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탄광 사건 화순탄광 노동자 학살 사건 | |
날짜 | |
1946년 8월 15일 ~ 1946년 11월 6일 | |
지역 | |
대한민국 전라남도 화순군 | |
원인 | 미군정의 무자비한 노동자 탄압, 물가 상승과 쌀 부족으로 인한 노동자의 고통 |
목적 | 미군정의 지배체제 확립, 좌익세력 척결 |
사상자 | 사망 36명 부상 500여 명 |
1. 개요
1946년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미군이 일으킨 민간인 학살.
2. 배경
1905년 화순 동면 대지주인 박현경이 화순탄광을 열었으나 일제는 1934년 그 운영권을 빼앗았다. 해방이 되자 간부들이었던 일본인이 없어지고 노동자들끼리 자치위원회를 열어 스스로 운영한다. 화순탄광 자치위원회는 100%의 지지를 받아운영되고 있었다. 자치위원회 간부였던 심상기의 증언에 따르면 실무를 거의 모두 한국사람들이 해왔었기 때문에 금방 질서가 잡혀 오히려 일제때보다 생산량이 더 늘어났었다[1]는 등 성공적인 자주관리를 하고 있었다.3. 미군의 화순탄광 강제 접수
화순군의 군민들은 인민위원회를 성립하였다. 이 위원회는 당시 80%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자체적으로 남아있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다. 이를 보고 받은 미군정은 화순을 위험지구로 판명하여 미군 부대 4~5백명을 화순에 파견했다. 또한 미군은 11월 미군대위 율러를 앞세워 탄광을 무조건 접수한다고 공포하였다. 이후 탄광소장으로 극우인사이자 서울에서 온 외지인인 임성록을 앉혔다. 그리고 노조 지도자들에게 위협[2]을 가했다. 또한 지도자들이 노동자를 잠재우지 못하자 남호진 외 3인의 간부를 해고시키고 노동자 백여명을 해고시켰다.4. 노동자들의 시위 및 미군정의 진압
이에 반발하여,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들은 투쟁을 시작했다. 2월 24일, ‘전종업원대회’를 열어 ▲최저 생활을 보장하는 임금제 도입 ▲해고된 노동자의 즉각 복직 ▲후생 시설 정비 ▲소장의 독단적 운영 반대 ▲부패한 임원 축출 ▲일요일을 쉬는 제도 확립 등 6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고 말이다.그러나 미군정과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특히 8월 15일, 해방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광주로 가려던 노동자들은 너릿재에서 미군과 경찰의 저지에 부딪혔다. 미군 측은 트럭과 장갑차로 행렬을 막았고, 이 과정에서 총격과 폭행이 발생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너릿재 정상까지 쫓겨 올라가 30여 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10월이 되자 노동자들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섰다. 10월 31일, 3천여 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아이를 업은 채 광주로 행진하며 쌀을 요구하고,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11월 4일, 미군정의 기습 검거로 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다쳤으며, 화순군은 결국 탄광 폐쇄를 명령했다.
이어서 11월 6일에는 75명이 체포되었고, 11월 9일에는 경찰서를 공격하던 노동자들 중 3명이 사망했다. 이런 강경 진압으로 인해 봉기는 결국 진압되었고, 화순 탄광 노동조합은 점점 힘을 잃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