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07 23:28:43

비센테 게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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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Vicente_Guerrero.png
본명 비센테 라몬 게레로 살다냐
Vicente Ramón Guerrero Saldaña
출생 1782년 8월 10일
누에바에스파냐 틱슬라
(現 멕시코 게레로 틱슬라)
사망 1831년 2월 14일 (향년 48세)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 오아하카 쿠일라판
(現 멕시코 오아하카 쿠일라판데게레로)
재임기간 공동 국가원수
1823년 4월 1일 ~ 1824년 10월 10일
제2대 대통령
1829년 4월 1일 ~ 1829년 12월 17일
서명
파일:비센테 게레로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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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1426><colcolor=#fff> 배우자 마리아 과달루페 에르난데스
자녀 2명
종교 가톨릭
정당 [[자유당(멕시코)|
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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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복무 멕시코 육군
1810년 ~ 1821년
최종 계급 장성급 장교
참전 경력 멕시코 독립전쟁 }}}}}}}}}

1. 개요2. 생애

1. 개요

멕시코독립운동가, 군인이자 제2대 대통령. 멕시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다.

2. 생애

비센테 게레로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후안 페드로 게레로는 노새 운송 사업을 하였고, 이로 인해 게레로는 멕시코 전역을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총포 제작자이기도 해서 게레로는 칼, 소총, 대포와 같은 무기를 다루고, 유지하고, 수리하고, 만드는 법을 배웠다. 젊은 시절 습득한 기술은 독립 전쟁 당시 왕당파와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게레로는 보병과 기병 모두에서 검, 사브르, 권총, 소총, 총검을 능숙하게 다룰 뿐만 아니라, 창, 밧줄, 마체테 등 남부 반군의 손에 들어가면 왕당파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무기들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독립 전쟁이 발발한 후, 그는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와 이시도로 몬테스 데 오카의 군대가 테크판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고 , 그곳에서 운동에 참여하도록 설득되었다. 1810년 에르 메네질도 갈레아나의 직접 지휘 하에 군 경력을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의 사나운 성격, 대담함, 용기 덕분에 이 듀오는 맹렬한 기병 돌격과 맹렬한 보병 돌격을 지휘하고 참여한 후 나중에 리더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게레로는 1812년 2월 이스카르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 1812년 11월 반군이 오아하카를 점령했을 때 중령 계급에 도달했다. 1815년 틀라파에서 원주민들에게 한 연설에서 게레로는 스페인으로부터 원래 인정받지 못했던 원주민을 위한 더 큰 자유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원주민에게 시민권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독립군 지도자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처형되자 세력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결국 1815년 초, 누에바에스파냐의 부왕인 펠릭스 마리아 칼레하는 수많은 군대와 가혹한 탄압 조치를 통해 운동의 요람인 과나후아토에서 반란을 진압했다고 자랑했고, 이들이 항복하면 사면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로 인해 많은 독립 지도자들이 항복했지만, 비센테 게레로는 사면을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였다. 1818년 게레로는 아우힐라 회의에서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820년 하위 회의에서 그의 권한이 재확인되었다. 그는 왕당파의 동요를 틈타 남부 왕당파 지휘관 가브리엘 데 아르미호에게 독립운동에 동참하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부지휘관 카를로스 모야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지만 역시 거부되었다. 아르미호는 게레로를 제압하지 못해 사임했고, 1820년 11월 9일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남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투르비데는 표면적으로는 왕당파였지만, 실제로는 멕시코 독립 후 스페인 왕족이 통치하는 군주제를 세우려는 라 프로페사 음모단과 연계되어 있었다. 게레로는 페드로 아센시오와 함께 현재 게레로 주 지역의 산악지대에서 저항을 이어갔으며, 이투르비데가 이끄는 왕당파 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1820년 12월부터 1821년 1월 사이 게레로군은 사포테펙과 토토말로야, ‘악마의 동굴’ 전투 등에서 연속 승리를 거두며 왕당파군을 괴멸시켰다. 이투르비데는 게레로를 제압할 수 없음을 깨닫고 협상을 제안했다. 그는 스페인 왕족을 멕시코의 군주로 세우자는 조건으로 게레로에게 동맹과 경제적 지원을 제시했으나, 게레로는 이를 거부하고 자유·정의·자치의 원칙 아래 ‘조국의 아들들’이 통치하는 독립 정부를 제안했다. 그는 스페인 정부의 불의와 식민지민에 대한 차별을 비판하며, 멕시코인이 스스로 통치할 힘이 있음을 강조했다. 설득 끝에 이투르비데는 게레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1821년 2월 10일 ‘아카템판의 포옹’으로 동맹이 성립되었다. 2월 24일 ‘이과라 계획’이 발표되어 양측 군이 통합, ‘삼보군’이 결성되었으며, 9월 27일 이투르비데가 이끄는 독립군이 멕시코시티에 입성함으로써 멕시코 독립전쟁이 종결되었다.

멕시코 독립 후 비센테 게레로는 남부 방면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과달루페 훈장을 받았다. 그는 전 동지인 에레라, 킨타나 로오, 브라보 등과 함께 이투르비데 제국 정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으나, 1822년 산타 안나가 공화국 수립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게레로와 브라보를 의심하며 감시했고, 게레로는 비반코 후작이 자신의 지휘권을 빼앗으려 하자 브라보와 함께 멕시코시티를 탈출했다. 이후 부상을 입었지만 제국 붕괴 후 과달루페 빅토리아 정부의 임시행정부 보조위원으로 참여했고, 1824년 공화국 수립 후 요크파 프리메이슨의 일원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스페인인 추방정책에 반대하며 일부를 보호했으나, 1829년 스페인의 재정복 음모가 드러나자 지지를 철회했다. 1828년 브라보의 반란을 진압한 후, 요크파의 지원을 받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평등과 자유의 상징으로 중·하층민의 지지를 받았고, 반면 상대 후보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는 귀족·보수층의 지지를 받았다. 미국 공사 포인셋은 게레로를 정식 교육은 부족하지만 결단력과 용기가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 그러나 당시 헌법에 따라 주의회 대표 36명이 대통령을 선출했으며, 페드라사가 11표로 당선되고 게레로는 9표에 그쳤다. 이는 부정선거 의혹과 민심 왜곡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산타 안나로렌소 데 사발라가 주도한 무장봉기로 페드라사가 축출되었다. 의회는 민의에 어긋난 선거를 무효화하고 게레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그는 1829년 4월 1일 취임해 민중 감시 아래 주권을 존중하는 정부를 약속했다.

비센테 게레로의 대통령 임기는 약 8개월 반으로 짧았지만, 그는 ‘민중의 후보’로서 공교육 제도와 무상교육 계획을 추진하고, 농민에게 유리한 토지 개혁과 산업 발전, 실업 해소, 전쟁 부상자 복지 시설 설립, 국내외 무역 활성화 등 진보적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자유국가는 예술·산업·과학·상업을 보호하며, 미덕과 공로만을 보상한다”고 주장하며 시민적 덕성과 경제적 자립을 강조했다. 일부에서 그가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평가했으나, 실제로 그는 법적·민간 정부의 권위를 옹호하고 군국주의를 거부한 인물이었다. 재임 중 그는 종교적 관용, 직접 선거 강화, 연방주의 수호, 민주주의 발전, 군·성직자 특권 폐지, 종교재판소 재산 매각, 망명자 사면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 정책은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루카스 알라만이 이끄는 보수 세력인 ‘선량한 사람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귀족·성직자·지주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며, 민중을 배제한 통치를 지향했다. 게레로의 관용은 보수 세력의 성장을 허용했고, 일부 요크파 동지들도 미국 공사 포인셋의 영향력에 반대하면서 내분이 심화되었다. 재무장관 로렌소 데 사발라의 과도한 조세 개혁은 주 정부의 반발을 샀고, 국가 재정은 이미 파산 상태였으며, 게레로는 외채와 군비 부족 속에서 스페인의 재침공 위협에 대비해야 했다. 1829년 8월 스페인군이 탐피코에 침공했으나, 산타 안나와 미에르 이 테란의 지휘 아래 멕시코군이 이를 격퇴했다. 게레로 정부는 이에 대응해 쿠바 침공 계획까지 검토했지만, 그는 인도주의적 이유로 실행을 중단했다. 같은 해 9월 15일 그는 미겔 이달고의 유지를 이어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으며, 이는 미주 대륙에서 가장 선구적인 인권 조치 중 하나였다. 이는 미국 남부의 노예제 옹호 세력과 텍사스 개척민의 반감을 샀지만, 당시 텍사스 지도자 스티븐 오스틴은 게레로 정부를 “가장 관대한 정권”이라 칭송했다. 그러나 경제 위기와 정치 분열 속에서 게레로는 국방 강화를 위해 의회의 특별 권한을 부여받았고, 사발라의 조세 정책으로 중앙집권 논란이 커졌다. 이를 구실로 부통령 부스타만테가 1829년 12월 할라파 계획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고, 언론과 일부 자유주의자들까지 이에 동조했다. 게레로가 직접 진압에 나서자 수도에서는 그의 대리 대통령 보카네그라가 사임 압박을 받았고, 의회는 게레로를 ‘통치 불능’으로 선언해 부스타만테가 권력을 장악했다. 게레로는 남부로 내려가 다시 무장했으며, 틱스틀라미초아칸, 현 게레로 주 일대에서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남부전쟁’을 이끌었다.

1831년 1월 15일, 아카풀코의 틀라코파노차 해변에서 비센테 게레로는 제노바 출신 용병 프란시스코 피칼루가의 초대를 받아 그의 배 콜롬보 호에 올랐다가 배신당해 체포되었다. 이는 부통령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의 지시에 따라 전쟁부 장관 호세 안토니오 파시오가 5만 페소를 주고 꾸민 음모였다. 게레로는 대통령으로서 헌법상 대법원만이 재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인 전시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고 1831년 2월 14일 오악사카의 쿠일라팜에서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