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20894><colcolor=#ffffff> 로베르 조르주 니벨 Robert Georges Nivell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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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6년 10월 15일 |
프랑스 제국 툴레 | |
사망 | 1924년 3월 22일 (향년 67세) |
프랑스 공화국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군인 |
복무 | 프랑스군 (1878~1921) |
최종 계급 | 소장 |
참전 |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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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후반기 프랑스 육군의 장군.2. 생애
일선의 하급 지휘관으로서는 유능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알제리 및 튀니지 등의 북아프리카에서 장교 생활을 시작해 의화단의 난 당시 청나라로 파병을 간 프랑스 군인들 중 한 명이었다.그러나 대규모의 작전부대를 지휘해야 하는 고위 장성의 직위에 오르면서, 점차 그의 부족함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니벨은 대전 초기인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 육군 제45사단의 포병부대를 자유자재로 이끌어 독일군의 폰 클룩 장군이 이끄는 제1군을 성공적으로 격퇴시켰으며, 이로 인해 대포병 사격과 야간사격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1916년에는 제2군 사령관으로 진급하여 베르됭 전투 후반기에 정교한 보-포 합동을 통한 이동탄막 전술을 선보이며 프랑스군의 역습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1917년에 벌어진 니벨 공세에서 잘못된 지휘로 프랑스군 참패의 원흉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독일군은 45개 예비 사단을 전부 끌어내야 했는데, 독일 측 기록에 따르면 16만 7,000명의 사상자와 3만 7,000명의 실종자[1]를 내어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18만 7,000명의 희생자를 낸 프랑스군은 상당히 선전한 편이라며 니벨를 옹호하는 의견이 일부 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군의 공세를 돕기 위해 조공에 나섰던 영국군에서 13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을 고려하면, 이는 독일군보다 약 2배 많은 병력[2]을 동원하고도 적보다 약 2배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비극이었다. 또 기껏 점령한 지역들은 독일군이 고의로 비워놓았던 곳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절대로 선전했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게다가 니벨 자신이 입안한 공세를 실행하기 위해 작전계획을 대놓고 홍보하며 다녔는데, 이는 프랑스군 장병들의 기대감을 지나치게 부풀려놓았고, 독일군은 손쉽게 정보를 얻어서 니벨의 작전에 대해 단단히 대비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공세가 실패하여 지나친 기대에 대비되는 참패를 겪게 된 프랑스군에선 대규모의 항명 사태가 벌어졌으며, 이를 수습한 필리프 페탱이 아니었다면 프랑스 제3공화국은 비슷한 시기의 러시아 제국처럼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총사령관에 페탱이 임명되고 나서도 니벨은 한동안 자기 사령부에서 꼼짝하지 않다가, 이후 북아프리카령 식민지군 사령관이라는 한직으로 조용히 전출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인 1921년까지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가 개신교도인 영국인이라 니벨 본인도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신도였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반가톨릭적인 정서가 강했던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출세하는데 있어 이 종교적인 요인이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