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엑스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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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국박람회 日本万国博覧会 Japan World Exposition | ||||
<colbgcolor=#dd2f2e><colcolor=#fff> 행사 기간 | 1970년 3월 15일 ~ 9월 13일 (6개월, 183일) | |||
개최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오사카 | |||
주제 | 인류의 진보와 조화 人類の進歩と調和 | |||
주제가 | 세계의 나라에서 안녕하세요 世界の国からこんにちは | |||
전시면적 | 330ha (약 998,250 평) | |||
참가국 | 77개국 | |||
입장객 | 6,421만 8,770명 | |||
BIE 구분 | 등록박람회 | |||
주최 | 재단법인 일본 만국 박람회 협회 | |||
1967 몬트리올 엑스포 | → | 1970 오사카 엑스포 | → | 1992 세비야 엑스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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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사카 만국박람회장 전경 |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개최된 세계박람회기구 공인 박람회이자 등록박람회. 무려 6,421만 명이 방문한 박람회로서 일본 국민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으며, 1970년대 고도성장기의 상징과도 같은 행사가 되었다. 당시 최첨단 신기술이었던 아이맥스가 최초로 소개된 박람회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각종 서브컬처에도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관람객을 동원한 덕분에 대성공한 박람회로 꼽히며, 이 기록은 거의 40년 뒤 중국이 개최한 2010 상하이 엑스포에서야 깨졌다.
2. 개회식
개회식 중계방송 |
3. 주제가
주제가 세계의 나라에서 안녕하세요 |
4. 목적과 의의
1970 오사카 엑스포의 심볼 <태양의 탑> | 랜드마크 타워 |
페스티벌 플라자의 스페이스 프레임 루프 | 코닥과 리코 社의 부속 건물 |
캐나다관[1] | 한국관과 독일관 |
이 박람회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선진 경제국에 진입하였음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겠다는 의지의 표상이었고[2], 간토 지방에서 세계인의 스포츠 제전인 1964 도쿄 올림픽을 개최했으니 간사이 지방에서는 세계인의 문화 제전인 엑스포를 개최함으로써 국가 재건을 성공적으로 달성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있었다.[3][4] 이 때문에 아직까지도 일본 기성세대의 뇌리에는 '오사카 만박'이 고도성장기의 일본, '좋았던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다.
냉전기 올림픽이나 세계박람회가 국가 주도의 체제 선전이나 국민 결집에 이용된 것은 진영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였으며 유럽과 미국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일본의 경우 국가주의적 색채가 정식명칭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세계박람회는 원칙적으로 도시 단위의 행사이므로 정식 명칭에는 보통 도시의 이름이 들어가지만, 'Osaka, Japan'도 아니고 'Japan World Exposition'가 되는 것은 이례적인 명칭이다. 가까이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인정 박람회만 보아도 도시(대전, 여수)의 이름이 강조되고 있고, 가장 최근의 등록박람회인 2015 밀라노 엑스포 역시 그렇다. 어쨌든 이는 일본에서 관습화되어 일본이 개최한 가장 최근의 세계박람회인 2005 아이치 엑스포의 정식명칭 역시 '2005년 일본 국제박람회(2005年日本国際博覧会)'이다.
5. 영향
5.1. 일본
그야말로 일본 세계박람회 역사의 원점으로서, 이후 일본에서 개최한 세계박람회는 가장 최근의 2005 아이치 엑스포 에 이르기까지 오사카 세계박람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엑스포 개최의 인력/인맥들도 오사카 당시의 인물들이 계속 이어내려오면서 영향을 미쳐 왔으며, 광고 기획회사의 관여, 영상물 위주의 전시기법, 공동관[5], 대성공에 대한 기대(!!)[6]등이 있었다.일본 세계박람회의 원점이자 주요국 진입을 알리는 중요한 행사로서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행사이지만, 지역개발(주로 건설)을 위한 빌미로서의 엑스포의 활용이나 지역민들의 소외, 대체로 유사한 전시물들의 내용 등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할 것이다. 만박의 상징물인 태양의 탑은 현대적이면서 일본적 디자인으로 전세계인들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고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일본 디자인 작품으로 쇼와 시대를 다루는 일본의 여러 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
1970년 행사라 현재 환갑이 지난 일본의 전후 베이비 붐세대인 단카이 세대는 다 기억하고 있는 소재이다. 특히 일본의 현 노년층에게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 패전의 그림자를 씻고 쇼와 시대 (昭和) 의 일본의 번영을 상징하는 행사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에 소위 좋았던 옛날의 추억하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그 무렵의 일본은 전국민이 일본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이 넘치던 시대였는데 현재의 일본은 20여년 이상 경제침체로 국민들이 자신감을 잃고 미래에 대한 비관적 분위기가 감돌기 때문에 더욱 일본의 성쇠의 빛과 그림자의 대조가 뚜렷해보이는 것이다.
비교를 하자면 한국의 1988 서울 올림픽 개최가 한국 사회의 큰 변화와 해외에서의 한국에 대한 인상이 크게 개선되는 것과 시기적으로 맞물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오사카 만국박람회는 1964 도쿄 올림픽과 함께 태평양 전쟁의 추축국이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의 부정적 인상을 씻고 일본을 현대적인 주요국의 일원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일본인 자신들도 이 행사로 국가적 자부심이나 일본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국민적 자부심을 고취한 행사였다.
이 행사의 영향으로 굉장한 벼락부자가 된 곳이 있었으니, 바로 키타오사카 급행전철이다. 오사카 엑스포의 사업을 추진하던 당시에는 회장 예정 부지 주변으로 아무런 궤도 교통이 다니고 있지 않아서, 버스를 통해 신오사카 역~오사카 만국박람회장을 왕복하는 셔틀 버스를 운행하려고 했지만, 차라리 지하철을 건설하여 일시적인 수요 수송과 함께 차후의 도시 개발까지 염두에 두는 방침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당초 비관적이었던 예상과 달리 개통 이후 만국박람회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당초 오사카 시의 예상 이용인원이었던 450만 명의 약 9.5배 정도인 4,150만 명이 이용하게 된다.[7] 또한 이 노선이 오사카 지하철의 끝판왕인 미도스지선과 직결하는 관계로 환승이 매우 편리하기도 했다.[8] 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신칸센이나 비행기 등을 타고 미도스지선과 그에 직결되는 토자이선에 환승등으로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가축수송이 되는건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또한 이전까지 일본에서 양식이 돈가스나 나폴리탄 같은 경양식만 알려졌던 시절에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미식으로 알려진 나라들이 자국의 식문화를 자랑히기 위해 레스토랑을 오픈, 일본에 본격적으로 서양식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
5.2. 대한민국
당시 한국관의 팜플렛 표지. 민단계 교포의 도움을 받았는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대한민국의 바로 이웃에서 개최된,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의 세계박람회였기에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도 크다. 광고 기획회사에 의한 전시물/전시공간의 기획이나 영상물 위주의 전시물은 대한민국이 개최한 세계박람회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참고로 한국관의 설계는 건축가 김수근이 맡았는데, 바로 이전 엑스포인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의 한국관 역시 그가 설계한 작품이다.
또한, 오사카 세계 박람회 당시 밀려드는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이로 인해 수 시간을 대기한 뒤 20분 걸려 관람하고, 정작 무엇을 봤는지도 모른 채 스탬프만 찍어 나오며, 관람객들이 불만을 터뜨리던 당시 박람회의 모습은 20여년 후, 40여년 후 바다 건너 한국이 개최한 세계박람회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일본의 오사카만박 성공은 이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한테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 특히 그 당시 일본은 철완 아톰 이나 우주 로켓 등 미래 SF물이나 로봇물 등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전시물들도 초대형 가동 로봇이나 자동음악연주로봇(애니매트로닉스) 등 소위 미래의 모습을 중심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일본의 엑스포 대성공은 이웃나라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당시의 한국인들에게는 "저게 다 조선놈 피 빨아먹어 번 돈으로 올린 것이다"라는 반감과 함께 "일본은 희망찬 미래로 달려가는 부유한 국가, 한국은 아직도 가난한 국가"라는 양가감정의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격차는 한국의 한강의 기적,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이후에 겨우 극복하게 된다.[9] 국내 아동잡지 등에서도 다량의 컬러 사진페이지를 포함한 초호화 특집으로 대대적으로 소개하였고,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관심과 한강의 기적으로 구매력도 높아지면서[10] 출판에 상대적으로 연구가 필요한 교양서적이나 일본 과학전집, 학습만화들이 이때부터 해적판으로나마(...) 본격적으로 번역되어 국내에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국풍81의 모티브가 되었기도 했다. 전두환이 5.17 내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에 언론통폐합, 삼청교육대 등의 군기잡기식 정책이 약 1년 정도 이어지다가, 정국이 안정화되었다고 판단되자, 분위기 전환용으로 오사카 엑스포 사례를 참고해서 국풍 81이라는 행사를 치른것이다. 공식 엑스포는 아니었지만, 대형행사라는 공통점은 있었기 때문에 형식은 참고했던것이었다. 또한 그 해에 올림픽 개최까지 성공하자 이에 삘받아서 야간통행금지 폐지와 교복자율화, 프로스포츠 도입을 동시에 단행했는데 이를 일명 3S정책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11]
여담으로 전시관에 얽힌 재미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김수근이 1967 몬트리올 엑스포의 한국관을 한창 짓고 있을 당시에 오사카 엑스포의 전시관 설계 의뢰가 들어온 것이었으며, 김수근은 이에 캐나다에서 바로 귀국하지 않고 만박이 열리는 오사카까지 날아가 직접 현장답사를 해서 전시관을 지었다. 또한 전시장 위치가 하필 태양의 탑과 일본관이 있는 입구쪽이라 정부에서도 꽤나 공을 들여서 지었는데, 당시 '과학기술'이라는 미래지향적인 면을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김수근은 한국의 문화유산을 부각하고자 ‘경회루형’ ‘금관형’ ‘팔각 석등형’ ‘장구형’ ‘거북선형’과 같이 전통적 문화유산에서 모티프를 취한 모델을 주문하던 정부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정부와 김수근의 논리가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자 김수근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카드로 꺼내들었고 파격적인 한국관의 외관은 정부가 추진하는 ‘공업입국’의 상징으로 국내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한국관 내부에는 석굴암 불상의 복제품이 있었는데, 현재 오사카 백두학원에 남아있다.#
6. 개최 이후의 모습
엑스포가 끝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시설물이 철거되었다. 엑스포 당시의 시설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저 위의 상징물인 태양의 탑만 남아 있다.[12] 나머지 부지는 대부분 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국립민속박물관과 엑스포 기념관 등이 들어섰다.2007년경 공원 남쪽 공터[13]에 파라마운트 테마파크가 계획된 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EXPOCITY라는 아울렛이 들어와 사실상 무산되었다.
2007년 어린이날, 엑스포랜드에서 있던 롤러코스터가 탈선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가 난 롤러코스터는 안전장치를 한 채 일어서서 타는 형태였는데, 2번째 칸의 차축이 부서지면서 줄줄이 가드레일에 부딪히고 만 것. 이 사고로 사고가 난 2호차에 타고 있던 20대 여성 1명이 튕겨져 나가 그 자리에서 숨졌고, 나머지 승객 21명도 전원 중경상을 입었다. 결국 이 사고의 여파로 엑스포랜드는 2009년 2월에 폐장한다.
일본 시간 2018년 11월 24일 새벽 2025년 오사카에서 엑스포가 다시 개최되기로 결정됨에 따라 개최 장소에 대해서 현재 부지에서 개최하게 될 거란 말이 있었으나 인공섬 유메시마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7. 대중매체
- 1970년 6월 18일에 개봉한 영화 <엑스포 70 동경작전(최인현 감독)>#의 주 무대인데, 조총련 공작책 허달(허장강 분)이 엑스포에 다녀올 한국 관광객을 납북 겸 포섭하려고 하는 찰나, 한국의 민완 정보원 박동근(박노식 분)이 조총련의 본거지에 포섭해서 그들의 악행을 폭로하고자 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 1970년 8월 21일 및 28일자 KBS-TV 금요무대 <꽃집 아줌마(극본 이근삼, 연출 이성재)>에서 다뤄진 바 있다. 극중 고 여사(정혜선 분)가 미국인 짐 가워와 함께 재일교포 실업가 유일평의 초청을 받아 부관페리편으로 일본에 가서 엑스포를 구경한다는 것이다. 해당 에피소드를 찍기 위해 중앙방송국(KBS) 측은 7월 27일부터 1주 간 제작진 및 출연진 등 6명을 일본으로 출장시켰는데, 이는 TV 드라마 사상 최초의 해외 로케촬영 시도로 기록됐다.(#1, #2)
-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에서 오사카 만국 박람회(줄여서 만박)가 주요 코드로 나왔다.
- 2001년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어른제국의 역습의 주요 배경으로 나오며[14], 또다른 극장판 암흑 마왕 대추적에선 타마요미족이 타마유라족의 찜질방에서 다함께 주제곡을 열창했다.[15][16]
- 사자에상 애니판 110화 'サザエ万博に行く(사자에 만박에 가다)'편에서 이소노 집안 식구들이 오기도 했다.
[1] 캐나다의 유명 건축가 아서 에릭슨이 디자인했다.[2] 일본이 선진국에 진입한 것도 오사카 엑스포 개최 2년 전인 1968년이었다. 이때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의 2배를 넘긴 동시에 전체 GDP도 독일을 추월했다.[3] 올림픽 이후 개최한 엑스포로써 각국의 경제 부흥을 세계에 공포한 대회라는 점에서 후대의 1993 대전 엑스포와 2010 상하이 엑스포와도 비슷한 포지션이다.[4] 여담으로 같은 해(정확히는 오사카 올림픽 개최 중)에 일본은 아시아 최초의 보잉 747 여객기를 들여왔고, 이듬해(1971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맥도날드를 들여왔다. 우연히도 둘 다 세계에서 5번째로 도입한 것이기도 했다.[5] 이른바 국내에서 개최된 엑스포에서 볼 수 있는 "태평양 공동관" 따위의 것. 오사카 세계박람회 이전에는, 참가국이 자신의 비용으로 자국 전시관을 설치하여야 하는 세계박람회의 원칙상 공동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사카 세계박람회 주최측에서는 참가국 수를 늘이기 위한 묘안으로 독자적인 전시관을 설치할 능력이 되지 않는 수개국이 저렴한 비용으로 공동의 전시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공동관이다. 원칙적으로는 참가할 여력이 되지 않는 국가들을 꼬드겨(?) 참가시키는 만큼, 당연히도 그 참가국에게는 차관 제공 등의 여러가지 박람회 외적인 대가가 주어졌다.[6] 이런 기대로 일본에서는 계속해서 세계박람회가 개최되지만 오사카만큼 성공한 경우는 없었고, 1985 츠쿠바 엑스포처럼 망한 경우는 있다.[7] 참고로 오사카 엑스포를 방문한 사람은 총 6,100만여 명 정도였다.[8] 미도스지선이야 말로 오사카, 아니 일본 전체 지하철 노선중의 끝판왕이라 봐도 좋을정도로 잘 만들어진 노선이다. 오사카의 중심이라고 읽컫는 우메다, 난바, 텐노지를 한방에 가로지르고, 환승의 요충지 센리츄오역(모노레일 환승으로 오사카 국제공항), 신오사카역(도카이도 신칸센), 우메다역(한큐,한신,JR고베·교토방면), 요도야바시역(케이한 교토방면), 난바역(킨테츠 나라-이세-시마방면, 난카이 간사이 국제공항방면), 텐노지역(JR와카야마·나라·간사이 공항방면, 킨테츠 카시하라-요시노방면) 등을 한번에 잇기 때문이다.[9] 1970년 일본의 1인당 GDP가 2056달러였던 것과 달리 한국의 1인당 GDP는 279달러였다. 그야말로 '선진국에 진입한 지 2년이 지난 나라 VS 최빈국을 탈출한 지 1년이 지난 나라'의 차이였던 셈.(...)[10] 물론 달마다 할부로 갚는 월부 책장사가 대세였다. 그래도 아예 못살 정도는 아니었다는 의미.[11] 물론 준비 과정과 논의 자체는 그 이전부터 진행되었다. 교복자율화와 프로스포츠도 논의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 1982년~1983년에 걸쳐 단박에 시행된것이야 올림픽에 발맞춘것이기는 했지만.[12] 당시 시설물이 위치했던 자리에 가면 작은 비석에 사진과 설명이 기록돼있다.[13] 구 엑스포랜드 자리.[14] 한국 더빙판에서는 1993 대전 엑스포로 로컬라이징화되었다. 약 23년의 시간차가 있다.[15] 비디오판은 한국어로 더빙을 한 반면, 대원판은 자막만 넣었다.[16] 중간에 캐릭터가 대사가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더빙의 목적이 아니라 주제곡의 가사중 '70년의 안녕하세요' (1970年の こんにちは )부분이 있는데 이 영화의 상영 시대상 1997년이지만 챔프 방영은 2008년이라 더빙으로 "2000하고도 8년의 안녕하세요"라고 바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