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론 해전 セイロン沖海戦 Indian Ocean raid | ||
|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쟁의 일부 | ||
| 날짜 | ||
| 1942년 3월 31일 ~ 1942년 4월 10일 | ||
| 장소 | ||
| 스리랑카 섬 및 동남 인도양 | ||
| 교전국 | | |
| 지휘관 | | |
| 병력 | 항공모함 2척[1] 경항공모함 1척[2] 전함 5척[3] 순양함 7척 구축함 15척 잠수함 7척 항공기 100기 이상 초계함 이하의 소형군함 30척 상선 50척 이상 | 항공모함 5척[4] 경항공모함 1척[5] 순양전함 4척[6] 순양함 11척 구축함 23척 잠수함 5척 항공기 275기 |
| 피해 규모 | 경항공모함 1척 침몰 중순양함 2척 침몰 구축함 2척 침몰 무장상선 1척 침몰 초계함 1척 침몰 슬루프 1척 침몰 상선 20척 침몰 항공기 54기 손실 825명 사망 | 항공기 16기 손실 32명 사망 |
| 결과 | ||
| 일본의 승리 | ||
| 기타 | ||
| 영국의 인도양 작전이 크게 위축됨 일본의 남방점령지 안전 확보 | ||
1. 개요
1942년 3월 말부터 4월 초에 걸친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의 인도양 작전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영국 해군 동양함대의 해전이다. 영국 해군은 이전에 벌어진 말레이 해전과 자바 해전에서 이미 대패한 상태에서 실론 해전마저도 참패하면서 일본 제국 해군을 상대로 완벽한 삼연벙을 먹게 되었고, 이후 1944년 말 이전까지 인도양-동남아시아 방면에서 방어전으로만 일관한다. 이로 인해 이후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작전과 실행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하게 된다.2. 배경
2.1. 영국
영국 해군 동양함대가 말레이 해전에서 참패하고 사령관 톰 필립스 제독은 기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이후 자바 해전에서도 ABDA 연합함대가 대패하여 동양함대는 더 이상 일본의 침략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이제 일본의 위협은 동남아시아를 넘어 인도양 전체에 퍼져감에도, 이를 방비할 영국의 태평양 해상 세력은 이름밖에 남아있지 않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말레이 지역이 함락당하고 영국령 버마까지 함락하자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 제국의 문 앞까지 일본군이 당도하게 되었다.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영국군 수뇌부 그리고 전시 내각의 수반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고민 끝에 전함 5척이 중심이 되는 대대적인 전력 증파를 결정했다. 사실 영국군은 아직 본토 방위와 함께, 지중해에서도 이탈리아 왕국에 맞서 싸워야 했으나, 동시기 나치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일으켜 소련을 침공 중이었고 이탈리아 왕립해군은 타란토 공습 이후 해군 활동이 일시적으로 감소한 상황이었으며 북아프리카 전역 또한 에르빈 롬멜의 거센 반격을 일단 저지하였기에 이런 증파 결정이 가능했다. 그리고 3월 8일에는 동양함대의 지휘관도 더들리 파운드 제1해군경의 건의를 받아서 제임스 폰즈 서머빌로 교체했다. 제임스 폰즈 서머빌은 3월 24일에 콜롬보에 도착했고 3월 26일에 기함인 워스파이트에 승함했다.
2.2. 일본 제국
1942년 3월 9일의 시점에서 일본군은 남방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는 단계에 돌입했다. 그리고 다음 작전을 논의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실론섬을 함락시키고 인도 제국을 공략해서 추축국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과 제휴를 하는 작전인 서아작전(西亜作戦)을 일본 제국 육군이 주장하는 상황이었고, 군령부를 선두로 한 일본 제국 해군은 오스트레일리아를 공략하거나 사모아 제도까지 진격해서 미국과 호주간의 연결을 차단하는 FS작전(FS作戦)을 주장해서 결론이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 연합함대에서 독자적으로 2월 20일부터 23일까지 인도양 침공작전을 수립해서 실론섬의 점령과 영국 해군 동양함대를 격멸하는 계획을 세우고 도상연습까지 진행했으나 군령부의 반대에 부딪쳐서 일단 보류한 상태였다.그러나 영국령 버마를 침공한 일본군이 랑군까지 점령한 상황에서 태국과 버마를 연결하는 교통로가 빈약한 관계로 육로로 보급이 어렵게 되자 해상으로 보급해야 하는데 실론섬에 주둔한 영국군이 수송선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점이 나왔으며, 나치 독일도 일본군이 인도 제국을 공격함으로서 영국의 후방 거점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일본 제국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해로 보호를 위해서라도 수마트라섬 북부와 안다만 제도를 점령해서 비행장을 건설함과 동시에 실론섬의 중요 항구 2개소를 파괴하고 영국 해군의 동양함대에 타격을 주는 작전이 필요해졌다. 원래 작전 구상에는 실론섬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도 감안했으나 남방작전 이후의 작전이 최종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론섬만 점령하는 것은 일본 제국 육군이 거절했기에 사실상 일본 제국 해군만의 작전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예측한 인도양 방면의 영국 해군 전력은 항공모함 2척과 전함 2척이 중심이 되고 중순양함 3척 및 다수의 경순양함과 구축함이 호위를 하는 동양함대이며, 실론섬을 비롯한 주변 군사 기지에서 300대의 항공기가 배치되었다고 파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해군의 증파 소식은 일본군에게도 들어오게 된다. 미국 해군 태평양함대를 반신불수로 만들고 영국 해군 동양함대를 격멸해 안정적으로 남방 점령지를 확보했다고 생각한 찰나 들어온 영국군의 대규모 증파 결정은 태평양 외곽 방어선 구축을 준비하던 일본군에게 위협이 되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역시 남방 점령지에 대한 위협 제거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포트 다윈을 다윈 공습으로 공격하고 돌아온 나구모 주이치의 기동부대인 제1항공함대에게 인도양으로 진출할 것을 지시한다. 제1항공함대는 남방부대의 지휘관인 곤도 노부타케 휘하로 배속될 예정이었다.
3. 양측의 준비
3.1. 영국
전함 5척이 동양함대에 긴급배치되었고,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HMS 포미더블이 추가되어 기존의 항공모함인 HMS 인더미터블, 경항공모함인 HMS 허미스까지 총 3척으로 구성된 항공모함 부대가 편성되었다. 항공기 또한 호커 허리케인과 최신기종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소량이나마 배치된다.그러나 전함 5척 중 4척이 제1차 세계 대전기에 건조된 리벤지급 전함인 HMS 리벤지, HMS 로열 소버린, HMS 라밀리즈, HMS 레졸루션으로 화력은 15인치(381mm) 2연장 주포탑 4기 8문으로 준수하였지만, 구식전함이였으며 속력도 애초부터 상대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함급인데다가 전간기 시절의 영국 경제상황 악화등으로 인해 정비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수준의 18노트 정도의 속도를 내면 양호할 지경이라 매우 느리므로 일본군 주력 함대와 비교하여 열세였다.[7] 나머지 1척도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인 HMS 워스파이트인데, 역시 리벤지급 전함과 동시기에 건조된 구식전함인 데다가, 건조당시에는 25노트의 속력을 내는 고속전함이었지만 이 시점에서는 다른 전함들의 속도가 향상되었기에 일반 전함과 별 차이가 없는 속도를 가진다. 함재기도 신예기가 일부 있었지만 여전히 페어리 풀머 같은 구형 전투기가 다수를 차지했으며, 적 함대 공격의 핵심인 뇌격기는 구형 복엽기인 페어리 소드피시였다.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함재기인 A6M에 비해 질적으로 매우 열세였다.
애초에 대규모 증파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의 동양함대 전력은 아직 불충분했다. 말레이 해전 항목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미 1941년 12월 말에 일본 제국의 위협에 대해 재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영국 해군의 함대 중 상당한 부분을 동양함대로 이동 및 배치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으나 이미 대서양과 지중해 및 영국 본토 주변 해역에 대한 해군력 필요가 높았기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소규모의 Z부대만 보냈다가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일단 이동가능한 전력을 집결시켰으나 군함의 승조원과 함재기 조종사 및 승무원의 훈련도가 매우 부족했고, 군함들도 최신형 군함과 구식 군함이 뒤섞여서 통합적인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곤란했다. 그래서 제임스 폰즈 서머빌은 최신형 및 고속군함을 모은 A부대와 구식 및 느린군함을 모은 B부대로 함대를 나누었다. 구체적으로는 전함 5척 중 리벤지급 전함 4척과 경항공모함 허미즈 및 속도가 느린 군함으로 구성된 B부대를 편성하고, 워스파이트와 항공모함 인더미터블, 포미더블을 포함한 최신예 군함과 고속군함으로 편성된 속도가 빠른 A부대를 편성하여 A부대를 주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각각의 군함들은 한번도 합동훈련을 한 적이 없다시피했고 합동작전도 진행한 적이 없어서 동양함대의 효율성은 여전히 낮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은 3월 26일 신임 동양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제임스 서머빌 제독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머빌 제독은 다가올 일본군의 공세로부터 동양함대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고 전면적인 침공에 대비하며 일본군을 견제하는 데 주력하기로 목표를 정립하고. 동양함대가 미끼가 되어 일본 함대를 끌어낸다면 지상기지의 항공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협공한다는 기본 전술을 채택한다.
그래서 연합국의 정보부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제임스 폰즈 서머빌은 태양이 하늘에 떠 있는 주간에는 일본군의 공격을 회피하다가 야간이 되면 레이더를 장착한 페어리 알바코어를 선두로 한 야간 공습으로 일본군의 군함에 항공어뢰와 항공폭탄을 날려주는 타란토 공습 방식의 야간전을 수행하려고 했다. 이러한 공격방식은 일본군의 우세함과 영국 해군의 빈약함을 파악하고 주간에는 해전이 불리해진다는 판단을 제임스 폰즈 서머빌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극동연합국(Far East Combined Bureau)에서 보내온 정보에 문제점이 있었다.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일본군의 계획과 달리 일본군의 전력이 실제로 움직이는 날짜를 예상하지 못했고, 일본군의 전력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그래서 극동연합국의 정보에 따르면 일본군의 항공모함은 2척이라고 과소평가했는데 실제로는 정규항공모함 5척과 경항공모함 1척으로 구성된 6척이 투입되었으며, 카가의 좌초사고가 없었다면 일본 제국 해군의 항공모함의 숫자가 7척으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작전개시일도 3월 21일에 일본 제국 해군이 스타링 베이를 출발해서 4월 1일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공격을 시작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일본 제국 해군이 늦어질 것에 대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제임스 폰즈 서머빌이 생각한 교전을 실시할 경우에는 중과부적 상태에 몰리면서 영국 해군 동양함대가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영국 해군성이 명령한 과제인 인도양의 항로를 보호하고 동양함대를 불필요한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고 한 것을 어길 가능성이 높았다.
동양함대를 중심으로 한 해군전력이 빈약한 것에 비해서 실론섬을 중심으로 한 항공전력과 방공전력은 최대한 강화하는데 성공했다. 1941년 12월 7일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사용하던 구식 QF 3인치 20cwt 대공포 4문밖에 없던 트랑코말리 항구는 1942년 4월 4일까지 트랑코말리와 콜롬보에 각각 QF 3.7인치 대공포같은 강력한 신형 대공포를 포함한 여러가지 종류로 구성된 대공포 144문를 배치할 수 있었고, 방공용 레이더 1기도 트랑코말리와 콜롬보에 각각 1기씩 배치했다. 전투기 전력도 영국 공군의 호커 허리케인이 3개 비행대 분량의 67기가 배치되어 2개 부대가 콜롬보에, 1개 부대가 트랑코말리에 배속되었으며, 영국 해군의 페어리 풀머도 2개 비행대 분량의 44기가 배치되어 1개 부대씩 콜롬보와 트랑코말리에 나누어져서 배속되었다. 일본군 함대를 공격할 항공전력도 1941년 12월 7일에는 8대의 구식 뇌격기에서 1942년 4월 4일에는 7대의 PBY 카탈리나 비행정, 14대의 브리스톨 블레넘 IV 폭격기, 12대의 페어리 소드피시 뇌격기로 증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필요한 전력에 비해서는 항공전력이 약했다. 일본군 함재전투기인 A6M은 빈약한 방어력을 제외한다면 실론섬에 배치되고 출격가능한 모든 항공기를 능가한다. 그리고 저속 선회전이 A6M의 장기이므로 페어리 소드피시처럼 복엽기이며 초저속 비행이 가능해서 Bf 109같은 고속 단엽기가 요격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공격측도 속도를 줄이다가 실속 상태로 빠져서 혼자서 추락하는 등의 행운을 바랄수도 없었다.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처럼 확실하게 A6M에게 우위를 차지할 기종의 경우에는 극소량이 현지에 도착하긴 했으나 영국 본토와 실론섬의 기후와 환경의 차이가 너무 커서 조립 및 시운전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므로 실론 해전 당시에는 전투기로 운용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급하게 항공전력을 실론섬에 투입하다보니 상대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인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사용하던 항공기를 가져온 경우가 많은데, 보크스 필터처럼 비행성능을 깎아낼 정도로 거대한 필터가 장착된 경우가 많은 것도 문제였다. 해당 필터는 사하라 사막같은 건조지역에서 모래먼지를 걸러낼 목적이지만 실론섬처럼 바다나 열대 지방에서는 불필요한데, 장착 위치상 보크스 필터를 떼어내고 기수 하부에 별도의 부품을 장착해서 외부모양을 다듬어야 할 정도로 보크스 필터가 크고 무거우며 분리도 쉽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덕분에 스펙상의 성능까지 깎아먹고 출격하거나 아예 출격이 불가능한 경우까지 발생한다.
3.2. 일본 제국
일본 제국 해군의 인도양 작전은 진주만 공습, 남방작전 지원, 다윈 공습 등에서 많은 실전경험을 치른 나구모 주이치의 제1항공함대와, 오자와 지사부로가 이끄는 제1남파함대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이중 핵심은 제1항공함대였다. 오자와의 제1남파함대가 벵골만 일대에서의 통상파괴전 및 일본군이 공격중인 버마에 대한 위협 제거가 목적이었다면, 나구모의 제1항공함대는 동양함대가 결집한 실론섬을 공략, 영국 동양함대를 격멸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3월 9일에는 연합함대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연합함대전령작제86호(聯合艦隊電令作第86号)를 발동해서 제2함대사령장관인 곤도 노부타케(近藤信竹)가 지휘하는 남방부대에게 실론섬 방면 기동작전의 실시를 명령한다. 곤도 노부타케는 3월 14일에 남방부대전령작제139호(南方部隊電令作第139号)를 발동해서 우선 병(丙)잠수부대에게 인도양 방면의 통상파괴전 및 초계를 지시한다. 그러나 잠수함의 숫자가 고작 5척이라서 실질적으로는 실론섬과 인도의 남쪽 해안을 정찰하는 것이 주요한 성과였으며 격침전과는 화물선 6척과 소형 범선 4척이라는 소량의 전과만 기록한다.
곤도 노부타케가 직접 지휘하는 남방부대 본대는 4월 4일에 말레이 반도 서부의 페낭에서 출발해서 인도양 방면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항공전력도 북부 수마트라와 안다만 제도에 건설된 비행장에 배치되어 본대의 작전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서머빌 제독이 취임한 3월 26일, 포트 다윈 폭격을 마치고 휴식중이던 제1항공함대는 셀레베스 섬을 출항하여 자바 섬 남쪽을 통해 인도양으로 나아갔다.
일본 제국 해군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군함의 숫자가 많고 질적인 면에서도 전간기 시절에 재건조라고 불릴 지경의 대규모 대개장을 마친 군함들의 성능이 좋았다. 속도면에서도 우월한데다가 주요 전투가 함재기에 의한 공습이었으므로 영국 해군이 상대를 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제임스 폰즈 서머빌 제독이 야간공습을 계획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재기의 경우에도 A6M, D3A, B5N는 빈약한 방어력 문제만 제외하면 당시 영국이 투입한 함재기를 능가하며 실론섬에 배치한 육상용 항공기도 대부분 능가한다. 그리고 개전당시부터 별다른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일본군의 조종사와 승무원들은 훈련과 실전경험이 풍부하므로 기체의 성능을 최대한 뽑아낼 수 있었다.
4. 세부전력
4.1. 일본 제국 해군
|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 | |
| 남방부대 본대 | |
| 지휘관 | 제2함대 사령관 곤도 노부타케 해군 중장 |
| 제4전대 | 아타고 |
| 제4전대 제1구축소대 | 아라시, 노와키 |
| 남방부대 기동부대 | |
| 지휘관 | 제1항공전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8] |
| 제1항공전대 | 아카기, |
| 제2항공전대 | 소류[10], 히류 |
| 제5항공전대 | 쇼카쿠[11], 즈이카쿠 |
| 지원부대 | |
| 지휘관 |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군이치 |
| 제3전대 제1소대 | 히에이[12], 키리시마 |
| 제3전대 제2소대 | 하루나, 콩고 |
| 제8전대 | 토네[제8전대], 치쿠마 |
| 기동부대 경계부대 | |
| 지휘관 | 오오모리 소장 |
| 제1수뢰전대 | 아부쿠마[14] |
| 제4구축대 제2소대 | 하기카제, 마이카제 |
| 제17구축대 | 우라카제, 타니카제, 하마카제, 하기카제 |
| 제18구축대 | 시라누이, 카게로, 카스미, 아라레 |
| 제5항공전대 소속 | 아키구모[15] |
| 보급부대 | |
| 제1보급대 | 쿠니마루, 타케히로마루, 니혼마루, 아즈마, 사카에마루, 쿠니요오마루, 아사히, 히가시마루 |
| 제2보급대 | 니치로오마루, 다이 니토모 사카에마루, 토요미츠마루 |
| 말레이 함대 | |
| 지휘관 | 오자와 지사부로 |
| 북방대 | |
| 제7전대 제1소대 | 쿠마[16], 스즈야 |
| 제20구축대 | 하쿠운 |
| 중앙대 | |
| 제4전대 | 토리 |
| 제5잠수전대 | 유라[17] |
| 제4항공전대 | 류조[18] |
| 제20구축대 | 유우기리, 사기리 |
| 남방대 | |
| 지휘관 | 시카야마 카쿠옷토 대령 |
| 제7전대 제2소대 | 미쿠마, 모가미 |
| 제20구축대 | 아미기리 |
| 보급부대 | |
| 지휘관 | 아야나미 함장 사쿠마 에이지 중령 |
| 구축함 | 아야나미, 시오카제 |
| 급유함 | 닛에이마루 |
| 경계부대 | |
| 제3수뢰전대 | 센다이[19] |
| 제19구축대 제1소대 | 우라나미, 이소나미 |
| 제11구축대 | 하츠유키, 시라유키, 후부키, 무라쿠모 |
| 병(丙)잠수부대 | |
| 지휘관 | 제2잠수전대 사령관 이치오카 히사시 소장 |
| 잠수함 | 이10, 이3, 이2 |
| 제8잠수대 | 이4, 이6 |
| 남방부대 항공부대 | |
| 지휘관 | 제11항공함대 사령관 츠카하라 니시조 소장 |
| 기지 항공대, 비행정 부대 | |
4.2. 연합군
| 연합군 | |
| 영국 해군 동양함대 | |
| 사령관 | 제임스 폰즈 서머빌 중장 |
| 함재기 | 93대(뇌격기 57대, 전투기 36대) |
| A부대 | |
| 사령관 | 제임스 폰즈 서머빌 중장(겸임) |
| 정규항공모함 | 인도미터블, 포미더블 |
| 전함 | 워스파이트 |
| 중순양함 | 콘월, 도셋셔 |
| 경순양함 | 엔터프라이즈, 에메랄드 |
| 구축함 | 6척 |
| B부대 | |
| 사령관 | 앨저넌 윌리스 중장 |
| 경항공모함 | 허미즈 |
| 전함 | 레졸루션, 라밀리즈, 로열 소버린, 리벤지 |
| 경순양함 | 다나에, 드래곤 |
| 네덜란드군 경순양함 | 야콥 반헬크 |
| 구축함 | 7척 |
| 네덜란드군 구축함 | 1척 |
5. 전투
5.1. 3월 31일부터 4월 4일
일본 제국 해군은 예정된 계획대로 3월 21일부터 스털링만에서 출격해서 4월 1일에 실론섬을 공습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적 출현등의 보고가 있어서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결과 출격이 늦어져서 실제로 스털링만에 일본 제국 해군이 도착한 것은 3월 26일이고 실론섬 공습도 4월 5일로 늦어지게 된다.영국군은 당시 콜롬보에 있던 극동 연합부(FECB)에 의해 통신 해석, 방위 측정, 부정 등의 암호 해독에 노력하고 있어, 일본 해군의 주요 작전용 암호인 JN-25의 해독을 실시해, 지점 부호의 특정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제국 해군의 계획을 탐지해서 3월 22일에는 4월 1일에 일본군이 실론섬을 공습할 것이라는 정보를 확보한다.
서머빌 제독은 3월 30일에 함대를 출격시키고 3월 31일에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속도가 빠른 최신예 군함으로 구성된 A부대와 속도가 느리고 구식군함으로 구성된 B부대로 함대를 나눈다. 그런 다음에 실론섬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순찰 구역에 함대를 위치시켰다.
영국군은 기본 전략대로 지상 기지 및 항모의 함재기를 총동원한 일제적인 일본 함대 타격전 수행을 위해 예상되는 침공로를 샅샅이 수색했다. 항공모함 허미스를 포함하여 보유한 초계기 및 비행정을 모두 투입하여 일본 함대를 찾았으나 탐색에 실패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4월 1일로 예측된 일본군의 공격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머빌 제독은 일본 함대가 실론섬 남쪽으로 접근하고 있으리라 예측하고 그 남쪽 해역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이 전혀 보이지 않자 지휘부에서 혼선이 일어난다. 그리고 중순양함 도셋셔는 수리를 중단하고 4월 1일에 긴급하게 함대에 합류했기 때문에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4월 2일에는 리벤지급 전함에서는 식수와 보일러용 물이 부족해지는 일이 발생했으며, 연료가 부족한 군함도 나타나는 등 함대 전체에 보급과 수리가 필요한 증상이 일어난다.
서머빌 제독은 일본 함대가 우회 루트로 실론섬으로 오고 있을 가능성을 경계하면서도 허미스를 트링코말리로 보내 마다가스카르 침공전을 준비시켰고 순양함 일부를 또 떼내어 호송선단 호위 준비를 시켰다. 나머지 주력 함대는 일본군의 작전권에서 벗어나 있다고 판단되는 몰디브로 이동시켜 보급을 받게 했다.
서머빌 제독은 이때 아군의 첩보가 틀렸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이런 분산 배치를 감행한 것이다. 물론 실제 공격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고 때문에 주력 함대를 몰디브까지 이동시켜 보급을 받게 한 것이지만 문제는 시기가 적절치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4월 4일 정오경 몰디브로 이동해 열심히 보급을 받고 있던 영국 함대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정찰 임무를 띄고 출격한 캐나다 왕립공군의 413 비행대대 소속의 레너드 버챌(Leonard Birchall) 비행대대장이 조종하는 PBY 카탈리나으로부터 대규모 일본 함대가 실론섬 남동쪽 580km 지점에서 동쪽에서 접근 중이라는 급보가 들어온 것이다. 이 비행정은 얼마 안 가 격추당했고, 서머빌은 급히 전 함대에 출항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몰디브와 실론 섬의 직선거리는 1,000km 내외로 쉽게 돌아갈 거리가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서 B부대는 아직까지도 연료보급을 비롯한 보급과 보충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4월 5일까지 출격준비를 갖출 수 없을 지경이라서 보급을 먼저 마친 A부대만 단독으로 먼저 출격하게 된다. 그리고 콜롬보 항구에 도착한 중순양함 콘월과 도셋셔에게는 즉시 A부대로 합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항공모함 허미즈는 호위하는 구축함과 함께 트랑코말리를 출항해서 실론섬 북동쪽으로 항진해서 일본군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그리고 콜롬보와 트랑코말리에 정박한 군함들에 대해서 탈출 후 합류 명령도 내려진다.
애당초 일본군은 술책이나 우회 기동 없이 정상적으로 실론섬 공격을 위해 이동중이었다. 일본군으로서도 예상치 못하게 적 발견등의 첩보에 대응하느라고 예정된 계획보다 4일 지연된 것 뿐이었고,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첩보부의 공격 예측 날짜도 그에 따라 4일 빗나간 것일 뿐이었다.
일본군의 경우에는 적기에게 발견되었기 때문에 영국군 함재기나 잠수함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공격부대의 편제를 변경해서 기존의 계획인 콜롬보 공습에 집중투입하는 방안 대신 제5항전의 항공대를 중심으로 한 절반의 부대를 남겨두었다가 전황의 변화에 따라서 투입한다는 계획으로 변경한다.
그리고 기습의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에 4월 4일 오후까지 예정된 항로나 콜롬보 항구에 대한 공중정찰을 실시하지 않았다. 이유는 있었는데 원래는 기습을 위해서 몰래 비행정이나 정찰기를 보내서 정찰할 계획이었으나 기함인 아카기에서도 알아챌 정도로 콜롬보 방면에서 영국군의 통신량이 급증했기 때문에 이미 일본군이 들켰다는 것이 명확했으므로 정찰기나 비행정을 보내면 격추당해서 손실만 발생할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영국군의 정찰기를 격추해야 하므로 아군 오사의 위험성도 높아서 일본군이 정찰기를 날리기가 곤란했다. 실제로도 영국군은 실론섬에서 영국 공군 205비행대 소속의 카탈리나 FV-R이 저녁 시간인 4월 4일 오후 5시 45분에 이륙한 후 4월 4일 밤 10시 37분에 첫번째 정찰보고를 타전한 후 4월 5일 아침 6시 15분에 실론섬에서 180km 떨어진 지점에서 마지막 정찰보고를 보냈다. 해당 정찰기는 최종보고를 타전한 지 90분만에 일본군 함재기에게 격추당한다.
5.2. 4월 5일 : 1차전 콜롬보 공습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고 영국군의 정찰기를 격추한 나구모는 정찰기를 남서쪽과 북서쪽 방면으로 보내서 영국 함대를 찾는 것과 동시에 콜롬보를 공습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4월 5일 새벽 6시경, 공격 부대를 출격시켰다. 호위기인 A6M 36기, D3A 38기, B5N 54기를 포함한 총 126기의 대규모 공격 편대였고, 진주만 공습과 포트 다윈 공습을 지휘한 베테랑 후치다 미쓰오 중좌가 지휘했다. B5N 뇌격기의 일부는 D3A 급강하폭격기가 장착할 수 없는 800kg 철갑폭탄을 장착했다. 그리고 제2항공전대의 히류, 소류의 급강하폭격기와 제5항공전대의 소카쿠, 즈이카쿠의 전투기와 뇌격기는 콜롬보 항구에서 도주하는 군함을 공격하거나 영국 항공모함의 등장시 대응하기 위해서 발진준비태세를 유지한 채 비행갑판 위에서 대기했다.#1콜롬보 항구에서는 상선 25척을 포함한 많은 숫자의 선박들이 탈출했으나 아직 상선 21척, 구축함 테네도스와 데코이, 무장상선 헥터, 잠수모함 루시아, 잠수함 트러스티등의 소수의 군함들이 남아있었다.
아침 7시 45분, 레이더를 가동했으나 사전에 공습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수비군이 요격기를 긴급출동시켰고 요란한 공습 사이렌이 환영하는 가운데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된다. 일본군은 미리 상공에 대기중이던 소수의 영국 전투기들을 격추한 후 항만 시설과 비행장을 공습하며 동시에 항만의 군함과 상선을 공습했다. 공습결과 무장상선 헥터와 구축함 테네도스, 노르웨이 소속 유조선 솔리가 격침되었으며 잠수모함 루치아와 상선 2척을 포함한 3척이 손상되었다. 일본군은 A6M 1기와 D3A 6기를 상실하여 7기가 격추되었으나 영국군은 호커 허리케인 34기와 페어리 풀머 6기가 포함된 41기가 요격에 나섰으나 호커 허리케인 14기와 페어리 풀머 4기를 포함한 20기가 격추당하고 1기가 이륙중에 손상을 입는 대규모 패배를 달성했고, 공습이 발생하기 전에 일본 함대를 찾아다니던 페어리 소드피시 뇌격기 8기는 불행히도 이들 공격대와 조우하여 모조리 격추당했다. 브리스톨 블레넘 14기도 일본군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동남아 전선에서 쓰던 F2A 버팔로따위가 아닌 호커 허리케인까지 출격했음에도 이 모양 이 꼴이었던 건, 제2선급 전선에 투입된 영국 공군과 최정예였던 일본 해군의 조종사간 기량 차이도 한몫했다.
오전 11시 18분에 1차 공격대 지휘관인 후치다 미쓰오는 지상에 있는 비행장등의 군사시설에는 큰 피해를 주었으나 항구에 있는 군함과 상선에 대한 폭격은 효과가 미흡하다고 판단하고 제2차 공습이 필요하다고 연락했다. 해당 보고를 받은 일본군 함대는 각각의 항공모함에 대기중이던 함재기들의 무장을 항공어뢰에서 항공폭탄으로 변경한 후 1차 공격대가 귀환 후 착함하면 2차 공격대로 출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나구모 주이치는 항구에 항공모함이나 전함은커녕 순양함이나 구축함도 안 보인다는 보고를 받고는 영국 함대가 요격을 위해서 출진했다고 판단했다. 이미 정찰기를 보냈지만 추가적으로 각 군함들이 보유한 모든 정찰기를 출격시켜 주위에 있을 영국 함대를 수색했고, 오전 10시에,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에서 출격한 정찰기가 영국군 중순양함 2척을 발견하고 보고하고, 나구모는 함재기들의 무장을 다시 항공폭탄에서 항공어뢰로 되바꾸라고 지시한다. 함대의 속도도 24노트에서 28노트로 올렸다.
여기서 참모들간의 다툼이 일어나는데, 오이시 타모츠(大石保)는 콜롬보 항구에 대한 제2차 공습을 주장하고, 겐다 미노루는 발견한 군함을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맞섰다. 나구모 주이치는 겐다 미노루의 제안을 수용하고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즉시발진 제안도 받아들여서 일단 항공폭탄을 장착한 상태의 D3A 급강하폭격기 53기를 우선 출격시켰다. 해당 부대는 오전 11시 49분부터 정오 12시 3분까지 출격을 마쳤다. 그리고 추가보고로 영국군 중순양함 2척 주변에 다른 영국군 군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정오 12시 56분에 알게 되자 기존에 출격했던 53기를 일단 먼저 영국군 중순양함에게 보내고, 제5항공전대의 쇼카쿠와 즈이카쿠에게 보유한 뇌격기와 급강하폭격기의 절반으로 추가공격준비를 하라고 지시한다. 제5항공전대는 출격시각을 오후 2시로 잡고 준비를 시작한다.
이 불행한 중순양함 2척은 HMS 콘월, HMS 도셋셔[20][21]로 호송선단 호위 명령을 받고 콜롬보에 정박해 있다 허겁지겁 도망치며 본대로 합류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결국 본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아무런 항공 엄호도 못 받는 상황에서 일본군 항공기들의 좋은 표적연습이 되며 순식간에 격침당했다. 콘월, 도솃셔 격침 때 일본군 항공기들이 보여 준 명중률은 무려 88%이었고 전투 시간은 고작 30여 분이었으며 오후 2시에 두척 모두 격침당한다. 침몰한 중순양함 2척의 생존자들은 30시간 후에 영국 함대에서 파견된 경순양함 엔터프라이즈에게 구출되지만 중순양함 2척의 침몰로 인해 424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오후 2시에는 제2차 공격대가 발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영국군 중순양함 2척을 격침했지만 주변 및 영국군 중순양함들의 예상 항로인 남서방향에서도 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은 나구모 주이치는 영국 해군의 기습에 대응하기 위해서 함재기 출격을 멈추고 제1항공함대를 남동쪽으로 돌려서 퇴피를 시작한다.
서머빌은 오후 2시에 페어리 알바코어 4기를 정찰기로 북동쪽으로 320km 떨어진 지역에 보내서 수색을 개시했다. 그러나 오후 3시부터 나구모 주이치의 제1항공함대 본대는 남서쪽으로 변침을 실시하고, 제2항공전대는 3시부터 북동쪽으로 변침을 시작했다. 함대를 퇴피시키더라도 방향을 오인하도록 처음에는 방향을 다양하게 잡고 분산시킨 것이다. 따라서 알바코어들은 나구모 주이치를 찾아내지 못했으며, 오히려 제2항공전대에게 발각당해서 페어리 알바코어 1대는 오후 4시 4분에 상당한 손상을 받고 나머지 1대는 오후 4시 28분에 보고를 하기도 전에 격추당한다. 나머지 알바코어 2대는 결국 일본군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귀환한다. 유일한 성과는 손상된 알바코어가 제2항공전대의 위치를 찾아낸 것 뿐이었다.
서머빌은 오후 4시 55분까지 손상된 알바코어에게 보고를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콜롬보에서 오후 2시 기준으로 일본군 함대가 남서쪽으로 24노트로 항진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서미빌은 아직까지는 야간전에 희망을 걸고 오후 5시 26분에 남서쪽으로 변침했는데, 해당 시점에서 나구모의 제1항공함대 주력은 고작 190km 떨어져 있고, 제2항공전대는 고작 160km 떨어진 상태였다. 만일 그전까지의 항로인 동쪽을 서머빌이 유지했다면 오후 9시에 32km 거리까지 양측 함대가 근접하게 되며 야간전이 벌어졌을 것이다.#1
오후 5시 45분에 손상된 알바코어가 착함한 후 승무원에게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존의 정보와 새롭게 보고된 정보가 서로 모순이 일어났다. 유일하게 일치하는 것은 손상된 알바코어가 발견한 일본군이 본대가 아닌 분대라는 것 뿐이며, 일본군이 실시한 항진방향의 트릭도 먹혀서 북서쪽과 남동쪽이라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의견이 분열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4월 5일의 늦은 시간에 극동연합국(Far East Combined Bureau)이 나구모의 제1항공함대가 4월 6일에 항해할 예정을 담은 일본군의 JN 25B 암호를 등고 해독하는 데 성공했으나 동양함대로 전송시에 혼선이 발생해서 서머빌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서머빌은 정보부족으로 인해 야간공습을 시행하는 것을 포기하고 동양함대 A부대를 북서쪽으로 항진시켜서 일본군을 추적하기로 결정했다. 북쪽과 동쪽 방면으로 레이더를 장착한 함재기를 보내서 수색을 개시했지만 그 때는 이미 일본군 함대가 해당 해역을 벗어난 뒤라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중순양함 2척을 상실했고 4월 6일까지 영국군의 정보망에 일본군의 함대가 항공모함 4척과 전함 3척으로 구성되었기에 동양함대의 전력을 넘어섰다는 것을 서머빌이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서머빌은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허미스가 합류하지 못한 상황에서 항공모함 2척과 구식 전함 5척으로 일본 함대를 상대하기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잠깐동안 변침했을 뿐이다. 대신 야간에 일본 함대를 포착하여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지만 이마저도 앞서 언급한대로 실패한다.
전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중순양함 2척 격침 직후 양측 함대 간 직선 거리는 불과 300km 이내였고 격침된 중순양함 2척과 A부대간의 거리는 북동쪽으로 55k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영국군 중순양함을 추적하던 일본군의 정찰기가 영국군 중순양함의 예상항로를 따라서 80km를 더 비행한 후 모함인 토네로 귀함을 시작했는데 서머빌 제독이 A부대를 남서쪽으로 10분만 더 항진시켰으면 바로 발견될 정도였다. 일본군도 4월 5일 밤까지는 일단 퇴피를 시행한 후 4월 6일 아침에는 서쪽 방면으로 수색을 개시했으나 이 시기에는 동양함대가 좀 더 서쪽에 있어서 수색을 실패한다.
만약 이때 일본 함대가 영국 함대를 발견했다면 말레이 해전 저리가라 할 영국군 최대의 대참사가 일어날 뻔 했다. 즉 콘월과 도솃셔 두척의 중순양함 격침으로 끝난게 오히려 행운이었다는 이야기다.
5.3. 4월 6일 ~ 8일
콜롬보가 초토화되고 아무런 전과도 없이 귀중한 중순양함 2척을 손실한 서머빌 제독은 콜롬보가 초토화된 이상 일본군의 다음 목표는 콜롬보에서 가장 가까운 해군 기지인 몰디브의 아두 아툴(addu atoll) 환초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서머빌은 실론에서 몰디브로 향하는 항로 주위에 매복했다가, 일본군이 몰디브 공략을 위해 항공기를 모두 띄운 그 순간에 일본 제국 해군 함대를 처리한다는 계획을 세운다.그런데 일본군은 아두 아툴 기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애당초 아두 아툴 기지는 건설된지 얼마 안 된 기지였고, 일본군은 패망해서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 이 기지의 존재를 몰랐다. 당연히 나구모는 몰디브 같은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는 동네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런던에서는 동양함대 휘하 B부대가 느리기만 하고 전투엔 도움도 안 된다는 이유로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몸바사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서머빌 역시 이에 동의했다. B부대가 실제 일본군과의 싸움에 도움이 안되기도 했고, 이 도움도 안되지만 그래도 귀중한 전함들이 엉뚱하게 일본군에게 격침당할까 두려워한 탓이었다. 그리고 서머빌은 4월 8일, 마침내 전 함대에 봄베이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봄베이는 인도 서해안 최대의 항구도시로, 이로서 영국은 일시적으로나마 인도양 동부를 포기한 셈이었다.
5.4. 4월 9일 : 트링코말리 공습과 허미스 침몰
나구모는 콜롬보를 박살냈으니 그 다음엔 실론 섬 제2의 항구인 트링코말리에 쑥재배를 하기로 결정하고 항로를 변침했다. 4월 8일 오후 3시 17분에 카탈리나 비행정에게 일본군 함대가 발견된 후 트랑코말리 항구도 긴급피난이 결정되었다.호위기인 A6M 41기, D3A 91기로 구성된 132기의 제1차 공격대는 후치다 미쓰오 중좌의 지휘하에 트링코말리를 공습한다. 이번 공습에서도 영국 함대의 항공모함을 우려해서 함재기의 절반은 즉시 대응을 위해 출격대비상태로 비행갑판 위에서 대기한 상태였다.
트링코말리 수비대는 AMES 272의 레이더로 146km 거리에서 일본군의 항공기를 탐지하는 데 성공했고, 호커 허리케인 17대와 페어리 풀마 6기를 출격시켜서 선제요격에 돌입했다. 비록 호커 허리케인 8대와 페어리 풀마 1기가 격추당했지만 일본군도 선제요격으로 A6M 2기가 격추당하고 공습과정에서 A6M 1기와 D3A 1기를 상실해서 총 4기가 격추당한다. 그리고 중과부적 상태이므로 트링코말리도 비행장과 항만시설이 공습당했고, 정박해있던 모니터함 에레버스가 지근탄을 맞고 손상되었으며, 탄약운반선이던 슬루프 1척이 좌초 후에 불타서 손실되었다. 그리고 영국군 사망자 20명과 부상자 33명이 발생했고 민간인도 38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영국군의 반격도 진행되었다. 오전 7시 16분, RCAF 413 비행대의 카탈리나 비행정이 일본 함대를 발견했지만, 보고하는 동안 격추된 것이다. 어찌되었든 일본군 함대의 위치를 파악하자 브리스톨 블레넘 9기가 호위기 없이 즉시 발진했으며, 오전 10시 25분에 기습적인 공습에 성공한다. 트링코말리를 공습한 제1차 공격대가 귀함중이었기에 일본군 항공모함의 상공이 어수선했으며, 제2항공전대의 히류가 영국군 폭격기를 발견했으나 다른 군함에 알려주지 못해서 폭격목표가 된 아카기는 함재기의 무장변환중에 습격을 당한다. 하지만 브리스톨 블레넘이 투하한 폭탄은 해당 폭격기가 급강하폭격기가 아니므로 일반폭격처럼 수평폭격을 했기에 모두 빗나갔으며, 3,400m 높이에서 항공모함 상공을 경호하던 호위기들과 허미즈 공습 후에 귀환하던 전투기들이 요격을 실시해서 4기는 호위기들에게 격추당하고 1기는 귀환중이던 전투기들에게 격추당한다. 일본군의 손실은 요격을 진행하던 A6M 1기였다.
트링코말리 항구에도 제대로 된 군함이 없는 것에 대해 나구모가 고민에 빠지던 오전 9시경 순양전함 하루나에서 출격시킨 정찰기가 영국 항모 발견의 보고를 올렸다. 나구모는 즉시 트링코말리 항구에 대한 2차 공습을 준비 중이던 편대들에게 긴급 무장 변경을 지시했고 육상 폭격용 무장을 장착하고 있던 일본기들은 일제히 대함 공격용 무장으로 환장하여 출격했다. 그러나 항공모함 허미즈는 일본군의 트링코말리 공격이 끝났다고 오판하고 트링코말리로 돌아오는 중이었으며 일본기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을 지켜줄 함재기들마저 모두 육상 기지에 남겨둔 채였다. 설상가상으로 거리도 트링코말리에서 고작 105km 떨어진 지점이라서 일본군이 공습하기 딱 좋았다.
오전 10시 25분, 항공모함 허미즈를 향해 함재기 80대를 동원한 대대적인 집중공격이 시작되었고 함재기도 없고 대공 화기도 부족하며, 호위 세력도 거의 없던 허미즈는 고속으로 도주를 시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격침되었다. 일본군 급강하폭격기가 45발을 투하해서 37발이 허미즈에게 명중해서 명중률 82%를 기록했다. 그리고 아직 폭탄을 투하하지 않은 일본군 급강하폭격기가 호위함인 구축함 HMS 뱀파이어[22]와 동행하던 보급함들을 목표로 폭격을 실시했으며, 구축함 뱀파이어(HMS Vampire)는 폭탄 16발 투하에 폭탄 13발 명중, 초계함 홀리호크(HMS Hollyhock)는 폭탄 6발 투하에 폭탄 1발 명중, 대형 유조선인 브리티시 서전트(British Sergeant)은 폭탄 12발 투하에 폭탄 11발 명중, 해군 보조함인 에설스테인(Athelstane)은 폭탄 6발 투하에 폭탄 5발이 명중했다. 그 외에 수송선인 노르비켄(Norviken)도 폭탄이 명중했다. 다수의 폭탄 명중에 의해 호위함과 상선들도 같이 격침되었다. 인명피해는 허미즈에서 307명, 뱀파이어에서 8명, 홀리호크에서 53명이 발생했고, 병원선인 비타(Vita)가 600명을 구조한다. 일본군의 손해는 D3A 4기로 뒤늦게서야 트링코말리 방면의 육상 비행장에서 날아온 페어리 풀머 2기에 의한 요격 때문이었다.
일련의 작전을 마친 나구모는, 동양함대 주력 격멸에는 실패했지만 항모 1척과 중순양함 2척을 격침시키고 콜롬보와 트링코말리를 쑥대밭으로 만든 성과에 만족하며 귀환을 지시했다. 진주만 공습 때와 달리, 콜롬보, 트링코말리의 항만 배후 시설을 모조리 폭격으로 파괴했기에 나머지 동양함대 전력이 돌아와도 실론섬 기지를 이용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통상파괴전 측면에서도 항공모함 류죠를 비롯해서 따로 활동한 부대를 합쳐서 상선 23척이 격침되고 격침톤수 112,312톤을 기록해서 만만치 않은 성과를 기록한다.
6. 결과
6.1. 연합군
명백한 영국군의 참패였다. 일본군의 공격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도 정확한 일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전술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이로서 영국은 벵골만을 포함한 동부 인도양의 제해권을 일본에게 완전히 내주었고, 일본의 남방 점령지에 대한 위협은커녕 인도에 대한 침공에 대비하는 데 급급해야 했다.동양함대는 함대의 주력 기지를 동아프리카에 있는 케냐의 몸바사로 이동한다. 그리고 실론섬을 포기할 수 없기에 서머빌 제독은 실론섬 근해까지 진출했다가 후퇴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중부 인도양의 제해권 탈환을 시도했다. 실론섬에도 1942년 6월까지 항공기 64대와 예비기로 구성된 영국 공군의 3개 비행대대가 배치되었고 일본군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3개의 비행대대가 추가되었으며 대공포와 레이더도 개선품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육상 수비군으로 호주의 육군 여단 2개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1942년 4월 18일에 영국 해군성에서 계획을 발표했다. 본토함대와 지중해함대에서 항공모함들을 대부분 차출해서 동양함대에 배속시킨 후에 실론섬으로 진격해서 다시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다. 실행시기는 9월로 잡혔다.
하지만 영국군의 첩보망에 일본군 항공모함들이 중부태평양같은 먼 지역으로 움직이는 것이 발견되었고, 미드웨이 해전으로 대타격을 입었다는 정보를 미국이 전달했다. 영국은 일본이 인도양 방면에서 더 이상은 공세를 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기 시작했고, 7월부터 동양함대의 증강을 늦추기 시작했으며 9월에는 일본군이 인도양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 후 동양함대를 오히려 축소한다. 뒤이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에르빈 롬멜이 다시 공세로 전환하고 몰타 항공전도 격화되면서 영국은 인도양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다.
이는 사실상 영국이 대일전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킨다. 이후 영국의 대일전은 식민지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정부에 의해 주도되며 태평양 전쟁에서 영국의 발언권은 크게 약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팽창하는 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설 국가는 진주만 공습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있는 미국밖에 없었다. 이후 영국이 다시 태평양 전쟁으로 돌아오는 것은 1943년부터이며 인도양에서 소규모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 군함을 침몰시키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고 영국 태평양함대를 조직해서 태평양 전쟁의 최후반에 참전했으나 일본 제국 패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거나 하는 등의 큰 활약을 보이진 못했다.
6.2. 일본군
반대로 일본 제국 해군은 동양 함대의 완전한 격멸에는 실패했지만 원했던 전략적 목표를 모두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영국군은 더 이상 남방 점령지에 위협을 가할 수 없었기에 동양함대는 사실상 괴멸한 것이나 마찬가지고 일본군은 전력을 다해 미군과의 전투에 주력하며 태평양 외곽 방어선만 유지하면 충분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최상의 전략적 조건을 구비한 채 미군과의 결전에 온 힘을 쏟아붓게 된다.그러나 인도양에 대한 통상파괴전이나 공세는 신통치 않았다. 제8잠수전대를 투입하여 인도양에서 통상파괴전을 펼치거나, 특설순양함이라고 부르는 상선개조형 가장순양함인 호쿠니마루와 아이쿠니마루의 통상파괴전, 마다가스카르 전투에서 잠수함에 탑재한 갑표적을 투입해서 디에고 수아레스 기습작전을 실시하여 리벤지급 전함 라밀리즈를 중파하고 유조선인 브리티시 로얄티를 격침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과정을 합해도 연합국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적었기에 당시의 나치 독일 해군 작전부장이자 중장인 쿠르트 프리케(Kurt Fricke)는 당시 나치 독일에 체류중이었던 노무라 나오쿠니(野村直邦) 중장에게 반복해서 인도양 방면에 일본군의 유력한 전력을 투입할 것을 요청했고, 나중에는 테이블을 두들기면서 북아프리카 전역의 상황은 일본군이 유력한 함대를 적극적으로 투입하지 않으면 패퇴할 것이 명확하므로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여기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도 끼어들어서 한층 더 밀접한 협력관계를 요구한다며 일본의 연합함대가 영국의 동양함대를 격멸해줄 것을 요청할 지경이었다.
결국 군령부에서도 6월 22일에 대해지제107호(大海指第107号)를 통해 연합함대에게 차기 작전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통상파괴전을 전개하여 적의 굴복을 추진한다는 의사를 연합함대에게 전달한다. 연합함대도 전령작제174호(電令作第174号)를 통해 인도양 방면의 해상교통파괴전인 B작전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B작전은 연습순양함을 기함으로 구축함과 상선을 개조한 가장순양함을 투입하고 지상비행장에 전개한 항공부대의 지원을 받는 소규모 작전으로 목표도 수상부대가 수송선 20척, 잠수함부대가 수송선 50척을 격침시키는 것을 기대하는 수준으로 매우 작은 작전이었기에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 왕국이 바라는 수준이 전혀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서 실행일인 1942년 8월 1일은 공교롭게도 미국이 과달카날 전역을 시작하기 전에 양동작전으로 영국군에게 시선을 끌어주라고 부탁해서 영국군이 스텁 작전(Operation Stab)이라는 행동을 개시한 날이다. 서머빌 제독은 자신의 함대인 A부대를 이끌고 실론섬 근방으로 진출했으며, 해당 행동은 일본군의 비행정에게 발각되었기에 B작전은 일시적인 연기가 진행된다. 그 후에 툴라기 전투가 시작되자 8월 8일에 B작전을 취소하고 군함들을 솔로몬 제도나 뉴기니 방면으로 돌린다.
B작전이 무산된 후에는 일본군의 잠수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이 진행되긴 했으나 미국과 싸울 전력도 부족한 상황이라서 말 그대로 개점휴업급으로 추축국에게 전투를 진행하고 있다 수준으로 활동이 미약해졌다.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 왕국도 이러한 일본 제국의 행동 때문에 이럴 것이라면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면 안되었다라고 후회 겸 비판을 일본 제국에게 날려줄 정도로 사이가 안좋아졌다. 결국 일독경제협정(日独経済協定)의 체결이나 기술교류에 악영향이 오고 만다.
7. 기타
4월 9일 오전에 있었던 영국군 브리스톨 블레넘 폭격기 부대의 일본 제국 해군 함대 공격은 개전 후 일본 해군 항공모함 부대에 대한 최초의 직접 공격 시도였다. 비록 이때는 수량도 적었고 수평 폭격이었기에 일본 함대에 타격을 주지 못하고 요격당했지만 영국군 폭격기 부대가 구름을 뚫고 항공모함에 근접해서 폭탄을 투하할 때까지 일본군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람에 일본 해군 항공모함 부대의 초계 능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압도적 승리 속의 자그마한 불안 요소였으나 나구모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정찰기들의 일부를 함대 주변에 배치하여 상공을 감시하지 않고 모든 정찰기를 영국군 함대를 찾으려고 내보냈으며, 정찰기를 수상군함의 몇 대 수준으로 적고 속도도 느린 수상기로만 충당한 일본 제국 해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터진 상황이기도 했으며, 나중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후에나 C6N 사이운같은 본격적인 항공모함용 정찰기가 도입되게 된다.또한 영국이 여러 차례 공중전에서 패배한 요인으로써 함재기의 차이도 있었다. 당시 영국해군의 일러스트리어스급이 사용하던 함재기들은 대부분 구식이였으며 속도 또한 당대기준 한참 미달이였다. 따라서 날카로운 기동과 저속 선회전이 장점인 A6M에게 영국군의 함재기는 질적으로 매우 열세였다.[23]
또한 이 실론 해전은 미드웨이 해전의 전초전이라고 불리는 해전이였다. 당시 미숙했던 초계, 탐색작전, 전투 중 벌어진 무장교환 등, 이는 후에 일어날 미드웨이 해전 당시의 일본 해군의 문제점과 매우 유사하다.
[1] 인도미터블, 포미더블[2] 허미즈[3] HMS 워스파이트, 리벤지, 레졸루션, 로열 소버린, 라밀리즈[4] 아카기, 소류, 히류, 쇼카쿠, 즈이카쿠[5] 류조[6] 공고, 히에이, 하루나, 기리시마[7] 이때 남아있던 리벤지급 전함은 모두 동양함대에 배속. 리벤지급 전함은 총 5척으로 HMS 로열 오크는 1939년 10월, 스캐퍼플로에 정박해 있다가 홀로 잠입한 귄터 프린의 유보트 U-47에게 격침당했다.[8] 곤도 제독 휘하[9] 팔라우에서 좌초[10]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기함[11] 제5항공전대 사령관 원 다나카츠 소장의 기함[12] 미카와 군이치 기함[제8전대] 사령관 아베 코오키 기함[14] 오오모리 소장 기함[15] 사실 제5항공전대 라고 표기되어 있다.[16] 쿠리타사령관 기함[17] 다이 타다시케 소장 기함[18] 츠노다 카쿠지 소장 기함[19] 하시모토 사령관 기함[20] 중순양함 도솃셔는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비스마르크를 어뢰로 격침시킨 순양함이다.[21] 국내에 번역된 문헌이나 인터넷에서 도솃셔를 '도르셋'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일본식 발음으로 잘못된 표현이다.[22] 구축함 HMS 뱀파이어는 호주 해군 소속 함정으로서 연연방의 일원으로 영국해군 작전에 참가했다. 말레이 해전 당시 Z부대에 배속되어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를 호위하였으나 두 전함의 침몰을 막지는 못했고 결국 뱀파이어도 실론 해전에서 침몰하고 마는 운명을 겪었다.[23] 자세한 내용은 일러스트리어스급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