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한민국의 대내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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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인근 교전 1949 | 북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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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전투 1949 | 북한 | |
옹진-은파산 전투 1949 | 북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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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상보안청의 평화선 침범 사건 1952 ~ 1965 | 일본 | |
일본 해상보안청의 독도 무단침범 및 점령시도 사건 1953 ~ 1956 | 일본 | |
독도 대첩 1954 | 일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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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GP 총격 사건 2020 | 북한 | |
2022년 북한 무인기 영공 침범 사건 2022 | 북한 |
1. 개요
1980년 3월 23일 한강에 북한의 무장공비가 침투했다가 제9보병사단에 의해 격퇴된 사건.
2. 상세
사살당한 무장공비의 시신이 편집되지 않은 채로 나오기 때문에 연령제한이 걸려 있다.
1980년 3월 23일 황중해 일병은 한강 보초근무 중 철통경계로 북한 무장공비 3명의 침투를 격퇴하였다.
3월 23일 새벽 2시 50분 경 한강 하구 지역 초소에서 후임인 김범규(金範圭, 당시 이병)와 경계 근무 중이던 황중해는 한강을 통해 몰래 잠입하는 무장공비 3명을 발견하였는데 옆에 있던 김범규에게 옆 초소로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리라고 지시하고 본인은 다가오는 무장공비를 향해 사격하여 무장공비 3명 중 2명을 사살하였다.
이는 그가 양안 시력 2.0으로 중대 특등사수였으며 경상북도 영천시의 시골 출신으로 달빛 없는 야음에도 익숙한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후 김범규에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5분 대기조와 함께 도망치던 1명도 마저 소탕하였다.
이 공로로 4월 15일 황중해 일병과 김범규 이병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고 2계급 특진하였으며, 이외에 포상금 1,700만원[1], 사단장 휴가 6개월, 연대장 휴가 6개월을 받고 고향에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갔으며, 황중해 일병의 고향인 영천에서는 카 퍼레이드까지 했다고 한다. 여기 더해 부대에서 자체적으로 신설한 초대 경계왕에 선정되었다.
완전작전 후, 황중해 일병은 부사관에 지원하여 최종 계급 상사로 2012년에 전역하였다. 그가 공비를 소탕했던 당시 소속부대였던 제9보병사단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2002년에 기존 구산리 소초의 이름을 '황중해 소초'로 명명했다. 이 사건은 국군 사상 최초로 아군의 피해는 전혀 없이 북측의 침투를 막아낸 완전작전이기 때문에 제9보병사단에서는 매년 3월 23일만 되면 3.23 완전작전을 기린다.
[1] 국방TV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공비 사살 포상금과 양복값으로 1,050만원을 수표로 받았고, 고향인 영천시에서 마련해준 추가 포상금 650만원을 더해 총 1,70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강남 아파트 31평 짜리가 2,500만원 가량이었던 만큼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포상금 중 대부분은 형의 사업자금으로 쓰였으며, 본인 수중에는 100만원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