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9월, 일본군 내에 있었던 해프닝.
1. 배경
1942년 남방작전 이래 필리핀은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1943-44년에 걸친 미국의 대반격으로 이제 미군이 필리핀에 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일본군 역시 잔뜩 긴장하며 필리핀의 각 부대에게 최고의 경계태세를 요구하고 있었다.다바오는 필리핀에서 루손 섬 다음으로 크며, 필리핀 남부 최대 규모이기도 한 민다나오 섬의 최대도시이자 핵심도시로 섬 남부의 다바오 만 깊숙한 곳에 있는 항구 도시인데, 그 중요성으로 인해 1944년 9월 1일부터 미 육군항공대 B-24 폭격기들이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고, 미 해군 TF78은 9일, 10일 이틀에 걸쳐 다바오를 포함한 민다나오 각지의 일본군 시설에 대규모 공습을 가했다.
물론 미군의 필리핀 탈환전은 필리핀의 허리라 할 수 있는 중부지역 레이테 섬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역사를 아는 후대에서나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공권, 제해권 모두 미군이 가진 상태에서 일본군은 미군이 어디로 공격해올지 예측할 수 없어 극도의 긴장상태에 놓였고, 대규모 공습까지 가해지니 현지 부대의 긴장감과 경계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2. 전개
2.1. 보고
9월 10일 새벽 4시경, 민다나오 섬 남단에서 다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사랑가니(Sarangani) 섬#의 일본군 해안초소에서 미군 상륙주정 목격 보고를 올린다. 네 시간 뒤인 오전 8시, 역시 사랑가니 섬의 일본군 상급부대에서는 상급부대에 재차 상륙주정 다수 목격 보고 및 항공정찰 및 공격 명령을 요청한다.당시 필리핀 전역의 일본군 항공세력은 육군의 제4항공군(사령관 도미나가 교지 중장)과 해군의 제1항공함대(사령관 데라오카 긴페이 중장#)[1]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문제는 배경 부분에 상술했듯 바로 직전에 미군의 대공습으로 안 그래도 없는 항공전력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특히 민다나오 섬의 항공전력이 작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다바오의 제1항공함대 사령부는 보다 북쪽인 중부의 세부에 있는 기지에 정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통신 및 거리 문제로 항공정찰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오전 9시 30분, 이번에는 바로 다바오의 해안감시초소에서 미군 상륙의 보고가 올라온다. 미군의 수륙양용전차와 상륙주정들이 해안으로 쇄도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다바오를 포함한 민다나오 섬 남부의 방위를 맡은 해군 32근거지대(사령간 다이야 키요시 소장)는 다시 상급부대에 긴급보고를 올림과 동시에 예하 부대에 시설 및 기밀문서 파기 후 내륙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사령부 역시 철수를 시작했다.
2.2. 반격명령
제1항공함대는 아직 정찰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32근거지대가 적의 전면상륙을 보고하고 시설파기 및 철수를 진행 중이라는 말에 전투대비 명령을 내렸다. 아울러 1항공함대 역시 사령부가 다바오에 있어서 미군의 공격에 노출될 우려가 있었으므로 사령관을 포함한 지휘부의 철수가 시작되었다.상황은 즉시 연합함대 및 대본영에게도 전파되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는 필리핀 방위계획인 첩1호 작전의 발동을 선언하고, 잠수함 및 항공기 세력에 즉각 출동하여 상륙 중인 미군을 요격할 것을 지시했다. 대본영도 긴급회의를 소집하였으나 연합함대와는 달리 미군의 본격적인 침공이 맞는지에 대한 검토, 그리고 최근의 공습으로 타격받은 항공세력의 부족 등의 이유로 첩1호 작전을 바로 발동하진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오후 3시경이 되면서 상황은 급박해져갔다. 상술한 32근거지대, 1항공함대는 물론 다른 남부의 주요 부대 지휘부들이 모두 필사의 철수를 감행하였다. 그 와중에도 해군 26항공전대 지휘부는 자기들은 비행기 편으로 세부 섬까지 런을 치면서, 자기들에게 임시배속되어 있던 육군 비행대에게는 적진 정찰 명령을 내린다.(...) 26항공전대 외에도 각급 단위 부대들에게 미군에 대한 반격 및 상륙군 격멸 명령이 내려졌고 민다나오 섬 및 그 주변의 항공세력, 지상세력들은 반격을 위해 예정된 지역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주요 중추부대들은 내륙으로, 다른 섬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해군으로부터 미군 상륙의 통보를 받은 육군도 난리가 났다. 지상군인 35군은 반격을 위해 각지에 흩어진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육군 항공세력인 제4항공군의 도미나가 교지 중장은 역시 근래의 공습을 피해 재배치 중이던 예하 세력들의 동원을 서둘렀으며 제2비행사단 및 제13비행단에게 반격을 위한 전진배치 명령을 내렸다.[2]
2.3. 허무한 결말
항목명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사건의 본질은 실로 황당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고, 대규모 집단패닉에 빠진 일본군 수뇌부 중에도 이 본질을 꿰뚫은 사람이 몇 명 있었다.해군 제1항공함대 참모 이노구치 리키헤이 중좌는 이미 철수한 사령관의 뒤를 이어 지휘부 소개작업을 진행하면서도, 다바오에 미군이 상륙했다는데, 아무리 지휘소가 해안가는 아니라지만 같은 다바오에 있는 지휘소에서 포성이나 총성 하나 안 들리는게 뭔가 이상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연락이 닿는 데까지 수소문하여 아직 철수하지 않은 비행기들을 통해 항공정찰을 지시한다.
그리고 일선 부대들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비행사들이 있었다. 철수 중이던 201해군항공대의 타마이 아사이치 중좌는 총성, 포성 하나 안들리는데 미군이 쳐들어온거 맞냐?며 철수 명령을 거부하고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단신으로 정찰비행에 나섰다. 실제 미군이 침공한 것이 맞으면 단신 정찰비행은 바로 격추, 전사로 이어질 수 있는 무모한 행위였으나 타마이는 교전 자체를 의심하고 있었고 그 의심은 사실로 드러났다.
다바오 해안, 다바오 만 전체를 철저히 정찰하고 온 타마이는 뒤늦게 온 이노구치 중좌의 명령을 전달받고 바로 철수 중이던 1항공함대 사령부로 달려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자신이 두 눈으로 목격하고 온 상황을 보고한다. 그리고 이노구치 중좌가 그 충격적인 현실을 사령관 및 상급부대에 보고한다.
문제는 필사의 철수작전으로 인해 통신시설 대부분이 파괴된데다가 각 부대 지휘부가 모두 급히 철수 중이어서 소재가 불분명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고받은 제1항공함대 사령관 데라오카 중장은 16시 37분이 되어서야 본래 지휘부로 복귀하며 각 부대에 상황전파를 명령했으나 사실상 그 날 자정까지도 상황전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기껏 상황전파가 되었어도 각 부대들도 황당한 소리를 믿지 못하고 진짜 미군이 없는거 맞는지?를 다시 질의하며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기에 상황을 수습하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3. 결과
안그래도 열악한 일본군의 필리핀 방위력은 이걸로 더 악화되었다.(...)제1항공함대를 비롯하여 다바오 및 민다나오 섬에 근거한 일본군 주요부대 지휘부들은 오보라는 상황을 통보받고 허탈하게 지휘부로 돌아왔지만, 이미 자기들 손으로 기지시설을 다 파괴한 뒤였다.(...) 부대 지휘를 위한 통신보안시설도 관련 장비도 모두 파기되었고 사령부나 주요 시설에 이미 불을 질러서(...) 도저히 작전지휘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제1항공함대는 다바오를 포기하고 마닐라로 옮겨야했으며, 다른 부대들도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해군 지휘부도 그야말로 엄청나게 빡쳐서[3] 바로 군령부의 오쿠미야 마사타케 중좌를 급파하여 제1항공함대 수뇌부를 말 그대로 조졌다. 1항공함대 사령관 데라오카 중장은 취임 2달만에 경질당해서 본국으로 소환되었고[4] 최초 오보를 보고한 32근거지대장 역시 경질당했다.
문제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있지도 않은 미군 상륙부대에 대한 타격을 위해 작전계획상 예정된 결집지로 모인 일본 항공세력들은 안그래도 없는 연료를 엄청 낭비했을 뿐더러, 이들의 움직임은 미군의 감시망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일본군 항공세력들이 허탈해하며 결집지에서 각자의 기지로 돌아갈 때 미군은 재네들 뭔가 하려나 보다. 그 전에 먼저 치자며 9월 12일 이들이 모인 세부 섬의 기지를 들이쳤고 일본군은 여기서만 백여 기의 항공기를 잃었다.(...)
4. 원인
첫 번째 원인은 32근거지대 해안 초소들의 오인 보고에 있다. 문제는 오인보고를 한 초소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 군령부는 이를 조사하면서 다바오 만 내에서의 파도가 치다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마치 그 모습이 상륙주정처럼 보일 만 했고, 하필 주변에 민간 어선 등이 있었고, 바로 직전까지 대규모 공습을 받고 적 상륙에 대비하라는 경계명령까지 내려지면서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인 것이 안 좋은 의미의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보았다. 그리고 검증된 바는 없지만 문제의 제1항공함대 참모들은 미군 상륙 보고를 받은 직후에 굉음을 들어서 이를 미군의 상륙지원용 함포 사격 소리로 오인했다고 변명했다. 이를 증언한 사람도 역시 복수인데, 아마 번개 소리일 거라고.(...)사실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인 상태에서 위에서 설명한 대로 여러 우연한 조건들이 겹치니 현장에서 오판하고 보고를 할 수는 있다. 문제는 지휘부의 태도인데, 지휘부는 제대로 상황 파악을 안하고 일선 부대의 보고만을 믿고 바로 지휘부를 파기하고 내륙으로 철수하는 추태를 부렸다. 여러 악조건으로 항공정찰이 어렵더라도, 미군이 자기들이 있는 도시에 상륙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으면 참모나 전령이라도 현장에 보내서 확인을 해야 정상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타마이 중좌의 예처럼 보듯, 민다나오 섬 내의 항공세력들로도 충분히 항공정찰이 가능했는데 억지로 세부 섬의 전력에게 항공정찰을 지시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명백히 사령관인 데라오카 긴페이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양반 입장에서 변명거리가 있다면 전임 사령관 카쿠카 카쿠지가 8월 2일 티니안 섬 전투에서 전사한 후, 취임한 지 1달도 안되어 부대 제반사정에 대해 잘 몰랐다는 점은 있다.
결국 일본군 입장에선, 온갖 악조건 속에서 자기들의 실수까지 겹쳐서 일어난 집단 히스테리였던 것이다.
5. 여담
- 사건의 배경이 된 민다나오 공습의 목적은 추후의 레이테 섬 상륙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사건 5일 뒤인 9월 15일에 시작된 모로타이 섬 전투 때문이기도 하다. 모로타이 섬은 다바오에서 직선거리로 600km밖에 떨어지지 않았기에 모로타이 섬에 상륙하려는 미군의 배후를 민다나오 섬의 일본군 항공세력이 공격할 우려가 있어 사전에 제압해야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일본군은 미군의 모로타이 섬 공격 계획을 몰랐고, 민다나오 섬 남부 해역에서 활동 중인 미 함대의 목적을 필리핀(민다나오 섬) 상륙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다바오 오보 사건의 다른 원인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 이 사건과는 별개로, 어쨌든 다바오는 남부 필리핀 전역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해가 바뀌어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미군의 공격을 받아 점령되었다. 오보 사건의 책임을 묻고 지휘부가 경질된 것과는 별개로 32근거지대를 포함하여 다바오 방위 부대들은 계속 다바오에 주둔하고 있다가 미군과 전투를 치렀고 대부분이 전멸당했다.
[1] 본래 항공모함 기동부대 소속 함재기 세력이었으나 항모가 죄 격침되거나 살아남았어도 기름이 없어(...) 작전이 어려워지자 육상기지 운용 전력으로 재편되었다.[2] 후대에 적전도주와 수많은 카미카제 명령 남발로 악명을 떨친 도미나가지만, 이때는 아직 최초의 카미카제가 시작되기도 전이어서 의외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지휘를 했다.[3] 두 가지 측면인데, 하나는 당연히 있지도 않은 적 때문에 남부 필리핀 방어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모든 일을 초래한게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육군에게 신나게 비웃음당했기 때문(...)[4] 나중에 사람이 없었는지 본토결전용 카미카제 부대인 제3항공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