 도당의 경우 어차피 북한에 거점을 두고 남한에 재건이 목적으로 1·2지구당이 북한에 의해 만들어 졌다. 3·4지구당도 각각 충남북도당과 경북도당-남도부 부대등 각 2개 도당만 합치면 되었다. 가장 문제가 된 제5지구의 경우 전남북도당, 경남도당, 남부군등 3+1개의 도당급이 해산후 재구성 하여 단일 지도부를 구성하라는 것인데 쉬운일이 아니였다. 기존의 도당은 소지구당으로 지구당 산하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해석 되었다.

이번에도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기본적으로 밀정이 된자가 가져온 문서를 믿을 수 없으며 설사 맞다 하더라도 이는 중앙당이 현지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한 것이니 문제가 있다."라는 주장이였다. 그러나 아직도 이현상의 권위는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결정서 111호 ‘미해방지구에 있어서 우리 당사업을 더욱 강화하는 데에 대해서’에 의해 이현상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에 이번 지시는 확실히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령에 의해 나온 것이였는데, 이는 도저히 박영발이 부인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당의 지시라도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쉬운일이 아니였다. 도당위원장회의에서 일주일동안의 격론 끝에 '도당을 그대로 둔 채 5지구당을 결성한다.'라는 절충안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도당 산하 지구를 소지구당으로 하여 도당 산하에 두었다. 즉 중앙당의 지시는 지구당→소지구당(구 지대 또는 도당)의 2단계로 개편하라는 것인데 결국 지구당→도당(지대에서 도당으로 환원시킴)→소지구당(구 지구)등 3단계로 개편하였다. 즉 꼼수였다.

어쨌든 당의 지시는 절대적이라 조선로동당 제5지구당의 경우
위원장 이현상(구 남부군 사령관)
(상임)부위원장 : 박영발(전남도당 위원장)
부위원장 : 방준표(전북도당 위원장)
조직부장 : 조병하(전북도당 부위원장)
유격지도부장 :박찬봉(전남 지리산전구 위원장)[86]
이상 5명에 김삼홍(경남도당 부위원장), 김선우(전남도당 부위원장 겸 유격대 사령관)가 추가되어 7인의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외에도 다음과 같은 조직을 두어 상부조직이 비대한 빨치산에 또다시 옥상옥이 추가되었다.[87]
위원장 호위대장 김태규(김지회 부대 소조장)
기요과장 김희중(함북 출신), 부과장 이형련[88]
통신과장 남호일(북한 출신)
경리과장 마 실(북한 출신)
의무부장 박춘근(전남병원장)
유격지도 부부장 문남호(경북 경산 출신)

전남도당에서는 박영발이 5지구당 부위원장이 되면서, 공석이된 도당위원장에 부위원장겸 유격대장인 김선우가 임명된다. 이로서 김선우는 2번째로 전북도당 위원장이 된다.
전북도당에서는 방준표가 도당 위원장 자리를 유지하면서 5지구당 부위원장직을 겸임하였다. 부위원장 조병하는 5지구당 조직부장을 겸임하였다.
경남도당에서는 위원장 남경우가 전사했지만 부위원장 김삼홍이 그자리를 잊지 못하였다. 일부 기록에서는 이현상 편에 선 김삼홍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 박영발 때문이였다고 한다. 이현상과 김삼홍은 일제강점기 콤서클 시절의 동료였다. 경북도당 위원장에는 전북도당 부위원장 조병하가 전보되었다.

전북도당의 45․46․53사단은 항미연대와 복수연대로 재편되었다. 사단제 개편을 거부했던 전남 도당은 전남부대와 남태준 부대로 재편되었다.

경남도당은 52년 1월 대성골 전투에서 위원장 남 경우, 부위원장 허동욱과 조영래, 조직부장 강명석, 선전부장 안병화 등 14명의 도당 수뇌부가 전멸되었다. 경남도당의 전투부대인 57사단은 정치위원 김의장이 전사하지만 사단장 이영회가 60명쯤 데리고 탈출 한 후 남부군과 함께 다닌다.

그리고 5지구당 결성을 알리며 상황 보고를 하여 ‘상’부에 ‘선’을 달기 위한 ‘상선연락대’를 만들어, 그 책임자를 남부군 제1부사령관이자 전 승리사단장 이진범으로하여 20명정도로 북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속리산 인근에서 군경에게 포착되어 전멸한다.[89]

94호 결정서에서는 당간부 및 유격대 지도자들을 교육/훈련하기 위해 1천여명을 훈련할 수 있는 간부훈련소를 만들도록 되어 있다. 이에 따라 51년 10월 '금강정치학원'을 설치하고 여기 출신자들을 52년 남파 시켰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파괴되어가는 남한의 각 지구당을 다소나마 지탱하기 위한 새로운 조치가 필요해 결정서 111호 ‘미해방지구에 있어서 우리 당사업을 더욱 강화하는 데에 대해서’가 채택되었다. 이 결정서는 남한정세와 휴전회담을 전망한 장기적인 대책이 포함되었다.
각 지구당에서는 중앙과의 연락을 가지기 위한 사업을 진행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중앙당의 결정이 제때에 전달되지 못했다. 무장투쟁에만 편중하고 당조직사업을 소홀히 했다. 각 유격부대가 대부대로 집결하여 참호를 파고 수일간에 걸친 정규적 진지전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경찰과 헌병조직이 널리 분포된 불리한 환경에서 당과 유격대에 불리한 결과를 준다. 광범한 군중에 대한 선전선동과 통일전선사업이 부족하다.

이에대한 해결책으로 '유격대는 인민과 연결되고 당의 지도를 받으며, 모험적인 전투를 피하며', '당지도부는 산으로 올라가지 말고, 지구당 지도부를 도시로 진출 시킬 것, '합법과 비합법을 결합시킬 것'이 요구되었다. 즉 산에서 내려와 인민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는데 이태의 <남부군>에서는 빨치산의 신상까지 이미 경찰이 파악하고 있으며 일반인과 너무도 다른 그들이 어떻게 하산하냐며 비판적으로 보았다. 실제로 지하당 사업을 위해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 하였다. 잘해야 <빨치산의 딸>의 주인공 처럼 위장자수 해서 들어가는 정도 밖에 없었다. 그것도 한두명은 가능할지도 몰라도 지도부 전체가 하산하는 것은 불가능 하였다.

결국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당의 지시인 '111호 결정서'에도 불구하고 바뀐 것 없이 종전대로 산속에 거점을 잡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보급투쟁만을 자행하였다.

52년 3월 10일 기준으로 군 추계에 의하면 잔존 빨치산의 수는 1,778명이라고 한다. 이 중 소백/지리산 지구가 1,248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남부군의 이태는 그 대부분은 중증동상/부상/질병자/은신중인 면당원/소수의 각 지구 지휘부 요원들이었을 것으므로 가동 전투원은 남한 통틀어 아마도 100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중 7할은 이현상의 5지구당에 모여 있고, 나머지는 4지구당의 군사부장 남도부에게 있을 것이라고 예측 했다.

제 5지구당은 4월 30일 조직위원회를 통해 결정서 8호를 채택하여, 기존 군면 단위로 소조 활동을 해오던 잡다한 부대들을 통합한다. 이로 인해 기존에 각 도당산하의 각종 부대들은 전북부대(부대장 방준표), 전남부대(부대장 김선우), 경남부대(부대장 조병하)[90], 김지회부대(부대장 김흥복), 제주부대, 논산부대로 통합제편된다. 제주와 논산부대의 경우 실존하지 않은 서류상의 부대로 이지역이 제5지구당의 책임구역이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이결정서는 이현상의 견제라는 성격도 있었다. 기존에 이현상 예하의 각종 부대를 각각 지역별로 독립 시키고 친위대격인 김지회 부대만 남겨 놓은 것이다.[91]

이무렵 토벌대도 개편이 있어 53년 5월 1일자로 그때까지 남경사(서남지구 경비사령부) 예하에 있던 군경 합동부대 중 경찰 부대를 독립시켜 서전사(서남지구 전투경찰대)를 남원에 설치하였다. 군경의 경쟁심을 유발하려는 의도는 좋았다 실전에서는 많은 차질과 마찰이 수반되었다. 어쨌든 그동안 경찰은 모루 역할을 하고 군부대라는 망치로 후려치던 연합작전에서 각자 작전 펼치는 2원적 체계로 바뀌었는데, 어차피 이시기 잔존 빨치산 세력이 워낙 미미해 예전 처럼 수만명을 동원하는 대대적인 포위작전이 더이상 소용이 없다는 현실론이 반영되었다. 경찰은 전투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였지만 경찰서 별로 보유한 사찰유격대가 몇명 안남은 빨치산을 추적/매복하여 토벌하는데 대단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정각. '3년 1개월 2일 18시간'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유엔군 쪽에서는 유격대 안전철수를 제안했지만 묵살당했다. 북한은 이 제안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서 빨치산은 북한으로 부터 버려지게 되었다. 이때 기준으로는 남한 잔존 공비는 1,388명으로 추정된다.

10. 남로당 숙청

1951년 11월 10일~14일 평양에서 열린 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는 향후 김일성의 정적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예고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김일성은 '인민군 후퇴시 우익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에 대해 비판하고(김무정, 방호산연안파), '민족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외국의 것을 기계적으로 반입하는 사업 작풍'을 비판했으며(소련파), '미제의 탐정과 암해분자들과 기타 모든 적대분자들이 로동당에 기어들지 못하도록' 하라(박헌영등 남로당)는 일장연설을 하였다.

52년 12월 북한 로동당은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를 통해 박헌영·이승엽등 남로당 숙청을 실시한다. 남한의 빨치산측은 1953년 봄에서야 중앙통신을 통해 이 엄청난 소식을 접한다. 53년 가을에는 사법 처분을 받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보도와는 상관없이 실제로는 이미 52년 12월 15일 로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 뒤에 체포 구속 되었고, 스탈린 사망후인 53년 3월 5일부터 평안북도 천마군 골짜기에서 당성검토를 받아오고 있었다. 제일 먼저 월북 시인 임화가 체포되었고 뒤이어 빨치산 총책 이승엽, 부책 배철/박승원, 빨치산 독립 10지대장 맹종호, 그밖에 중요 직책에 있던 윤순달, 조일명, 리, 이원조, 설정식 등 남로당 고위간부들이 줄줄이 쓸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대구 10.1 사건,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은 물론 심지어 6.25 전쟁까지 모두 이들이 혁명역량을 말살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 부터 일제의 간첩(...)으로 암약했고 해방 후에는 미제의 간첩으로서 북한을 파괴하기 위해 월북했다는 것이다. 또한 월북한 남로당원 교육기관이였던 강동정치학원은 한국전쟁후 해체되었다가, 황해도 서흥군에 금강정치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교육을 실시하였다. 박헌영과 김응빈이 남한 지역에 내려 보낼 유격대와 지하당 간부를 양성하였는데, 숙청이 시작되자 반역을 위한 사설 군사집단으로 의심되어 학교는 폐교되고 학생들을 강제로 중앙당학교에 수용되었다.

휴전 3일 후인 7월 30일에는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으로 기소된 것이다. 이때 남로당 숙청의 일환으로 사법상 이승엽등 남로당계 간부 12여명이 기소당하여 윤순달(징역15년)과 이원조(징역12년)를 제외한 10명이 8월 6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남한 유격대를 전담하는 유격지도처(526부대) 처장인 배철, 부부장 박승원, '독립10지대장' 맹종호등이 처형당해 빨치산의 최고지도부가 싹 털려 버렸다. 단, 이들 12명과 함께 조사받던 박헌영만은 워낙 거물이라 소련측에서 보호 해주어 기소되지 않았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2년후 처형당한다.

상술했다시피 빨치산의 근원은 입산한 남로당 세력으로, 이들이 바로 이른바 구빨치이며 박헌영의 군사력이였다. 그러나 당의 지시는 절대적이였다. 빨치산측은 회의를 소집하여 당 중앙의 일련의 결정들을 수락지지하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중견간부 이상에게 자기비판서[92]와 충성서약서를 제출케 하고, 일선부대원에게 종파행위를 비난하는 사상교육을 강화하여 내부 동요를 막았다. 처형당한 월북 시인 임화가 작사한 빨치산의 노래들은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다. 하지만 빨치산의 근본이 남로당이고 그 남로당 숙청 소식에 대한 충격은 컸다.[93] 남한에서는 남로당 숙청을 전형적인 권력투쟁으로 본 반면에, 생존한 유격대와 주사파는 수십년동안 북한의 발표를 철저히 신뢰하였다.

53년 8월 26일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 확대회의가 지리산 토끼봉 아래 목동골에서 열렸다.[94] 5지구당 간부 20명이 참석했는데, 박헌영·이승엽의 영향을 청산하고 사상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그동안 나름 잘돌아가던 5지구당을 해체하기로 한다. 조직위원회 7인중 이현상의 편은 경남도당 부위원장 김삼홍 뿐이였다. 그나마 전남도당 부위원장 김선우와 지구당 유격지도부장 박찬봉은 대세를 따르는 편이였다. 그에 반해 지구당 조직부장 조병하는 방준표와 뜻을 함께 했다.

먼저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포문을 열었다. “(미제의 간첩인 박헌영 일당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자신의 과오를 자아비판하며)반당분자의 술책에 속아 동지들을 죽음으로 내몬 데 대해 나부터 자아비판하겠소. 그리고 부위원장을 사퇴하고 평당원으로 돌아가겠소.” 박영발이 동귀어진의 정신으로 모든 직위를 버리고 평당원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이현상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여기에 이승엽이 중앙당의 허가도 없이 개인적으로 결정한 구두지시에 따라 마음대로 남부군을 결성했다는 것, 이설물 파괴, 요인 암살 등 소규모활동으로 후방을 교란해야 할 유격대를 정규군처럼 운용함으로써 괴멸시켜버렸다는 것, 당 간부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고 하수복과 연애를 했다는 등 이현상에 대한 개인 비방도 들어갔다. 결국 이현상을 포함한 5지구당 간부들은 현직위를 사퇴하고 백의종군 하기로 했다. 이에 결정서 9호 ‘반당, 반국가적 파괴 암해분자, 종파분자인 박헌영, 이승엽 반역도당의 잔재와 영향을 근절, 청소하기 위한 제반 대책’을 채택하고 해산했다. 결정서 9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반당 반국가 파괴 암해 종파분자 박헌영, 이승엽 반역 도당의 잔재와 영향을 근절 청소하기 위한 제반 대책
제5지구당의 조직을 반당 반국가 종파적으로 자기들의 간악한 목적에 복종시키고자 이승엽의 심복부하 여운철로 하여금 1950년 11월 9일 강원도 후평에서 지시하기를, 남부지방 6개 도의 당 지도사업을 위임하고, 이현상 동지에게 상기 6개 도의 유격부대들에 대한 통일 영도를 위임하여 지금까지 불합리한 조직체 운영을 하면서 각 도당 단체와 유격대들을 사상적 조직적 전투적으로 혼란 악화시켰으며, 특히 전북 경남 유격대들은 거의 전부 파괴시켰으며, 경남 도당의 중요 간부들은 남김없이 전멸시켰으므로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는 박헌영 이승엽 반역 도당들에 대한 결정적 대책을 적극적으로 지지 옹호하면서, 그 반역 도당의 영향과 5지구당을 포함한 그 잔재를 철저히 근절 청소함에 수반, 제5지구당의 조직적 사상적 총정리를 1953년 9월 10일까지 완료할 것을 이현상 동지에게 책임 지운다.
- 최화수 <지리산 반세기> 182페이지

뒤이어 9월 6일에는 지리산 빗점골에서 조직위윈회가 재소집 되어 앞선 회의결과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5지구당 결정서 제10호'가 채택되어 박영발의 제의로 5지구당 자체가 해산되었다.
9월 6일 박영발의 보고로서 제5지구당을 해체한다.
1. 제5지구당 요원 및 김지회 부대 대원을 구례군당•남원군당 및 경남도당에 각각 분산 소속케 한다.
2. 구국출판사를 조직하여 박영발•송영회가 운영을 책임진다.
3. 제5지구당 잔무정리 및 재정비품 일체를 박영발이 인수한다.
4. 송신기, 수신기 설비 및 전원 등에 대한 구입 보장을 이현상•조병하가 책임진다.
5. 제5지구당 문서 일체의 비장은 김희준이 책임진다.[95]
6. 김지회부대는 구례군당이 당적 지도를 담당하고 995부대로 바꾼다.
-최태환 <젊은 혁명가의 초상>

5지구당 위원장이자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모든 직위를 박탈 당하고 평대원으로 격하 되었다. 이후 무장해제 당하고 반감금 상태로 열흘간 감시당하다가 경남도당으로 이송중 군경에게 사살 되었다. 이현상 직계이자 친위부대 역할을 했던 김지회부대는 전 인민여단 참모장 김태규를 부대장으로 하여 전남도당 구례군당의 산하로 들어가고 이름도 995부대로 바꾸었다. 기타 사령부 요원과 전투부대는 아예 해체당하여 각 도당, 군당으로 분산되었다.[96] 이후 모든 지구당과 유격대에서 '반역도당의 잔재 청소작업'이라는 명목으로 이현상에 대한 비판회가 계속 되었다. 남부군 출신들은 매일같이 열린 회의에 출석해 종파분자 이현상의 오류와 종파성을 비판하도록 강요 받았다. 이는 이현상이 평소 총애하던 자이든, 이현상을 잘 알지도 못한자이든 예외 없었다.

이현상과 동귀어진한 5지구당 부위원장이자 전남 도당 위원장이였던 박영발은 "(자신이) 미제의 간첩 박헌영의 주선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것을 반성한다"는 자기비판을 한 후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전남 도당에서 분리되어 ‘조국출판사’라는 이름으로 25명 정도 이끌고 나오게 된다.

부위원장이자 전북 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자료와 불참했다는 자료가 엇갈린다.

이로서 지구당 체제는 물론, 남부군 까지 해체되었다. 그리고 평대원으로 격하되어 무장 해제까지 당하고 반감금 상태가 되었다. 경남도당으로 이송할 예정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아마도 경남도당 부위원장 김삼홍과의 친분때문으로 추측된다.[97] 여기에 경남부대는 2병단 시절 동지였던 이영회가 부대장으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남도당으로 가기를 자청했다고 한다.
이송대기로 홀로 외롭게 지내던 종파분자(?) 이현상은 겨우 열흘 후, 53년 9월 18일 오전 11시 5분 차일혁 총경의 서남지구경찰대 2연대 산하 사찰 유격대에 의해 시체로 발견되었고, 이후 시체는 창경원에 전시된다.[98]

동년 9월 21일 경찰 토벌대는 남원군 아영에서 전 5지구당 유격지도부 부부장 문남호(27세)를 생포하고 5지구당 내분의 진상을 알리는 2개의 문건을 압수했다. 그동안 생포된 하급 대원들의 입을 통해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챘지만, 이번에는 간부를 통해 직접적인 문서로 사실 확인을 하게 된 것이다. 조선로동당 제5지구당 결정서 제9호 '박헌영, 이승엽 도당의 잔재와 영향을 청소하기 위한 대책'과 이를 구체화 시키기 위한 행동 방안 결정서 제10호가 바로 그것이다.

마침 동년 동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을 잡지 않고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리산 평정 없이 남한의 평화가 없고, 이현상의 생포 없이 지리산의 평정이 없습니다. 나는 평화협정을 위해 이현상을 직접 만날 용의가 있습니다.”라는 특별 담화를 발표했었다.

북한에서는 53년 2월 5일 이현상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 했다.

52년 8월 6일 이승엽과 유격지도처 간부들이 사형선고당한 것과 달리, 남로당계 총수인 박헌영만은 모스크바의 개입으로 재판이 지연되어 55년 12월 15일에야 사형이 언도된다. 그는 “미군정의 지령을 받고 무장폭동을 준비했고, 금강학원을 통해 유격대를 증강해서 미군의 원산 상륙을 계기로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 내가 그 총사령이었는데 그 이유는 내 사상적 근본이 나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그에 비해 남도부의 제4지구당은 해체하지 않았다. 남도부의 강력한 지휘하에 활발한 유격활동을 벌였다.[99] 남도부의 항목에도 있지만 그는 남로당 출신이 맞기는 하지만, 월북한 이후 김일성에게 포섭된 상태라 남로당과 관계가 소원하였다. 다른 도당 지도부 처럼 남로당 중앙에서 활동 경력조차 없었다. 이현상이 죽은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벌였는데 '111호 결정서'에 따른 도시침투작전을 준비할겸 53년 10월 1일 각 소지구당의 유격부대를 개편하였다. 김진구부대는 신불산 사령부에 주둔하였고 안철•추일 부대는 부산 및 동래 방면으로 침투, 유응재부대는 대구 및 팔공산으로 분산하며 부대명도 팔공산 부대로 변경할 것을 각각 지시하였다.
이무렵 김진구 부대의 작전참모로 차진철이 임명되는데 그의 본명이 바로 성일기로 <북위38도선>의 주인공이며 나중에 여동생 성혜림김정일과 결혼을 하게 되어 처남이 된다. 남도부는 차진철에게 고향인 창녕으로 내려가 지하활동을 하라고 지시한다. 이어 남도부는 53년 11월경 대구에 있는 차진철의 누이 성기수의 집에 나타난다.[100]

제3지구당의 경우 아직 위원장 남충열이 활동은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정도는 미약했다. 워낙 정보가 없어서 더이상은...

53년 8월 군경은 잔존 유격대의 숫자를 325명으로 보고 있었다. 군경측은 유격대원의 이름이나 소속, 출생지등을 정확하게 파악 하고 있는 상태이니 지금까지의 추정치와는 달리 비교적 정확한 숫자였다. 그나마 그중 비무장 인원은 73명으로 중환자 아니면 빨치산 혐의의 산간 부락민이며 오히려 산중에서는 무기가 남아돌았다. 한창때의 100의 1밖에 안되는 숫자로 쪼그라 들었을 정도로 초라해진 조선인민유격대였다.

11. 제2차 대토벌작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빨치산 간부들은 휴전이 될 것 같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휴전 협상에 따라 북송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협상중 남한에서는 제발 데려가달라고 했지만 북한에서는 남로당의 군사력인 빨치산을 거부하였다. 이때 받은 빨치산들의 충격은 대단한 것으로 특히 자수나 포로가 된 후 훈방조치되어 남한 사회에 들어와 있어 신문을 통해 정보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이러한 냉정한 태도에 분노하게 된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지하조직 건설을 하기 위해 위장자수 했던 빨치산들도 전향해버릴 정도. 이제는 왜 싸우는지 골수 공산주의자들도 알지 못했다. 도당 위원회나 민청 같은 행정 조직이 입산해서 싸운 것은 제2전선을 형성하여 조국해방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는 뭘 위해서 싸우는 것인가?

이미 사상적 동요가 심각한 상황에서 빨치산은 연거푸 사상적 충격을 맞게 되었다. 평대원이야 투항하면 죽는 줄로만 알았지만, 실제로는 간단한 조사후 훈방 처리한다는 것을 간부급이라면 알고 있었다. 기존에는 없던 간부급 자수자가 속출하였다.

어쨌든 휴전으로 이제는 전력이 남아돌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2월 문봉제 치안국장에게 “1년 이내에 후방 공비를 평정하라”라는 엄명을 내렸고, 동년 12월 11일부터 제2차 대토벌작전이 실시되었다. 물론 이때도 작전 지역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전투서열 등은 다음과 같다.

박 전투사령부 : 박병권 사령관
제5사단 : 사단장 박병권 → 한신(3개 연대)
남부지구 경비사령부 : 유해준(1개 연대, 2개 대대)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 신상묵(4개연대)

1차 대토벌 작전의 백 야전사령부의 포스에 비해서는 조촐하지만[101], 어차피 빨치산의 전력도 1차 작전 시기에 비하면 초라하였다. 제5지구당(구 전남도당)의 경우 잔여세력이 대충 찍어 400~450명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1차 대토벌 작전 직후보다 더 줄어들어 있는 상태였다.

제1기 작전 : 1953년 12월 11일 ~ 1954년 2월 10일
제2기 작전 : 1954년 2월 11일 ~ 1954년 3월 31일
제3기 작전 : 1954년 4월 1일 ~ 1954년 5월 25일

상술했다시피 겨울은 전투가 없어도 얼어죽고 굶어죽는 시기였다. 여기에 더하여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되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경찰의 상시적인 토벌작전으로 겨우겨우 연명하던 빨치산들은 2차 대토벌 작전으로 아예 전멸해 버린다. 군경은 이제 빨치산의 행동 루트와 잠복지점을 꿰뚫고 있었고, 누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맡고 있는 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여기에 경찰의 사찰유격대(투항한 빨치산 출신. 일명 보아라 부대)가 야간에도 침투하여 빨치산의 목을 따고 다녔다.

54년으로 접어들면 "잔존 빨치산들은 열 명 안팎의 단위로 나뉘어 지휘자의 성을 붙여 김소부대니 박소부니 하는 소조활동을 하고 있었다(이태의 <천왕봉>中)." 또한 이태는 지휘부에서야 정전투쟁이니 지하당투쟁이니 그럴싸한 구호를 외쳤지만, 이러한 소조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말 이외는 찾지 못했을 것이라며 자조하였다. 그나마 2차 대토벌 작전으로 빨치산들의 조직적인 저항은 완전히 끝난다. 이후로는 선떨어진 잔당 한두명이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산간 마을에 나타나 마을 사람을 놀래킬 뿐이었다.

12. 최후

충남도당은 원래도 세가 약했지만 51년말~52년말의 군경의 1차대공세때 전멸한다.

경북도당은 52년 2월경 위원장 박종근이 사망하면서 절단난 상황. 북한에서 이구형을 보내 경북도당 재건을 지시했지만, 53년말 전멸한다.

가장 세가 강했던 전남도당의 경우 국군 5사단의 집중타를 받았는데, 도당 위원장이자 전남 동부지도부를 이끄는 김선우[102]는 54년 4월 5일 백운산에서 이동중 저격을 받아 즉사하였다.[103]

전 도당 위원장이자 현 조국출판사 책임자 박영발은, 1954년 2월 21일 지리산 배암사골에서 총상을 입은 후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던 주치의 박00이 쏜 30연발 카빈 소총 난사를 맞고 사살되었다. 예전에는 53년 1월 토벌대에 포위되어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알려졌다. 소설 <남부군>, 실록 <남도부>등 상당수의 책에서 잘못 알려졌다. 2008년의 책인 <전남 유격투쟁사> 부터는 바로잡혀 있다. 다만 이 책에서는 그냥 배신자가 쐈다고 하며 누구인지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사건 당시 카빈 소총을 맞고 쓰러진 박영발의 비서인 이정례가 수류탄을 던져 주치의를 죽였다. 이정례도 부상으로 쓰러져 있었는데 다음날 보급투쟁을 마치고 돌아온 조국출판사 필경사 박남진, 이주하등 7명에게 구해졌고, 이들에게 모든 사실을 알린다. 2005년에야 박남진이 이 사실을 언론을 통해 알리면서 대중에게 밝혀졌다. 물론 살아남은 비전향 장기수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다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내부적으로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쪽팔려서 이를 감추기 위한 의도와 국군측의 전과 부풀리기가 겹쳐져서 발생한 병크. 심지어 위의 기사에는 왜 그 사실을 지금 까밝히냐는 힐난의 댓글까지 있다.

전남 유격대 총사령관 오금일[104]은 1953년 가을 무렵 말봉산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105] 5지구당 유격지도부장이었던 박찬봉은 거창군 북상면에서 사살당한다. 전남도당의 외팔이 부대장 남태준은[106] 1954년 3월 8일경 생포되어 군사재판을 통해 동년 12월 24일 대구에서 처형당했다. 또한 이들이 지휘하던 무장세력도 전멸하였다.

또한 구례 군당 위원장 강경구가 대토벌 작전이 끝나고 살아남은 빨치산 40명정도 규합하여 ‘상승부대’(산성부대?)라고 이름 붙이고 지하조직과 접촉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보성 문덕에서 전멸 당함으로서 부대로서의 빨치산은 존재하지 않고 지도부도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지하로 내려갔거나 도망다니던 극소수의 빨치산들만 있었는데 그것도 전남 서부지도부[107]를 이끌던 박갑출 등 5명은 1955년 3월 3일 경찰에게 비트가 발각되며 자결함으로서 전남도당의 무장유격투쟁은 완전히 끝난다.[108]

전북도당의 경우 도당 위원장 방준표가 54년 1월 31일 덕유산 기슭에서 토벌대와의 전투중 생포될 위기에 처해지자 자폭하면서 거의 끝났다. 국군 제5사단 36연대 정창호 중위가 이끄는 수색대는 먼저 주변에서 7명을 사살하고, 다시 1046고지를 수색중 방준표 등 5명을 발견한다. 마이크를 통해 투항 권고를 하며 3일이나 기다렸지만 끝내 불응하여 할 수 없이 57밀리 무반동총과 수류탄으로 공격하자, 남녀의 목소리로 '김일성 수령 만세!',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른 후 잠잠해졌다고 한다. 그러니 폭사인지 자폭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비전향 빨치산들의 책에는 영용한 방준표 동지가 썩어 빠진 군경의 총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은지 죄다 자폭으로 써놓았다.[109]

경남도당은 이미 52년 1월 지리산 대성골 전투로 지리멸렬한 상태였다(위원장 남경우는 여기서 사망).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영회부대 최후의 서른명 가량은 53년 11월 23일 백주 대낮에 의령경찰서를 정면공격한다. 남부군때나 볼 수 있는 막가파 스타일이었는데 마침 그날이 '의령인의 날'(...)이라 경찰 대부분이 시내에 지원을 나갔고 경찰서에 상주하고 있던 경찰 인력이 경찰서장 포함 10여 명만 남아 있는 상황이라 쉽게 성공해 버린다. 이로써 경찰서장 등 5명을 사살하고 경찰서와 군청 등 건물 48개동을 불태워 버렸다. 다 죽어가는 걸로만 알았던 빨치산들이 이런 황당한 짓을 하자 인근 경찰서에서 모두 몰려와 이영회 부대를 집중타를 때리게 된다. 반란군 14연대 출신의 부대장 이영회는 27일 서전사 전경 5연대의 매복에 걸려 사살되었다. 27일 경찰의 습격으로 전멸한다. 또한 이 전투는 군경의 빨치산 편제 부대와 마지막 교전 기록이다. 이영회부대 잔존 병력은 12월 1일 역시 5연대의 총공격에 완전 섬멸된다.

그나마 도당 부위원장 김삼홍만은 53년 11월 지하당 조직을 위해 하산했다가 다음해 여름(혹은 55년 1월 14일?) 검거되어 34년 동안 투옥된다. 89년 9월에 풀려나 바로 부산 메리놀병원에 입원했다가 90년 2월 사망한다. 5지구당의 7인의 조직위원중 유일한 체포 사례이며 남한 6개 도당 부위원장 이상급 이상 중에서도 유일하다.

5지구당 조직부장이자 전남도당 부위원장 조병하는, 5지구당 해체후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경남으로 갔다가, 54년 1월 6일 지리산 천왕봉 북동쪽 조개골(경남 산청군)에서 생포된다. 전향을 거부하고 자살까지 기도했다가 사형을 언도 받고 총살 당한다.
단 이미 두달전에 15명 밖에 안남은 북부소지구당을 재건시키기 위해 도당 15명, 이영회부대 25명을 차출하여 북부소지구당 노영호에게 보내놓은 상태였다. 이로써 60명 가량으로 불어난 북부소지구당은 의령경찰서 습격사건과는 관계 없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위원장 박찬봉(제5지구당 유격지도부장) 아래 노영호 부대를 구성했다.

남부군은 53년 9월 해체되어, 직속 부대는 전남북 도당과 경남 도당으로 공중분해 되었다. 평당원으로 강등된 이현상은 그 직후인 9월 17일 사찰유격대에 걸려 사살. 김지회부대는 995부대로 개편되어 김태규가 이끌고 전남 구례군당 산하로 들어간 상태였는데 12월의 국군의 2차공세때 방향감각을 잃고 군부대에 투항하게 되었다. 이로서 남부군은 그 잔존세력 마져 끝장났다. 확인 가능한 반란군 14연대의 최후의 빨치산은 승리사단장→81사단장→김지회부대장 테크를 밟은 26세의 김흥복으로 53년 12월 부상으로 환자트에 있다가 5사단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리에서 시작된 여순반란사건은 정확히 5년 2개월만에 그 잔당까지 토벌된다.

그나마 남부군 문화공작대의 문화예술인들은 살아 남아 여러가지 방법으로 빨치산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시인 이명재와 김영, 작가 이동규, 화가 양수아, 미술평론가 문춘, 성악가 최순회, 기자 이태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외 <빨치산의 딸>의 주인공이며 저자의 엄마인 정치지도원 이옥자, 연락원 하종구,[110] 전속부관 고송균 등이 살아남아 빨치산을 추모하기 위해 가끔 모였다.

이로써 남한 6개 도당 지도부와 남부군은 죄다 전멸하고 남도부만 남았다. 남도부는 '결정서 111호'에 따라 도심으로 침투하여 지하공작을 실시할 예정이였다.[111] 이에 남도부는 거점을 부산인근의 신불산에서 대구의 팔공산으로 옮겼다. 작전참모 성일기(<북위38도선>의 주인공)를 사전 침투 시켜 선을 확보 해 놓은 상태였다. 성일기는 창녕에 있는 큰아버지 성윤경과 누이인 성기수에게 대구로 가서 자신과 남도부를 맞이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전 확인차 53년 12월 31일 대구에서 큰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실은 이 모든 과정을 육군본부 특무부대(특별수사반장 최룡 대위)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최룡 대위는 사전에 큰아버지와 누이를 만나 이미 포섭하였고, 둘은 다시 찾아온 성일기를 설득시켜 자수하게 만든다. 그리고 남도부가 약속한데로 대구의 성기수의 집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남도부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부관인 홍만식, 팔로군 출신인 군의장 지춘란 소위, 팔공산 부대장 유응재 등을 잇다라 내려보내며 성기수의 집의 간만 보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한 낌새를 보여도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특무부대와 차진철은 남도부가 팔공산 아지트에 있는지 알았지만, 그는 이미 다른 루트로 대구시내로 내려와 동인동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그러나 54년 부하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된 후 55년 여름 총살되었다.

이과정은 1970년 초에 동양라디오(DBS)에서 방송된 <광복20년>중에 한달간 방송된 <남도부사건>에서 잘 나와 있다. 극작가인 김교식이 남도부를 체포한 수사담당자를 취재하여 그들의 공로 위주로 하여 훌륭한 '반공홍보프로'로 만들었다.

55년 4월 1일 간단한 공고문이 지리산 일대에 나붙으며 입산 금지가 해제되었다.
공고, 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히 섬멸되었습니다.
단기 4288년 4월 1일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백

이로서 공식적인 빨치산 진압은 종료되고, 이후 잔존 세력은 ‘망실공비’(亡失共匪) 혹은 ‘잔비’(殘匪)로 불리며 군대나 해체된 전투경찰이 아닌, 행정경찰의 사찰계 형사들에 의해 추적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경찰이 추산한 남은 전체 망실공비는 59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1960년에는 15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은 더이상 허울좋은 조국해방전쟁 따위가 아닌 오직 살기 위해서 산을 헤메다가 하나 둘 죽어갔다.

1963년 10월 16일, 지리산(산청군 생초면 고읍의 용수로 둑)에서 총에 맞은 두 변사체가 카빈소총 두자루와 실탄 40발과 함께 발견되었다. 경찰에 포위되자 1명이 동료를 사살하고 자살한 것이었다. 안완도와 강우형이라는 이름의 망실공비였다. 이들이 잡히면서 정순덕(빨치산) 일당이 최후의 망실공비가 된다.

1963년 11월 12일, 지리산 내원골(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일대)에서 경남도당 이영회부대 출신의 정순덕이 생포되고 이홍이가 사살되었다.[112]

13. 그 이후

살아남은 대원들은 전향서를 쓴 대원들과 전향서를 안쓰고 비전향 장기수란 이름으로 수감생활을 한 소수로 남게 되었다. 비전향 장기수의 경우 중간에 전향서를 써서 나온 사람도 있었고 문민정부국민의 정부 시절에 친북 계열 인사들은 몇차례에 걸쳐서 북송하고, 반북 계열 인사들은 석방되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한편 전향서를 쓴 사람들은 그냥 남한사회의 색안경속에서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살아간 사람이 있는 반면에 몇몇은 서류로만 전향서를 작성했을 뿐 남한사회를 인정하지 못했고 혁명 세력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독재정권하의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대학생들과 접촉을 하였고 이들과 민혁당 사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운동권의 원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초기엔 서울의 빈민으로 살았지만 박정희 정권의 개발논리에 따라서 서울에서 쫒겨나면서 광주대단지로 유입되었다. 그러던 중 광주 대단지 사건이 발생하면서 성남시 특유의 거칠고 반정부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이들이 남한사회에 물들지 않을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근처 가장 가까운 대학교인 한국외대 용인캠퍼스의 학생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는 경기동부연합이 자신들을 빨치산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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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에서는 행동대라고 불리는 도시유격대가 창설되었다.[2] 보성전문학교 31회 졸업생. 고려공산청년회 간부, 남조선 민청 위원장, 강동정치학원장이라는 설도 있다.[3] 1대대장 김흥복, 2대대장 김환영. 3연대는 목포 형무소를 공격하여 350명 탈옥시켜 충격을 주었다.[4] 2사단 대전, 3사단 대구, 5사단 광주 담당.[5] 여순사건의 주역이었던 김지회는 이곳의 전신인 평양학원 대남반에서 교육받고 대한민국 국군에 침투하였다고 한다.[6] 현재는 승지골로 이름이 바뀌었다.[7] 대구고보, 조치대학, 학병 출신. 6.25 전에는 경상남도 군사책으로 경남도경에 체포 후 전향함. 남로당 총책 김삼룡체포에 관여한 후 위장입북 한다. 이를 모르는 리승엽에 의해 다시 남파 되었다가 6.25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온 좌익들이 그가 배신했다고 알려서, 빨치산 '임종환 부대' 정치위원으로 배치 시켜 살해 된다.[8] 전 충남도책 으로 전 충남 논산군당책 곽해봉, 전 충남 대덕군당책 박천평/고판수등과 함께 남파 되었다. 이후 이승엽에 의해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6개도당 총정치위원이 된다.[9] 이후 남한이 북진하여 북한의 대부분을 접수했을 때, 북한에서 활동했던 지하세력을 무시하고, 남한에서 활동했던 서북청년단 간부 등으로 도지사 이하 조직을 만들어 낙하산으로 내려보낸 것과 비슷하다. 심지어 이후 후퇴과정에서 버려진 것도 비슷.[10] 국군 북진 이후 서울에서는 빨치산 활동이 불가능하여 강원도로 가서 활동한다.[11] 박광회? 별오리 대회(50년 12월 21일 로동당 중앙위원회 3차 정기대회)에서 질서있게 후퇴하지 못하고, 허락 없이 남한 임지를 이탈한 책임을 물어 출당조치.[12] 별오리 대회에서 같은 이유로 출당조치.[13] 위의 문장에는 50년 6월초에 이주상이 남파되어 도당위원장을 하였다고 나와 있는데, 6.25 이후 도당위원장 자리를 북로당계인 남충열에게 넘겨주고 이주상은 당시 의용군으로 조직된 충남대전여단장이 되었다.[14] 출신지는 전라남도가 아니라 경상북도 봉화군이다.[15] 6.25 직전에 국군의 강력한 토벌로 지방 빨치산이 전멸직전의 상황에 몰리자 자포자기한 심정의 위원장이 엽색행각에 빠져들어, 이에 대한 과오로 총살된다. 그리고 부위원장이였던 김선우가 도당위원장이 된다. 그러자 6.25가 터지고 중앙당에서 모스크바 당학교 유학파 방준표가 낙하산으로 내려오자, 부위원장이 되었다. 다만 경력을 인정받아 6개 도당중 유일하게 도당위원장이 유격대 사령관을 겸하지 않고 김선우가 부위원장겸 유격사령관이 된다. 이후 박영발은 이현상과 동귀어진하기 위해 모든 자리를 버리고 평당원으로 내려간다. 그 바람에 김선우가 다시 도당위원장이 되었다. 결국 두 자리를 왔다 갔다하는 거의 도당위원장급 부위원장이다.[16] <‘빨치산의 아내, 무명옷 입은 선생님’ 이여자, 이숙의>(삼인출판사)의 저자 이숙의의 남편, 6.25 이전까지는 배철이었으나 중앙당으로 소환되었다.[17] 이미 자영농이 될 것이 확실시된데다 공산주의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은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이승만 개인에 대한 평가야 어떻든 농지개혁법은 분명히 성공적인 토지개혁 사례에 속한다. 아르헨티나 등을 보면 확실하다. 자영농만큼 공산주의가 안먹히는 계층도 드물다.[18] 다만 내무서는 가장 먼저 연락을 받고 북으로 도망쳤다. 구빨치 시절의 무기는 전부 내무서에 반납 했었다. 그리고 내무서는 모든 무기를 들고 튀었기 때문에 초기에 빨치산은 극심한 무기 부족에 시달렸다.[19] 이때 도당 조직부의 주임무가 낙오병들을 꼬셔서 빨치산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전라도 일대에는 중대급 이상의 부대가 없었다. 단지 105예비사단(사단장 : 월북 소령 강태무)의 일부가 각 시군에 소대 단위로 주둔하였다. 모든 부대는 북강원도 혹은 (남)강원도 혹은 춘천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인민군은 빨치산에 합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민군의 안전한 후퇴를 돕는게 각 도당에게 주어진 명령이었다. 다만 유일한 예외로 인민군 빨치산 부대인 남해여단이 있다.[20] 북한은 남한의 강원도를 남강원도라고 불렀다. ‘도 당위원회’도 북강원도당, 남강원도당이라고 하여 따로 있었다. <남부군>에서 이태는 기록상으로는 남강원도로 후퇴하라고 되어 있지만 9.28 후퇴당시 자신은 춘천으로 후퇴하라고 들었는데 잘못 들은 것인가 의아해 한다. 다른 빨치산 문학에서도 강원도/강원도남쪽/남강원도 방면으로 후퇴와 춘천으로 후퇴등으로 다 틀리게 쓰여 있다.[21] 경기도당과 남강원도, 북강원도 도당 지도부는 현지에서 입산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후퇴함. 이에 별오리 대회에서 전원 출당 조치함. 서울시당은 도저히 남아서 유격전을 할 여건이 안되어 강원도 방면으로 이동하여 활동함.[22] 전남도당을 제외하고는 도당위원장이 유격대장을 겸임했지만 도당과 유격대 산하 조직과 간부는 별도로 조직된, 이원화 조직이였다.[23] 대열을 안으로 단단히 묶어세우고, 밖으로부터의 물리적 위해나 사상적 침입을 막는다는 뜻. 병력관리가 주 임무로 인사과에 해당한다. 대열과는 사병만 담당하며 당원관리와 간부들의 경우 도당의 간부부에서 담당하였다.[24] 빨치산 기관지 발행. 간단한 교재나 지시문, 전단류등도 출판[25] 도당 통신과의 경우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을 수신하는 수력발전무전기가 있지만(발신 불가) 유격대 통신과의 경우 그냥 발로 뛰는 연락원들이다.[26] 본명 박우현, 다른 도당 위원장들은 대부분 모스크바 당학교 출신이지만, 남충열만 특이하게 평양정치학원 출신이다.[27] 충남 서산군 운산경찰 지서장으로 빨치산 토벌대장이였던 변홍명의 따르면 충남 빨치산이 3만명이 넘어 자신이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원없이 전투를 했다고 한다. 특히 서해안의 운산 가야산이 빨치산 천국이라고 하는등 당시 대부분의 기록을 쌈싸먹는 증언을 하였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증언에 의해 빨치산 10만 대군설이 나왔나 보다.[28] 맹봉, 백암, 왜가리, 학소등은 전부 호 또는 가명이였다. 소설 <남부군>에는 카투사 병단이라고 나와있지만 착오라고 생각된다. 빨치산 부대명에 소련군 군가 카츄샤(Катюша)라면 몰라도, 미군소속 한국부대인 카투사(KATUSA)라고 할 리가(...). 소련을 배우자는 뜻의 學蘇를 ‘학쏘’, ‘학살'(虐殺) 이라고 나온 책도 있다. <장군의 후예>에서는 도당 호위(‘고위’라고 오타), 외가리, 탱크라고 나와 있지만 이것도 오기 혹은 용어순화 인 듯. 소설 <남부군>저자 이태는 독수리 병단 2소대장이였고, 소설 <장군의 후예>의 황의지는 땅끄 병단장이였다.[29] 인민군에서 운영하며 함북 회령에 있는 유격대원 양성학교. 교장 오진우[30] 50년 3월 제3병단 잔존인원을 구출하기 위해 연선유격대 200지대(회령 제3군관학교 제1기 졸업생 300명, 부대장 김상호)와 김무현 부대가 연합하여 10차로 약 700명이 남파되었다가 국군에게 격퇴당하고 양양으로 돌아와 있었다. 김상호등 10명과 죽은 김무현을 제외한 27명등 극소수 잔여세력이였지만 다시 충원 받았다[31] 38선이라는 '선'에 '연'하여 가까이 배치되어 38선을 넘나들며 작전을 하는 유격대[32] 자료에 따라 연선유격대 대신 당시 북한 행정구역이였던 양양 유격대 750명이 합류했다고 나오기도 하는데 동일한 부대를 지칭하는 것 같기는 하나 병력의 차이가 크다.[33] 전원 총살은 아니고 길원팔의 양아들인 14세 소년은 채명신에게 채씨 성을 받고 키워져 서울대 박사 출신 교수가 된다. 여비서 중위는 탈출하여 부임지인 경상남도의 까지 내려가 남도부에게 이소식을 전한다.[34] 여담으로 35년간 감옥살이 했지만, 전향하고 풀려났다가 북한을 그리워 하며 1990년에 자살한 정대철 소위가 남해여단 소속 빨치산. 당시 전향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사례로 꼽힌다. 비전향장기수 63명은 전부 2000년에 북한으로 송환되었다.[35] 이승엽은 김일성에게 굴복하여 내각의 각료를 맡고 있었고, 이현상은 반김일성파로 몰려 북한에서 탈출할 정도였다. 여운철은 중앙당 위원 이주하와 함께 6.25직전 대전으로 잠입였고, 전쟁 발발후 충남도당 위원장을 지냈다.[36] 남조선 인민유격대라고도 하는데, 전쟁 초기 서울에서 의용군이 편성될 때, 박헌영의 심복 김응빈이 별도로 만든 '남조선 인민 유격대'를 그대로 이은 것이다.[37] 소설 <남부군>에서는 300/150/100/80명으로 나오지만 이후에 출판된 <빨치산의 딸>과 이를 복붙한 <이현상 평전>에 따르면 500/170/130/60명으로 총원 860명 이라고 한다. 이태의 두번째 소설인 <여순병란>에서는 450/150/130/?명이라고 하며 최태환의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는 400/60/150/150등 800명으로 나온다. 사실 이태는 당시 현장에 없던 사람이고, <빨치산의 딸>에서 이옥자가 그곳에 있던 사령부 직속부대원 이다. 그러나 <빨치산의 딸>은 전반적으로 빨치산의 숫자를 뻥튀기 하는 편이라, 이책을 참고하여 출판한 이태의 <여순병란>에 따라 수치를 기재한다.[38] 400명의 월북청년으로 구성. 지대장에 유격지도처 동부연락소장 맹종호, 정치위원 유원식[39] 도경찰청 간부들이 청주 남쪽의 금강변 부강 유원지로 야유회를 떠나서 지휘 라인이 공석이였다. 잊다른 중공군 대공세로 사태가 급박한 가운데 한가롭게 야유회를 떠난 점에 대한 비판이 있다.[40] 탈옥수들은 오랜 수용생활로 몸이 피폐해 있었고, 산짐승 같은 빨치산을 따라 오지 못해 대부분 낙오 하였다. 충북 괴산 군당 선전부장으로 15년 형을 선고 받은 김종한등 극소수만 남부군을 따를 수 있었다.[41]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등 6개 도당위원장회의. 1차는 5월 송치골에서 2차는 8월에 했다고 하거나, 혹은 10월 초순 지리산 달궁골에서 최초의 회의를 했다고도 한다. 자료별로 전부 날짜와 장소가 다르다.[42] 다만 6개 도당을 여운철이 통합지휘하라고 이현상이 말한 것은 논란이 있다. 이현상을 옹호하는 쪽은 여운철 부분이 아예 빠져 있고 이현상이 단지 무장유격대만 통합 지휘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현상을 비난하는 쪽은 여운철을 통해 6개 도당을 정치적으로 통합지휘 하려고 했다고 한다. 서적마다 이부분의 차이가 크다. 다른 단락에도 나왔지만 여운철의 실존 여부 자체가 의문시 된다. 그러나 여운철 부분은 이승엽-이현상이 6개 도당 자체를 지휘하려고 했는지 여부를 판가름할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6개도당 회의부분은 참석자중 누구도 자료로 남기지 않았고, 소설 <남부군>의 이태등 제3자의 추측만이 존재한다.[43] 박영발은 경남 봉화 태생으로 해방이후 활동하기 시작하여 남로당원으로 모스크바 고급 당학교 6개월 유학까지 갔다 온 밑바닥 출신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고학력 공산주의자 이승엽, 이현상 같은 엘리트 계층과 태생이 달랐다.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하는 국내파는 박헌영․여운형등을 숭상하였지만, 박영발등 해방 이후의 공산주의자에게 태양은 단 하나, 김일성 뿐이였다.[44] <여순병란>에서는 여기에 추가하여 "각도의 군사책임자는 남부군 부사령관이 된다."라고 되어 있다.[45] <여순병란>에 의하면 남부군에 비해 다른 도당에서는 민폐가 너무 심해 이조항을 넣는데, 결국 다른 건 다 지켜졌지만 여섯째 조항만은 안지켜졌다고 한다.[46] '지리산 승리의 길' 편집 책임자가 소설 <남부군>의 이태인데 종이와 인쇄수단이 없어서 결국 창간호를 내는데 실패한다. 그에반해 '승리의 길'은 계속 발행 되었다. 전남 부대의 ‘백아산 승리의 길’의 체제가 가장 잘 되어 있었다.[47] 형식적으로는 6개 도당 당사업 총괄이였지만 도당 위원장들의 반발로 남부군 직속부대에만 영향령을 미칠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단순히 남부군 정치위원. 이태의 <이현상>에서는 '6도 유격대 정치부 연락위원'이라는 유명무실한 직위라고 한다. <이현상 평전>에서는 1차대공세때인 52년 1월 15일 경찰전투대의 총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48] 이현상이 2차 6개도당위원장 회의 참석하러 간 시기인 8월10일 또는 14일경 경찰과의 가회전투에서 사살된다. 박종하는 그전에 입었던 부상을 입었다가 이때쯤 죽었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이 전투에 참가한 남부군과 기타 연합 부대원 700명이 전원 새 옷으로 갈아입었을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 전투가 남부군의 마지막 승리였고 이후 연전연패를 거듭한다.[49] 김일성대학 사학과 교수. 소설 남부군에는 “50년 여름 여대생 50명을 이끌고 문화공작차 호남지방에 내려왔다가 후퇴중 남부군과 만나게 되는 차일평”이라며 그가 여운철과 같은 사람인지 혼란 스러워 한다. 군경의 1차대공세에서 생포된 후 육군본부 2등문관으로 임명되어 선무방송을 하게 된다. 남한내 포로로 잡힌 빨치산 통틀어서 최고위직. 빨치산 문학을 보면 여운철을 정치위원으로 쓰기도 하고, 차일평을 정치위원이라고 쓴 책도 있다. 신동아 기사에서는 그냥 정치위원 여운철, 부정치위원에는 차일평이라고 간단히 정리했다. 물론 부정치위원이라는 용어는 없다. 아마도 복잡한 내부관계 때문에 그냥 이해를 포기하고 신동아에서 자의적으로 붙인 단어인듯.[50] 후평에서 편입된 원산시 민청위원장 출신. 곡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부상자 트로 후송되었다가, 여기서 <남부군>의 저자 이태를 만나 이때의 인연으로 그를 사단 정치부 지도원 대우 기자로 끌여 올려주게 된다. 이후 경남의 이영회 부대 정치위원으로 있다가 53년 가을 군경에게 체포되지만 친구였던 5사단장이 그냥 풀어준다. 그러나 월북한다며 막무가내로 올라가다가 휴전선 인근에서 체포되어 광주형무소 수감. 함께 수감된 <빨치산의 딸>의 정운창은 이봉각의 수용생활태도를 보고 꽤나 찌질한 인간으로 보았다. 실제로 전향하고 노역하러 갔다가 일이 잘 안맞는다고 전향을 취소하고 비전향자 사동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51] 이태의 <남부군>에는 인민여단과 혁명지대가 통합되어 92사단이라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혁명지대는 지리산에 오기도 전에 원래의 부임지인 충청지역으로 가버렸다. 이때문에 이태는 혁명지대를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소설 <남부군>의 가장큰 오류[52] 북한 6사단 박격포중대 낙오병 30여명중심. 자생적으로 지리산 일대 독립 유격대 활동을 하던중 덕유산까지 흘러들어 왔다가, 명덕전투에서 102부대의 일부인 315부대가 남부군 승리사단과 함께 싸운다. 소속 도당이 없던 관계로 이후 남부군을 추종하다가 둘다 통합된다. 주지의 사실과 같이 북한 6사단은 조선족으로 구성된 중공군 166사단이 소속 변경된 것으로, 남한에서는 걸어다니는 공수부대라고 불린 최강부대이다. 빨치산 부대는 ‘팔로군 출신’이라고 불렀다. 92사단의 한개 대대로 편입된다.[53] 기록에 따라 없기도 하고 남부군 직속이라 하기도 한다. 실제로 남부군과 연합작전인 악양전투에 참전했는데 남부군과 협동 전용 부대일 수 있다. 도당 위원장 회의에서 각도 군사책임자는 남부군 부사령관에 임명되기로 했는데, 김명권이 바로 전북도당의 군사책임자였다.[54] 반란군 14연대 부사관으로, 이현상의 2병단시절 5연대장으로 활동하다가 6.25 이후, 이현상을 따라 국군 후방 교란을 위해 낙동강을 건너다가 실종되었다. 실은 낙동강 건너다가 이영회 부대원 50명중 거의 대부분이 전사하고 두명만 살아 남는다. 헤어진 이영회는 경남도당과 연결되어 여기서 활약한다.[55] <이현상평전>에서는 건강한 대원 대신 환자를 보낸 것이 박영발이 이현상 지시에 불만을 품은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남부군의 세력이 약해 대원들을 차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부군의 전투력은 도당 유격대와 비교할 수 없이 강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56] ‘적진 와해 공작’의 약칭[57] ‘민중 운동’의 약칭[58] 여성 15명으로 구성된 문화공작대를 이끌었다. 군가/당가등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 임무.[59] 그 외 지도원 대우를 받는 작가, 시인, 화가, 기자등이 있었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가 바로 남부군 직속 81사단 정치위원(이봉갑) 아래 기자였다.[60] <남부군>의 이태가 전남도당 시절에 수력발전식(...) 무전기를 통해 조선중앙통신을 청취하여 도당에 전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중앙당에서 내리는 지령은 단파라디오를 통해 암호문으로 보내는 것이라, 암호를 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61] 소설 남부군에서는 제1차 대토벌작전 3기작전이 끝날 무렵인 52년 1월 28일에 독립 4지대로 개편했다고 나온다. 51년 11월 14일 이후에도 사단 단위로 계속해서 활동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 여러 기록을 참고해 보았을 때, 지령은 미리 받았지만, 실제 개편은 소설 남부군에 나오는 날짜에 한 것 같다. 다만 명칭은 문화부장의 명칭은 정치위원으로 바로 바뀌었다.[62] 극렬 종북주의자들은 이때를 ‘침공군’에 의한 제1차 대침공 기간이라고 부른다.[63] 게다가 이들은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세뇌시키는건 물론이요, 철도와 도로를 파괴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는데, 이로 인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주 보급로인 경부선 철도마저 위협받고, 국도 역시 군경의 통제력이 강한 낮에만 쓸 수 있었다.[64] 참모장 김점곤 대령, 작전참모 공국진 대령, 정보참모 유양수 대령, 군수참모 장우주 중령.[65] 일각에서는 제15보병사단과 1개 전투경찰연대를 더하여 집계하기도 한다. 또 일각에서는 위에 서술된 수치는 제1항공단과 3개 도경 경찰기동대를 제외한 수치라고 하는 둥, 부대를 계산하는 방식이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66] 그리스 내전 당시 좌익 게릴라를 토벌 할 때 우파 군대의 고문으로 있었다.[67]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작전 개시 초기에 별다른 전과가 안 나오자 그가 걱정하던 도중 밴 플리트 장군이 걱정 말라며 매스컴 대처는 자기가 하겠다면서 장군은 임무를 수행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며칠 뒤 유의미한 전과들이 속속 보고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덕분에 전과가 날 때까지 메스컴에서 별다른 부정적인 터치는 없었다. 백선엽은 그 당시의 밴 플리트 장군에 대해 고위 장성다운 면모를 보였다고 서술했다.[68] 실록 지리산을 쓴 백선엽은 이를 토끼 사냥과 같다고 했으며 토끼 사냥의 방식은 옛날 초등학생(군경=망치)이 토끼(공비)를 잡으러(소탕하러) 뒷산(공비 거점)으로 가면(국군의 공격) 토끼들이 본능에 따라 달아나다 내리막에서 미끄러지면 대기하고 있었던 다른 무리의 학생(경찰=모루)이 토끼들을 잡아(토벌)가는 방식이라고 서술했다.[69] 이에 비해 국군은 미리 피아식별용 대공포판을 보여주어 공습을 피하며 아군 오폭을 막을 수 있었다.[70] ex : 민간인 마을 근처에서 숙영 금지, 저항자 이외에는 발포 금지, 식량은 넉넉하게 나오니 잉여 물자를 주민들에게 나눠 줄 것 등[71] 빨치산 수기를 보면 군경의 토벌로 다 죽어가다가 이런 며칠 휴식때야 숨돌리는 상황이 나온다. 군경도 사람이니 며칠간의 휴식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72] 1기 한정으로 백야전사의 발표는 공비사살 1,263명으로 되어 있다. 또한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란 2년지>에는 사살 1,379명, 생포 1,379명, 귀순 162명이며, 육군본부 정훈감실의 <공비토벌사>에서는 756명으로 되어 있다.[73] 지리산 주능선의 세석고원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백무동, 서남쪽은 대성동이다. 백무동과 대성동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을 백무동 계곡, 대성계곡이라 부르고, 그 골짜기를 대성골, 백무골이라고 한다.[74] 군경의 전과는 심하게 과장되었으니 항상 깎아서 봐야한다는 입장을 갖고있다.[75] <빨치산의 딸>에서는 92사단도 있었다고 나온다.[76] 조선로동당 연락부에 보내려고 초안한 통신문의 경우 "일부 도당 위원장의 반발로 유격대의 유기적인 통합체계 확립이 어려우니 대책을 세워달라"라는 내용이다. 이로써 군경에서 빨치산의 내분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는 빨치산 하급대원 따윈 알 수 없는 1급 기밀이었다.[77] 소설 <빨찌산의 딸> 정지아의 아버지 정운창이 군당위원장이었다. 많은 당원들을 보존한 공로를 인정받아 도당 조직부장이 된다. 도당 부위원장 다음가는 최고의 보직.[78] 그러나 <이현상 평전>에서는 지대화 개편시 이미 81사단과 92사단을 김지회 부대, 박종하 부대로 개편한 것이라고 나옴. <남부군>과 <빨치산의 딸>에서 나오는 자료를 철저히 추종하는 그동안의 기조와 달라 좀 의아하다.[79] 이태는 수도사단의 3차 공세가 끝나면서 전투경찰대에게 체포된다. 그러면서 남부군이나 빨치산은 이번 대토벌작전으로 사실상 끝났다고 서술했지만, 아직 빨치산의 잔존 조직이 제법 남아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대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80]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에서는 마지막에라도 마음을 고쳐 먹은 행위라고 좋게 평가한다(...).[81] 각 부대가 8~90명 밖에 안되었고, 그나마 두달 후에는 병력 부족으로 박종하 부대는 해체되어 김지회 부대로 통합된다.[82] 단순 가담자인 투쟁인민은 훈방조치했다. 그동안 입산자 가족에게 갖은 패악질을 일삼던 각종 청년단은 군경에 입대되며 해체 되어 하산해도 살만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도 토벌대에 참가하라는 명령에 갖은 수단을 쓰면서 거부하는 청년단장 염상진의 모습이 잘 나온다.[83] 남한의 경우에야 이승만에 따라 정전반대 시위로 국내가 시끄러웠지만, 북한의 경우 김일성에 의해 정전협정 체결하자는 시위가 있었다. 일부 반대자를 숙청할 정도였다.(전쟁은 북한이 일으켜놓고 왜 먼저 정전의지를 보였냐면 자기들이 털렸기 때문이다. 북한과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자기들이 이겼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영토면적만 봐도 황해도의 쥐토리만한 땅이나 경기도의 개성 등 일부를 더 얻는 대가로 강원도 일대를 뭉텅 뜯겼다. 게다가 미국이 폭격을 날리는 바람에 일제강점기에 있던 인프라가 날아갔으며 민간인도 수백만명이나 죽었기에 아직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53년을 한국전쟁의 끝으로 가정하고 보면 북한의 당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전략적인 패배인데 피해까지 합치면 전술적 패배까지 당한 셈 게다가 미군은 휴전맺기 전까지 폭격을 날려 그 피해는 계속 누적되었다. 그래서 북한은 더 털리지 않기 위해 정전을 하려고 한 거고)[84] 제주도당은 4.3 사건으로 작살나 있었고, 있다해도 바다건너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 경남 도당도 52년 1월 대성골 전투로 위원장이 사망하면서 지리멸렬[85] 국사교과서에서도 잘나오지만 실제로는 특무부대장인 김창룡이 대구형무소 중형수를 빼내서 공비가 나타났다며 사살 하고, 계엄령 건 것이다. 다만 남도부 본인은 '94호 결정서'가 남한 빨치산을 싸잡아 비난 한 것 때문에 열받아서 일종의 파업상태로 신불산에서 나오지 않고 아무것도 안하였다. 위원장 자리도 거절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때문에 한동안 위원장이 공석이라 남파된 이구형이 위원장 자리를 맡았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어쨌든 위원장은 공석으로 봐야 하고 이구형과 남도부가 부위원장이였다.[86] 경기 개성 태생으로 오십대였다. 전남도당 조직부장이였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전남도당 조직부장은 <빨치산의 딸> 아빠 정운창 아닌가?[87] 이태의 <남부군>에 의하면 김일성 교조주의파 5명에 비해 이현상파는 오직 김삼홍 뿐이라 5:2로 이현상은 '옴쭉달싹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한다.[88] 전남 영광태생으로, 경성제국대학 의대 출신 의사. 기요과는 출판과 선전 임무를 담당하는데 이형련이 의무과가 아닌 이쪽으로 배치시키면서 박영발 전속 의무관에 임명하여 그를 독점하였다. 소설 남부군 개정판에서 자신이 알던 이름 모를 병을 '재귀열병'이라고 제보해준 전남도당 의사 이모씨로 나온다. 53년 9월 3일 차일혁 총경 부대에게 생포되면서 지구당내 알력과 이현상의 위치를 어렴풋이 알려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죽은걸로 나오는데 그럼 죽은사람이 이태에게 제보?[89] 여담으로 빨치산을 통틀어 몇안되는 여성 간부인 양봉순이 <빨치산의 딸>에는서는 상선연락대에 포함되어 가다가 죽었다고 나오지만, <남부군>에는 이미 군경의 1차대토벌 작전때 죽었다고 한다.[90] 그동안 남부군은 김흥복이 이끄는 흥복부대와 송관일이 이끄는 관일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송관일이 경남으로 넘어가 경남부대를 이끈다. 조병하는 명목상에 가까웠고 실제로도 송관일 부대로 불렸다. 원래 이부대는 남부군 출신의 이영회가 이끌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이영회는 경남도당 군사부장으로 올라가게 된다.[91] 이태의 <여순병란>에 의하면 김지회부대는 부대장 김흥복 이하 총원 56명이였으며 그중 간부는 22명, 평대원은 34명이다. 그나마 평대원중 여성은 12명, 토벌대 출신은 6명으로 남성대원이 남부군 통틀어 꼴랑 16명 밖에 안되는 눈물겨운 상황이였다.[92] 공산당의 특성상 당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을 해야 하며 상부의 지시에 대해 비판할 자유가 없다. 그런데 지금와서 왜 그동안 왜 당에게 충성과 복종을 했는지 자기비판을 하라고 하니 완벽한 자기모순[93] 비전향계열 빨치산들의 책인 <전남 유격투쟁사>에서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고 간단히 넘겼고, <빨치산의 딸>에서는 “남로당과 북로당이 통합한 뒤로 우리 당에 분파주의란 없다는 말을 계속 들어왔던 터라 이승만정부의 보도를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박헌영 까지는 모르지만 이승엽이나 리 등은 충분히 미제의 첩자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는 황당한 소리를 한다. 그에 반해 전향한 빨치산인 <남부군>에서는 엄청난 사상적 동요를 가져온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식하며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한다.[94] 소설 <남부군>에서는 9월 6일이라고 하며 <이현상평전>에서는 장소가 지리산 빗점골이라고 한다. 하여튼 각종 빨치산 기록에서 명칭이나 날짜가 일치한 것을 본적이 없다.[95] 기요과장 김희준의 가명은 이일영으로 경남 북부 소지구당 위원장 노영호가 전사하자 후임이 되었다.[96] <이현상평전>에서는 박종하부대도 구례군당 유격대로 갔다고 하며, 김지회부대와 합쳐 23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박종하부대는 이미 52년초 제1차대토벌작전으로 인해 해산되어 김지회 부대와 통합되었으니 오류이다. 아마 해체당시 김지회 부대만 23명이였을 것이다. 김지회 부대 결성 당시는 <여순병란>에 의하면 56명이였다.[97] 이태의 <여순병란>에는 빨치산 송시백의 증언에 따라 '지하당 조직 임무를 뛰고 경남 진주군당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었다고 나오는데, 군당 위원장도 아니고 그야말로 망신주기에 다름이 없는 자리이다.[98] 정확히는 빨치산 출신의 2연대 사찰유격대가 이현상의 시체를 발견하자, 같은지역에서 작전하던 5사단 56연대 수색대(수색대장 안진구 인민군 소좌 이하 전원 귀순공비로 구성. 안진구는 일전에 공작을 위해 5지구당에 침투하여 이현상과 대면한적이 있어 그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조 모 상사가 7일밤 8시 밤 수명의 공비들과 교전하여 사살하고 몇명의 시신은 가져 갔는데, 한 대원이 늙은 공비가 갖고 있던 시체의 권총이 탐이 나서 총만 훔치고 시체는 나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증거물로 권총을 제시하였다. 이는 국방부와 내무부의 공로 다툼으로 확전 되었는데 결국 대통령이 경찰이 찾은 것으로 결론 지어줬다. 다만 그동안 노고를 치하하여 훈장은 국군과 내무부(경찰)에 공평하게 나눠 수여되었다. 북한의 혁명열사능의 이현상비에는 17일 사망으로 되어 있다.[99] 애초에 5지구당은 4개 도당급 부대가 박터지게 싸우는 구조이고, 4지구당은 남도부 부대와 경북도당만이 존재 했는데, 도당 위원장 박종근이 죽으며 자연스럽게 남도부 아래 통합되어 그의 권위에 대들 사람이 없었다.[100] 동양라디오의 방송 프로그램인 <광복 20년>중에서 <남도부사건>은 이시점 부터 시작된다.[101] 조촐하다고는 해도 총 지휘관을 맡은 박병권은 5.16 군사정변 직후 국방부 장관에까지 오른 엘리트 군인이었으며 한신 역시 훗날 합참의장까지 역임하고 대장으로 전역한 명장이었다. 유해준 역시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전선에선 잔뼈가 굵은 군인이었다.[102] 구빨치 시절부터 도당위원장을 맡다가 인공시절 박영발이 낙하산으로 내려오자 전남도당 유격 사령관을 맡음. 도당위원장 박영발이 남로당 관련으로 격하되자 대신 위원장을 맡음.[103] 2월 27일 비트에 숨어 있다가 조직부부장 박춘석의 배신으로 몰려든 국군과 대치하다가 수류탄으로 자폭했다는 설과 대립한다.[104] 구빨치 시절 전남도당 ‘오르그’,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격대 부사령관, 남로당 격하 이후 한자리씩 올라 총사령관을 맡았다.[105] 통명산에서 부상당한 채 포로로 잡혔으나 연행 직전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106] 중공군 팔로군 출신으로 인민군 6사단으로 편입되어 포병군관으로 복무.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남 총사령부에서 줄곳 1연대장을 맡아왔다. 2차대공세 시점에는 전남 도당내 동부 지도부의 실질 전투력은 이봉삼의 전남부대(각 도당별 주력을 전북부대, 경북부대등의 명칭으로 개편)와 남태준부대등 2개였다.[107] 군경의 공세로 전남 전체의 지도가 힘들어지자 도당은 동부지도부로 존재하고, 여기에 새로 박갑출의 서부지도부를 만들어 조직을 분리하였다.[108] 3명은 현장에서 죽고, 살아남은 도당 여맹위원장 장삼례와 전남 총사령부 7연대장 조용식의 연락병이자 인민군 출신의 김병극이 체포되었다. 이 둘이 전남의 마지막 빨치산이었다.[109] 상당수의 고위급 빨치산들이 죽을 때 산중처를 끼고 있었는데 방준표 역시 신단순이라는 딸뻘의 산중처와 함께 있었다. 방준표의 산중처가 되자 손에 물 한번 안뭍힐려고 해서 '공주님'이라는 비아냥 섞인 별명을 얻었으며 간호보조원 출신이라고 한다.[110] 남도부의 당숙. 녹 동무라는 산중명으로 알려져있다.[111] 이전에 언급한데로 산하 부대는 활동이 활발했지만, 정작 남도부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당시 경남도경국장 박병배는 남도부가 이시기에 월북 했었다고 본다. 이후 김일성에게 '대구 폭파 후 월북'이라는 최후의 작전명령을 받고 다시 월남하였다고 증언한다.[112] 이영회부대가 괴멸된후 이응조와 함께 3인만 10년가까이 지냈다. 이응조는 앞선 61년 지리산 송대마을 위쪽 선녀굴에서 사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