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18:29:36

모로타이 섬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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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부터 1945년 1월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동부의 모로타이 섬을 둘러싸고 벌어진 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

그동안 뉴기니 섬에서만 치러지던 동인도제도 전역이 뉴기니 섬 바깥에서 치러진 최초의 전투였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 및 남부 필리핀 진공을 위한 전초기지 형성을 위한 중요한 전투였다.

1. 배경
1.1. 일본 제국의 사정1.2. 미국의 사정
2. 전투과정
2.1. 사전 준비2.2. 미군의 상륙 및 섬 점령 (9.15~10.4)2.3. 일본의 반격
3. 이후4. 여담

1. 배경

1.1. 일본 제국의 사정

사실 모로타이 섬 자체는 그다지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1942년 남방작전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접수한 일본군도 모로타이 섬에는 병사 하나 주둔시키지 않았다. 사실 모로타이 섬이 위치한 동인도 제도 동부, 말루쿠 제도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은 뉴기니와 접한 할마헤라 섬말루쿠 섬, 호주와 마주보고 있는 티모르 섬 정도였다. 말루쿠 제도의 부속도서에 불과하고 면적도 훨씬 작은 모로타이 섬[1]은 일본군에겐 크게 의미없는 곳이었다.

사실 이는 1944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최상위 총군은 남방군이고 이 밑에서 동인도제도를 관할하는 2군, 그리고 필리핀을 관할하는 14군이었는데 이들은 뉴기니 전선의 붕괴와 제해권 상실로 동인도 제도와 필리핀이 실질적인 미군의 위협에 노출됨에 따라 동부 동인도 제도에서의 방어력 증강을 계획한다.

이들이 선택한 곳은 할마헤라 섬이었다. 동쪽으로 뉴기니 섬과는 할마헤라 해를 사이에 두고 200k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과의 직선거리가 500km가 안되었다.[2] 남쪽으로는 동인도 제도의 또 다른 요충지 말루쿠 섬과 250km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더구나 섬 자체가 크고 면적이 넓다 보니 비행장을 설치할 곳도 많았으며, 예로부터 동인도제도 동부의 중심지[3]여서 인프라도 있는 편이었다.

할마헤라 방위력 증강을 위해 일본군은 우선 중국전선에 있던 32사단을 차출하여 할마헤라 섬으로 파견했다. 다만 재배치과정에서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전력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살아남은 병력은 할마헤라 섬 도착 후 비행장을 건설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며 예상되는 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 와중에 일부 병력이 모로타이 섬에도 상륙하여 비행장 건설을 시도했으나 배수 문제 및 건설 난이도로 인해 중도 포기하고 철수, 대만 원주민 등으로 구성된 다카사고 의용대 중심으로 약 500여 명의 병력만이 수비를 위해 남아 있었다.

1.2. 미국의 사정

수많은 오판을 보여준 일본군이었지만, 할마헤라가 매우 중요한 거점이며 필리핀 방위에 필수적이라는 판단은 매우 정확했고 미군 역시 일본군이 할마헤라 섬에 전개하여 지상군 및 항공전력을 집중하는 것을 보고 매우 골치아파했다. 대만이 없었다면 미군은 상당한 희생을 치러가며 그 커다란 할마헤라 섬[4]을 오랜 시간을 들여 공략해야 했다.

여기서 주목된 곳이 바로 모로타이 섬이었다.

미군이 보기에 모로타이 섬도 매우 쓸만한 대안이었다. 면적이 작다지만 어디까지나 할마헤라 섬에 비교해서 작은 것이지 충분한 병력을 주둔시킬 수도 있고 비행장 건설도 문제가 없을 만큼 넓은 면적이었다. 애시당초 제주도 정도 사이즈의 섬이다. 그러면서도 일본군 수비대 병력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수준이었으며, 나머지 일본군 주력은 할마헤라 섬에 있었기에 굳이 큰 피해를 무릅쓰며 할마헤라 섬을 공략하느니 모로타이 섬을 공략하고 지키는 것이 희생도 훨씬 적고 시간도 단축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모로타이 섬의 위치도 절묘했다. 모로타이 섬의 위치는 할마헤라 섬의 북부로, 미군이 당시 최우선적으로 두고 있던 필리핀 진공을 위해 최적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는 조속한 필리핀 진공을 위한 거점을 마련코자 했는데 최종적으로 선택된 곳이 민다나오 섬 동쪽 팔라우의 펠렐리우 섬과 앙가우르 섬, 그리고 민다나오 섬 남쪽 말루쿠 제도의 모로타이 섬이었다.

2. 전투과정

2.1. 사전 준비

미 해군과 육군항공대는 약 1달 전부터 남부 필리핀 및 동인도 제도 전역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단행, 일본군 항공세력을 보이는 족족 박살냈다. 당시 미군은 모로타이 섬을 중심으로 반경 640km 내의 항공세력을 일소내지 최대한 타격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부터 시작해서 말루쿠 제도의 암본, 셀레베스, 세람, 그리고 저 멀리 보르네오까지 확인된 모든 항공기지를 폭격하고 요격에 나선 일본기들을 최대한 격추시켜, 상륙 이후 예상되는 반격세력을 최소화시켰다.

그러면서도 목표인 모로타이 섬에는 폭탄 하나 떨어트리지 않았다. 이는 모로타이 섬에는 철저히 관심이 없는 척 함으로서 일본군이 모로타이 방어에 관심갖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고, 실제 이 기만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그 와중에, 남부 필리핀 공습 과정에서 일본군이 덜컥 지레 겁을 먹고 다바오 오보 사건을 일으켰다.(...)

2.2. 미군의 상륙 및 섬 점령 (9.15~10.4)

미군의 상륙은 9월 15일 시작되었다. 이는 펠렐리우 전투와 동시에 이뤄진 것인데, 미군의 상륙에 대응하는 일본군 잔존함대 및 항공세력의 반격 시도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상술했듯 미군의 기만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어, 모로타이 섬에는 최소한의 일본군 병력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전투력이 떨어지는 다카사고 의용대 포함 약 500여 명의 일본군에 맞서, 미군이 투입한 것은 육군 31, 32보병사단이었다.

9월 15일, 해군 함대의 함포 지원사격을 받으며 31사단은 모로타이 섬 최남단 해안가에 상륙했다. 불행히도 이들이 상륙한 해안은 산호초와 진흙탕으로 인해 상륙이 매우 곤란한 해안이었으나 일본군은 워낙 소수다 보니 이들의 상륙을 보고 다 내륙으로 철수해서 상륙 중 중장비 일부를 비전투손실로 잃은 것을 제외하면 큰 어려움은 없었다.

미군은 상륙지점을 발판 삼아 빠르게 모로타이 섬을 확보해 나갔다. 일본군 수비대는 이를 지연시키기 위해 몇 차례 습격에 가까운 공세를 펼쳤으나 워낙 숫적인 차이가 심각하다보니 미군에게 패퇴할 뿐이었다. 10월 4일, 미군은 섬 점령과 전투 종료를 선언했는데 이때까지 미군 전사자는 30명, 일본군 전사자는 300명 이상 추정이었다.

미군은 모로타이 섬 전투를 이때 종결되는 것으로 보고, 이후 이어진 일본군의 일련의 반격작전은 별개의 전투(모로타이 방어전)로 취급한다.

점령과 동시에 미군은 모로타이 섬에 대대적인 기지 건설을 시작했다. 상륙 2달여만에 대규모 비행장들이 지어졌고, 대형 유조선들이 입안할 수 있는 규모의 부두와 대규모 연료저장고가 건설되었다. 그와 동시에 대규모 주둔시설 및 이를 위한 통신, 도로교통 등 기반시설, 병원 등 지원시설이 몇 달만에 완공되었다.

2.3. 일본의 반격

모로타이 상륙 후 미군의 기만에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군은 즉시 반격을 개시했다. 물론 모로타이 섬의 병력들은 반격은커녕 쫓겨다니기 급급했고 상급부대와 통신조차 연결되기 어려웠기에 반격 주체는 할마헤라 섬에 주둔한 일본군이었다.

우선, 9월 15일부터 모로타이 섬을 사정권에 둔 거의 모든 기지에 잔존 일본기들이 총동원되어 모로타이 섬 공습에 나섰다. 물론 아직까지 주변 해역에 있던 미 항모기동부대 함재기들에 의해 대거 요격당해 공습 성과는 미미했으나, 일본은 약 반년에 걸쳐 꽁꽁 숨겨둔 기체들을 꾸준히 보내어 모로타이를 공격했다.

이런 소규모 공습과 별개로, 모로타이 섬으로의 반격 주체는 지상군이었다. 할마헤라 섬에 주둔한 32사단에는 즉시 모로타이 섬 탈환 명령이 떨어졌다. 문제는 결국 바다였다. 할마헤라 섬과 모로타이 섬의 항로는 출발지 및 상륙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60km 내외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거리였다. 해군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32사단은 현지징발한 각종 잡다한 민간선들, 급조한 목선 등을 활용해 야음 및 악천후를 틈타 모로타이 섬에 상륙해야 했고, 반대로 미군은 레이테 섬 전투 등 중요한 작전이 한가득한 상황에서 주력 전투함들을 이 좁은 해역에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소형선들로 꾸준히 순찰을 돌며 일본군의 도해를 막아야 하는 처지였다.

때문에 일본군은 미 해군 함대가 필리핀 등의 작전을 위해 모로타이 주변에서 철수하는 9월 하순 이후부터 슬금슬금 바다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물론 미군도 바보는 아니라서 수십 척의 PT보트를 배치,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다수의 일본군 선박을 격침시키긴 했지만 지켜야 할 해안이 너무 많았고, 미군부터가 모로타이 섬 전체 수비보다는 주요 기지구역의 철저한 방어에 초점을 두어서 일본군은 큰 손실을 입으면서도 어떻게든 상당한 병력을 모로타이 섬에 상륙시킬 수 있었다.

9월 하순에 처음 건너온 부대는 32사단 211연대였다. 211연대장 모리타 요시테루 대좌는 모로타이 섬의 일본군 지휘 전권을 부여받아 기존 수비대 패잔병력, 그리고 이들과 섞여서 도해한 210연대나 기타 부대 병력들의 총괄지휘를 맡았다.

일본군의 상륙은 주로 할마헤라 섬과 직선거리가 짧은 섬의 동남해안 일대로 이뤄졌으며 병력규모가 어느 정도 되자, 이들은 미군의 상륙지점이기도 한 섬 최남단 지역으로의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안그래도 화력이 열세한 일본군은 미군의 잘 준비된 방어진지를 돌파하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미군이 이들을 더 추격하지 않은 이유는, 섬 전체 장악을 하기에 병력이 부족해 기지구역 수비에 우선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오우치 대좌는 잔존 병력 + 계속 도해해오는 병력들을 규합해 어떻게든 미군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 전투만큼은 일본군의 무능 탓이라 하기 어려운게, 전투 자체가 매우 악조건이었다. 애시당초 도해부터가 미군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하는 판이었으니 탄약이나 중화기의 보급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일본군은 어떠한 화력지원도 없이 미군 방어선 돌파를 시도해야 했던 것이다. 32사단 사령부도 이런 현실을 외면하진 않고 어떻게든 보급선을 띄웠으나 미군이 해상경계를 강화하면서 상당수가 침몰했고, 애시당초 현지에서 급조한 선박들 수준으로는 물자의 대량운반도 어려웠다. 해가 바뀐 1945년부터는 그 최소한의 보급조차 거의 두절되었고, 상륙한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보다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더 많이 죽어나갔다.

아울러 그 시점부터 미군도 슬슬 일본군을 소탕해야 한다고 판단, 서서히 섬 내륙쪽으로 진출하며 점령지를 넓히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필리핀 전선으로 차출된 기존 병력들을 대신하여 뉴기니에서 대기 중이던 예비부대인 33사단 136연대가 새로이 배치되었다. 연초에 연달아 일어난 전투에서 미군은 역으로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전선을 분단시켰다. 일본군은 어떻게든 증원 및 보급을 받을 수 있는 해안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미군은 포병부대 지원까지 받아가며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붙였고, 병력도 화력도 모두 열세인 상황에서 사실상 전멸, 와해되었다.

이후로도 일본군 생존 잔여병력이나 추가 증원병력이 미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대규모는 아니었고 소규모 교전 수준에 그쳤다.

3. 이후

4. 여담



[1] 그래도 길이 80km에 면적 1,800㎢로 제주도와 비슷한 규모의 큰 섬이다. 어디까지나 앞에 언급된 다른 섬들에 비해 작은 것이다.[2] 바로 이 점 때문에 할마헤라 섬의 방위를 동인도제도 관할인 2군이 아닌, 필리핀 관할인 14군이 맡게 된다.[3] 그 유명한 테르나테가 바로 할마헤라 섬의 부속도서다. 할마헤라와 테르나테 사이에는 10km의 좁은 해협이 지나고 있으며, 때문에 소축적지도로는 아예 테르나네가 할마헤라 섬에 있는 것처럼 표기되기도 한다.[4] 17,780㎢으로 모로타이 섬의 약 10배에 달했다. 거기에 할마헤라 섬에 인접한 부속 도서들까지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