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00:23:26

헤일스톤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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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tion Hailstone
헤일스톤 작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ilstoneTorpedo.jpg
미국 항공모함의 함재기에게 공격을 받는 일본군 수송선
시기
1944년 2월 16일 ~ 2월 17일
장소
트럭 제도
교전국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미국|]]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마크 미처|]]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고바야시 마사미
결과
미국 해군의 승리
일본 제국 해군의 중태평양 상실
전력 정규항공모함 5척
경항공모함 3척
전함 7척
기타 군함 40여척
항공기 약 590기
순양함 5척
구축함 8척
기타 군함 5척
상선 50여척
항공기 350기
피해 정규항공모함 1척 피해
전함 1척 피해
항공기 25기 손실
40명 전사
순양함 3척 침몰
구축함 4척 침몰
기타 군함 3척 침몰
상선 32척 침몰
항공기 270기 손실

1. 개요2. 배경3. 트럭 환초4. 공습5. 결과 및 이후의 여파

트럭 제도(지금의 추크 제도)

1. 개요

태평양 전쟁 중 1944년 2월에 미국 해군이 2일에 걸쳐 일본 해군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던 캐롤라인 제도의 트럭 환초(현재는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추크 제도)를 공습한 작전이다. 흔히 헤일스톰(Hailstorm)[1]으로 착각되나 정확한 이름은 헤일스톤(Hailstone)[2]이다.

이 공습 이후로 일본 해군은 중태평양의 거점을 버리고 필리핀과 팔라우로 밀려나게 된다.

2. 배경

1943년 초, 과달카날과 동부 뉴기니에서 미군이 승리한 이후로 일본군이 방어 태세에 돌입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주도권이 미국에게로 완전히 넘어오게 되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공세에 돌입한다.

과거 41년과 42년에 일본군이 남방작전에서 했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미군이 섬 하나를 점령하고 다음 섬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남쪽에서는 미 육/해군이 연합작전을 펼치며 밀고 들어오고, 중부태평양에서는 해군이 천천히 일본 제국을 죄어오는 방식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 후자인 중부 태평양 루트의 첫 번째로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 환초에서 타라와 전투가 벌어졌다. 이 경로의 다음 목적지는 중부태평양 한폭판의 마셜제도였고 그 배후엔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자 방어선의 중핵이었던 트럭 환초가 있었다.

3. 트럭 환초

트럭 환초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일본이 독일로부터 빼앗은 이래 태평양에서 활동하는 일본군에게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일본은 이 일대의 섬들을 남양군도라 불렀다. 태평양 전쟁 개전 전부터 서구 열강들의 눈을 피해 군사기지로 개발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살펴보면 남쪽으로는 라바울을 중심으로 한 동부뉴기니 및 비스마르크 제도[3]와 과달카날을 위시한 솔로몬 제도 일대를, 그리고 동쪽으로는 중태평양의 마셜제도를 지원할 수 있는 위치였다. 북으로는 마리아나 제도 - 오가사와라 제도 - 일본본토로 이어지는 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 축의 서쪽은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 일본의 새로운 점령지가 된 필리핀과 동남아시아가 있다.

과달카날 전역이 진행중이던 때인 1942년부터는 연합함대의 사령부와 주력이 눌러 앉으면서 일본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전함 야마토 및 여러 항공모함들을 비롯한 수많은 주요 일본 해군 군함들이 이곳에 정박해 있었고, 태평양에서 작전을 벌이는 많은 일본 해군 함정들의 보급 기지로 사용되었다. 또한, 상당한 규모의 비행장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 항공기들에게도 중요한 작전 거점이자, 라바울 같은 일선 기지로 가는 길의 경유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트럭환초에는 각종 함선 및 항공연료시설, 함선의 정박지원 및 계류시설, 물자하역시설, 함선수리 및 정비시설, 군수지원시설, 보급창 등을 총괄하는 거대한 해군병참기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43년, 전황이 불리해진 일본군은 절대방위선을 지정하였는데 여기엔 캐롤라인 제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캐롤라인 제도에서의 핵심 거점은 다름아닌 트럭 환초였다.
그만큼 이곳은 일본군에게 매우 전략적인 위치였으며, 동시에 미군에게는 중요한 공격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트럭섬의 기지는 그 전략적 가치에 상응하는 방어 및 보안조치가 미비했다. 마찬가지로 함대 사령부가 있던 미군의 진주만 기지와 비교해 보면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건설중장비가 미군에 비해 부족하고 인력비율이 높은 일본군 특성상 기지 건설이 주둔기간에 비해 지지부진했던데다, 환초라는 자연적 특성으로 인해 지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전진기지 그 이상으로 확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또한 이를 인지하고 대책을 강구했지만 미군의 공격이 있던 그날까지 효과적인 방안은 마련하지 못했다.

위 아래 당시 트럭 환초의 사진을 보면 함대 사령부가 위치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빼곡하게 있는 밀림이 그대로 보이는 수준이다.

미군이 도쿄 폭격을 위해 마리아나 제도의 밀림을 다 밀어내고 20만여명의 장병이 거주하는 군사도시를 만들어 낸 것과 비교하자면 일본군이 경시한 병참능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다.

사실 미군 수뇌부는 마셜제도 침공과 비슷한 시기에 트럭환초가 있는 캐롤라인 제도를 직접 침공,점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력의 분산과 그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한 니미츠 제독은 지상군을 마셜제도에 집중시키고, 캐롤라인 제도는 항모기동부대의 폭격만으로 비행장을 무력화 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1943년부터 미국의 대규모 고속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존재로 기지가 이미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최대한의 지연전을 위해 인공섬 에텐까지 만들어 추후 예상되는 미군의 공습을 분산시키려 했지만 전력의 열세는 명백했던지라 43년 10월 말부터 전력을 조금씩 빼내기 시작했다. 44년 2월에 트럭환초에서 불과 1,000km 떨어진 마셜제도가 사실상 미군의 손에 들어가자[4] 연합함대 기함 무사시를 비롯해 이때까지 남아있던 주력 함정들을 본토와 팔라우 등지로 급히 후퇴시켰다. 때문에, 공습이 시작된 시점엔 이렇다 할 주력함들은 없었지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대규모 상선단과 몇 척의 군함들, 그리고 몇백 기에 달하는 항공기들이 남아있었다.

4. 공습

파일:external/nozawa22.cocolog-nifty.com/01_3.jpg
공습을 가하는 미 해군의 급강하 폭격기 편대

1944년 2월 16일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미 해군의 최신예 항공모함인 에식스급 항공모함 4척 및 기타 경항공모함들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트럭 제도를 맹공습하기 시작했다.

항공모함이 공습을 맡는 동안 다른 수상함 및 잠수함들은 퇴각로에 배치되어 아가노급 경순양함 1번함 아가노, 카게로급 구축함 마이카제 등을 격침시키기도 했다.

72여기의 F6F 헬캣 전투기들이 기타 급강하폭격기 및 뇌격기들이 안전한 공습을 할 수 있도록 먼저 트럭 제도에 도착했다. 이들을 포착한 50여기의 일본군 전투기들이 나와 상대하여 4기의 헬캣이 격추되었으나, 이미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숙련된 파일럿들을 상대해 낼 수는 없었고, 사실상의 학살극이 벌어졌다.

이들이 제공권을 확보하자, 곧이어 뇌격기들이 밀고 들어와 비행장 등을 폭격하고, 급강하폭격기들이 상선들 및 군함들에게 공격을 가하면서 피해를 입혔다. 16일의 공습은 무려 6차례에 걸쳐 이뤄졌고, 이날 하루동안 엔터프라이즈 하나가 날린 폭탄만 900톤에 이를 정도로 맹공습이 이루어졌다. 이 공습으로 환초 안에 있던 일본 함선들이 대부분 격침되었고 기지의 비행장 및 일본군 전투기 세력들과 대공포대들이 무력화 되었다.

그러나 16일의 공습이 끝나자, 이번에는 일본군이 사이판에서 출격한 다수의 G4M 폭격기들을 이용하여 자정을 막 넘길 때에 미 해군을 공격했다. 비록 공격은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네 척의 에식스급 항공모함 중 하나였던 USS 인트레피드가 어뢰에 피격당해서 11명이 전사하고 이후 수리를 위해 진주만으로 돌아가야 했다.

17일에는 미 함대가 다시 공습을 하여 기지를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 이 중 첫 공습은 17일 새벽에 레이더를 장비한 야간형 TBF 어벤저로 실시했는데, 이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레이더를 이용한 야간폭격의 최초 사례가 되었다. 이후 날이 밝자 2차례 더 공습하여 전날 공습에서 살아남았던 탄약창이나 유류 저장시설 등[5] 각종 지상 시설물들을 파괴한 뒤, 대부분의 미함대는 작전을 끝내고 철수하였다.

5. 결과 및 이후의 여파

트럭 환초가 공습당하자, 대본영은 이미 미군이 대거 손을 뻗친 마셜제도를 비롯한 중태평양에 있는 섬들을 버리기로 결정하였으며, 이후 이들 섬에는 보급 및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후에 미군이 상륙작전을 펼치는데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트럭 환초의 공습으로 일본군은 200여 기가 넘는 항공기를 잃었으며, 순양함 3척, 구축함 4척, 수송선 37척 총 22만톤이 2일만에 격침당하는 피해를 보았다. 22만톤의 격침 전과는 태평양 전쟁 개전이래 이 때까지 단일 전투에서 미군이 거둔 격침 전과 중 최고 기록이었다. 이 공습으로 트럭 환초의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43년 11월부터 계속 공습을 받던 라바울이 이때까지 입은 피해보다도 더 심했다.

한편, 격침된 수송선 중엔 방어를 증강하기 위해 내려오던 일본군 52사단 병력도 있었는데 9천명이 있던 이 선단의 수송병력중 7천명이 해저에 수장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

이 공격에 경악한 일본 해군은 라바울에 있던 항공대를 트럭으로 급히 모았다.(2월 19일) 하지만, 함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은 이 공습을 기점으로 사실상 잃었으며, 항공기지로서의 기능만 겨우 남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3월말부터 미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4월엔 미 함대가 다시 들이닥쳐서 비행장과 항공대가 다시 박살나면서 트럭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트럭뿐만 아니라 캐롤라인 제도 일대가 미군의 항공공격에 난타당해서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고, 이후 트럭을 비롯한 캐롤라인 제도 일대는 종전때까지 일본군의 점령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고립된채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후방기지인 트럭이 말 그대로 털리자 남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던 라바울 또한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항공대가 2월 19일에 트럭으로 철수하면서 항공 엄호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라바울을 기점으로 이뤄지던 수상함을 통한 수송 임무는 2월 20일에 2척의 구축함[6]에 의해 실시된 가부부 지역에 대한 수송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들 구축함이 팔라우로 돌아가면서 이후 종전때까지 라바울에 구축함 이상의 일본해군의 수상함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으며, 라바울 주변의 일본군 점령지들의 보급사정은 더욱 열악해졌다. 그리고, 항공대가 사라지면서 라바울 전체가 연합군의 항공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으며 이후 라바울에 주둔한 일본군에게는 연합군의 공습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로서 라바울은 더 이상 연합군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 채 고립되어 버렸다.

트럭 제도에서의 성공은 라바울의 무력화를 가져옴과 동시에 미군 고속항모전단의 대규모 공격의 시작이었다. 트럭 제도의 공습을 마친 미군은 이후 4월말까지 마리아나 제도와 팔라우,캐롤라인 제도,홀렌디어를 공격하였고 바로 윗 문단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럭을 다시 공격해 확인사살하였다. 같은시기 인도양에 파견된 새러토가 또한 인도네시아 지역을 공격하면서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43년의 뉴조지아 전역에서 일본군의 핵심 거점인 콜룸방가라를 건너뛴 이래, 미군의 기본 전략은 일본군이 강화시킨 거점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그 주변 지역을 장악하고, 그렇게 장악한 지역을 신속하게 자신들의 거점으로 만들어서[7] 일본군이 차지한 거점에 대한 보급선을 끊고, 거점을 말려죽이는 것이었다. 라바울처럼 거점 그 자체의 전투력이 상당한 경우는 고립시킨 상태에서 지속적인 공습으로 무력화 시켰다. 이 전략은 일명 개구리뛰기 또는 우회라는 표현으로 불렸다. 트럭 공습이 있기 전에 미군이 들이닥친 마셜제도 역시 일본군이 방어거점으로 삼은 외곽의 섬은 놔둔채 곧바로 중심부인 과잘린 환초를 점령하여 잽싸게 미 함대의 전진기지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트럭을 비롯한 캐롤라인 제도 역시 이 전략의 대상이 되어 지상군에 의한 직접적인 점령시도 대신에 폭격으로 무력화 되었으며 라바울도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애초에 일본군은 태평양에 방어거점을 강화시켜놓고 항모기동부대를 비롯한 해군함대로 이를 뒷받침하면 미군이 이 거점들을 공격하다가 제풀에 지쳐서 일본과의 강화에 나서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군의 전략은 일본군의 노력을 허사로 돌리고 각종 자원을 무의미하게 소모시킴은 물론이고, 예상을 뛰어 넘는 빠른 속도로 일본군의 방어선 안쪽을 질러 들어감에 따라 방어계획에 혼선을 야기했다. 미군의 공세를 막아야할 일본의 해군함대들은 이미 미 항모기동부대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으며, 트럭 공습은 여기에 쐐기를 박은 꼴이 되었다.

일본 해군은 이러한 미군의 공격 페이스에 밀려 주력 부대들을 피신시키기에 급급했다. 트럭에서 팔라우로 도망갔다가 그마저도 버리고 도망쳐야했다. 그 와중에 고가 미네이치 연합함대사령관이 실종되고 그 부관이 미군에게 생포되면서 작전계획이 연합군에게 탈취당하는 추태를 보였다.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공격에 이어서 4월부터 남태평양 방면에서 맥아더의 공격이 이어지자, 일본 해군은 그때 그때의 대응에 급급해하면서 전력을 계속 잃어갔다.

그리고, 6월에 사이판 전투필리핀 해 해전으로 인해 절대방위선이 무너지고 일본 해군의 주력인 항모부대가 거덜나면서, 전쟁은 일본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 우박을 동반한 폭풍[2] 우박[3] 오늘날의 파푸아뉴기니 일대[4] 마셜제도의 콰잘린 환초가 1944년 2월 초에 미군에게 점령되면서 트럭환초가 미군 정찰기들의 행동권에 들어갔다.[5] 이 작전을 지휘한 미처 제독은 인화성 물질들이 가득한 이 시설들을 먼저 공격하여 화재가 일어나면 후속 공격에 차질을 줄 것으로 예상하여 이 시설들을 제일 마지막 공격 목표로 지정했다.[6] 유즈키, 미나즈키[7] 여기에는 미군 공병들의 능력이 매우 컸다. 일본군의 예상을 저만치 뛰어넘는 속도로 비행장과 항만, 그리고 주변 인프라까지 건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