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멕시코 합중국 제39대 대통령 호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마르케스 José Victoriano Huerta Márquez | |
<colbgcolor=#006847> 출생 | <colcolor=#000000,#e5e5e5><colbgcolor=#fff,#191919>1850년 12월 22일[1] |
멕시코 할리스코 주 코요틀란 | |
사망 | 1916년 1월 13일 (향년 65세) |
미국 텍사스 주 엘패소 | |
재임 기간 | 제39대 대통령 |
1913년 2월 19일 ~ 1914년 7월 15일 | |
직업 | 군인, 정치인 |
국적 | [[멕시코| ]][[틀:국기| ]][[틀:국기| ]]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경력 | 내무부 장관 제39대 멕시코 대통령 (1913 - 1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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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의 제39대 대통령.2. 생애
포르피리오 디아스처럼 인디오와 크리오요의 혼혈이며, 경력도 디아스를 닯아서 일찍이 사관생도부터 군생활을 시작해 멕시코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는 육군 소장까지 진급했다. 이 때 멕시코는 디아스가 퇴진하면서 대통령이 된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전후 처리에 실패하면서 혼란스러웠는데, 우에르타는 반란을 일으킨 혁명군 출신 군벌인 파스쿠알 오로스코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다.[2]1913년 2월에 마누엘 몬드라곤[3]과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우에르타는 마데로에게 진압 명령을 받자 몬드라곤과 내통하고 쿠데타를 도운 뒤 마데로를 암살했는데 이 사건이 비극의 열흘(La Decena Trágica)이다. 이후 우에르타는 징검다리로 세운 임시 대통령인 페드로 라스쿠라인[4]에게 승계받는 방법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이 된 우에르타는 디아스 시대로의 회귀를 국정 운영 방침으로 잡고, 전국에 퍼진 반란군을 진압하겠다는 명목으로 강제 징집령을 내렸으나 이 정책들로 인해 민심을 잃게 되었다. 이에 우에르타는 나름대로 유화 정책을 펴기도 하고, 사파타에게 공직을 제안하며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사파타는 우에르타의 회유 시도에 권력에 눈이 멀어 주인을 죽인 놈이라고 비웃으며 우에르타를 거부했다.
국외 정세도 우에르타의 편이 아니었다. 우에르타는 취임 후 영국과 독일의 승인을 받았지만, 미국은 승인을 미루었다. 그러던 중 1914년에 미 해군 함정인 돌핀 함이 연료를 긴급히 보충하러 탐피코 항에 입항했다가 멕시코 경찰에 억류된 탐피코 사태가 일어나자, 미국은 베라크루스를 일시 점령했고 우에르타를 지지하던 헨리 윌슨 주멕대사도 본국으로 송환했다.
결국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를 맹주로 결집한 혁명군이 총공격을 개시하자, 우에르타는 스페인으로 도주한 뒤 독일의 지원을 받아 복귀를 노렸으나 미국에게 멕시코 입국이 거부되자 엘패소에 발이 묶인 채 1916년에 사망했다.
3. 참고자료
- 백종국 저, <멕시코 혁명사> (2000년). 한길사
- 엔리케 크라우세 저, 이성형 역, <멕시코 혁명과 영웅들> (2005년), 까치.
- 이순명 저. <멕시코,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 (2013년). 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