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23:14:57

몽진

1. 개요2. 동양사3. 서양사4. 몽진을 한 실존 인물

1. 개요



직역하면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파천(播遷)이라고 하기도 한다.[1] 다만 근현대 공화국의 국가원수에게는 제왕이나 다를 바 없는 독재자라고 비꼬는 의미가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다.

뜻이 뜻이니 만큼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후퇴했다기 보다는 싸워보지도 않고 무조건 도망부터 친다는 뜻이 매우 강하다. 빤스런과 일맥상통한다. 이걸 실행한 지도자는 '-'이라는 접두어가 별명으로 붙는다고 보면 된다.

다만 전근대시대에는 군주가 적에게 잡히는 것은 국가의 멸망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태였으므로, 단순히 몽진을 했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전쟁을 회피했다기 보다는, 근왕 세력의 결집하는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안사의 난이나 여요전쟁이 그러한 사례에 부합한다.

2. 동양사

동양은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전근대적 총력전이 시작되었고, 군주와 정부의 역할이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했다. 게다가 한나라 이래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반적이었던 징병제는 효율적인 정부의 지방행정력과 중앙정부의 병력 집결 역량, 그리고 중앙정부에서 내려보내는 무장의 총괄지휘 없이는 작동이 불가능한 체제였으므로, 중앙정부의 생환에 곧 전쟁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게다가 유교의 영향으로 지방 호족들이나 군벌들 역시 형식적으로나마 자신들의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미덕이었고, 따라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군주가 자신의 영향권 그 자체인 도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특히 동아시아 농경 문명국들에게 사실상 공공의 적이었던 북방 유목민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동력을 가지고 있어, 선방어를 기도하다가는 국가가 하루아침에 결딴날 가능성이 높아 종심방어를 위해 군주와 정부가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었다.

다만 동아시아에서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이것이 통용되지 않은 곳이 전국시대의 일본으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된 일본에서 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달아남은 곧 자살을 의미했다.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나가는 순간, 그 어디에도 자신의 편이 없었고 자신을 죽이고 자기 땅을 꿀꺽하려는 경쟁자들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할복하거나 끝까지 싸우다 죽는 문화가 생긴 것은 그들이 단지 싸움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이유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중앙집권이 잘 되지 않아 몽진하다가 생고생을 한 경우가 고려의 현종이다.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고려는 수도가 불바다가 되었고, 현종은 정부 부처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소수의 경호원과 원정왕후 및 소수의 재상, 노자가 될 재산만 거느리고 그야말로 걸음아 날 살려라 몽진했다.[2][3] 그리고 이 과정에서 12개의 고을을 거쳐갔는데 그 중 중간 기착지였던 공주와 도착지였던 나주를 제외한 모든 고을에서 왕을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친 현종은 이후 개경으로 돌아와 군주의 권위와 집권 체제의 불안함을 몸소 느낀 경험을 살려, 고려의 중앙집권체제를 세우고 법과 제도를 개혁하며 다수의 대도시에는 관리를 파견하는 등 고려를 중앙집권 국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군이 되었다.

어쨌던 전술한 이유로 인해 동아시아에서는 전문적인 무장에게 군사를 맡기고 행정부는 다른 도시로 달아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행정부가 무책임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정치적, 지정학적 특성에 의한 일이었다.

3. 서양사

서양의 경우 중화권의 동양과 달리 봉건제가 17세기까지 이어졌고, 때문에 행정부의 권위 역시 구석구석 미치지 못했다. 또한 전쟁이 흔하고 군사적 대치가 일반적인 봉건제 특성상, 군부와 문민 행정부의 역할 역시 그다지 엄밀하게 나뉘지 않았다. 그리고 봉건제에서 자기 영지의 방어전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곧 달아날 곳 없이 모든 영지를 잃고 몰락한다는 뜻이었으므로, 기사에서부터 군주에 이르기까지 자기 군대는 자기가 통솔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였다.

또한 중세에는 특히 용병이 흔했는데, 돈만 받으면 그만인 용병들의 입장에서는 목숨 걸고 상대 군주의 성을 공격해 무너뜨릴 필요가 없었고 자신의 고용주가 정치적으로 우위에 선 상태로 협상할 수 있게 하면 그만이었으므로, 굳이 전격적인 수도 공성전을 감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군주와 군주국의 이데아로 여겨진 로마 제국은 그 본질부터 군주가 전쟁으로 집권한 나라였고, 이 특성에 따라 거의 전면적인 전쟁이 벌어지면 군주가 친정하는 경우가 흔했다. 친정을 나가는 군주의 입장에서는 몽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다만, 전세가 불리해지면 부장이나 노장에게 전선을 맡기고 본인은 후퇴하여 2차 방어선을 형성하는 정도의 형태는 존재했다.

즉, 서양은 지정학적, 역사적인 맥락에서 국가와 군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고, 당연히 군주는 군부의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전쟁이 나면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일본이나 고려의 막번제 및 호족제보다 훨씬 더 자치력이 강력한 장원제 체제에서 어차피 패전하고 재산과 군대를 다 상실한 군주는 달아날 곳도 없었다. 때문에 유럽에서 몽진의 개념은 중앙집권이 완성되는 나폴레옹 시대 이후였다.

4. 몽진을 한 실존 인물

군주가 아닌 인물(예: 이승만, 김일성)의 사례를 넣지 말 것.


[1] 아관파천이 대표적인 용례다.[2] 어느 정도였느냐면, 충청도 쪽에서는 거란군이 현종을 바짝 추격해 10리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3] 10리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5km를 크게 넘어가지 않는 거리다. 체력이 좀 좋은 사람이라면 뛰어서도 쉬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거리인지라 기병이 주력인 거란군이 쫓아오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잡힌거나 마찬가지인 거리다.[4]러시아 칼리닌그라드州 소베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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