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02:29:47

86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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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fff,#1c1d1f><rowcolor=#fff,#1c1d1f> 구분 유년·소년 청년·장년 중년 노년
연령대 10대 미만 ~ 10대 20대 ~ 30대 40대 ~ 50대 60대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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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용어의 역사
2.1. 발생2.2. 대중화2.3. 용어에 대한 비판
3. 특징
3.1. 인구3.2. 경제3.3. 정치, 사회3.4. 문화3.5. 교육3.6. 사교육과 교육열 조장3.7. 병역
4. 관련 문서

1. 개요

/ 86 Generation

대한민국의 세대 중 하나. 대학교 80대학번 60년대생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쉽게말해 1960년~1969년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60년대생이 30대여서 '386세대\'라고 불렸고 2024년 기준으로는 50대 중반 ~ 60대 중반의 세대로 '586세대 / 686세대'(n86세대)라고 불린다. 2024년 기준으로 기성세대다.

386~686의 의미가 확장되어서 중장년층 등 넓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원래 의미는 단순히 1960년대생이 아니라 1980년대애 대학을 나오고 운동권에 투신한 사람만 지칭하는 용어였다.# '8'과 '6'은 각각 학번[1]과 출생년도를 뜻하므로 바뀌지 않지만 해당 세대가 40, 50, 60대를 거치며 앞 자리는 계속 바뀐다. 여기 '세대'라는 말이 붙어서 인텔CPU 80386를 탑재한 386 컴퓨터에 빗대어 1960년대생 전체 또는 1961~1969년생을 386세대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이 세대는 1960년부터 1969년까지 10년간 무려 1,000만 명[2] 가량 태어났고[3] 대한민국 인구의 17%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용어에 대한 비판 문단에도 서술되었듯 대입자가 적었던 시대임에도 대학 학번을 세대명으로 정하다 보니 실제 사람들의 주관적 세대 의식과 괴리가 존재한다. 2016년 최샛별 교수의 대규모 세대 연구에서 이들 스스로가 베이비붐 세대로 정의#했다는 것은 대졸자와 비대졸자 간 스스로 자신의 세대를 규정하는데 갭이 있으며 다수인 비대졸자들은 스스로를 86세대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씁쓸함을 드러낸다.

20대, 1990년대 학번, 1970년대 출생자를 뜻하는 297세대[4], 40대, 1970년대 학번, 1950년대 출생자를 뜻하는 475세대[5]라는 말도 쓰이긴 했으나 86세대와 달리 잘 쓰이지 않는다.

정확한 연대를 책정하자면 1960년 또는 1961년~1969년 사이 태어난 이들을 지칭한다. 1960년대 후반생들은 20대의 대부분을 민주화 이후 1997년 외환 위기 이전 시기를 지나왔고, 20대=90년대라는 인식이 커서 X세대 유행에 한 축을 담당했으며, 실제로 1996년경부터 86세대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엔 X세대로 보았으나 386세대가 유행하면서 86세대에 편입되어 버렸다.

이들과 전후 세대를 합치면 대략 1,400만 명 정도로 대한민국 인구의 1/4을 차지한다. 2024년 기준으로 전후 세대가 은퇴하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큰 주류 집단이 되었다.

2. 용어의 역사

2.1. 발생

1980년대에는 이 세대를 6.25 전쟁 이후에 태어나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고 하여 '전후(戰後)세대'라고 불러왔다.

펜티엄윈도우 95가 보급되던 1995년경, PC통신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사회적으로 PC 도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사회에 대충 적응은 했는데, 그다지 잘 안풀리는 30대를 가리켜서 386 CPU로 윈도우 95 돌리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라고 보수 언론에서 주장하였고, 당시 활자신문의 절대적 영향력에 마치 정설처럼 굳어졌다. 실제로는 윈도우 95 출시 전인 1993년에도 PC통신에서 X세대와 구분하려고 386세대라는 말을 만들고 사용하였다는 증언이 있으니 언론이 주도해서 만들었다는 말은 정확히는 거짓말이다. 다만 '신조어'라는 것이 근원을 찾기는 어려운데다가 당시 PC 통신 하던 증인은 소수에 불과하여 이러한 근원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신문사의 비유 자체는 적절한 것이, 386 CPU는 1980년대에 나왔고, 윈도우 95는 1995년에 나왔다. 컴퓨터의 성능이 부족하여 Windows 3.x[6]도 돌리지 못하는 386 PC가 당시 386세대 무직자들과 닮은 구석이 있다.

어원에 대하여 월간조선은 2017년 8월, 월간지 ≪말≫지가 1999년 5월호에 낸 별책부록 ≪21세기 한국의 희망 386리더≫[7]에 소개된 386세대의 어원 성립에 대하여 보도한 적이 있다. 이 별책부록은 당시 주목받던 많은 86세대 인사들을 다루고 있고, 이들의 자세한 인터뷰가 담겨 있어 신빙성이 상당히 높으므로 옮겨본다.
지난 1996년 11월 초순 늦은 밤 서초동의 한 인테리어 회사 사무실. 30대 대여섯명이 머리를 맞대고 한 카페에 대한 이름짓기를 하고 있었다. 이정우 변호사, 이왕준 ‘청년의사’ 대표, 김원재 MA 건설 대표, 한창민, 김종민. 그들은 30대 모임의 하나인 ‘열린공간30’의 주요 창립멤버들로 만남의 공간으로 활용한 카페를 ‘디자인’하고 있었다. 자장면에 고량주를 시켜먹으면서.
“386으로 하면 어때요? 우리 세대들이 30세로 80년대에 대학을 나온 60년대 출생들이잖아요.[8] 그 앞 숫자를 모아 386.”
한창민씨(당시 디지털 조선일보 근무)의 제안이었다. 연세대 철학과 82학번인 그는 총학생회 기획부장 시절부터 기발한 아이디어로 유명했던 인물. 그러나 즉석 기각. 당시만 해도 숫자로 이름을 짓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대신 ‘동숭동에서’로 결정됐다. 그런데 96년 12월 7일 그 카페가 개업할 때부터 기각된 이름 386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카페 대표를 맡았던 김종민(서울대 국문 83)씨의 말. “언론과 인터뷰 할 때 우리 카페를 ‘386들의 모임공간’이라고 했더니 그 뒤부터 386이란 말이 유행되더군요.” 김씨는 “그 용어는 분명히 한창민씨가 처음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다. 한창민씨에게 ‘저작권’이 정말 그에게 있는 거냐고 물어봤다. “내가 처음은 아니죠. 그 용어를 만든 건 인텔이니까(웃음). 그것에 약간의 패러디를 한 거죠.” 한씨는 그때 막 컴퓨터들이 펜티엄급으로 접어들고 있었다면서 386은 용량의 한계가 있지만 얼마든지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의 30대들은, 이른 학번은 한두 해 후면 30대들은, 이른 학번은 한두 해 후면, 40대로 접어든다. 386세대라는 이름도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우리가 486, 586이 될 때 사회적 퍼포먼스가 더 좋아져야겠죠.” 한씨는 ‘준비된 업그레이드’를 위해 요즘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 <<21세기 한국의 희망 386리더">> 1999년 5월 발간#
즉, 1994년~1996년 즈음의 1990년대 중반부터 사용해온 용어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용어는 언론에서 만든 것으로서[9] 3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이 스스로 '386세대'로 부르며 자랑스러워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될 때는 컴퓨터가 286, 386, 486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듯이 자신들도 세월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었다. 그러나 펜티엄이 나오고, 코어2듀오 등의 세대별 브랜드명으로 출시되며, X86 CPU의 이름으로 생산되는 CPU가 사라지자 X86이 낡은 명칭이 되었다.

2.2. 대중화

조선일보, 동아일보[10]를 비롯한 보수언론에 의해 표현이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보수, 진보에 무관하게 386세대 본인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당시 종이 신문의 영향력이 강하기도 했고 정치적인 용어임에도 나름대로 중립적인 용어이기도 했다. 또한 시사에서 사용되었음에도 나름대로 신묘한 표현이었다.[11] 그랬던 탓에 한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그 전 시대의 '베이비붐 세대', '전후 세대' 같은 딱딱한 단어보다는 부드러웠고, 반대로 뒤에 나온 'X세대'니 'N세대' 등의 용어보다는 훨씬 직관적이었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과제를 달성하고 남은 학생 운동 세력이 연세대 사태 등으로 물리적으로 박살나서 대학생 세대의 동질 의식이 약해진데다가, IMF 사태로 각자 살아가기 힘겨운 시대가 찾아 오고서는 이런 세대론도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12] '세대'론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양극화 심화로 제시된 88만원 세대론이 등장할 때였고, 그때까지 586세대는 나름대로 '세대'론에서 독보적인 용어로 살아남은 것이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신386세대"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이는 30년대에 태어나 80세를 넘은 1960년대 인사(사회활동을 시작한)를 뜻하는 말로 대표적인 인물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1960~70년대 정치인, 관료들이 대거 복귀하면서 우파색채가 강화되자 내놓은 말이다.
현재는 정계를 비롯한 언론에서 나잇대를 나타내는 앞의 숫자를 빼고 그냥 \'86세대'로 부르는 유형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80386', '80486', '80586' 등의 CPU 계통을 'x86'으로 호칭하는 것과 어느 정도 궤를 함께 한다.

2.3. 용어에 대한 비판

586~686세대[13]라는 표현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최종 학력이 고졸 이하인 사람들을 전부 제외한 표현이다. 넓게 잡아도, 80년대 학번으로 대학문화를 조금이라도 경험을 해본 대학 자퇴자까지만 수용하는 표현인 것이다.

이미 1960년대 출생자를 의미하는 '6'자가 있는데도 1980년대 학번을 의미하는 '8'자가 들어가 86이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이들을 칭하는 용어라고 볼 수 있다. 1985년을 기준으로 대학 진학률은 36.5% 정도였다. 여기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다시 사회주류에 진입한 경우까지를 고려하면 전체 1961~1970년생 중에서 소위 '86'은 사실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86'세대'라는 단어는 1960년대생 '세대'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대학에 진학하지 못 한 인구를 사회에서 배제시켜버린 단어"이다.

'86' 뒤에 '세대'를 붙여 세대를 일반화 한 것은 60년대생 세대의 양극화 현상과 고졸 이하 소외 현상을 함축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86세대의 수많은 문제와 그에 대한 불만이 생겨났다.

최소한 어린 시절을 기준으로 했을 때, 60~70년대 출생자들 중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던 대다수는 그 이전 시절보다도 더욱 열악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가난의 대물림을 피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이전 세대보다 대학 진학이 쉬웠다고는 하지만, 당시에도 여전히 중학교 졸업자의 65% 정도만이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일반계 고등학교 진학자의 35% 정도가 대학에 진학했다. 특히 여학생의 경우, 공부를 어느 정도 잘했어도 부모님들에 의해 상업계 고등학교로, 반쯤 강요된 진학을 하는 경우가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까지도 비일비재했다.[14]

당시 학벌 경쟁은 부모 차이 하나로 판가름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고, 그렇게 발생한 학벌의 차이는 이후 사회적 차별로 이어졌다. 직장과 사회에서 '중졸자', '고졸자'라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을 받았던 대부분의 80~90년대 학번인 61~80년생들은 열등감에 빠졌고, 이는 2004년에서 2009년까지 고등학생의 상급학교 진학률 80%로 대표되는[15] 단군 이래 최악의 학벌 경쟁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시 말해, 60년대 출생자의 80%가 넘는 압도적인 절대 다수는 최종 학력이 고졸 이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낭만적인 대학 문화를 향유했다는 1960년대 태생 젊은이들은 정작 세대 전체로 보면 일부 소수에 불과하다. 당시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당연하듯이 고졸 이하의 학력인 경우가 많았으며, 86세대들의 동생세대~조카세대인 이른바 서태지 세대, 국초딩 세대, 88만원 세대, 삼포세대와 비교를 해 보면, 비교적 일찍 사회에 진출하면서 사회인 생활을 시작했다. 결국, 낭만적 황금기를 구가한 86세대 젊은이들은 절대다수가 아니라 극소수의 유복한 대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86세대라는 표현이 1960년대생 전체에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1960년대에 태어난 대학생들 중 일부가 정치권으로 들어와, 한 시대의 엘리트로서 정치, 경제, 문화, 언론 등 사회의 중심층을 형성하고, 한 시대의 언어를 독점하는 것에 성공하며, 한국 사회의 주류세력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여론을 주도하게 된 것이 큰 원인이다. 즉, 소위 '86세대'는 자연스럽게 '대학 캠퍼스 생활'을 전제로 하면서 과거를 묘사하였고,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절대다수의 인물들은 사실상 타자화 • 공백화 하였다. 공교롭게도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적 소외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리고 이는 제5공화국 당시 3S 정책과 맞물려서 왜곡된 보수언론을 비롯한 기득권층에서 의도적으로 주입한 경향이 매우 다분하다. 상대적으로 일부 소수 인원만이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대학 캠퍼스 문화가 뉴스나 드라마, 연예 프로 등으로 수없이 많이 미화되면서 노출되었으며, 실제로 대학의 실상과는 억만광년 정도의 차이나 동떨어져 있는 낭만적인 풍토 등을 의도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공공매체에서 보여줬다.

단적인 예로, 국풍81같은 어용스런 관제 행사라든가, 대학가요제라든가, 대학 캠퍼스를 소재로 한 수많은 청춘 드라마라든가 등등... 특히 대학입시, 그중에서도 명문대 입시에 관한 언론의 뉴스는 입시 경쟁률이 얼마나 된다고 알려주는 내용이 뉴스에서 보도가 될 정도로 과열되고 지나칠 정도였다.

결국, 상대적으로 절대다수였던 대학에 가지 못한 1960년대 세대들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 한 상태로 학벌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에 따라서 대학생들을 동경하면서 이들의 가치에 함몰되었다. 자신과 개개인의 삶을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기보다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던 대학생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내면화시켰기 때문이다.

86세대의 다음 세대인 X세대는 극심한 교육열[16]에 시달리는 가장 큰 이유도 1940-60년대생의 70%~80%가 고졸 이하의 학력자로, 절대다수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대학 생활로 덮어버린 사회의 진실은 잔혹하기 그지 없었다. 감전, 신체절단 등 각종 산업재해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너무나도 흔했다.[17] 하지만, 1980년대 영화나 만화, 방송에서는 달동네나 빈곤층을 다루는 묘사는 소위 국격을 해친다면서 '검열'되었고[18], 땡전뉴스보도지침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사회적인 저항은 주요 미디어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축소하거나 왜곡시켜서 보도해버렸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빈곤한 삶은 아예 기록말살형 같은 검열을 당했던 것이다. 그 결과 텔레비전같은 미디어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한 대학생들의 삶만을 정상인으로 대우를 했고, 그나마 그 대학생들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삶도 완전히 왜곡시켜서 보도했다.

대다수의 고졸 취업자의 삶은 정부의 정책에 따라서 철저하게 무시를 당했고, 그 중에서 상당수는 열악한 노동조건이나 산업재해 등에 시달려야 했고 노조를 결성하려 들기라도 하면 아예 정부에서 직접, 번개같이 나서서 탄압하고 분쇄했다.

결국, 미디어에서 보도하고 기록한 당시의 '시대상'은 '진정한 대한민국이 보여주는 1980년대의 시대상'이 아니라, 철저하게 거품이 끼어있고 왜곡적이고 허구적인 시대상의 분식회계나 다름없었다. 상당수 대학에 다녔었던 86세대들의 대학생 시절은 사회의 정의를 위해 군부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고 인생을 바쳤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과거 학생운동의 중심이었던 전대협에서는 "오월대, 녹두대"처럼 군사조직 비스무리한 단체를 만들어 자기 또래의 전경들과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도 많았었고, 실제로 박종철처럼 살해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나마, 1980년대 후반부터 검열이 풀리면서 뉴스비전 동서남북이나 르포 60, 다큐멘터리 제5공화국, PD수첩 같이 본격적으로 사회의 치부를 까발리고 취재하는 프로그램이 등장하고[19] 이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 나오기도 했지만, 드라마의 경우에는 매우 단기간만 다뤄지거나 방송사 내부검열[20]로 틀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후에는 시청률에 밀리다 보니까 잘 다뤄지지도 않았으며, 시사 프로그램은 아무래도 초상권 문제나 높으신 분들이 찔리는 문제 같은 것도 있기 때문에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고, 만화의 경우에는 그나마 민중 만화나 시사 만화, 일부 명랑만화에서 다뤘고, 그 이외에도 일부 순정만화에서도 다루기는 했었지만 아무래도 1980년대 만화 중에서 인기 작품 위주로나 출간되는 수준인 데다가 한국 영화에서는 제일 수준이 떨어졌던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2010년대가 된 이후로도 재벌가를 배경으로 하는 막장 드라마가 많이 나오고 예전부터 청소년 드라마 등등, 여러 방송에 나오는 고등학교는 항상 일반계 고등학교인 점도 이러한 맥락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연예인들이 학창시절 연예인 활동을 하느라 제대로 공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분명히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닌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도, 왜 그렇게 인서울권 대학의 연극영화과나 실용음악과로 진학을 많이 하고 학력위조에 목을 맸는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자.

대표적으로, 1980년대 이전부터 문제가 된 심형래학력위조 사건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자서전에다 고려대학교 출신이라 대놓고 거짓말을 써놓은 사례가 아주 유명했고 2000년대에 방송된 개그 콘서트를 비롯해서 그 밖의 예능 프로에서 고려대와 연세대 출신 연예인들이 나와서 동문대결을 했을 때 심형래도 자주 참가했었다.[21]

이러한 사회문화 풍토와 1990년대 중반부터 대학진학률이 고도로 높아지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96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20대에 대학진학을 하지 않고 대학생들보다 사회인 생활을 먼저 시작한 것은 대학을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즉, 1960년대생 중에서 대학생이 아니었던 절대 다수는, 정확한 나이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인생에서 강한 열등감을 느껴야 되는 일종의 결핍된 요소로 받아들였으며, 자신의 또래 대학생들보다 사회 생활을 더 일찍 시작한 것은 단지 후회해야 될 인생의 과오일 뿐이었고, 다음 세대에게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자기 자신다운 인생의 형태로 여기지도 않고 있다. 이처럼 이 세대의 감정에는 어린 시절의 한(恨)이 서려있는 불편한 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2010년대에서 대학 진학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취업이 더욱 어려워진 시기라면, 소위 지잡대를 가는 것보다 고졸 이후 바로 취업하는 것이 더 효용성이 높을 가능성도 있다.[22] 하지만 소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너무 강한 60년대생의 고졸 출신들은, 나는 입학하지 못했지만, 자식들만이라도 반드시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강한 자존심 때문에 지금의 대학 정원과 진학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다는 시각도 있고, 사실상 정설로 통한다. 그러므로, 586세대가 받았던 혜택의 근본적인 원인은, 대학 진학률이 아주 적어서, 대학생들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1960년대생의 절대 다수가 고졸 혹은 그 이하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취업시장에서는 단지 대학생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우수한 인재로 여겨졌으며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다수인 80% 이상을 차지하고 1960년대생의 고졸 이하 사람들에게는 대학생이었던 적조차 없으니 당연히 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약 20% 미만인 대학 진학률을 현재에 비교하면, 86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의 대학생은 "대학생"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최소한 인서울 이상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현재 인서울+카이스트, 포공 등을 합쳐도 20%가 안 된다. 사실상 현재의 명문대생과 86세대의 대학생은 거의 같은 포지션이라는 의미.

그리고 최악이 된 문제는 당시의 한국 사회가 선진국 마지막 문턱에 탑승했던 과도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인서울 대학을 나온 이들과 그들이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지금의 인서울 명문대학을 졸업한 많은 대학생들은 왜 청년실업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극소수의 86세대가 누렸던 특권은 그들이 당시 대학을 졸업했다는 점 덕에서만 나온 게 아니고,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운빨과도 큰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가 힘들다. 요약하자면 시기적으로도 좋은 운을 타고났기 때문에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86세대는 그 용어 자체가 시민들을 기만한다. 그리고 바로 그 용어를 만들어낸 주체들이, 대부분의 시민들은 꿈도 못 꾸던 대학을 부모의 부유함 하나만 가지고 대충 입학해 하루종일 시위나 벌이며 공부 하나 제대로 안하다 별 검증 없이 대기업에 취직하고 정계에 진출에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기성 기득권자가 되어있다. 그러나 부모가 부유하지 못해 대학에 갈 수 없었거나 대학 졸업장을 땄어도 상류층이 되지 못한 대부분의 60년대생들은 언론에서 잊혀졌다.

언론에서 60년대생들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고 도매금치는 기만적인 용어를 계속 퍼트린 탓에 이 용어는 60년대생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며, 소수의 60년대생들이 대한민국의 상류층이 되어 재계와 정계를 장악한 탓에 대다수 평범한 60년대생들까지 피해를 보고 말았다.

3. 특징

3.1. 인구

엄청나게 많다. 한 해 평균 100만 명씩 태어났기 때문에 각 연대별 출생자 수 1위이며 이들과 1955~1959년, 1970~1974년생을 합치면 고작 20년 사이에 태어난 인구가 당시 대한민국 국민의 60%를 웃도는 수준이었으며, 2020년대 기준으로는 35%를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어딜 가나 바글바글 거릴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3.2. 경제

시대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라 살림이 엄청 어려웠던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내서 자라왔지만, 대한민국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성장하며 아메리칸 드림과 같이 대기업, 부동산같은 안정적인 경제기반을 마련하기 쉬웠던 세대. 한편으로는 양극화와 부익부 빈익빈이 극심한 모순이 가득한 세대이다.

86세대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다. 사회문화적으로 진보성향을 띄는 것과는 다르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수혜를 입어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며 세금으로 복지를 주는 것을 싫어하며, 다주택자 규제와 종부세 문제에 관심이 많다. 이 점에서는 정치적으로 성향이 다른 20대 남성들과 의견이 일치한다. 좋은 대학을 나온 86세대는 월급을 받아 부동산 투자로 많은 부를 쌓았다. 물론 대학을 졸업하지 못 한 60년대생 중에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많다. 한국의 전국 주택 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었다. 즉, 실제로 집이 필요한 사람의 수보다 집의 수가 더 많다. 그리고 주택, 특히 1980년대 이후 한국 주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파트는 감가상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깎인다. 그러면 수요와 공급 이론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내려가는 것이 소위 '보이지 않는 손' 이론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미 집을 소유하고 있는 86세대는 주택 가격이 끊임없이 올라가길 바라며, 부동산 가격이 내려가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들에게 부동산은 최고의 노후보장 수단이자 투자이기 때문이다. 낮은 가격에 집을 팔고 싶지 않으니 부동산 규제를 거부하고 가격을 낮추지 않는다. 게다가, 집을 가진 86세대는 전세도 원하지 않는다. 금리가 인하되면서 다달이 현금이 들어오는 월세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또한 금융자산보다 부동산을 선호하는 현상은 대한민국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한국인들 대부분이 금융자산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부동산은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한국에서 이건 사실이다. 2008년~2017년 사이 부동산 수익률은 주식 수익률보다 무려 25.7%나 앞섰다.#

386세대가 내 집 마련을 한 시기는, 대부분 IMF를 갓 지난 2000년대 초반이다. 이후, 엄청난 집값 폭등[23]으로 집을 가질 수 있었던 86세대들은 많은 수익을 거뒀다.[24] 일부는 은행대출을 통해서 부동산 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파트 두 세 채를 구입했다. 2000년 이전에는 부동산 투기가 일반인보다는 소수의 전문 투기세력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였고, 이전 세대는 빚을 지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다. 다만 이건 IMF 이전에 은행 이자율이 10%나 그 이상급으로 매우 높았기에 빚을 빌려쓰기도 힘들었던 데다가 복지제도 같은 것이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던 때라 (사실 복지제도는 2020년대 이후로도 별로 좋지 않지만) 빚을 거하게 졌다가 바로 한강이나 낙동강으로 입수할 판이라서 그랬던 영향이 강하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빚을 3,000만 원 졌다 하면 1년에 300-400만 원씩을 추가로 갚아야했다. 역으로 이자율이 높았기에 은행에 돈을 저축해놓으면 부동산은 모르지만 적어도 주식이나 펀드에 넣어두는 것 보다는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저축상품이나 전세가 흥했던 것이다.[25] 하지만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을 기점, IMF의 후유증 극복과 경기부양을 이유로 이자율이 2%대까지 낮아지고 대출문턱도 낮아지면서 빚을 지는 데 부담이 덜해졌고 그래서 '부자되세요' 열풍을 타고 대출이 급증하게 된 것이다. 부동산 거품 때문에 은행 이자 불어나는 것보다 땅값이 더 빨리 오르므로 빚내서 집 사도 이득이라는 벼락거지 신조어가 등장한것도 이때다.

2010년대 중후반, 586 화이트컬러가 대거 가세한 2차 부동산 버블은 그야말로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으면 멍청한 사람 취급받는 풍조가 강했고, 반대로 부동산에 투자할 만큼 기초자금이나, 수입이 높지 못 했던 586세대들은 이 대열에 끼지 못 했다. 특히 IMF로 인해 해고당했거나 파산한 뒤, 재취업을 못 했던 586세대는 종자돈도 없고, 대출길도 막혀 부동산 버블에 제대로 탑승하지도 못 했고, 결국 양극화가 심해졌다.[26] 이렇게 86세대들은 주어진 자금을 부동산에 투자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부동산 거품을 일으키는 바람에 나라의 수도인 서울에 자기 집을 장만하고 싶은 꿈을 가진 20대들에게 집값 직격탄을 날려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다. 하지만 부동산 거품의 원인이 86세대의 부동산 투자 때문만은 아니며, 자본주의에서 투자하는 건 죄가 아니라고 86세대 투자자들은 항변한다. 86세대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외치며 정부의 부동산 거품을 잡기 위한 정책을 가진것 뺏기라고 반대하고 임대주택 공급이나 부동산 세금 인상도 반대한다.[27] 전국적으로 집은 남아도는데, 정작 갓 사회에 들어온 20, 30대가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 집은 없다. 1년에 천만 원 모아서 서울 시내에 2억 원짜리 조그만 집을 사려면 20년 모아야 한다. 전세는 매물조차 잘 나오지 않으니까 결국 '집'이 아닌 '방'에서 다달이 부담스럽게 높은 월세를 내며 살아야 한다. 5평 전후의 공간에 매월 20~50만 원이라는 비싼 월세를 내는 것이 현 대한민국 (정확히는 서울과 수도권) 현실이다. 이렇다 보니 물가 관리는 전혀 되지 않고, 월급에서 생활비와 월세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당연히 연애는 힘겹기만 하고 결혼은 사치이며 주택구입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집을 가진 86세대는 소련의 붕괴를 목격했던 기억으로 국가가 부동산을 규제하거나 세금을 써서 집을 마련해주는 정책에 반감이 심하다. 시장경제 사회에서 노력해서 집을 사야지, 사회에 해달라고 요구만 하는것은 빨갱이라고 싸잡아 매도한다. 자본주의 고도성장의 그림자인 대한민국 사회에 짙게 드리운 구조적 모순은 이미 개인의 노력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었고 공정, 자유시장경제라고도 볼 수 없는 지경인 터라 20세기 초반식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방종자유주의 사상에 갇힌 헛소리라고 까여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서울에서 집을 사고 싶어도 돈이 부족해서 박탈감을 느끼는 사회초년생 20대들은 386sucks 같은 노래를 부르며 부동산을 차지하고 20대에게 부동산을 나눠주지 않는 586세대를 비판하고 있다. 2016년도에 나온 나라별 부호 통계에서 자수성가형 부호 비율이 세계 평균은 63%인 반면 한국은 겨우 33%에 불과했다. 수저빨이 매우 심각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미 다수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어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나 다주택 보유에 대한 감세가 필요한 586세대 상당수는 종합부동산세 인하와 부동산 거래 활성화나 관련 세금 인하를 주장하고 있고, 향후 주택을 구입해야 하는 2030세대 입장에서는 586세대에 대한 강한 박탈감에 시달리던 2030세대가 강한 적대감과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한편으로 1997년 외환 위기 때 86세대들이 받은 피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86세대가 외환위기 때 어땠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자료 입증이 되지 않았으며, 주장이 상호간에 상반되기 때문. 입사 2~3년 뒤 외환위기가 터져 회사에 입사동기 10명중 2명밖에 안 남은 이야기가 있는 반면, 당시 86세대는 대부분 연차가 얼마 안 된 직급이 낮은 직원이라서 해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28] 영세 자영업이나 일용직 근로자로 생계를 이어가는 86세대도 많은 반면, 중견 관리직 혹은 상층직을 차지하고 있는 86세대도 많기 때문.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1980년대 당시 대학에 다녔던 1960년대 출생자들의 숫자는 무려 250만 명에 달하는데, 이들 전체를 동질적인 하나의 집단으로 봐야 할지는 많은 논쟁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표명했으며, 소설가 성석제는 '기득권에 취해 있는 이들보다는 여전히 먹고 살 걱정에 시달리는 순응적인 586세대가 훨씬 많다'고 주장했다. 출처 링크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 세대조차도 양극화가 심하다. 상층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를 누리며 살아가는 기득권들은 극소수 뿐이며, 나머지는 다른 세대와 마찬가지로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온몸으로 다 받아가며 살아왔기 때문에 수혜의 세대라고 일반화하기는 큰 무리가 있다. 연령별 소득 수준 분포 자료세대별 월평균 임금

3.3. 정치, 사회



1960년대 당시에 평균출산율이 5명대를 기록했고, 그래서 이 세대들이 인구수가 다른 세대들보다 많다. 사실 현 1980~90년대생의 인구수가 전보다 비교적으로 적고 남초인 건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기 인구정책의 영향이 크다. 여타의 세대들보다 인구수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유명인사들도 많이 포진되어 있고, 가장 많은 유권자수를 가진 만큼 정치적인 힘도 막강하다. 그래서 이 세대가 유명한 것이다. 현재 50~60대라 사회를 이끄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은 제6공화국 출범 직후부터 이미 투표권을 가진 상태가 되었고, 보수정당 우위의 정치체제를 흔들어버리고 선거판을 주도하는 캐스팅 보터가 되었다. 그들은 민주정부 (민주당 정권), 특히 참여정부를 지지하고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당시 30대 ~ 40대 초반.) 이들이 참여정부 세력에 대한 지지를 버렸을 때 이명박 후보에게 표를 주었고, 이렇게 해서 이명박 정부가 등장했다. 그리고 18대 대선 즈음에는 이들은 캐스팅보트 인 40대 중반 ~ 50대 초반 세대를 형성하고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경합이었다.

386세대의 엄밀한 의미이자, 원래 사용된 의미가 운동권 세대이다.# 그에 걸맞게 사회적인 측면에서 386세대는 운동권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물론 386 '세대'로 묶이는 60년대생은 운동권과 관련없는 경우도 많다. 86세대는 성장기에 권위주의 독재정권의 관제 민족주의 교육을 받아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또한 운동권은 대학생 시절 이란사건으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의 학살을 방임한 미국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같은 자유보수주의 계열 민주화 운동가들과 갈등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한민주당김영삼김대중은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중에 "소수 학생들의 반미, 용공, 과격 시위를 반대한다." 라고 발표하여 사회주의 운동권에 거리를 두자, 자민투 운동권 세력이 신한민주당의 직선제개헌 서명운동을 훼방한 5·3 인천사태이다.# 양 김은 사회주의 계열 운동권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29] 386 운동권들은 자신들이 처한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으나 그 노력의 상당수는 정치적 구조에 대한 저항이 대부분이었다. 86세대는 기성세대,중장년층과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젊음을 강조하였지만 정작 내부 집단에서는 비민주적 운영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30]

86세대는 기성세대, 중장년층과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젊음을 강조하였지만 정작 내부 집단, 커뮤니티에서는 비민주적 운영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꼰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를 무너트리고 대의를 위해서 집단 내부의 작은 문제점 정도는 청년들의 사소한 실수 정도로 취급하고 넘어가자는 것은 유, 초년시절 극단적인 사회(유신정권) 하에서 초, 중등교육을 받아 집단주의가 몸에 밴 상태라서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었던 사고이다. 물론 1980년대의 학생운동이 정말 목숨 걸고 해야 될 수준이라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나 그 때 생긴 특징인 국가에 검열을 반대하고 자유를 외치지만 집단 내부에서는 전체주의적 차별적이고, 공정(평등), 이성, 합리를 강조하지만 자신들이 대상일때는 공감과 배려를 요구하는 등의 모순은 86세대들이 대학졸업하고 자본주의의 기득권이 되어 반복되고 30대인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생에게도 대물림되면서 집단주의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문제가 있다.

86세대 정치인들은 16, 17대 총선, 특히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신생 정당이던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서울이나 그 근교 지역구에 출마해 열린우리당의 압승과 함께 본격 정계로 진입했고, 대부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복귀를 했다. 물론 김문수같은 정치인과 민중을 개돼지라는 막말을 한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나,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이정호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 같은 사람들도 있다.

인구가 많다 보니 자연히 586세대만큼 정치인 수가 많았던 세대가 없었고, 또 정치에 입문한 세대 중 386세대가 비율이 높으며 그 후속 세대의 정치 입문은 청년정치인이라고 하면서 당에서 주도적으로 소수를 밀어주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정도고, 이런 당 주도 청년정치 프로젝트마저도 경험 부족이나 내부 갈등 등 여러 문제로 잘 되지 않고 있다.

2020년대, 현재 한국 정치는 86세대 정치인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야당 대선후보, 당대표, 장관, 검찰총장 모두 86세대이다.

86세대 정치인들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부터 장관, 입법부 국회의원, 사법부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보니 586용퇴론이 나오기도 했다. 여론 조사를 살펴보면 TBS가 KSOI에 의뢰하여 전국민을 상대로 2022년 5월 27-28일간 조사한 결과, 더불어민주당 박지현 비대위원장의 586용퇴론에 대해 49.6%가 동의, 35.2%가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여심위 또, 뉴스토마토가 미디어토마토에 의뢰하여 전국민을 상대로 2022년 6월 7일 586 용퇴론에 대해 조사한 결과, 586 퇴진 자체를 반대하는 여론은 14.8%로 조사됐다. 일괄 퇴진 33.9%, 선별 퇴진 36.9%로 나타났다. 여심위 #

88만원 세대는 이런 세대론을 토대로 586 개XX론을 폈다.#

3.3.1. 386 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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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문화

상대적으로 60년대생의 일부 소수 인원만이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대학 캠퍼스 문화가 뉴스나 드라마, 연예 프로 등으로 수없이 많이 미화되면서 노출되었으며, 실제로 대학의 실상과는 억만광년 정도의 차이나 동떨어져 있는 낭만적인 풍토 등을 의도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공공매체에서 보여줬다. 단적인 예로, 국풍81같은 행사라든가, 대학가요제라든가, 대학 캠퍼스를 소재로 한 수많은 청춘 드라마라든가 등등... 특히 대학입시, 그중에서도 명문대 입시에 관한 언론의 뉴스는 입시 경쟁률이 얼마나 된다고 알려주는 내용이 뉴스에서 보도가 될 정도로 과열되고 지나칠 정도였다.

AFKN[31]은 어찌보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수 있다. 당시 영어 좀 할 줄 아는 대학생들은 국내 뉴스 대신에 AFKN에서 방송하는 abc의 굿모닝 아메리카, 나이트라인, ABC 월드 뉴스 투나잇 등을 봤다고 한다. 또한, MBC 강변가요제, MBC 대학가요제등 대학가요제가 유행하였고 당시 대학생들 가방에는 뉴스위크나 타임지를 보는 유행이 있었다고 한다. 또 랜드로바는 386세대 대학생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들 중 하나다. 참고로 당시 노는 애들은 경쟁사의 영에이지를 많이 신었다.

1980년대 학번 대학생에 대한 대표적인 지원 정책은 대중교통 요금의 할인제도였다. 대학생 버스요금이 중, 고교생과 같았다. 물론, 같은 나이의 취업자(고졸)들은 성인 취급을 하여 이러한 혜택이 없었다. 본격 대학생 우대였다.[32] 그 당시에는 상이군경보다도 훨씬 더 좋은 혜택이었다 볼 수 있다.[33] 이는 무엇보다 인수도권 학생들에게 유리했는데, 서울 시내버스와는 달리 할인폭이 컸다.[34][35]

대중음악계에서 60년대생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전통가요 시대에서 현대가요 시대로 바뀌는 급격한 변화에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나버린 비운의 세대인데, 물론 시대의 변화에 동참하거나 적응하여 90년대와 그 이후의 K-POP시장에서 활약한 신승훈, 김건모, 이승환, 이승철, 박미경, 김종서, 김광진, 윤종신, 임재범, 이소라, 강산에, 탁재훈, 이현우, 장혜진, 신해철, 윤상, 이은미, 조관우, 유영석 같은 인물들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60년대생 가수들은 90년대 가요계의 주류에서 밀려나야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라이브카페에서 70~80년대의 가요를 부르며 활동하거나 트로트가수로 전향하여 60년대생 이상의 구세대 성인층만을 대상으로 한 음악을 하게 되기도 하였다.

3.5. 교육

애시당초 1960년대생의 절대 다수가 고졸 혹은 그 이하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취업시장에서는 단지 대학생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우수한 인재로 여겨졌으며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절대 다수인 80% 이상을 차지하고 1960년대생의 고졸 이하 사람들에게는 대학생이었던 적조차 없으니 당연히 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약 20% 미만인 대학 진학률을 현재에 비교하면, 86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의 대학생은 "대학생"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최소한 인서울 이상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현재 인서울+카이스트, 포공 등을 합쳐도 20%가 안 된다. 사실상 현재의 명문대생과 86세대의 대학생은 거의 같은 포지션이라는 의미.

586세대 바로 직후인 1989학번~1990년대 학번 세대는 대입 수험생 수가 사상 최고로 불어난 반면, 졸업정원제는 폐지(약 30% 감소)되어 입시 경쟁이 격화되었다. 또한 등록금이 싸다고 수년간 푸념하던 대학 당국의 항의가 수용되면서, 1989년 대학 등록금 자율화 조치가 시행되고 대학 등록금이 큰 폭으로 올랐다.[36]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거의 모든 대학이 계속 등록금을 올려왔다. 한편, 86세대가 수험생이던 1980년대까지 유교적 가치관이 강하게 남아있어서, 가난한 집안의 경우에는 장남만 대학보내고, 여자는 교육을 포기하는 등 남녀차별이 존재하였다.

당시 대졸자 세대의 교육 및 사회환경은 그 사상적 동질감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앞 세대가 논 팔고 소 팔아 우골탑을 만들어서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했다면, 이들은 윗 세대 보다 좋은 환경에서 대학에 들어갔다. 교육 환경은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지만 상대적 성장 일로에 있던 당시 경제상황으로 인해 다른 세대보다 고용불안, 소득불안정같은 경제적인 부족함은 상대적으로 덜했으며 사회진출의 경로도 넓었다.[37] 이 때문에 고용없는 성장을 겪고 있는 88만원 세대보다 취업을 쉽게 했다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위 서술에서처럼 86세대들이 정말로 '개나소나' 대학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과거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진학률을 보였다는 것 뿐이지, 실제로는 겨우 30% 수준이었다. 87년 중앙일보 기사[38] 그러니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으로 프리패스했다는 묘사는 86세대의 다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대학 교육이 보편화된 시기는 빨라도 1990년대 후반이며, 보통 2000년대로 잡는다. 대학 진학률은 1990년대 후반에 65% 정도였고, 2000년대 초반에서야 80%를 넘겼다. 하물며 고등학교도 사실상 100%가 진학하는 지금과 달리 70~80%만이 진학했던 시절이다.

또한 고졸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재보다 적었다. 현재는 유튜버, 배달, 코인 등으로 고졸자라도 돈을 벌 방법이 있는 반면 그 시절 고졸은 농사 아니면 노가다밖에 길이 없었다.

참고로 이 세대는 다른 세대에 비해 월등히 많이 태어난 탓에 중학교 및 고등학교에서는 한 학급에 학생이 70명이라는 기절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 배치되기도 했다. 게다가 저 당시에는 반도 현재보다 더 적었으니 더 그렇다. 바로 밑의 세대인 1970년대 생들 조차 한 학급에 55명일 정도였는데 1970년대 생보다 인원이 훨씬 많은 86세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전 세대는 절대적 빈곤에 따른 영양부족으로 체력이 떨어졌으나 이들 세대에 들어 보릿고개가 사라지면서 그 문제가 해소되었고, 이들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낼 때에는 아직 컴퓨터와 전자오락 등이 보급되기 이전이라 대부분 밖에서 신체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체력이 좋은 편이었다. 또 당시에는 군사정권의 교련과목이 체육과 같이 존재했고 학력고사에 체육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체력이 입시과목화 되었다는 사실이 있었다.[39]

3.6. 사교육과 교육열 조장

386 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을 장악했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학원 장사를 해 떼돈을 번다. 이들이 사교육 시장을 키운 주범이다.
2006년 김진경 당시 노무현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 이 사람은 운동권 출신인 데다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 노무현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대통령직속 국가교육회의 대입제도개편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대치동을 만든 세대로 요약할 수 있다. ~지옥 같은 대치동 입시학원~ 대수능뿐 아니라 공무원 시험, 전문대학원 입학시험, 임용시험 등에서도 메가스터디386세대가 만든 학원이 모두 장악했다. 그나마 수능은 매해 매스컴에서라도 언급하지만 현재 이들 시험은 더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무도 언급해 주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1980년대 5공 정권의 과외금지 조치는 이들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수험생 입장에서는 과외금지로 인해 사교육을 받지 않고도 대학에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와서는 저 조치 때문에 학비를 조달하기 위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사라진 꼴이 되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서비스업이 발달하지 못해서 과외를 하지 않는다면 택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는 공장, 노가다 등 뿐이었는데 공장의 경우 운동권위장취업으로 오해받아 쫓겨날 위험이 높았으며, 지금보다 소득수준이 훨씬 낮고 최저임금 개념도 없던 시절에 공장이나 노가다로 받는 박봉으로는 학비 조달이 어려웠다. 1980년대에 막노동이 고수입 직종이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는데, 노가다 임금이 급격히 상승한 것은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르면서 3D직종 기피 풍조가 가속화된 1990년대의 이야기이지, 적어도 1980년대 중반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이후 1980년대 후반 민주화 투쟁으로 ‘전면적 과외 금지’를 몰아붙인 신군부는 1987년 ‘6·10항쟁’ 이후 사실상 힘을 잃었다.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던 1970~80년대 학번 대학생들은 ‘투쟁’을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1989년 교육민주화 운동을 하다 교단을 떠나게 된 ‘전교조 해직교사’들과 더불어 수많은 고학력자가 별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사회에 진출했다. 이런 현상과 맞물려서, 1992년 9월 서울시내 중고교 재학생의 학원 수강이 전면 허용되었다. 사교육 업계가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에 힘을 실어준 건 1993년 처음 치러진 수능이다. 기존의 암기식 학력고사와 달리 수능은 학생의 사고력, 논리력, 비판 능력 등을 평가 대상으로 삼았다. 대학 시절 고전과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토론과 세미나를 반복한 운동권 출신에게 최적화된 입시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논술 전형 또한 신설됐다. 교육 당국의 잇단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는 논술의 영향력을 점점 강화했다. 동아일보는 1990년 5월 22일자에서 ‘전교조 해직교사는 1500여 명이며, 상당수가 서점·문방구·출판사 경영, 학원강사, 번역업 등에 종사한다’고 보도했다. 일반적 직장생활이 어려운 이들의 호구지책 중 하나가 학원강사였던 셈이다.

너무 많아 여기에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메가스터디’를 창업한 손주은이 대표적이다.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한 황광우(서울대 77학번)씨는 플라톤청솔학원에서 논술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황씨가 지은 <진리는 나의 빛> <황씨 아저씨네 논술 서리>는 논술교재로 유명한 책이다. 도시형 대안학교 '이우'의 교장인 정광필(서울대 78학번)씨도 플라톤청솔학원에서 논술 강의를 했다.

또한 한석원/생애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 또한 손주은, 이범, 이현, 김찬휘, 정지웅 등과 함께 운동권 1세대 강사이다. 또한 그는 2004년 김찬휘, 한석원은 같은 운동권 동료이자 역시 영어학원을 운영하던 최인호를 끌어들여 '티치미'를 공동 설립, 메가스터디를 요망한 장사치라고 깐 내용은 아직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르몽드 코리아>의 대표이사인 박승흡(서울대 1980학번)씨는 국어교사 출신으로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가 논술강사를 시작했다. 이현씨 또한 중학교 윤리강사로 재직하다가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뒤 대표적 사교육 업계인 스카이에듀를 만들었다. 전대협 2기 출신인 조동기(고려대 1985학번)씨는 강남 대일학원에서 국어과목으로 스타강사 대열에 들어선 이후 1997년말 대치역에 '조동기국어논술학원'을 열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핵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는 전국에 19개 분원을 마련하고 올해 매출목표를 400억원으로 잡고 있다.

서울 강동구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청산학원을 이끄는 쌍두마차인 최원극(외국어대 1984학번)씨와 박영재(서울대 1984학번)씨는 주체사상쪽 조직이던 자주민주통일(자민통) 소속으로 골수 운동권이었다. 1991년 속셈학원 수준으로 출발한 청산학원은 과학고, 민족사관고, 외국어고 전문학원으로 성장해 매출 100억원대의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논술과 구술 면접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고 22개 분원을 두고 있는 유레카논술아카데미의 대표강사 장민성(서울대 1981학번), 박홍순(성균관대 1982학번)씨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계로 분류된다. 박홍순씨는 민주노동당 중앙당 기획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4년에는 구로구 갑 후보로 출마한 바 있다.

노원구에 있는 학림학원의 채광석(성균관대 1987학번)씨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운동권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학림학원에는 성균관대 운동권 출신들이 강사로 다수 포진하고 있다. 초암논술아카데미 대표강사인 이윤호, 송재인씨도 1980년대 초반 학번으로 운동권 출신들이다. 과학탐구 영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연봉18억원을 기록한 이범(서울대 1988학번)씨도 좌파 운동권의 이론을 제공했던 <학회평론>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학원 사업을 하다가 정치권으로 진출한 경우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건국대 산업공학 85학번)의원과 열린민주당 정봉주(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1980학번)의원은 길잡이학원과 외대어학원을 운영하다가 여의도 입성에 성공한 경우다.#

사실 단순히 먹고 살 것이 없어서 뛰어들기는 했지만, 대한민국 사교육의 중심이 된 건 운동권 출신 강사들의 남다른 ‘전략’ 덕분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하루에 6일씩 학교에 다니던 2005년, 정부가 한 달에 한 번 토요일에 쉬는 ‘놀토’ 정책을 내놓자 대치동 학원가엔 바로 ‘토요 집중반’ 프로그램이 생겼다. 명절 기간에 집중적으로 국영수를 파고드는 이른바 ‘명절 특강’을 만든 것도 대치동이었다.

사교육 전문가로 거듭난 386들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못잖게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공격적이었다. 정부가 학생들을 공부 부담에서 해방시키고자 입시 전형에서 ‘비교과’ 평가 비율을 높이자 대치동은 즉시 최고 수준의 비교과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대치동을 한국 사교육의 메카로 만든 386 강사들은 이제 대치동의 주류가 아니긴 하다. 50세를 훌쩍 넘기면서, 상당수가 은퇴했거나 새로운 인생 항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사교육 전문가들은 대치동의 명성을 흔들림 없이 공고화하고 있다.

3.7. 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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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병역의무의 징병률이 낮은 대신 복무 기간이 길었다. 많은 인구수와 지금에 비해 긴 복무 기간 덕분에 징병률이 낮았기 때문에 병역면제를 받는 비율이 1990년대 이후에 비해서 높았다. 당시 징집대상 남성들 중에서 현역 병역을 수행하는 비율은 40%대~60%대에 불과했다.#[40] 다만 현역 복무기간은 30개월이었고, 1990년대 이후에 비하면 꽤 길었고, 현재에 비하면 군인월급도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며, 군 가혹행위도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신체검사에서 이상소견이 있는 경우에 18개월 방위병 복무 판정이나 면제 판정을 받는 비율이 1990년대 이후에 비해 높았고, 2대 독자 등의 경우에는 6개월 방위병 복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역에 있어 대학생 우대 제도들이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대학원에 진학한 고학력자의 경우 현역복무 판정을 받아도 6개월 석사장교로 입대하는 방법도 있었다. 다만 석사장교는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수와 비슷한 숫자인 매년 평균 1000명 정도의 인원만 선발했다.[41]

이들의 징병율이 낮은 진정한 이유는 엄청나게 높은 출산율 때문이었다. 한 해 100만 명씩 태어났기 때문에 인적자원 하나만큼은 끝장나게 넘쳐 흘렀다. 그래서 신체검사를 하더라도 1급만 현역으로 복무하고 2급이 방위병으로 복무할 정도였으며[42] 어딘가 조금만이라도 불편한 곳이 있다면[43] 면제였다.

또한 이 시절에는 대학 1학년때 문무대 일주일, 2학년때 전방입소 일주일을 하게 되면 복무기간을 90일 단축해줬다. 즉 당시 대학생들의 실질적 복무기간은 27개월이였던 것. 절대 복무기간은 1990년대보다 길었지만 대학 재학자와 최종 고졸이하 간에 복무기간이 달랐다는 점에서 이는 아래 용어 비판에서 서술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세대들의 박탈감을 만드는데 일조했다.[44] 이 제도는 1989년에 없어져서 1989학번 이후는 복무단축이 없다. 1988학번은 문무대만 갔다왔기 때문에 45일 단축.

이 뿐만 아니라 당시 병역법의 입영의무 연령도 모든 병역의무자는 만 30세가 되는 해까지였으며 만 30세가 되는 해를 넘긴 경우에는 소집면제처리가 되도록 되었다. 지금도 만 30세가 넘어가면 현역입영대상에서 제외되고 보충역으로 빠진다.

4. 관련 문서



[1] 이러면 재수를 하지 않은 79학번인 1960년생들이나 빠른 1961년생들은 포함되지 않겠지만 이들도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2] 다만 이 수치는 최초 출생신고 당시 기준이며 영아 사망, 해외 이민,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사망 등으로 현재는 850만 명이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3] 연도별 대한민국 출생 및 사망 통계[4] 현재는 497~597[5] 현재는 675~775[6] 최소성능: 286(영문), 386(한글)이상 CPU[7] 2017년 이 별책부록에 소개된 인사들이 노무현 정권 이후 국회의원이 되고,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장관 등을 맡게 되자 예언서로 불리며 상당히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8] 다만 68~69년생은 당시 286세대였다.[9] 마찬가지로 후대의 MZ세대 역시 한국 언론이 억지로 만들어낸 것으로, 레거시 미디어의 힘이 예전같지 않은 오늘날에 정작 세대 당사자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10] 황중환의 386c가 대표적이다.[11] 이 말이 처음 등장했던 90년대는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사오정(45세가 정년)',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중한 시간을 위하여)' 등 깔깔유머집(요즘 말로는 아재 개그)에서 겨우 나올 단어들이 유행하던, 정확히는 진짜 깔깔유머집이 직장 분위기를 살릴 유머라고 유행했다. 정말로 신묘한 단어였던 것.[12] '밀레니엄 세대' 같은 직관성이 높은 용어를 제외하면 X세대, N세대는 그나마 히트한 축에 속하고, G세대니 C세대니 하는 지금은 사전에서나 볼 법한 용어들이 쏟아졌으나 살아남은 것은 거의 없다. 가장 히트했다는 X세대도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표되는 'X세대 문화'의 유행, 그리고 유재석, 이병헌, 박진영, 강호동 등 많은 X세대들이 2020년대에도 문화를 주도하는 탑스타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잘 정착한 것이지, '자유롭고 규정할 수 없다'는 X세대의 특징은 1990년대 처음 민주화되고 중진국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국가에서 성인을 맞이한 이들을 바라본 기성세대들에겐 당혹스러울 정도로 새로운 것이었지만, 이후 민주화와 경제발전이 더 고도화된 이후 성인이 된 이들에겐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게 되었다.[13] 2019년 기준 1969년생이 50세에 접어들었으며, 2020년~24년에 1960~64년생은 60대에 진입했다.[14] 1992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리에 방영된 배우 김희애최수종 주연의 드라마 아들과 딸이 이러한 사회적 풍토를 잘 그려냈다.[15] e-나라지표 취학률 및 진학률 출처.[16] 다만, 교육열 자체는 그 이전부터 분명히 존재했던 상태이기는 했다. 하지만, 더더욱 지독한 학력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 목표가 지속해서 높아져갔을 뿐. 그리고, 지금은 토익 700이니 800이니 해도 취직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17] 이 문제는 산업현장에서 안전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거나 보호장구 착용에 미숙하거나 원가절감으로 빼버리는 부분이 많아 생기는 문제이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들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2012년 11월 9일에 방송되었고 아주대병원 이국종 교수가 출연하였던 "MBC스페셜" '골든타임은 있다. - 외상외과' 편에서 하루에 전국적으로 100여 명이 사망하는 중증외상 환자 거의 대부분은 생업현장에서 다치는 경우라고 언급되었던 점과, 설령 다치지 않는다 해도 이러한 직종에서 종사할 경우 보험회사의 상해위험등급에서 높은 등급을 받아 보험 가입 시 어느 정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18] 참고로 이런 조치가 입식생활이 맞지 않는 대한민국 가옥들에 침대가 보급되게 만드는 데에도 한몫 거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드라마에 나오는 집들 중에서 침대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령 바닥에서 생활하는 집이 나온다고 해도 그건 서민이나 빈곤계층 아니면 농어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나 등장한다. 사실 침대생활을 하려면 바닥 난방이 아닌 벽난로, 라디에이터, 팬코일유니트 등으로 난방을 해야 한다. 결국, 한국의 주거공간에는 침대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19] 물론, 그 이전에도 추적 60분이나 MBC 리포트 같은 프로그램이 존재했었지만 5공 시절 특성상 검열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20] 주로 3당 합당 이후의 1990년대다.[21] 사실, 이 학력위조는 고려대 측도 할 말이 없는 것이 학력위조를 확인해 줘야 될 학교 측이 나서서 대놓고 심형래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선전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개그 콘서트를 고려대에서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특별 초대손님으로 자랑스런 선배라고 대놓고 구라를 치면서 심형래가 등장을 했다는 것이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공식행사에서 대놓고 동문이라고 말을 하는데, 고려대 측이 오히려 심형래를 감싸주면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력위조가 밝혀진 다음에 고려대 측에서는 "학부는 아니지만 고대에서 개설한 과정을 수료했으므로 넓은 의미의 동문으로 본다."는 희대의 개드립을 시전했다. 당시의 명문대학들은 돈을 벌고 유명인사들을 이용해서 학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최고경영자 과정이나 평생교육원 등을 운영했고,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교육도 진행하지만 수강생들을 자신의 학교 인맥으로 묶어서 동문의식을 심어주고,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일가를 이뤄낸 중장년층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동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그러면서 가방끈 비스무리한 것 하나 달아주면서 학교에서는 수업료도 걷고 기부도 받을 수 있고, 유명인이 나서서 대학 홍보도 해줬으니 손해를 볼 것이 없는 일석이조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불공정한 관행이 있는 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아직도 유명 연예인들을 수능도 제대로 보지 않고 실력과 상관없이 입학시키는 악습이 존재하는 것도 이런 사유 때문이다. 결국, 나중에 고려대에서는 이건희 명예박사 사건이 터지면서 화룡점정으로 변한다.#[22] 물론 이쪽도 중소기업 생산직이라는, 거의 높은 확률로 비인간적인 삶을 강제당할 수 있다.[23] 수도권 최소 2~3배[24] 자세한 것은 부동산, 버블세븐 문서를 참고하자.[25] 은행에 가서 1억 원 저축을 하면 1년에 이자로 1,000만 원을 얻어먹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26] #1, #2,#3[27] #1, #2,#3, #4[28] 당시 이들 세대의 실직률이나 이직률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자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지속적인 논쟁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29] 김대중의 자서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참고.[30] 남성 중심적인 생각 때문인지, 성추행이 일어나도 피해자의 침묵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1, #2 결국 이 문제가 표면화된 것이 86세대 대상 미투 운동이라는 견해가 있다. #[31] 1996년까진 System M VHF-Low 2ch였으나 1996년부터 UHF 34ch로 변경되었고 MTS/SAP방식의 스테레오 방송을 실시했다.[32] 정확히 말하면 중,고,대학생 할인을 받으려면 현금승차는 안되고 "회수권"이라는 것을 구매해야 하는데 중고생용과 대학생용이 있었다. 대학생용은 일반인의 전용을 막고자 대학 학생회관 매점에서만 팔았으며 좀 깐깐한 대학에서는 그 대학 학생증까지 보여줘야 팔았다. 참고로 노량진 재수학원가에서는 어디서 빼돌렸는지 대학생 회수권을 확보해 10~20원의 프리미엄을 얹어 팔기도 했다. (1989년 기준 일반인 140원, 중,고,대학생 회수권 100원)[33] 이러한 사례 중에서 좀 더 심한 사례는 번화가에서의 미성년자 음주단속이였다. 1980년대 당시는 만 20세 미만은 미성년자였는데 대부분의 대학 1년생과 생일이 안 지난 대학 2학년생은 대부분 미성년자였음에도 단속 시 봐 주는 분위기였다. 물론 재수생은 무조건 단속. 이게 일견 법적 일관성에 모순점이 있었지만 인텔리 계층으로써 사회에 불만을 일으킬 가능성이 가장 크던 대학생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유지되었다. (참고로 결국 이런 모순된 상황은 미성년자 기준을 만 19세 미만으로 낮춰도 없어지지 않아서 음주 가능 시기를 만 19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34] 이 정책은 1990년부터 없어져서 인수도권 대학 학생들은 교통비가 2배로 올랐다.[35] 철도청(과 지하철공사)에서 운영하는 수도권 전철은 상당히 늦게까지 학생 할인이 유지됐다. 1회권은 할인이 없었지만 정액권은 할인받을 수 있었다. 기준은 '신분'이고 나이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 만학도도 할인받을 수 있었다. 애초에 철도는 만 13세부터 성인 운임을 받는다. 그러나 중고대학생은 통일호 이하(나중엔 무궁화호까지 확대) 열차는 철도청에서 소속 학교로 배부한 할인증을 이용하면 20% 운임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단, 최저운임 아래로는 할인되지 않았다. 즉 서울-천안, 서대전-익산 같은 중거리 구간은 있으나마나다).[36] 그나마 첫해인 1989년도에는 대학들이 눈치를 보느라 등록금 인상을 하지 않은 대학이 더 많았으며 모 대학처럼 인상했다가 학생회의 반발로 인상분을 도로 환불받은 사례도 있었다.[37] 일자리가 크게 늘어나던 시절이라,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졸업생 학과 불문, 이공계 전문대졸 남자라면 거의 100% 취업이 되었다.[38] 지금으로 따지면 4등급 이하로는 대학 진학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셈이다.[39] 오죽하면 90년대에 체력장으로 고교생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40] 참고로 2019년에는 징집대상 남성의 94.3%가 현역 또는 보충역으로 징병되었다.#[41]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 김난도 역시 석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전 법무부 장관 조국 역시 석사장교 출신.[42] 현재 기준으로는 3급조차 받기 어려울 정도의 경증 저시력자도 적지 않은 수가 방위병으로 복무했다.[43] 가령, 평발의 경우 현재는 발 뼈의 각도를 세세하게 따져 가면서 급수를 나누고 어지간히 심하지 않은 이상 2~3급 현역이 나오며 일상생활에 큰 불편이 있을 정도로 심해도 면제가 아닌 4급 보충역 판정을 내리는 것이 절대다수지만, 당시에는 그냥 서 있을 때 발바닥에 아치가 보이지 않기만 하면 무조건 면제를 받을 수 있었다.[44] 군필자는 잘 알겠지만, 선임보다 먼저 전역하는 후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