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10:03:33

이유(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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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儒
생몰년도 미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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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며 는 문우(文優) 또는 효유(孝儒)로[2] 사례(司隷) 빙익군(馮翊郡) 합양현(郃陽縣) 사람이다.[3] 범엽의 《후한서》나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독자적인 열전 기록이 없으며 후한서와 여러 사서, 비석 금석문 등에 단편적으로 흩어져 기록되어 있다.

2. 정사 삼국지

조정에서 박사(博士)를 지냈으며, 광화 7년(184년) 거록 사람 장각황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합양 사람 곽가(郭家)[4] 또한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성과 관청을 불태웠는데 합양령 조전(曹全)은 곽가의 난을 진압하는 한편 의 학자인 이유·정인(程寅) · 난규(欒規)를 조정에 천거했다. 이에 이유는 이듬해에 동향인 상량(商量)·사마집(司馬集) 등과 함께 조전을 기리는 비를 세웠으며 이 비문이 현존하고 있다.[5]

동탁의 명령으로 소제를 독살했다.[6] 초평 원년(190년), 산동 지역에서 의병크게 일어나 동탁의 난을 토벌하고자 했다.(후한서 영사하황후전) 동탁은 동방에서 병사가 일어나자 두려워서 홍농왕(소제)를 곧 죽였다.(후한서 동탁열전)[7] 동탁은 홍농왕을 누각 위에 머물게 한 후, 낭중령 이유에게 짐독을 올리게 하면서 말했다.(후한서 영사하황후전)
"이 약을 드시면 병환이 다 낫게 될 것입니다."

유변은 먹지 않으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나를 죽이려 하는 네놈의 계략 아니냐?"

그래도 소제는 먹지 않으려 했지만 이유가 억지로 권하자 하는 수 없이 스스로 먹고 목숨을 끊었다.
192년에 동탁이 주살된 후 권력을 장악한 이각을 통해 시중(侍中)에 천거되었다. 헌제는 거절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유는 전에 홍농왕의 낭중령을 지냈는데 짐의 형님협박하여 죽였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이오."

그러자 이각은 이에 반박했다.

"이유는 동탁의 사주를 받아 자신의 본의로 한 것이 아니니 죄없는 자를 벌할 수 없습니다."[8]

역사서의 기록대로라면 이유는 동탁에 연루되어 덤으로 처형되기는커녕 실상은 이각이 집권할 때까지도 여전히 살아서 그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사서에서 이유의 행적은 불명.[9]

3. 삼국지연의

정사에서는 동탁의 일개 수하에 불과했던 인물이 삼국지연의에서는 나관중에 의해 대폭 개작되어 엄청난 비중을 가진 군사 캐릭터로 각색했다. 나관중은 이유가 상당히 나이가 많았던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연의에서는 대폭 젊어진 대신 원래 나이에 걸맞은 학식을 부여했다. 그래서 연의에서의 이유가 영민한 것이다.

연의에서는 동탁사위이자 최고 모사로 동탁이 진작에 그의 영민함을 알고 을 주었으니 연의에서의 동탁도 덩달아 어느 정도 인물 보는 식견의 보정을 받았다. 대장군 하진십상시 환관들을 모두 주살하고자 동탁을 불렀을 때 적극적으로 응하라고 부추겼으며, 가기 전에 먼저 사심이 없다는 의미의 조서를 먼저 하진에게 보내 하진을 안심시키라고 간하였다. 동탁이 낙양에 상경하여 정권을 쥔 뒤에는 현재 황제를 폐위시키고 진류왕 즉 헌제를 황제로 옹립시켜 천하의 대권을 잡으라고 계책을 올리라는 것을 주장하는 등 삼국지 초반 동탁의 대성공을 도운 최고 공신이다.

또한 하태후를 2층에서 던져 죽이고 당희를 목졸라 죽인 뒤에는 폐위된 홍농왕(소제)에게 목구멍을 억지로 벌려 독주를 부어 죽이고 반동탁연합군이 추격해 오자 원외를 비롯한 원소의 일가친척들을 몰살시키라고 진언을 하고 낙양을 불태운 뒤 장안으로 천도하라고 진언하는 등 매우 간악하고 잔인한 계책까지도 사용하는 사악한 군사로 묘사된다. 그 뒤 반동탁연합군의 추격을 두려워해 서영여포로 하여금 매복하게 하여 조조군을 대패시켰다.

그 뒤에는 동탁초선에게 빠져 여포와 관계가 틀어진 걸 불길한 징조로 치고 동탁에게 초선을 여포에게 주라고 간했으나, 동탁이 거부하자 이후 곧 초선에 의해 동탁이 몰락할 거라고 예견한다. 그래서인지 동탁이 반대파들에게 속아 황제가 되는 줄 알고 가짜 선양식에 갈 때 동탁의 측근 중 유일하게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동탁이 주살된 뒤 바로 집에서 하인들에게 잡혀 여포에 의해 척살되었다.[10]

4. 평가

삼국지의 전체적인 평가는 잔인하고 비열한 간신, 역적, 악당으로서의 평가가 대부분인 듯하다. 악인이지만 나름대로의 통찰은 보유한 인물.

정사에서는 단지 소제를 시해한 원흉으로써 사후 처리의 토막 일화로 한차례 거론될 뿐이어서 동탁 휘하에서의 비중이 컸을지조차 의문인 인물이다.

연의에서도 기본적으로 간신이자 악인이지만 동탁에게만은 충성하고 뛰어난 지략을 보이는 명군사로 묘사됐다. 연의로써의 모습이 나름대로 인상적이라 자연스럽게 여러 삼국지 각색물에서도 삼국지연의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쉽게 참고할 수 있는 기본 텍스트가 삼국지연의이며 원 사서인 정사에 이유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 데다가, 그나마 있는 기록도 소제를 독살했다는 등 영 좋지 않기 때문이다. 정사와 연의의 비교가 성황일 때 이유는 거의 가공의 인물에 가깝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정사에 비하면 연의에서 동탁의 군사로써의 캐릭터성을 부여받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 비중이 크게 늘어난 연의의 수혜자 겸 피해자.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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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전비》에 따르면 화평 원년에 백모곡의 수재를 입었고, 그 폐해를 물리친 다음 성곽을 쌓았고, 대대로 살아오던 집안이나 수신하던 선비들 중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 중 이유, 난규, 정인 등에게 벼슬을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화평 원년은 150년이니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관례에 오르는 나이인 15세로 최대한 낮게 잡더라도 이유는 136년생이 된다. 허나 이후 내용엔 화평 원년의 폐해를 무술년~기해년(158~159년이 된다)에 물리치고 성곽을 쌓은 다음 이유, 난규, 정인을 천거했다고 하니 이 시기를 160년 이후로 볼 수도 있다.[2] 조전비에는 이유의 자가 문우(文優)라고 기록되어있는데《태평어람》 인용 원산송의 《후한서》에서는 이유(李儒)가 이효유(李孝儒)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자에 들어가는 글자가 이름 글자와 같은 것은 드물고 금석문이 신뢰성 원탑이기 때문에 이효유는 이유를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3] 《조전비(曹全碑)》[4] 조조모사 곽가가 아니다.[5] 출처: 조전비.[6] 출처: 후한서, 자치통감.[7] 아이러니하게도 관동에서 병사가 일어난 까닭은 소제를 죽였다는 얘기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자치통감에는 동탁이 낭중령 이유로 하여금 소제를 독살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이 기록 한 줄이 자치통감에 적혀 있는 이유에 대한 전부의 기록이다.[8] 출처: 후한기.[9] 황제를 시역한 대역죄인인만큼 삼보의 난 와중 죽었던가 아니면 이각 몰락 이후 숙청됐거나 설령 생존했다면 이후 일반인으로 조용하게 살았을 것이다.[10] 이문열 삼국지 만화판에선 계집 하나 때문에 망했다는 독백을 하며 목이 잘리고 이현세 만화 삼국지에선 어리석은 동탁이 내 말을 안 듣더니 기어코 여자 하나 때문에 죽는다라고 한탄하며 끌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