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13 22:55:54

구찌 땅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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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인도차이나 전쟁2.2. 베트남 전쟁2.3. 중국-베트남 전쟁
3. 구조4. 관광상품

1. 개요

구찌 땅굴(Cu Chi tunnels, Địa đạo Củ Chi)은 베트남의 구찌 지역에 있는 군사적 목적으로 굴착된 땅굴이다. 주로 베트남 전쟁 시기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서 미군 공습에 활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꾸찌 땅굴, 쿠치 땅굴 등등으로도 표기된다. 한국에서는 명품 브랜드 구찌와 이름이 같아 종종 언어유희 소재가 되는데, 땅굴의 규모와 구조를 보면 과연 명품 땅굴이라 할 만하다.

2. 역사

2.1. 인도차이나 전쟁

구찌 땅굴은 1946년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굴착되었다.

당시 땅굴은 지금보다 더 짧고 구조도 단순했지만, 베트남군은 이 땅굴을 프랑스군의 습격을 피하는 피난처 등으로 활용하면서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승리에 기여했다.

2.2. 베트남 전쟁

구찌 땅굴은 베트남 전쟁 때부터 본격적으로 명성과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당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화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미군을 상대하기 위해 구찌 땅굴을 이용한 전술을 채택하고 50년대부터 땅굴을 증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중에는 최대 깊이 300m, 총 길이 250km에 달하는 초대형 땅굴 네트워크가 형성되었으며 구조도 더 복잡해지고 체계화되었다. 베트콩들은 낮에는 구찌 땅굴에 숨어있다가 밤에 지상으로 올라와 보급품을 받거나 미군을 습격하곤 했다.

미군은 베트콩들의 구찌 땅굴을 이용한 전술로 인해 전쟁 내내 고전했다. 미군 입장에서는 베트콩들이 틈만 나면 어디선가 튀어나와 기습하고 사라지는데 대체 어디로 들어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군이 베트콩들의 보급을 차단하려 온갖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알 수 없는 경로로 보급을 받으며 시간이 지나도 지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미군은 크림프 작전(Operation Crimp)시더 폴스 작전(Operation Cedar Falls)를 필두로 한 군사작전을 통한 조사 끝에 이 땅굴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고, 1966년 미군은 남베트남의 밀림도 제거할 겸 구찌 땅굴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B-52 폭격기로 구찌 지역에 30여톤에 달하는 고엽제를 투하하였다. 그러나 지상이 아닌 지하에 있는 구찌 땅굴에는 당연히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고, 여전히 베트콩들은 땅굴을 드나들며 미군을 괴롭혔다.

미군은 구찌 땅굴의 입구를 발견하는 족족 폭약을 밀어넣어 폭파시키거나 물과 최루가스를 주입해 구찌 땅굴을 파괴하려고 노력했고, 몇몇 작전들은 꽤 성공적이라서 땅굴 일부가 붕괴되고 갱도 내 베트콩들을 여럿 소탕하기도 했지만 250km에 달하는 땅굴 네트워크 전체를 파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설령 일부 구역이 파괴되더라도 베트콩들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므로 별 효과도 없었다.

그러자 미군은 아예 갱도 내부로 병력을 밀어넣어 구찌 땅굴을 공략하려 했다. 구찌 땅굴은 당시 베트남인들의 체격에 맞춰 건설되었기에 덩치 큰 미군 병사들에게는 너무 비좁았고, 때문에 165cm 이하의 덩치 작은 병사들로 구성된 터널 랫(Tunnel rat) 부대를 투입했다. 이들은 권총과 총검, 수류탄, 폭발물 등으로 위장하고 땅굴 내부로 들어가 베트콩들을 상대했다.[1]

하지만 이 터널 랫도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았는데, 베트콩들에게 갱도 내부는 홈그라운드였던 만큼 땅굴 내부에 설치한 온갖 부비트랩[2]과 갱도를 돌아다니는 밀림의 동물들[3]과 싸워야 했으며 아예 부실공사로 땅굴이 무너져 생매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구찌 땅굴의 전체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베트콩들의 땅굴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결국 구찌 땅굴은 북베트남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 기여하는 요인 중 하나로써 작용하였다.

2.3. 중국-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 이후 구찌 땅굴은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또 다시 쓰이게 되었다. 이때에도 마찬가지로 구찌 땅굴을 이용한 전략이 먹혀서 중국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고 결국 베트남이 승리하는 데 또 기여했다.

이렇게 구찌터널의 활약상이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보니, 2010년대에 하노이 지하철호치민 지하철의 개통이 지연되었을 때 각종 최신식 기술과 예산을 동원했는데도 왜 호미랑 바구니로 구찌터널 파는 것보다 느리냐면서 한 동안 당국과 건설사들을 비아냥 거리는 농담거리가 되기도 했다.

3. 구조

구찌 땅굴은 단순한 일회성 갱도나 참호전 당시 참호를 초월한 생활공간 내지는 지하도시에 가까운 초대형 땅굴 네트워크였다.

전성기였던 베트남전 당시 땅굴의 길이는 200km에 달했으나 미군의 폭격, 붕괴, 풍화 등으로 인해 현재는 120km 가량만 온전하게 남아 있다.

땅굴의 입구는 최대한 발각되지 않도록 진입 뚜껑 위에 흙과 낙엽을 얹어 감쪽같이 위장했고 근처에는 함정을 설치했다. 함정은 내부에도 있어서 가짜 갱도를 만들어 적군이 잘못 들어가면 그대로 부비트랩에 걸리도록 치밀하게 조성해놓았다. 이 부비트랩으로는 펀지스틱(Punji stick)[4], 전갈이나 독사를 풀어놓은 독동물 함정, 건드리면 총이 격발되거나 폭발물이 터지는 것 등등이 있어 걸리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땅굴 내부 시설은 단순한 매복이나 은신을 넘어 장기간 작전을 위해 각종 군사시설뿐 아니라 편의 시설들이 갖춰져 있었다. 때문에 작전회의실이나 무기창고부터 주방, 응급 수술을 할 수 있는 의무실, 침실, 심지어 대원들의 정신건강을 위한 극장 등도 설치되어 있었다. 주방의 경우 조리를 위해 불을 쓰면 연기가 피어올라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Hoàng Cầm stove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다.[5]

물론 베트콩들에게 땅굴 생활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환풍구를 만들었어도 공기와 물이 부족하고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상술했듯 갱도로 들어오는 독동물들은 베트콩에게도 골칫거리였다. 위생 불량으로 인해 말라리아나 기생충도 만연했다.

4. 관광상품

현재 구찌 땅굴의 일부 구간은 관광 명소가 되었으며, 몇몇 안전한 구간들 한정으로 관광객들이 통로를 드나들며 내부를 관람할 수 있게 해놓았다. 내부에는 사격장도 있어 AK-47이나 M16을 비롯한 옛날 총도 실제로 쏴볼 수 있다. 비용은 2024년 기준 총알 한발당 6만동(약 3천원).
[1] 독가스 부비트랩을 상대하기 위해 방독면을 쓰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감각이 둔해져 대부분 착용하지 않았다.[2] 수류탄이나 대인지뢰는 기본에 독 발라놓은 펀지스틱, 판자를 뜯어내면 갱도에 물이 차오르는 함정 등등 다양했다. 아예 미군을 유인하기 위한 함정용 가짜 갱도도 있었다. 일례로 호주의 제 3 야전부대 소속 Robert "Bob" Bowtell 상병이 땅굴 내부로 진입했다가 부비트랩에 걸려 사망했다.[3] 거미, 전갈, 지네 등 온갖 독충과 독사, 쥐가 들끓었으며 독사의 경우 아예 베트콩들이 함정에 풀어놓기도 했다.[4] 나무나 대나무를 죽창처럼 뾰족하게 깎아놓은 말뚝. 이 가시에 독(독초나 독사)이나 분변을 묻혀 감염을 유도하고 치명률을 더 높이기도 했다.[5] 지상으로 연결된 굴뚝을 옆으로 길고 넓은 형태로 만들어 연기가 여러 개의 환풍구로 분산되도록 했고, 통로 내부에 축축한 나뭇잎이나 모래를 깔아 연기의 온도를 낮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