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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틈관동[1]간체자: 闯关东
정체자: 闖關東
청나라가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한 만주 일대에 수백년에 걸친 한족들의 이민을 칭하는 단어. 그 관문인 산해관을 통과해 동쪽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틈관동이라는 명칭을 썼다.
2. 역사
2.1. 중원 정복 후 만주의 공백지화
여진족 왕조인 청나라가 중국 대륙의 중심인 중원을 정복 했을때, 당시 10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되던 만주족들 중 9할에 이르는 90만 명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왔다. 이 때 한족을 지배해야 했던 이민족인 만주족들은 원나라 멸망의 사례 등을 살펴 훗날 후손들이 중원에서 쫓겨날 일이 생기더라도 돌아갈 터전을 만들어 놓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향인 만주에 한족의 정착을 금하는 봉금정책을 취했다.[2] 그래서 만주는 '옥토가 천리에 펼쳐 있고, 땅은 있으나 사람은 없는'(沃野千里, 有土無人) 무인지경의 상황이었다.하지만 당시 화베이, 산둥 지방은 수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토지가 황폐화 되어 있던 상태였고 가난하고 굶주린 민중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비옥한 토지가 널렸다는 만주를 향해 조금씩 몰려들었다. 사실 만주는 황야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요동, 요하를 포함하는 크고 아름다운 지대고, 만주의 남쪽부분인 요동 반도쪽은 원래도 농경지대에 적합한 기후라서 중원에서도 관심 자체는 가지고 있어 여러차례 진출하여 직속 영토로 차지했었던 땅이고, 유목민들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19세기부터는 충분히 개발의 여지가 있는 땅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아예 막은 건 아니고 1653년 순치제 시절에 주둔군이 먹을 군량을 생산할 목적으로 10년 가량 잠깐 이민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1인당 한달에 곡식 한말을 주고 토지 개간이 늘때 마다 더 주는등 꽤나 파격적인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성인남성 약 1만5천 명 가량이 몰려왔다.[3] 하지만 군량 자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 되었다고 판단한 조정에서는 만주족의 이익이 침해될 것을 우려하여 다시 이민을 금지하였다. 역사에서는 보통 틈관동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2.2. 틈관동의 시작과 청나라의 봉금령
알음 알음 소식을 전해 들은 중원의 농민들은 산해관을 거쳐 육로로 만주(주로 요동)으로 들어왔다. 산둥 지방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빠른 해로를 통해서 왔기 때문에 더 많은 수가 들어왔다.[4][5] 청나라 군대도 이들을 대놓고 막진 않았고 요동의 만주족들은 오히려 이들을 반기며 자신들의 토지를 빌려주어 경작하게 했다. 이덕분에 선양을 중심으로 만주의 인구는 크게 늘었다.이주 소식을 듣고 만주로 빠져나가는 인구가 늘어나자 내내 쉬쉬하던 정부에서도 그 이야기를 방관만 할순 없었고 1740년, 전면적인 봉쇄령을 내렸다. 산해관을 닫아 버려서 백성들의 이주를 막고, 이미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여기로 전입신고 하고 세금 낼래, 아니면 다시 니네 고향으로 돌아갈래? 하며 둘중 하나를 택하게 했다. 얼마나 철저했는지 산해관을 통과할수 있던 유일한 사람들인 상인들도 목적지에서 발급한 증명서가 있어야만 유조변을 드나들수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만주로 불법 입경을 시도했다. 아예 내몽골, 몽골로 올라가 산해관을 우회하거나 해로를 통해 요동 반도 끝단 뤼순 근처에 상륙 후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더 깊숙한 내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존에 터를 잡고 살던 주민들 까지 합세하여 동쪽으로 뻗어나갔다. 이시기부터 틈관동의 목적지는 요동에서 지린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50여년 가량이 지난 1792년, 화베이 지방에 찾아온 유례 없는 자연재해로 산해관에 난민들이 모여들자, 직예성 총독은 '먹고 살기 힘든 사람만 골라서 내보내주십시오' 라는 내용으로 직접 상소를 올려서 건륭제에게 이주를 허가 받았다. 그 후로도 약 10여년에 걸친 끝없는 자연재해로 인해 이 조치는 계속 연장 되었다.
이후로 사정이 조금 나아지면 관문을 닫고, 나빠지면 열어주는 정책이 반복되었지만 틈관동의 물결은 점점 커져만 갔다. 시기상으로 19세기 부터 화베이 지방에는 자연재해가 끊이질 않았고 청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백련교도의 난 같은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주민들은 더 멀리 아무르강까지 진출하였다.
2.3. 러시아 제국의 등장과 봉금령의 철폐
그리고 마침내 봉금령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멀리 서양에서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태평양까지 도달한 러시아 제국이 나타나면서 최후방이였던 만주가 졸지에 최전방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대략 1860년 경에 러시아 제국이 연해주 및 외만주를 탈취하고 더욱 압박이 거세지자, 청나라는 만주 방어를 위하여 인구유입을 할 수밖에 없었고 1878년, 가족 동반 이민을 허용하면서 그동안 취해왔던 봉금 정책을 완전히 철폐하였다.이후로도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져 붕괴 후 혼란기 중원의 혼란이 계속되자 근현대 난세에서 더 많은 수의 인구가 만주로 몰려들어 정착하였다. 이런 결과 1940년 당시 만주국의 인구는 약 4천 3백만에 달했다.
2.4.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최후의 틈관동은 1958년부터 이뤄진 '북대황(北大荒)[6] 개발'이라는 국가주도 만주 개발 정책이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아무르강, 송화강, 우수리강의 3개 강이 만나는 중국 최동단 삼강 평원 지역[7]을 개발하기 위해 15만 명의 인민해방군과 5만명 가량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인력을 투입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로 이 지역은 중국의 우방인 북한, 러시아 그리고 가상적국 1순위인 한국, 일본, 미국이 부딪히는 지역으로 변했다. 만주를 중원을 방어하는 전진기지화 시키려는 중국 공산당의 계획하에 60년대부터 홍위병을 포함한 수십만~수백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북 3성에 정착하였고, 북대황 개발, 그리고 틈관동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3. 기타
해외 이주 화교들의 상당수가 장강 이남에 뿌리를 두고 있고 화북, 산동 등 북방 출신이 적은 데에는[8] 바다를 통한 해외 이동에서 남방에 비해 여건이 불리한 탓도 있지만 이들 지역의 이주 수요를 만주가 흡수해 준 점도 한몫했다.현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여러 소수민족들이 각자 성급 행정구역인 자치구를 얻어간 것에 비해 정작 만주족은 자치구를 배당 받지 못하고 자치현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던 것에도 이 틈관동의 역사가 큰 원인이 되었다. 만일 만주족 자치구의 설립을 강행한다면 헤이룽장성이 만주족 자치구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문제는 수백년간에 걸친 틈관동으로 인해 서력 1948년 시점이 되면 헤이룽장성과 그 성도인 하얼빈시가 도무지 만주족 고유의 권역이라고 보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가령 하얼빈시의 경우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즈음이 되면 너무도 인구 수가 높고 민족 분포가 다양해 한 때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수도로 진지하게 고려될 정도였으며 특히 마오쩌둥 본인은 아주 끝까지도 하얼빈시를 수도로 하는 안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었다. 결국 베이징시가 중국 역사에서 갖는 상징성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베이징시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로 지정 되었으나 이 정도로 지난 수백년간 중국의 틈관동이 대규모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틈관동 자체가 청나라의 중원 입관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라는 점에서, 현대 만주족 사이에서는 조상들의 중원 입관을 부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자기 조상들이 그냥 만주에서만 살았다면 오늘날 자신들이 중국과는 별개의 나라로 잘 지냈을지도 모른다며 안타까워하는 만주족도 있을 정도다.[9]
4. 관련 문서
[1] 관동은 산해관의 동쪽, 즉, 만주를 가리키는 말이고 틈은 문門에 말馬를 조합해 말을 타고 문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다. 비슷한 말로 동남아로 이주하는 하남양(下南洋)과 몽골, 동투르키스탄으로 가는 주서구(走西口)가 있다. 전부 당대 먹고 살기 힘들었던 중국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단어들이다.[2] 본래 요동 지역은 한국사의 북방왕조들이나 북만주의 유목민족 유목제국들이 끊임없이 싸우던 지역으로 중국 한족 왕조하고는 별 인연이 없는 땅이었다. 그러다가 중국사 최초로 강남에서 기원한 왕조인 명나라 대부터 밀고 올라가 조금씩 개척이 이루어지던 영토였다. 그러다 다시 북방 유목민계 청나라가 내려온 뒤 한족 정착민들 대부분이 쫓겨났다.[3] '성인 남성만' 해당한 이유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4] 산둥 반도 해로는 고조선이 요동을 점유하던 시대부터 쓰였을 정도로 유서 깊은 길이다. 실제로도 전국시대의 전란을 피해 도망쳐 온 중국 유민들이 유입됐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5] 언어적으로는 현대 중국어의 만주 방언이라고 할 수 있는 둥베이 관화의 일부 산둥반도 동부-요동반도 남부의 교료(膠遼) 관화에서 산둥 방언의 혼종 특성이 잔존하고 있다.[6] 북쪽에 위치한 거대한 황무지라는 뜻.[7] 북대황 개발 이전까지 이 지역은 황량한 거대 늪지대였다. 만주와 이어져있는 러시아 연해주의 지대를 구글 어스 등으로 유심히 살펴보면 개발 이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8] 다만 재한 화교들이나 한국을 거쳐 제3국으로 재이주한 화교들 그리고 러시아 화교들은 북방 출신이 많다.[9] 그래서 청나라의 건국시조인 누르하치는 딱히 호불호가 갈리지 않으나 중원 입성을 시도한 홍타이지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