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4 14:45:18

제갈규

諸葛珪
? ~ 187[1]
1. 개요2. 가계도3. 창작물에서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는 군공(君貢)으로 제갈근, 제갈량, 제갈균 삼형제의 아버지, 제갈현의 형. 서주 낭야국 양도현 사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제갈근과 제갈량 사이에 딸 2명이 더 있었다.

그의 첫 아내 장(章)씨는 일찍 죽었고, 이후 그는 송씨를 후처로 들였다. 제갈근과 제갈량은 첫째 부인인 장씨 소생이고, 제갈균은 장씨 소생이란 설과 송씨 소생이란 설이 공존하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삼국지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무에 가깝지만, 자식농사에서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뒀기에 역사에 이름이 남았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제갈량이야 말할 것도 없고, 장손인 제갈각은 비록 오만한 성품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나라의 최고 권력자까지 올랐으며, 둘째 아들의 장남인 손자 제갈첨 또한 촉한의 부마이자 위장군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연주 태산군의 군승(태수를 보좌하는 관직)을 지냈지만 제갈량이 어릴 적에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제갈량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고 계모인 송씨 슬하에서 컸다고 한다.

한국의 남양 제갈씨에서는 제갈규를 시조로 삼으며, 제갈규의 5세손 제갈충이 3세기 말엽 신라망명하여 한국 제갈씨의 중시조가 되었다.[2]

2. 가계도

파일:제갈규가계도1.jpg
파일:제갈규가계도2.jpg

3. 창작물에서

파일:전략제갈규.png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이름은 언급이 안되지만 제갈량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으로보아 제갈규가 확실하다. 제갈량에게 의붓아버지가 있다는 기록 같은 것은 없으니.

진순신소설 제갈공명에서 태산군에서 관직을 역임하면서 아내가 제갈량을 낳으려고 하자 양도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임지에 머물러 업무를 수행했으며, 제갈량의 이름에 대해서는 일식이 암시하는 것처럼 어두운 세상이 될 것 같다면서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가져다주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후 동생 제갈현이 낙양에 들어가서 시랑을 역임하다가 낙양의 정쟁에 질려서 관직에 사직하기로 하며, 이로 인해 제갈현과 함께 의논하고 제갈규는 양도에 든든한 사람이 없기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일족을 보살펴달라고 하면서 그 뜻에 찬성한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제갈량이 등장하는 연의에서는 원래 서주에 살다가 서주 대학살 때 제갈규는 죽고 삼형제는 형주의 제갈현에게 보내져 키우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제갈량은 어릴 때 기억으로 조조의 패도에 염증을 느껴 유비에 이끌린 것으로 묘사된다.


[1] 제갈균 항목에는 그가 189년생이라 서술되어 있는데, 설령 유복자라 해도 햇수로 2년이 차이가 날 순 없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2] 제갈충은 제갈량의 증손자로 알려져있다. 제갈충은 제갈경의 아들이며 또한 제갈경은 제갈첨의 차남이라고 한다.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은 유선의 딸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므로, 이와 같은 유래에 한치의 틀림도 없다면 한국 제갈씨는 제갈량은 물론이고 유비의 후손이기도 한 셈. 물론 여기에도 이설은 있어 제갈충은 제갈첨의 차남인 제갈경의 아들이 아니라 제갈첨과 함께 촉한 멸망시에 면죽관에서 전사한 장남 제갈상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아예 단지 제갈규의 5대손이라고만 전하기도 하여 자세한 내막은 정확히 알 수 없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제갈규의 5대손일 뿐이라는 단서만을 따르자면 한국의 제갈씨는 제갈량의 동생인 제갈균의 후손일 수도 있고 제갈근의 아들이자 제갈량의 양자였던 제갈교의 손자 제갈현이 제갈각의 삼족이 멸족된 뒤 다시 제갈근의 후사를 잇게 되었으므로 적자인 제갈현을 제외한 동렬의 오나라 제갈씨의 후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제갈량의 증손자면 제갈규한테는 5세손이 아니라 4세손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내용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지만, 아무튼 제갈규의 5대손인 제갈충이 신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이래 그 후손이 중국으로 귀환하였다가 제갈규의 20대손에 해당하는 제갈공순이 9세기 초 다시 신라로 귀화함으로써 한국 제갈씨의 중시조로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제갈경은 제갈첨과 제갈상의 사후, 그리고 촉한이 멸망한 이후 진晉나라에서 벼슬을 하기는 하였지만 망국의 설움 때문이었는지 결국 그 아들 제갈충이 신라로 망명하였고 진의 멸망 이후 중국으로 돌아갔던 제갈충의 후손이 환관들이 황제들을 줄줄이 살해하는 당나라 말 혼란기에 다시 신라로 건너온 이래 완전히 정착한 것. 물론 당연하겠지만 모든 제갈씨가 망명한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중국에는 제갈량, 제갈근의 후손들이 건재하며 팔괘촌을 비롯한 제갈씨의 집성촌들도 관광 명소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