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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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루이스 부뉴엘 Luis Buñuel | |
본명 | 루이스 부뉴엘 포르톨레스 Luis Buñuel Portolés |
출생 | 1900년 2월 22일 |
스페인 칼란다 | |
사망 | 1983년 7월 29일 (향년 83세)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국적 | 스페인 (1949년 포기) [[멕시코| ]][[틀:국기| ]][[틀:국기| ]] (1949~) |
직업 | 각본가, 감독, 프로듀서 |
데뷔 | 1928년, 〈어셔가의 몰락〉[1] |
활동 | 1929년 ~ 1977년 |
학력 | 마드리드 대학교 |
가족 | 배우자 (1934년 결혼) 자녀 2명[2] |
종교 | 무종교(무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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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초현실주의는 유머의 힘으로 태어났고 유머의 힘으로 해방을 꿈꾼다. ''
''지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은 루이스 부뉴엘입니다.”
앨프리드 히치콕
앨프리드 히치콕
스페인/멕시코의 영화감독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명으로 불리는 거장 중의 거장이다. 초현실주의 사조를 이끌었으며, 사회 풍자적인 내용과 정렬된 서사를 파괴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동원해 영화적 가능성을 확장시킨 작품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라틴 영화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카를로스 사우라, 훌리오 메뎀, 심지어 기예르모 델 토로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지대하다.
특히 부르주아와 가톨릭에 대한 반발감이 엄청나 커리어 대부분이 신성모독적이며 소송방지급 블랙 유머로 가득한 편이다. 황금시대와 제 2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비리디아나는 신성 모독적인 내용으로 인해 스캔들로 번졌을 정도. 이러한 부뉴엘의 대담함은 표현의 자유를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에선 과거에 루이스 부뉘엘, 루이 부뉘엘로 적었으나 전부 잘못된 표기로,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루이스 부뉴엘에 가깝다.
2. 생애
1900년 2월 22일 아라곤(Aragon) 지방의 칼란다(Calanda)라는 시골[3]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동네 유일한 여관을 경영하던 집안이고, 아버지는 쿠바 아바나에서 철물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좋은 집안의 아들이었다. [4] 지방의 수도 사라고사에 위치한 예수회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자서전 '마지막 숨결'에 따르면[5] 매우 엄격한 종교교육을 행하고 중세 라틴어를 사용했을 정도로 보수적이어서 14살 때 신앙에 회의감을 느꼈고 오히려 거부감만 많아졌다고 한다. 결국 기말 시험 도중 감독관에서 모욕당하고 쫓겨난 뒤 예수회 학교로 돌아가는 걸 거부했고 [6] 지역 공립학교로 편입해 학업을 마쳤다. 성과 신성모독에 눈을 뜬 것도 이 시기이며(...) 특히 인간의 욕망을 종교가 어떻게 억압하고 남은 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강렬하게 체험한 이 유년기의 경험은 훗날 창작력의 원천으로 평생 자리잡는다.1917년부터 1925년까지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대학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동안 살바도르 달리,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비롯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예술/인문학적 감수성을 기르게 된다. 졸업 후 파리로 건너가 프리츠 랑의 운명(Der Mude Tod, 1921)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장 엡스탱 감독이 에드거 앨런 포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어셔가의 몰락(28년작)의 조감독으로 참여했으나 의견 차이로 중간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7] 이후 고향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제작비를 받아 달리와 함께 꾸었던 꿈을 토대로 안달루시아의 개를 완성해 대중에 선보였고, 초현실주의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듬해 드 누아유 자작(Viscount of Noailles)으로부터 지원받은 5백만 프랑으로 황금시대를 연출, 11월 28일 '스튜디오28' 극장에서 상영됐으나 우파 지식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스크린에 잉크통과 연막탄을 던지는 등 수모를 겪었다.[8]
1933년에는 '아신'이라는 가명의 친구가 복권에 당첨되어 받은 상금으로 우르데스 마을(Las Hurdes)의 빈민들의 시궁창스러운 일상을 담아낸 빵 없는 세상을 개봉해 국가와 종교가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는 문구로 크레딧을 장식해서 프랑코파를 비롯한 보수층들의 심기를 건드려 상영금지를 당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승리를 거두자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시의 MoMA에서 스페인어 더빙 편집 등 유성영화 기술을 익히지만 미국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막스 에른스트의 증언에 따르면 1946년 하루는 박물관 감독관들이 그에게 와서 정통 가톨릭을 부정하는 영화인 황금시대를 살바도르 달리와 공동으로 각본을 집필한 것이 사실이며 무신론적이고 불경한 작품이 맞냐고 물었고, 부뉴엘은 무신론적인 작품이 맞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감독관들은 사직을 요구했고, 며칠 후 해고된 부뉴엘은 막스와 함께 달리가 살고 있는 5번가로 찾아가 뺨을 때리고 그대로 나온 뒤 인연을 끊게 되었다고 한다.[9] 달리가 자서전에 부뉴엘을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해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는 사실 와전된 것이다. [10] 최종적으로 멕시코에 정착해 시민권을 얻게 되고 1947년부터 1965년까지 21편의 영화를 감독하였으며[11] 프랑스로 넘어가 세브린느를 포함한 후기 명작들에서도 스페인 혹은 라틴 아메리카와 관련된 문화 요소를 곳곳에 삽입했다. 1983년 7월 29일 멕시코 시티에서 눈을 감는다. 부인 말에 따르면 사인은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간경화증이었다고 한다. 장례식은 친지들과 옥타비오 파스 같은 지인들끼리 조용히 치렀다.
도발적인 작풍과는 달리 아내 잔 루카 [12]하고는 50년동안 해로했다. [13] 아들 후안 루이스 역시 감독이 되었으나, 별 반향을 얻지 못했다. [14] 후안 전 아내도 감독이자 극작가였고, 손자 디에고 부뉴엘 [15]도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면서 3대가 영화인 가족이 되었다.
3. 특징
초현실주의로 이름을 알린 만큼 흔히 전형적인 논리적 관습을 전복하고 권력 및 상류층들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를 조롱하고 관음증을 특유의 도발로 빗나가게 만든다. 당장 데뷔작부터 개는 한 마리도 씬에 담겨있지 않고 "옛날 옛적에" "8년 후" "봄이 되어" 같은 자막 카드가 뒤죽박죽 섞여 관객들이 서사 자체를 이해하는 것을 비웃으며, 황금시대의 마지막 시퀀스는 사드 후작의 소돔의 120일의 결말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블랑지 공작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형상화해 당시 프랑스의 우익, 반유태인 단체가 난동을 피우기까지 했다. 또한 트리스타나에서 극 중 주연인 카트린 드뇌브가 하인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그녀가 냉소를 머금고 있는 표정만을 비추어 관객들의 욕망을 걷어차 버린다.또한 미겔 데 세르반테스라든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라틴 문화 특유의 세속적이고 뻔뻔한 상상력을 펼치기로 유명했다. 태연하게 비현실적인 상황을 들이대면서 대상을 조롱하는 부뉴엘의 유머는 판타지 장르와 현대 부조리 코미디와 블랙 코미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뉴엘 본인이 밝히길 에른스트 루비치, 앨프리드 히치콕,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마르크스, 프리츠 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루비치에게서는 코미디를, 히치콕에서는 시선의 영향을,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랑에게서는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무신론 뿐만이 아니라 반교권주의, 세속주의적 성향이 강한 편이라. 제도권 종교에 냉소적인 비판을 가하는 영화가 많다. 종교가 추구하는 선함과 깨달음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진 않지만, 세속적 상황에 둔감하고 교조적인 종교 시스템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편. 때문에 고결한 인물이 세속에서 더럽혀진 후 선함을 실천한다는 아이러니한 전개가 자주 등장하곤 한다. 멕시코에서 버스 타기, 사막의 시몬이나 나자린 같은 영화에서 이런 성향이 두드러진다. [16]
4. 작품 목록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출연 | 비고 |
1928 | 어셔가의 몰락 La chute de la maison Usher | ○ | 각색 참여 | ||
1929 |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 | ○ | ○ | ○ | 단편, 첫 연출작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
1930 | 황금시대 L'Age d'Or | ○ | ○ | ○ | 중편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
1933 | 빵 없는 세상 Las Hurdes | ○ | ○ | 다큐멘터리, 단편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 |
1947 | 그랑 카지노[17] Gran Casino | ○ | |||
1949 | 위대한 난봉꾼 El gran calavera | ○ | |||
1950 | 잊혀진 사람들 Los olvidados | ○ | ○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제4회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세계기록유산 등재 (2003)# | |
1951 | 수산나 Susana | ○ | ○ | ||
1951 | 책략의 딸 La hija del engaño | ○ | |||
1952 | 멕시코에서 버스 타기 Subida al cielo | ○ | ○ | ||
1952 | 사랑 없는 여자 Una mujer sin amor | ○ | ○ | ||
1953 | 엘[18] Él | ○ | ○ | ||
1953 | 짐승[19] El bruto | ○ | ○ | ||
1954 | 환상의 전차를 타고 여행하다 La ilusión viaja en tranvía | ○ | |||
1954 |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 | ○ | ||
1954 | 폭풍의 언덕 Abismos de pasión | ○ | ○ | ||
1954 | 강과 죽음 El río y la muerte | ○ | ○ | ||
1955 | 범죄에 대한 수필 Ensayo de un crimen | ○ | ○ | ||
1956 | 새벽 Cela s'appelle l'aurore | ○ | ○ | ||
1956 | 애련의 장미 La mort en ce jardin | ○ | ○ | ||
1959 | 나자린 Nazarín | ○ | ○ | ||
1959 | 죄의 공화국 La fièvre monte à El Pao | ○ | ○ | ||
1960 | 젊은이 The Young One | ○ | ○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 |
1961 | 비리디아나 Viridiana | ○ | ○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제14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 |
1962 | 절멸의 천사[20] El Ángel exterminador | ○ | ○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 |
1964 | 어느 하녀의 일기 Le journal d'une femme de chambre | ○ | ○ | ||
1965 | 시몬 오브 더 데저트[21] Simón del desierto | ○ | ○ | 단편, 수상 | |
1967 | 세브린느 Belle de jour | ○ | ○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제28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 |
1969 | 은하수 La voie lactée | ○ | ○ | ○ | |
1970 | 트리스타나 Tristana | ○ | ○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 |
1972 |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 | ○ | ○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제47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 | |
1974 | 자유의 환상 Le fantôme de la liberté | ○ | ○ | ○ | |
1977 | 욕망의 모호한 대상 Cet obscur objet du désir | ○ | ○ | 유작 |
[1] 장 엡스탱 감독 작품. 각본가이자 조감독으로 참여[2] 1명은 2017년에 사망.[3] 사라고사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굉장한 산골 깡촌이다. 인구는 3700명 정도. 루이스 본인은 이 마을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도 중세였던 곳'이라 설명했다.[4] 결혼 당시 아버지가 45살, 어머니가 18살 (...)이라 그떄 기준으로도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결혼이었다. 루이스는 7남매 중 장남.[5] 후기 작업 파트너였던 각본가 장클로드 카리에가 정리했으며, 2021년 11월 5일 을유문화사에서 번역 출간했다. 참고로 초현실주의자답게 구술 내용에 허풍이 강한 편이니 적당히 필터링해서 보라는 얘기가 많다.[6] 퇴학 당했다고 어머니에게 거짓말했지만 사실은 세계사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우등생이었지만 자의로 나온 것.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으로 진학한 것도 그렇고 공부는 잘했던 모양.[7] 엡스탱과 부뉴엘은 아벨 강스의 나폴레옹(1927년 영화) 참여 여부로 싸우기도 하는 등 이전부터 충돌이 많았다. 부뉴엘이 참여 요청을 조롱하듯 거부하자 엡스탱이 강스 같은 대감독을 모욕하다니, 초현실주의자 같은 미친 놈 같다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이후 어셔가의 몰락을 끝으로 갈라섰지만 개인적 교류는 있었는지 엡스탱이 후술하듯이 부뉴엘의 미래 아내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고.[8] 시사회 당시 부르주아 관객층들은 "유대인 타도"를 외치면서 달리와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들을 훼손하기까지 했다.[9] 같은 해 다섯 손가락을 가진 괴수(The Beast with Five Fingers)를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다.[10] 사실 예전부터 부뉴엘이 달리와 로르카의 관계를 질투한데다 일찍부터 예술가로 성공한 달리한테 열등감이 있었다고 한다.[11] 새벽+애련의 장미와 로빈슨 크루소+젊은 연인의 경우 각각 프랑스, 미국 자본으로 제작했다.[12] 특이하게도 1924 파리 올림픽 체조 동메달리스트였던 프랑스인 체조 교사였다고 한다. 1994년 타계.[13] 의외로 만든 영화랑 대조되게 향락 같은 거하고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파티장에 갔는데 적응을 못했다고. 장 엡스탱은 이 둘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 못 갈거라고 경고했지만 예상을 깨고 앱스탱 타계 후로도 해로했다.[14] 호러 영화랑 TV쪽으로 활동했으며 아버지 명성 때문인지 같이 작업한 배우들은 화려했다.[15] 후안의 전 아내가 러시아 유대계 미국인이기에 디에고는 스페인-러시아-유대-미국계 프랑스인이다.[16] 나자린은 이런 제도권 종교 비판 성향에도 불구하고 바티칸 선정 위대한 영화에 오른 적이 있다.[17] 멕시코에서의 첫 영화이며, 평범한 뮤지컬 멜로물이다.[18] 영제를 번역한 '이상한 정열'로 표기하기도 한다.[19] '야만인'으로 표기하기도 한다.[20] '학살의 천사'로 불리기도 한다.[21] '사막의 시몬'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