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멕시코 합중국 제51대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 델리오[1] Lázaro Cárdenas del Río | |
<colbgcolor=#006847> 출생 | <colcolor=#000000,#e5e5e5><colbgcolor=#fff,#191919>1895년 5월 21일 |
멕시코 미초아칸 주 히킬판 | |
사망 | 1970년 10월 19일 (향년 75세)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재임 기간 | 제51대 대통령 |
1934년 12월 1일 ~ 1940년 11월 30일 | |
직업 | 군인, 정치인 |
국적 | 멕시코 |
정당 | |
경력 | 미초아칸 주지사 제도혁명당 대표 국방장관 제51대 멕시코 대통령 (1934 - 1940) |
[clearfix]
1. 개요
멕시코의 군인 및 정치인. 멕시코 제51대 대통령이었다.2. 생애
2.1. 멕시코 혁명
미초아칸 주 출신이며 멕시코 혁명 때 알바로 오브레곤 계열 혁명군에 가담해서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정권에 맞서 싸웠다. 우에르타가 몰락하고 혁명군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오브레곤 진영과 판초 비야&에밀리아노 사파타 진영으로 갈라졌을 때도 나중에 멕시코 대통령이 될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와 함께 오브레곤 세력을 지지했다.혁명이 끝나자 카르데나스는 군대에 남아서 우에르타 잔당 및 가톨릭 반란군[2]을 진압하다가 카예스가 만든 국가혁명당(PNR)에 입당했다.
2.2. 멕시코 대통령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1928년에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후 여전히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알바로 오브레곤은 헌법을 개정하여 전직 대통령의 재선을 가능하게 만들고 재선에 도전해 당선되었지만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톨릭 광신도 호세 토랄의 손에 암살당하며 권력은 다시 카예스의 손으로 넘어왔고 헌법 개정도 없던 일이 되었다. 이후 카예스는 헌법을 개정하는 대신 자신이 다루기 쉽다고 판단한 후보를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비선실세 비슷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막시마토(Maximato)라는 기형적인 체제를 형성했다.카르데나스는 1934년 카예스의 3번째 바지사장 아벨라르도 L. 로드리게스가 퇴임한 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당연히 카예스는 카르데나스 또한 바지사장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카르데나스는 카예스가 생각한 것처럼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어서 토지개혁 및 노동자 처우 개선, 지방 카우디요 권력 축소와 같은 개혁을 추진했고 카예스파와의 내부 정쟁에서도 승리하여 카예스는 미국으로
남은 재임 기간에 카르데나스는 당명을 멕시코 혁명당(PRM)으로 바꾸고 의무교육 확대, 석유 국유화[4], 군인 처우 개선, 집단농장인 에히도에 힘을 실어주는 토지개혁과 같은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2.3. 대통령 퇴임 이후
1940년에 동료인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우파 후보인 후안 안드레우 알마산(Juan Andreu Almazán)을 꺾고 당선되자 카마초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은퇴 후에도 제도혁명당의 조언자 역할을 했고, 미국의 쿠바 정부 전복 시도와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도 벌였다.1970년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3. 평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멕시코의 산업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멕시코가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게 만든 기반을 쌓아올렸다는 평을 듣고 있다. 포퓰리즘의 전형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호불호가 갈리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이나 브라질의 바르가스와는 달리 멕시코가 부침없이 상당히 장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덕택에 그 정도는 약한 편이고 멕시코에서 존경받는 대통령 순위권에 꼭 드는 인물이다.그러나 그는 말년에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과 이에 관련한 문제점을 인정하였고,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개막식을 하루 앞두고 벌어진 틀라텔롤코 학살사건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콰우테목 카르데나스는 우경화되어가는 제도혁명당에 반발하여 여러 좌파정당들과 연합하면서 민주혁명당을 창당했고[5]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부정선거 때문에 초반개표에서 앞섰음에도 제도혁명당 후보인 카를로스 살리나스에게 낙선했고, 이후로도 1994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서 대선 출마를 했지만 결국 3위로 낙선당하며, 무관의 세월을 보내야했다.[6] 그래도 멕시코 좌파의 대부로 많은 존경을 받는 편이며 오브라도르에게 선배이자 은사격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AMLO의 승리를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그리워하는 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임자 알바로 오브레곤과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보수 가톨릭 반군(크리스테로)를 사면하는 등 정치적으로 필요할 땐 유연함도 보였으나 근본적으로 멕시코 혁명 시절 겪은 급진주의적 좌파 국제주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해서 스페인 내전 당시 열강도 아니었던 멕시코의 국력으로, 온갖 생색과 깽판을 쳤던 소련과 달리 비교적 순수한 조건으로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하기도 했다. 중과부적으로 공화국이 패전한 이후 전 세계로 좌파, 민주주의자, 세속주의자 스페인 망명객들이 퍼지자 이들을 많이 받아들여 전후 영화, 문학 등 멕시코 문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4. 그의 이름을 딴 것
4.1. 지명
- 라사로 카르데나스(미초아칸): 미초아칸 주 동남부에 있는 해안도시.
- 라사로 카르데나스(킨타나 로오): 킨타나 로오 주 서북부에 있는 광역권. 홀복스가 이쪽에 속해있다.
- 라사로 카르데나스(틀락스칼라): 틀락스칼라 주에 있는 광역권.
4.2. 교통
5. 출처
참고자료: 백종국 저 《멕시코 혁명사》6. 대중매체
Hearts of Iron IV에서는 멕시코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비동맹주의 지도자로 등장하지만 중점에 따라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지도자로 만들 수도 있다. 역사적 AI로는 멕시코가 세속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제도적 혁명' 중점을 달성해 민주주의 지도자가 되는 편.유명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플루타르코 카예스와 함께 전체주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카예스보다 온건하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멕시코 혁명 당시 미국의 만행에 분노하면서도 소련의 요구대로 미국에 코카인을 푸는것에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양심적인 사람으로 나온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서 적도록 하고 있다.[2] 대통령에 취임한 오브레곤과 카예스는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 때 가톨릭 반란군과 멕시코 정부군의 전쟁을 크리스테로 전쟁이라고 부른다.[3] 이후 카예스는 멕시코의 석유 국유화로 미국의 심기가 불편해지자 미국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탈환하려 했다. 하지만 카예스가 파시스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본 미국 정부는 거리낌없이 카르데나스 정권을 승인했다. 카예스는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집권기에 멕시코로 돌아왔다.[4] 이 때문에 카우디요 중 한 명이었던 사투르니노 세디요 마르티네스(Saturnino Cedillo Martínez)가 카르데나스 정부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에 성공했다. 세디요는 카르데나스 초기에 농업장관을 맡았으나, 카르데나스 방식의 토지 개혁에 반대했고 사병인 금빛 셔츠단도 거느렸기 때문에 정적으로 떠올랐으며, 토지 개혁 과정에서 근거지인 산루이스포토시 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살되었다.[5] 2014년에 탈당했다. 멕시코 좌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라고 하면 대표적인 인물이 콰우테목 카르네나스와 로페스 오브라도르인데 둘다 창립멤버면서 탈당해버렸으니 구심점이 사라진 민주혁명당은 이후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 AMLO는 국가재건운동을 창당, 그쪽으로 들어갔으나 콰우테목은 고령으로 인하여 그대로 정계에서 은퇴해버렸다. 다만 콰우테목의 아들인 라사로 카르데나스 바텔은 국가재건운동에 입당하였으며, 훗날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파르도 정권 하의 대통령실장이 되었다. 그의 소임은 AMLO와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파르도가 나눠서 하고 있는 편.[6] 그나마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멕시코 시티 시장을 지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